<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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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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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 장왕(莊王-?부터 기원전 591년. 재위 기원전 614년부터 기원전 591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6대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여(侶) 또는 여(旅), 시(諡)는 장(莊)이었다. 그는 또 초(楚)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알려졌고,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손꼽아졌으며, 초(楚) 성왕(成王-6-18참고) 원(員)의 손자였고, 폭군이었던 상신(商臣-穆王)의 적자(嫡子)였다. 아들은 공왕(共王) 심(審).
참고: 필(邲)의 싸움
필의 싸움은 기원전 597년(周는 定王 10년, 魯는 宣王 12년)에,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정(鄭)현의 필(邲)이라는 곳에서 진(晋)과 초(楚)가 격돌했던 전쟁으로 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 후, 천하의 패권은 진(晋)에서 초(楚)로 넘어갔으며, 그로서 초(楚) 장왕(莊王)의 위광(威光)은 대륙을 덮었다.
1. 경위(經緯)
그 전, 초(楚)의 장왕(莊王)은 천하평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위(上)의 진(晋)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일대(一大)결심을 하고는 스스로 병사들을 이끌고 정(鄭)부터 공격했다. 그러자 정(鄭)은 곧 진(晋)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정경(正卿)이었던 순림부(荀林父)는 정(鄭)이 몇 번이나 진(晋)에 면종배반(面從背反-겉으로는 복종하고, 뒤에서는 배반을 일삼는 짓)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그러면서 또 정(鄭)은 곧 초(楚)에 의해서 멸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또 그때, 정(鄭)의 입장에서는 그 번(番)이야말로 초(楚)에 지게 되면 완전하게 멸망하게 될 것이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필사 항전했다. 그러자 또 그 전쟁은 진(晋)의 생각보다 길어지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진(晋)은 그때서야 부랴부랴 군사를 일으켜서 정(鄭)에 원군을 보냈지만, 그러나 또 마침 그때, 그러니까 진군(晋軍)이 그 정(鄭)에 도착했을 때, 정(鄭)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자 정(鄭)의 양공(襄公)은 마치 미자계(微子啓-6-13 참고)가 주(周)에 항복했을 때처럼 예를 갖추어서 장왕(莊王)을 맞이했다.(참고: 그 후, 주왕(紂王)이 무왕(武王)에게 패해서 죽자, 그 두 사람은 스스로 무왕(武王)을 찾아가서 항복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미자계(微子啓)는 상반신을 벗은 채로 양손을 뒤로 결박했고, 그리고는 왼손으로는 양(羊)을 끌고, 오른손에는 억새를 꺾어 든 채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그러자 무왕(武王)은 흔쾌히 그의 항복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초(楚)의 군신(群臣)들은 모두 정(鄭)을 멸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러나 장왕(莊王)은 그때 <정(鄭)군(君)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줄을 아는 자다(겸손한 자). 그러므로 반드시 이 나라 또한 잘 다스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 정(鄭)군(君)에 더 이상의 수치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 철군했고, 그 후에 다시 정(鄭)과 다시 동맹을 맺었다.
2. 싸움
그렇게 해서 정(鄭)의 패배를 알게 되었던 진(晋)의 사장(師將) 순림부(荀林父)는 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상군(上軍)의 장(將)이었던 사회(士會)도 <좋습니다! 전쟁이란 모름지기 적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 그리고 또 덕(德)과 형(刑) 그리고 정(政)과 사(事), 전(典), 예(禮) 그 여섯 가지를 모두 갖추고(지키고) 싸웠던 초(楚)에 대적한다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순림부(荀林父)에 동의했다. 하지만 또 그때, 중군(中軍)의 좌(佐)였던 선곡(先穀)이란 자가 그 전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단으로 병을 움직였기 때문에, 그래서 싸움은 하는 수 없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래서 또 그때, 양군(兩軍)의 세력을 보면 또 아래와 같았다.(단, 참고이므로, 한글표기는 생략함)
晋軍의 編成
中軍-将:荀林父 佐:先穀 中軍大夫:趙括、趙嬰斉
上軍-将:士会 佐:郤克 上軍大夫:鞏朔、韓穿
下軍-将:趙朔 佐:欒書 下軍大夫:荀首、趙同
司馬:韓厥
楚軍의 編成
荘王(楚王) 孫叔敖(令尹)
中軍-将:沈尹
左軍-将:子重(이름은 嬰斉・荘王의 兄弟)
右軍-将:子反(이름은 側・荘王의 兄弟)
3. 결전(決戰)
그렇게 해서 초(楚)의 장왕(莊王)과 영윤(令尹-宰相) 손숙오(孫叔敖)는 정(鄭)을 항복시킨 후, 진(晋)과는 싸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후군(後軍)에 해당되는 군세(軍勢)를 조금 남겨두고 수도 영(郢)으로 철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또 오참(伍參)이란 자가 장왕(莊王) 앞으로 나오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 진(晋)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자는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군신(群臣)들은 아직 하나로 뭉쳐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싸운다면 필시 우리가 이길 것이며, 그리고 또 현재 적(敵)의 사장(師將)이란 사람은 일국(一國)의 재상입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우리의 사장(師將)은 군주(君主)이신데, 그러므로 또 만약에 여기서 물러나신다면, 앞으로 어떻게 천하에 모범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장왕(莊王)은 고뇌 끝에 마차(馬車)를 북쪽으로 다시 향했으며, 그리고는 정(鄭)으로 다시 들어가서 관(管)이란 곳에다 진(陳)을 구축했다. 그리고는 또 진(晋)에 화목(和睦) 목적의 사자도 보냈는데, 그러자 또 진(晋)에서는 순림부(荀林父)와 사회(士會)가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또 그때, 선곡(先穀)도 비밀리에 장왕(莊王)에게 사자를 보내서, 자신들은 싸우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장왕(莊王)이 다시 진(晋)에 화목 목적의 사자를 보냈고, 그때도 진(晋)은 그것을 수락했다. 그리고는 또 그 답으로 화목 목적의 사자였던 위기(魏錡)와 조전(趙旃)이란 자를 장왕(莊王)에게 보냈는데,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장왕(莊王)과 화목할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장왕(莊王)을 죽이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장왕(莊王)의 진(陳) 가까이에까지 가게 되자 바로 공격을 가했지만, 그러나 수비가 워낙에 견고했기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또 그들은 곧바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또 장왕(莊王)이 본진의 병사들을 이끌고 진군(晋軍) 속으로 곧 쳐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또 그때, 그렇게 되면 장왕(莊王)의 진(陳)이 고립될 것이 염려가 되었던 손숙오(孫叔敖)가 황급히 전군에 공격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전쟁은 드디어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 그때까지도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다고 낙관(樂觀)하고 있던 중이었던 순림부(荀林父)는 그런 갑작스런 초군(楚軍)의 공격을 받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몰라서 다음과 같이 전군에 포고를 내려버렸다. <제일 강을 빨리 건너서 퇴각하는 자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그러자 진(晋)의 중군(中軍)과 하군(下軍)은 순식간에 괴멸하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또 서로 먼저 도망가려고 배에 올라탔지만, 그러나 또 그때 황하(黃河)에 띄워져 있던 배의 숫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자 또 그때, 배에 먼저 올랐던 병사들은 뒤에 와서 배를 떠날 수 없게 뱃전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병사들의 손과 팔 등을 잘랐고, 그것은 또 배가 전복되어서 아무도 그 배를 탈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해서 했던 행동이었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그곳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참극이 일어났다.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삼군(三軍) 중에서 사회(士會)가 인솔했던 상군(上軍)만은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들은 단 한명의 손실도 없이 퇴각하는데 성공을 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 때문에 진(晋)은 잠깐 동안 침체기에 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그 역으로 초(楚) 장왕(莊王)의 위광은 천하를 덮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장왕(莊王)은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대승 후, 장왕(莊王)은 신하(臣下)들로부터 경관(京觀-전사자의 유해를 한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戰功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합동무덤=monument)을 만들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러나 장왕(莊王)은 그때 <무(武)란 글자는 창(戈)>을 멈춘다(止)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것은 또 폭(暴)을 금(禁)하고, 싸움을 멈추며, 큰 것을 지키고, 공(功)을 정(定)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대중(衆)의 화합을 꾀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려는 속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내가 했던 일은 그 무덕(武德)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그럼에도 충성을 다 바쳐서 싸웠던 진군(晋軍) 병사들의 유체들로 경관(京觀)을 만든다는 것은 과연 옳은 짓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참고: 그러나 또 실제로 그 武란 글자는 창(戈)을 (앞으로) 나아간다 라고 하는 것이 그 원의(原義)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진(晋)마저 물리치고 패업을 달성했던 장왕(莊王)은 그 마무리로 그때까지 진(晋)을 따르고 있던 송(宋)을 다시 표적으로 정했다. 그리하여 그 첫 단계로 기원전 595년에, 일찍이 아버지 목왕(穆王)의 명으로 송(宋) 소공(昭公)의 마부(馬夫-여기서의 마부는 왕의 수행원 또는 호위하는 자)에게 채찍을 가했기 때문에, 그래서 송(宋)나라 사람들의 한(恨)의 표적이 되어 있었던 신단(申舟)이란 인물을 제(齊)로 보내는 사자(使者)로 지명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송(宋)을 통과하는데 인사는 필요 없음>이란 명을 내렸는데, 그것은 또 그 신단이 자신의 그런 명령을 따라서 송(宋)에 무례를 저지르게 하고, 또 그로써 그가 송(宋)에서 살해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구실로 해서 송(宋)에 출병을 시킬 요량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자 장왕(莊王)은 마치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송(宋)으로 달려갔고, 그리고는 곧바로 수도였던 상구(商丘-河南省 商丘市)를 포위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장왕(莊王)은 노(魯)도 초(楚)의 맹하(盟下)로 만드는 등, 착실하게 패업을 완성할 준비를 해두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송(宋)의 우사(右師)였던 화원(華元)이란 자를 필두로 해서 송군(宋軍)은 당연히 저항을 해왔고, 그러자 또 그 싸움은 예상치 않게 길어져서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594년 5월이 되었어도 그 상구(商丘)를 함락시키지를 못했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하는 수 없이 일단 철수를 명령했다. 하지만 또 그때, 아버지였던 신단(申舟)까지 희생시키고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려는 장왕(莊王)을 원망했던 신단의 아들 신서(申犀) 때문에 장왕(莊王)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자신의 측근이었던 신숙시(申叔時)가 올린 헌책을 장왕(莊王)은 받아들였고, 그 결과 상구(商丘) 교외에 둔전(屯田)을 설영(設營)하고는 지구전(持久戰)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얼마 후에 화원(華元) 등도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자반(子反)이란 자가 중개를 해서 마침내 송(宋)도 초(楚)의 맹하(盟下)로 들어왔고, 그로써 장왕(莊王)의 패업은 완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다음, 그는 기원전 591년에 사거했다.(장왕 끝)
⊙ 화원(華元-생몰미상)은 중국 춘추시대 송(宋)의 정치가로, 당시 2대국(大國)이었던 진(晋)과 초(楚)의 화평을 위한 중재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예를 중시했던 이상주의자로 알려졌으며, 송(宋) 굴지의 명재상 중 한사람이었다.(하략)
아무튼 또, 그렇게 해서 패권을 거머쥐었던 초(楚)였다지만, 하지만 그 장왕(莊王)의 뒤를 이었던 7대 공왕(共王) 때는 <언능(鄢陵)의 싸움>에서 진(晋)에 패했고, 그것으로 초(楚)는 또 패권을 잃고 말았다.
○ 언능(鄢陵)의 싸움
언능의 싸움은 중국의 춘추시대였던 기원전 575년(周는 簡王 11年, 魯는 成公 16年)에 언능(鄢陵-河南省鄢陵県)에서 진(晋)과 초(楚)가 격돌했던 싸움이었고, 그 결과는 진군(晋軍)의 승리로 끝났다.
1. 경위
기원전 579년, 진(晋)과 초(楚)는 송(宋)의 땅에서 회맹했다. 그리고는 송(宋) 화원(華元)의 중개로 양국은 맹약을 하고 정전(停戰-하지만 史記에서는 그때가 기원전 589년이라고 했고, 左傳에서는 기원전 579년이라고 했는데, 史記의 실수로 봄)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577년에 진(晋)의 맹하(盟下)였던 정(鄭)이 초(楚)의 맹하였던 허(許)를 공격했기 때문에, 초(楚)의 공왕(共王)은 그 허(許)를 구원하기 위해서 정(鄭)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다음해, 정(鄭)은 초(楚)의 영토를 할양받아서 화목했고, 그것으로 초(楚)의 맹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또 진(晋)의 여왕(厲王)은 원래 자신을 따랐던 그 정(鄭)의 배신을 바로잡기 위해서 위(衛), 제(齊), 노(魯) 등을 이끌고 정(鄭)을 쳤다. 그러자 또 정(鄭)은 초(楚)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그 결과 진(晋)과 초(楚)는 다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은 그때의 군대편성에 관한 것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당시, 楚軍은 中軍・左軍・右軍 三軍으로 편성되었고
晋軍은 中軍・上軍・下軍・新軍 四軍을 보유하고 있었다.
晋軍의 編成
君主:厲公 軍師:苗賁皇
中軍-将:欒書 佐:士燮
上軍-将:郤錡 佐:中行偃
下軍-将:韓厥 佐:智罃(출병으로 비게된 晋의 후방을 맡음)
新軍-将:郤犨 佐:郤至
楚軍의 編成
君主:共王 軍師:伯州犂
中軍-将:子反
左軍-将:子重
右軍-将:子幸
2. 전쟁
그 전쟁은 공왕(共王)이 진(晋)의 대부(大夫)였던 여기(呂錡)가 쏜 화살에 눈을 부상당했을 정도로 혼전(混戰)이었다. 그러자 공왕(共王)은 화가 나서 가신이었던 양유기(養由基)에게 명을 내렸고, 그러자 양유기(養由基)는 단 한발의 화살로 여기(呂錡)를 쏘아서 죽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공왕(共王)의 부상에 초군(楚軍)들이 동요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점점 더 전의는 상실되고 있었다. 그러자 공왕(共王)은 그날 밤에 자반(子反)을 불러들여서 다음날의 작전에 대해서 의논해보고자 했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자반(子反)은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공왕(共王)의 부름에 나아가지를 못했다. 그러자 또 공왕(共王)은 그것으로 초군(楚軍)의 패배를 예감하고는 그날 중에 회군하여 수도 영(郢)으로 돌아갔다.
3. 전후(戰後)
자반(子反)은 전쟁 중 최대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자살했고(그러나 史記에서는 철군 직전에 군영에서 주살되었다고 함), 승리했던 진(晋)의 여왕(厲王)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그리고 그 후에 여왕(厲王)은 그 여세를 타서 호족(豪族)들을 폐하고 공실(公室)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획책했고, 그 결과로 대족(大族)이었던 극(郤)씨(氏)의 경(卿) 3명을 죽였다. 하지만 또 그 후, 여왕(厲王)은 자신들도 그 극(郤)씨(氏) 같은 꼴이 될 것을 두려워했던 난서(欒書)와 중행언(中行偃)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명군이었던 도공(悼公)이 그 뒤를 이어서 패권을 확고히 했다.
<楚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