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9)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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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송의 위치도-下中>


 송(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286년)은 중국의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였고, 도(都)는 상구(商丘)였다.

 
양공(襄公-?부터 기원전637년. 재위는 기원전 651년부터 기원전 637년)은 중국의 춘추시대에 송(宋)의 주군이었으며, 성(姓)은 자(子), 휘(諱)는 자부(茲父 또는 茲甫), 시(諡)는 양(襄)이었다. 그리고 그는 환공(桓公)의 아들이었으며,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거론되는 일도 있다. 그는 기원전 651년에 송공(宋公)의 위(位)에 즉위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목이(目夷)라는 서형(庶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위(位)를 그 형에게 양도하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또 그 목이(目夷)가 그것을 한사코 거절해서 그가 즉위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그 목이(目夷)를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직후에 제(齊)의 환공(桓公)이 회맹(會盟)을 주최했고, 그러자 그도 그 회맹에 참가했으며,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그는 회맹에 참가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가 사적(私的)인 일보다는 예(禮)를 중시했던 이상주의(理想主義)자였기 때문이었는데,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643년에 그 환공(桓公)이 죽자 제(齊)에서는 그 후계를 둘러싸고 내란(內亂)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자 양공(襄公)은 다시 회맹을 열어서 조(曹), 위(衛), 주(邾) 등, 소국(小國)들을 이끌고, 일찍이 송(宋)에 유학(留學)을 했던 적이 있었던 태자 소(昭)를 추천해서 세우고는 제(齊)로 부임시켰으며, 그로서 내란을 수습하고 그 소(昭)를 제공(齊公)으로 올렸다. 그러자 그가 제(齊)의 효공(孝公)이 되었으며, 그러자 또 양공(襄公)은 그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던 등(滕)의 선공(宣公)을 포획했다. 그 후, 기원전 639년에 그는 다시 제(齊)와 초(楚)와 함께 회맹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이 제후(諸侯)들의 맹주임을 초(楚)로부터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목이(目夷)가 그에게 <송(宋)이 제후들의 맹주가 되려는 것은, 분에 맞지 않는 위험한 일>이라고 간언했지만, 그러나 양공(襄公)은 목이(目夷)의 말을 듣지 않았다. 거기다 양공(襄公)은 오히려 초(楚)와 진(陳) 그리고 채(蔡)와 허(許) 그리고 조(曹)까지 모아서 회맹을 열었는데, 그런데 그는 그 자리에서 초(楚)의 자옥(子玉)에 의해서 감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맹주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말았는데, 그러자 또 그는 그 다음해 그 굴욕을 갚아줄 생각으로 위(衛)와 허(許) 그리고 등(滕) 등을 이끌고 초(楚)의 맹하(盟下)였던 정(鄭)을 공격했다. 그러자 또 그때도 목이(目夷)가 나서서 그를 말렸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도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그러자 또 초(楚)의 성왕(成王)은 그 정(鄭)을 구원하기 위해서 병(兵)을 일으켰으며, 그리하여 양군은 결국 송(宋) 내(內)의 홍수(泓水)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앞서 소개했던 대로, 그 전쟁은 소위 양공(襄公)의 인(仁)으로 인해서 패했고, 그 후에 진(晋)의 중이(重耳)가 송(宋)을 방문했을 때, 그는 크게 환대했으며, 그 후였던 기원전 637년에 대퇴부의 상처가 원인이 되어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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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의 위치도 左 赤圓>

 
 진(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376년)은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주대(周代)와 춘추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국가였으며, 처음에는 당(唐)으로 불렸지만, 나중에 개명해서 진(晋)이 되었다. 그리고 국성(國姓)은 희(姬)였고, 수도는 익(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분가였던 곡옥(曲沃)이 익(翼)의 종가(宗家)를 멸한 후, 개명해서 강(絳)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옛날, 한때 주(周)의 성왕(成王)이 동생이었던 우(虞)와 함께 정원에서 놀았을 때,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이와 같이 너를 봉하노라>라는 봉건(封建)의식을 흉내 내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왕(成王)이 궁전으로 돌아갔을 때,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윤일(尹佚)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성왕(成王)에게 하자, 성왕(成王)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尹-그러시면, 우(虞)전(殿)을 어느 곳에다 봉하면 좋겠습니까?> <成王-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단지 그와 놀이를 한 것뿐이요!> 그러자 또 윤일(尹佚)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모름지기 천자(天子)에게서 허언(虛言)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왕이 내뱉은 말은 번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바로 얼마 후에 주공단(周公旦)이 당(唐)을 정벌하고 돌아왔을 때, 우(虞)를 그 당(唐)에 봉했으며, 그리하여 우(虞)는 당숙우(唐叔虞)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 우(虞)의 아들 섭(燮) 때에 분수(汾水=汾河=중국 山西省을 南北으로 흐르는 큰 강으로, 渭河에 버금가는 黄河 第2의 支流)의 지류였던 진수(晋水) 근처에서 국명을 진(晋)으로 하여 개국했다.

 그리고 그 후 제11대 소후(昭侯)의 시대에 그 소후(昭侯)의 숙부였던 성사(成師)가 곡옥(曲沃)을 물려받아서 분가했으며, 성사(成師)는 죽은 후에 환숙(桓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환숙(桓叔)은 생전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 곡옥(曲沃)이 번영을 누렸고, 그래서 곡옥(曲沃)은 당시의 수도(首都)보다도 더 번창하고 컸다지만, 그러나 그 후에 익(翼)의 본가와 그 곡옥(曲沃) 간에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그러자 또 무공(武公)의 시대에 익(翼)의 민후(緡侯 또는 湣侯)를 멸하고 주가(主家)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 무공(武公)의 시대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했으며, 그 내용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 있었다
.
그러자 또 그 후에 중이(重耳)가 다시 돌아와서 내란을 수습했고, 그 후에 <성복(城濮)의 싸움(기원전 632년)>에서 초(楚)를 격파한 후 강대한 패자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문공(文公)이 천하를 경영하게 되었다.

 중이(重耳=文公-기원전 696년부터 기원전 628년)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 성(姓)은 희(姬), 휘(諱)은 중이(重耳), 시(諡)는 문(文), 진(晋)의 공자(公子)였다. 하지만 공자(公子) 시절에 일어났던 내란으로 인해서 그는 19년이나 제국(諸國)을 방랑했으며, 귀국 후에는 군주가 되어서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후에 제(齊)의 환공(桓公)과 함께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 칭해졌고, 춘추오패의 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가계(家系)는 원래 진(晋)의 분가(分家)였는데, 그러나 그는 무공(武公)의 대에 본가(本家)를 멸하고 스스로 진공(晋公)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던 헌공(獻公)과 적(狄-白狄)족(族)의 딸이었던 호희(狐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하지만 그 헌공(獻公)에게는 중이(重耳) 외에도 태자(太子)였던 형 신생(申生-重耳와는 異母兄)과 아우였던 이오(夷吾-후의 惠公) 등이 있었다.

 ○ 이오(夷吾=惠公-?부터 기원전 637년 10월)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재위는 기원전 650년부터 기원전 637년)였고, 성(姓)은 희(姬), 휘(諱)는 이오(夷吾)였으며, 헌공(獻公)의 제3자(子)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지(機智)가 풍부했다고 알려졌으며, 태자였던 신생(申生)이 죽은 후에는 중이(重耳)와 함께 차기 군주의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러나 여희(驪姬)가 해제(奚齊)를 낳자 굴읍(屈邑)에 봉해졌다. 그 후, 기원전 652년에 여희(驪姬)가 헌공(獻公)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극예(郤芮)의 헌언(獻言)을 따라서 양(梁)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651년에 이극(里克) 등, 진(晋) 국내의 대부(大夫)들에 의해서 해제(奚齊)와 그 후를 이을 도자(悼子)가 차례로 살해당하자, 그는 진(秦) 목공(穆公)의 후원을 받아서 귀국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650년에 진공(晋公)이 되었다. 그 후, 군주가 되었던 혜공(惠公)은 당시 자신보다 이름이 높았던 중이(重耳)가 귀국할 것을 염려해서 자객(刺客)을 보냈다거나,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 그리고 해제(奚齊)와 도자(悼子)를 살해하고 자신을 맞이했던 그 이극(里克) 등의 대부(大夫)들 조차도 아주 엄하게 탄압했다. 그런데다 또 당시, 진(晋)에서는 연년(連年) 흉작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기원전 647년에 혜공(惠公)은 앞에 자신을 도와주었던 진(秦)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내용 역시도 앞에서 기술되었기 때문에 일단 생략하며, 그 결과로 기원전 645년에 혜공(惠公)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러자 또 그 배은망덕했던 혜공(惠公)에 진(秦)의 목공(穆公)은 대노(大怒)해서 응전했는데, 그것이 <한원(韓原-현재 陝西省 韓城市)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또 그 결과 진(晋)은 패했고, 진(秦)은 압승을 거두었으며, 혜공(惠公)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도 앞에서 소개가 되었으므로 일단 생략하며, 그는 기원전 637년 10월에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재(人才)를 좋아했기 때문에, 17세가 되던 때에는 조쇠(趙衰),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그리고 위주(魏犨) 등을 자신의 곁에 두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중이(重耳)의 패업(霸業)을 크게 도운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몸집이 아주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또 자신의 아버지가 태자(太子)였을 때부터 그는 이미 어른의 체격을 하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술된 대로, 그 후로 여희(驪姬)의 음모가 진행됨에 따라서 그도 변방으로 쫓겨 갔고(蒲), 그러자 여희(驪姬)는 신생(申生)을 함정에 빠뜨려서 누명을 씌운 후에 자살시켰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독살미수였다. 그 후, 안심을 할 수 없었던 여희(驪姬)는 중이(重耳)까지 죽이려고 환관이었던 발제(勃鞮)란 자를 파견해서 중이(重耳)를 자살시키려고 획책했다. 그러자 또 중이(重耳)는 그 술책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도망을 기도했고, 그러자 또 그것을 막으려고 발제(勃鞮)가 경계를 더욱 엄중히 폈지만, 그러나 결국 중이(重耳)는 도망에 성공해서 그의 어머니의 출신지였던 백적(白狄)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후, 중이(重耳)는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국외(國外)로 망명했다.

 ○ 조쇠(趙衰-?부터 기원전 622년)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으며,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쇠(衰), 자(字)는 자여(子餘), 시(諡)는 성(成)이었고, 조성자(趙成子)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그는 대부(大夫)였던 조숙(趙夙)의 동생이었으며,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조(趙)나라의 시조였다. 그는 헌공(獻公)의 공자(公子)들 중에서 점(占)을 쳐본 결과 길점(吉占)이 나왔던 중이(重耳)를 선택했고, 기원전 653년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하자 중이(重耳)와 함께 망명 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 19년에 걸쳤던 제국(諸國)에의 방랑이 이어졌고, 그러던 중 적(狄)에서 숙외(叔隗-重耳의 妾이 되었던 季隗의 언니)를 만나서 취처(娶妻)했다. 그러자 그 후, 숙외(叔隗)는 장차 조(趙)나라의 기초를 세우게 될 조순(趙盾)을 낳았다. 그리고 또 다음, 기원전 645년에 진(晋)에서 중이(重耳)의 동생 이오(夷吾)가 혜공(惠公)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그는 중이(重耳)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나머지 자객을 보냈고, 그러자 또 그는 중이(重耳)와 함께 제(齊)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그 도중에 그들은 위(衛)의 땅을 지나야만 했는데, 그러나 그 위공(衛公)은 그들을 반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그들은 이미 다 떨어진 식량 때문에 근처 농가에서 구걸을 해야 했지만, 그러자 또 그곳의 농민은 그릇에다 흙만 가득 담아서 내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또 중이(重耳)가 그것을 보고 대노(大怒)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조쇠(趙衰)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하자 중이(重耳)가 그대로 따라했다. <흙을 얻었다는 것은 이곳의 땅을 얻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를 다해서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그런 다음 또 기원전 637년에 중이(重耳)가 초(楚) 성왕(成王)의 초대를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성왕(成王)은 중이(重耳)의 인품을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했다. 하지만 그에도 중이(重耳)는 예법에 서툴렀는데, 그러자 또 조쇠(趙衰)가 중이(重耳)를 가르쳐서 중이(重耳)가 예(禮)를 다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진(秦)의 목공(穆公)이 중이(重耳)를 반겨 맞았으며, 기원전 636년에는 드디어 중이(重耳)가 귀국길에 올라서 진군(晋君)에 즉위했고, 그로서 문공(文公)이 되었다. 그 후, 조쇠(趙衰)는 문공(文公)의 딸이었던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그리하여 새롭게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용제(趙嬰齊) 3명의 자식을 생산했다. 그런데 그때, 당연히 조희(趙姬)가 정처(正妻)가 되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 조희(趙姬)가 원해서 숙외(叔隗)가 정처가 되었으며, 그것으로 또 조순(趙盾)이 적자(嫡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문공(文公)의 패업을 도왔으며, 기원전 635년에 진(晋)이 주(周)의 양공(襄公)으로부터 그 땅을 하사받았을 때는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629년에는 상군(上軍)의 좌(佐-將을 돕는 職으로, 부대장 정도)였던 호모(狐毛)가 죽자 그 후임을 맡았으며, 기원전 625년에는 중군(中軍)의 좌(佐)에도 임명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622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사후 성(成)이란 시(諡)가 내려졌고, 그리하여 조성자(趙成子)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 조순(趙盾)은 진(晋)의 재상이 되었으며, 그 후에 독립해서 조(趙)의 기초를 다졌다.

 ○ 호언(狐偃)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자(字)는 자범(子犯)이었으며, 구범(舅犯) 또는 구범(咎犯)으로도 불렸다. 그의 아버지 호돌(狐突)은 원래는 적(狄) 출신이었지만, 그러나 나름대로의 선견지명을 갖춘 덕으로 진(晋)의 무공(武公)을 섬겼다. 그리고 그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던 헌공(獻公) 대에 이르자, 호돌은 자신의 두 아들(형 狐毛와 동생 狐偃)에게 중이(重耳)를 섬기게 했으며, 그것은 또 그 중이(重耳)의 생모가 적(狄) 출신이었던 데다가, 그 그릇도 당연히 패자(覇者)의 그릇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하자 진(晋)은 곧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러던 중에 중이(重耳)를 주군(主君)으로 세워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중이(重耳)는 어느 정도 마음이 동했던가 보지만, 그러나 또 그때, 호언(狐偃)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중이(重耳)를 말렸다. <군주(君主-奚齊)를 죽인 신하들의 손에 의해서 받들어진 군주(君主)의 자리는 불길(不吉)합니다> 그 후, 중이(重耳)는 망명길에 올랐고, 호언(狐偃)도 그 길을 함께 따라나섰다. 그리고 어느 때 일행이 기아(飢餓)에 허덕이면서 오록(五鹿)이란 곳을 지나가고 있었을 때, 그곳의 농민에게 음식을 구걸했지만, 그러나 그 농민은 그릇에다 흙만 가득 담아서 내왔을 뿐이었다. 그러자 중이(重耳)가 몹시 노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호언(狐偃)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해서 중이(重耳)를 기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곳의 백성이 이 땅을 공자께 헌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후일(後日), 반드시 이 땅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제(齊)로 들어갔을 때, 당시의 패자(覇者)였던 환공(桓公)은 그 일행들을 환대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들을 이 제(齊)의 대신(大臣) 자격으로 대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제(齊)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오!> 그러자 중이(重耳)는 몹시 기뻐했지만, 그러나 그때 또 호언(狐偃)이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들은 패자(覇者-重耳)의 가신(家臣)이 되기 위해서 공자(公子)를 따라온 것이지, 제(齊)의 신하가 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그 후에 중이(重耳)의 처(妻)였던 제강(齊姜)과 조쇠(趙衰)와 함께 상의해서, 중이(重耳)를 취하게 한 후에 마차에 태우고는 억지로 제(齊)를 떠났다. 그러자 또 술이 깨고 난 후에 중이(重耳)는 대노(大怒)해서 호언(狐偃)을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호언(狐偃)이 이렇게 말을 했다. <제가 죽고 없어도 공자께서 성공할 자신이 있으시다면 원대로 하십시오!> 그러자 또 중이(重耳)가 화를 억누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좋다!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당신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을 것이다!> 그러자 또 호언(狐偃)이 이렇게 말을 했다. <혹시라도 공자께서 성공을 하지 못하신다면, 저는 굶어서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도 그 고기는 별로 먹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중이(重耳)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것으로 중이(重耳)는 자기 가신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후로는 스스로 진(晋)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점점 더 학문과 수양에 매진(邁進)했다. 그리고 그 후, 제(齊)의 환공(桓公)과 송(宋)의 양공(襄公) 그리고 진(秦)의 목공(穆公) 등, 당시 춘추시대를 대표하던 명군(名君)들의 지원을 받았던 중이(重耳)는 드디어 진(晋)으로 돌아가서 문공(文公)이 되었고, 그러자 또 호언(狐偃)은 귀국한 후, 그 문공(文公)의 패업을 크게 도왔다. 그리고 또 그 후, 주(周)의 양왕(襄王)이 <숙대(叔帶)의 난>을 피해서 정(鄭)으로 망명했는데, 그리고는 제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 권위가 저하되었던 주(周)왕실을 구해줄려는 제후들은 없었는데, 그러자 또 호언(狐偃)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군(君-文公)은 왕(王-襄公)을 도와서 배성들에게 그 의(義)로움의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문공(文公)은 군사를 일으켜서 그 난을 평정했다. 그러자 또 문공(文公)은 그 공을 인정받아서 왕실로부터 온(溫)과 원(原) 등, 중앙에서 가까운 땅을 하사받았고, 그것이 또 후에 진(晋)이 대발전을 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또 문공(文公)은 왕실을 구하고 세상에 의(義)를 보였던 것으로 해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 위주(魏犨-생몰불명)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무장이었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필(畢)이었지만, 나중에 위(魏)로 바꾸었으며, 휘(諱)는 주(犨), 시(諡)는 무(武)였다. 그리고 그는 필만(畢萬)의 손자였으며, 그래서 또 필주(畢犨) 또는 위무자(魏武子)라고도 불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전힐(顚頡)이란 자와 함께 중이(重耳)를 섬겼으며, 나중에 중이(重耳)가 망명을 떠났을 때도 항상 중이(重耳)를 호위하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기원전 637년에 중이(重耳)가 귀국해서 진공(晋公)의 자리에 오르자, 그도 위(魏) 씨(氏)의 당주(當主)가 되었으며, 그리고 또 기원전 633년에 삼군(三軍)이 창설되자 그는 문공(文公)의 차우(車右-왕의 수레를 모는 사람)가 되어서 문공(文公)을 계속해서 호위했다. 하지만 기원전 632년에 문공(文公)이 조(曹)를 공략했을 때, 중이(重耳) 방랑시절에 신세를 졌던 희부기(釐負羈 또는 이부기)의 집만은 불 지르지 말 것을 명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친구였던 전힐(顚頡)과 함께 그 집을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그는 부상을 당했으며, 그 일로 해서 또 전힐(顚頡)은 사형에 처해졌지만, 그러나 그는 부상의 중태(重態)였던 점을 감안해서 차우(車右)에서 면직되는 것만으로 그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에게는 위기(魏錡)와 위과(魏顆) 그리고 위강(魏絳) 3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위강(魏絳)의 계통이 그 위(魏) 씨(氏)의 계보를 이었으며, 나중에 전국칠웅(戰國七雄) 때의 위(魏)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시(諡)는 무(武)로 내려졌으며, 그것으로 위무자(魏武子)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무튼, 그가 백적(白狄)으로 망명했을 때, 그의 나이 이미 43세였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때, 그 백적(白狄) 족과 적대관계에 있었고, 그래서 또 그 백적(白狄) 족에 의해서 멸해졌던 적적(赤狄) 족의 자매(姉妹)가 중이(重耳)에게 보내졌는데, 그러자 중이(重耳)는 그 중에서 언니였던 숙외(叔隗)를 취했으며, 동생 계외(季隗)는 조쇠(趙衰)가 취했다. 그 후, 중이(重耳)가 그 백적(白狄)에 망명한지 5년째 되었던 해, 헌공(獻公)이 훙거(薨去)했다. 그러자 이미 전술(前述)했던 대로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했으며, 한동안 진(晋)에서는 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혼란이 진정되자 이극(里克)이 중이(重耳)를 진공(晋公)에 모시기 위해서 사자를 보냈지만, 그러나 중이(重耳)는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 자리는 이오(夷吾)가 차지했으며, 혜공(惠公)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뒤의 이야기 역시 전술(前述)되었으며, 그러자 또 역시, 중이(重耳)는 살해의 두려움을 느끼고는 제(齊)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출발 시에 중이(重耳)가 숙외(叔隗)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나를 25년만 기다려주시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재혼을 하시오> 그러자 숙외(叔隗)가 웃으면서 또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만약에 25년이나 기다리게 된다면, 저의 묘(墓)에 심어둔 측백(柏)나무도 아주 크게 자라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는 당신을 끝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그 후, 중이(重耳) 일행은 전술(前述)한 대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제(齊)에 도착했고, 그러자 환공(桓公)은 그들을 후대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제(齊)에서 5년이 지났을 즈음, 제(齊)의 환공(桓公)이 훙거(薨去)했고, 그러자 또 그 후계를 둘러싸고 격심한 내란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때는 또 이미 환공(桓公)의 딸(齊姜)을 부인으로 거두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중이(重耳)는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호언(狐偃)과 조쇠(趙衰) 등은 그 중이(重耳)를 제(齊)에서 빼내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때, 제강(齊姜)의 시녀(侍女)가 그들이 말하던 것을 몰래 훔쳐듣고는 제강(齊姜)에게 고해바쳤다. 그러자 또 제강(齊姜)은 누설(漏泄)의 두려움을 느껴
서 그 시녀를 죽이고는 중이(重耳)에게 하루빨리 제(齊)를 떠날 것을 독촉했다. 그러나 중이(重耳)는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제강(齊姜)은 호언(狐偃) 등과 밀담해서 중이(重耳)를 취하게 한 후, 차에 태워서 제(齊)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그 뒤의 이야기는 전술(前述)한 바와 같으며, 아무튼 그 후에 그 일행들은 조(曹)로 들어갔지만, 환영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례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자 그들은 서둘러서 송(宋)으로 다시 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당시 초(楚)와의 전쟁(泓水의 싸움)에서 지고 낙담해 있던 양공(襄公)이 그들을 환대했다. 그리고 환공(桓公)과 같이 20승(乘-당시의 戰車 4頭 마차였기 때문에, 80頭)의 말을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당시, 송(宋)으로서는 그 이상의 조력(助力)은 무리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초(楚)로 향했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정(鄭)에 들러서 의향을 물었지만, 냉대만 당했다. 하지만 초(楚)의 성왕(成王)은 그들을 환대했고, 그 다음의 이야기는 전술(前述)했던 바와 같았다. 아무튼 또 기원전 637년에는 진(晋)의 혜공(惠公)이 사망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 진(秦)에서 인질로 잡혀있었던 태자 어(圉)가 진(秦)을 탈출해서 진공(晋公-懷公)이 되었다. 그러자 또 진(秦)의 목공(穆公)은 그것을 괴심하게 여기고는 당시 초(楚)에서 망명 중이던 중이(重耳)를 그 진공(晋公)에 앉히려고 불렀다. 그리고 그해 12월, 진(晋)의 중신(重臣)들과도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었던 중이(重耳)는 진군(秦軍)을 거느리고 진(晋)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또 당연히 진군(晋軍)이 중이(重耳)를 맞으러 나왔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평판을 잃었던 혜공(惠公)과 그의 아들 회공(懷公)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울 군사는 적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오히려 중이(重耳) 편이 되어서 회공(懷公)의 측근들을 멸했다. 그리하여 중이(重耳)는 결국 문공(文公)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62세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오히려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그 후였던 기원전 635년에는 반란으로 도망을 왔던 주(周)의 양왕(襄王)을 도와서 반란을 진압했고, 기원전 632년에는 초(楚)의 공격을 받았던 송(宋)에 원군을 보냈다. 그러자 또 성왕(成王)은 회군을 결정했지만, 그러나 또 전술(前述)했던 대로 자옥(子玉)이 고집을 부려서 싸움은 시작되었는데, 그러자 또 문공(文公)은 과거 성왕(成王)과 약속했던대로, 전군(全軍)을 삼사(三舍) 후퇴시켰다. 하지만 결국 문공(文公)은 그 싸움에서 이겼으며, 그것으로 천하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628년에 사거(死去)했으며, 그 생전의 공적에 따라서 시호(諡號)는 문(文)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재위는 비록 9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행해졌던 업적들은 그를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려놓게 하기에 충분하게 했고, 그것으로 또 그는 환공(桓公)과 나란히 춘추오패의 필두가 되었다. 


 <晋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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