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8)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
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앞에서 趙
氏 계속)

 ♣ 조삭(趙朔-?부터 기원전 598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삭(朔), 시(諡)는 장(莊), 그래서 조장자(趙莊子)로도 불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조순(趙盾)은 생전에 은혜를 입었던 조희(趙姬)의 아들 조괄(趙括)에게 조가(趙家)의 종주(宗主)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 조괄(趙括)과 그의 형 조동(趙同)은 인덕(人德)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족(一族)의 흥망을 걸 수 있었던 사람으로, 그래서 또 평소 덕(德)이 많았던 조삭(趙朔)에게로 관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당주(當主)의 자리에 올랐던 조삭(趙朔)은 그 뒤에 경(卿)의 지위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597년 <필(怭)의 싸움> 때에는 하군(下軍)의 장이 되어서 종군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하군(下軍)의 좌(佐)였던 난서(欒書)가 전쟁의 무가치함을 주장하면서 철병(撤兵)론을 들고 나오자 그도 찬성했으며, 그러자 또 평소 그의 인기(人氣)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고, 그리고 또 숙부이기도 했던 위, 조동과 조괄 형제가 전쟁계속을 주장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도 전쟁에 참가를 했다. 하지만 또 초군(楚軍)의 맹공을 받고 중군(中軍)은 거의 붕괴되었으며, 하군(下軍)도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다. 그러자 그 후, 진(晋) 국내에서는 그 조(趙)가(家)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그러자 또 그 상황을 우려했던 한궐(韓厥-춘추시대 晋의 정치가, 장군)이 조삭(趙朔)에게 망명할 것을 권하기도 했는데,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자네가 우리 조가(趙家)의 제사(祭祀)를 지켜주기만 한다면, 나는 아무런 여한이 없네!> 그리하여 기원전 598년, 사구(司寇-六卿 중 하나)였던 도안가(屠岸賈 또는 도안고라고 쓴 곳도 많으므로, 참고바람)가, 일찍이 영공(靈公)을 죽였던 조천(趙穿)의 죄를 조(趙)씨(氏) 일족(一族)에게 물어서 전부 처형했다. 하지만 당시 태아(胎兒)였던 조무(趙武)는 다행히 그 화를 면했고, 그러자 그 후에 도안가(屠岸賈)에게 복수를 했던 한편, 조가(趙家)를 부흥시켜서 진(晋)의 재상자리에까지 올랐다.

 ♠ 조무(趙武-기원전 598년부터 기원전 541년 12월 7일)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무너졌던 조(趙)씨(氏)日) 가문을 다시 일으켰던 사람이었으며, 초(楚)와 화목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소개가 되었지만, 일족이 멸망했을 때 그의 어머니 조장희(趙莊姬)는 공실(公室)에서 강가(降嫁-신하 등, 낮은 직급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命)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궁(宮)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그녀는 임신을 하고 있었다.

 참고: 다른 것에서도 비슷하겠지만, 예를 들면, 조장희의 희(姬)는 晋室의 성(姓)이며, 그러나 趙氏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趙를 사용했고, 또 남편의 시(諡)가 장(莊)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아무튼, 그렇게 해서 탄생한 조무(趙武)는 도안가(屠岸賈)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당시, 조삭(趙朔)의 식객이었던 공손저구(公孫杵臼)를 희생양으로, 그리고 조삭(趙朔)의 친구였던 정영(程嬰)의 임기응변, 그리고 또 조삭(趙朔)으로부터 조가(趙家)재흥(再興)의 부탁을 받았던 한궐(韓厥)의 지원을 받아서 산속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그 후, 성인이 되었던 조무(趙武)는 한궐(韓厥)의 주선으로 당시, 병으로 누워있던 경공(景公)을 배알했고, 그 자리에서 한궐(韓厥)이 경공(景公)을 설득해서 조가(趙家)의 부흥을 허락받았다.

 참고: 경공(景公-?부터 기원전 581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在位:기원전 600년부터 기원전 581년) 성(姓)은 희(姬), 휘(諱)는 거(據), 성공(成公)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말년에 불치병을 얻어서 죽었는데, 그래서 그때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이란 뜻의 <병고황(病膏肓)에 들었다>라는 고사(故事)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자 그 후, 조무(趙武)는 한궐(韓厥)과 난서(欒書)의 도움을 받아서 도안가(屠岸賈)를 척살했으며, 그것으로 가문의 원수를 갚았다. 그러자 한궐(韓厥)과 난서(欒書) 그리고 지앵(智罃)과 사섭(士燮) 그리고 중행경(中行庚)으로부터 축사(祝辭)를 받았지만, 그러나 그 직후에 정영(程嬰)이 <지하에서 계신 조장자(趙荘子-趙朔)와 공손저구(公孫杵臼) 님께 이 사실을 고하고 싶다!>라고 말을 하고 자해(自害)하고 호읍(號泣)했다. 그 다음 기원전 573년, 조무(趙武)는 도공(悼公)으로부터 신군(新軍)의 장에 임명되었으며, 그것으로 비로소 경(卿)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기원전 560년에는 한궐(韓厥)의 아들이었던 한기(韓起)의 추거(推擧)를 받아서 상군(上軍)의 장으로 승격했지만, 그러나 과거 한번 멸족의 위기를 겪었던 교훈을 생각해서 교만하지 않았고, 덕을 베풀었으며, 항시 온화한 풍모를 유지했으며, 스스로 한발 물러나는 자세로 살았다.

 참고: 도공(悼公-기원전 587년부터 기원전 559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 재위는 기원전 573년부터 기원전 559년까지였다. 그리고 양공(襄公)의 증손(曾孫)이었으며, 아버지는 혜백담(惠伯談)이었다. 그리고 즉위하기 전에는 주(周)의 왕도(王都)에서 학문을 쌓았기 때문에, 그래서 주자(周子) 또는 손주(孫周)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난서(欒書)와 순언(荀偃)의 주도에 의해서 여공(厲公-亂政으로, 자객 程滑에게 죽음)이 죽자, 진(晋)으로 와서 군주가 되었다. 그 후, 현정(賢政)을 펼쳐서 나라를 잘 이끌어갔지만,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리하여 진(晋) 최후의 명군(名君)으로 칭송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시대에 왕실의 힘은 오히려 약해져서 귀족들의 힘은 증대되었다.

 아무튼 또 그 후, 기원전 548년에는 정경(正卿), 중군(中軍)의 장이 되었으며, 차경(次卿)의 한기(韓起)와 상담역이었던 숙향(叔向)과 함께, 당시 남쪽의 대국이었던 초(楚)와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46년 7월에 미병(弭兵)에서 회맹을 개최했고, 그 결과 초(楚)와 제(齊) 그리고 정(鄭), 송(宋) 등의 주변제국과의 강화를 실현시켰으며, 그것으로 진(晋)의 명재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기원전 541년이 되자 그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그러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조무(趙武)는 동년(同年) 12월 1일에 선조(先祖)들의 합제(合祭)를 치렀으며, 그리고 그 직후였던 12월 7일에 사망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향년 57세였다. 그러자 시(諡)로 헌문(獻文)이 내려졌으며, 그래서 조문자(趙文子)로도 불렸다.

 ♠ 조성(趙成-생몰불상)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성(成), 시(諡)는 경(景)이었다. 그래서 조경자(趙景子) 또는 조경숙(趙景叔)으로도 불렸고, 조무(趙武)의 아들, 조앙(趙鞅)의 아버지였다. 그는 기원전 541년에 부(父) 조무(趙武)가 죽자 그 뒤를 이어서 당주(當主)가 되었지만, 그러나 다른 조(趙)씨(氏)들에 비해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직급은 차경(次卿) 중군(中軍)의 좌(佐)까지 올랐기 때문에, 그래서 능력은 있었던 인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기원전 533년에는 진(晋)과 주(周)의 대부(大夫)들에 의한 영지(領地) 싸움이 일어나려고 했을 때, 그가 들어가서 중개를 했으며, 결국 화해시켰던 등, 나름대로의 확약도 펼쳤던 인물이었다.

 ♠ 조앙(趙鞅-?부터 기원전 463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시(諡)는 간(簡)으로 해서 조간자(趙簡子)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조성(趙成)의 아들이었으며,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아버지였다. 조앙(趙鞅)은 6대째의 당주였고, 처음에는 직급도 무슨 좌(佐)에 머무르는 등,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떤 때, 그 진(晋)에서 제일 현자(賢者)라고 이름이 높았던 숙향(叔向)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노(魯)의 재상 중손멸(仲孫蔑)은 자신을 위해서 싸우다 죽을 수도 있을 부하가 다섯 명이나 있다는데, 저에게는 어째서 그런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것입니까?!> 그러자 숙향(叔向)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것은 너에게 그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주마!(그 역할을 맡겠다는 의미)>

 참고: 양설 힐(羊舌肸-생몰불상)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양설(羊舌), 휘(諱)는 힐(肸), 자(字)는 숙향(叔向), 양설 직(羊舌職)의 아들이었고, 동모형(同母兄)에 양설 적(羊舌赤-伯華)이 있었으며, 이모제(異母弟)에 양설 호(羊舌虎-叔羆)가 있었다. 그리고 평공(平公)의 스승을 맡았고, 해박(該博)한 인물로 알려졌던 현인(賢人)이었다.

 참고: 평공(平公-?부터 기원전 532년. 재위:기원전 559년부터 기원전 532년)은 도공(悼公)의 아들이었고, 위의 숙향(叔向) 등, 현신(賢臣)들의 보좌를 받아서 패권을 유지했으며, 별 큰 허물없이 진(晋)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 도공(悼公)이 태자 표(彪-平公)의 성인식을 마치고 대상(臺上)에 올라서 도시(首都)를 내려다보다가 <아아, 즐거운 곳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여제(汝齊)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저곳이 아무리 즐거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덕의(德義)를 행하는 즐거움보다는 못합니다> 그러자 또 도공(悼公)이 <무엇을 덕의라고 말하는 것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또 여제(汝齊)가 <제후들의 행위를 보고, 선사(善事)를 행하고, 악사(惡事)를 경계하는 것, 그것이 덕의(德義)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또 도공(悼公)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덕의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요?> 그러자 또 여제(汝齊)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답을 했다. <양설 힐(羊舌肸)이 제국(諸國)의 역사들을 전부다 꿰고 있습니다> 그러자 도공(悼公)은 숙향(叔向)을 태자의 스승에 임명했다. 하지만 그 후, 도공(悼公)은 요절했고, 그 자리를 평공(平公)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는 슬픈 노래를 좋아했고, 여색(女色)을 밝히는 등, 군주로서의 자질에 결점을 드러냈다. 그러자 숙향(叔向)이 그를 지도해서 진(晋)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으며, 그러자 그 후로도 평공(平公)은 큰 허물없이 정치를 펼쳤다. 그러자 관인(官人) 반수(半數)가 숙향(叔向)의 덕을 기렸으며, 특히 초(楚)의 영윤(令尹)이었던 자목(子木)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진(晋)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는 바로 숙향(叔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초(楚)에는 그런 인물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초(楚)는 진(晋)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일화로, 어느 때 정경(正卿)이었던 한기(韓起)가 자신의 곤궁(困窮)함을 탄식하자 숙향(叔向)은 그것을 축하했다. 그러자 또 한기(韓起)가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러자 또 숙향(叔向)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난(欒)씨와 극(郤)씨는 부유하게 살았지만 거만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한을 사서 결국에는 망하고 말았소! 그리고 당신은 현재 가난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덕의(德義)를 펼칠 수가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축하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자 또 한기(韓起)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아, 내가 그것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깨우쳐주신데 가슴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40년에 제(齊)의 안영(晏嬰)이 사자로 진(晋)에 왔을 때,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런데 그때 안영(晏嬰)이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제(齊)의 정권은 모두 전(田)씨(氏)의 손아귀로 들어갔소!> 그러자 숙향(叔向)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 진(晋)도 말세(末世)이긴 마찬가지요! 진(晋)의 정치는 모두 경(卿)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기원전 536년에 정(鄭)의 자산(子産)이 형정(形鼎-成文法)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숙향(叔向)은 <정(鄭)은 이제 곧 망할 것이다! 무릇, 정치란 사람을 보고 행하는 것이거늘, 그러나 법률이 만들어진다면 그때부터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법(法)만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예언을 했다. 그렇듯, 숙향(叔向)은 비록 경(卿)의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평공(平公)의 측근에서 상담역을 맡으면서 진(晋)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조앙(趙鞅)은 그렇게 숙향(叔向)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520년에 주(周)의 경왕(景王)이 사냥을 하다가 심장발작을 일으켜서 사망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러자 태자 맹(猛-나중의 悼王)과 왕의 서자(庶子)였고, 서형(庶兄)이었던 왕자 조(朝) 사이에 후계를 타투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주(周)의 수도는 잿더미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조앙(趙鞅)은 태자 맹(猛)의 요청으로 진군(晋軍)을 이끌고 왕자 조(朝)의 군대를 쳤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516년에 태자 맹(猛)이 즉위했고, 조앙(趙鞅) 등은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기원전 514년에 조앙(趙鞅)은 당시, 정경(正卿)에다 중군(中軍)의 장이었던 위서(魏舒-晋의 무장, 정치가)와 다른 육경(六卿)의 꾐에 빠져서 공족(公族) 양설(羊舌-叔向의 아들 家系) 씨(氏)와 기(祁-祁奚・祁午의 子의 가계) 씨(氏)를 멸해버렸고, 그것으로 그 땅에 자식들을 대부(大夫)로 배치시켜서 세력을 공고히 했던 등, 조화를 목적으로 했던 자신의 조부(祖父) 조무(趙武)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513년에, 그는 중행인(中行寅)과 함께 범선자(范宣子-士匄)가 만들었던 법을 솥(鼎)에 새겨 넣었던 형정(形鼎)을 공개했으며, 그러자 또 그것이 진(晋)에서는 최초의 성문법이 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01년에는 노(魯)에서 많은 악명(惡名)을 떨치고 진(晋)으로 망명해왔던 양호(陽虎)를 전 가신(家臣)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자신의 부하로 삼았는데, 그러자 양호(陽虎)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나중에 조앙(趙鞅)을 위해서 분투했다.

 참고: 양호(陽虎)는 노(魯)의 정치가였고, 한때 노(魯)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505년에는 공자(孔子)를 초빙해서 자기 아래 벼슬시키려고 했고, 그러자 또 공자(孔子)도 그럴 의향이 있었지만, 그러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후, 권력투쟁에서 져서 노(魯)에서 추방되었으며, 진(晋)으로 가서 조앙(趙鞅)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앙(趙鞅)을 위해서 위(衛) 공실(公室)에 개입하면서 암약(暗躍)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소식이 두절되었다.

 아무튼 또 그 후의 어느 때, 조앙(趙鞅)은 고포자경(姑布子卿)이라는 관상의 명인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자기 자식들의 관상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고포자경(姑布子卿)이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에 장군에 버금갈 관상을 가진 자식은 없습니다> 그러자 조앙(趙鞅)은 낙담했지만, 그러나 사실, 조앙(趙鞅)은 그때 자신의 막내는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막내도 보여주었는데, 그러자 고포자경(姑布子卿)은 그 막내를 보았던 순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바로 이 아들이 장군에 버금갈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바로 조무휼(趙無恤)이었고, 그리고 또 조앙(趙鞅)은 당초 장자였던 백노(伯魯)에게 후계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조무휼(趙無恤)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때, 조앙(趙鞅)은 큰 병에 걸려서 꼬박 이틀하고도 반나절을 수면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그러자 또 당시 명의였던 편작(扁鵲)이 그의 집으로 가서 진찰을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그는 꿈을 꾸었다고 했으며, 그 꿈속에서 그는 천제(天帝)와 함께 백신(百神)들과 놀았다고 한다.

 참고: 편작(扁鵲-생몰불상)은, 중국 전국시대의 의사로, 특히 한(漢) 이전의 반(半) 전설적인 명의로 알려져 있으며, 성(姓)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었고,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상군(長桑君)으로부터 의술을 배운 후에 환자의 오장을 투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행동과 인격, 진료, 치료에 관한 것은 한비자(韓非子)와 사기(史記) 등에 일화로 남아있으며, 그 후의 한방(漢方)의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를 편작(扁鵲) 또는 기파편작(耆婆扁鵲)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이제는 명의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의하면 <그는 발해(渤海)군(郡), 정(鄭)의 사람이라고 했고, 성(姓)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고대의 역사가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이론을 제기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양자법언(揚子法言)>이나 <회남자(淮南子)> 등에서는 <편작(扁鵲)은 노(盧)의 사람>이라고 했고, 청(淸) 대의 사마정(司馬貞)과 서광(徐廣)은 <하북성(河北省)의 임구(任丘)현 사람>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가 전적(典籍)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은 전국시대 말의 한비자(韓非子-紀元前295年에서 紀元前233年)에서였지만, 그러나 또 사마천(司馬遷)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의하면, 그가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것은 기원전 655년으로, 곽(郭)이라는 소국(小國)이 멸망했을 때라고 했고, 그 활동이 끝났던 것은 기원전 350년, 진(秦)이 함양(咸陽)으로 천도했을 때였다고 해서, 그것을 서술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약 300년이나 살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그의 행동범위도 아주 광대했으며, 그 햇수도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행했던 일이었으며, 그래서 또 어떤 특정의 학파(學派)에 의한 활동이었지 않았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랬던 그가 앞의 그 조앙(趙鞅)의 진찰도 했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상황이 진(秦)의 목공(穆公)의 상태와 흡사했었고, 그래서 또 그때 목공(穆公) 역시도 천제(天帝)를 만난 꿈을 꾸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편작(扁鵲)은 조앙(趙鞅)의 상태를 보고나서 3일 이내에 깨어날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그러자 조앙(趙鞅)은 편작(扁鵲)에게 전지(田地)4만(萬)묘(畝 또는 무. 그리고 1묘=30평이므로 ∴ 120만평)를 내렸다고 한다.

 아무튼, 조앙(趙鞅)은 그 꿈속에서 두 마리의 곰을 죽였는데, 그러자 천제(天帝)가 기뻐했으며, 그래서 그에게 두 개의 상자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천제(天帝) 옆에는 1명의 남자아이가 서 있었는데, 그러자 또 천제(天帝)는 적(狄-오랑캐)의 개 한 마리를 그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아이가 장년(壯年)이 되면 돌려주도록 하라> 하지만 조앙(趙鞅)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또 천제(天帝)가 한 남자를 자신에게 보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게 해주었다. <첫째, 진(晋) 내에 있는 경(卿)들 중에서 두 집을 토벌할 것. 그리고 둘째는 조앙(趙鞅)의 아들이 적(狄)의 땅에서 두 나라와 싸워서 이기게 됨. 그리고 천제(天帝) 옆에 서있던 아이는 바로 당신(趙鞅)의 아들이며, 적(狄)의 개는 북방(北方)의 대(代)라는 지역을 통치할 군주, 그러나 나중에 당신의 아들이 그곳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조앙(趙鞅)과 조무휼(趙無恤)의 장래를 예견했던 것이었고, 그리고 또 그 두 집을 토벌하라고 했던 것은 중행(中行)씨(氏-荀氏 本家)와 범(范)씨(氏-士氏 分家)를 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조무휼(趙無恤)이 적(狄)에서 두 나라와 싸워서 이기게 될 것이라고 했던 것은 조무휼(趙無恤)이 대(代)를 공격해서 멸한 후 진(晋)의 경(卿) 중 하나였던 지(知)씨(氏-荀氏 分家)를 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진(晋)에서도 그때까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육경(六卿)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으며, 그러자 조앙(趙鞅)은 중행(中行)가(家)의 당주였던 중행인(中行寅)과 중행인(中行寅)의 처가였던 사(士)가(家)의 당주 사길사(士吉射-范吉射)와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晋) 공실(公室)을 명목상의 후견인으로 하고, 조가(趙家), 위가(魏家-魏侈), 지가(智家-智轢), 한가(韓家-韓不信) 그 4가(家)가 합동해서 그 두 가문을 멸했으며, 그리하여 그때부터 진(晋)에서는 제후(諸侯)에 필적할만한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그 네 가문이 대두(擡頭)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한편, 공자(孔子)는 그 일과 함께 상기(上記)의 법을 공개했던 일 등에 반감을 품고는 자신의 저서 춘추(春秋)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조앙(趙鞅), 진양(晋陽)에서 모반(謀反)하다> 아무튼 그 후, 조앙(趙鞅)은 조무휼(趙無恤)에게 자신의 뒤를 맡기고 죽었다. 그러자 그에게 시(諡)로 간(簡)이 내려졌으며, 그 후로 조간자(趙簡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 조무휼(趙無恤-?부터 기원전 425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무휼(無恤), 시(諡)는 양(襄), 그래서 조양자(趙襄子)로도 불렸으며, 조앙(趙鞅)의 말자(末子)였다. 그리고 고포자경(姑布子卿)으로부터 대성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을 후에 조앙(趙鞅)의 후계자로 점 찍혀졌지만, 그러나 그때 그의 어머니는 적족(翟族=)출신으로, 신분도 낮았던 데다가 그는 말자(末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은 곧 잊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조앙(趙鞅)이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내가 보물(符) 하나를 상산(常山)의 정상에 숨겨놓았다. 그것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참고: 상산(常山)은 항산(恒山)을 의미하며, 중국의 도교(道敎) 오악(五嶽) 중 하나로, 북악(北岳) 즉, 북쪽에 있는 산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에 있으며, 최고(最高)표고(標高)는 2,016m이다. 그리고 그 산은 중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고로 높은 산이며,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장과로(張果老)가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참고로, 오악(五嶽)은 다음과 같다. 北岳 恒山 / 西岳 華山 / 中岳 嵩山 / 東岳 泰山 / 南岳 衡山

 아무튼,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자식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조무휼(趙無恤)만 다시 돌아와서 그것을 찾았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조앙(趙鞅)이 그것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 산의 정상에 오르니 그 아래에 대(代)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러자 저는 그것을 보고 내가 저곳을 가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던 조앙(趙鞅)은 자신의 후계자로 조무휼(趙無恤)을 결정했다. 그러자 장형(長兄)이었던 백노(伯魯)는 조앙(趙鞅)의 결정에 따랐으며, 그 후로도 조무휼(趙無恤)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보좌했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은 어렸을 때부터 잘 따랐던 백노(伯魯)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에 백노(伯魯)는 병이 나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앙(趙鞅)마저 죽어버렸고, 그러자 조앙(趙鞅)의 뒤를 이었던 조무휼(趙無恤)은 상복(喪服)을 입은 채로 대(代)의 왕<당시, 조무휼의 매형(妹兄=姊兄)>을 위한 연회를 열고는 그를 초대했다. 그러자 대왕(代王)이 그 연회에 참석을 했는데, 그러자 조무휼(趙無恤)은 그들을 토벌하고는 그 대(代)를 찬탈(簒奪)해서 손에 넣었다. 그러자 또 자기 남편이 조무휼(趙無恤)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의 누나는 조무휼(趙無恤)을 실컷 매도(罵倒)하고는 자살을 해버렸다. 그러자 그 후, 조무휼(趙無恤)은 그 땅에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장형(長兄) 백노(伯魯)의 아들 조주(趙周-成君)에게 맡겨서 다스리게 했고, 그것으로 백노(伯魯)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 그리고 그 후, 진(晋)의 육경(六卿) 중에서 최대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지(智)씨(氏)의 당주 지요(智瑤-智伯・智襄子)가 위(魏)씨(氏)의 당주 위구(魏駒-魏桓子)와 한(韓)씨(氏)의 당주 한호(韓虎-韓康子)의 세력을 인솔하고는 조무휼(趙無恤)의 본거지였던 진양(晋陽)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조무휼(趙無恤)은 한때 지요(智瑤)의 수공(水攻-강물을 막아서 고립시키는 것)에 낙성(落城)의 위기까지 겪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때 조무휼(趙無恤)은 위구(魏駒)와 한호(韓虎)에게 <지요(智瑤)는 욕심이 아주 많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죽고나면 그 다음은 바로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요!>라고 말을 하면서 그들을 회유했고, 그러자 그 후에 전세는 대역전되어서 지요(智瑤)는 패사(敗死)했다. 그러자 또 기원전 453년, 그때부터 진(晋)은 사실상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으로 3분(分)되었고, 그리하여 바로 그때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아무튼 그리고 또 덧붙여서, 조무휼(趙無恤)은 그 후에 지요(智瑤)의 구신(舊臣)이었던 예양(豫讓)에게 두 번이나 암살기도를 당했지만,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그러자 예양(豫讓)은 조무휼(趙無恤) 앞에서 자결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하지만 여기서는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는 관계로 소개는 생략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따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또 그 후, 조무휼(趙無恤)은 장자(長子) 백노(伯魯)의 은혜를 다시 갚기 위해서 조주(趙周)를 당주에 추대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조주(趙周)도 빨리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이었던 대군(代君) 조완(趙浣)을 차기 당주로 세웠다. 그리고 기원전 425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그 후에 양(襄)이란 시(諡)가 내려졌다. 하지만 또 그 후, 사기(史記)의 조세가(趙世家)에 의하면, 조무휼(趙無恤)은 공동 씨(空同氏-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戎의 一派)의 딸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런데 조무휼(趙無恤)이 나중에 형(兄)의 손자였던 조완(趙浣-献侯)을 후계자로 삼고는 자기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일족(一族)으로서 군주를 모시도록!> 그러자 그에 불만을 가졌던 그의 아들들은 그가 죽자 조완(趙浣)을 쫓아냈으며, 그 중에서 장형(長兄)을 내세워서 당주로 삼고는 조(趙)를 다스렸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의 유지(遺志)를 받들지 않았던 그 불효행위에 대해서 백성들은 비난했고, 그 결과로 그 5명의 자식들을 모두 처형되었으며, 조완(趙浣)은 다시 당주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조무휼(趙無恤)의 유지(遺志)를 지켜졌다고 한다.





  <趙 氏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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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7)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참고: 직하(稷下)의 학(學)이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에서 부흥했던 제자(諸子=諸子百家)의 학(學)이며, 당시 제(齊)의 수도였던 임(臨)으로 모여들었던 사상가(思想家)와 변사(辯士) 등에 의해서, 그때까지 주장되고 있었던 여러 가지의 제(諸)사상들이 총합되었는데, 그리하여 많은 독자적인 사상(思想)그룹이 형성되었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 직하(稷下)라는 것은, 임(臨)의 직문(稷門) 즉, 임(臨)에 있었던 직문(稷門)이란 문(門)의 근처 어디라는 의미이며, 그리고 순자(荀子-기원전 313년부터 기원전 238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의 사상가로, 유학자였고, 휘(諱)는 황(況), 자(字)는 경(卿)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4세기 말에 조(趙)에서 탄생했으며, 나중에 제(齊)의 양왕(襄王)에게로 가서 벼슬을 했고,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 제주(祭酒=學長)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참언(讒言)을 받아서 제(齊)를 떠났으며, 초(楚)의 재상이었던 춘신군(春申君)에게로 가서 난능(蘭陵-중국 漢代에 현재의 山東省 棗庄의 南東에 위치해있었던 縣의 名이며, 戰國時代에는 楚의 邑이었다)의 영(令)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그곳에서 살았으며, 그리고 후한(後漢)의 순욱(荀彧)과 순유(荀攸)는 그의 후예였고, 성악설(性惡說)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그와 그의 후학(後學)들이 저작했던 것들은 전한(前漢) 말에 정리되어서 <손경신서(孫卿新書)>32편으로 모아졌고, 그것을 또 당(唐)의 양량(楊倞-그러나 양경이라고 쓴 곳도 많이 있으므로, 참고바람)이 또 정리를 해서 그 책이름을 <순자(荀子)>라고 개명했으며, 거기에다 주석을 첨가해서 20권으로 만들었다. 그 후 손경신서(孫卿新書)는 망실(亡失)되었으며, 그래서 현존하는 것들은 모두 그 양량(楊倞)이 주석했던 것들의 계통이다. 그리고 또 참고로 다음은 그 32편의 구성을 열거한 것이며, 따로 한글표기는 하지 않습니다.

 1. 勧学 2. 修身 3. 不苟 4. 栄辱 5. 非相 6. 非十二子 7. 仲尼 8. 儒效 9. 王制 10. 富国 11. 王霸 12. 君道 13. 臣道 14. 致士 15. 議兵 16. 彊国 17. 天論 18. 正論 19. 礼論 20. 楽論 21. 解蔽 22. 正名 23. 性悪 24. 君子 25. 成相 26. 賦 27. 大略 28. 宥坐 29. 子道 30. 法行 31. 哀公 32. 堯問

 아무튼, 그리고 또, 다른 유명한 사람들의 경우에서도 그렇지만,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자료들은 다른 훌륭한 곳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므로 가능하면 상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대략이나, 개요만 소개해드리고 있으므로, 그 점 미리 이해 당부 드리며, 그래서 또 순자(荀子)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1 권학(勸學)편에서는 배우는 것과 선(善)한 일들의 계속적인 노력을 강조했으며, 2 수신(修身)편에서는 예(禮)의 중(重)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또 9의 왕제(王制)편과 10의 부국(富國)편 등에서는 치정(治政)에서 실력주의와 성과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으며, 23의 성악(性惡)편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부터 나쁘므로, 그래서 후천적인 노력 또는 학문을 닦는 것으로써 선(善)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러한 성악설(性惡說)의 입장에서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비판했다. 그리고 또 순자(荀子)는 선(善)을 치(治)로, 악(惡)을 난(亂)으로 규정했고, 인간의 본성은 <한도(限度)가 없는 욕망(慾望)>이라고 전제(前提)한 후, 각자(各自)가 제각각의 욕망을 채우려든다면, 사회는 다툼과 살인이 만연해져서 난(亂)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성악설(性惡說)을 논증(論證)했다. 그리고 또, 각자의 욕망을 외적(外的)인 규범(禮)으로 규제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치(治=)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禮)를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으며, 그것은 또 일종의 사회계약설(社會契約說)로도 평가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17의 천론(天論)편에서는, 그 천(天)을 단지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또 그때까지 내려오던 천인상관사상(天人相關思想) 즉, 하늘이 인간의 행위에 감응(感應)해서 화복(禍福)을 내린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또한, 유성(流星)이나 일식(日食)도 진기한 자연현상의 하나일 뿐이므로, 그래서 또 그런 것들은 위정자들의 행동과는 무관하며, 길조(吉兆)라거나 흉조(凶兆)라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또, 그러한 것들을 봤을 때, 신기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하늘은 단지 자연현상일 뿐이므로, 그래서 그것을 숭배해서 공물(供物)을 바치기보다는, 그것을 연구해서 이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도(祈禱)나 초상(超常)적인 효과도 모두 부정했으며, 당시에 흔히 행해졌던 기우제(祈雨祭)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는 비가 오는 것은 그 기우제 때문이 아니라, 비가 내릴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내린 것일 뿐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는 점(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면서, 위정자는 중요한 결정에 앞서서 점을 치지만,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 점이란 것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무지(無知)한 백성들을 믿게 하려는, 한마디로 현혹시켜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하늘(天) 즉, 인간초월적인 상징 또는 경외(敬畏)로운 대상조차 부정했을 것이란 생각은 지나친 것이다. 아무튼 또, 그의 제자로는 한비(韓非)와 이기(李沂) 그리고 부구백(浮丘伯) 그 세 사람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부구백(浮丘伯)을 통해서 순자(荀子)의 사상은 한대(漢代)의 유학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한비(韓非)와 이기(李沂)는 외적(外的)인 규범인 예(禮)의 사상을, 거기에 더해서 법(法)에 의한 인간의 제어(制御)를 주장했으며, 특히 한비(韓非)는 법가사상의 대성자로, 그리고 이기(李沂)는 법가(法家)의 실무(實務) 완성자가 되었다. 하지만 단 <법가(法家)사상> 그 자체는 공자(孔子)와 한비자(韓非子) 이전부터 존재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순자(荀子)의 사상으로부터 그 법가사상이 탄생되었다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면 앞에서 이미 소개된 조쇠(趙衰-6-19참조)가 나오므로, 그래서 그 조쇠(趙衰)의 장남(長男)이었던 조순(趙盾)부터 차례로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 조순(趙盾-生沒不詳)은 조쇠(趙衰)의 장남으로,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순(盾), 시(謚)는 선(宣)이었다. 그리고 조(趙)씨(氏)의 시조(始祖)로서, 진(晋)에서 오랫동안 정권을 잡으면서 조(趙)씨(氏)의 존재를 세상에 크게 알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조선자(趙宣子) 또는 조선맹(趙宣孟)으로도 불렸다.

 아무튼, 그리고 앞의 이야기를 상기하는 차원에서 조금 소개하고 넘어가면, 그의 아버지 조쇠(趙衰)는 여희(麗姬)의 난 후에 중이(重耳)를 따라서 제국(諸國)을 유랑했으며, 망명지였던 적(狄)에서 족장의 딸이었던 숙외(叔隗)를 맞아들여서 조순(趙盾)을 낳았다. 그 후, 중이(重耳)는 귀국해서 문공(文公)이 되었고, 조쇠(趙衰)도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 후, 기원전 621년에 문공(文公)의 뒤를 이어서 양공(襄公)이 즉위했고, 호사고(狐射姑)가 중군(中軍)의 장(將)이 되었으며, 조순(趙盾)은 중군(中軍)의 좌(左)가 되었지만, 그 후에 양공(襄公)의 대부(大傅)였던 양처부(陽處父)의 추천을 받아서 중군(中軍)의 장(將)이 되었다. 그리고 중군(中軍), 상군(上軍), 하군(下軍), 그 삼군(三軍)에 대한 설명과 좌(左)에 대한 설명 등은 앞에서 이미 다 소개했으므로, 이하 생략하며, 그리고 그 동년(同年), 양공(襄公)이 몰(沒)하자, 당시 태자였던 이고(夷皋)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래서 군신(群臣)들은 양공(襄公)의 동생을 옹립하기로 합의를 했다. 그러자 조순(趙盾)은 당시, 진(秦)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공자 옹(雍)을 불러오자는 의견을 냈는데, 그러나 그때 호사고(狐射姑)가 진(陳)에 있던 공자(公子-樂)를 불러오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조순(趙盾)은 자객을 보내서 그 공자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호사고(狐射姑)는 적(狄)으로 망명을 했고, 그러자 또 그곳에서 호사고(狐射姑)가 옹(雍)의 반대파를 모을 것이 두려웠던 조순(趙盾)은, 그에 생각을 바꾸어서 원래 후계자였던 이고(夷皋)를 옹립하기로 결심을 했고, 그래서 또 그때 이미 진(秦)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晋)으로 오고 있던 옹(雍)을 군사를 보내서 도로 쫓아버렸다. 그러자 또 그때, 옹(雍)을 영접하기 위해서 그곳에 가있었던 선멸(先蔑)과 사회(士會)도 옹(雍)과 함께 진(秦)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그 후, 조순(趙盾)은 사회(士會)가 진(秦)에 남아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그러자 그는 또 책략을 써서 그를 진(晋)으로 불러들였다.

 
참고: 사회(士會-생몰불상)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무장이었고, 정치가였다. 성(姓)은 기(祁), 씨(氏)는 사(士) 혹은 봉지(封地)명으로부터 수(隨), 범(范)이며, 휘(諱)는 회(會), 자(字)는 계(季), 시(謚)는 무(武)였고, 그래서 범무자(范武子)로도 불렸다. 그리고 또 그는 사위(士蔿-士氏의 시조였고, 武公과 献公을 모시면서 晋 발전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이었다)의 손자였으며, 사결(士缺-士成伯)의 말자(末子)였다. 그리고 자식으로 사섭(士燮-范文子)과 사방(士魴-彘恭子)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자(末子)라는 입장에서(字의 季는 末子를 의미함) 가문을 이을 입장에 있지는 았았기 때문에, 그래서 기원전 632년의 <성복(城濮)의 싸움>에서 종군했고, 그 후에 진군(晋軍)이 귀환했을 때, 문공(文公)의 거우(車右-왕의 수레를 따라다니면서 보좌하는 일종의 시종이나 호위 관으로 해석함)로 지명되었다. 그리고 그 11년 후였던 기원전 621년에 정경(正卿) 조순(趙盾)을 명을 받고, 당시 진(秦)에 있던 공자 옹(雍)을 맞으러갔지만, 조순(趙盾)의 변심으로 인해서 사회(士會)는 옹(雍)과 함께 진(秦)에 망명했다. 그 후, 사회(士會)는 진(秦)에서 강공(康公)을 모시게 되었지만, 그러나 같이 망명했던 선멸(先蔑)과는 한 번도 만나지를 않았다. 아무튼, 그 후에 그는 강공(康公)의 군사(軍事)고문이 되었고, 기원전 615년에는 <하곡(河曲)의 싸움>에서 진(晋)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하는 등, 군재(軍才)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자 그 다음해, 조순(趙盾)의 주도로 극결(郤缺)이 나서서 사회(士會)를 진(晋)으로 불러들였으며, 그리고는 대부(大夫)의 지위를 주었다. 그리고 또 그때, 봉지(封地)로 수(隨)와 범(范) 받았는데, 그런 이유로 사회(士會)가 일가(一家)창립했던 분가는 그때부터 범(范)씨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사회(士會)는 조순(趙盾)과 자주 대립했고, 영공(靈公)의 난행(亂行)을 간(諫)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영공(靈公)은 전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그러다가 결국 기원전 607년에 암살되고 말았다.

 참고: 영공(靈公)은 조순(趙盾)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이고(夷皋)였지만, 그러나 그 후에 조순(趙盾)과 심하게 대립했고, 끝내는 자객을 보내서 죽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 자객(鉏麑)은 실패해서 스스로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으며, 그러자 영공(靈公)은 다시 조순(趙盾)을 연회에 참석시켜서 죽이려고 했지만, 그것을 눈치 챘던 조순(趙盾)은 급히 진(晋)을 탈출했다. 그러자 그 후, 영공(靈公)은 그런 사실에 격분했던 조순(趙盾)의 종형제(從兄弟)였던 조천(趙穿)에게 살해되었고, 그 후에 조순(趙盾)은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양공(襄公)의 동생이었던 공자 흑둔(黑臀)을 옹립했는데, 그가 바로 성공(成公)이었다.(이것으로 영공의 소개를 대신함)

 
아무튼 또 그 후였던 기원전 597년에는 정(鄭)을 구원하기 위해서 진(晋)이 출병했을 때, 그는 상군(上軍)의 장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전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는 시종(始終) 초(楚)의 장왕(莊王)과 화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필(邲)의 싸움>이 벌어졌고(6-21 참조), 진(晋)은 대패했다. 그러나 그때, 그가 이끌었던 상군(上軍)만은 손실을 거의 내지 않고 성공적으로 퇴각했다. 그 후, 기원전 593년 3월 29일에 그는 순림부(荀林父)의 후원을 받아서 정경(正卿-宰相)이 되었고, 동시에 중군(中軍)의 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러자 진(晋)에 있던 도적들이 사회(士會)가 무서워서 진(秦)으로 모두 도망을 갔다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겨울, 주(周)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수습을 했는데, 그러자 정왕(定王)이 그를 치하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예(禮)를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는 수치심으로 귀국 후에 전례(典禮)를 연구했고, 그 결과 새로운 법을 정했으며, 그 법은 후에 <범무자(范武子)의 법>으로 불리면서 진(晋)에서 아주 오래 존중되었다. 그리고 그는 재상의 자리에 앉았던지 2년 만에 물러났으며, 그러자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진(晋) 역사상, 사회(士會)만이 최고의 재상이었다>라고 절찬했다. 그리고 그 사후, 생전의 대활약의 공을 인정해서 시호(諡號)로 무(武)가 내려졌고, 그것으로 그는 범무자(范武子)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이고(夷皋)가 즉위해서 영공(靈公)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후로 점차로 조순(趙盾)과 사이가 나빠져 갔다. 그러자 기원전 607년 영공(靈公)은 기어이 조순(趙盾)을 죽일 자객(鉏麑)을 보냈고, 그 뒤의 이야기는 위에서 소개한 그대로였다. 그러자 그 후에 태사(太史-史官)는 그 때의 일을 두고 <조순(趙盾), 왕을 시(弑)함>이라고 기록했고, 그리고 시(弑)라고 기록했던 것은 윗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후에 조순(趙盾)은 자기가 했던 일이 아니었다고 항의했지만, 그러나 그에 대해서 동호(董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반박했다. <당신은 영공(靈公)을 죽인 후에 이 나라를 떠났고, 그 다음에 돌아온 것이요! 그리고 또, 바로 그 시점에서 당신은 진(晋)의 정경(正卿)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반역자였던 조천(趙穿)을 처형시킬 의무가 있었소!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영공(靈公)은 당신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오!> 그러자 조순(趙盾)은 그 후로 그 일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참고: 동호(董狐)는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사관(史官)(?~?)이었고, 폭군이었던 영왕(靈王)이 조천(趙穿)에게 살해되었을 때, 그를 처벌하지 않았던 조순(趙盾)의 행위를 죄(罪)라고 직필(直筆)로 기록했던 것으로, 후세에 양사(良史)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아무튼, 기원전 601년, 그는 장기집권 끝에 정경(正卿)의 지위를 극결(郤缺-춘추시대 晋의 정치가. ?~기원전 597년)에게 양도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며, 그가 죽자 선(宣)이란 시(諡)가 내려졌다. 그리하여 그 후로 조선자(趙宣子)라고 불려졌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하면, 그가 생전에 어떤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 꿈에 대해서 점을 쳐보니 <끊어지지만 뒤는 좋다>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점괘대로, 나중에 그의 아들 조삭(趙朔) 대(代)에 그 위세(威勢)를 질투당해서 일족이 전원 몰살을 당했는데, 그런데 그때, 유일하게 조무(趙武-태아 상태였음)는 그 난리를 피해서 도망을 갔고, 그 후에 다시 조(趙)씨를 부흥시켰다.





 <趙 氏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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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6)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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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빈(孫臏-기원전 4세기경)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의 군인이었고, 사상가였다. 그리고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사람이었으며, 손무(孫武)의 손자로 알려져 있고, 그 손무(孫武)와 함께 손자(孫子)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저작으로, 그가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손빈병법(孫臏兵法=竹簡兵法)이 있다.

 그는 아(阿-山東省 陽穀県)와 견(鄄-山東省 濮県) 사이 또는 그 주변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빈(臏-뜻은 종지뼈 또는 정강이뼈를 베는 형벌)이란 이름도 다리를 절단당하는 형(刑)을 받았던 것으로 해서 붙여졌던 일종의 별명으로, 그래서 그의 본명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본명이나 가족 또는 내력 등에 관해서는 일체 불명(不明)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 자신의 숙적이 되는 방연(龐涓)과 함께 어느 곳에서 병법을 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방연(龐涓)은 위(魏)에서 벼슬을 살았고,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지만, 그러나 방연(龐涓)은 항상 자기보다 뛰어났던 손빈(孫臏)을 경계했다. 그래서 어느 때, 그는 손빈(孫臏)을 위(魏)로 초대했고, 그런 다음 함정에 빠뜨려서 다리를 절단하는 형벌을 받게 했다. 그리고 경형(黥刑)까지 받게 했는데(그러나 또 그에는 孫臏 스스로의 잘못으로 魏의 朝廷으로부터 그런 형벌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자 그 후, 손빈(孫臏)은 제(齊)로 도망을 갔고, 그곳에서 사장(師將)이 되었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전에, 그러니까 손빈(孫臏)이 제(齊)로 도망을 갔을 때, 그는 먼저 제(齊)의 장군이었던 전기(田忌)의 집에서 객(客)의 신분으로 머물렀는데, 그런데 어느 때에, 제(齊)의 왕이었던 위왕(威王)이 자신의 공자(公子)들 그리고 전기(田忌)와 함께 승부를 겨루는 경마(競馬)경기를 개최했다. 그러자 손빈(孫臏)도 그 자리에 참석을 했는데, 그리고는 전기(田忌)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을 했다. <상대가 상등(上等)의 말을 타고 나오는 경기에서는 하등(下等)의 말을 타고 나가서 경기를 하시고, 상대가 중등(中等)의 말을 타고 나오는 경기에서는 상등(上等)의 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대가 하등(下等)의 말을 타고 나올 때는, 상등(上等)의 말을 타고 나가서 경기를 하십시오!> 그러자 그 결과 전기(田忌)는 2승 1패를란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왕으로부터 천금(千金)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자 기분이 몹시 좋아졌던 전기(田忌)는 손빈(孫臏)을 위왕(威王)에게 추천했고, 그러자 위왕(威王)은 그를 사장(師將)에 임명했다.

 그 후, 앞에서 소개했던 대로 손빈(孫臏)은 전기(田忌)를 내세워서 조(趙)를 구했는데<그때, 위위구조(圍魏救趙)의 故事를 남김>,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설명을 하면, 당시 위(魏)는 조(趙)를 공격했고, 그러자 조(趙)의 수도가 포위되었다. 그러자 조(趙)는 급히 제(齊)에 원군을 청했는데, 그때 위왕(威王)은 손빈(孫臏)을 장수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손빈(孫臏)이 극구 사양해서 전기(田忌)가 대장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조(趙)를 구원하러 나섰으며, 그리고 그 후에 손빈(孫臏)은 조(趙)로 향하던 도중에 전기(田忌)에게 군사를 돌려서 당시, 약소노병(弱小老兵)만 남아 있었던 위(魏)를 먼저 치게 했다. 그러자 위기를 느꼈던 위(魏)의 주력군이 조(趙)의 포위를 풀고 다시 위(魏)로 달려왔는데, 그러나 너무 강행군을 했던 나머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피로곤비(疲勞困憊)해서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다. 그러자 제군(齊軍)은 그것을 노려서 위군(魏軍)을 공격했고, 그것으로 그 <계릉(桂陵)의 싸움>은 제(齊)의 대승으로 끝났다.

 
참고: 말이 나온 차에 위위구조(圍魏救趙)의 고사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보고 넘어가면, 그 원문은 다음과 같고 <共敵不如分敵 敵陽不如敵陰>, 그리고 그 해석은 <적(敵)이 모여 있는 것은 분산(分散)되어 있는 것과 같지 않다! 즉, 적(敵)을 한곳에 모아놓고 치는(공략하기) 것보다는, 적을 분산시켜놓고 치는 것이 더 좋으며, 적(敵)의 밝은 쪽은 적의 어두운 쪽과 같지 않다! 즉, 적(敵)의 정면을 공격하기보다는, 적의 숨겨진 약점을 찾아내서 공격하는 것이 더 좋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상황은 또 앞에서 설명한 제군(齊軍)의 회군 시에 손빈(孫臏)이 전기(田忌)에게 했던 말로, 손빈(孫臏)은 그때 전기(田忌)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회군(回軍)을 조언했다. <엉킨 실타래를 풀 때는 무리하게 당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도 다른 나라를 구원하려고 할 때는 직접적으로 달려들어서 적(敵)과 맞서기보다는, 요소(要所-중요한 곳)을 치고, 허(虛-빈 곳)을 치고, 그래서 형세(形勢)를 무너뜨린다면, 실타래는 자연스럽게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敵)을 한곳에 모으지 않고 분주하게 만들어서 피로하게 한 후에 공격하는 전술을 위위구조(圍魏救趙)라고 부르게 되었다.(史記의 孫子吳起列傳)

 아무튼, 그 <계릉(桂陵)의 싸움>이 있었던 13년 후에 또 <마릉(馬陵)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러나 그에 대한 설명도 이미 앞에서 소개가 다 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같지만, 비슷한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제군(齊軍)은 <계릉(桂陵)의 싸움>에서와 같이 위(魏)의 수도를 공략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방연(龐涓)도 이미 준비를 다 끝냈던 상태였으며, 그래서 위(魏) 본국에도 정예부대를 남겨두고 한(韓) 공략에 나섰던 참이었다. 그러자 제군(齊軍)은 그곳에서 발이 묶여서 오도 가도 못하는 형국이 되었는데, 그러자 또 방연(龐涓)은 그때 위(魏)를 방어하고 있던 방위군과 자신이 이끌던 공략군이 협격(挾擊)해서 제군(齊軍)을 물리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계략을 미리 알아차렸던 손빈(孫臏)은 퇴각을 결정했고, 그러자 또 방연(龐涓)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군(齊軍)을 추격했으며, 그것은 또 철퇴(撤退)전(戰)에서는 추격 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빈(孫臏)은 그렇게 철퇴하면서도 방연(龐涓)의 <위군(魏軍)에는 죽음도 겁내지 않는 용맹한 군사들만 있지만, 제군(齊軍)은 원래부터 겁쟁이들이다!>라고 하는 오만방자함을 역이용하기 위해서, 제군(齊軍) 진영에 설치했던 아궁이의 수를 줄여가면서 후퇴를 했다. 그러자 그것을 확인했던 방연(龐涓)은 제군(齊軍)에 탈주병이 많다고 판단하고는 그 추격의 속도를 더욱 높여나갔다. 그런 한편, 손빈(孫臏)은 애로(隘路-좁고 험한 길, 難關)였던 마릉(馬陵)까지 방연(龐涓)을 유인하고는, 그 한 나무에 <龐涓死于此樹之下-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는다>라고 써두었다. 그리고는 그 길의 양측에 병사들을 매복시켰고, 그 나무 아래에서 불이 켜지면 화살을 쏘아라고 지시를 했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이며, 방연(龐涓)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후, 손빈(孫臏)의 이름은 대륙을 울렸으며, 그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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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자(孟子-기원전 372년?부터 기원전 289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학자였고, 성(姓)은 맹(孟), 휘(諱)는 가(軻), 자(字)는 자여(子輿)였으며, 아성(亞聖-유학에서 공자 다음가는 聖人=맹자)으로도 칭해졌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공맹(孔孟)의 가르침>이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언행(言行)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맹자(孟子)>이며,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고, 인의(仁義)에 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목표로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추(芻-현재의 山東省 鄒城市) 출신이었고,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와 관련되었던 맹모삼천(孟母三遷) 고사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그리고 또 사실(史實)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교육적인 모범으로 해서 현재, 추성 시(鄒城市)에는 맹모삼천사(孟母三遷祠)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나중에 공자(孔子)의 손자였던 자사(子思)의 문하로 들어가서 학문을 배웠으며, 그리고 또 그때, 그는 그 자사(子思)에게 직접 배웠다는 말도 있지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 연대(年代)에 무리가 있다.(아래 子思 참조) 아무튼 또 그 후, 그는 위(魏)와 제(齊) 그리고 송(宋)과 노(魯) 등지로 유세(遊說)를 떠났지만, 그러나 그의 뜻은 그 나라의 왕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제자들을 육성하는데 노력했으며, 그 사이에 저작활동도 겸행했다.

 참고: 자사(子思-기원전 483년?부터 기원전 402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학자였고, 성(姓)은 공(孔), 이름은 급(伋), 자(字)는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였고, 아버지는 공백어(孔伯魚)였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그래서 공자(孔子)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 후에 증자(曾子-6-24참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또 그 후, 그 역시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펼친 후에 노(魯)의 목공(穆公)에게 가서 벼슬을 했다. 그리고 그와 그 일파(一派)들이 저작했던 것으로 <자사자(子思子)>란 것이 있었다지만, 현존하지 않으며, 그리고 중용(中庸)도 자사(子思)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는 있지만, 그러나 또 현재에서는 중용(中庸)의 전반부 등과 예기(禮記)의 몇 편정도가 그 자사자(子思子)에서 전재(轉載)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성(誠)을 천지와 자연의 법칙으로 삼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철학을 제창하였다.

 아무튼 당시, 묵가(墨家)의 고자(告子)는 <사람의 성(性-천성, 성품 또는 품성)에는 선(善)도 없고, 불선(不善)도 없기 때문에,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같은 명군(明君)이 나타나면 백성들은 선(善)을 좋아하게 될 것이고, 그 반대로 유왕(幽王)이나 려왕(厲王) 같은 암군(暗君)이 나타나게 되면 백성들은 난폭(亂暴)한 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했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타고난 성품이 착한(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사람도 있다>라고도 주장하고 있었다.(性猶湍水-사람의 本性은 여울물과 같다는 뜻으로, 여울물이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흘러갈 수 있듯이, 천성적으로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했던 告子의 說)

 참고: 묵가(墨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노나라의 묵자(墨子)의 사상을 받들고 실천하던 제자백가의 한 파였으며, 절대적인 천명에 따라서 겸애(兼愛)와 흥리(興利)에 노력하여 근검할 것을 주장했고, 음악과 전쟁을 반대하였으며, 영혼과 귀신의 실재를 역설하여 종교적인 색채를 띠기도 했다. 그리고 <묵자(墨子)>는 묵자(墨子)의 사상서이며, 인간집단의 전체적 번영인 '이(利)'에 주목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강제적인 연대와 공동의 겸애를 주장하였으며, 침략주의를 배격하고, 다스리는 자의 사치를 추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또 묵자(墨子-B.C.480~B.C.390)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사상가·철학자였으며, 성(姓)은 묵(墨), 이름은 적(翟), 묵가(墨家)의 시조였고, 유가(儒家)에게서 배웠으나, 무차별적인 박애의 겸애(兼愛)를 설파하고, 평화론을 주장하여 유가(儒家)와 견줄만한 학파를 이루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설명함. 

 아무튼, 그에 대해서 맹자(孟子)는 <사람의 품성은 원래부터 선(善)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성인(聖人)이나 소인(小人-일반인)도 그 품성은 한가지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 성품이 선(善)한 사람이 때로 불선(不善)을 행하는 것은, 그 선(善)한 성품이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 상실돼버렸기 때문이다>라고도 했다. 그 때문에 또 맹자(孟子)는 <큰 덕(德)을 가진 사람이란, 그런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라고 했으며, 그리고 또 <학문의 길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심(放心-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잃어버렸던 마음)을 구(求)하는 것, 즉 인간의 본성(善)을 회복(回復)시키는데 있을 뿐이다>라고도 했다. 그리고 또 당시,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을 제창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은 유교(儒敎)주류(主流)파의 중심개념이 되어서 많은 유자(儒者)들에게 전해져서 계승되었다.

 
참고: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악하므로, 선(善) 행위는 후천적인 습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던 학설이며, 중국의 순자(荀子)가 주장하였
다. 그리고 또 그는 인간이란 선천적으로 한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대로 두면 싸움만이 일어나서 파멸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예(禮)로써 바로잡아야 한다고도 했다.(荀子는 차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소개함)

 아무튼, 맹자(孟子)는 또 <인간의 본성에 사단(四端)이 있다>고도 했으며, 그 사단(四端)은 간단하게,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로,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불쌍히 여겨서 언짢아하는 마음)과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예(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겸손히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과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이른다. 그래서 또 맹자(孟子)는 <그런 것을 노력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사람은 금수(禽獸)와 같게 될 것이다>라고도 말을 했다. 그리고 또 그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저절로 몸에 익혀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 때문에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군자(君子)는 금수(禽獸)와도 같은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다. 그리하여 맹자(孟子)는 낙관적(樂觀的)인 인간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의 주체적(主體的)인 노력으로 사회 전체를 통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리하여 맹자(孟子)의 사상은 후세에 주자학(朱子學)으로 이어졌으며, 순자(荀子)의 사상은 법가(法家)사상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그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서 인(仁)과 의(義) 즉, 인의(仁義)는 공자(孔子)의 인(仁)을 더욱 발전시켰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고금(古今)의 군주들을 왕자(王者)와 패자(覇者)로, 그리고 정도(政道)를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로 변별(辨別)했으며, 그리하여 전자(前者)가 후자(後者)보다 더 낫다고도 주장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천하(天下)를 얻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마음부터 먼저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리하여 영토와 군사력부터 확대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또 <왕도(王道)에 의해서 자국의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타국의 백성들에게까지도 왕자(王者)로서 존경받게 되면, 다른 제후들이 침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앞에서도 잠시 소개가 되었지만, 양(梁)의 혜왕(惠王)과 만났을 때, 혜왕(惠王)이 <이익(利益)으로 나라를 강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는 <군주(君主)는 이익(利益)이 아닌, 인의(仁義)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또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비록 소국(小國)이라도 대국(大國)에 지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그 인의(仁義)는 또 군주(君主)가 백성의 마음을 잘 알아 살펴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며,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적이 없게 된다(仁者無敵)라고도 말을 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아무리 소국(小國)의 군주(君主)라도 천하의 왕자(王者)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패자(覇者)의 사적(事績)에 관해서 제(齊)의 선왕(宣王)이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모름지기 군주(君主)란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王道)를 걸어야 하며, 그랬을 때만이 천하의 백성들은 그 왕의 치하(治下)에서 살고 싶어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또, 그 맹자(孟子)의 민본(民本)사상은 경제사상(經濟思想)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었으며, 당시 그가 제창했던 정전제(井田制)도 그러한 문맥(文脈)에서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급진적인 주장이었고, 그래서 당시의 군주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랬어도 맹자(孟子)는 일관되게 <백성이 최우선>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리고 또 그 자신 혁명(革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의 <천명(天命)설>은 나중에 <혁명(革命)설>의 원형(原型)이 되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순(舜)은 천하를 하늘로부터 내려 받았던 것이었지, 요(堯)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이 아니었다>라고 했고, 그래서 또 <천하를 얻게 해주는 것은 오직 하늘뿐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또 예를 들어서 <아무리 요(堯) 같은 천자(天子)라고 하더라도, 천명(天命)에 거슬러서 천하를 주고받는 일은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고 또 그 <하늘의 뜻> 또는 <천명(天命)>의 표현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백성들의 마음 또는 생각에 의해서 표시 또는 표현되는 것>이고, 그래서 또 <백성들이 어떤 사람을 천자(天子)로 인정하고, 그래서 또 그 치세(治世)에 만족을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 천명(天命)을 받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라는 뜻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그 <천명(天命)설>에 입각(立脚)해서 은주혁명(殷周革命-6-5~11참조)을 거론하면서 <주(周)의 무왕(武王)은 꼭 그렇게 은(殷)의 주왕(紂王)을 토벌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라고 했고, 그것은 또 역시 <가만 놔뒀어도 천명(天命)에 의해서 모든 것은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맹자(孟子)는 유가(儒家)의 제일 중요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의 지위는 송(宋)대(代) 이전에는 그다지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중당(中唐)시대에 한유(韓愈)가 <원도(原道)>를 저술했고, 거기서 한유(韓愈)는 <맹자(孟子)는 전국시대 유가 중에서 유일하게 공자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것을 시작으로, 그때부터 맹자(孟子)의 <승격(昇格)운동>이 현실화되었다.

 참고: 한유(韓愈-768~824)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하겠지만, 그러나 일단 약력을 소개하면, 그는 중국 당나라의 문인이었고 정치가였으며,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을 비판했고, 고문(古文)을 주장하였으며, 시문집에 <한창려집(韓昌黎集)40巻>과 <외집(外集)>이 있었다. 그리고 위의 중당(中唐)시대란 중국 당나라 때, 시(詩)의 발달을 기준으로 나누었던 역사의 4시기를 말했던 것으로, 송(宋)나라 때 <엄우>란 사람이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으로 나누었던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당(中唐)시대는 그 사당(四唐)의 세 번째 시기로, 대종(代宗) 때부터 14대 문종(文宗) 때까지의 약 70년간을 말하며, 그 시기에 한유나 유종원 또는 백거이 등, 뛰어난 시인들이 많이 나와서 고시(古詩)가 번창하였다. 그리고 또 참고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는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여덟 명의 뛰어난 문장가로, 당(唐)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그리고 송(宋)의 구양수(歐陽脩)와 왕안석(王安石) 그리고 증공(曾鞏)과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을 이른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3소(蘇)씨(氏)는 모두 친자(親子-父, 長子, 次子)관계로, 삼소(三蘇)라고도 불렸다.(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또는 변려문(騈儷文)은,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했던 한문 문체로, 문장 전편이 대구로 구성되어서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 때문에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함.

 아무튼, 그 후에 맹자(孟子)는 점점 그 지위가 상승되었고, 그리하여 북송(北宋)시대 신종(神宗) 희령(熙寧)4년(1071년)에는 맹자(孟子)의 글이 처음으로 과거의 시험과목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원풍(元豊)6년(1083년)에는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추국공(芻國公)의 지위를 추증(追贈)받았으며, 그 다음해에는 공자(孔子)묘(廟)에 함께 병치(竝置)되어서 제사지내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맹자(孟子)>가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으로 승격되었으며, 남송(南宋)시대가 되자 주희(朱熹)가 그 <맹자(孟子)>에 주석을 달았고, 그리하여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와 함께 사서(四書)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다 또 실제적인 지위는 오경(五經)의 위로 올려 졌으며, 그 후였던 원(元)대(代)의 지순(至順)원년(元年)(1330년)에 맹자(孟子)는 <아성공(亞聖公)>에 봉해졌다. 그러자 그 후로 맹자(孟子)는 아성(亞聖)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공자(孔子)의 다음 지위로 승격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공자(孔子)의 출신지였던 산동성(山東省) 추성시(鄒城市)의 남교(南郊)에는 맹자(孟子)를 제사 지내는 맹묘(孟廟)가 지어져 있으며, 그 별명은 아성묘(亞聖廟)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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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5)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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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후(武侯-기원전 424년부터 기원전 37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 위(魏)의 군주(재위는 기원전 395년부터 기원전 370년)였으며, 성(姓)은 희(姬), 씨(氏)는 위(魏), 휘(諱)는 격(擊)이었고, 문후(文侯)의 아들이었으며, 공자(公子) 중완(仲緩)과 태자 앵(罃) 등의 아버지였다. 그는 또 아버지 문후(文侯)의 뒤를 이어서 명군(名君)의 소리를 들었으며, 그 시대에 위(魏)의 세력을 크게 키웠다. 하지만 만년에는 별 성장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또 그때, 서쪽으로는 진(秦), 북쪽으로는 조(趙), 동쪽으로는 제(齊), 남쪽으로는 초(楚)와 한(韓) 등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또 그 시기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또 국고(國庫)가 현저히 줄게 되었으며, 그래서 또 그 다음 대였던 앵(罃)의 대에서는 패권을 내놓을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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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罃=惠王-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19년)은 중국 전국시대 위(魏)의 제3대 군주(재위는 기원전 369년부터 기원전 319년), 또는 초대(初代) 왕이었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위(魏), 휘(諱)는 앵(罃)이었다. 그리고 무후(武侯)의 적자(嫡子)로 태어났으며, 무후(武侯) 사후에 이모형(異母兄)이었던 공자 중완(仲緩 또는 魏緩)과의 왕위싸움에서 이기고 즉위했다. 그리고 또 당시, 위(魏)는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최대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무후(武侯) 만년에는 전쟁이 끊이지를 않았다. 거기에다 그가 즉위하려고 했을 때쯤에 공족(公族)이었고, 당시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공숙좌(公叔座)가 임종을 맞으려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그는 혜왕(惠王)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지금, 나의 식객(食客) 중에 공손앙(公孫鞅=商鞅-나중에 후술함)>이란 사람이 있는데, 내가 죽고 나면 그를 재상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위(魏)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가 그것을 거절한다면, 그때는 바로 그를 죽여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가 만약에 다른 나라로 가버린다면, 그때는 위(魏)에 심대(甚大)한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 혜왕(惠王)은 공숙좌(公叔座)가 너무 늙은 나머지 임종 시에 헛소리를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손앙(公孫鞅)을 등용하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자 또 그런 혜왕(惠王)의 태도에 실망을 했던 공손앙(公孫鞅)은 그 길로 진(秦)으로 가버렸고, 진(秦)의 효공(孝公)에게 인정을 받아서 그곳에서 재상이 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국정을 대개혁했고, 그러자 진(秦)은 순식간에 강국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 공적으로 그는 상(商)이란 땅을 하사받았고, 그래서 그때부터 <상앙(商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진(秦)은 여러 번 위(魏)를 공격했고, 그러자 또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영토를 잃어갔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341년에 벌어졌던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위군(魏軍)은 전기(田忌), 손빈(孫臏)이 이끌던 제군(齊軍)에 패했으며, 그 때문에 또 적자(嫡子)였던 상장군(上將軍) 태자 신(申)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맛봐야만 했다.

 참고: 전국책(戰國策) 권23 위(魏)2 제위전어마릉(齊魏戰於馬陵)에 의하면 <방연(龐涓)은 제군(齊軍)에 포로가 되었고, 태자 신(申)은 전사(戰死)했다>라고 기록이 되어있으며(원문-龐涓戰于馬陵 魏師大敗 殺太子申 慮龐涓)>, 맹자(孟子)에 의하면, 위(魏) 혜왕(惠王)이 만년에 맹자(孟子)와 만났을 때 <나는 얼마 전에 아까운 아들을 전사(戰死)로 잃었소!>라고 말하면서 탄식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자 또, 그것을 호기(好機)라고 보았던 상앙(商鞅)이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340년에 결국 서쪽을 침범했고, 그리고는 자신과 친교가 있었고, 총대장이었던 공자(公子) 공(邛-惠王의 異母弟?)을 속여서 포로로 잡으면서 대승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위(魏)는 수도 안읍(安邑)에서 동쪽의 대량(大梁-현재의 開封)으로 천도까지 해야 했던 신세에까지 몰렸는데,
그러자 그 후에 위(魏)는 <양(梁)>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실의의 나날을 이어가고 있었던 혜왕(惠王)은 결국 익애(溺愛)했던 태자 신(申)을 대신해서 신(申)의 동모제(同母弟)였던 공자 혁(赫)을 세자로 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 때에 내가 공숙좌(公叔座)의 말을 들었는데, 내가 그때 공숙좌(公叔座)의 말을 듣고 그 공손앙(公孫鞅)을 죽여 버렸다면 오늘날 이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인데...>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때 그 공손앙(公孫鞅)을 죽이지 못했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처럼 거듭되었던 패전으로 인해서 위(魏)는 점점 쇠퇴해갔으며, 그러자 결국 한(韓)과 함께 제(齊)에 복속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으로 문후(文侯) 이래 지켜왔던 패권도 잃게 되었다. 그리고 혜왕(惠王)은 기원전 319년에 노쇠(老衰)로 사망했다.(82세) 그리고 또, 그 혜왕(惠王)에게는 맹자(孟子)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었다고 해서 잠시 살펴보고 끝을 내면, 맹자(孟子)에서는 그가 양(梁)의 혜왕(惠王)으로 등장하며, 어느 때 맹자(孟子)와 만나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나는 이정도로까지 덕(德)을 베풀고 있는데, 어째서 인재들이 나에게는 모이지 않는 것인가?> 그러자 맹자(孟子)가 <전장(戰場)에서 백 보를 도망간 병사를 오십 보를 도망간 병사가 비웃었다>라는 것을 예로 들면서 <혜왕(惠王)의 덕(德) 또한 그렇게 크게 평가할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五十步百步의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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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릉(馬陵)의 싸움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였던 기원전 341년에, 위(魏)와 제(齊)가 격돌했던 싸움이었고, 결과는 제(齊)가 압승했다. 그리하여 진(晋)의 후계자로서 천하의 패권을 손에 쥐었던 위(魏)는 그 후로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제(齊)는 진(秦)과 함께 대륙을 이분(二分)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전(事前)>

 한(韓)은 계릉(桂陵)의 싸움에서 위(魏)가 패퇴(敗退)하는 것을 보고 제(齊)와 손을 잡았다. 그 후, 제(齊)의 세력을 등에 업었던 한(韓)은 위(魏)와 싸우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위(魏)는 놀랄만한 저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한(韓)은 다섯 번이나 싸워서 다섯 번 모두 다 졌다. 그러자 또 그 역으로 위(魏)는 그 참에 한(韓)을 멸하려고 들었고, 그러자 또 한(韓)은 제(齊)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자 또 제(齊)의 위왕(威王)은 신임하던 손빈(孫臏)을 사장(師將)으로 파견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 손빈(孫臏)은 오히려 전기(田忌)를 추천했다. 그러자 또 그 전기(田忌)를 사장(師將)으로 했던 제군(齊軍)들은 임치(臨淄)를 떠나서 위(魏)로 공격해서 들어갔고, 그러자 또 한(韓)에 머물고 있었던 위군(魏軍)은 당황해서 위(魏)로 급히 돌아갔기 때문에, 한(韓)은 구제되었다.

 <손빈(孫臏)의 계략>

 당시, 위(魏)의 장군이었던 방연(龐涓)은 과거, 손빈(孫臏)과 동문(同門)하면서 함께 병법을 배웠던 사이였다. 그 후에 방연(龐涓)은 위(魏)로 가서 장군이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 손빈(孫臏)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손빈(孫臏)이 위(魏)에 벼슬을 하러 왔을 때마다 누명을 씌워서 또는 책략 등을 써서 그의 양족(兩足)까지 절단했고, 경형<黥刑=墨刑-중국에서 행했던 오(五)형 가운데 하나로, 죄인의 이마나 팔뚝 등에 먹줄로 죄명을 써넣었던 형벌>에까지 처했다. 그러던 중, 제(齊)에서 사자(使者)가 왔는데, 그러자 손빈(孫臏)은 계략을 사용해서 비밀리에 위(魏)를 탈출했다. 그리고는 제(齊)에서 전기(田忌)의 수하(手下) 군사(軍師)가 되었다. 그 후, 손빈(孫臏)은 위(魏)에 침공해 들어가 있던 제군(齊軍)에게 10만개의 아궁이(밥을 지을 수 있는 시설물)를 만들라고 명하고는 군(軍)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5만개를, 그 다음날은 2만개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계속해서 퇴각했다. 그러자 그때 제군(齊軍)을 추격하고 있었던 방연(龐涓)은 제군(齊軍)들이 머물렀던 야영지에 남아있던 그 아궁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제군(齊軍)은 겁이 많기 때문에, 우리들이 추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이 두려워서 도망병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마음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러자 방연(龐涓)은 일각(一刻)이라도 빨리 제군(齊軍)을 추격하기 위해서 병사들의 장비를 가볍게 했고, 그런 다음에는 주야(晝夜)겸행(兼行)으로 강행군을 했다. 그랬던 한편, 손빈(孫臏)은 위군(魏軍)의 추격속도를 예측해가면서 그날 저녁때쯤에나 마릉(馬陵)에 도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 그 주위에 있던 큰 나무 하나를 골라서 그 나무의 껍질을 적당히 벗긴 후에, 그 바탕에다 하얗게 칠을 하고는, 그 위에다 또 다음과 같은 글을 크게 썼다. <방연(龐涓)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는 또 그 주위에다 복병을 배치하고는 <어둠 속에서 불이 보이면, 그 불이 보이는 곳으로 일제히 화살을 쏘아라!>라고 명령을 해두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곳에 도착했던 위군(魏軍)은 그 글을 써두었던 나무를 발견하고는 방연(龐涓)에게 보고를 했다. 그러자 방연(龐涓)이 달려와서 그 글을 읽으려했는데, 그런데 그때는 이미 밤이었기 때문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자 방연(龐涓)이 불을 밝혀서 그 글을 읽으려고 했던 순간, 주위에서 화살이 비처럼 쏘아져왔고, 그러자 위군(魏軍)은 물론, 방연(龐涓)의 몸에도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꽂혔다. 그러자 방연(龐涓)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죽었다. <드디어 애송이가 세상에 이름을 냈구나!> 그러자 위군(魏軍)은 대혼란에 빠져서 패했고, 태자 신(申)은 포로가 되었다.

 <그 후>

 제군(齊軍)의 사령관으로, 전공을 세우고 개선(凱旋)했던 전기(田忌)에게 당시, 재상이었던 추기(鄒忌)가 모함을 했고, 그러자 위왕(威王)의 의심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던 전기(田忌)는 초(楚)로 망명했다. 그리고 명장 방연(龐涓)을 잃었던 위(魏)에서는 그 싸움을 고비로 국력이 쇠하여져갔으며, 그러자 또 진(秦)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는 판단으로, 위(魏)의 혜왕(惠王)은 한(韓)의 소후(昭侯)와 함께 제(齊)에 귀속해서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또 손빈(孫臏)도 그 싸움으로 복수를 끝냈고, 그 후에는 소식이 단절되었던 것과 동시에 역사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또 일설에 따르면, 그 후에 병법서를 썼다고도 한다. 

 

 





 


 <戰國時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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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4)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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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후(文侯-?부터 기원전 396년)는 중국 전국시대 초기 위(魏)의 군주였고(재위는 기원전 445년부터 기원전 396년), 성(姓)은 희(姬), 씨(氏)는 위(魏), 휘(諱)는 도(都)였다. 그리고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사(斯-斯其)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이극(李克), 오기(吳起), 악양(樂羊), 서문표(西門豹) 등,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서 위(魏)를 전국시대(戰國時代) 최고의 패국(覇國)으로 부상시켰다. 그리고 그는 위구(魏駒-魏桓子)의 손자였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불상(不詳)이다. 그리고 아들에 태자 격(擊-武侯)이 있었고, 나중에 재상의 부인이 되었던 공숙부인(公叔夫人-공주)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원조(遠祖)는 필(畢-陝西省 咸陽市)에 봉해졌던 주(周) 희창(姬昌-文王)의 서자(庶子)였던 필공고(畢公高)였다.

 참고: 畢公高는 서주(西周) 초기의 중신으로, 왕족이었다. 그리고 성(姓)은 희(姬)였고, 이름은 고(高)였으며, 주(周)의 무왕(武王)과 성왕(成王) 그리고 강왕(康王) 3대를 섬겼다. 그리고 그 필(畢)에 봉지(封地)를 내렸던 사람은 무왕(武王)이었고, 그래서 그때부터 필공(畢公)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필공(畢公)의 후예로 진(晋)의 대부였던 필만(畢萬)이 있었으며,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시조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 필(畢)이 언제 어떻게 멸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필공(畢公)의 먼 후예였던 필만(畢萬)이 진(晋)의 헌공(獻公-6-17참조)을 모셨고, 그런 다음에 위(魏)씨(氏)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필만(畢萬)의 손자 위주(魏犨-魏武子-6-19참조)의 대(代)가 되었을 때, 문공(文公)의 방랑에 함께 했던 공적으로 대부(大夫)가 되었다. 그리고 그 위무자(魏武子)의 현손(玄孫)으로, 문후(文侯)의 조부(祖父)였던 위환자(魏桓子)의 대(代)에, 진(晋)의 최고유력 씨족(氏族)이 되어있었던 지(知)씨(氏)가 멸해졌고, 그리하여 진(晋)은 위(魏)와 조(趙) 그리고 한(韓) 그 삼진(三晋)으로 분열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도 명목상으로는 진(晋)의 신하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것이 기원전 403년에, 문후(文侯)도 조(趙)씨(氏), 한(韓)씨(氏)들과 함께 주(周)의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정식으로 제후(諸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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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극(李克-?부터 기원전 395년)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정치가였고, 문후(文侯)를 도와서 위(魏)를 전국(戰國) 초기 패국(覇國)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회(李悝)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치세(治世) 시절에 곡물(穀物)의 가격조정을 시행해서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고취(鼓吹)시켰으며, 성문법을 제정해서 부국강병을 달성시켰다. 그래서 그의 정책은 나중에 상앙(商鞅)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그리고 또 문후(文侯)가 오기(吳起)를 등용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그러자 그는 <오기(吳起)는 욕심이 많은 자이지만, 그러나 용병(用兵)만큼은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고, 그러자 문후(文侯)는 오기(吳起)를 등용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법경(法經) 6편(編)과 이자(李子)32편을 저술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 법경(法經)이 실재했던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법경(法經)에 대한 소개임.

 참고: 法經은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이회(李悝)가 지었던 법률 책으로, 도법(盜法)·적법(賊法)·수법(囚法)·포법(捕法)·잡법(雜法)·구법(具法)으로 분류하였으며, 구법은 다시 오형(五刑)·십악(十惡)·팔의(八議)로 나누어서, 죄의 실제와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설명하였던 것이었다.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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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양(樂羊-생몰불명)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무장이었고, 문후(文侯)의 명령으로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해서 멸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한비자(韓非子)에 의하면 그가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하려고 했을 때쯤에 자신의 아들이 그 중산국(中山國)에 인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공격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중산국(中山國)은 그 아들을 죽였고, 그런 다음에는 그 시체를 삶아서(야채도 함께 넣어서 스프로 만들었다고 함) 요리를 해서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러자 그는 태연하게 그것을 맛봤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또 자신의 결의가 그만큼이라는 것을 그 적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며, 그런 다음에 그 중산국(中山國)을 멸망시켰다. 그 후, 문후(文侯)가 그 소리를 듣고 그의 충성에 감동했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 그를 비방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는데, 그러자 그는 문후(文侯)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 아들로 만든 요리도 먹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의 것은 더 말을 해서 무얼 하겠습니까?> 그 후, 악양(樂羊)은 중산국(中山國)에서도 제일 컸던 영수(靈壽)란 곳을 포상으로 받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식으로 만든 요리를 먹고 전공을 올렸다는 이유로, 오히려 문후(文侯)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그와 그의 자손들은 그 영수(靈壽)에서만 살았으며, 악양(樂羊)은 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명장(名將)이었던 악의(樂穀)의 선조로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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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문표(西門豹-생몰불명)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복상(卜商=子夏)의 문하에서 정치를 배웠다. 그리고 또, 같은 제자였던 이극(李克)과 함께 위(魏) 문후(文侯)를 섬겼으며, 당시 토지가 황폐해 있었다던 업(鄴)의 지사(知事)에 기용되었다. 그러자 그는 먼저 그곳의 농민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애로사항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또 당시, 그곳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미신(迷信)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또 해마다 그 근처 강에서 살고 있다던 신(神-河伯)에게 어린 처녀와 아주 많은 재보(財寶)를, 그것도 무녀(巫女)와 삼노(三老)라고 불리던 장노(長老)들과 그 의식을 관리하던 관리(官吏)들에게 바쳐서, 그것을 그 강에 빠뜨리는 인신공양(人身御供)이란 것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거기다 또 그렇게 모았던 재보(財寶)란 것이 아주 엄청난 양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또 그 즈음에는 어린 딸을 가졌던 집들이 멀리 도망을 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들이 경작하고 있던 논밭들은 그대로 방치되어서 황폐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서문표(西門豹)가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고, 그래서 또 백성들은 그 의식(儀式)에 대한 하소연을 했지만, 그러나 그때, 서문표(西門豹)는 그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그곳에 모였던 백성들은 서문표(西門豹) 역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모두들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때, 서문표(西門豹)는 이미 그런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며, 거기다 그곳에는 관개(灌漑) 또한 절실하다고 판단했지만, 그러나 그 강(江)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그 정리부터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의식이 거행되던 날이 왔고, 그러자 그 강(江)가에는 무녀(巫女)들이 모여들었으며, 서문표(西門豹)도 그것을 참관한다는 명목으로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그 행사에 참석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제물(祭物)이 될 처녀가 나타나자 서문표(西門豹)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래도 명색(名色)이 제물인데, 저렇게 못생긴 처녀로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내가 좀 더 고운 처녀를 데려올 것이니 강의 신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는 또 <아, 그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인데, 그러면 또 강의 신이 더욱 노(怒)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그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 강의 신과 친한 사람을 사자(使者)로 보내야겠군!> 그리고는 그 의식을 주관하던 노파(老婆) 무녀를 그 강에 빠뜨렸다. 그런데 조금 기다렸어도 그 노파(老婆)가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그 노파(老婆)가 데리고 왔던 제자 무녀(巫女)들을 그 사자(使者)로 모두 물에 빠뜨렸다.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노파(老婆) 무녀(巫女)를 보내도 소식이 없고, 그 제자 무녀들을 보냈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강의 신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하는 수 없이 저 삼노(三老)들을 보내볼 수밖에 없겠군!> 그런 다음 그 삼노(三老)들도 차례로 물에 빠뜨렸다. 하지만 또 잠시 기다렸어도 그들 역시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엄청난 재보(財寶)를 거둬들였던 관리들 차례인가?> 그러자 그 관리들이 그 앞으로 달려와서 엎드려 절하면서 이렇게 사정을 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하고! 그런 다음 그들은 이마를 땅에 찧어서 이마에서 피가 흘렀는데, 그러자 그는 잠시 더 그런 모습을 지켜본 후에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물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 그럭저럭 물의 신도 만족을 한 모양이군! 그러니 우리도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그러자 그 후로는 그런 의식이 사라졌다고 하며, 그곳에서 미신도 일절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서문표(西門豹)는 업(鄴) 부근 촌들의 장노(長老)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황하(黃河)와 장하(漳河)에서 물을 끌어들인 후, 업(鄴)의 논밭으로 관개(灌漑)하는 대사업을 실시했다. 그러자 업(鄴)의 백성들은 <지금 이대로도 그럭저럭 살만한데, 뭐 하러 저렇게 힘든 일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에 대해서 서문표(西門豹)는 <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이해시킬 마음이 전혀 없소! 왜냐하면, 그 결과로 당신들의 자손들이 혜택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요! 그러므로 또, 100년 정도 지나면 분명히 그때의 사람들은 이 일을 잘 한 일이라고 평가를 할 것이요!>라고 말을 하고는 그 공사를 계속했다. 그러자 그 후, 업(鄴)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위(魏)는 강국(强國)이 되었으며, 이어서 열후(列侯)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자 그 후, 업(鄴)의 사람들은 풍족하게 살았으며, 그리고 또 아주 나중이었던 한(漢)왕조가 그 수로(水路)를 변경하려고 했을 때, 그곳의 나이든 노인들은 그것을 반대했으며, 그것으로 서문표(西門豹)의 예언은 이루어졌고,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또 그를 기리는 사당(祠堂)은 그 장하(漳河) 주변에 다수(多數) 분포해 있다고 하며, 삼국시대 때, 조조(曹操)는 그 서문표(西門豹)의 사당 부근 서쪽에 자신의 묘를 만들어달라고 유언까지 남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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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하(子夏-기원전 507년?부터 기원전 420년)는 공자(孔子)의 문인(門人)으로, 성(姓)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字)는 자하(子夏)였고, 위(偉-河南省)나라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그는 진(晋)의 온국(溫國-河南省 焦作市)출신이었다고도 했는데, 그는 학문을 좋아해서 공문(孔門) 십철(十哲) 중 한사람이 되었다.

 참고: 공문십철(孔門十哲)은 四科十哲이라고도 하며, 공자(孔子)의 제자들 가운데, 특히 학덕이 뛰어났던 열 명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을 열거하면, 먼저 덕행(德行)에서 안연 또는 안회(顏淵=顔回)와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 또는 염옹(仲弓=冉雍)이 있었고, 언어(言語) 즉, 변설(辯舌)에서 재아(宰我)와 자공(子貢)이 있었으며, 정사(政事)에는 염유 또는 자유(冉有=子有)와 계로 또는 자로(季路=子路)가 있었고, 문학(文學) 즉, 학문(學文)에서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있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소개는 일단 생략하며, 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나친 것은 못 미친 것보다 못하다>라는 것으로, 불급(不及)으로 평가된 인물이었다.(論語의 先進편) 그리고 위(魏)의 문후(文侯)에게 초대되어서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었으며,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 서문표(西門豹) 등의 제자를 배출(輩出)했다. 그리고 또 예기(禮記)에 의하면, 자신의 자식이 죽었을 때, 그는 너무나도 슬퍼했던 나머지 실명(失明)까지 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동문(同門) 증자(曾子)가 그를 찾아갔는데,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왜, 나에게만 그런 불행한 일이 찾아오는가?!> 그러자 증자(曾子)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처자식을 돌보지 않아왔던 것은 바로 너였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하고는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 그 모든 것이 다 나의 잘못이었네!> 그리고 그의 학풍은 나중에 순자(荀子)에게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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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산국(中山國)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중남부(中南部)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중산(中山)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 전에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이래(以來) 중원(中原) 북부에 있었던 백적(白狄)이 건국했던 도시국가로, 선우(鮮虞)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당초에는 태행산맥(太行山脈-현재 중국의 북부에 위치해있는 산맥으로, 山西省, 河南省, 河北省 3省의 경계부분에 위치해 있음) 서쪽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414년에 무공(武公=中山武公. 재위 기원전 414년부터 기원전 407년까지. 中山国의 第2代 公이었음)이 백성들을 이끌고 그 태행산맥을 넘었으며, 그리하여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중부에 그 중산국(中山國)을 건국했다.(하지만 원래의 영토를 완전히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음) 그리고 그 무공(武公)은 주(周)나라 정왕(定王)의 손자였고, 그 때문에 이민족이었으면서도 주(周)왕조의 성(姓)인 희(姬)를 사용했다. 그리고 또, 그 나라는 당초부터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기원전 407년에는 위(魏) 악양(樂羊)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까지 함락 당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산(大山)이란 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나 그로부터 20년간이나 환공(桓公)의 지휘로 항전을 계속해서 결국 나라를 부흥시켰다. 그 후, 중산국(中山國)은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해서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또 기원전 296년에 조(趙)의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또 그 나라는 중원(中原)의 제국(諸國)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나라였고, 유목(遊牧)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남아있는 사료(史料)는 미흡하며, 그 때문에 또 <신비(神秘)의 왕국(王國)>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또 그랬던 것이 197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에 걸쳐서 석가장(石家莊) 부근의 평산(平山)현(縣)에서 그 나라의 도성(都城)이었던 영수(靈壽)고성(古城)이 발굴되었고, 그곳에서 금과 은, 동, 옥 그리고 도기(陶器) 등의 호화(豪華)화려(華麗)한 문물(文物)들과 함께, 유목적인 문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아주 호사(豪奢)스러운 천막(天幕)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리고 또 특히, 그 유물들 중에서는, 그 당시의 술(酒)이 보존상태가 아주 좋은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한때 그것이 화제(話題)가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중산국(中山國)의 역대 왕들을 소개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文公(?年-紀元前415年)
 武公(紀元前414年-紀元前406年)
 桓公(紀元前388年-紀元前340年)
 成公(紀元前340年-紀元前328年)
 王(黌) (紀元前327年-紀元前313年)
 王(次/虫) (紀元前312年-紀元前299年)
 王尚 (紀元前298年-紀元前296年)







  <戰國時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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