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8)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
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앞에서 趙
氏 계속)

 ♣ 조삭(趙朔-?부터 기원전 598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삭(朔), 시(諡)는 장(莊), 그래서 조장자(趙莊子)로도 불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조순(趙盾)은 생전에 은혜를 입었던 조희(趙姬)의 아들 조괄(趙括)에게 조가(趙家)의 종주(宗主)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 조괄(趙括)과 그의 형 조동(趙同)은 인덕(人德)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족(一族)의 흥망을 걸 수 있었던 사람으로, 그래서 또 평소 덕(德)이 많았던 조삭(趙朔)에게로 관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당주(當主)의 자리에 올랐던 조삭(趙朔)은 그 뒤에 경(卿)의 지위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597년 <필(怭)의 싸움> 때에는 하군(下軍)의 장이 되어서 종군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하군(下軍)의 좌(佐)였던 난서(欒書)가 전쟁의 무가치함을 주장하면서 철병(撤兵)론을 들고 나오자 그도 찬성했으며, 그러자 또 평소 그의 인기(人氣)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고, 그리고 또 숙부이기도 했던 위, 조동과 조괄 형제가 전쟁계속을 주장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도 전쟁에 참가를 했다. 하지만 또 초군(楚軍)의 맹공을 받고 중군(中軍)은 거의 붕괴되었으며, 하군(下軍)도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다. 그러자 그 후, 진(晋) 국내에서는 그 조(趙)가(家)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그러자 또 그 상황을 우려했던 한궐(韓厥-춘추시대 晋의 정치가, 장군)이 조삭(趙朔)에게 망명할 것을 권하기도 했는데,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자네가 우리 조가(趙家)의 제사(祭祀)를 지켜주기만 한다면, 나는 아무런 여한이 없네!> 그리하여 기원전 598년, 사구(司寇-六卿 중 하나)였던 도안가(屠岸賈 또는 도안고라고 쓴 곳도 많으므로, 참고바람)가, 일찍이 영공(靈公)을 죽였던 조천(趙穿)의 죄를 조(趙)씨(氏) 일족(一族)에게 물어서 전부 처형했다. 하지만 당시 태아(胎兒)였던 조무(趙武)는 다행히 그 화를 면했고, 그러자 그 후에 도안가(屠岸賈)에게 복수를 했던 한편, 조가(趙家)를 부흥시켜서 진(晋)의 재상자리에까지 올랐다.

 ♠ 조무(趙武-기원전 598년부터 기원전 541년 12월 7일)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무너졌던 조(趙)씨(氏)日) 가문을 다시 일으켰던 사람이었으며, 초(楚)와 화목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소개가 되었지만, 일족이 멸망했을 때 그의 어머니 조장희(趙莊姬)는 공실(公室)에서 강가(降嫁-신하 등, 낮은 직급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命)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궁(宮)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그녀는 임신을 하고 있었다.

 참고: 다른 것에서도 비슷하겠지만, 예를 들면, 조장희의 희(姬)는 晋室의 성(姓)이며, 그러나 趙氏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趙를 사용했고, 또 남편의 시(諡)가 장(莊)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아무튼, 그렇게 해서 탄생한 조무(趙武)는 도안가(屠岸賈)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당시, 조삭(趙朔)의 식객이었던 공손저구(公孫杵臼)를 희생양으로, 그리고 조삭(趙朔)의 친구였던 정영(程嬰)의 임기응변, 그리고 또 조삭(趙朔)으로부터 조가(趙家)재흥(再興)의 부탁을 받았던 한궐(韓厥)의 지원을 받아서 산속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그 후, 성인이 되었던 조무(趙武)는 한궐(韓厥)의 주선으로 당시, 병으로 누워있던 경공(景公)을 배알했고, 그 자리에서 한궐(韓厥)이 경공(景公)을 설득해서 조가(趙家)의 부흥을 허락받았다.

 참고: 경공(景公-?부터 기원전 581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在位:기원전 600년부터 기원전 581년) 성(姓)은 희(姬), 휘(諱)는 거(據), 성공(成公)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말년에 불치병을 얻어서 죽었는데, 그래서 그때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이란 뜻의 <병고황(病膏肓)에 들었다>라는 고사(故事)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자 그 후, 조무(趙武)는 한궐(韓厥)과 난서(欒書)의 도움을 받아서 도안가(屠岸賈)를 척살했으며, 그것으로 가문의 원수를 갚았다. 그러자 한궐(韓厥)과 난서(欒書) 그리고 지앵(智罃)과 사섭(士燮) 그리고 중행경(中行庚)으로부터 축사(祝辭)를 받았지만, 그러나 그 직후에 정영(程嬰)이 <지하에서 계신 조장자(趙荘子-趙朔)와 공손저구(公孫杵臼) 님께 이 사실을 고하고 싶다!>라고 말을 하고 자해(自害)하고 호읍(號泣)했다. 그 다음 기원전 573년, 조무(趙武)는 도공(悼公)으로부터 신군(新軍)의 장에 임명되었으며, 그것으로 비로소 경(卿)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기원전 560년에는 한궐(韓厥)의 아들이었던 한기(韓起)의 추거(推擧)를 받아서 상군(上軍)의 장으로 승격했지만, 그러나 과거 한번 멸족의 위기를 겪었던 교훈을 생각해서 교만하지 않았고, 덕을 베풀었으며, 항시 온화한 풍모를 유지했으며, 스스로 한발 물러나는 자세로 살았다.

 참고: 도공(悼公-기원전 587년부터 기원전 559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 재위는 기원전 573년부터 기원전 559년까지였다. 그리고 양공(襄公)의 증손(曾孫)이었으며, 아버지는 혜백담(惠伯談)이었다. 그리고 즉위하기 전에는 주(周)의 왕도(王都)에서 학문을 쌓았기 때문에, 그래서 주자(周子) 또는 손주(孫周)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난서(欒書)와 순언(荀偃)의 주도에 의해서 여공(厲公-亂政으로, 자객 程滑에게 죽음)이 죽자, 진(晋)으로 와서 군주가 되었다. 그 후, 현정(賢政)을 펼쳐서 나라를 잘 이끌어갔지만,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리하여 진(晋) 최후의 명군(名君)으로 칭송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시대에 왕실의 힘은 오히려 약해져서 귀족들의 힘은 증대되었다.

 아무튼 또 그 후, 기원전 548년에는 정경(正卿), 중군(中軍)의 장이 되었으며, 차경(次卿)의 한기(韓起)와 상담역이었던 숙향(叔向)과 함께, 당시 남쪽의 대국이었던 초(楚)와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46년 7월에 미병(弭兵)에서 회맹을 개최했고, 그 결과 초(楚)와 제(齊) 그리고 정(鄭), 송(宋) 등의 주변제국과의 강화를 실현시켰으며, 그것으로 진(晋)의 명재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기원전 541년이 되자 그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그러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조무(趙武)는 동년(同年) 12월 1일에 선조(先祖)들의 합제(合祭)를 치렀으며, 그리고 그 직후였던 12월 7일에 사망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향년 57세였다. 그러자 시(諡)로 헌문(獻文)이 내려졌으며, 그래서 조문자(趙文子)로도 불렸다.

 ♠ 조성(趙成-생몰불상)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성(成), 시(諡)는 경(景)이었다. 그래서 조경자(趙景子) 또는 조경숙(趙景叔)으로도 불렸고, 조무(趙武)의 아들, 조앙(趙鞅)의 아버지였다. 그는 기원전 541년에 부(父) 조무(趙武)가 죽자 그 뒤를 이어서 당주(當主)가 되었지만, 그러나 다른 조(趙)씨(氏)들에 비해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직급은 차경(次卿) 중군(中軍)의 좌(佐)까지 올랐기 때문에, 그래서 능력은 있었던 인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기원전 533년에는 진(晋)과 주(周)의 대부(大夫)들에 의한 영지(領地) 싸움이 일어나려고 했을 때, 그가 들어가서 중개를 했으며, 결국 화해시켰던 등, 나름대로의 확약도 펼쳤던 인물이었다.

 ♠ 조앙(趙鞅-?부터 기원전 463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시(諡)는 간(簡)으로 해서 조간자(趙簡子)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조성(趙成)의 아들이었으며,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아버지였다. 조앙(趙鞅)은 6대째의 당주였고, 처음에는 직급도 무슨 좌(佐)에 머무르는 등,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떤 때, 그 진(晋)에서 제일 현자(賢者)라고 이름이 높았던 숙향(叔向)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노(魯)의 재상 중손멸(仲孫蔑)은 자신을 위해서 싸우다 죽을 수도 있을 부하가 다섯 명이나 있다는데, 저에게는 어째서 그런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것입니까?!> 그러자 숙향(叔向)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것은 너에게 그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주마!(그 역할을 맡겠다는 의미)>

 참고: 양설 힐(羊舌肸-생몰불상)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양설(羊舌), 휘(諱)는 힐(肸), 자(字)는 숙향(叔向), 양설 직(羊舌職)의 아들이었고, 동모형(同母兄)에 양설 적(羊舌赤-伯華)이 있었으며, 이모제(異母弟)에 양설 호(羊舌虎-叔羆)가 있었다. 그리고 평공(平公)의 스승을 맡았고, 해박(該博)한 인물로 알려졌던 현인(賢人)이었다.

 참고: 평공(平公-?부터 기원전 532년. 재위:기원전 559년부터 기원전 532년)은 도공(悼公)의 아들이었고, 위의 숙향(叔向) 등, 현신(賢臣)들의 보좌를 받아서 패권을 유지했으며, 별 큰 허물없이 진(晋)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 도공(悼公)이 태자 표(彪-平公)의 성인식을 마치고 대상(臺上)에 올라서 도시(首都)를 내려다보다가 <아아, 즐거운 곳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여제(汝齊)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저곳이 아무리 즐거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덕의(德義)를 행하는 즐거움보다는 못합니다> 그러자 또 도공(悼公)이 <무엇을 덕의라고 말하는 것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또 여제(汝齊)가 <제후들의 행위를 보고, 선사(善事)를 행하고, 악사(惡事)를 경계하는 것, 그것이 덕의(德義)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또 도공(悼公)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덕의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요?> 그러자 또 여제(汝齊)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답을 했다. <양설 힐(羊舌肸)이 제국(諸國)의 역사들을 전부다 꿰고 있습니다> 그러자 도공(悼公)은 숙향(叔向)을 태자의 스승에 임명했다. 하지만 그 후, 도공(悼公)은 요절했고, 그 자리를 평공(平公)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는 슬픈 노래를 좋아했고, 여색(女色)을 밝히는 등, 군주로서의 자질에 결점을 드러냈다. 그러자 숙향(叔向)이 그를 지도해서 진(晋)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으며, 그러자 그 후로도 평공(平公)은 큰 허물없이 정치를 펼쳤다. 그러자 관인(官人) 반수(半數)가 숙향(叔向)의 덕을 기렸으며, 특히 초(楚)의 영윤(令尹)이었던 자목(子木)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진(晋)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는 바로 숙향(叔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초(楚)에는 그런 인물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초(楚)는 진(晋)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일화로, 어느 때 정경(正卿)이었던 한기(韓起)가 자신의 곤궁(困窮)함을 탄식하자 숙향(叔向)은 그것을 축하했다. 그러자 또 한기(韓起)가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러자 또 숙향(叔向)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난(欒)씨와 극(郤)씨는 부유하게 살았지만 거만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한을 사서 결국에는 망하고 말았소! 그리고 당신은 현재 가난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덕의(德義)를 펼칠 수가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축하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자 또 한기(韓起)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아, 내가 그것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깨우쳐주신데 가슴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40년에 제(齊)의 안영(晏嬰)이 사자로 진(晋)에 왔을 때,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런데 그때 안영(晏嬰)이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제(齊)의 정권은 모두 전(田)씨(氏)의 손아귀로 들어갔소!> 그러자 숙향(叔向)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 진(晋)도 말세(末世)이긴 마찬가지요! 진(晋)의 정치는 모두 경(卿)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기원전 536년에 정(鄭)의 자산(子産)이 형정(形鼎-成文法)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숙향(叔向)은 <정(鄭)은 이제 곧 망할 것이다! 무릇, 정치란 사람을 보고 행하는 것이거늘, 그러나 법률이 만들어진다면 그때부터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법(法)만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예언을 했다. 그렇듯, 숙향(叔向)은 비록 경(卿)의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평공(平公)의 측근에서 상담역을 맡으면서 진(晋)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조앙(趙鞅)은 그렇게 숙향(叔向)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520년에 주(周)의 경왕(景王)이 사냥을 하다가 심장발작을 일으켜서 사망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러자 태자 맹(猛-나중의 悼王)과 왕의 서자(庶子)였고, 서형(庶兄)이었던 왕자 조(朝) 사이에 후계를 타투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주(周)의 수도는 잿더미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조앙(趙鞅)은 태자 맹(猛)의 요청으로 진군(晋軍)을 이끌고 왕자 조(朝)의 군대를 쳤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516년에 태자 맹(猛)이 즉위했고, 조앙(趙鞅) 등은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기원전 514년에 조앙(趙鞅)은 당시, 정경(正卿)에다 중군(中軍)의 장이었던 위서(魏舒-晋의 무장, 정치가)와 다른 육경(六卿)의 꾐에 빠져서 공족(公族) 양설(羊舌-叔向의 아들 家系) 씨(氏)와 기(祁-祁奚・祁午의 子의 가계) 씨(氏)를 멸해버렸고, 그것으로 그 땅에 자식들을 대부(大夫)로 배치시켜서 세력을 공고히 했던 등, 조화를 목적으로 했던 자신의 조부(祖父) 조무(趙武)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513년에, 그는 중행인(中行寅)과 함께 범선자(范宣子-士匄)가 만들었던 법을 솥(鼎)에 새겨 넣었던 형정(形鼎)을 공개했으며, 그러자 또 그것이 진(晋)에서는 최초의 성문법이 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01년에는 노(魯)에서 많은 악명(惡名)을 떨치고 진(晋)으로 망명해왔던 양호(陽虎)를 전 가신(家臣)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자신의 부하로 삼았는데, 그러자 양호(陽虎)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나중에 조앙(趙鞅)을 위해서 분투했다.

 참고: 양호(陽虎)는 노(魯)의 정치가였고, 한때 노(魯)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505년에는 공자(孔子)를 초빙해서 자기 아래 벼슬시키려고 했고, 그러자 또 공자(孔子)도 그럴 의향이 있었지만, 그러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후, 권력투쟁에서 져서 노(魯)에서 추방되었으며, 진(晋)으로 가서 조앙(趙鞅)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앙(趙鞅)을 위해서 위(衛) 공실(公室)에 개입하면서 암약(暗躍)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소식이 두절되었다.

 아무튼 또 그 후의 어느 때, 조앙(趙鞅)은 고포자경(姑布子卿)이라는 관상의 명인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자기 자식들의 관상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고포자경(姑布子卿)이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에 장군에 버금갈 관상을 가진 자식은 없습니다> 그러자 조앙(趙鞅)은 낙담했지만, 그러나 사실, 조앙(趙鞅)은 그때 자신의 막내는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막내도 보여주었는데, 그러자 고포자경(姑布子卿)은 그 막내를 보았던 순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바로 이 아들이 장군에 버금갈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바로 조무휼(趙無恤)이었고, 그리고 또 조앙(趙鞅)은 당초 장자였던 백노(伯魯)에게 후계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조무휼(趙無恤)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때, 조앙(趙鞅)은 큰 병에 걸려서 꼬박 이틀하고도 반나절을 수면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그러자 또 당시 명의였던 편작(扁鵲)이 그의 집으로 가서 진찰을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그는 꿈을 꾸었다고 했으며, 그 꿈속에서 그는 천제(天帝)와 함께 백신(百神)들과 놀았다고 한다.

 참고: 편작(扁鵲-생몰불상)은, 중국 전국시대의 의사로, 특히 한(漢) 이전의 반(半) 전설적인 명의로 알려져 있으며, 성(姓)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었고,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상군(長桑君)으로부터 의술을 배운 후에 환자의 오장을 투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행동과 인격, 진료, 치료에 관한 것은 한비자(韓非子)와 사기(史記) 등에 일화로 남아있으며, 그 후의 한방(漢方)의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를 편작(扁鵲) 또는 기파편작(耆婆扁鵲)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이제는 명의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의하면 <그는 발해(渤海)군(郡), 정(鄭)의 사람이라고 했고, 성(姓)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고대의 역사가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이론을 제기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양자법언(揚子法言)>이나 <회남자(淮南子)> 등에서는 <편작(扁鵲)은 노(盧)의 사람>이라고 했고, 청(淸) 대의 사마정(司馬貞)과 서광(徐廣)은 <하북성(河北省)의 임구(任丘)현 사람>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가 전적(典籍)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은 전국시대 말의 한비자(韓非子-紀元前295年에서 紀元前233年)에서였지만, 그러나 또 사마천(司馬遷)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의하면, 그가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것은 기원전 655년으로, 곽(郭)이라는 소국(小國)이 멸망했을 때라고 했고, 그 활동이 끝났던 것은 기원전 350년, 진(秦)이 함양(咸陽)으로 천도했을 때였다고 해서, 그것을 서술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약 300년이나 살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그의 행동범위도 아주 광대했으며, 그 햇수도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행했던 일이었으며, 그래서 또 어떤 특정의 학파(學派)에 의한 활동이었지 않았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랬던 그가 앞의 그 조앙(趙鞅)의 진찰도 했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상황이 진(秦)의 목공(穆公)의 상태와 흡사했었고, 그래서 또 그때 목공(穆公) 역시도 천제(天帝)를 만난 꿈을 꾸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편작(扁鵲)은 조앙(趙鞅)의 상태를 보고나서 3일 이내에 깨어날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그러자 조앙(趙鞅)은 편작(扁鵲)에게 전지(田地)4만(萬)묘(畝 또는 무. 그리고 1묘=30평이므로 ∴ 120만평)를 내렸다고 한다.

 아무튼, 조앙(趙鞅)은 그 꿈속에서 두 마리의 곰을 죽였는데, 그러자 천제(天帝)가 기뻐했으며, 그래서 그에게 두 개의 상자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천제(天帝) 옆에는 1명의 남자아이가 서 있었는데, 그러자 또 천제(天帝)는 적(狄-오랑캐)의 개 한 마리를 그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아이가 장년(壯年)이 되면 돌려주도록 하라> 하지만 조앙(趙鞅)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또 천제(天帝)가 한 남자를 자신에게 보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게 해주었다. <첫째, 진(晋) 내에 있는 경(卿)들 중에서 두 집을 토벌할 것. 그리고 둘째는 조앙(趙鞅)의 아들이 적(狄)의 땅에서 두 나라와 싸워서 이기게 됨. 그리고 천제(天帝) 옆에 서있던 아이는 바로 당신(趙鞅)의 아들이며, 적(狄)의 개는 북방(北方)의 대(代)라는 지역을 통치할 군주, 그러나 나중에 당신의 아들이 그곳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조앙(趙鞅)과 조무휼(趙無恤)의 장래를 예견했던 것이었고, 그리고 또 그 두 집을 토벌하라고 했던 것은 중행(中行)씨(氏-荀氏 本家)와 범(范)씨(氏-士氏 分家)를 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조무휼(趙無恤)이 적(狄)에서 두 나라와 싸워서 이기게 될 것이라고 했던 것은 조무휼(趙無恤)이 대(代)를 공격해서 멸한 후 진(晋)의 경(卿) 중 하나였던 지(知)씨(氏-荀氏 分家)를 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진(晋)에서도 그때까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육경(六卿)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으며, 그러자 조앙(趙鞅)은 중행(中行)가(家)의 당주였던 중행인(中行寅)과 중행인(中行寅)의 처가였던 사(士)가(家)의 당주 사길사(士吉射-范吉射)와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晋) 공실(公室)을 명목상의 후견인으로 하고, 조가(趙家), 위가(魏家-魏侈), 지가(智家-智轢), 한가(韓家-韓不信) 그 4가(家)가 합동해서 그 두 가문을 멸했으며, 그리하여 그때부터 진(晋)에서는 제후(諸侯)에 필적할만한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그 네 가문이 대두(擡頭)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한편, 공자(孔子)는 그 일과 함께 상기(上記)의 법을 공개했던 일 등에 반감을 품고는 자신의 저서 춘추(春秋)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조앙(趙鞅), 진양(晋陽)에서 모반(謀反)하다> 아무튼 그 후, 조앙(趙鞅)은 조무휼(趙無恤)에게 자신의 뒤를 맡기고 죽었다. 그러자 그에게 시(諡)로 간(簡)이 내려졌으며, 그 후로 조간자(趙簡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 조무휼(趙無恤-?부터 기원전 425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무휼(無恤), 시(諡)는 양(襄), 그래서 조양자(趙襄子)로도 불렸으며, 조앙(趙鞅)의 말자(末子)였다. 그리고 고포자경(姑布子卿)으로부터 대성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을 후에 조앙(趙鞅)의 후계자로 점 찍혀졌지만, 그러나 그때 그의 어머니는 적족(翟族=)출신으로, 신분도 낮았던 데다가 그는 말자(末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은 곧 잊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조앙(趙鞅)이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내가 보물(符) 하나를 상산(常山)의 정상에 숨겨놓았다. 그것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참고: 상산(常山)은 항산(恒山)을 의미하며, 중국의 도교(道敎) 오악(五嶽) 중 하나로, 북악(北岳) 즉, 북쪽에 있는 산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에 있으며, 최고(最高)표고(標高)는 2,016m이다. 그리고 그 산은 중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고로 높은 산이며,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장과로(張果老)가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참고로, 오악(五嶽)은 다음과 같다. 北岳 恒山 / 西岳 華山 / 中岳 嵩山 / 東岳 泰山 / 南岳 衡山

 아무튼,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자식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조무휼(趙無恤)만 다시 돌아와서 그것을 찾았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조앙(趙鞅)이 그것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 산의 정상에 오르니 그 아래에 대(代)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러자 저는 그것을 보고 내가 저곳을 가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던 조앙(趙鞅)은 자신의 후계자로 조무휼(趙無恤)을 결정했다. 그러자 장형(長兄)이었던 백노(伯魯)는 조앙(趙鞅)의 결정에 따랐으며, 그 후로도 조무휼(趙無恤)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보좌했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은 어렸을 때부터 잘 따랐던 백노(伯魯)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에 백노(伯魯)는 병이 나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앙(趙鞅)마저 죽어버렸고, 그러자 조앙(趙鞅)의 뒤를 이었던 조무휼(趙無恤)은 상복(喪服)을 입은 채로 대(代)의 왕<당시, 조무휼의 매형(妹兄=姊兄)>을 위한 연회를 열고는 그를 초대했다. 그러자 대왕(代王)이 그 연회에 참석을 했는데, 그러자 조무휼(趙無恤)은 그들을 토벌하고는 그 대(代)를 찬탈(簒奪)해서 손에 넣었다. 그러자 또 자기 남편이 조무휼(趙無恤)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의 누나는 조무휼(趙無恤)을 실컷 매도(罵倒)하고는 자살을 해버렸다. 그러자 그 후, 조무휼(趙無恤)은 그 땅에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장형(長兄) 백노(伯魯)의 아들 조주(趙周-成君)에게 맡겨서 다스리게 했고, 그것으로 백노(伯魯)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 그리고 그 후, 진(晋)의 육경(六卿) 중에서 최대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지(智)씨(氏)의 당주 지요(智瑤-智伯・智襄子)가 위(魏)씨(氏)의 당주 위구(魏駒-魏桓子)와 한(韓)씨(氏)의 당주 한호(韓虎-韓康子)의 세력을 인솔하고는 조무휼(趙無恤)의 본거지였던 진양(晋陽)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조무휼(趙無恤)은 한때 지요(智瑤)의 수공(水攻-강물을 막아서 고립시키는 것)에 낙성(落城)의 위기까지 겪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때 조무휼(趙無恤)은 위구(魏駒)와 한호(韓虎)에게 <지요(智瑤)는 욕심이 아주 많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죽고나면 그 다음은 바로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요!>라고 말을 하면서 그들을 회유했고, 그러자 그 후에 전세는 대역전되어서 지요(智瑤)는 패사(敗死)했다. 그러자 또 기원전 453년, 그때부터 진(晋)은 사실상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으로 3분(分)되었고, 그리하여 바로 그때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아무튼 그리고 또 덧붙여서, 조무휼(趙無恤)은 그 후에 지요(智瑤)의 구신(舊臣)이었던 예양(豫讓)에게 두 번이나 암살기도를 당했지만,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그러자 예양(豫讓)은 조무휼(趙無恤) 앞에서 자결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하지만 여기서는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는 관계로 소개는 생략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따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또 그 후, 조무휼(趙無恤)은 장자(長子) 백노(伯魯)의 은혜를 다시 갚기 위해서 조주(趙周)를 당주에 추대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조주(趙周)도 빨리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이었던 대군(代君) 조완(趙浣)을 차기 당주로 세웠다. 그리고 기원전 425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그 후에 양(襄)이란 시(諡)가 내려졌다. 하지만 또 그 후, 사기(史記)의 조세가(趙世家)에 의하면, 조무휼(趙無恤)은 공동 씨(空同氏-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戎의 一派)의 딸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런데 조무휼(趙無恤)이 나중에 형(兄)의 손자였던 조완(趙浣-献侯)을 후계자로 삼고는 자기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일족(一族)으로서 군주를 모시도록!> 그러자 그에 불만을 가졌던 그의 아들들은 그가 죽자 조완(趙浣)을 쫓아냈으며, 그 중에서 장형(長兄)을 내세워서 당주로 삼고는 조(趙)를 다스렸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의 유지(遺志)를 받들지 않았던 그 불효행위에 대해서 백성들은 비난했고, 그 결과로 그 5명의 자식들을 모두 처형되었으며, 조완(趙浣)은 다시 당주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조무휼(趙無恤)의 유지(遺志)를 지켜졌다고 한다.





  <趙 氏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