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참고: 직하(稷下)의 학(學)이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에서 부흥했던 제자(諸子=諸子百家)의 학(學)이며, 당시 제(齊)의 수도였던 임(臨)으로 모여들었던 사상가(思想家)와 변사(辯士) 등에 의해서, 그때까지 주장되고 있었던 여러 가지의 제(諸)사상들이 총합되었는데, 그리하여 많은 독자적인 사상(思想)그룹이 형성되었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 직하(稷下)라는 것은, 임(臨)의 직문(稷門) 즉, 임(臨)에 있었던 직문(稷門)이란 문(門)의 근처 어디라는 의미이며, 그리고 순자(荀子-기원전 313년부터 기원전 238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의 사상가로, 유학자였고, 휘(諱)는 황(況), 자(字)는 경(卿)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4세기 말에 조(趙)에서 탄생했으며, 나중에 제(齊)의 양왕(襄王)에게로 가서 벼슬을 했고,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 제주(祭酒=學長)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참언(讒言)을 받아서 제(齊)를 떠났으며, 초(楚)의 재상이었던 춘신군(春申君)에게로 가서 난능(蘭陵-중국 漢代에 현재의 山東省 棗庄의 南東에 위치해있었던 縣의 名이며, 戰國時代에는 楚의 邑이었다)의 영(令)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그곳에서 살았으며, 그리고 후한(後漢)의 순욱(荀彧)과 순유(荀攸)는 그의 후예였고, 성악설(性惡說)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그와 그의 후학(後學)들이 저작했던 것들은 전한(前漢) 말에 정리되어서 <손경신서(孫卿新書)>32편으로 모아졌고, 그것을 또 당(唐)의 양량(楊倞-그러나 양경이라고 쓴 곳도 많이 있으므로, 참고바람)이 또 정리를 해서 그 책이름을 <순자(荀子)>라고 개명했으며, 거기에다 주석을 첨가해서 20권으로 만들었다. 그 후 손경신서(孫卿新書)는 망실(亡失)되었으며, 그래서 현존하는 것들은 모두 그 양량(楊倞)이 주석했던 것들의 계통이다. 그리고 또 참고로 다음은 그 32편의 구성을 열거한 것이며, 따로 한글표기는 하지 않습니다.
1. 勧学 2. 修身 3. 不苟 4. 栄辱 5. 非相 6. 非十二子 7. 仲尼 8. 儒效 9. 王制 10. 富国 11. 王霸 12. 君道 13. 臣道 14. 致士 15. 議兵 16. 彊国 17. 天論 18. 正論 19. 礼論 20. 楽論 21. 解蔽 22. 正名 23. 性悪 24. 君子 25. 成相 26. 賦 27. 大略 28. 宥坐 29. 子道 30. 法行 31. 哀公 32. 堯問
아무튼, 그리고 또, 다른 유명한 사람들의 경우에서도 그렇지만,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자료들은 다른 훌륭한 곳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므로 가능하면 상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대략이나, 개요만 소개해드리고 있으므로, 그 점 미리 이해 당부 드리며, 그래서 또 순자(荀子)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1 권학(勸學)편에서는 배우는 것과 선(善)한 일들의 계속적인 노력을 강조했으며, 2 수신(修身)편에서는 예(禮)의 중(重)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또 9의 왕제(王制)편과 10의 부국(富國)편 등에서는 치정(治政)에서 실력주의와 성과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으며, 23의 성악(性惡)편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부터 나쁘므로, 그래서 후천적인 노력 또는 학문을 닦는 것으로써 선(善)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러한 성악설(性惡說)의 입장에서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비판했다. 그리고 또 순자(荀子)는 선(善)을 치(治)로, 악(惡)을 난(亂)으로 규정했고, 인간의 본성은 <한도(限度)가 없는 욕망(慾望)>이라고 전제(前提)한 후, 각자(各自)가 제각각의 욕망을 채우려든다면, 사회는 다툼과 살인이 만연해져서 난(亂)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성악설(性惡說)을 논증(論證)했다. 그리고 또, 각자의 욕망을 외적(外的)인 규범(禮)으로 규제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치(治=善)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禮)를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으며, 그것은 또 일종의 사회계약설(社會契約說)로도 평가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17의 천론(天論)편에서는, 그 천(天)을 단지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또 그때까지 내려오던 천인상관사상(天人相關思想) 즉, 하늘이 인간의 행위에 감응(感應)해서 화복(禍福)을 내린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또한, 유성(流星)이나 일식(日食)도 진기한 자연현상의 하나일 뿐이므로, 그래서 또 그런 것들은 위정자들의 행동과는 무관하며, 길조(吉兆)라거나 흉조(凶兆)라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또, 그러한 것들을 봤을 때, 신기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하늘은 단지 자연현상일 뿐이므로, 그래서 그것을 숭배해서 공물(供物)을 바치기보다는, 그것을 연구해서 이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도(祈禱)나 초상(超常)적인 효과도 모두 부정했으며, 당시에 흔히 행해졌던 기우제(祈雨祭)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는 비가 오는 것은 그 기우제 때문이 아니라, 비가 내릴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내린 것일 뿐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는 점(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면서, 위정자는 중요한 결정에 앞서서 점을 치지만,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 점이란 것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무지(無知)한 백성들을 믿게 하려는, 한마디로 현혹시켜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하늘(天) 즉, 인간초월적인 상징 또는 경외(敬畏)로운 대상조차 부정했을 것이란 생각은 지나친 것이다. 아무튼 또, 그의 제자로는 한비(韓非)와 이기(李沂) 그리고 부구백(浮丘伯) 그 세 사람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부구백(浮丘伯)을 통해서 순자(荀子)의 사상은 한대(漢代)의 유학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한비(韓非)와 이기(李沂)는 외적(外的)인 규범인 예(禮)의 사상을, 거기에 더해서 법(法)에 의한 인간의 제어(制御)를 주장했으며, 특히 한비(韓非)는 법가사상의 대성자로, 그리고 이기(李沂)는 법가(法家)의 실무(實務) 완성자가 되었다. 하지만 단 <법가(法家)사상> 그 자체는 공자(孔子)와 한비자(韓非子) 이전부터 존재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순자(荀子)의 사상으로부터 그 법가사상이 탄생되었다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면 앞에서 이미 소개된 조쇠(趙衰-6-19참조)가 나오므로, 그래서 그 조쇠(趙衰)의 장남(長男)이었던 조순(趙盾)부터 차례로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 조순(趙盾-生沒不詳)은 조쇠(趙衰)의 장남으로,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순(盾), 시(謚)는 선(宣)이었다. 그리고 조(趙)씨(氏)의 시조(始祖)로서, 진(晋)에서 오랫동안 정권을 잡으면서 조(趙)씨(氏)의 존재를 세상에 크게 알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조선자(趙宣子) 또는 조선맹(趙宣孟)으로도 불렸다.
아무튼, 그리고 앞의 이야기를 상기하는 차원에서 조금 소개하고 넘어가면, 그의 아버지 조쇠(趙衰)는 여희(麗姬)의 난 후에 중이(重耳)를 따라서 제국(諸國)을 유랑했으며, 망명지였던 적(狄)에서 족장의 딸이었던 숙외(叔隗)를 맞아들여서 조순(趙盾)을 낳았다. 그 후, 중이(重耳)는 귀국해서 문공(文公)이 되었고, 조쇠(趙衰)도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 후, 기원전 621년에 문공(文公)의 뒤를 이어서 양공(襄公)이 즉위했고, 호사고(狐射姑)가 중군(中軍)의 장(將)이 되었으며, 조순(趙盾)은 중군(中軍)의 좌(左)가 되었지만, 그 후에 양공(襄公)의 대부(大傅)였던 양처부(陽處父)의 추천을 받아서 중군(中軍)의 장(將)이 되었다. 그리고 중군(中軍), 상군(上軍), 하군(下軍), 그 삼군(三軍)에 대한 설명과 좌(左)에 대한 설명 등은 앞에서 이미 다 소개했으므로, 이하 생략하며, 그리고 그 동년(同年), 양공(襄公)이 몰(沒)하자, 당시 태자였던 이고(夷皋)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래서 군신(群臣)들은 양공(襄公)의 동생을 옹립하기로 합의를 했다. 그러자 조순(趙盾)은 당시, 진(秦)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공자 옹(雍)을 불러오자는 의견을 냈는데, 그러나 그때 호사고(狐射姑)가 진(陳)에 있던 공자(公子-樂)를 불러오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조순(趙盾)은 자객을 보내서 그 공자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호사고(狐射姑)는 적(狄)으로 망명을 했고, 그러자 또 그곳에서 호사고(狐射姑)가 옹(雍)의 반대파를 모을 것이 두려웠던 조순(趙盾)은, 그에 생각을 바꾸어서 원래 후계자였던 이고(夷皋)를 옹립하기로 결심을 했고, 그래서 또 그때 이미 진(秦)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晋)으로 오고 있던 옹(雍)을 군사를 보내서 도로 쫓아버렸다. 그러자 또 그때, 옹(雍)을 영접하기 위해서 그곳에 가있었던 선멸(先蔑)과 사회(士會)도 옹(雍)과 함께 진(秦)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그 후, 조순(趙盾)은 사회(士會)가 진(秦)에 남아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그러자 그는 또 책략을 써서 그를 진(晋)으로 불러들였다.
참고: 사회(士會-생몰불상)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무장이었고, 정치가였다. 성(姓)은 기(祁), 씨(氏)는 사(士) 혹은 봉지(封地)명으로부터 수(隨), 범(范)이며, 휘(諱)는 회(會), 자(字)는 계(季), 시(謚)는 무(武)였고, 그래서 범무자(范武子)로도 불렸다. 그리고 또 그는 사위(士蔿-士氏의 시조였고, 武公과 献公을 모시면서 晋 발전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이었다)의 손자였으며, 사결(士缺-士成伯)의 말자(末子)였다. 그리고 자식으로 사섭(士燮-范文子)과 사방(士魴-彘恭子)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자(末子)라는 입장에서(字의 季는 末子를 의미함) 가문을 이을 입장에 있지는 았았기 때문에, 그래서 기원전 632년의 <성복(城濮)의 싸움>에서 종군했고, 그 후에 진군(晋軍)이 귀환했을 때, 문공(文公)의 거우(車右-왕의 수레를 따라다니면서 보좌하는 일종의 시종이나 호위 관으로 해석함)로 지명되었다. 그리고 그 11년 후였던 기원전 621년에 정경(正卿) 조순(趙盾)을 명을 받고, 당시 진(秦)에 있던 공자 옹(雍)을 맞으러갔지만, 조순(趙盾)의 변심으로 인해서 사회(士會)는 옹(雍)과 함께 진(秦)에 망명했다. 그 후, 사회(士會)는 진(秦)에서 강공(康公)을 모시게 되었지만, 그러나 같이 망명했던 선멸(先蔑)과는 한 번도 만나지를 않았다. 아무튼, 그 후에 그는 강공(康公)의 군사(軍事)고문이 되었고, 기원전 615년에는 <하곡(河曲)의 싸움>에서 진(晋)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하는 등, 군재(軍才)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자 그 다음해, 조순(趙盾)의 주도로 극결(郤缺)이 나서서 사회(士會)를 진(晋)으로 불러들였으며, 그리고는 대부(大夫)의 지위를 주었다. 그리고 또 그때, 봉지(封地)로 수(隨)와 범(范) 받았는데, 그런 이유로 사회(士會)가 일가(一家)창립했던 분가는 그때부터 범(范)씨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사회(士會)는 조순(趙盾)과 자주 대립했고, 영공(靈公)의 난행(亂行)을 간(諫)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영공(靈公)은 전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그러다가 결국 기원전 607년에 암살되고 말았다.
참고: 영공(靈公)은 조순(趙盾)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이고(夷皋)였지만, 그러나 그 후에 조순(趙盾)과 심하게 대립했고, 끝내는 자객을 보내서 죽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 자객(鉏麑)은 실패해서 스스로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으며, 그러자 영공(靈公)은 다시 조순(趙盾)을 연회에 참석시켜서 죽이려고 했지만, 그것을 눈치 챘던 조순(趙盾)은 급히 진(晋)을 탈출했다. 그러자 그 후, 영공(靈公)은 그런 사실에 격분했던 조순(趙盾)의 종형제(從兄弟)였던 조천(趙穿)에게 살해되었고, 그 후에 조순(趙盾)은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양공(襄公)의 동생이었던 공자 흑둔(黑臀)을 옹립했는데, 그가 바로 성공(成公)이었다.(이것으로 영공의 소개를 대신함)
아무튼 또 그 후였던 기원전 597년에는 정(鄭)을 구원하기 위해서 진(晋)이 출병했을 때, 그는 상군(上軍)의 장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전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는 시종(始終) 초(楚)의 장왕(莊王)과 화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필(邲)의 싸움>이 벌어졌고(6-21 참조), 진(晋)은 대패했다. 그러나 그때, 그가 이끌었던 상군(上軍)만은 손실을 거의 내지 않고 성공적으로 퇴각했다. 그 후, 기원전 593년 3월 29일에 그는 순림부(荀林父)의 후원을 받아서 정경(正卿-宰相)이 되었고, 동시에 중군(中軍)의 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러자 진(晋)에 있던 도적들이 사회(士會)가 무서워서 진(秦)으로 모두 도망을 갔다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겨울, 주(周)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수습을 했는데, 그러자 정왕(定王)이 그를 치하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예(禮)를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는 수치심으로 귀국 후에 전례(典禮)를 연구했고, 그 결과 새로운 법을 정했으며, 그 법은 후에 <범무자(范武子)의 법>으로 불리면서 진(晋)에서 아주 오래 존중되었다. 그리고 그는 재상의 자리에 앉았던지 2년 만에 물러났으며, 그러자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진(晋) 역사상, 사회(士會)만이 최고의 재상이었다>라고 절찬했다. 그리고 그 사후, 생전의 대활약의 공을 인정해서 시호(諡號)로 무(武)가 내려졌고, 그것으로 그는 범무자(范武子)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이고(夷皋)가 즉위해서 영공(靈公)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후로 점차로 조순(趙盾)과 사이가 나빠져 갔다. 그러자 기원전 607년 영공(靈公)은 기어이 조순(趙盾)을 죽일 자객(鉏麑)을 보냈고, 그 뒤의 이야기는 위에서 소개한 그대로였다. 그러자 그 후에 태사(太史-史官)는 그 때의 일을 두고 <조순(趙盾), 왕을 시(弑)함>이라고 기록했고, 그리고 시(弑)라고 기록했던 것은 윗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후에 조순(趙盾)은 자기가 했던 일이 아니었다고 항의했지만, 그러나 그에 대해서 동호(董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반박했다. <당신은 영공(靈公)을 죽인 후에 이 나라를 떠났고, 그 다음에 돌아온 것이요! 그리고 또, 바로 그 시점에서 당신은 진(晋)의 정경(正卿)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반역자였던 조천(趙穿)을 처형시킬 의무가 있었소!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영공(靈公)은 당신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오!> 그러자 조순(趙盾)은 그 후로 그 일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참고: 동호(董狐)는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사관(史官)(?~?)이었고, 폭군이었던 영왕(靈王)이 조천(趙穿)에게 살해되었을 때, 그를 처벌하지 않았던 조순(趙盾)의 행위를 죄(罪)라고 직필(直筆)로 기록했던 것으로, 후세에 양사(良史)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아무튼, 기원전 601년, 그는 장기집권 끝에 정경(正卿)의 지위를 극결(郤缺-춘추시대 晋의 정치가. ?~기원전 597년)에게 양도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며, 그가 죽자 선(宣)이란 시(諡)가 내려졌다. 그리하여 그 후로 조선자(趙宣子)라고 불려졌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하면, 그가 생전에 어떤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 꿈에 대해서 점을 쳐보니 <끊어지지만 뒤는 좋다>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점괘대로, 나중에 그의 아들 조삭(趙朔) 대(代)에 그 위세(威勢)를 질투당해서 일족이 전원 몰살을 당했는데, 그런데 그때, 유일하게 조무(趙武-태아 상태였음)는 그 난리를 피해서 도망을 갔고, 그 후에 다시 조(趙)씨를 부흥시켰다.
<趙 氏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