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6)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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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빈(孫臏-기원전 4세기경)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의 군인이었고, 사상가였다. 그리고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사람이었으며, 손무(孫武)의 손자로 알려져 있고, 그 손무(孫武)와 함께 손자(孫子)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저작으로, 그가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손빈병법(孫臏兵法=竹簡兵法)이 있다.

 그는 아(阿-山東省 陽穀県)와 견(鄄-山東省 濮県) 사이 또는 그 주변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빈(臏-뜻은 종지뼈 또는 정강이뼈를 베는 형벌)이란 이름도 다리를 절단당하는 형(刑)을 받았던 것으로 해서 붙여졌던 일종의 별명으로, 그래서 그의 본명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본명이나 가족 또는 내력 등에 관해서는 일체 불명(不明)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 자신의 숙적이 되는 방연(龐涓)과 함께 어느 곳에서 병법을 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방연(龐涓)은 위(魏)에서 벼슬을 살았고,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지만, 그러나 방연(龐涓)은 항상 자기보다 뛰어났던 손빈(孫臏)을 경계했다. 그래서 어느 때, 그는 손빈(孫臏)을 위(魏)로 초대했고, 그런 다음 함정에 빠뜨려서 다리를 절단하는 형벌을 받게 했다. 그리고 경형(黥刑)까지 받게 했는데(그러나 또 그에는 孫臏 스스로의 잘못으로 魏의 朝廷으로부터 그런 형벌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자 그 후, 손빈(孫臏)은 제(齊)로 도망을 갔고, 그곳에서 사장(師將)이 되었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전에, 그러니까 손빈(孫臏)이 제(齊)로 도망을 갔을 때, 그는 먼저 제(齊)의 장군이었던 전기(田忌)의 집에서 객(客)의 신분으로 머물렀는데, 그런데 어느 때에, 제(齊)의 왕이었던 위왕(威王)이 자신의 공자(公子)들 그리고 전기(田忌)와 함께 승부를 겨루는 경마(競馬)경기를 개최했다. 그러자 손빈(孫臏)도 그 자리에 참석을 했는데, 그리고는 전기(田忌)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을 했다. <상대가 상등(上等)의 말을 타고 나오는 경기에서는 하등(下等)의 말을 타고 나가서 경기를 하시고, 상대가 중등(中等)의 말을 타고 나오는 경기에서는 상등(上等)의 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대가 하등(下等)의 말을 타고 나올 때는, 상등(上等)의 말을 타고 나가서 경기를 하십시오!> 그러자 그 결과 전기(田忌)는 2승 1패를란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왕으로부터 천금(千金)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자 기분이 몹시 좋아졌던 전기(田忌)는 손빈(孫臏)을 위왕(威王)에게 추천했고, 그러자 위왕(威王)은 그를 사장(師將)에 임명했다.

 그 후, 앞에서 소개했던 대로 손빈(孫臏)은 전기(田忌)를 내세워서 조(趙)를 구했는데<그때, 위위구조(圍魏救趙)의 故事를 남김>,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설명을 하면, 당시 위(魏)는 조(趙)를 공격했고, 그러자 조(趙)의 수도가 포위되었다. 그러자 조(趙)는 급히 제(齊)에 원군을 청했는데, 그때 위왕(威王)은 손빈(孫臏)을 장수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손빈(孫臏)이 극구 사양해서 전기(田忌)가 대장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조(趙)를 구원하러 나섰으며, 그리고 그 후에 손빈(孫臏)은 조(趙)로 향하던 도중에 전기(田忌)에게 군사를 돌려서 당시, 약소노병(弱小老兵)만 남아 있었던 위(魏)를 먼저 치게 했다. 그러자 위기를 느꼈던 위(魏)의 주력군이 조(趙)의 포위를 풀고 다시 위(魏)로 달려왔는데, 그러나 너무 강행군을 했던 나머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피로곤비(疲勞困憊)해서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다. 그러자 제군(齊軍)은 그것을 노려서 위군(魏軍)을 공격했고, 그것으로 그 <계릉(桂陵)의 싸움>은 제(齊)의 대승으로 끝났다.

 
참고: 말이 나온 차에 위위구조(圍魏救趙)의 고사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보고 넘어가면, 그 원문은 다음과 같고 <共敵不如分敵 敵陽不如敵陰>, 그리고 그 해석은 <적(敵)이 모여 있는 것은 분산(分散)되어 있는 것과 같지 않다! 즉, 적(敵)을 한곳에 모아놓고 치는(공략하기) 것보다는, 적을 분산시켜놓고 치는 것이 더 좋으며, 적(敵)의 밝은 쪽은 적의 어두운 쪽과 같지 않다! 즉, 적(敵)의 정면을 공격하기보다는, 적의 숨겨진 약점을 찾아내서 공격하는 것이 더 좋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상황은 또 앞에서 설명한 제군(齊軍)의 회군 시에 손빈(孫臏)이 전기(田忌)에게 했던 말로, 손빈(孫臏)은 그때 전기(田忌)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회군(回軍)을 조언했다. <엉킨 실타래를 풀 때는 무리하게 당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도 다른 나라를 구원하려고 할 때는 직접적으로 달려들어서 적(敵)과 맞서기보다는, 요소(要所-중요한 곳)을 치고, 허(虛-빈 곳)을 치고, 그래서 형세(形勢)를 무너뜨린다면, 실타래는 자연스럽게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敵)을 한곳에 모으지 않고 분주하게 만들어서 피로하게 한 후에 공격하는 전술을 위위구조(圍魏救趙)라고 부르게 되었다.(史記의 孫子吳起列傳)

 아무튼, 그 <계릉(桂陵)의 싸움>이 있었던 13년 후에 또 <마릉(馬陵)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러나 그에 대한 설명도 이미 앞에서 소개가 다 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같지만, 비슷한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제군(齊軍)은 <계릉(桂陵)의 싸움>에서와 같이 위(魏)의 수도를 공략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방연(龐涓)도 이미 준비를 다 끝냈던 상태였으며, 그래서 위(魏) 본국에도 정예부대를 남겨두고 한(韓) 공략에 나섰던 참이었다. 그러자 제군(齊軍)은 그곳에서 발이 묶여서 오도 가도 못하는 형국이 되었는데, 그러자 또 방연(龐涓)은 그때 위(魏)를 방어하고 있던 방위군과 자신이 이끌던 공략군이 협격(挾擊)해서 제군(齊軍)을 물리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계략을 미리 알아차렸던 손빈(孫臏)은 퇴각을 결정했고, 그러자 또 방연(龐涓)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군(齊軍)을 추격했으며, 그것은 또 철퇴(撤退)전(戰)에서는 추격 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빈(孫臏)은 그렇게 철퇴하면서도 방연(龐涓)의 <위군(魏軍)에는 죽음도 겁내지 않는 용맹한 군사들만 있지만, 제군(齊軍)은 원래부터 겁쟁이들이다!>라고 하는 오만방자함을 역이용하기 위해서, 제군(齊軍) 진영에 설치했던 아궁이의 수를 줄여가면서 후퇴를 했다. 그러자 그것을 확인했던 방연(龐涓)은 제군(齊軍)에 탈주병이 많다고 판단하고는 그 추격의 속도를 더욱 높여나갔다. 그런 한편, 손빈(孫臏)은 애로(隘路-좁고 험한 길, 難關)였던 마릉(馬陵)까지 방연(龐涓)을 유인하고는, 그 한 나무에 <龐涓死于此樹之下-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는다>라고 써두었다. 그리고는 그 길의 양측에 병사들을 매복시켰고, 그 나무 아래에서 불이 켜지면 화살을 쏘아라고 지시를 했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이며, 방연(龐涓)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후, 손빈(孫臏)의 이름은 대륙을 울렸으며, 그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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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자(孟子-기원전 372년?부터 기원전 289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학자였고, 성(姓)은 맹(孟), 휘(諱)는 가(軻), 자(字)는 자여(子輿)였으며, 아성(亞聖-유학에서 공자 다음가는 聖人=맹자)으로도 칭해졌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공맹(孔孟)의 가르침>이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언행(言行)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맹자(孟子)>이며,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고, 인의(仁義)에 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목표로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추(芻-현재의 山東省 鄒城市) 출신이었고,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와 관련되었던 맹모삼천(孟母三遷) 고사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그리고 또 사실(史實)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교육적인 모범으로 해서 현재, 추성 시(鄒城市)에는 맹모삼천사(孟母三遷祠)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나중에 공자(孔子)의 손자였던 자사(子思)의 문하로 들어가서 학문을 배웠으며, 그리고 또 그때, 그는 그 자사(子思)에게 직접 배웠다는 말도 있지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 연대(年代)에 무리가 있다.(아래 子思 참조) 아무튼 또 그 후, 그는 위(魏)와 제(齊) 그리고 송(宋)과 노(魯) 등지로 유세(遊說)를 떠났지만, 그러나 그의 뜻은 그 나라의 왕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제자들을 육성하는데 노력했으며, 그 사이에 저작활동도 겸행했다.

 참고: 자사(子思-기원전 483년?부터 기원전 402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학자였고, 성(姓)은 공(孔), 이름은 급(伋), 자(字)는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였고, 아버지는 공백어(孔伯魚)였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그래서 공자(孔子)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 후에 증자(曾子-6-24참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또 그 후, 그 역시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펼친 후에 노(魯)의 목공(穆公)에게 가서 벼슬을 했다. 그리고 그와 그 일파(一派)들이 저작했던 것으로 <자사자(子思子)>란 것이 있었다지만, 현존하지 않으며, 그리고 중용(中庸)도 자사(子思)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는 있지만, 그러나 또 현재에서는 중용(中庸)의 전반부 등과 예기(禮記)의 몇 편정도가 그 자사자(子思子)에서 전재(轉載)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성(誠)을 천지와 자연의 법칙으로 삼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철학을 제창하였다.

 아무튼 당시, 묵가(墨家)의 고자(告子)는 <사람의 성(性-천성, 성품 또는 품성)에는 선(善)도 없고, 불선(不善)도 없기 때문에,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같은 명군(明君)이 나타나면 백성들은 선(善)을 좋아하게 될 것이고, 그 반대로 유왕(幽王)이나 려왕(厲王) 같은 암군(暗君)이 나타나게 되면 백성들은 난폭(亂暴)한 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했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타고난 성품이 착한(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사람도 있다>라고도 주장하고 있었다.(性猶湍水-사람의 本性은 여울물과 같다는 뜻으로, 여울물이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흘러갈 수 있듯이, 천성적으로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했던 告子의 說)

 참고: 묵가(墨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노나라의 묵자(墨子)의 사상을 받들고 실천하던 제자백가의 한 파였으며, 절대적인 천명에 따라서 겸애(兼愛)와 흥리(興利)에 노력하여 근검할 것을 주장했고, 음악과 전쟁을 반대하였으며, 영혼과 귀신의 실재를 역설하여 종교적인 색채를 띠기도 했다. 그리고 <묵자(墨子)>는 묵자(墨子)의 사상서이며, 인간집단의 전체적 번영인 '이(利)'에 주목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강제적인 연대와 공동의 겸애를 주장하였으며, 침략주의를 배격하고, 다스리는 자의 사치를 추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또 묵자(墨子-B.C.480~B.C.390)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사상가·철학자였으며, 성(姓)은 묵(墨), 이름은 적(翟), 묵가(墨家)의 시조였고, 유가(儒家)에게서 배웠으나, 무차별적인 박애의 겸애(兼愛)를 설파하고, 평화론을 주장하여 유가(儒家)와 견줄만한 학파를 이루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설명함. 

 아무튼, 그에 대해서 맹자(孟子)는 <사람의 품성은 원래부터 선(善)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성인(聖人)이나 소인(小人-일반인)도 그 품성은 한가지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 성품이 선(善)한 사람이 때로 불선(不善)을 행하는 것은, 그 선(善)한 성품이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 상실돼버렸기 때문이다>라고도 했다. 그 때문에 또 맹자(孟子)는 <큰 덕(德)을 가진 사람이란, 그런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라고 했으며, 그리고 또 <학문의 길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심(放心-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잃어버렸던 마음)을 구(求)하는 것, 즉 인간의 본성(善)을 회복(回復)시키는데 있을 뿐이다>라고도 했다. 그리고 또 당시,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을 제창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은 유교(儒敎)주류(主流)파의 중심개념이 되어서 많은 유자(儒者)들에게 전해져서 계승되었다.

 
참고: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악하므로, 선(善) 행위는 후천적인 습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던 학설이며, 중국의 순자(荀子)가 주장하였
다. 그리고 또 그는 인간이란 선천적으로 한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대로 두면 싸움만이 일어나서 파멸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예(禮)로써 바로잡아야 한다고도 했다.(荀子는 차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소개함)

 아무튼, 맹자(孟子)는 또 <인간의 본성에 사단(四端)이 있다>고도 했으며, 그 사단(四端)은 간단하게,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로,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불쌍히 여겨서 언짢아하는 마음)과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예(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겸손히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과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이른다. 그래서 또 맹자(孟子)는 <그런 것을 노력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사람은 금수(禽獸)와 같게 될 것이다>라고도 말을 했다. 그리고 또 그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저절로 몸에 익혀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 때문에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군자(君子)는 금수(禽獸)와도 같은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다. 그리하여 맹자(孟子)는 낙관적(樂觀的)인 인간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의 주체적(主體的)인 노력으로 사회 전체를 통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리하여 맹자(孟子)의 사상은 후세에 주자학(朱子學)으로 이어졌으며, 순자(荀子)의 사상은 법가(法家)사상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그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서 인(仁)과 의(義) 즉, 인의(仁義)는 공자(孔子)의 인(仁)을 더욱 발전시켰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고금(古今)의 군주들을 왕자(王者)와 패자(覇者)로, 그리고 정도(政道)를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로 변별(辨別)했으며, 그리하여 전자(前者)가 후자(後者)보다 더 낫다고도 주장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천하(天下)를 얻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마음부터 먼저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리하여 영토와 군사력부터 확대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또 <왕도(王道)에 의해서 자국의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타국의 백성들에게까지도 왕자(王者)로서 존경받게 되면, 다른 제후들이 침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앞에서도 잠시 소개가 되었지만, 양(梁)의 혜왕(惠王)과 만났을 때, 혜왕(惠王)이 <이익(利益)으로 나라를 강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는 <군주(君主)는 이익(利益)이 아닌, 인의(仁義)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또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비록 소국(小國)이라도 대국(大國)에 지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그 인의(仁義)는 또 군주(君主)가 백성의 마음을 잘 알아 살펴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며,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적이 없게 된다(仁者無敵)라고도 말을 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아무리 소국(小國)의 군주(君主)라도 천하의 왕자(王者)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패자(覇者)의 사적(事績)에 관해서 제(齊)의 선왕(宣王)이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모름지기 군주(君主)란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王道)를 걸어야 하며, 그랬을 때만이 천하의 백성들은 그 왕의 치하(治下)에서 살고 싶어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또, 그 맹자(孟子)의 민본(民本)사상은 경제사상(經濟思想)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었으며, 당시 그가 제창했던 정전제(井田制)도 그러한 문맥(文脈)에서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급진적인 주장이었고, 그래서 당시의 군주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랬어도 맹자(孟子)는 일관되게 <백성이 최우선>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리고 또 그 자신 혁명(革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의 <천명(天命)설>은 나중에 <혁명(革命)설>의 원형(原型)이 되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순(舜)은 천하를 하늘로부터 내려 받았던 것이었지, 요(堯)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이 아니었다>라고 했고, 그래서 또 <천하를 얻게 해주는 것은 오직 하늘뿐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또 예를 들어서 <아무리 요(堯) 같은 천자(天子)라고 하더라도, 천명(天命)에 거슬러서 천하를 주고받는 일은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고 또 그 <하늘의 뜻> 또는 <천명(天命)>의 표현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백성들의 마음 또는 생각에 의해서 표시 또는 표현되는 것>이고, 그래서 또 <백성들이 어떤 사람을 천자(天子)로 인정하고, 그래서 또 그 치세(治世)에 만족을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 천명(天命)을 받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라는 뜻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그 <천명(天命)설>에 입각(立脚)해서 은주혁명(殷周革命-6-5~11참조)을 거론하면서 <주(周)의 무왕(武王)은 꼭 그렇게 은(殷)의 주왕(紂王)을 토벌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라고 했고, 그것은 또 역시 <가만 놔뒀어도 천명(天命)에 의해서 모든 것은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맹자(孟子)는 유가(儒家)의 제일 중요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의 지위는 송(宋)대(代) 이전에는 그다지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중당(中唐)시대에 한유(韓愈)가 <원도(原道)>를 저술했고, 거기서 한유(韓愈)는 <맹자(孟子)는 전국시대 유가 중에서 유일하게 공자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것을 시작으로, 그때부터 맹자(孟子)의 <승격(昇格)운동>이 현실화되었다.

 참고: 한유(韓愈-768~824)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하겠지만, 그러나 일단 약력을 소개하면, 그는 중국 당나라의 문인이었고 정치가였으며,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을 비판했고, 고문(古文)을 주장하였으며, 시문집에 <한창려집(韓昌黎集)40巻>과 <외집(外集)>이 있었다. 그리고 위의 중당(中唐)시대란 중국 당나라 때, 시(詩)의 발달을 기준으로 나누었던 역사의 4시기를 말했던 것으로, 송(宋)나라 때 <엄우>란 사람이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으로 나누었던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당(中唐)시대는 그 사당(四唐)의 세 번째 시기로, 대종(代宗) 때부터 14대 문종(文宗) 때까지의 약 70년간을 말하며, 그 시기에 한유나 유종원 또는 백거이 등, 뛰어난 시인들이 많이 나와서 고시(古詩)가 번창하였다. 그리고 또 참고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는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여덟 명의 뛰어난 문장가로, 당(唐)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그리고 송(宋)의 구양수(歐陽脩)와 왕안석(王安石) 그리고 증공(曾鞏)과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을 이른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3소(蘇)씨(氏)는 모두 친자(親子-父, 長子, 次子)관계로, 삼소(三蘇)라고도 불렸다.(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또는 변려문(騈儷文)은,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했던 한문 문체로, 문장 전편이 대구로 구성되어서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 때문에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함.

 아무튼, 그 후에 맹자(孟子)는 점점 그 지위가 상승되었고, 그리하여 북송(北宋)시대 신종(神宗) 희령(熙寧)4년(1071년)에는 맹자(孟子)의 글이 처음으로 과거의 시험과목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원풍(元豊)6년(1083년)에는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추국공(芻國公)의 지위를 추증(追贈)받았으며, 그 다음해에는 공자(孔子)묘(廟)에 함께 병치(竝置)되어서 제사지내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맹자(孟子)>가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으로 승격되었으며, 남송(南宋)시대가 되자 주희(朱熹)가 그 <맹자(孟子)>에 주석을 달았고, 그리하여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와 함께 사서(四書)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다 또 실제적인 지위는 오경(五經)의 위로 올려 졌으며, 그 후였던 원(元)대(代)의 지순(至順)원년(元年)(1330년)에 맹자(孟子)는 <아성공(亞聖公)>에 봉해졌다. 그러자 그 후로 맹자(孟子)는 아성(亞聖)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공자(孔子)의 다음 지위로 승격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공자(孔子)의 출신지였던 산동성(山東省) 추성시(鄒城市)의 남교(南郊)에는 맹자(孟子)를 제사 지내는 맹묘(孟廟)가 지어져 있으며, 그 별명은 아성묘(亞聖廟)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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