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4)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

 ○ 문후(文侯-?부터 기원전 396년)는 중국 전국시대 초기 위(魏)의 군주였고(재위는 기원전 445년부터 기원전 396년), 성(姓)은 희(姬), 씨(氏)는 위(魏), 휘(諱)는 도(都)였다. 그리고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사(斯-斯其)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이극(李克), 오기(吳起), 악양(樂羊), 서문표(西門豹) 등,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서 위(魏)를 전국시대(戰國時代) 최고의 패국(覇國)으로 부상시켰다. 그리고 그는 위구(魏駒-魏桓子)의 손자였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불상(不詳)이다. 그리고 아들에 태자 격(擊-武侯)이 있었고, 나중에 재상의 부인이 되었던 공숙부인(公叔夫人-공주)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원조(遠祖)는 필(畢-陝西省 咸陽市)에 봉해졌던 주(周) 희창(姬昌-文王)의 서자(庶子)였던 필공고(畢公高)였다.

 참고: 畢公高는 서주(西周) 초기의 중신으로, 왕족이었다. 그리고 성(姓)은 희(姬)였고, 이름은 고(高)였으며, 주(周)의 무왕(武王)과 성왕(成王) 그리고 강왕(康王) 3대를 섬겼다. 그리고 그 필(畢)에 봉지(封地)를 내렸던 사람은 무왕(武王)이었고, 그래서 그때부터 필공(畢公)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필공(畢公)의 후예로 진(晋)의 대부였던 필만(畢萬)이 있었으며,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시조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 필(畢)이 언제 어떻게 멸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필공(畢公)의 먼 후예였던 필만(畢萬)이 진(晋)의 헌공(獻公-6-17참조)을 모셨고, 그런 다음에 위(魏)씨(氏)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필만(畢萬)의 손자 위주(魏犨-魏武子-6-19참조)의 대(代)가 되었을 때, 문공(文公)의 방랑에 함께 했던 공적으로 대부(大夫)가 되었다. 그리고 그 위무자(魏武子)의 현손(玄孫)으로, 문후(文侯)의 조부(祖父)였던 위환자(魏桓子)의 대(代)에, 진(晋)의 최고유력 씨족(氏族)이 되어있었던 지(知)씨(氏)가 멸해졌고, 그리하여 진(晋)은 위(魏)와 조(趙) 그리고 한(韓) 그 삼진(三晋)으로 분열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도 명목상으로는 진(晋)의 신하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것이 기원전 403년에, 문후(文侯)도 조(趙)씨(氏), 한(韓)씨(氏)들과 함께 주(周)의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정식으로 제후(諸侯)에 봉해졌다.

-----------------------------------------------------------------------------------------------------
 ○ 이극(李克-?부터 기원전 395년)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정치가였고, 문후(文侯)를 도와서 위(魏)를 전국(戰國) 초기 패국(覇國)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회(李悝)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치세(治世) 시절에 곡물(穀物)의 가격조정을 시행해서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고취(鼓吹)시켰으며, 성문법을 제정해서 부국강병을 달성시켰다. 그래서 그의 정책은 나중에 상앙(商鞅)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그리고 또 문후(文侯)가 오기(吳起)를 등용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그러자 그는 <오기(吳起)는 욕심이 많은 자이지만, 그러나 용병(用兵)만큼은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고, 그러자 문후(文侯)는 오기(吳起)를 등용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법경(法經) 6편(編)과 이자(李子)32편을 저술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 법경(法經)이 실재했던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법경(法經)에 대한 소개임.

 참고: 法經은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이회(李悝)가 지었던 법률 책으로, 도법(盜法)·적법(賊法)·수법(囚法)·포법(捕法)·잡법(雜法)·구법(具法)으로 분류하였으며, 구법은 다시 오형(五刑)·십악(十惡)·팔의(八議)로 나누어서, 죄의 실제와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설명하였던 것이었다. 6편.

-----------------------------------------------------------------------------------------------------

 ◎ 악양(樂羊-생몰불명)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무장이었고, 문후(文侯)의 명령으로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해서 멸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한비자(韓非子)에 의하면 그가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하려고 했을 때쯤에 자신의 아들이 그 중산국(中山國)에 인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공격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중산국(中山國)은 그 아들을 죽였고, 그런 다음에는 그 시체를 삶아서(야채도 함께 넣어서 스프로 만들었다고 함) 요리를 해서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러자 그는 태연하게 그것을 맛봤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또 자신의 결의가 그만큼이라는 것을 그 적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며, 그런 다음에 그 중산국(中山國)을 멸망시켰다. 그 후, 문후(文侯)가 그 소리를 듣고 그의 충성에 감동했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 그를 비방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는데, 그러자 그는 문후(文侯)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 아들로 만든 요리도 먹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의 것은 더 말을 해서 무얼 하겠습니까?> 그 후, 악양(樂羊)은 중산국(中山國)에서도 제일 컸던 영수(靈壽)란 곳을 포상으로 받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식으로 만든 요리를 먹고 전공을 올렸다는 이유로, 오히려 문후(文侯)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그와 그의 자손들은 그 영수(靈壽)에서만 살았으며, 악양(樂羊)은 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명장(名將)이었던 악의(樂穀)의 선조로서도 유명했다.

-----------------------------------------------------------------------------------------------------


 ◎ 서문표(西門豹-생몰불명)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복상(卜商=子夏)의 문하에서 정치를 배웠다. 그리고 또, 같은 제자였던 이극(李克)과 함께 위(魏) 문후(文侯)를 섬겼으며, 당시 토지가 황폐해 있었다던 업(鄴)의 지사(知事)에 기용되었다. 그러자 그는 먼저 그곳의 농민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애로사항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또 당시, 그곳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미신(迷信)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또 해마다 그 근처 강에서 살고 있다던 신(神-河伯)에게 어린 처녀와 아주 많은 재보(財寶)를, 그것도 무녀(巫女)와 삼노(三老)라고 불리던 장노(長老)들과 그 의식을 관리하던 관리(官吏)들에게 바쳐서, 그것을 그 강에 빠뜨리는 인신공양(人身御供)이란 것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거기다 또 그렇게 모았던 재보(財寶)란 것이 아주 엄청난 양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또 그 즈음에는 어린 딸을 가졌던 집들이 멀리 도망을 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들이 경작하고 있던 논밭들은 그대로 방치되어서 황폐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서문표(西門豹)가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고, 그래서 또 백성들은 그 의식(儀式)에 대한 하소연을 했지만, 그러나 그때, 서문표(西門豹)는 그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그곳에 모였던 백성들은 서문표(西門豹) 역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모두들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때, 서문표(西門豹)는 이미 그런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며, 거기다 그곳에는 관개(灌漑) 또한 절실하다고 판단했지만, 그러나 그 강(江)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그 정리부터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의식이 거행되던 날이 왔고, 그러자 그 강(江)가에는 무녀(巫女)들이 모여들었으며, 서문표(西門豹)도 그것을 참관한다는 명목으로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그 행사에 참석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제물(祭物)이 될 처녀가 나타나자 서문표(西門豹)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래도 명색(名色)이 제물인데, 저렇게 못생긴 처녀로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내가 좀 더 고운 처녀를 데려올 것이니 강의 신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는 또 <아, 그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인데, 그러면 또 강의 신이 더욱 노(怒)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그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 강의 신과 친한 사람을 사자(使者)로 보내야겠군!> 그리고는 그 의식을 주관하던 노파(老婆) 무녀를 그 강에 빠뜨렸다. 그런데 조금 기다렸어도 그 노파(老婆)가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그 노파(老婆)가 데리고 왔던 제자 무녀(巫女)들을 그 사자(使者)로 모두 물에 빠뜨렸다.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노파(老婆) 무녀(巫女)를 보내도 소식이 없고, 그 제자 무녀들을 보냈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강의 신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하는 수 없이 저 삼노(三老)들을 보내볼 수밖에 없겠군!> 그런 다음 그 삼노(三老)들도 차례로 물에 빠뜨렸다. 하지만 또 잠시 기다렸어도 그들 역시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엄청난 재보(財寶)를 거둬들였던 관리들 차례인가?> 그러자 그 관리들이 그 앞으로 달려와서 엎드려 절하면서 이렇게 사정을 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하고! 그런 다음 그들은 이마를 땅에 찧어서 이마에서 피가 흘렀는데, 그러자 그는 잠시 더 그런 모습을 지켜본 후에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물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 그럭저럭 물의 신도 만족을 한 모양이군! 그러니 우리도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그러자 그 후로는 그런 의식이 사라졌다고 하며, 그곳에서 미신도 일절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서문표(西門豹)는 업(鄴) 부근 촌들의 장노(長老)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황하(黃河)와 장하(漳河)에서 물을 끌어들인 후, 업(鄴)의 논밭으로 관개(灌漑)하는 대사업을 실시했다. 그러자 업(鄴)의 백성들은 <지금 이대로도 그럭저럭 살만한데, 뭐 하러 저렇게 힘든 일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에 대해서 서문표(西門豹)는 <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이해시킬 마음이 전혀 없소! 왜냐하면, 그 결과로 당신들의 자손들이 혜택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요! 그러므로 또, 100년 정도 지나면 분명히 그때의 사람들은 이 일을 잘 한 일이라고 평가를 할 것이요!>라고 말을 하고는 그 공사를 계속했다. 그러자 그 후, 업(鄴)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위(魏)는 강국(强國)이 되었으며, 이어서 열후(列侯)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자 그 후, 업(鄴)의 사람들은 풍족하게 살았으며, 그리고 또 아주 나중이었던 한(漢)왕조가 그 수로(水路)를 변경하려고 했을 때, 그곳의 나이든 노인들은 그것을 반대했으며, 그것으로 서문표(西門豹)의 예언은 이루어졌고,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또 그를 기리는 사당(祠堂)은 그 장하(漳河) 주변에 다수(多數) 분포해 있다고 하며, 삼국시대 때, 조조(曹操)는 그 서문표(西門豹)의 사당 부근 서쪽에 자신의 묘를 만들어달라고 유언까지 남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

 ♣ 자하(子夏-기원전 507년?부터 기원전 420년)는 공자(孔子)의 문인(門人)으로, 성(姓)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字)는 자하(子夏)였고, 위(偉-河南省)나라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그는 진(晋)의 온국(溫國-河南省 焦作市)출신이었다고도 했는데, 그는 학문을 좋아해서 공문(孔門) 십철(十哲) 중 한사람이 되었다.

 참고: 공문십철(孔門十哲)은 四科十哲이라고도 하며, 공자(孔子)의 제자들 가운데, 특히 학덕이 뛰어났던 열 명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을 열거하면, 먼저 덕행(德行)에서 안연 또는 안회(顏淵=顔回)와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 또는 염옹(仲弓=冉雍)이 있었고, 언어(言語) 즉, 변설(辯舌)에서 재아(宰我)와 자공(子貢)이 있었으며, 정사(政事)에는 염유 또는 자유(冉有=子有)와 계로 또는 자로(季路=子路)가 있었고, 문학(文學) 즉, 학문(學文)에서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있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소개는 일단 생략하며, 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나친 것은 못 미친 것보다 못하다>라는 것으로, 불급(不及)으로 평가된 인물이었다.(論語의 先進편) 그리고 위(魏)의 문후(文侯)에게 초대되어서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었으며,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 서문표(西門豹) 등의 제자를 배출(輩出)했다. 그리고 또 예기(禮記)에 의하면, 자신의 자식이 죽었을 때, 그는 너무나도 슬퍼했던 나머지 실명(失明)까지 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동문(同門) 증자(曾子)가 그를 찾아갔는데,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왜, 나에게만 그런 불행한 일이 찾아오는가?!> 그러자 증자(曾子)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처자식을 돌보지 않아왔던 것은 바로 너였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하고는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 그 모든 것이 다 나의 잘못이었네!> 그리고 그의 학풍은 나중에 순자(荀子)에게로 이어졌다.

 ---------------------------------------------------------------------------------------------------


 ♣ 중산국(中山國)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중남부(中南部)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중산(中山)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 전에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이래(以來) 중원(中原) 북부에 있었던 백적(白狄)이 건국했던 도시국가로, 선우(鮮虞)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당초에는 태행산맥(太行山脈-현재 중국의 북부에 위치해있는 산맥으로, 山西省, 河南省, 河北省 3省의 경계부분에 위치해 있음) 서쪽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414년에 무공(武公=中山武公. 재위 기원전 414년부터 기원전 407년까지. 中山国의 第2代 公이었음)이 백성들을 이끌고 그 태행산맥을 넘었으며, 그리하여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중부에 그 중산국(中山國)을 건국했다.(하지만 원래의 영토를 완전히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음) 그리고 그 무공(武公)은 주(周)나라 정왕(定王)의 손자였고, 그 때문에 이민족이었으면서도 주(周)왕조의 성(姓)인 희(姬)를 사용했다. 그리고 또, 그 나라는 당초부터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기원전 407년에는 위(魏) 악양(樂羊)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까지 함락 당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산(大山)이란 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나 그로부터 20년간이나 환공(桓公)의 지휘로 항전을 계속해서 결국 나라를 부흥시켰다. 그 후, 중산국(中山國)은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해서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또 기원전 296년에 조(趙)의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또 그 나라는 중원(中原)의 제국(諸國)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나라였고, 유목(遊牧)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남아있는 사료(史料)는 미흡하며, 그 때문에 또 <신비(神秘)의 왕국(王國)>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또 그랬던 것이 197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에 걸쳐서 석가장(石家莊) 부근의 평산(平山)현(縣)에서 그 나라의 도성(都城)이었던 영수(靈壽)고성(古城)이 발굴되었고, 그곳에서 금과 은, 동, 옥 그리고 도기(陶器) 등의 호화(豪華)화려(華麗)한 문물(文物)들과 함께, 유목적인 문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아주 호사(豪奢)스러운 천막(天幕)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리고 또 특히, 그 유물들 중에서는, 그 당시의 술(酒)이 보존상태가 아주 좋은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한때 그것이 화제(話題)가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중산국(中山國)의 역대 왕들을 소개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文公(?年-紀元前415年)
 武公(紀元前414年-紀元前406年)
 桓公(紀元前388年-紀元前340年)
 成公(紀元前340年-紀元前328年)
 王(黌) (紀元前327年-紀元前313年)
 王(次/虫) (紀元前312年-紀元前299年)
 王尚 (紀元前298年-紀元前296年)







  <戰國時代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