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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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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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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후(武侯-기원전 424년부터 기원전 37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 위(魏)의 군주(재위는 기원전 395년부터 기원전 370년)였으며, 성(姓)은 희(姬), 씨(氏)는 위(魏), 휘(諱)는 격(擊)이었고, 문후(文侯)의 아들이었으며, 공자(公子) 중완(仲緩)과 태자 앵(罃) 등의 아버지였다. 그는 또 아버지 문후(文侯)의 뒤를 이어서 명군(名君)의 소리를 들었으며, 그 시대에 위(魏)의 세력을 크게 키웠다. 하지만 만년에는 별 성장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또 그때, 서쪽으로는 진(秦), 북쪽으로는 조(趙), 동쪽으로는 제(齊), 남쪽으로는 초(楚)와 한(韓) 등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또 그 시기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또 국고(國庫)가 현저히 줄게 되었으며, 그래서 또 그 다음 대였던 앵(罃)의 대에서는 패권을 내놓을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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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罃=惠王-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19년)은 중국 전국시대 위(魏)의 제3대 군주(재위는 기원전 369년부터 기원전 319년), 또는 초대(初代) 왕이었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위(魏), 휘(諱)는 앵(罃)이었다. 그리고 무후(武侯)의 적자(嫡子)로 태어났으며, 무후(武侯) 사후에 이모형(異母兄)이었던 공자 중완(仲緩 또는 魏緩)과의 왕위싸움에서 이기고 즉위했다. 그리고 또 당시, 위(魏)는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최대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무후(武侯) 만년에는 전쟁이 끊이지를 않았다. 거기에다 그가 즉위하려고 했을 때쯤에 공족(公族)이었고, 당시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공숙좌(公叔座)가 임종을 맞으려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그는 혜왕(惠王)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지금, 나의 식객(食客) 중에 공손앙(公孫鞅=商鞅-나중에 후술함)>이란 사람이 있는데, 내가 죽고 나면 그를 재상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위(魏)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가 그것을 거절한다면, 그때는 바로 그를 죽여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가 만약에 다른 나라로 가버린다면, 그때는 위(魏)에 심대(甚大)한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 혜왕(惠王)은 공숙좌(公叔座)가 너무 늙은 나머지 임종 시에 헛소리를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손앙(公孫鞅)을 등용하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자 또 그런 혜왕(惠王)의 태도에 실망을 했던 공손앙(公孫鞅)은 그 길로 진(秦)으로 가버렸고, 진(秦)의 효공(孝公)에게 인정을 받아서 그곳에서 재상이 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국정을 대개혁했고, 그러자 진(秦)은 순식간에 강국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 공적으로 그는 상(商)이란 땅을 하사받았고, 그래서 그때부터 <상앙(商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진(秦)은 여러 번 위(魏)를 공격했고, 그러자 또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영토를 잃어갔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341년에 벌어졌던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위군(魏軍)은 전기(田忌), 손빈(孫臏)이 이끌던 제군(齊軍)에 패했으며, 그 때문에 또 적자(嫡子)였던 상장군(上將軍) 태자 신(申)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맛봐야만 했다.
참고: 전국책(戰國策) 권23 위(魏)2 제위전어마릉(齊魏戰於馬陵)에 의하면 <방연(龐涓)은 제군(齊軍)에 포로가 되었고, 태자 신(申)은 전사(戰死)했다>라고 기록이 되어있으며(원문-龐涓戰于馬陵 魏師大敗 殺太子申 慮龐涓)>, 맹자(孟子)에 의하면, 위(魏) 혜왕(惠王)이 만년에 맹자(孟子)와 만났을 때 <나는 얼마 전에 아까운 아들을 전사(戰死)로 잃었소!>라고 말하면서 탄식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자 또, 그것을 호기(好機)라고 보았던 상앙(商鞅)이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340년에 결국 서쪽을 침범했고, 그리고는 자신과 친교가 있었고, 총대장이었던 공자(公子) 공(邛-惠王의 異母弟?)을 속여서 포로로 잡으면서 대승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위(魏)는 수도 안읍(安邑)에서 동쪽의 대량(大梁-현재의 開封)으로 천도까지 해야 했던 신세에까지 몰렸는데, 그러자 그 후에 위(魏)는 <양(梁)>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실의의 나날을 이어가고 있었던 혜왕(惠王)은 결국 익애(溺愛)했던 태자 신(申)을 대신해서 신(申)의 동모제(同母弟)였던 공자 혁(赫)을 세자로 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 때에 내가 공숙좌(公叔座)의 말을 들었는데, 내가 그때 공숙좌(公叔座)의 말을 듣고 그 공손앙(公孫鞅)을 죽여 버렸다면 오늘날 이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인데...>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때 그 공손앙(公孫鞅)을 죽이지 못했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처럼 거듭되었던 패전으로 인해서 위(魏)는 점점 쇠퇴해갔으며, 그러자 결국 한(韓)과 함께 제(齊)에 복속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으로 문후(文侯) 이래 지켜왔던 패권도 잃게 되었다. 그리고 혜왕(惠王)은 기원전 319년에 노쇠(老衰)로 사망했다.(82세) 그리고 또, 그 혜왕(惠王)에게는 맹자(孟子)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었다고 해서 잠시 살펴보고 끝을 내면, 맹자(孟子)에서는 그가 양(梁)의 혜왕(惠王)으로 등장하며, 어느 때 맹자(孟子)와 만나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나는 이정도로까지 덕(德)을 베풀고 있는데, 어째서 인재들이 나에게는 모이지 않는 것인가?> 그러자 맹자(孟子)가 <전장(戰場)에서 백 보를 도망간 병사를 오십 보를 도망간 병사가 비웃었다>라는 것을 예로 들면서 <혜왕(惠王)의 덕(德) 또한 그렇게 크게 평가할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五十步百步의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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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릉(馬陵)의 싸움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였던 기원전 341년에, 위(魏)와 제(齊)가 격돌했던 싸움이었고, 결과는 제(齊)가 압승했다. 그리하여 진(晋)의 후계자로서 천하의 패권을 손에 쥐었던 위(魏)는 그 후로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제(齊)는 진(秦)과 함께 대륙을 이분(二分)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전(事前)>
한(韓)은 계릉(桂陵)의 싸움에서 위(魏)가 패퇴(敗退)하는 것을 보고 제(齊)와 손을 잡았다. 그 후, 제(齊)의 세력을 등에 업었던 한(韓)은 위(魏)와 싸우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위(魏)는 놀랄만한 저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한(韓)은 다섯 번이나 싸워서 다섯 번 모두 다 졌다. 그러자 또 그 역으로 위(魏)는 그 참에 한(韓)을 멸하려고 들었고, 그러자 또 한(韓)은 제(齊)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자 또 제(齊)의 위왕(威王)은 신임하던 손빈(孫臏)을 사장(師將)으로 파견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 손빈(孫臏)은 오히려 전기(田忌)를 추천했다. 그러자 또 그 전기(田忌)를 사장(師將)으로 했던 제군(齊軍)들은 임치(臨淄)를 떠나서 위(魏)로 공격해서 들어갔고, 그러자 또 한(韓)에 머물고 있었던 위군(魏軍)은 당황해서 위(魏)로 급히 돌아갔기 때문에, 한(韓)은 구제되었다.
<손빈(孫臏)의 계략>
당시, 위(魏)의 장군이었던 방연(龐涓)은 과거, 손빈(孫臏)과 동문(同門)하면서 함께 병법을 배웠던 사이였다. 그 후에 방연(龐涓)은 위(魏)로 가서 장군이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 손빈(孫臏)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손빈(孫臏)이 위(魏)에 벼슬을 하러 왔을 때마다 누명을 씌워서 또는 책략 등을 써서 그의 양족(兩足)까지 절단했고, 경형<黥刑=墨刑-중국에서 행했던 오(五)형 가운데 하나로, 죄인의 이마나 팔뚝 등에 먹줄로 죄명을 써넣었던 형벌>에까지 처했다. 그러던 중, 제(齊)에서 사자(使者)가 왔는데, 그러자 손빈(孫臏)은 계략을 사용해서 비밀리에 위(魏)를 탈출했다. 그리고는 제(齊)에서 전기(田忌)의 수하(手下) 군사(軍師)가 되었다. 그 후, 손빈(孫臏)은 위(魏)에 침공해 들어가 있던 제군(齊軍)에게 10만개의 아궁이(밥을 지을 수 있는 시설물)를 만들라고 명하고는 군(軍)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5만개를, 그 다음날은 2만개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계속해서 퇴각했다. 그러자 그때 제군(齊軍)을 추격하고 있었던 방연(龐涓)은 제군(齊軍)들이 머물렀던 야영지에 남아있던 그 아궁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제군(齊軍)은 겁이 많기 때문에, 우리들이 추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이 두려워서 도망병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마음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러자 방연(龐涓)은 일각(一刻)이라도 빨리 제군(齊軍)을 추격하기 위해서 병사들의 장비를 가볍게 했고, 그런 다음에는 주야(晝夜)겸행(兼行)으로 강행군을 했다. 그랬던 한편, 손빈(孫臏)은 위군(魏軍)의 추격속도를 예측해가면서 그날 저녁때쯤에나 마릉(馬陵)에 도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 그 주위에 있던 큰 나무 하나를 골라서 그 나무의 껍질을 적당히 벗긴 후에, 그 바탕에다 하얗게 칠을 하고는, 그 위에다 또 다음과 같은 글을 크게 썼다. <방연(龐涓)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는 또 그 주위에다 복병을 배치하고는 <어둠 속에서 불이 보이면, 그 불이 보이는 곳으로 일제히 화살을 쏘아라!>라고 명령을 해두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곳에 도착했던 위군(魏軍)은 그 글을 써두었던 나무를 발견하고는 방연(龐涓)에게 보고를 했다. 그러자 방연(龐涓)이 달려와서 그 글을 읽으려했는데, 그런데 그때는 이미 밤이었기 때문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자 방연(龐涓)이 불을 밝혀서 그 글을 읽으려고 했던 순간, 주위에서 화살이 비처럼 쏘아져왔고, 그러자 위군(魏軍)은 물론, 방연(龐涓)의 몸에도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꽂혔다. 그러자 방연(龐涓)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죽었다. <드디어 애송이가 세상에 이름을 냈구나!> 그러자 위군(魏軍)은 대혼란에 빠져서 패했고, 태자 신(申)은 포로가 되었다.
<그 후>
제군(齊軍)의 사령관으로, 전공을 세우고 개선(凱旋)했던 전기(田忌)에게 당시, 재상이었던 추기(鄒忌)가 모함을 했고, 그러자 위왕(威王)의 의심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던 전기(田忌)는 초(楚)로 망명했다. 그리고 명장 방연(龐涓)을 잃었던 위(魏)에서는 그 싸움을 고비로 국력이 쇠하여져갔으며, 그러자 또 진(秦)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는 판단으로, 위(魏)의 혜왕(惠王)은 한(韓)의 소후(昭侯)와 함께 제(齊)에 귀속해서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또 손빈(孫臏)도 그 싸움으로 복수를 끝냈고, 그 후에는 소식이 단절되었던 것과 동시에 역사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또 일설에 따르면, 그 후에 병법서를 썼다고도 한다.

<戰國時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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