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5)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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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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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참고: 맹상군(孟嘗君-?부터 기원전 279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였고, 전국(戰國)사군(四君) 중 한사람이었다. 성(姓)은 규(嬀), 씨(氏)는 전(田), 휘(諱)는 문(文)이었고, 맹상군(孟嘗君)은 그의 시(諡)였다. 그리고 또 그는 제(齊)나라 위왕(威王)의 후손이었다.

 그(田文)의 아버지 전영(田嬰)은 선왕(宣王)의 이모제(異母弟)로, 설(薛-현재의 山東省 滕州)이란 곳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전영(田嬰)은 슬하(膝下)에 자식을 40명도 더 두었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의 어머니의 신분은 낮았고, 그의 생일은 또 5월 5일로, 그 날짜에 태어난 자식은 훗날 그 아버지를 죽인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전영(田嬰)은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그를 비밀리에 숨겨서 키웠다고 한다.(하지만 그 이야기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음)

 아무튼 그 후, 그가 성인 정도 되었을 때, 전영(田嬰)이 하루는 노하면서 그에게 <왜 아직도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또 그가 <왜 제가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러자 또 전영(田嬰)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것을 진정 네가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너처럼 그때 태어난 아이는 가문(家門)의 혜택을 잘 받아서 자란 다음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제가 가문의 혜택을 포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전영(田嬰)은 그의 뜻을 받아주어서 같은 집에서 살게는 해주었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날, 그는 전영(田嬰)에게 <아버님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의 손(孫)은 어떻게 될까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전영(田嬰)이 잘 모른다고 답을 했는데,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제(齊)의 영토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데도 우리 집은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랬다고 하지만, 하지만 또 우리 집에는 가족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사람들 때문에 이 집의 재산은 앞으로는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또 전영(田嬰)은 식객(食客) 한명을 집으로 초빙해서 그와 이야기를 해보게 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 객 앞에서 신랄한 비평을 가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대단히 날카로웠던 것이어서 금방 소문이 났다. 그러자 그 후에는 제후들 사이에서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전영(田嬰)은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전영(田嬰)의 후계를 잇게 된 그는 별 내세울 것도 없는 식색(食色)이라도 적극적으로 맞이했고, 그러자 그 수는 수천(數千)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때, 그는 중간에 칸막이를 세워두고 식객들과 같은 방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런데 그때 식객 중 한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 칸막이를 쳐둔 것은 주인의 것과 우리 식객들의 요리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또 그가 그 말을 듣고는 그 객에게 요리는 전부 같은 것임을 알려주었는데, 그러자 그 객은 자신의 언행에 수치심을 느껴서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그 일이 결국 그의 명성을 드높이게 했고, 그리하여 또 기원전 299년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은 그를 재상에 영접하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또 그는 진(秦)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어떤 사람이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그가 당대 일류의 인재인 것에 대해서는 저도 인정을 하지만, 그러나 그는 결국 제(齊)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진(秦)의 재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제(齊)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그대로 제(齊)로 돌려보내버린다면, 그는 또 필시 제(齊)의 이익을 위해서 일할 것이므로, 그러므로 또 결국 그는 진(秦)의 위협(威脅)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그 말을 받아들여서 그때 그가 묵고 있던 집을 포위했다. 그러자 곧 그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는 한 식객(食客)에게 시켜서 소양왕(昭襄王)의 총희(寵姬)에게 목숨을 구걸해보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 총희(寵姬)는 그때 그가 가지고 갔던 보물이었던 호백구(狐白裘)를 탐냈다. 그리고 또 그 호백구(狐白裘)란 여우의 겨드랑이에 난 흰 털만으로 만든 외투 같았던 것으로, 그것을 한 벌 만드는 데는 여우가 1만 필이나 필요했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대단히 귀한 물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것은 그가 진(秦)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소양왕(昭襄王)에게 헌상을 했던 것이었는데, 그래서 또 그는 당연히 고민이 되었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그때 식객 중에 구도(狗盜-개처럼 날렵한 도둑)란 사람이 나서서 그를 도와주려고 했고, 그리고는 소양왕(昭襄王)의 침소로 잠입해서 그것을 다시 훔쳐 내왔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그 총희(寵姬)에게 전달하고는 일단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또 언젠가 그 소양왕(昭襄王)의 마음이 바뀌었던지 맹상군(孟嘗君) 등은 급히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국경이었던 함곡관(函谷關)까지 갔을 때, 이미 밤중이어서 관문이 닫혀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난감해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식객 중 한사람이었던 물진사(物眞似)란 사람이 나서서 닭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그 소리를 들었던 닭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함곡관(函谷關)은 열렸고, 그들은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평소에 학자나 무술인 등의 식객들은 맹상군(孟嘗君)이 그런 도둑이나 하찮은 닭소리나 흉내 내는 사람들을 식객(食客)으로 받고 있었다는데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지만, 그러나 그때는 또 <과연, 사람은 쓰기 나름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 맹상군(孟嘗君)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이야기가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가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제(齊)로 다시 돌아왔던 맹상군(孟嘗君)은 재상이 되었고, 그 후에 한(韓) ・위(魏)군과 합세해서 진(秦)을 쳤다. 그런데 또 그 즈음에 풍환(馮驩)이란 거지 같은 사람이 그를 찾아왔는데, 그러자 그는 그를 식객으로 맞아주었고, 하급(下級)숙사에서 머물게 했다. 그러자 또 그 풍환(馮驩)은 가지고 있던 검(劍)을 땅에 두드리면서 다음과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장검(長劍-나름대로 검객인데)인데도 이런 대접을 받으니 그냥 돌아 가버릴까? 그러나 당장 먹을 물고기 한 마리 없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맹상군(孟嘗君)은 그를 중급(中級)숙사로 올려주었다. 그러자 또 그 풍환(馮驩)이 똑 같이 칼로 땅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장검(長劍)인데, 그냥 돌아 가버릴까, 하지만 다시 돌아가려고 해도 타고 갈 가마가 없네> 그러자 또 맹상군(孟嘗君)은 그를 상급(上級)숙소로 옮겨주었다. 그러자 또 그 풍환(馮驩)이 앞과 꼭 같이 하면서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장검(長劍)인데 그냥 돌아 가버릴까, 지금까지 집 한 채도 가져본 적이 없는데> 그러자 맹상군(孟嘗君)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후로 1년 정도나 그를 무시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맹상군(孟嘗君)은 설(薛)의 영지를 백성들에게 대여해주고 거기서 들어오는 이자로 식객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지만, 그런데 그 중에는 그 이자를 지불하지 않는 백성들도 있었다. 그러자 식객들 중에서 그 풍환(馮驩)이란 자가 추천되었고, 그래서 그는 그 이자를 받기 위해서 그 백성들에게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자를 내지 않았던 백성들을 모두 한 집에 모았는데, 그러자 몇 사람이 그 이자를 내놓았다. 그러자 또 그는 그 돈으로 술과 고기를 사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연회를 베푼 뒤에 한 사람씩 일일이 만나서 기한이 찼는데도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기한을 연장해 주었고, 그리고 아직 기한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증문(證文)을 쓰게 해서 따로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 백성들이 보던 앞에서 불에 태우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맹상군(孟嘗君)이 토지를 빌려주고 있는 것은 백성들에게 일을 주기 위함이요. 하지만 맹상군(孟嘗君)은 그 이자를 지불하지도 못할 정도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그 증문(證文)을 태우라고 나에게 명령을 내렸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맹상군(孟嘗君)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요!> 그러자 그곳에 있었던 백성들은 모두 맹상군(孟嘗君)의 덕(德)에 감복했다.

 하지만 또 정작에 그 말을 들었던 맹상군(孟嘗君)은 몹시 화를 내면서 풍환(馮驩)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또 풍환(馮驩)이 이렇게 말을 했다. <이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사람들에게 그 이자를 내라고 해봐야 그들은 고작 도망이나 갈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터전을 잃게 된 그들은 맹상군(孟嘗君)을 원망하면서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맹상군(孟嘗君)은 돈만 좋아하지 백성들을 아낄 줄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 사람을 배신하고 돈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맹상군(孟嘗君)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증문(證文)들을 태우는 것으로 백성들에게 맹상군(孟嘗君)께서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보였고, 그리하여 맹상군(孟嘗君)의 덕을 천하에 알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또 맹상군(孟嘗君)도 그 말에 감복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 그는 민왕(湣王) 아래서 재상을 지내면서 내외의 정치를 맡았다. 그러자 그때, 그는 제(齊)의 국력을 최고로 올렸지만, 그러나 또 나라가 그렇게 부강해지자 민왕(湣王)은 갑자기 거만해져서 타국(他國)에 압도적인 외교를 펼치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민왕(湣王)에게 그에 대해서 간언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민왕(湣王)은 그랬던 그와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맹상군(孟嘗君)의 제(齊) 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는 제(齊)>라는 평(評)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맹상군(孟嘗君)은 제(齊)의 재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러자 또 당시 3천명이 넘었다던 식객들도 모두다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런데 그때 단 한명의 사람이 그의 곁에 남아있었다고 했는데, 그가 바로 앞의 그 풍환(馮驩)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맹상군(孟嘗君)을 다시 재상에 올리기 위해서 일대 연극을 벌였으며, 그 우선으로 그는 진(秦)으로 갔다. 그리고는 소양왕(昭襄王)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맹상군(孟嘗君)이 진(秦)에서 벼슬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그동안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즉시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풍환(馮驩)은 그 다음으로 제(齊)로 급히 돌아가서 민왕(湣王)을 만나서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진(秦)에서 맹상군(孟嘗君)을 데려가려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되면 큰일이 아닐 수 없으므로, 왕께서는 그를 복직시켜주고, 영토도 더 올려주어서 그를 위로하심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자 민왕(湣王)은 그 사정을 정확히 알아본 다음에 풍환(馮驩)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풍환(馮驩)의 말대로 맹상군(孟嘗君)을 복직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토까지도 올려주었다.

 그 후, 풍환(馮驩)은 맹상군(孟嘗君)에게 사라진 식객들을 전부 다시 부르게 했다. 그러나 맹상군(孟嘗君)은 자신을 버리고 갔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풍환(馮驩)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맹상군(孟嘗君)을 설득했다. <그들이 그때 갔던 것은 맹상군(孟嘗君)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부자들 옆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지만, 그러나 가난한 사람 곁에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그것은 또 아침에 시장에 나가보면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그러나 해가 지고 나서 시장에 나가보면 사람들이 적은데, 그것은 또 아침보다 저녁에 물건이 적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살 것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또 그들이 그때 맹상군(孟嘗君)을 떠났던 것은 그들이 맹상군(孟嘗君)을 싫어했고 좋아했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맹상군(孟嘗君)과 같이 있다가는 그들 자신들의 생활도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맹상군(孟嘗君)이 납득하고 풍환(馮驩)의 뜻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풍환(馮驩)이 맹상군(孟嘗君)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재빠른 토끼는 잘 도망가기 위해서 항시 구멍을 3개를 파둡니다. 그런데 맹상군(孟嘗君)에게는 영토인 설(薛) 한 개의 구멍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위(魏)와 제(齊)에 2개의 도망갈 구멍을 더 만들어두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맹상군(孟嘗君)은 풍환(馮驩)에게 돈(金)을 주어서 위(魏)의 양왕(襄王)을 만나게 했다. 그러자 또 그 자리에서 풍환(馮驩)은 양왕(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제(齊)의 민왕(湣王)은 과거에 맹상군(孟嘗君)을 쫓아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으므로 명성이 높은 맹상군(孟嘗君)을 위(魏)로 불러들이신다면 금방 위(魏)는 부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양왕(襄王)은 아주 기뻐하면서 풍환(馮驩)에게 상석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 후, 맹상군(孟嘗君)은 위(魏)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러자 또 풍환(馮驩)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맹상군(孟嘗君)을 말렸다. <민왕(湣王)이 곧 달려올 것이므로 잠시만 더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그 후, 풍환(馮驩)의 생각대로 위(魏)에서 빈번히 사자가 와서 맹상군(孟嘗君)을 만나고 가는 것을 알게 되었던 민왕(湣王)은 맹상군(孟嘗君)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붙잡았다. <설(薛)에 선대(先代)의 사당(廟)을 지을 생각이므로 제(齊)에 머물러주시오> 그러자 풍환(馮驩)이 그 말을 듣고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드디어 2개의 도망 구멍이 더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는 <교토삼굴(狡免三窟)> 고사의 어원이 되었다.

 하지만 또 당시, 민왕(湣王)은 아직 맹상군(孟嘗君)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민왕(湣王)의 그런 성정(性情)을 잘 알고 있었던 맹상군(孟嘗君)은 스스로 은거(隱居)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도 그의 명성은 드높았고, 그 때문에 또 진(秦)으로서는 제(齊)에 그가 있는 한은 어쩔 수가 없다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진(秦)은 맹상군(孟嘗君)을 제거하기 위한 강력한 공작(工作)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또 그 때문에 민왕(湣王)의 시기심은 더욱 높아져서 결국에는 그를 죽일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결국 맹상군(孟嘗君)은 기원전 284년에 풍환(馮驩)이 미리 확보해두었던 그 도주 길에 올라서 위(魏)로 들어갔고, 그러자 또 위(魏)에서는 그를 재상으로 영접했다.

 그 후, 민왕(湣王)에게 한을 품고 있었던 연왕(燕王)의 뜻을 받았던 악의(樂毅-燕의 장군. 후술. 그러나 낙의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의 주도로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과 진(秦) 그리고 연(燕) 그 5개의 연합군이 성립되었으며, 그러자 제(齊)는 그 연합군에 대패했다. 그러자 또 그 후, 제(齊)로 쳐들어갔던 악의(樂毅)에 의해서 민왕(湣王)은 살해되었으며, 그로서 제(齊)는 바로 멸망 촌전(寸前)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전단(田單-齊의 장군)에 의해서 제(齊)는 부흥(復興)했으며, 그러자 맹상군(孟嘗君)도 다시 제(齊)로 돌아왔다.

 그 후, 기원전 279년에 그는 사거했으며, 그 후에 시(諡)로 맹상군(孟嘗君)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그의 자손들은 후계문제로 서로 다투었으며,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위(魏)와 제(齊)가 설(薛)을 공격해서 그의 자손들은 모두다 죽었다.

 
그리고 또,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염려해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러나 위의 田單에 대해서는 소개할 것이 조금 있기 때문에, 잠시 소개를 하고 마칩니다.

 그리고 또 이 자리를 빌어서 그동안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인사 올려드리며, 민족의 대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하여 가내 두루 평안하시며, 또한 풍성하고도 넉넉한 추석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해 올립니다. 그리고 또한 행복하시기만 하고 무탈한 명절 되시길 진심으로 빌어 올립니다. 그럼, 저 역시도 명절을 지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추석이 지난 후에 편안한 날 다시 뵙기를 희망합니다. 그럼, 즐거운 명절 되십시오...

 ※ 전단(田單-기원전 3세기경)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의 무장이었고, 연(燕)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 자신의 지략으로 나라를 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기(史記)에 단독으로 올랐던 인물이었다.

 기원전 284년, 제(齊)는 연합군에 패했다. 그러자 당시 하급직이었던 전단(田單)은 주위의 사람들과 자신의 친척들에게 마차(馬車)를 보강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제(齊)에는 아직도 70여 성(城)이 남아있다>라고 태평스런 말을 하면서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낙의(樂毅)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제(齊)가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단 그의 친척들이 모여서 마차(馬車)를 보강했는데,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대로 낙의(樂毅)가 쳐들어오자 제(齊)는 그를 대항하는데 역부족이었다.

 그 후, 전단(田單)이 머물고 있던 성마저 떨어졌고, 그러자 사람들은 그 성을 탈출하는데 급급했다. 그러자 또 미리 보강(補强)하지 않았던 마차(馬車)들은 차축(車軸)이 부러지는 등해서 연(燕)군(軍)의 손에 넘어갔지만, 그러나 미리 보강해두었던 마차(馬車)들은 다행히도 즉묵(卽墨-현재의 山東省 靑島市 內)이란 곳으로 옮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즉묵(卽墨)도 낙의(樂毅)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즉묵(卽墨)의 성주(城主)가 그에 대항해서 싸웠지만 오히려 격퇴 당했다. 그러자 또 그때, 앞의 일을 알고 있었던 어떤 관리가 전단(田單)을 추천했고, 그러자 그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전단(田單)은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너무도 갑작스럽게 장군이 되었던 전단(田單)은,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잘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선 자신의 집 정원에서 선조들에 대한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그러자 그 공물(供物)에 새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러자 또 그것을 불길하게 생각했던 전단(田單)은 그것이 필시 무슨 징조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내가 전날 꿈을 꾸었는데 군사들 중에 신(神)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런 기분이 든다는 병사를 찾아내서 제단에 올리고는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것으로 군령(軍令)은 이제 신(神)의 말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즈음에 제(齊)의 70 수(數) 도시(都市)들은 수도 임치(臨淄-현재의 山東省 淄博市)를 포함해서 거의가 점령이 되었던 상태였다. 그래서 또 제왕(齊王)이 머물고 있던 거(莒-현재의 山東省 日照市)와 즉묵(卽墨) 그 두 도시만이 어떻게든 버텨내면서 수년(數年)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 무렵, 연(燕)에서는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를 했다. 그러자 전단(田單)은 그 태자와 낙의(樂毅)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그때가 호기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간첩을 연(燕)으로 보내서 그 궁정(宮廷) 안에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리게 했다. <거(莒)와 즉묵(卽墨)은 지금이라도 바로 함락할 수 있는데도, 낙의(樂毅)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제왕(齊王)이 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제(齊)가 현재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낙의(樂毅) 대신으로 올 장군이 이 제(齊)를 사정없이 짓밟는 것이다>

 그러자 연왕(燕王)은 그 말을 믿고는 낙의(樂毅) 대신으로 기겁(騎劫)이란 자를 제(齊)로 보냈고, 낙의(樂毅)는 귀국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자 또 졸지에 낙의(樂毅)는 망명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부당한 지휘관 교대에 불만을 가졌던 연(燕)군(軍)들은 곧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낙의(樂毅) 대신으로 왔던 그 기겁(騎劫)이 낙의(樂毅)는 제(齊)의 70여 성(城)이나 함락을 시켰던 것에 비해서 자신은 단 한 개의 성도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내심 전공(戰功)이 없다는 초조감에 휩싸여있을 것이란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또 전단(田單)은 <포로가 되면 코가 잘리는 벌을 받게 된다는 말을 듣고 벌벌 떨고 있다>라든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 밖에 있는 자신들 선조들의 묘가 파헤쳐지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겁을 먹고 있다>라는 등의 허위정보를 연(燕)군(軍)에 흘렸다.

 그런데 기겁(騎劫)이 그대로 따라하자 그것을 봤던 즉묵(卽墨)의 민병(民兵)들은 <우리가 항복을 하게 되면, 그대로(유언비어처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 그리고 또, 조상들을 욕보이는 저런 자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소리치면서 사기(士氣)를 올렸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여자아이들과 노인들을 배치시켜서 성(城)을 지키게 하는 것처럼 해놓고는 사자를 연군(燕軍)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또 <이제 제(齊)에는 싸울 병사들도 없고, 화살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항복을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아직도 철저항전을 부르짖는 자들이 몇 명 남아있으므로, 그래서 그들을 설득시키는데 수일(數日) 정도가 걸릴 것이므로, 그때까지 말미를 달라>고 말하게 했다. 그러자 또 기겁(騎劫)은 5일의 말미를 주었는데, 그러자 또 그런 사실을 전해 들었던 연군(燕軍)들은 그때 이미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왔던지 벌써 수년(數年)이 지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그간의 피로와 망향(望鄕) 생각으로, 이제는 싸움이 다 끝났다면서 환호했다. 그러자 연군(燕軍)들의 긴장은 금방 풀려버렸고, 경계심도 그만큼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자 전단(田單)은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말미 중 하루 밤을 선택해서 비밀리에 성문을 열고는 뿔에는 단검을 꽂았고, 꼬리에는 횃불을 매달았던 소 천(千)두(頭)를 연군(燕軍)이 주둔하고 있던 곳으로 방사했다.(火牛의 計) 그러자 그 소들은 미친 듯이 연군(燕軍)의 진지로 달려갔고, 그리고는 뿔에 달렸던 단검으로 연군(燕軍)들을 찔렀을 뿐만 아니라, 꼬리에 횃불을 단 채로 연군(燕軍)의 막사를 덮쳤기 때문에, 그래서 연군(燕軍)의 진영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그 우왕좌왕하던 연군(燕軍)들을 향해서 그동안 연군(燕軍)에 한을 품고 있었던 병사들을 풀어서 맹공을 가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백성들은 큰북을 울리면서 제군(齊軍)이 대군인 것처럼 위장을 했고, 그러자 또 연군(燕軍)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혼란을 일으켰으며, 그리하여 결국 기겁(騎劫)의 군대는 무너졌다.

 그 후, 전단(田單)은 그 기세를 타고 잃었던 성들을 전부다 되찾았으며, 그러자 또 수도였던 임치(臨淄)로 그가 개선했을 때, 양왕(襄王)은 그를 평안군(安平君)에 봉했다.

 그 후, 그는 장군의 자격으로 몇 번인가 전쟁에 참가했으며, 특히 조세가(趙世家)에는 그가 나중에 조(趙)나라의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을 해두었다. 그리고 또, 동시대의 사료(史料)였던 여씨춘추(呂氏春秋)와 순자(荀子)에서도 그가 아주 훌륭한 군략(軍略)을 가졌던 사람이었다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또 사마천(司馬遷)도 <손자(孫子)의 "처음에는 처녀(處女)처럼 적에게 문을 열어주고, 나중에는 달아나는 토끼처럼 적이 방비할 틈을 주지 않는다"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 전단(田單)의 경우를 말한 것이다>라고 그를 제법 높게 평가했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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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4)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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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
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
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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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참고: 공자(孔子) 등, 너무 유명해서 잘 알려진 사람들에 대한 소개는 가급적 삼가거나, 나중에 따로 한곳에 묶어서 소개해드릴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이름이 나온 다음에 그냥 넘어가기도 뭐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진부(陳腐)해해하실 분은 상기의 내용을 참조하시어, 부디 이해 당부 드립니다.

<孔丘>



 ♧ 공자(孔子-기원전 551년 9월 28일부터 기원전 479년 4월 11일)는 춘추시대 중국의 사상가였으며, 철학자였고,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였다. 그리고 오늘날의 도덕(道德)을 확립했던 시조(始祖)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의 씨(氏)는 공(孔)이며, 휘(諱)는 구(丘) 그리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며, 공자(孔子)라는 것은 그에 대한 존칭이다(子=先生). 그래서 또 유럽에서는 라틴화(化)된 말로 컨퓨셔스(Confucius-孔夫子의 音譯이며, 夫子는 先生이라는 존칭)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그는 기원전 551년(일설에는 552년)에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변경의 추읍<陬邑-한자의 뜻과 다르게, 昌平 또는 太平을 누린다는 의미이며, 邑은 村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그곳은 현재의 山東省 곡부(曲阜)市라고 알려져 있다>에서, 추읍(陬邑)대부(大夫)의 차남으로 태어났다.(하지만 또 그에는 당시에 아주 비천한 계급이었던 巫女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도 있으며, 그것은 또 공자가 스스로 論語에서 '자신은 가난하고 賤한'이라고 표현했던 것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아무튼, 알려지기로 그의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안징재(顔徴在)였다고 하지만, 그러나 논어(論語)에서는 기술(記述)된 바가 없다. 그리고 또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었다고 했고, 그래서 또 고아로 자랐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학문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고학(苦學) 중에 예학(禮學)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또 어떻게 해서 그 예학(禮學)을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래서 또 그 때문이었던지 당시 예학(禮學)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국조(國祖) 주공단(周公旦-6-13참고)을 제사지내는 대묘(大廟)에 들어갔을 때는, 오히려 그는 '이것은 무엇인가?' '저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면서 물어보는 등, 자신의 지식에 애매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그에는 또, 그때 그가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은, 오히려 禮를 실천했던 것이었다 라는 이설이 있다)

 아무튼 그는 또 노자(老子)에게 교육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그러나 또 그것은 공자(孔子)의 예학(禮學)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려고 했던 후세의 유가(儒家)들과, 그리고 또 그 공자(孔子)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했던 도가(道家)들의 사상이 일치했던 것으로, 일종의 날조(捏造)였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또, 그는 신장(身長)이 9척(尺) 6촌(寸-춘추시대의 1척은 약 22.5센티였던 것으로 계산하면 약 216센티)이나 되었다고 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장인(長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史記의 孔子世家)

 그리고 또 그는 52세 때, 노(魯)의 정공(定公)에 의해서 중도(中都)란 곳의 재(宰-宰相)가 되었다고 사기(史記)의 공자(孔子)세가(世家)에서는 전하고 있다. 하지만 또 그 다음 해에는 대사구(大司寇-刑部를 맡았던 六卿 중의 한명)에 취임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또 당시, 정변(政變)으로 노(魯)의 실권을 쥐게 되었던 양호(陽虎)의 권유에 응했던 것이라고 한다.(논어의 陽貨 제17-하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도망갔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또, 그는 기원전 497년에 국정(國政)에 실망을 해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제국(諸國)을 순례하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나라는 없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기원전 483년에 69의 나이로 노(魯)에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제자들의 육성에만 전념했으며, 기원전 479년에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상기의 내용으로 봤을 때, 공자(孔子)의 인생은 대부분이 무관(無冠)으로, 일개학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한 대(漢代-前漢)의 사가(史家)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는 그의 공적을 왕(王)에 버금하는 것으로 평가를 해서 공자(孔子)세가(世家-諸侯王家의 역사를 말함)라고 이름을 붙였고, 그리고 또 그의 제자들의 전기는 중니(仲尼)제자(弟子)열전(列傳)이라고 이름 붙였을 만큼 사마천은 공자(孔子)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또 후세에 유교(儒敎)에서는 그를 두고 소왕(素王-無位의 王)이라고 부르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의 공적과 주장에 관해서도 잠시 알아보면, 그는 인(仁-人間愛)과 예(禮-規範)에 기초한 이상(理想)사회의 실현을 강조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또 그는 당시까지 샤머니즘(shamanism-巫術) 같은 원시유교(단, 儒敎란 명칭이 성립되었던 것은 후세였다)를 체계화해서 하나의 도덕(道德)과 사상으로 승화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또 당연히 그의 근본적인 뜻(意義)은 인(仁)에 있었으며, 그 인(仁)을 다양한 상황에서 관철시키는 것으로 해서 도덕(道德)을 바로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그 근저(根柢)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인 선조숭배사상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유교(儒敎)에서는 인(仁)이라는 인도(人道)적인 측면과, 예(禮)라는 가부장제(家父長制)를 축(軸)으로 했던 신분제도 그 쌍방(雙方)을 함께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 공자(孔子)는 자신의 그런 사상을 국정(國政)에 반영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거의 무산되었다. 그래서 또 공자(孔子)는 만년에 그에 실망한 나머지 노(魯)나라로 다시 돌아갔으며, 그러던 중에 제일로 아꼈던 애제자 안회(顔回)마저 청빈(淸貧)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그 다음으로 아꼈던 제자 자로(子路)는 모반이 일어났을 때 왕을 지키려다가 참살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모든 것에 낙심을 했던 공자(孔子)는 결국 불우한 말로(末路)를 맞이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공자(孔子) 사후에 맹자(孟子), 순자(荀子) 등이 그의 후계자로 나오기도 했지만,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이 전국(戰國)에서 한(漢) 초기로 넘어가려던 때여서 그다지 세력을 확장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후였던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거치면서 점점 유교(儒敎)의 세력은 확대되어 갔고, 그 결과로 유교(儒敎)는 결국 국교(國敎) 화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 시대에 의한 고하(高下)는 있었지만, 유교(儒敎)는 중국 사상의 근간(根幹)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그 한참 후였던 20세기에, 모택동(毛澤東)이 발동했던 <문화대혁명> 때, 공자(孔子)는 또 다른
의미로 중국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었으며, 그것은 또 그때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비림(임)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란 것을 전개해서 공자(孔子)와 임표(林彪)를 결부시켜서 비판하는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 결과로 공자(孔子)는 봉건주의를 확대했던 중국사(中國史)의 <악인>으로 치부되었으며, 임표(林彪)는 그런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현대에 부활시켰다고 하는 <현대의 악인>으로 치부되었던 불행한 역사가 중국에는 있었다.

 ♣ 증자(曾子-기원전 506년부터 ?)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유교(儒敎) 여명(黎明)기의 중요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휘(諱)는 참(參)이었으며, 자(字)는 자여(子與), 아버지는 증석(曾皙), 아들로는 증신(曾申)이 있었다.

 그는 노(魯)의 무성(武城-현재의 山東省 武城) 출신으로, 효()도(道-親孝行)에 밝았으며, 그래서 공자(孔子)의 눈에 띄게 되어서 효경(孝經)을 저술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또 그의 제자로는 앞의 오기(吳起)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에는 또 그 오기(吳起)의 실제 스승은 증신(曾申)이었고, 그래서 또 그를 파문시켰던 사람은 바로 그 증신(曾申)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또 그는 <증참(曾參), 사람을 죽였다>라고 하는 말을 남겼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또 그 사연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면, 어느 때에 그가 알던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그 사실을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고 한다. <증참(曾參)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으려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 후에 두 번, 세 번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식들이 전해져오자 그의 어머니는 그때서야 그 말을 믿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전국책(戰國策)이란 곳에 실려 있다는 것으로, 그 교훈은 또, 평소에는 별 들을 가치도 없는 거짓말 같은 것이라도 사람이 몇 번을 꼭 같이 듣게 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글은 <24효(孝)>에도 들어있다는데, 그래서 그 내용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또 어느 때에, 그가 풀 같은 것을 베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손님이 찾아왔다.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그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할 지를 몰라서 그가 빨리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지만, 그러나 그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서 자신의 손가락을 계속해서 깨물었다는데, 그러자 또 그때, 그는 갑자기 가슴이 아픈 것을 느끼고는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손님이 와있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그 손님을 맞이했다고 한다.

 # 참고: 사마양저

 사마양저(司馬穰苴-생몰불명)는 중국 춘추시대 제(齊)의 장군으로, 성(姓)은 규(嬀)였고, 씨(氏)는 전(田-그러나 景公을 섬기다가 大司馬가 되었기 때문에, 후에 司馬라고 했다), 휘(諱)는 양저(穰苴)였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안영(晏嬰)의 추천으로 등용되었으며, 그 후에 제(齊)가 번영하는데 공적을 세웠다. 그리고 또한, 병법서인 사마법(司馬法)은 그가 썼던 것을 다시 정리했던 것이었으며, 전완(田完)의 후예로 알려졌다.

 참고: 사마법은 무경칠서(武經七書) 또는 무학(武學)7서 중의 하나이며, 중국의 병법에 관한 일곱 가지의 책인 무경칠서는 육도(六韜)와 손자(孫子) 그리고 오자(吳子)와 사마법(司馬法) 그리고 삼략(三略)과 울요자(尉繚子) 그리고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전완(田完 또는 陳完-생몰불명)은 중국 춘추시대 진(陳)의 공자(公子)였고, 제(齊)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성(姓)은 규(嬀)였고, 씨(氏)는 진(陳) 또는 전(田), 휘(諱)는 완(完), 시(諡)는 경(敬)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여공(厲公-利公)의 차남이었으며, 진경중(陳敬仲) 또는 전경중(田敬仲)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전국7웅이었던 전제(田齊)의 조상이었다.

 아무튼, 당시의 제(齊)는 장기 간에 걸쳤던 내란의 결과로 경공(景公)이 즉위했으며, 명신으로 이름이 높았던 안영(晏嬰)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당시에는 진(陳)에서 망명해 왔던 귀족 전씨(田氏)들의 세력이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제(齊)의 구(舊) 귀족들은 그런 그들을 질시(嫉視)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경계의 도를 점점 더 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랬을 때쯤, 제(齊)는 진(晋)과 연(燕)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로 영토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자 상심했던 경공(景公)은 그 영토의 회복을 위해서 고심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마침 그때 안영(晏嬰)이 사마양저(司馬穰苴)를 추천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안영(晏嬰)은 <양저(穰苴)는 비록 전씨(田氏)의 서자(庶子)이지만, 그 문덕(文德)은 병사들을 따르게 하고, 그 무덕(武德)은 적을 위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군이시여, 부디 그를 한번 시험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를 천거했다. 그러자 또 경공(景公)은 사마양저(司馬穰苴)와 여러 가지의 병법에 대해서 논하고는 그를 장군의 자리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원래 저의 지위는 보잘 것이 없는 낮은 자리인데, 그런데도 갑자기 장군이 된다면 사람들이 저를 업신여기고 따르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군의 총신(寵臣)이며, 그에 더해서 신망까지 있는 사람을 저의 고문(顧問)으로 임명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경공(景公)에게 말을 했다. 그러자 경공(景公)은 그의 말을 들어주었고, 그 결과로 장가(莊賈)라는 사람이 그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장가(莊賈)에게 <내일 정오에 군문(軍門)에서...>라고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다. 그런데 장가(莊賈)는 돌아가던 길에 <진정으로 군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친척과 고관(高官)들과의 송별(送別)을 위한 주연(酒宴)을 벌였고, 그 때문에 약속시간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러자 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장가(莊賈)가 없던 사이에 군을 정비해서 군규(軍規)를 전군(全軍)에 시달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었을 때쯤에 나타났던 장가(莊賈)에게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장가(莊賈)는 솔직하게 전날 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늦게 되었다고 말을 했고, 그러자 사마양저(司馬穰苴)가 또 이렇게 말을 하면서 격노(激怒)했다고 한다. <장군이란, 일단 출격을 명받았으면 집안일 같은 것은 잊어야 하고, 군중(軍中)에 임해서는 친척이나 지인(知人) 같은 것을 잊어야 하며, 전장(戰場)에 나서서는 자신의 안전 따위는 잊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현재, 적군은 이 나라를 유린하며 깊숙이 쳐들어와 있는 상태이고, 그로 인해서 국내는 불안에 휩싸여 있으며, 병사들은 또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풍우(風雨)에도 아랑곳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군께서도 그 모든 일로 심려하고 계시며, 그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또 밤잠도 설치고 계신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고작 송별을 위한 주연 때문에 출진(出陳)에 늦었다니, 그것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는 군법에 따라서 그 장가(莊賈)를 처형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장가(莊賈)는 너무 놀라서 경공(景公)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그리고는 경공(景公)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사자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장가(莊賈)를 처형시켜 버렸다. 그러자 또 그것을 지켜봤던 병사들은 사마양저(司馬穰苴)를 경외(敬畏)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군규(軍規)를 바로 세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경공(景公)에게 용서를 빌러 갔던 장가(莊賈)의 사자가 다시 돌아와서 그 뜻을 사마양저(司馬穰苴)에게 전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사마양저(司馬穰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고는 그 사자를 쫓아 보냈다고 한다. <장수는, 군(軍營)에 있을 동안에는 비록 군령(君令-왕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 후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군중(軍中)에 있었을 때는 항상 병사들과 행동을 같이 했고, 식사도 같은 것을 먹었으며, 약한 병사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으며, 병자들까지도 출진의 뜻을 높였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런 일들을 알게 되었던 진(晋)과 연(燕)의 군대에서는 미리 제군(齊軍)에 겁을 먹고 후퇴하기 시작했으며, 그러자 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잃어버렸던 땅을 모두 되찾았다. 그러자 또 그 후, 경공(景公)은 개선하고 왔던 그를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했다.

 그 후, 전씨(田氏)의 세력은 점점 더 확대되었고, 그러자 또 타족(他族)들은 그런 그들을 더욱 질시(嫉視)했다. 그러자 또 그 결과로 그는 구(舊) 귀족들<晏嬰이 등장하기 이전에 국정을 장악했던 자들로, 그에는 또 포(鮑) 씨(氏-鮑叔의 家系)와 고(高) 씨(氏) 등>로부터 참언을 받았으며, 그러자 또 그 말을 받아들였던 경공(景公)으로부터도 그는 소외되었고, 그 후에는 해임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 후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도 전씨(田氏)들의 세력 확대는 멈추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제(齊)의 강(姜) 씨(氏-太公望의 家系)들로부터 나라까지도 빼앗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위왕(威王) 때에는 왕호(王號)를 부르게까지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위왕(威王)은 사마양저(司馬穰苴)의 병법을 존경해서, 그래서 또 그것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제후들이 제(齊)에 입조(入朝)하게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위왕(威王)은 학자들에게 시켜서 그의 병법을 연구하게 했으며, 그 결과로 사마양저(司馬穰苴)병법이란 것이 탄생했으며, 그것이 후세에 사마법(司馬法)이 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그 사마법은 전부 155편으로 되어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현존(現存)하는 것은 인본(仁本)・천자지의(天子之義)・정작(定爵)・엄위(嚴位)・용중(用衆) 그 5편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후세에 사마천(司馬遷)은 그 병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넓고 깊으며, 특히 삼대(三代-夏・殷・周)의 전쟁에 관해서 그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된 책은 없다>

 그리고 또, 그 현존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그것은 병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쟁에서의 의례적(儀禮的)인 것을 적은 부분이 많으며, 그것에 대한 예로는 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에는 전쟁에 져서 도망을 치는 적은 백보(百步)까지밖에는 추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후퇴하는 적도 삼사(三舍-앞에서 설명되었음. 그러나 다시 상기하는 차원에서, 舍는 군이 하루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로, 대충 12킬로미터 정도임. 그러므로 대충 36킬로미터)까지밖에는 추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실전(實戰)적인 부분으로서는 <전쟁에서는 우선, 적보다도 이동하는 것이 더 힘들고, 그리하여 도착이 늦어지게 되면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리고 또 쉬게 되면 나태해지기 쉽고, 하지만 또 쉬지 않으면 피곤해진다. 그리고 또 그 휴식이 길어지게 되면 다시 공포(恐怖)가 찾아온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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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3)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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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
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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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 오기(吳起-?부터 기원전 381년)는 중국 전국시대의 군인으로, 정치가였고, 군사사상가(軍事思想家)였다. 그는 또 손무(孫武), 손빈<孫臏-孫武의 자손으로 알려졌으며, 孫武와 함께 孫子로 불려졌던 인물이었다. 저작에 손빈병법(孫臏兵法)이 있으며, 기회가 되면 다음에 소개함>과 함께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가 생전에 행했던 병법(兵法)은 별명으로 <손오(孫吳)의 술(術)>이라고도 불렸으며, 그가 죽은 후에 나왔던 <오자(吳子)>의 원작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들은 오기(吳期)가 있었다.

 참고: 1. 별록(別錄)은 중국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이 펴낸 장서(藏書-秘書) 목록 집으로, 조정의 장서목록과 해제집(解題集)을 모아 엮은 것이며, 칠략(七略)의 처음 이름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때 없어져서 오늘날은 일부(20권)만 전한다고 하며, 그리고 또 칠략(七略)은 역시 유향의 별록(別錄)에 입각해서 그의 아들이었던 흠(歆)이 지었던 서적 분류목록이었으며, 집략과 육예략 그리고 제자략, 시부략, 병서략, 술수략, 방기략으로 분류하였던 것이었다. 3만 2000권.

 2. 그리고 그 별록(別錄)에 의하면 <노(魯)의 좌구명(左丘明)이 춘추좌씨전을 작성해서, 그것을 제자였던 증신(曾申-曾子)에게 전했고, 그러자 또 그 증신은 자신의 제자 오기(吳起)에게 그것을 전했으며, 오기(吳起)는 다시 그것을 자신의 아들 오기(吳期)에게 전했고, 오기(吳期)는 제자였던 초(楚)의 탁초(鐸椒)에게 전했으며, 탁초(鐸椒)는 다시 제자였던 조(趙)의 우경(虞卿)에게 전했고, 그 우경(虞卿)은 다시 제자였던 순경(荀卿-荀子/荀況)에게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그는 위(衛)의 좌씨(左氏-현재의 山東省 菏沢市 定陶県) 출신의 사람이었고, 증자(曾子-曾申 또는 曾參. 공자의 제자)에게 배웠다고 했지만,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혀서 파문(破門)당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그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일찍이 벼슬을 하기 위해서 각지를 떠돌았는데, 그런데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가산(家産)만 탕진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라고 비웃은데 격분해서 고향사람들을 죽인 일로 해서(일설에 의하면, 그때 고향사람 약 30여 명을 죽이고는 曾子에게로 갔다고 함)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두말없이 증자(曾子)의 문하를 떠났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는 노(魯)의 원공(元公)이었던 가(嘉)를 찾아가서 장군이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는 자신의 아내가 제(齊)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노(魯)의 입장에서 적국(敵國)의 사람이었던 자신의 아내를 미리 죽였던 것으로 해서 가(嘉) 등의 의심을 풀고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은 또 그의 인격에 대한 불신감을 낳게 했고, 그러자 또 노(魯)의 대부(大夫)들은 그를 두고 <오기(吳起)란 자는 장군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노(魯)와 형제의 나라인 위(衛)를 독단으로 침략한 이상한 사람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자 또 그 말을 들었던 원공(元公)은 그를 징계면직(懲戒免職)했고, 그로써 그는 실각(失脚)했다. 그러자 또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다시 위(魏)의 문후(文侯)에게로 도망쳤다.(그러나 그는 그 사이에 齊를 쳐서 魯를 강국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함)

 그러자 또 문후(文侯)는 당시 위(魏)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1,2를 다투던 명군(名君)으로, 적극적으로 인재를 등용해서 위(魏)의 국력을 상승시키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오기(吳起)가 위(魏)로 들어왔다고 하자 가신(家臣)이었던 이극(李克)이란 사람에게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이극(李克)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탐욕적이고,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흠이지만, 그러나 군사(軍事)적으로는 명장(名將) 사마양저(司馬穰苴-중국 춘추시대 齊의 장군. 기회가 되면 다음에 소개함)도 그를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문후(文侯)는 그를 등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그 후, 오기(吳起)는 군중(軍中)에 있을 때, 병사들과 같은 것을 먹고, 그 병사들과 같은 곳에서 잠을 잤으며, 그 병사들 중에서 상처가 나서 고름이 생긴 병사가 생기자,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빨아냈다. 그런데 또 어느 때, 그가 다른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고 있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옆에 있다가 탄식했다. 그러자 그가 물어보자 그 여자가 이렇게 답을 했다. <장군께서는 저 아이 아버지의 고름도 빨아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그 사람은 장군의 행동에 감격해서 목숨을 바쳐서 적과 싸웠고, 그리고는 전장에서 장열하게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장군께서 저 아이의 고름도 빨아내어주고 있으니, 장차 저 아이도 그 사람과 같이 그렇게 장열하게 죽을 것 같아서 이렇게 미리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여인의 이야기가 시사(示唆)해주는 바와 같이, 당시 병사들은 모두 그의 행동에 감격해서 그를 신복(信服)처럼 따르면서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그래서 그 군대는 압도적으로 강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오기(吳起)는 그런 군사들을 이끌고 진(秦)을 쳤으며, 그리고는 5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러자 또 그 공적이 인정되어서 그는 서하(西河)의 태수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로 진(秦)과 한(韓)을 견제하게 되었
다.

 그리고 또 그 후, 문후(文侯)가 죽고 그 아들이었던 무후(武侯)가 즉위하자 전문(田文-孟嘗君과는 同名異人)이란 자와 재상(宰相)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지만, 그가 졌다. 그러자 또 그는 그에 불복(不服)해서 전문(田文)을 찾아갔고, 그리고는 군략(軍略)과 정치력 그리고 제후(諸侯)들에의 위신 등에 대해서 그와 전문(田文) 중 누가 더 뛰어났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전문(田文)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 3가지 중에서 내가 당신보다 더 뛰어난 것은 하나도 없소! 하지만 지금의 주군(主君)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의 신망이 약하오!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당신과 나 중에서 누가 재상(宰相)이 되면 더 좋겠소?!> 그러자 오기(吳起)는 자신이 재상(宰相)의 재목이 아님을 알고 그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 전문(田文)이 죽자 문후(文侯)의 사위였던 공숙모(公叔某)란 자가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자는 오기(吳起)를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처(妻)의 동생이었던 무후(武侯)에게 오기(吳起)를 참언했다. 그러자 또 무후(武侯)는 그때부터 오기(吳起)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공숙모(公叔某)는 오기(吳起)를 함정에 빠뜨릴 책략까지 획책했으며, 이윽고는 오기(吳起)에게 반역의 누명까지 씌우려고 했기 때문에 오기(吳起)는 다시 초(楚)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또 마침 초(楚)의 도왕(悼王)은 그를 반겨 맞아주었고, 그리고는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또 그는 법가(法家)적인 사상을 토대로 해서 국정개혁을 실시했으며, 그리고 또 당시, 그 초(楚)에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종족(宗族)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했는데, 그래서 또 오기(吳起)는 법 준수의 철저와 불필요한 관직의 폐지 등, 제(諸) 개혁을 실시하는 것으로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러자 또 그 결과 국고(國庫)는 전보다 풍족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그것으로 군을 양성하여 부국강병에 힘썼고, 그것으로 또 왕권강화에도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후세에 그 일을 두고 오기(吳起)가 법가(法家)의 원조(元祖)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수법으로, 그 전의 관중(管仲)이라거나 또는 태공망(太公望) 같은 사람들도 이미 비슷하게 썼던 수법이었다.

 아무튼, 그러자 또 그로 인해서 힘을 잃게 되었던 귀족들은 점점 더 불만이 강해졌고, 그 결과로 또 그 모든 한(恨)은 당연히 오기(吳起)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오기(吳起) 자신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또 그때까지 자신의 뒤를 밀어주던 도왕(悼王)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당분간은 무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던 기원전 381년에 고령의 도왕(悼王)이 사망했고, 그러자 또 그와 동시에 오기(吳起)를 죽이겠다던 무리들이 궁중으로 난입했다.

 하지만 또 그때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오기(吳起)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었던 그 도왕(悼王)의 시신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폭도들은 그를 향해서 마구잡이로 활을 쏘았고, 그러자 또 그 화살들은 도왕(悼王)의 사체에도 꽂혔다든지, 오기(吳起)의 몸에도 꽂혔다든지 해서 결국 오기(吳起)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또 잠시 초(楚)에는 정치의 공백기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 후에 도왕(悼王)의 뒤를 이었던 숙왕(肅王)이 왕위에 등극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때 자신의 아버지였던 도왕(悼王)의 몸에도 화살을 쏘았던 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왕의 유체를 건드린 자는 죽을 죄-楚의 법률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과거 伍子胥가 왕의 사체에 채찍을 가했던 일로부터 생겼던 법률이었다>다. 그런 다음, 그는 그때 화살을 쏘았던 자들을 찾아내서 대역(大逆)의 죄로 일족(一族) 전원을 처형했지만, 그러나 오기(吳起)의 죽음으로 인해서 초(楚)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굴원(屈原-기원전 343년 1월 21일부터 기원전 278년 5월 5일?)은 초(楚)의 정치가였고, 시인이었다. 성(姓)은 미(羋)였고, 씨(氏)는 굴(屈) 그리고 휘(諱)은 평(平) 또는 정칙(正則), 자(字)는 원(原)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시인(詩人)이었으며, 정치가로서는 진(秦)의 장의(張儀)에 의한 책략을 미리 간파하고 회왕(懷王)에게 필사적인 간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자 초(楚)의 장래에 절망해서 물에 투신해서 자살했다.

 그는 초(楚) 무왕(武王)의 공자(公子) 하(瑕-屈瑕)를 조상으로 했던 공실(公室)계의 종족(宗族-廣義의 왕족) 중 한사람이었고, 굴(屈)씨(氏)는 경(景)씨(氏)・소(昭)씨(氏)와 함께 초(楚)의 왕족 계에서도 최고 명문(名門)의 하나였다.(그것을 3閭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그 가문에 더해서 그는 박문강기(博聞强記-사물을 널리 들어 알고서 그것을 잘 기억함)에다 시문(時文)에도 특히 뛰어났었기 때문에, 그래서 회왕(懷王)은 그를 깊이 신임했고, 그리하여 그는 좌도(左徒)가 되었다.

 
참고: 左徒는 중국의 내정(內政)에서, 최고였던 영윤(令尹)을 보좌했던 좌윤(左尹)과 우윤(右尹) 아래의 직급으로, 그에는 또 좌도(左徒)와 사패(司敗)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좌도(左徒)는 굴원(屈原)과 춘신군(春申君)이 담당했던 적이 있었으며,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사도(司徒)라는 관직이 있었고, 그래서 또 그 사도(司徒)를 보좌했던 직책이 좌우(左右)사도(司徒)였는데, 그런데 또 어떤 연유로 인해서 전국시대 경에 좌도(左徒)만 남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당시, 초(楚)는 서쪽의 진(秦)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고, 그래서 그 진(秦)과 동맹을 맺어서 편하게 가자는 친진파와, 동쪽의 제(齊)와 동맹을 맺어서 진(秦)에 대항하자는 친제파로 나뉘어져있었다. 그리고 굴원(屈原)은 친제파의 필두였으며, 정치능력도 아주 뛰어났고, 그리고 또 무엇보다 강직한 성품 때문에 그는 동료들로부터 질투(嫉妬)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참언까지 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부터는 회왕(懷王)조차도 그는 멀리하게 되었으며, 그로서 초(楚)의 정책은 친진파로 기울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굴원(屈原)은 필사적으로 회왕(懷王)에게 간언해서 진(秦)은 신용할 수 없는 나라이므로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곧 회왕(懷王)은 굴원(屈原)의 염려대로 진(秦)의 모략(謀略)가(家)였던 장의(張儀)의 꾐에 빠졌고, 그리하여 초군(楚軍)은 대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굴원(屈原)은 3여(閭)대부(大夫)의 자격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자 또 진(秦)은 회왕(懷王)에게 혼인을 핑계로 진(秦)으로 올 것을 요청했는데, 그러자 또 굴원(屈原)은 앞의 회왕(懷王)이 장의(張儀)의 꾐에 넘어갔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회왕(懷王)을 말렸지만, 그러나 결국 회왕(懷王)은 친진파였던 공자(公子) 자란(子蘭)에게 설득당해서 진(秦)으로 갔고 그곳에서 감금되었다.

 그러자 왕을 잃게 된 초(楚)에서는 경양왕(頃襄王)을 옹립했고, 그 경양왕(頃襄王)은 또 굴원(屈原)을 싫어했던 자란(子蘭)을 영윤(令尹-丞相)에 앉혔기 때문에 굴원(屈原)은 다시 정계로부터 추방되었고, 이어서 강남(江南)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진(秦)이 초(楚)의 수도 영(郢)을 함락했고,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굴원(屈原)은 절망했던 나머지 돌을 안고 멱라강(汨羅江-汨羅水는 中國 湖南省 湘陰縣의 북쪽에 있는 江으로, 서쪽으로 흘러서 湘江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戰國時代에 楚나라 三閭大夫였던 屈原이 周圍의 讒訴로 분함을 못 이겨 그곳에 빠져 죽은 곳으로도 有名하다. 지금은 汨水라고 부른다)에 투신해서 자살했다.

 그 후, 굴원(屈原)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또는 망해(亡骸)를 물고기들이 잘 먹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물고기 밥으로 조릿대 잎(笹葉)에다 쌀밥을 넣어서 강에 던졌다고 전해지며, 그것이 또 종(粽-단옷날 등에 먹는 띠·조릿대 잎에 싸서 찐 찹쌀떡)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전설적인 경정(競艇)경기(競技)인 드라곤보트(dragon boat-龍船)는 <물에 빠진 굴원(屈原)을 구출해내려는 민중들이 앞을 다투어서 배를 냈다>라고 하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굴원(屈原)의 강렬했던 애국의 정(情)으로부터 나왔던 시(詩)들은 초(楚)의 노래집 초사(楚辭)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더욱 대표되었던 것은 <이소(離騷)>라고 알려져서 후세의 애국지사들로부터 애창(愛唱)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작품 <어부사(漁父辭)>의 모두(冒頭) 굴원기방(屈原旣放-굴원은 이미 쫓겨났다)으로부터 철부지 같은 짓을 굴원(屈原)이라고 말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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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2)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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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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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 영왕(靈王-?부터 기원전 529년. 재위는 기원전 540년부터 기원전 529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27대 왕으로 이름은 웅위(熊圍), 그러나 후에 웅건(熊虔)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는 부(父) 제24대 공왕(共王)의 차남이었고, 공왕(共王) 사후 왕위는 장자였던 강왕(康王)이 이어받았으나, 하지만 또 그 강왕(康王)마저 사망하자 강왕(康王)의 아들 겹오(郟敖)가 그 뒤를 이었다. 그래서 웅위(熊圍)는 재상이 되어서 겹오(郟敖)를 보좌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또 기원전 541년에 웅위(熊圍)는 겹오(郟敖)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그는 주로 세력 확대에 매진했고, 그러면서 제후들과 회맹해서 그들과 함께 오(吳)를 토벌했다. 그 후, 기원전 533년에는 진(陳)을, 그리고 또 기원전 531년에는 채(蔡)를 토벌했으며, 그 후에도 서(徐), 그 다음은 또 오(吳)를 다시 토벌하는 등, 초(楚)의 세력 확대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 연이었던 전쟁들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그러자 또 당연한 결론으로 백성들은 서서히 영왕(靈王)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영왕(靈王)의 동생들이었던 웅비(熊比)와 웅흑굉(熊黑肱-子晳) 그리고 웅기질(熊弃疾)은 반대파를 결성했다. 그리고는 기원전 529년에 영왕(靈王)이 군사를 이끌고 수도 영(郢)을 비웠던 사이에 쿠데타를 결행했다. 그 결과 영왕(靈王)의 아들이었던 태자 웅록(熊祿)이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초군(楚軍)은 한꺼번에 붕괴되었으며, 그러자 또 영왕(靈王)도 혼자서 산속을 헤매다가 사망했다. 그러자 그 후, 그 쿠데타를 주도했던 웅비(熊比)가 왕위를 이었으나, 그러나 또 그에 불만을 가졌던 웅기질(熊弃疾)이 다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형들을 자살로 내몰고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평왕(平王)이었다.

 ○ 평왕(平王-?부터 기원전 516년. 재위는 기원전 528년부터 기원전 516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기질(弃疾-그러나 즉위 후에는 居로 개명함)이었다. 그리고 공왕(共王)의 5남이었으며, 강왕(康王)과 영왕(靈王) 그리고 왕비(王比)의 아우였다. 그리고 일찍이 공자(公子) 기질(弃疾)은 형이었던 영왕(靈王)의 명을 받아서 진(陳)과 채(蔡)를 멸하고는 그곳에다 진공(陳公)과 채공(蔡公)을 올렸다.

 
참고: 기질(弃疾)은 초왕(楚王)에 즉위한 후, 최후의 진공(陳公)이었던 애공(哀公)의 손자 혜공(惠公)과 최후의 채공(蔡公)이었던 영후(靈侯)의 아들 평후(平侯)를 각각 국군(國君)으로 옹립해서 양국을
부흥(復興)시켰다.

 그리고 또 제(齊)에서 악명(惡名)을 떨쳤고, 나중에 오(吳)로 망명했던 경봉(慶封)을 공격해서 처형했던 등, 영왕(靈王)의 수족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 나중은 전술(前述)대로였으며, 그 결과 태자는 살해되었고, 웅비(熊比)가 왕위에 올랐으며, 그러자 또 기질(弃疾)은 웅비(熊比)에 의해서 사마(司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였던 5월 18일에 기질(弃疾)은 <왕(靈王)이 귀국해서 신왕(新王)을 처형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시내에 흘렸고, 그것으로 왕비(王比)와 영윤(令尹)이었던 자석(子晳)을 자살로 내몰았으며, 그 다음날이었던 5월 19일에 스스로 초왕(楚王)에 즉위했다.(한편, 靈王도 같은 날 자살함)
그렇게 해서 왕이 되었던 기질(弃疾) 즉, 평왕(平王)은 기원전 523년에 태자(太子)였던 건(建)의 비(妃)를 진(秦)으로부터 맞이하기 위해서 소부(少傅)였던 비무기(費無忌)를 진(秦)으로 보냈다.

 참고: 소부(少傅)는 태자의 훈도(訓導)를 맡았던 직명이며, 그 위의 직으로 태부(太傅)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소부(少傅)는 태자의 부(富驕)교육을 맡았음.

 그런데 그 비무기(費無忌)는 진(秦)의 공녀(公女-公主)가 아주 미인이란 것을 알게 되자 평왕(平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그녀의 미색이 너무도 아름다우니 그녀는 차라리 왕께서 취하시고, 태자에게는 다른 여자를 주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평왕(平王)은 그 뜻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녀는 결국 태자의 비(妃)가 되지 못하고 평왕(平王)의 측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또 그 후, 비무기(費無忌)는 평왕(平王)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비무기(費無忌)는 그 일로 해서 자신이 태자(太子)에게 미움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평왕(平王)에게 오히려 태자를 참언(讒言)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평왕(平王)은 비무기(費無忌)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는 태자를 국경의 경비 명목으로 성부(城父)란 곳으로 멀리 보내버렸다. 하지만 비무기(費無忌)는 그 후에도 태자를 모함(謀陷)했고, 그때의 이유는 또 태자가 자신의 비(妃)가 될 사람을 아버지에 빼앗긴 것에 한을 품고는 모반을 기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또 그때, 평왕(平王)은 태부(太傅)였던 오사(伍奢)도 태자 감독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잡아들였고, 거기에다 오사(伍奢)의 아들이었던 오상(伍尙)과 <오자서(伍子胥)>까지 잡아들여서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또 <오자서(伍子胥)>는 그에 응하지 않고 오(吳)로 도망을 쳐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오사(伍奢)와 오상(伍尙)만이 처형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이 <오자서(伍子胥)>로 하여금 복수심을 품게 만들었고, 그 후에 평왕(平王)도 점점 더 신망(信望)을 잃어갔으며, 오(吳)의 침공도 받게 되자 국력 또한 쇠약해져갔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516년 6월에 평왕(平王)은 결국 병몰(病沒)했으며, 그러자 또 그 후에 오(吳)가 초(楚)의 수도 영(郢)을 점령했을 때, 오자서(伍子胥)는 그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의 유체를 꺼낸 후에 300번도 더 넘게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

 ⊙ 비무기(費無忌-?부터 기원전 515년)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신하로 평왕(平王)을 모셨으며, 간신(奸臣)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최초에 평왕(平王)의 태자 건(建)의 소부(少傅)를 맡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평왕(平王)의 내용과 같으며, 그러자 또 태자 건(建)은 사전에 평왕(平王)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송(宋)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또 비무기(費無忌)는 오(伍) 씨(氏) 일가(一家)들이 자신에게 보복할 것을 두려워해서 참언(讒言)으로 그 오(伍) 씨(氏)들마저 모함했으며, 그 결과로 오사(伍奢)와 오상(伍尙)이 처형되었다. 그 후, 비무기(費無忌)는 평왕(平王)의 최측근으로 위세를 떨쳤으며, 그런 권력으로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차례로 자살로 몰아갔다거나, 극완(郤宛) 등을 살해했다. 그러자 그 후, 초(楚)는 점점 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 들어갔고, 그러자 또 주변국에서 그 초(楚)를 노리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오자서(伍子胥)가 도망을 갔던 오(吳)가 침략을 해왔기 때문에, 초(楚)의 백성들은 모두 그 비무기(費無忌)를 원망했다. 그 후, 기원전 516년에 평왕(平王)이 죽자 아직 어렸던 소왕(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백성들은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비무기(費無忌)를 원망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그러자 또 그 다음해 영윤(令尹)이었던 자상(子常)이 백성들을 달랜다는 의미로 그 비무기(費無忌)를 처형하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했다.

 ⊙ 오사(伍奢-?부터 기원전 522년)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신하였고,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장왕(莊王)을 모셨던 오거(伍擧)의 아들이었고, 초(楚)의 건계(乾溪-현재의 安徽省 亳州市 利辛県) 출신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초(楚) 평왕(平王)의 태자를 가르치는 태부(太傅)를 맡았으며, 그 오(伍) 씨(氏) 일족(一族)은 장왕(莊王)의 시대부터 초(楚)의 녹을 먹었던 명족(名族)으로 영향력도 아주 강했다. 그런데 그는 평소 비무기(費無忌)와 사이가 아주 나빴으며, 그래서 비무기(費無忌)가 참언(讒言)을 해서 그는 평왕(平王)에게 붙들려갔다. 그러자 그는 평왕(平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태자가 모반을 꾀했다는 것은 뿌리도 이빨도 없는 것인데, 어째서 아무것도 아닌 자의 참언(讒言)을 믿고 태자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하지만 평왕(平王)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 그는 투옥되었다. 거기다 또 평왕(平王)과 비무기(費無忌)는 그 오사(伍奢)의 두 아들까지도 처리할 목적으로 그 두 아들에게 <너희들이 오면 너희들의 아버지는 풀려날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전했는데, 그러자 또 오사(伍奢)가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상(伍尙)은 효자이기 때문에 나 때문에라도 올 것이지만, 그러나 자서(伍子胥)는 지모(智謀)가 있기 때문에 와봐야 죽을 것을 뻔히 알고 있을 것이므로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오. 그러므로 죄(罪)는 나 혼자만 받게 해주시오.> 하지만 평왕(平王)은 그 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는 이미 전술(前述)했던 대로이다. 그러자 또 오사(伍奢)는 죽기 전에 오자서(伍子胥)가 도망을 갔던 것을 두고 이렇게 단언(斷言)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필시 이 초(楚)에 화(禍)가 될 것이다>

 
○ 오자서(伍子胥-?부터 기원전 484년)는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었다. 그리고 휘(諱)는 원(員)이었고, 자(字)은 자서(子胥)였다. 그는 또 오(吳)에서 벼슬을 했으며, 그리하여 그 오(吳)의 약진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오왕(吳王)에게 소외당했으며, 최후에는 주살(誅殺)되었다.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당시 직언청렴(直言淸廉)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며, 오자서(伍子胥)는 9척(尺-약 2미터 정도)이 넘는 신장에다 성격도 아주 혈기왕성했던 의기(意氣)로운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앞서 기술했던 대로 태자였던 건(建)의 모반사건에 휘말리면서 그 오(伍) 씨(氏)들은 수난을 당했고,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복수를 맹세하고는 태자 건(建)과 함께 정(鄭)으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그 후, 태자 건(建)은 그 정(鄭)에서 진(晋)을 부추겨서 정(鄭)에 반역을 꾀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살해당했고,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그 건(建)의 아들이었던 공손승(公孫勝-白公勝)과 함께 오(吳)로 다시 도망을 쳤다. 그런데 또 그 여정(旅程)이란 것이 참으로 과혹(過酷)했던 것으로, 그 두 사람은 구걸을 해서 목숨을 연명했으며, 그러자 또 병이 들어서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초(楚)와 오(吳) 사이에 있던 양자강(揚子江) 주변에서 추격자들이 따라왔을 때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어부에게 부탁을 해서 몸을 숨겼다고도 하며, 그렇게 해서 무사히 그 강을 건넌 후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백금(百金)정도의 칼을 그 뱃삯으로 지불하려하자 그 어부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가버렸다고 한다. <내가 일부러 만금(萬金-伍子胥의 목에 걸렸던 상금)을 버렸는데, 그깟 백금(百金)을 가지겠소!>

 그렇게 해서 겨우 오(吳)로 들어갔던 두 사람은 일단 송자광(公子光)이란 사람 밑으로 들어갔으며, 그 후에 오자서(伍子胥)는 오왕(吳王) 요(僚)와 공자(公子) 광(光)에게 초(楚)를 칠 것을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요(僚)는 그 말을 받아들였지만, 공자(公子) 광(光)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면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공자(公子)광(光)에게 야심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전제(專諸)란 자를 추천했다. 그리고 또 그는 조만간 그 오(吳)에 내분이 생길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때부터 때를 기다리면서 근신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얼마 후에 오(吳)의 주력군이 정벌을 나갔던 초(楚)에서 발이 묶인 채로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자, 오자서(伍子胥)는 그때서야 공자(公子)광(光)에게 <때가 왔다>라고 말을 하면서 쿠데타의 시기를 일러주었다. 그러자 또 공자(公子)광(光)은 오왕(吳王)요(僚)를 연석(宴席)에 초대했고, 그러자 또 오왕(吳王)요(僚)는 불안한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그러나 그때는 국내에서 동요(動搖)가 일어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경비병과 호위부대를 데리고 그 연석에 참석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도중에 전제(專諸)가 결사(決死)의 각오로 오왕(吳王)요(僚)를 베었으며, 그 결과 그것이 쿠데타의 단서가 되어서 공자(公子)광(光)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합려(闔閭)>였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오자서(伍子胥)를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는데, 그리하여 오자서(伍子胥)는 마침내 초(楚) 인접국 왕의 측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오자서(伍子胥)는 <손무(孫武-孫子)>와 함께 합려(闔閭)를 보좌했으며, 오(吳) 국내(國內)의 정비(整備)에 진력(盡力)을 다했다. 그리고 초(楚)에 대한 공격 준비가 충분해질 때까지 합려(闔閭)를 진정시켰으며, 그러다가 이윽고 기원전 506년에 그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해서 출병했고, 그 결과로 초(楚)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앞에서 밝혔던 대로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서는 그 사체에 300여 차례나 채찍을 가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한(恨)을 풀었다는데, 그런데 그것이 또 <시체에 채찍을 가하다>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또 그때, 그의 오랜 친구였던 <신포서(申包胥)>가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는 너무 심했다고 나무라자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해는 졌는데 아직도 갈 길은 멀고, 그러니 도행해서 역시(倒行逆施-次例를 거꾸로 施行한다는 뜻으로, 곧 道理에 順從하지 않고 일을 行하며, 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한다는 것을 말함)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 속뜻은 <(그때)자신의 나이가 이미 많아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상적인 절차 등을 밟을 여유가 없었다 또는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 <그동안 가슴에 품어 왔던 한(恨)을 다만, 비상식적으로 풀었던 것뿐이었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또 그때, 그러니까 오(吳)가 초(楚)의 수도를 함락했을 때, 초왕(楚王-廢태자의 異母弟였던 昭王)은 이미 도망을 가고 없었다. 그리고는 어느 지방에서 병사들을 다시 모아서는 재흥(再興)을 기도하려 했기 때문에, 그래서 철저한 수색을 실시했지만 그러나 그를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그 사이에 월(越)이 오(吳)를 침공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초(楚)는 병(兵)을 둘로 나눌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다 또 신포서(申包胥)가 진(秦)에 원군을 청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형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초(楚)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지만, 그런데 또 그때, 장군이었고, 합려(闔閭)의 제부(弟夫)였던 개(槪)가 마음대로 오(吳)로 귀국해서는 오왕(吳王)의 자리에 올라버렸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하는 수 없이 초(楚)에서 철수해서 우선 그 개(槪)의 일부터 처리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오(吳)로 다시 돌아갔던 오자서(伍子胥)는 계속해서 합려(闔閭)를 보좌하는 일에 열중했으며, 그리하여 결국 그 오(吳)를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만드는 데까지 성공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재차 초(楚)를 쳤다든지, 중원(中原)을 노렸다든지 했지만, 그러나 그 전에 오자서(伍子胥)는 인접국이던 월(越)부터 공략할 것을 진언했고, 그것은 또 그 월(越)과 오(吳) 양방 간에 중원(中原)을 노리기에는 상대가 서로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 당시, 그 월(越)은 소국(小國)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吳)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러나 또 그때는 급속하게 국력을 신장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장래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런 진언을 올렸던 것이었다. 그러자 합려(闔閭)도 그 뜻을 받아들였고, 그리고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월(越)로 향했다. 하지만 또 당시, 월왕(越王)이었던 <구천(句踐)>의 군사(軍師) <범려(范蠡)>의 계책에 말려서 오(吳)는 월(越)에 대패(大敗)했고, 거기에다 합려(闔閭)는 월(越)의 장군이었던 영고부(靈姑孚)가 쏘았던 화살에 한쪽 다리를 부상당했으며, 그런데 그것이 또 마침 파상풍(破傷風)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합려(闔閭)는 결국 자리에 눕는 신세까지 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후, 합려(闔閭)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그러자 또 공자(公子)들 중에서 <부차(夫差)>란 자가 오자서(伍子胥)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그 후계자로 추천해줄 것을 오자서(伍子胥)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합려(闔閭)를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태자는 부차(夫差) 공자(公子)로 함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합려(闔閭)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부차(夫差)은 박정(薄情)해서 군주의 그릇으로는 부족하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가 이렇게 말을 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주위에서 우리들이 보살펴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급한 것은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를 명확히 해두는 것이며, 그것으로 권력투쟁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는 일입니다> 그러자 또 합려(闔閭)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오자서(伍子胥)에게 그 일을 일임했다. <당신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뜻대로 하시오!>


 참고: 1. 원래 합려(闔閭)에게는 요절(夭折)했던 장남 태자가 있었다고 하며(史記索隱-竹書紀年에서는 태자 波 그리고 左傳에서는 태자 終纍), 그리고 3남으로 공자(公子) 자산(子山)이 있었다.(左傳)

 2.사기색은(史記索隱)은 당(唐)나라 때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에다 주석(注釋)을 붙인 주석서로,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사기(史記) 3가(家) 주(注)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선행(先行) 제서(諸書)들을 인용해서 음운(音韻)과 지리(地理) 그리고 인물(人物)들을 아주 우수하게 고증(考證)했던 것이다.

 3. 그리고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위의 사마(司馬)정(貞)이 자주 인용했던 책이었으며, 중국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은 중국의 전설시대부터 위(魏)나라의 양왕(襄王)까지 저술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작자는 불명임.

 아무튼, 그런 다음 합려(闔閭)는 부차(夫差)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너는 구천(句踐)이 나의 원수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저 오자서(伍子胥)를 잘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자 또 부차(夫差)도 이렇게 말을 했다. <앞으로 3년 이내에 반드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합려(闔閭)가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부차(夫差)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그때부터 부차(夫差)를 모시게 되었으며, 다시 구천(句踐)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준비를 차근차근히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그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기원전 494년에 먼저 오(吳)를 공격했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던 오(吳)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월(越)은 대패했으며, 그러자 또 오(吳)는 그대로 월(越)로 쳐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월(越)의 수도 부근에 있던 회계산(會稽山)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사자를 보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했다. <월(越)은 이제부터 오(吳)의 속국이 될 것이며, 저 구천(句踐)은 이제부터 오왕(吳王) 님의 노예가 되려 하오니 제발 저의 뜻을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부차(夫差)는 몹시 흡족해서 구천(句踐)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가 나서서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했다. <구천(句踐)은 명군(名君)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고, 그 주위에는 또 많은 능신(能臣)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두면 분명히 나중에 화(禍)가 될 것이니 지금 죽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구천(句踐)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 후, 월(越)은 오(吳)에 공순하면서 뇌물을 바치는 등, 오(吳)의 경계를 조금씩 풀어갔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계속해서 월(越)을 경계하라고 진언을 올렸지만, 그러나 부차(夫差)는 오히려 이제는 다 잡은 토끼에 관심 없다는 듯 중원(中原) 쪽으로만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그 두 사람의 사이에도 조금씩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또 그때, 월(越)의 <범려(范蠡)>가 밀정(密偵)을 보내서 오자서(伍子胥)의 중상(中傷)을 부차(夫差)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또 부차(夫差)에게는 <서시(西施)>라는 미녀를 보내서 당시, 점점 더 심해졌던 월(越)에 대한 경계를 풀 수 있도록 획책했다.

 그러자 그 후, 부차(夫差)는 북으로, 특히 제(齊) 쪽으로 출진을 계속했으며, 그 때문에 영토는 조금씩 넓어지기는 했어도, 그러나 그 반대로 국력은 급속하게 소모되어 갔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齊)는 피부(皮膚)의 병(病)이요, 월(越)은 내장(內臟)의 병입니다(눈앞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피부의 병인 제(齊)의 내란(內亂)이지만, 그러나 정말로 신경을 써야하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내장의 병 즉, 월(越)의 존재라는 의미)>라고 말을 했지만, 그러나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두 사람은 언성까지 높여가면서 아주 격한 언쟁까지도 벌였던 모양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당시, 재상(宰相)이었던 <백비(伯嚭)>란 자가 실직(實直-정직하고 성실함)했던 오자서(伍子胥)를 쫓아내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그는 월(越)로부터 뇌물까지 받아 챙긴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의 수단으로 오자서(伍子胥)와 부차(夫差)의 사이를 이간질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이제 멀지 않아서 오(吳)는 월(越)에 정복당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어느 때 제(齊)에 사자로 갔을 때, 자신의 아들을 그 제(齊)에 맡기고 왔을 정도였다.

 
참고: 춘추좌씨전의 노(魯) 소공(昭公-기원전 522년) 20년의 <楚・伍 氏의 계보>에 의하면, 오자서(伍子胥)의 아들 이름은 오풍(伍豊)이라고 했고, 증조부의 이름은 오참(伍參), 조부의 이름은 오거(伍擧)인데 그 별명은 오초(伍椒)라고 했다. 그리고 숙부의 이름은 오초명(伍椒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러나 자신은 오(吳)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오(吳)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런데 또 그 일이 문제가 되어서 오자서(伍子胥)는 오(吳)로 귀국한 후 부차(夫差)로부터 검을 받아서 자결을 명받았다. 그러자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제가 죽으면 저의 묘 위에 가래나무(梓-一說에는 예덕나무)를 심으십시오. 나중에 그것을 사용해서 (夫差의) 관을 만들 수 있게요. 그리고 저의 눈은 빼내서 동남(東南-越 방향)쪽 성문 위에 두십시오. 나중에 월(越)이 오(吳)를 멸망시키는 것을 잘 볼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런 다음, 오자서(伍子胥)는 부차(夫差) 앞에서 자결했다. 그런데 또 바로 그 말이 부차(夫差)의 심기를 상하게 해서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무덤을 만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 유체를 말가죽으로 만든 부대자루에다 넣어서 강에다 던져버리게 했다. 그러자 또 백성들은 모두 오자서(伍子胥)를 동정했고, 그 물가에 그를 위한 사당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랬던 일이 나중에 <단오(端午)>의 풍습과 중국에서의 <액땜풍습>으로 이어졌다고 하며, 그래서 또 사람들이 강에 공양물을 흘려보내는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단, 현재는 굴원의 고사에서 단오의 유래를 찾기도 함)

 아무튼 또, 오자서(伍子胥)가 죽은 후에 오(吳)에서는 더 이상 월(越)을 경계하는 자가 없어졌고, 그래서 또 당시 오(吳)는 파멸의 길을 자청해서 가고 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오(吳)는 오자서(伍子胥)의 예언대로 그로부터 얼마 후에 월(越)에 정복당했으며, 부차(夫差)는 겨우 생명만 건진 채로 변경(邊境)으로 귀향을 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자결했다고 한다. <오자서(伍子胥)가 옳았고 나는 어리석었다. 그러므로 나는 저승에서도 그를 볼 면목이 없기 때문에, 내가 죽거든 제발 내 머리를 베어서 보자기에 싸주길 바란다> 그리고 또 그 후에 백비(伯嚭)도 구천(句踐)에게 잡혀서 악신(惡臣)의 표본으로 효수(梟首)되었다.

 ○ 신포서(申包胥)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왕손(王孫) 또는 봉지(封地) 명으로부터 신(申)이었고, 휘(諱)는 포서(包胥) 그래서 왕손포서(王孫包胥)라고도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또 평왕(平王), 소왕(昭王), 혜왕(惠王) 3대를 섬겼으며, 오(吳)의 첨병(尖兵)이라고 할 수 있었던 오자서(伍子胥)에 버금갔던 인물이었다.

 그는 오자서(伍子胥)가 초(楚)를 침공해서 수도를 함락시켰을 때, 진(秦)으로 원군을 청하러 떠났다. 그리고는 애공(哀公)에게 사정을 했지만, 그러나 애공(哀公)은 소왕(昭王)의 어머니가 진(秦)의 공주(公主)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신포서(申包胥)는 크게 탄식하고는 7일7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물마저 마시지 않은 채로 울고 또 울었다. 그러자 드디어 그것이 애공(哀公)의 마음을 움직였던지 애공(哀公)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초(楚)는 원래 무도(無道)의 나라이거늘, 이런 충신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므로 초(楚)를 그냥 멸하게 두는 것은 옳지가 않다!> 그리고는 전차(戰車) 500을 내주었고, 그리하여 기원전 505년에 진(秦)의 원군은 오(吳)를 파(破)했으며, 그리고 또 그때, 오(吳)에서는 내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초(楚)는 오(吳)를 물리치는데 성공을 했다.

 그 후, 소왕(昭王)은 신포서(申包胥)에게 봉읍(封邑) 5000호(戶)란 대봉(大封)을 내렸지만, 그러나 정작 신포서(申包胥)는 초(楚)에 선조들의 분묘(墳墓)들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또 자신이 그것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그것을 거절했다.

 그 후, 기원전 476년에 신포서(申包胥)는 혜왕(惠王) 어머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였던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사자의 자격으로 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는 월(越)이 오(吳)를 멸하기 바로 직전이었는데(吳의 멸망은 기원전 473년), 그러자 구천(句踐)은 신포서(申包胥)에게 오(吳)를 멸할 계책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신포서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戰爭)은 화(和)를 제1로 하고, 그 다음이 인(仁)이며, 맨 나중이 바로 용(勇)입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그 계책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오(吳)를 멸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또 그것으로 신포서(申包胥)는 자신의 조국을 유린(蹂躪)했고, 또한 친구였던 오자서(伍子胥)를 철저히 이용한 후에 말살(抹殺)했던 구적(仇敵) 오(吳)를 멸하는데 일조(一助)했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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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1)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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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
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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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 장왕(莊王-?부터 기원전 591년. 재위 기원전 614년부터 기원전 591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6대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여(侶) 또는 여(旅), 시(諡)는 장(莊)이었다. 그는 또 초(楚)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알려졌고,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손꼽아졌으며, 초(楚) 성왕(成王-6-18참고) 원(員)의 손자였고, 폭군이었던 상신(商臣-穆王)의 적자(嫡子)였다. 아들은 공왕(共王) 심(審).

 참고:
필(邲)의 싸움

 필의 싸움은 기원전 597년(周는 定王 10년, 魯는 宣王 12년)에,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정(鄭)현의 필(邲)이라는 곳에서 진(晋)과 초(楚)가 격돌했던 전쟁으로 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 후, 천하의 패권은 진(晋)에서 초(楚)로 넘어갔으며, 그로서 초(楚) 장왕(莊王)의 위광(威光)은 대륙을 덮었다.

 1. 경위(經緯)

 그 전, 초(楚)의 장왕(莊王)은 천하평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위(上)의 진(晋)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일대(一大)결심을 하고는 스스로 병사들을 이끌고 정(鄭)부터 공격했다. 그러자 정(鄭)은 곧 진(晋)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정경(正卿)이었던 순림부(荀林父)는 정(鄭)이 몇 번이나 진(晋)에 면종배반(面從背反-겉으로는 복종하고, 뒤에서는 배반을 일삼는 짓)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그러면서 또 정(鄭)은 곧 초(楚)에 의해서 멸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또 그때, 정(鄭)의 입장에서는 그 번(番)이야말로 초(楚)에 지게 되면 완전하게 멸망하게 될 것이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필사 항전했다. 그러자 또 그 전쟁은 진(晋)의 생각보다 길어지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진(晋)은 그때서야 부랴부랴 군사를 일으켜서 정(鄭)에 원군을 보냈지만, 그러나 또 마침 그때, 그러니까 진군(晋軍)이 그 정(鄭)에 도착했을 때, 정(鄭)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자 정(鄭)의 양공(襄公)은 마치 미자계(微子啓-6-13 참고)가 주(周)에 항복했을 때처럼 예를 갖추어서 장왕(莊王)을 맞이했다.(참고: 그 후, 주왕(紂王)이 무왕(武王)에게 패해서 죽자, 그 두 사람은 스스로 무왕(武王)을 찾아가서 항복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미자계(微子啓)는 상반신을 벗은 채로 양손을 뒤로 결박했고, 그리고는 왼손으로는 양(羊)을 끌고, 오른손에는 억새를 꺾어 든 채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그러자 무왕(武王)은 흔쾌히 그의 항복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초(楚)의 군신(群臣)들은 모두 정(鄭)을 멸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러나 장왕(莊王)은 그때 <정(鄭)군(君)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줄을 아는 자다(겸손한 자). 그러므로 반드시 이 나라 또한 잘 다스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 정(鄭)군(君)에 더 이상의 수치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 철군했고, 그 후에 다시 정(鄭)과 다시 동맹을 맺었다.

 2. 싸움

 그렇게 해서 정(鄭)의 패배를 알게 되었던 진(晋)의 사장(師將) 순림부(荀林父)는 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상군(上軍)의 장(將)이었던 사회(士會)도 <좋습니다! 전쟁이란 모름지기 적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 그리고 또 덕(德)과 형(刑) 그리고 정(政)과 사(事), 전(典), 예(禮) 그 여섯 가지를 모두 갖추고(지키고) 싸웠던 초(楚)에 대적한다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순림부(荀林父)에 동의했다. 하지만 또 그때, 중군(中軍)의 좌(佐)였던 선곡(先穀)이란 자가 그 전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단으로 병을 움직였기 때문에, 그래서 싸움은 하는 수 없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래서 또 그때, 양군(兩軍)의 세력을 보면 또 아래와 같았다.(단, 참고이므로, 한글표기는 생략함)

 
晋軍의 編成

 中軍-将:荀林父 佐:先穀 中軍大夫:趙括、趙嬰斉
 上軍-将:士会  佐:郤克 上軍大夫:鞏朔、韓穿
 下軍-将:趙朔  佐:欒書 下軍大夫:荀首、趙同
 司馬:韓厥

 楚軍의 編成

 荘王(楚王) 孫叔敖(令尹)
 中軍-将:沈尹
 左軍-将:子重(이름은 嬰斉・荘王의 兄弟)
 右軍-将:子反(이름은 側・荘王의 兄弟)

 3. 결전(決戰)

 그렇게 해서 초(楚)의 장왕(莊王)과 영윤(令尹-宰相) 손숙오(孫叔敖)는 정(鄭)을 항복시킨 후, 진(晋)과는 싸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후군(後軍)에 해당되는 군세(軍勢)를 조금 남겨두고 수도 영(郢)으로 철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또 오참(伍參)이란 자가 장왕(莊王) 앞으로 나오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 진(晋)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자는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군신(群臣)들은 아직 하나로 뭉쳐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싸운다면 필시 우리가 이길 것이며, 그리고 또 현재 적(敵)의 사장(師將)이란 사람은 일국(一國)의 재상입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우리의 사장(師將)은 군주(君主)이신데, 그러므로 또 만약에 여기서 물러나신다면, 앞으로 어떻게 천하에 모범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장왕(莊王)은 고뇌 끝에 마차(馬車)를 북쪽으로 다시 향했으며, 그리고는 정(鄭)으로 다시 들어가서 관(管)이란 곳에다 진(陳)을 구축했다. 그리고는 또 진(晋)에 화목(和睦) 목적의 사자도 보냈는데, 그러자 또 진(晋)에서는 순림부(荀林父)와 사회(士會)가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또 그때, 선곡(先穀)도 비밀리에 장왕(莊王)에게 사자를 보내서, 자신들은 싸우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장왕(莊王)이 다시 진(晋)에 화목 목적의 사자를 보냈고, 그때도 진(晋)은 그것을 수락했다. 그리고는 또 그 답으로 화목 목적의 사자였던 위기(魏錡)와 조전(趙旃)이란 자를 장왕(莊王)에게 보냈는데,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장왕(莊王)과 화목할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장왕(莊王)을 죽이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장왕(莊王)의 진(陳) 가까이에까지 가게 되자 바로 공격을 가했지만, 그러나 수비가 워낙에 견고했기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또 그들은 곧바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또 장왕(莊王)이 본진의 병사들을 이끌고 진군(晋軍) 속으로 곧 쳐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또 그때, 그렇게 되면 장왕(莊王)의 진(陳)이 고립될 것이 염려가 되었던 손숙오(孫叔敖)가 황급히 전군에 공격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전쟁은 드디어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 그때까지도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다고 낙관(樂觀)하고 있던 중이었던 순림부(荀林父)는 그런 갑작스런 초군(楚軍)의 공격을 받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몰라서 다음과 같이 전군에 포고를 내려버렸다. <제일 강을 빨리 건너서 퇴각하는 자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그러자 진(晋)의 중군(中軍)과 하군(下軍)은 순식간에 괴멸하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또 서로 먼저 도망가려고 배에 올라탔지만, 그러나 또 그때 황하(黃河)에 띄워져 있던 배의 숫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자 또 그때, 배에 먼저 올랐던 병사들은 뒤에 와서 배를 떠날 수 없게 뱃전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병사들의 손과 팔 등을 잘랐고, 그것은 또 배가 전복되어서 아무도 그 배를 탈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해서 했던 행동이었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그곳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참극이 일어났다.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삼군(三軍) 중에서 사회(士會)가 인솔했던 상군(上軍)만은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들은 단 한명의 손실도 없이 퇴각하는데 성공을 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 때문에 진(晋)은 잠깐 동안 침체기에 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그 역으로 초(楚) 장왕(莊王)의 위광은 천하를 덮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장왕(莊王)은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대승 후, 장왕(莊王)은 신하(臣下)들로부터 경관(京觀-전사자의 유해를 한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戰功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합동무덤=monument)을 만들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러나 장왕(莊王)은 그때 <무(武)란 글자는 창(戈)>을 멈춘다(止)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것은 또 폭(暴)을 금(禁)하고, 싸움을 멈추며, 큰 것을 지키고, 공(功)을 정(定)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대중(衆)의 화합을 꾀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려는 속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내가 했던 일은 그 무덕(武德)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그럼에도 충성을 다 바쳐서 싸웠던 진군(晋軍) 병사들의 유체들로 경관(京觀)을 만든다는 것은 과연 옳은 짓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참고: 그러나 또 실제로 그 武란 글자는 창(戈)을 (앞으로) 나아간다 라고 하는 것이 그 원의(原義)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진(晋)마저 물리치고 패업을 달성했던 장왕(莊王)은 그 마무리로 그때까지 진(晋)을 따르고 있던 송(宋)을 다시 표적으로 정했다. 그리하여 그 첫 단계로 기원전 595년에, 일찍이 아버지 목왕(穆王)의 명으로 송(宋) 소공(昭公)의 마부(馬夫-여기서의 마부는 왕의 수행원 또는 호위하는 자)에게 채찍을 가했기 때문에, 그래서 송(宋)나라 사람들의 한(恨)의 표적이 되어 있었던 신단(申舟)이란 인물을 제(齊)로 보내는 사자(使者)로 지명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송(宋)을 통과하는데 인사는 필요 없음>이란 명을 내렸는데, 그것은 또 그 신단이 자신의 그런 명령을 따라서 송(宋)에 무례를 저지르게 하고, 또 그로써 그가 송(宋)에서 살해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구실로 해서 송(宋)에 출병을 시킬 요량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자 장왕(莊王)은 마치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송(宋)으로 달려갔고, 그리고는 곧바로 수도였던 상구(商丘-河南省 商丘市)를 포위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장왕(莊王)은 노(魯)도 초(楚)의 맹하(盟下)로 만드는 등, 착실하게 패업을 완성할 준비를 해두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송(宋)의 우사(右師)였던 화원(華元)이란 자를 필두로 해서 송군(宋軍)은 당연히 저항을 해왔고, 그러자 또 그 싸움은 예상치 않게 길어져서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594년 5월이 되었어도 그 상구(商丘)를 함락시키지를 못했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하는 수 없이 일단 철수를 명령했다. 하지만 또 그때, 아버지였던 신단(申舟)까지 희생시키고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려는 장왕(莊王)을 원망했던 신단의 아들 신서(申犀) 때문에 장왕(莊王)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자신의 측근이었던 신숙시(申叔時)가 올린 헌책을 장왕(莊王)은 받아들였고, 그 결과 상구(商丘) 교외에 둔전(屯田)을 설영(設營)하고는 지구전(持久戰)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얼마 후에 화원(華元) 등도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자반(子反)이란 자가 중개를 해서 마침내 송(宋)도 초(楚)의 맹하(盟下)로 들어왔고, 그로써 장왕(莊王)의 패업은 완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다음, 그는 기원전 591년에 사거했다.(장왕 끝)

 ⊙ 화원(華元-생몰미상)은 중국 춘추시대 송(宋)의 정치가로, 당시 2대국(大國)이었던 진(晋)과 초(楚)의 화평을 위한 중재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예를 중시했던 이상주의자로 알려졌으며, 송(宋) 굴지의 명재상 중 한사람이었다.(하략)

 아무튼 또, 그렇게 해서 패권을 거머쥐었던 초(楚)였다지만, 하지만 그 장왕(莊王)의 뒤를 이었던 7대 공왕(共王) 때는 <언능(鄢陵)의 싸움>에서 진(晋)에 패했고, 그것으로 초(楚)는 또 패권을 잃고 말았다.

 ○ 언능(鄢陵)의 싸움

 언능의 싸움은 중국의 춘추시대였던 기원전 575년(周는 簡王 11年, 魯는 成公 16年)에 언능(鄢陵-河南省鄢陵県)에서 진(晋)과 초(楚)가 격돌했던 싸움이었고, 그 결과는 진군(晋軍)의 승리로 끝났다.

 1. 경위

 기원전 579년, 진(晋)과 초(楚)는 송(宋)의 땅에서 회맹했다. 그리고는 송(宋) 화원(華元)의 중개로 양국은 맹약을 하고 정전(停戰-하지만 史記에서는 그때가 기원전 589년이라고 했고, 左傳에서는 기원전 579년이라고 했는데, 史記의 실수로 봄)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577년에 진(晋)의 맹하(盟下)였던 정(鄭)이 초(楚)의 맹하였던 허(許)를 공격했기 때문에, 초(楚)의 공왕(共王)은 그 허(許)를 구원하기 위해서 정(鄭)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다음해, 정(鄭)은 초(楚)의 영토를 할양받아서 화목했고, 그것으로 초(楚)의 맹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또 진(晋)의 여왕(厲王)은 원래 자신을 따랐던 그 정(鄭)의 배신을 바로잡기 위해서 위(衛), 제(齊), 노(魯) 등을 이끌고 정(鄭)을 쳤다. 그러자 또 정(鄭)은 초(楚)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그 결과 진(晋)과 초(楚)는 다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은 그때의 군대편성에 관한 것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당시, 楚軍은 中軍・左軍・右軍 三軍으로 편성되었고
 晋軍은 中軍・上軍・下軍・新軍 四軍을 보유하고 있었다.

 晋軍의 編成

 君主:厲公 軍師:苗賁皇
 中軍-将:欒書 佐:士燮
 上軍-将:郤錡 佐:中行偃
 下軍-将:韓厥 佐:智罃(출병으로 비게된 晋의 후방을 맡음)
 新軍-将:郤犨 佐:郤至

 楚軍의 編成

 君主:共王 軍師:伯州犂
 中軍-将:子反
 左軍-将:子重
 右軍-将:子幸

 2. 전쟁

 그 전쟁은 공왕(共王)이 진(晋)의 대부(大夫)였던 여기(呂錡)가 쏜 화살에 눈을 부상당했을 정도로 혼전(混戰)이었다. 그러자 공왕(共王)은 화가 나서 가신이었던 양유기(養由基)에게 명을 내렸고, 그러자 양유기(養由基)는 단 한발의 화살로 여기(呂錡)를 쏘아서 죽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공왕(共王)의 부상에 초군(楚軍)들이 동요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점점 더 전의는 상실되고 있었다. 그러자 공왕(共王)은 그날 밤에 자반(子反)을 불러들여서 다음날의 작전에 대해서 의논해보고자 했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자반(子反)은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공왕(共王)의 부름에 나아가지를 못했다. 그러자 또 공왕(共王)은 그것으로 초군(楚軍)의 패배를 예감하고는 그날 중에 회군하여 수도 영(郢)으로 돌아갔다.

 3. 전후(戰後)

 자반(子反)은 전쟁 중 최대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자살했고(그러나 史記에서는 철군 직전에 군영에서 주살되었다고 함), 승리했던 진(晋)의 여왕(厲王)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그리고 그 후에 여왕(厲王)은 그 여세를 타서 호족(豪族)들을 폐하고 공실(公室)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획책했고, 그 결과로 대족(大族)이었던 극(郤)씨(氏)의 경(卿) 3명을 죽였다. 하지만 또 그 후, 여왕(厲王)은 자신들도 그 극(郤)씨(氏) 같은 꼴이 될 것을 두려워했던 난서(欒書)와 중행언(中行偃)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명군이었던 도공(悼公)이 그 뒤를 이어서 패권을 확고히 했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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