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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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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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참고: 공자(孔子) 등, 너무 유명해서 잘 알려진 사람들에 대한 소개는 가급적 삼가거나, 나중에 따로 한곳에 묶어서 소개해드릴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이름이 나온 다음에 그냥 넘어가기도 뭐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진부(陳腐)해해하실 분은 상기의 내용을 참조하시어, 부디 이해 당부 드립니다.

<孔丘>
♧ 공자(孔子-기원전 551년 9월 28일부터 기원전 479년 4월 11일)는 춘추시대 중국의 사상가였으며, 철학자였고,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였다. 그리고 오늘날의 도덕(道德)을 확립했던 시조(始祖)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의 씨(氏)는 공(孔)이며, 휘(諱)는 구(丘) 그리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며, 공자(孔子)라는 것은 그에 대한 존칭이다(子=先生). 그래서 또 유럽에서는 라틴화(化)된 말로 컨퓨셔스(Confucius-孔夫子의 音譯이며, 夫子는 先生이라는 존칭)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그는 기원전 551년(일설에는 552년)에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변경의 추읍<陬邑-한자의 뜻과 다르게, 昌平 또는 太平을 누린다는 의미이며, 邑은 村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그곳은 현재의 山東省 곡부(曲阜)市라고 알려져 있다>에서, 추읍(陬邑)대부(大夫)의 차남으로 태어났다.(하지만 또 그에는 당시에 아주 비천한 계급이었던 巫女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도 있으며, 그것은 또 공자가 스스로 論語에서 '자신은 가난하고 賤한'이라고 표현했던 것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아무튼, 알려지기로 그의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안징재(顔徴在)였다고 하지만, 그러나 논어(論語)에서는 기술(記述)된 바가 없다. 그리고 또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었다고 했고, 그래서 또 고아로 자랐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학문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고학(苦學) 중에 예학(禮學)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또 어떻게 해서 그 예학(禮學)을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래서 또 그 때문이었던지 당시 예학(禮學)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국조(國祖) 주공단(周公旦-6-13참고)을 제사지내는 대묘(大廟)에 들어갔을 때는, 오히려 그는 '이것은 무엇인가?' '저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면서 물어보는 등, 자신의 지식에 애매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그에는 또, 그때 그가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은, 오히려 禮를 실천했던 것이었다 라는 이설이 있다)
아무튼 그는 또 노자(老子)에게 교육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그러나 또 그것은 공자(孔子)의 예학(禮學)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려고 했던 후세의 유가(儒家)들과, 그리고 또 그 공자(孔子)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했던 도가(道家)들의 사상이 일치했던 것으로, 일종의 날조(捏造)였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또, 그는 신장(身長)이 9척(尺) 6촌(寸-춘추시대의 1척은 약 22.5센티였던 것으로 계산하면 약 216센티)이나 되었다고 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장인(長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史記의 孔子世家)
그리고 또 그는 52세 때, 노(魯)의 정공(定公)에 의해서 중도(中都)란 곳의 재(宰-宰相)가 되었다고 사기(史記)의 공자(孔子)세가(世家)에서는 전하고 있다. 하지만 또 그 다음 해에는 대사구(大司寇-刑部를 맡았던 六卿 중의 한명)에 취임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또 당시, 정변(政變)으로 노(魯)의 실권을 쥐게 되었던 양호(陽虎)의 권유에 응했던 것이라고 한다.(논어의 陽貨 제17-하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도망갔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또, 그는 기원전 497년에 국정(國政)에 실망을 해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제국(諸國)을 순례하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나라는 없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기원전 483년에 69의 나이로 노(魯)에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제자들의 육성에만 전념했으며, 기원전 479년에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상기의 내용으로 봤을 때, 공자(孔子)의 인생은 대부분이 무관(無冠)으로, 일개학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한 대(漢代-前漢)의 사가(史家)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는 그의 공적을 왕(王)에 버금하는 것으로 평가를 해서 공자(孔子)세가(世家-諸侯王家의 역사를 말함)라고 이름을 붙였고, 그리고 또 그의 제자들의 전기는 중니(仲尼)제자(弟子)열전(列傳)이라고 이름 붙였을 만큼 사마천은 공자(孔子)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또 후세에 유교(儒敎)에서는 그를 두고 소왕(素王-無位의 王)이라고 부르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의 공적과 주장에 관해서도 잠시 알아보면, 그는 인(仁-人間愛)과 예(禮-規範)에 기초한 이상(理想)사회의 실현을 강조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또 그는 당시까지 샤머니즘(shamanism-巫術) 같은 원시유교(단, 儒敎란 명칭이 성립되었던 것은 후세였다)를 체계화해서 하나의 도덕(道德)과 사상으로 승화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또 당연히 그의 근본적인 뜻(意義)은 인(仁)에 있었으며, 그 인(仁)을 다양한 상황에서 관철시키는 것으로 해서 도덕(道德)을 바로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그 근저(根柢)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인 선조숭배사상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유교(儒敎)에서는 인(仁)이라는 인도(人道)적인 측면과, 예(禮)라는 가부장제(家父長制)를 축(軸)으로 했던 신분제도 그 쌍방(雙方)을 함께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 공자(孔子)는 자신의 그런 사상을 국정(國政)에 반영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거의 무산되었다. 그래서 또 공자(孔子)는 만년에 그에 실망한 나머지 노(魯)나라로 다시 돌아갔으며, 그러던 중에 제일로 아꼈던 애제자 안회(顔回)마저 청빈(淸貧)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그 다음으로 아꼈던 제자 자로(子路)는 모반이 일어났을 때 왕을 지키려다가 참살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모든 것에 낙심을 했던 공자(孔子)는 결국 불우한 말로(末路)를 맞이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공자(孔子) 사후에 맹자(孟子), 순자(荀子) 등이 그의 후계자로 나오기도 했지만,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이 전국(戰國)에서 한(漢) 초기로 넘어가려던 때여서 그다지 세력을 확장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후였던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거치면서 점점 유교(儒敎)의 세력은 확대되어 갔고, 그 결과로 유교(儒敎)는 결국 국교(國敎) 화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 시대에 의한 고하(高下)는 있었지만, 유교(儒敎)는 중국 사상의 근간(根幹)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그 한참 후였던 20세기에, 모택동(毛澤東)이 발동했던 <문화대혁명> 때, 공자(孔子)는 또 다른 의미로 중국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었으며, 그것은 또 그때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비림(임)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란 것을 전개해서 공자(孔子)와 임표(林彪)를 결부시켜서 비판하는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 결과로 공자(孔子)는 봉건주의를 확대했던 중국사(中國史)의 <악인>으로 치부되었으며, 임표(林彪)는 그런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현대에 부활시켰다고 하는 <현대의 악인>으로 치부되었던 불행한 역사가 중국에는 있었다.
♣ 증자(曾子-기원전 506년부터 ?)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유교(儒敎) 여명(黎明)기의 중요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휘(諱)는 참(參)이었으며, 자(字)는 자여(子與), 아버지는 증석(曾皙), 아들로는 증신(曾申)이 있었다.
그는 노(魯)의 무성(武城-현재의 山東省 武城) 출신으로, 효(의)도(道-親孝行)에 밝았으며, 그래서 공자(孔子)의 눈에 띄게 되어서 효경(孝經)을 저술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또 그의 제자로는 앞의 오기(吳起)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에는 또 그 오기(吳起)의 실제 스승은 증신(曾申)이었고, 그래서 또 그를 파문시켰던 사람은 바로 그 증신(曾申)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또 그는 <증참(曾參), 사람을 죽였다>라고 하는 말을 남겼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또 그 사연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면, 어느 때에 그가 알던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그 사실을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고 한다. <증참(曾參)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으려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 후에 두 번, 세 번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식들이 전해져오자 그의 어머니는 그때서야 그 말을 믿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전국책(戰國策)이란 곳에 실려 있다는 것으로, 그 교훈은 또, 평소에는 별 들을 가치도 없는 거짓말 같은 것이라도 사람이 몇 번을 꼭 같이 듣게 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글은 <24효(孝)>에도 들어있다는데, 그래서 그 내용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또 어느 때에, 그가 풀 같은 것을 베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손님이 찾아왔다.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그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할 지를 몰라서 그가 빨리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지만, 그러나 그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서 자신의 손가락을 계속해서 깨물었다는데, 그러자 또 그때, 그는 갑자기 가슴이 아픈 것을 느끼고는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손님이 와있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그 손님을 맞이했다고 한다.
# 참고: 사마양저
사마양저(司馬穰苴-생몰불명)는 중국 춘추시대 제(齊)의 장군으로, 성(姓)은 규(嬀)였고, 씨(氏)는 전(田-그러나 景公을 섬기다가 大司馬가 되었기 때문에, 후에 司馬라고 했다), 휘(諱)는 양저(穰苴)였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안영(晏嬰)의 추천으로 등용되었으며, 그 후에 제(齊)가 번영하는데 공적을 세웠다. 그리고 또한, 병법서인 사마법(司馬法)은 그가 썼던 것을 다시 정리했던 것이었으며, 전완(田完)의 후예로 알려졌다.
참고: 사마법은 무경칠서(武經七書) 또는 무학(武學)7서 중의 하나이며, 중국의 병법에 관한 일곱 가지의 책인 무경칠서는 육도(六韜)와 손자(孫子) 그리고 오자(吳子)와 사마법(司馬法) 그리고 삼략(三略)과 울요자(尉繚子) 그리고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전완(田完 또는 陳完-생몰불명)은 중국 춘추시대 진(陳)의 공자(公子)였고, 제(齊)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성(姓)은 규(嬀)였고, 씨(氏)는 진(陳) 또는 전(田), 휘(諱)는 완(完), 시(諡)는 경(敬)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여공(厲公-利公)의 차남이었으며, 진경중(陳敬仲) 또는 전경중(田敬仲)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전국7웅이었던 전제(田齊)의 조상이었다.
아무튼, 당시의 제(齊)는 장기 간에 걸쳤던 내란의 결과로 경공(景公)이 즉위했으며, 명신으로 이름이 높았던 안영(晏嬰)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당시에는 진(陳)에서 망명해 왔던 귀족 전씨(田氏)들의 세력이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제(齊)의 구(舊) 귀족들은 그런 그들을 질시(嫉視)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경계의 도를 점점 더 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랬을 때쯤, 제(齊)는 진(晋)과 연(燕)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로 영토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자 상심했던 경공(景公)은 그 영토의 회복을 위해서 고심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마침 그때 안영(晏嬰)이 사마양저(司馬穰苴)를 추천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안영(晏嬰)은 <양저(穰苴)는 비록 전씨(田氏)의 서자(庶子)이지만, 그 문덕(文德)은 병사들을 따르게 하고, 그 무덕(武德)은 적을 위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군이시여, 부디 그를 한번 시험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를 천거했다. 그러자 또 경공(景公)은 사마양저(司馬穰苴)와 여러 가지의 병법에 대해서 논하고는 그를 장군의 자리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원래 저의 지위는 보잘 것이 없는 낮은 자리인데, 그런데도 갑자기 장군이 된다면 사람들이 저를 업신여기고 따르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군의 총신(寵臣)이며, 그에 더해서 신망까지 있는 사람을 저의 고문(顧問)으로 임명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경공(景公)에게 말을 했다. 그러자 경공(景公)은 그의 말을 들어주었고, 그 결과로 장가(莊賈)라는 사람이 그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장가(莊賈)에게 <내일 정오에 군문(軍門)에서...>라고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다. 그런데 장가(莊賈)는 돌아가던 길에 <진정으로 군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친척과 고관(高官)들과의 송별(送別)을 위한 주연(酒宴)을 벌였고, 그 때문에 약속시간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러자 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장가(莊賈)가 없던 사이에 군을 정비해서 군규(軍規)를 전군(全軍)에 시달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었을 때쯤에 나타났던 장가(莊賈)에게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장가(莊賈)는 솔직하게 전날 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늦게 되었다고 말을 했고, 그러자 사마양저(司馬穰苴)가 또 이렇게 말을 하면서 격노(激怒)했다고 한다. <장군이란, 일단 출격을 명받았으면 집안일 같은 것은 잊어야 하고, 군중(軍中)에 임해서는 친척이나 지인(知人) 같은 것을 잊어야 하며, 전장(戰場)에 나서서는 자신의 안전 따위는 잊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현재, 적군은 이 나라를 유린하며 깊숙이 쳐들어와 있는 상태이고, 그로 인해서 국내는 불안에 휩싸여 있으며, 병사들은 또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풍우(風雨)에도 아랑곳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군께서도 그 모든 일로 심려하고 계시며, 그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또 밤잠도 설치고 계신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고작 송별을 위한 주연 때문에 출진(出陳)에 늦었다니, 그것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는 군법에 따라서 그 장가(莊賈)를 처형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장가(莊賈)는 너무 놀라서 경공(景公)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그리고는 경공(景公)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사자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장가(莊賈)를 처형시켜 버렸다. 그러자 또 그것을 지켜봤던 병사들은 사마양저(司馬穰苴)를 경외(敬畏)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군규(軍規)를 바로 세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경공(景公)에게 용서를 빌러 갔던 장가(莊賈)의 사자가 다시 돌아와서 그 뜻을 사마양저(司馬穰苴)에게 전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사마양저(司馬穰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고는 그 사자를 쫓아 보냈다고 한다. <장수는, 군(軍營)에 있을 동안에는 비록 군령(君令-왕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 후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군중(軍中)에 있었을 때는 항상 병사들과 행동을 같이 했고, 식사도 같은 것을 먹었으며, 약한 병사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으며, 병자들까지도 출진의 뜻을 높였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런 일들을 알게 되었던 진(晋)과 연(燕)의 군대에서는 미리 제군(齊軍)에 겁을 먹고 후퇴하기 시작했으며, 그러자 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잃어버렸던 땅을 모두 되찾았다. 그러자 또 그 후, 경공(景公)은 개선하고 왔던 그를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했다.
그 후, 전씨(田氏)의 세력은 점점 더 확대되었고, 그러자 또 타족(他族)들은 그런 그들을 더욱 질시(嫉視)했다. 그러자 또 그 결과로 그는 구(舊) 귀족들<晏嬰이 등장하기 이전에 국정을 장악했던 자들로, 그에는 또 포(鮑) 씨(氏-鮑叔의 家系)와 고(高) 씨(氏) 등>로부터 참언을 받았으며, 그러자 또 그 말을 받아들였던 경공(景公)으로부터도 그는 소외되었고, 그 후에는 해임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 후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도 전씨(田氏)들의 세력 확대는 멈추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제(齊)의 강(姜) 씨(氏-太公望의 家系)들로부터 나라까지도 빼앗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위왕(威王) 때에는 왕호(王號)를 부르게까지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위왕(威王)은 사마양저(司馬穰苴)의 병법을 존경해서, 그래서 또 그것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제후들이 제(齊)에 입조(入朝)하게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위왕(威王)은 학자들에게 시켜서 그의 병법을 연구하게 했으며, 그 결과로 사마양저(司馬穰苴)병법이란 것이 탄생했으며, 그것이 후세에 사마법(司馬法)이 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그 사마법은 전부 155편으로 되어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현존(現存)하는 것은 인본(仁本)・천자지의(天子之義)・정작(定爵)・엄위(嚴位)・용중(用衆) 그 5편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후세에 사마천(司馬遷)은 그 병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넓고 깊으며, 특히 삼대(三代-夏・殷・周)의 전쟁에 관해서 그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된 책은 없다>
그리고 또, 그 현존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그것은 병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쟁에서의 의례적(儀禮的)인 것을 적은 부분이 많으며, 그것에 대한 예로는 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에는 전쟁에 져서 도망을 치는 적은 백보(百步)까지밖에는 추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후퇴하는 적도 삼사(三舍-앞에서 설명되었음. 그러나 다시 상기하는 차원에서, 舍는 군이 하루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로, 대충 12킬로미터 정도임. 그러므로 대충 36킬로미터)까지밖에는 추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실전(實戰)적인 부분으로서는 <전쟁에서는 우선, 적보다도 이동하는 것이 더 힘들고, 그리하여 도착이 늦어지게 되면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리고 또 쉬게 되면 나태해지기 쉽고, 하지만 또 쉬지 않으면 피곤해진다. 그리고 또 그 휴식이 길어지게 되면 다시 공포(恐怖)가 찾아온다>
<楚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