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5)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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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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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참고: 맹상군(孟嘗君-?부터 기원전 279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였고, 전국(戰國)사군(四君) 중 한사람이었다. 성(姓)은 규(嬀), 씨(氏)는 전(田), 휘(諱)는 문(文)이었고, 맹상군(孟嘗君)은 그의 시(諡)였다. 그리고 또 그는 제(齊)나라 위왕(威王)의 후손이었다.

 그(田文)의 아버지 전영(田嬰)은 선왕(宣王)의 이모제(異母弟)로, 설(薛-현재의 山東省 滕州)이란 곳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전영(田嬰)은 슬하(膝下)에 자식을 40명도 더 두었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의 어머니의 신분은 낮았고, 그의 생일은 또 5월 5일로, 그 날짜에 태어난 자식은 훗날 그 아버지를 죽인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전영(田嬰)은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그를 비밀리에 숨겨서 키웠다고 한다.(하지만 그 이야기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음)

 아무튼 그 후, 그가 성인 정도 되었을 때, 전영(田嬰)이 하루는 노하면서 그에게 <왜 아직도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또 그가 <왜 제가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러자 또 전영(田嬰)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것을 진정 네가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너처럼 그때 태어난 아이는 가문(家門)의 혜택을 잘 받아서 자란 다음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제가 가문의 혜택을 포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전영(田嬰)은 그의 뜻을 받아주어서 같은 집에서 살게는 해주었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날, 그는 전영(田嬰)에게 <아버님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의 손(孫)은 어떻게 될까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전영(田嬰)이 잘 모른다고 답을 했는데,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제(齊)의 영토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데도 우리 집은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랬다고 하지만, 하지만 또 우리 집에는 가족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사람들 때문에 이 집의 재산은 앞으로는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또 전영(田嬰)은 식객(食客) 한명을 집으로 초빙해서 그와 이야기를 해보게 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 객 앞에서 신랄한 비평을 가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대단히 날카로웠던 것이어서 금방 소문이 났다. 그러자 그 후에는 제후들 사이에서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전영(田嬰)은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전영(田嬰)의 후계를 잇게 된 그는 별 내세울 것도 없는 식색(食色)이라도 적극적으로 맞이했고, 그러자 그 수는 수천(數千)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때, 그는 중간에 칸막이를 세워두고 식객들과 같은 방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런데 그때 식객 중 한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 칸막이를 쳐둔 것은 주인의 것과 우리 식객들의 요리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또 그가 그 말을 듣고는 그 객에게 요리는 전부 같은 것임을 알려주었는데, 그러자 그 객은 자신의 언행에 수치심을 느껴서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그 일이 결국 그의 명성을 드높이게 했고, 그리하여 또 기원전 299년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은 그를 재상에 영접하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또 그는 진(秦)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어떤 사람이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그가 당대 일류의 인재인 것에 대해서는 저도 인정을 하지만, 그러나 그는 결국 제(齊)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진(秦)의 재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제(齊)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그대로 제(齊)로 돌려보내버린다면, 그는 또 필시 제(齊)의 이익을 위해서 일할 것이므로, 그러므로 또 결국 그는 진(秦)의 위협(威脅)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그 말을 받아들여서 그때 그가 묵고 있던 집을 포위했다. 그러자 곧 그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는 한 식객(食客)에게 시켜서 소양왕(昭襄王)의 총희(寵姬)에게 목숨을 구걸해보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 총희(寵姬)는 그때 그가 가지고 갔던 보물이었던 호백구(狐白裘)를 탐냈다. 그리고 또 그 호백구(狐白裘)란 여우의 겨드랑이에 난 흰 털만으로 만든 외투 같았던 것으로, 그것을 한 벌 만드는 데는 여우가 1만 필이나 필요했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대단히 귀한 물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것은 그가 진(秦)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소양왕(昭襄王)에게 헌상을 했던 것이었는데, 그래서 또 그는 당연히 고민이 되었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그때 식객 중에 구도(狗盜-개처럼 날렵한 도둑)란 사람이 나서서 그를 도와주려고 했고, 그리고는 소양왕(昭襄王)의 침소로 잠입해서 그것을 다시 훔쳐 내왔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그 총희(寵姬)에게 전달하고는 일단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또 언젠가 그 소양왕(昭襄王)의 마음이 바뀌었던지 맹상군(孟嘗君) 등은 급히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국경이었던 함곡관(函谷關)까지 갔을 때, 이미 밤중이어서 관문이 닫혀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난감해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식객 중 한사람이었던 물진사(物眞似)란 사람이 나서서 닭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그 소리를 들었던 닭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함곡관(函谷關)은 열렸고, 그들은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평소에 학자나 무술인 등의 식객들은 맹상군(孟嘗君)이 그런 도둑이나 하찮은 닭소리나 흉내 내는 사람들을 식객(食客)으로 받고 있었다는데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지만, 그러나 그때는 또 <과연, 사람은 쓰기 나름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 맹상군(孟嘗君)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이야기가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가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제(齊)로 다시 돌아왔던 맹상군(孟嘗君)은 재상이 되었고, 그 후에 한(韓) ・위(魏)군과 합세해서 진(秦)을 쳤다. 그런데 또 그 즈음에 풍환(馮驩)이란 거지 같은 사람이 그를 찾아왔는데, 그러자 그는 그를 식객으로 맞아주었고, 하급(下級)숙사에서 머물게 했다. 그러자 또 그 풍환(馮驩)은 가지고 있던 검(劍)을 땅에 두드리면서 다음과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장검(長劍-나름대로 검객인데)인데도 이런 대접을 받으니 그냥 돌아 가버릴까? 그러나 당장 먹을 물고기 한 마리 없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맹상군(孟嘗君)은 그를 중급(中級)숙사로 올려주었다. 그러자 또 그 풍환(馮驩)이 똑 같이 칼로 땅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장검(長劍)인데, 그냥 돌아 가버릴까, 하지만 다시 돌아가려고 해도 타고 갈 가마가 없네> 그러자 또 맹상군(孟嘗君)은 그를 상급(上級)숙소로 옮겨주었다. 그러자 또 그 풍환(馮驩)이 앞과 꼭 같이 하면서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장검(長劍)인데 그냥 돌아 가버릴까, 지금까지 집 한 채도 가져본 적이 없는데> 그러자 맹상군(孟嘗君)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후로 1년 정도나 그를 무시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맹상군(孟嘗君)은 설(薛)의 영지를 백성들에게 대여해주고 거기서 들어오는 이자로 식객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지만, 그런데 그 중에는 그 이자를 지불하지 않는 백성들도 있었다. 그러자 식객들 중에서 그 풍환(馮驩)이란 자가 추천되었고, 그래서 그는 그 이자를 받기 위해서 그 백성들에게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자를 내지 않았던 백성들을 모두 한 집에 모았는데, 그러자 몇 사람이 그 이자를 내놓았다. 그러자 또 그는 그 돈으로 술과 고기를 사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연회를 베푼 뒤에 한 사람씩 일일이 만나서 기한이 찼는데도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기한을 연장해 주었고, 그리고 아직 기한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증문(證文)을 쓰게 해서 따로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 백성들이 보던 앞에서 불에 태우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맹상군(孟嘗君)이 토지를 빌려주고 있는 것은 백성들에게 일을 주기 위함이요. 하지만 맹상군(孟嘗君)은 그 이자를 지불하지도 못할 정도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그 증문(證文)을 태우라고 나에게 명령을 내렸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맹상군(孟嘗君)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요!> 그러자 그곳에 있었던 백성들은 모두 맹상군(孟嘗君)의 덕(德)에 감복했다.

 하지만 또 정작에 그 말을 들었던 맹상군(孟嘗君)은 몹시 화를 내면서 풍환(馮驩)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또 풍환(馮驩)이 이렇게 말을 했다. <이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사람들에게 그 이자를 내라고 해봐야 그들은 고작 도망이나 갈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터전을 잃게 된 그들은 맹상군(孟嘗君)을 원망하면서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맹상군(孟嘗君)은 돈만 좋아하지 백성들을 아낄 줄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 사람을 배신하고 돈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맹상군(孟嘗君)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증문(證文)들을 태우는 것으로 백성들에게 맹상군(孟嘗君)께서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보였고, 그리하여 맹상군(孟嘗君)의 덕을 천하에 알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또 맹상군(孟嘗君)도 그 말에 감복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 그는 민왕(湣王) 아래서 재상을 지내면서 내외의 정치를 맡았다. 그러자 그때, 그는 제(齊)의 국력을 최고로 올렸지만, 그러나 또 나라가 그렇게 부강해지자 민왕(湣王)은 갑자기 거만해져서 타국(他國)에 압도적인 외교를 펼치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민왕(湣王)에게 그에 대해서 간언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민왕(湣王)은 그랬던 그와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맹상군(孟嘗君)의 제(齊) 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는 제(齊)>라는 평(評)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맹상군(孟嘗君)은 제(齊)의 재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러자 또 당시 3천명이 넘었다던 식객들도 모두다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런데 그때 단 한명의 사람이 그의 곁에 남아있었다고 했는데, 그가 바로 앞의 그 풍환(馮驩)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맹상군(孟嘗君)을 다시 재상에 올리기 위해서 일대 연극을 벌였으며, 그 우선으로 그는 진(秦)으로 갔다. 그리고는 소양왕(昭襄王)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맹상군(孟嘗君)이 진(秦)에서 벼슬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그동안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즉시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풍환(馮驩)은 그 다음으로 제(齊)로 급히 돌아가서 민왕(湣王)을 만나서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진(秦)에서 맹상군(孟嘗君)을 데려가려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되면 큰일이 아닐 수 없으므로, 왕께서는 그를 복직시켜주고, 영토도 더 올려주어서 그를 위로하심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자 민왕(湣王)은 그 사정을 정확히 알아본 다음에 풍환(馮驩)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풍환(馮驩)의 말대로 맹상군(孟嘗君)을 복직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토까지도 올려주었다.

 그 후, 풍환(馮驩)은 맹상군(孟嘗君)에게 사라진 식객들을 전부 다시 부르게 했다. 그러나 맹상군(孟嘗君)은 자신을 버리고 갔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풍환(馮驩)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맹상군(孟嘗君)을 설득했다. <그들이 그때 갔던 것은 맹상군(孟嘗君)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부자들 옆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지만, 그러나 가난한 사람 곁에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그것은 또 아침에 시장에 나가보면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그러나 해가 지고 나서 시장에 나가보면 사람들이 적은데, 그것은 또 아침보다 저녁에 물건이 적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살 것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또 그들이 그때 맹상군(孟嘗君)을 떠났던 것은 그들이 맹상군(孟嘗君)을 싫어했고 좋아했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맹상군(孟嘗君)과 같이 있다가는 그들 자신들의 생활도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맹상군(孟嘗君)이 납득하고 풍환(馮驩)의 뜻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풍환(馮驩)이 맹상군(孟嘗君)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재빠른 토끼는 잘 도망가기 위해서 항시 구멍을 3개를 파둡니다. 그런데 맹상군(孟嘗君)에게는 영토인 설(薛) 한 개의 구멍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위(魏)와 제(齊)에 2개의 도망갈 구멍을 더 만들어두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맹상군(孟嘗君)은 풍환(馮驩)에게 돈(金)을 주어서 위(魏)의 양왕(襄王)을 만나게 했다. 그러자 또 그 자리에서 풍환(馮驩)은 양왕(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제(齊)의 민왕(湣王)은 과거에 맹상군(孟嘗君)을 쫓아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으므로 명성이 높은 맹상군(孟嘗君)을 위(魏)로 불러들이신다면 금방 위(魏)는 부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양왕(襄王)은 아주 기뻐하면서 풍환(馮驩)에게 상석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 후, 맹상군(孟嘗君)은 위(魏)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러자 또 풍환(馮驩)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맹상군(孟嘗君)을 말렸다. <민왕(湣王)이 곧 달려올 것이므로 잠시만 더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그 후, 풍환(馮驩)의 생각대로 위(魏)에서 빈번히 사자가 와서 맹상군(孟嘗君)을 만나고 가는 것을 알게 되었던 민왕(湣王)은 맹상군(孟嘗君)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붙잡았다. <설(薛)에 선대(先代)의 사당(廟)을 지을 생각이므로 제(齊)에 머물러주시오> 그러자 풍환(馮驩)이 그 말을 듣고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드디어 2개의 도망 구멍이 더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는 <교토삼굴(狡免三窟)> 고사의 어원이 되었다.

 하지만 또 당시, 민왕(湣王)은 아직 맹상군(孟嘗君)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민왕(湣王)의 그런 성정(性情)을 잘 알고 있었던 맹상군(孟嘗君)은 스스로 은거(隱居)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도 그의 명성은 드높았고, 그 때문에 또 진(秦)으로서는 제(齊)에 그가 있는 한은 어쩔 수가 없다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진(秦)은 맹상군(孟嘗君)을 제거하기 위한 강력한 공작(工作)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또 그 때문에 민왕(湣王)의 시기심은 더욱 높아져서 결국에는 그를 죽일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결국 맹상군(孟嘗君)은 기원전 284년에 풍환(馮驩)이 미리 확보해두었던 그 도주 길에 올라서 위(魏)로 들어갔고, 그러자 또 위(魏)에서는 그를 재상으로 영접했다.

 그 후, 민왕(湣王)에게 한을 품고 있었던 연왕(燕王)의 뜻을 받았던 악의(樂毅-燕의 장군. 후술. 그러나 낙의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의 주도로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과 진(秦) 그리고 연(燕) 그 5개의 연합군이 성립되었으며, 그러자 제(齊)는 그 연합군에 대패했다. 그러자 또 그 후, 제(齊)로 쳐들어갔던 악의(樂毅)에 의해서 민왕(湣王)은 살해되었으며, 그로서 제(齊)는 바로 멸망 촌전(寸前)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전단(田單-齊의 장군)에 의해서 제(齊)는 부흥(復興)했으며, 그러자 맹상군(孟嘗君)도 다시 제(齊)로 돌아왔다.

 그 후, 기원전 279년에 그는 사거했으며, 그 후에 시(諡)로 맹상군(孟嘗君)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그의 자손들은 후계문제로 서로 다투었으며,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위(魏)와 제(齊)가 설(薛)을 공격해서 그의 자손들은 모두다 죽었다.

 
그리고 또,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염려해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러나 위의 田單에 대해서는 소개할 것이 조금 있기 때문에, 잠시 소개를 하고 마칩니다.

 그리고 또 이 자리를 빌어서 그동안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인사 올려드리며, 민족의 대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하여 가내 두루 평안하시며, 또한 풍성하고도 넉넉한 추석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해 올립니다. 그리고 또한 행복하시기만 하고 무탈한 명절 되시길 진심으로 빌어 올립니다. 그럼, 저 역시도 명절을 지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추석이 지난 후에 편안한 날 다시 뵙기를 희망합니다. 그럼, 즐거운 명절 되십시오...

 ※ 전단(田單-기원전 3세기경)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의 무장이었고, 연(燕)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 자신의 지략으로 나라를 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기(史記)에 단독으로 올랐던 인물이었다.

 기원전 284년, 제(齊)는 연합군에 패했다. 그러자 당시 하급직이었던 전단(田單)은 주위의 사람들과 자신의 친척들에게 마차(馬車)를 보강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제(齊)에는 아직도 70여 성(城)이 남아있다>라고 태평스런 말을 하면서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낙의(樂毅)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제(齊)가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단 그의 친척들이 모여서 마차(馬車)를 보강했는데,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대로 낙의(樂毅)가 쳐들어오자 제(齊)는 그를 대항하는데 역부족이었다.

 그 후, 전단(田單)이 머물고 있던 성마저 떨어졌고, 그러자 사람들은 그 성을 탈출하는데 급급했다. 그러자 또 미리 보강(補强)하지 않았던 마차(馬車)들은 차축(車軸)이 부러지는 등해서 연(燕)군(軍)의 손에 넘어갔지만, 그러나 미리 보강해두었던 마차(馬車)들은 다행히도 즉묵(卽墨-현재의 山東省 靑島市 內)이란 곳으로 옮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즉묵(卽墨)도 낙의(樂毅)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즉묵(卽墨)의 성주(城主)가 그에 대항해서 싸웠지만 오히려 격퇴 당했다. 그러자 또 그때, 앞의 일을 알고 있었던 어떤 관리가 전단(田單)을 추천했고, 그러자 그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전단(田單)은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너무도 갑작스럽게 장군이 되었던 전단(田單)은,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잘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선 자신의 집 정원에서 선조들에 대한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그러자 그 공물(供物)에 새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러자 또 그것을 불길하게 생각했던 전단(田單)은 그것이 필시 무슨 징조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내가 전날 꿈을 꾸었는데 군사들 중에 신(神)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런 기분이 든다는 병사를 찾아내서 제단에 올리고는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것으로 군령(軍令)은 이제 신(神)의 말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즈음에 제(齊)의 70 수(數) 도시(都市)들은 수도 임치(臨淄-현재의 山東省 淄博市)를 포함해서 거의가 점령이 되었던 상태였다. 그래서 또 제왕(齊王)이 머물고 있던 거(莒-현재의 山東省 日照市)와 즉묵(卽墨) 그 두 도시만이 어떻게든 버텨내면서 수년(數年)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 무렵, 연(燕)에서는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를 했다. 그러자 전단(田單)은 그 태자와 낙의(樂毅)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그때가 호기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간첩을 연(燕)으로 보내서 그 궁정(宮廷) 안에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리게 했다. <거(莒)와 즉묵(卽墨)은 지금이라도 바로 함락할 수 있는데도, 낙의(樂毅)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제왕(齊王)이 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제(齊)가 현재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낙의(樂毅) 대신으로 올 장군이 이 제(齊)를 사정없이 짓밟는 것이다>

 그러자 연왕(燕王)은 그 말을 믿고는 낙의(樂毅) 대신으로 기겁(騎劫)이란 자를 제(齊)로 보냈고, 낙의(樂毅)는 귀국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자 또 졸지에 낙의(樂毅)는 망명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부당한 지휘관 교대에 불만을 가졌던 연(燕)군(軍)들은 곧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낙의(樂毅) 대신으로 왔던 그 기겁(騎劫)이 낙의(樂毅)는 제(齊)의 70여 성(城)이나 함락을 시켰던 것에 비해서 자신은 단 한 개의 성도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내심 전공(戰功)이 없다는 초조감에 휩싸여있을 것이란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또 전단(田單)은 <포로가 되면 코가 잘리는 벌을 받게 된다는 말을 듣고 벌벌 떨고 있다>라든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 밖에 있는 자신들 선조들의 묘가 파헤쳐지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겁을 먹고 있다>라는 등의 허위정보를 연(燕)군(軍)에 흘렸다.

 그런데 기겁(騎劫)이 그대로 따라하자 그것을 봤던 즉묵(卽墨)의 민병(民兵)들은 <우리가 항복을 하게 되면, 그대로(유언비어처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 그리고 또, 조상들을 욕보이는 저런 자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소리치면서 사기(士氣)를 올렸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여자아이들과 노인들을 배치시켜서 성(城)을 지키게 하는 것처럼 해놓고는 사자를 연군(燕軍)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또 <이제 제(齊)에는 싸울 병사들도 없고, 화살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항복을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아직도 철저항전을 부르짖는 자들이 몇 명 남아있으므로, 그래서 그들을 설득시키는데 수일(數日) 정도가 걸릴 것이므로, 그때까지 말미를 달라>고 말하게 했다. 그러자 또 기겁(騎劫)은 5일의 말미를 주었는데, 그러자 또 그런 사실을 전해 들었던 연군(燕軍)들은 그때 이미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왔던지 벌써 수년(數年)이 지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그간의 피로와 망향(望鄕) 생각으로, 이제는 싸움이 다 끝났다면서 환호했다. 그러자 연군(燕軍)들의 긴장은 금방 풀려버렸고, 경계심도 그만큼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자 전단(田單)은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말미 중 하루 밤을 선택해서 비밀리에 성문을 열고는 뿔에는 단검을 꽂았고, 꼬리에는 횃불을 매달았던 소 천(千)두(頭)를 연군(燕軍)이 주둔하고 있던 곳으로 방사했다.(火牛의 計) 그러자 그 소들은 미친 듯이 연군(燕軍)의 진지로 달려갔고, 그리고는 뿔에 달렸던 단검으로 연군(燕軍)들을 찔렀을 뿐만 아니라, 꼬리에 횃불을 단 채로 연군(燕軍)의 막사를 덮쳤기 때문에, 그래서 연군(燕軍)의 진영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그 우왕좌왕하던 연군(燕軍)들을 향해서 그동안 연군(燕軍)에 한을 품고 있었던 병사들을 풀어서 맹공을 가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백성들은 큰북을 울리면서 제군(齊軍)이 대군인 것처럼 위장을 했고, 그러자 또 연군(燕軍)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혼란을 일으켰으며, 그리하여 결국 기겁(騎劫)의 군대는 무너졌다.

 그 후, 전단(田單)은 그 기세를 타고 잃었던 성들을 전부다 되찾았으며, 그러자 또 수도였던 임치(臨淄)로 그가 개선했을 때, 양왕(襄王)은 그를 평안군(安平君)에 봉했다.

 그 후, 그는 장군의 자격으로 몇 번인가 전쟁에 참가했으며, 특히 조세가(趙世家)에는 그가 나중에 조(趙)나라의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을 해두었다. 그리고 또, 동시대의 사료(史料)였던 여씨춘추(呂氏春秋)와 순자(荀子)에서도 그가 아주 훌륭한 군략(軍略)을 가졌던 사람이었다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또 사마천(司馬遷)도 <손자(孫子)의 "처음에는 처녀(處女)처럼 적에게 문을 열어주고, 나중에는 달아나는 토끼처럼 적이 방비할 틈을 주지 않는다"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 전단(田單)의 경우를 말한 것이다>라고 그를 제법 높게 평가했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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