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40)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그 후, 경후(敬侯)의 증손(曾孫)이었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騎馬)전술을 도입해서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에 조(趙)의 그 기마대(騎馬隊)는 제국(諸國)을 떨게 했고, 당시 위(魏)에 멸해졌던 후 재흥(再興)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다시 멸했다.

 그리고 또 당시, 진(秦)에서는 효공(孝公)을 섬기고 있던 상앙(商鞅)이 정치개혁을 단행한 후, 엄격한 법치주의에 의한 통치체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진(秦)의 국력은 증대되었다. 그러자 또 위(魏)와 한(韓)이 그에 위협을 받았으며, 장의(張儀-6-26참조)의 책략에 의해서 초(楚)의 회왕(懷王)은 포로로 잡혔고, 진(秦)은 초(草)의 땅을 빼앗았다.

 ○ 효공(孝公-기원전 381년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제25대 군주였고, 헌공(獻公-師隰)의 적자(嫡子)였다. 그리고 또 그는 즉위와 동시에 포고(布告)를 내서 국정을 쇄신(刷新)하겠다고 포부를 밝혔고, 그 후에 위(魏)에서 왔던 상앙(商鞅)을 영입했던 것으로 발본(拔本)적인 국정개혁에 들어갔다.<상앙(商鞅)의 변법(變法)> 그리하여 목공(穆公) 사후부터 쇠퇴했던 진(秦)을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재탄생시켰으며, 수도를 역양(櫟陽)에서 함양(咸陽)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위(魏)를 격파하는 등, 부국강병에 노력했던 중흥(中興)의 시조(始祖)였다.

 ○상앙(商鞅-기원전 390년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 또는 위(衛)의 공족(公族)계였기 때문에 위앙(衛鞅)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또 상앙(商鞅)이란 호칭은 그가 나중에 진(秦)의 상(商)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상군앙(商君鞅)이라는 의미의 존칭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법가사상을 기초로 해서 진(秦)의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것이 또 나중에 진(秦)의 천하통일에 초석이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주변의 원한을 사서 처형당했다. 그는 위(衛)의 공족(公族) 출신이었고, 위(魏)의 혜왕(惠王)을 모시던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중서자(中庶子-公族을 담당했던 官職)를 지냈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가 되었으며,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그 길로 진(秦)으로 가서 당시 환관(宦官)이었던 경감(景監)이란 자를 만나서 당시 아직 젊었던 효공(孝公)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 만남은 이루어졌고, 그러자 상앙(商鞅)은 먼저 왕도(王道)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을 열변했는데, 하지만 효공(孝公)은 그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자 또 그 얼마 후에 그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상앙(商鞅)은 그때는 한단계정도 수준을 낮추어서 다시 왕도(王道)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때도 효공(孝公)의 반응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또 얼마 후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앞보다 더 수준을 낮추어서 패자(覇者)의 길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그러자 그때는 효공(孝公)도 열심히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상앙(商鞅) 쪽으로 다가와서 그 이야기를 경청했을 정도였다. 그 후, 그렇게 해서 신임을 얻었던 상앙(商鞅)은 국법을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그러나 정작 효공(孝公)이 비판을 두려워해서 망설였다. 그러자 또 상앙(商鞅)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격려했다. <疑行無名, 疑事無功> 즉, 여기서의 의(疑)란, 확신이 없는 애매한 태도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또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감(自信)을 가지고 단행(斷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나 마음가짐 상태로 무엇을 하려고 든다면, 그 일이 비록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그래서 명예 또한 얻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상앙(商鞅)의 그 말은 후세에 고사성어(故事成語)로 남게 되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자 감용(甘龍)이라든가, 두지(杜摯) 같은 자들이 반대하고 나왔는데, 그러자 상앙(商鞅)은 그들의 주장을 논파(論破)했고, 그러자 효공(孝公)도 상앙(商鞅)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기원전 359년, 효공(孝公)은 상앙(商鞅)을 좌서장(左庶長)에 임명했으며, 변법(變法)이라고 불렸던 국정개혁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1차 변법(變法)이라고 불렸던 것이며, 그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참고: 좌서장(左庶長)은 진(秦)의 20등작제(二十等爵制) 중에서 제12위를 가리켰던 것이며, 한편, 상군열전(商君列伝)에서는 그 시점(時點)에 좌서장이 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진본기(秦本紀)에서는 변법(變法) 실행 후 3년이 지났을 때부터였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며, 그리고 다음은 참고로 그 진20등작제(秦二十等爵制)에 대한 내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이 등작제는 진(秦)한(漢)시대에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그 등위는 다소 변동이 있을 수 있으며, 역시 한글표기는 하지 않습니다.

1.公士 /2.上造 /3.簪裊 /4.不更 /5.大夫 /6.官大夫 /7.公大夫 /8.公乗 /9.五大夫 /10.左庶長 /11.右庶長 /12.左更 /13.中更 /14.右更 /15.少上造 /16.大上造 /17.駟車庶長 /18.大庶長 /19.関内侯 /20.列侯

 1. 호적(戶籍)을 만들어서 백성들을 5호(戶-) 또는 10호(戶-)를 한 조(組)로 나눈다.(그것을 什伍라고 불렀음)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것을 의무로 할 것이며, 혹시라도 그 중에서 죄를 범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십오(什伍) 전체가 연좌(連座)로 벌을 받는다.(그것을 告座라고도 불렀음) 그러나 미리 신고를 한 경우에는 전쟁에서 적의 머리를 취한 것과 같은 공적이 인정된다.

 2. 한 집에 두 명 이상의 성인 남자가 있는데도 분가하지 않은 자는, 부세(賦稅)를 배가(倍加)시킨다.

 3.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을 때는 작위(爵位)로 보상한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지 않은 자에게는 그 정도에 상응하는 과형(課刑)을 부과한다.

 4. 남자는 농업, 여자는 방적(紡績) 등, 가정 내의 수공업에 종사하고, 그 중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은 세금을 면제한다. 그러나 장사를 한다거나 게으름을 피워서 가난하게 된 자는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뜨린다.

 5. 특권 계급이라고 해도 전공(戰功)이 없는 자는 그 신분을 박탈한다.

 6. 법령(法令)을 사회규범의 요점으로 한다.

 그런 다음 그는 나라에서 법을 확실하게 집행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3장(丈-1丈은 10尺 그러나 秦代의 度量衡에서는 1尺이 약 27.6㎝정도였으므로, 약 8.3m)도 더 되던 나무를 수도였던 옹(雍)의 남문(南門) 앞에 박아놓고 <그 나무를 북문(北門)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十金)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그 나무를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상금을 50금으로 올렸다. 그러자 어느 하루, 어떤 사람 한명이 와서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겼다. 그러자 상앙(商鞅)은 약속대로 그 남자에게 50금을 상금으로 주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백성들은 상앙(商鞅)이 만든 변법(變法)을 믿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최초의 신법(新法)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백성들의 불만은 높아갔지만, 그러나 상앙(商鞅)은 그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거기다 또 상앙(商鞅)은 그 법이 훌륭하게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이 그것을 반드시 지키려는 마음이 없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마침 그때, 효공(孝公)의 아들 태자 영사(嬴駟-나중의 惠文王)가 법을 어긴 일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효공(孝公)에게 그를 처벌할 것을 소원(訴願)했다. 그러자 또 효공(孝公)은 태자에게는 직접적인 벌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태자의 부(傅-후견役)였던 공자 건(虔)을 비삭(鼻削-코를 자름)형에 처했고,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공손가(公孫賈)에게는 이마에 글을 새겨 넣은 묵형(墨刑)에 처했으며, 거기다 또 한사람 태자의 시종(侍從)이었던 축환(祝懽)마저 태자를 잘 보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그러자 그 후, 공자 건(虔)과 공손가(公孫賈) 그 두 사람은 수치심에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고, 그러자 또 그 두 사람은 그때부터 상앙(商鞅)을 증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백성들은 그때서야 법의 지엄함을 알고는 따르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은 그때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자 전답(田畓)들은 아주 멋지게 개간되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그리고 또 백성들도 그때부터는 풍족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내 것이다!>하고 달려드는 사람 하나도 없을 정도가 되어갔다. 그러자 또 처음에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백성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때부터는 상앙(商鞅)을 칭찬하는데 입이 마를 지경이었고, 그것으로 상앙(商鞅)의 그 변법(變法)은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52년, 그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진(秦)은 위(魏)를 침공했으며, 그리고 기원전 350년에는 수도를 옹(雍)에서 함양(咸陽)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동년(同年) 상앙(商鞅)은 다시 변법(變法)을 시행했으며, 그것은 또 법가사상에 의한 군주독재권의 확립을 기도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의 주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1. 부자(父子)형제(兄弟)가 한집에 사는 것을 금한다.

 2. 전국(全國)의 집락(集落)을 현(縣)으로 나누고(縣制로, 全國에 41縣을 設置함) 그곳에 각각 영(令-長官), 승(丞-補佐)을 설치하는 것으로 중앙집권화를 철저히 한다.

 3. 정전(井田)을 폐(廢)하고, 전지(田地)의 구획(區劃)정리를 행한다.

 4.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한다.

 참고: 그때, 공평(公平)하게 계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승(升-되, 말)이 <상앙승(商鞅升)> 또는 <상앙량(商鞅量)>이라고 불렸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아무튼 당시까지 그곳에서는 부자형제가 한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중원(中原) 제국(諸國)들의 시각에서 그런 것은 야만(野蠻)의 풍습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상앙(商鞅)은 그것을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었고, 그 결과로 호수(戶數)가 늘어나서 진(秦)은 그때부터 더욱더 강대해져 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340년, 그 전 해에 이미 제(齊)의 손빈(孫臏)에 의해서 피폐(疲弊)해져 있었던 위(魏)를 다시 침공했으며, 그때 상앙(商鞅)은 스스로 군을 인솔해서 그 토벌에 나섰다. 그리고 또 옛날부터 친구사이였고, 당시 위(魏)의 총대장이었던 공자(公子) 공(邛)을 기만해서 포로로 잡았으며, 그것으로 황하(黃河) 이서(以西)의 땅을 빼앗았다. 그러자 위기를 느꼈던 위(魏)는 수도를 안읍(安邑-현재의 山西省 安邑)에서 동쪽의 대량(大梁-현재의 開封)으로 옮겼으며, 그러자 또 그때, 혜왕(惠王)은 <내가 일찍이 공숙좌(公叔座)의 말을 듣지 않아서 지금 이런 일을 겪는구나!>라고 하면서 크게 후회했다. 아무튼, 그 공적으로 상앙(商鞅)은 상(商)과 어(於)라는 땅의 15읍(邑)을 봉지로 내려 받았고, 그때부터 상앙(商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소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고의 절정을 맞고 있었던 상앙(商鞅)도 그 이면에는 많은 그림자들을 생산했고, 그들은 또 그를 제거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제일로 많은 피해를 봤던 사람들은 구(舊) 귀족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시 군주의 독재로 인해서 자신들의 권한이 많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상앙(商鞅)에 대한 증오가 더욱 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어느 때, 상앙(商鞅)의 심복이었던 조양(趙良)이 상앙(商鞅)에게 <지금 당장 재상의 직을 그만두고 타국(他國)으로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엄중하게 충고를 했다. 그러자 그에 대해서 상앙(商鞅)은 <네가 나의 안전을 염려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그것을 두고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조양(趙良)은 상앙(商鞅)에게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보고 그길로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338년, 마침내 효공(孝公)이 죽었고, 그러자 태자 사(駟)가 즉위해서 혜문왕(惠文王-그러나 그 시점에서는 惠文公)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만을 기다려왔던 상앙(商鞅)의 반대파(公子 虔・公孫 賈 등)들이 혜문왕(惠文王)에게 참소(讒訴)를 했고, 그것으로 상앙(商鞅)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상앙(商鞅)은 급히 도망을 갔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어느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여관의 주인은 그가 상앙(商鞅)인줄을 몰랐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의 숙박을 거부했다. <상앙(商鞅) 님의 엄명에 의해서 여권(旅券)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숙박시키지 못하도록 법률로 정해두었습니다> 그러자 상앙(商鞅)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아! 법을 위한 폐(弊), 여기에까지 이르렀던가?!(법률을 만들어서 철저하게 시켰던 폐해(弊害)가 이런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할 줄이야...)> 그 후, 그는 일단 위(魏)로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위(魏)에서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추방되었다. 그러자 하는 수가 없었던 상앙(商鞅)은 봉지였던 상(商)으로 가서 군사를 모았지만, 그것을 토벌하러왔던 진(秦)의 토벌군에 의해서 격퇴되었으며, 상앙(商鞅)도 그때 죽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엄명을 내려서 그 본보기로 삼기 위해 그의 유해를 면지(黽地-현재의 河南省 澠池県)에서 차열(車裂)형에 처하라고 했고, 그 결과 그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어진 후에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그것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또 그 진(秦)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고 끝을 내면, 그 진(秦)은 원래는 내륙의 오지(奧地)에 기원(起源)을 두었던 나라로, 그래서 당시의 중국 즉, 내륙인 중앙에 있던 제국(諸國)들과는 다소 이질(異質)적인 나라였고, 그 풍습이란 것도 거의 야만(野蠻)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상앙(商鞅)에 의해서 그 모든 것들은 개혁되었으며, 거기다 위(魏)까지 이기고는 강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상앙(商鞅) 사후, 즉 혜문왕(惠文王) 이후의 진(秦)의 역대군주들도 모두 상앙(商鞅)이 만들었던 그 법을 따랐으며(그것은 또 그 반세기전에 楚의 吳起도 그런 엄격한 법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가 죽고 나자 그것도 함께 없어졌다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또 그 후에 진(秦)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도 바로 그 상앙(商鞅)이 만들어두었던 그 <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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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9)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
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
그리고 그는 한(韓)의 경후(景侯)와 위(魏)의 문후(文侯)와 함께 기원전 403년에 진(晋)의 열공(烈公)으로부터 제후(諸侯)로서 인정되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또 그때, 그에게는 영장(嬴章-나중의 敬侯)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동생이었던 무공(武公-武侯)에게 양위(讓位)되었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된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그는 생전에 음악을 아주 좋아했는데, 특히 정(鄭)나라 출신의 어떤 가수(歌手)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당시 상국(相國-재상)이었던 공중연(公仲連)에게 그의 신분을 높여주라고 명을 내렸는데, 그러자 공중연(公仲連)은 <그를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신분을 높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반대했다. 그러자 열후(列侯)는 <그렇다면 그에게 밭(田) 1만 묘(畝)를 내려라!>라고 또 명을 내렸다. 그러자 공중연(公仲連)은 알았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내켜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열후(列侯)가 언젠가는 그 결정을 후회할 날이 있겠지'하고 기다렸다는데, 그런데 그 1개월 후에 열후(列侯)가 그 결과를 물었다. 그러자 또 공중연(公仲連)이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 적당한 밭을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또 얼마 후에 열후(列侯)가 그것에 대해서 또 물으려고 하자 공중연(公仲連)은 병을 핑계로 참내(參內)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 얼마 후에 공중연(公仲連)은 우축(牛畜)과 서월(徐越) 그리고 순흔(荀欣)을 데리고 가서 열후(列侯)에게 소개하면서 추거(推擧)했다. 하지만 열후(列侯)는 그 일은 제쳐두고 끝까지 앞의 그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또 공중연(公仲連)은 그 말에는 애매하게 얼버무리고는, 자신이 데리고 갔던 자들이 모두 현자(賢者)들이라고 하면서 재차 그들을 추거했다. 그러자 열후(列侯)가 그들을 시험했는데, 그러자 우축(牛畜)은 인의(仁義)의 도에 대해서 설파했으며, 순흔(荀欣)은 현자(賢者)들을 등용시켜서 그들의 재능을 이용해야 한다고 설파했고, 이어서 서월(徐越)은 재화(財貨)를 검약(儉約)해서 공로(功勞)가 있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상을 내려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 열후(列侯)는 그때서야 언뜻 깨달았던 것이 있었고, 그래서 급히 공중연(公仲連)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잠깐,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던 것 같소! 그 악사(樂士)에게 내리려던 밭은 일단 보류시키시오!> 그 후, 우축(牛畜)은 사(師)에 그리고 서월(徐越)은 내사(內史)에, 그리고 순흔(荀欣)은 중위(中尉)에 각각 임명되었으며, 공중연(公仲連)에게도 의상(衣裳) 2벌이 내려졌다고 한다.

 아무튼, 경후(敬侯)는 기원전 400년에 열후(列侯)가 죽었을 때, 아직 나이가 어렸었기 때문에, 숙부(叔父)였던 무공(武公)이 그 대를 이었고, 열후(列侯)는 또 무공(武公)에게 <그 다음 대는 경후(敬侯)가 잇게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지만, 그러나 또 무공(武公)은 그 다음 대를 자신의 아들이었던 영조(嬴朝)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해서, 그때부터 경후(敬侯)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후(敬侯)도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무공(武公)이 건재(健在)하고 있었을 동안에는 그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도록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였던 기원전 387년에 드디어 무공(武公)이 죽자 경후(敬侯)는 자신이 마땅히 그 대를 이어야 한다면서 주변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어서 등극했다. 그러자 또 조조(趙朝-嬴朝)가 그에 반발해서 무력봉기를 일으켰는데, 그러자 경후(敬侯)는 중모(中牟-河南省 湯陰県 西部)에서 한단(邯鄲-河北省 邯鄲)으로 천도한 직후에, 그 한단(邯鄲)에서 조조(趙朝-嬴朝)를 진압했다. 그러자 또 조조(趙朝)는 위(魏) 무후(武侯)의 도움을 받아서 위(魏)로 도망을 갔고, 그러자 또 무후(武侯)는 오기(吳起)를 대장으로 해서 군을 조(趙)에 보냈지만, 그러나 위군(魏軍)의 작전착오로 인해서 오히려 조군(趙軍)에 졌고, 그 결과로 조조(趙朝)는 토벌되었으며, 그 후로 경후(敬侯)의 왕위는 확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75년에 그는 죽었다.

 그 후, 경후(敬侯)의 증손(曾孫)이었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騎馬)전술을 도입해서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에 조(趙)의 그 기마대(騎馬隊)는 제국(諸國)을 떨게 했고, 당시 위(魏)에 멸해졌던 후 재흥(再興)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다시 멸했다.

 ○ 무령왕(武靈王-?부터 기원전 295년. 재위: 기원전 326년부터 기원전 298년)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의 군주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옹(雍-사기색은에 의함)이었다. 그리고 숙후(肅侯)의 아들이었고, 호복기사(胡服騎射)를 도입해서 조(趙)를 군사대국으로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326년에 숙후(肅侯)가 죽자 조후(趙侯)의 위를 이어받았지만, 그러나 그때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신하였던 비의(肥義)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기원전 319년 즈음에 제국(諸國)에서는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그는 <조(趙)는 아직 그만한 능력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군(君)의 호칭을 고집했다. 그리하여 왕호는 그의 아들이었던 혜문왕(惠文王) 때부터 사용했으며, 그러자 또 그 혜문왕(惠文王)은 무령왕(武靈王)의 시(諡)에도 왕호를 올리기도 했지만, 기원전 315년에 인접국이었던 연(燕)에서 대혼란이 발생했고, 그리하여 그 나라는 군주 부재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무령왕(武靈王)은 연(燕)의 공자였던 직(職)을 맞이해서 나중에 조(趙)의 뒤를 받쳐줄 수 있을 방패용으로 그를 옹립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소왕(昭王)이 군주의 자리에 올라버렸다. 그리고 또 기원전 311년에 무령왕(武靈王)은 꿈속에서 한 미녀(美女)를 보았는데, 그러자 그는 그 꿈의 해석을 구했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해 듣고 오광(吳廣)이란 남자가 찾아와서 그 꿈의 미녀가 바로 자신의 딸인 맹도(孟桃)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그 맹도(孟桃)를 그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그는 아주 크게 기뻐하면서 그 맹도(孟桃)를 맞이했고, 그 후로 총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맹도(孟桃)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나중의 혜문왕(惠文王)이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310년에 그는 교외(郊外-국경)에 야대(野臺-들에 지은 높은 臺)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그곳에서 중산국(中山國)과 제(齊)의 동태를 살피게 했으며, 그것으로 그 나라들을 정복하려는 자신의 야망을 내비쳤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307년에 그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로써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생각해냈는데, 그것은 또 당시, 중국에서의 귀족(貴族)전사의 전통적인 전술이란 것이, 3인의 전사(戰士) 즉, 마부(馬夫)와 궁사(弓射) 그리고 창(戈手)에 의한 백병전(白兵戰)을 분담(分擔)하는 전차(戰車)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당시 북방유목민족의 1인 특수훈련을 받은 전사가 직접적으로 1마리의 말에 올라타서 활을 쏘면서 싸우는 방법을 도입하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 대부(大夫)들은 윗옷자락이 길고, 아래는 스커트 형식의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말을 타려면 상당히 불편했던 점이 많았다. 그런데다 또 유목민족의 복장들은 말을 타기에 적합한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가 생각했을 때, 그런 복장의 도입이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에게 그것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자, 비의(肥義)는 바로 찬성했지만, 그의 숙부였던 공자(公子) 성(成)은 반대를 했다. 그것은 또 당시, 중화사상이 강했던 중국의 대륙에서는 그 유목민족을 만이(蠻夷)라고 부르면서 업신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들의 그런 방식을 도입한다는 자체가 이미 말도 되지 않는 만행(蠻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때, 비의(肥義)의 태도가 그들에게서는 신기하게 보였을 정도였는데, 그래서 또 그때 성(成)이 그런 반대를 하고 나왔던 것은, 그들의 수준으로서는 오히려 당연했던 결과였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포기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성(成)과 반대파들을 설득시켰으며, 그 결과 그의 뜻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동년(同年) 진(秦)의 무왕(武王)이 죽었고, 그러자 연(燕)에 있던 공자 직(稷)이 진군(秦君)이 되었는데, 그가 소양왕(昭襄王)이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8년에, 그는 그때까지 태자로 있었던 공자 장(章)을 폐했고, 공자 하(何)를 태자로 세운 뒤에 위(位)를 물려주었지만, 그러나 스스로 주부(主父)라고 칭하면서 실질적인 권력까지는 넘겨주지 않았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6년, 그때까지 몇 번이고 공격을 해서 반(半)정도는 정복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완전히 멸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5년에는 공자 장(章)에게 연민의 마음이 느껴져서 월(越)의 북쪽에 있던 대(代)의 군(君)으로 삼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공자 장(章)으로 하여금 혜문왕(惠文王)에 반란을 결의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하지만 장(章)은 반란에 실패하고는 그에게로 도망을 왔는데, 그러자 그는 장(章)을 숨겨주었다. 그러자 또 혜문왕(惠文王) 측의 이태(李兌)와 공자 성(成)이 그의 관저를 포위했으며, 그러자 또 공자 장(章)은 그 중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반란은 끝났지만, 하지만 또 그때, 감히 주부(主父)의 관저를 포위하고 병(兵)을 움직였던 것으로 해서 나중에 문책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이태(李兌) 등은, 그래서 그 포위를 풀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그 3개월 후에 그(主父)는 아사(餓死)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것을 두고 사마천(司馬遷)은 <무령왕(武靈王)이 후계(後繼)를 망설였던 결과, 그 자신 아사하고 말았던 것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為天下笑, 豈不痛乎)>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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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8)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
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앞에서 趙
氏 계속)

 ♣ 조삭(趙朔-?부터 기원전 598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삭(朔), 시(諡)는 장(莊), 그래서 조장자(趙莊子)로도 불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조순(趙盾)은 생전에 은혜를 입었던 조희(趙姬)의 아들 조괄(趙括)에게 조가(趙家)의 종주(宗主)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 조괄(趙括)과 그의 형 조동(趙同)은 인덕(人德)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족(一族)의 흥망을 걸 수 있었던 사람으로, 그래서 또 평소 덕(德)이 많았던 조삭(趙朔)에게로 관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당주(當主)의 자리에 올랐던 조삭(趙朔)은 그 뒤에 경(卿)의 지위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597년 <필(怭)의 싸움> 때에는 하군(下軍)의 장이 되어서 종군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하군(下軍)의 좌(佐)였던 난서(欒書)가 전쟁의 무가치함을 주장하면서 철병(撤兵)론을 들고 나오자 그도 찬성했으며, 그러자 또 평소 그의 인기(人氣)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고, 그리고 또 숙부이기도 했던 위, 조동과 조괄 형제가 전쟁계속을 주장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도 전쟁에 참가를 했다. 하지만 또 초군(楚軍)의 맹공을 받고 중군(中軍)은 거의 붕괴되었으며, 하군(下軍)도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다. 그러자 그 후, 진(晋) 국내에서는 그 조(趙)가(家)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그러자 또 그 상황을 우려했던 한궐(韓厥-춘추시대 晋의 정치가, 장군)이 조삭(趙朔)에게 망명할 것을 권하기도 했는데,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자네가 우리 조가(趙家)의 제사(祭祀)를 지켜주기만 한다면, 나는 아무런 여한이 없네!> 그리하여 기원전 598년, 사구(司寇-六卿 중 하나)였던 도안가(屠岸賈 또는 도안고라고 쓴 곳도 많으므로, 참고바람)가, 일찍이 영공(靈公)을 죽였던 조천(趙穿)의 죄를 조(趙)씨(氏) 일족(一族)에게 물어서 전부 처형했다. 하지만 당시 태아(胎兒)였던 조무(趙武)는 다행히 그 화를 면했고, 그러자 그 후에 도안가(屠岸賈)에게 복수를 했던 한편, 조가(趙家)를 부흥시켜서 진(晋)의 재상자리에까지 올랐다.

 ♠ 조무(趙武-기원전 598년부터 기원전 541년 12월 7일)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무너졌던 조(趙)씨(氏)日) 가문을 다시 일으켰던 사람이었으며, 초(楚)와 화목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소개가 되었지만, 일족이 멸망했을 때 그의 어머니 조장희(趙莊姬)는 공실(公室)에서 강가(降嫁-신하 등, 낮은 직급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命)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궁(宮)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그녀는 임신을 하고 있었다.

 참고: 다른 것에서도 비슷하겠지만, 예를 들면, 조장희의 희(姬)는 晋室의 성(姓)이며, 그러나 趙氏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趙를 사용했고, 또 남편의 시(諡)가 장(莊)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아무튼, 그렇게 해서 탄생한 조무(趙武)는 도안가(屠岸賈)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당시, 조삭(趙朔)의 식객이었던 공손저구(公孫杵臼)를 희생양으로, 그리고 조삭(趙朔)의 친구였던 정영(程嬰)의 임기응변, 그리고 또 조삭(趙朔)으로부터 조가(趙家)재흥(再興)의 부탁을 받았던 한궐(韓厥)의 지원을 받아서 산속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그 후, 성인이 되었던 조무(趙武)는 한궐(韓厥)의 주선으로 당시, 병으로 누워있던 경공(景公)을 배알했고, 그 자리에서 한궐(韓厥)이 경공(景公)을 설득해서 조가(趙家)의 부흥을 허락받았다.

 참고: 경공(景公-?부터 기원전 581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在位:기원전 600년부터 기원전 581년) 성(姓)은 희(姬), 휘(諱)는 거(據), 성공(成公)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말년에 불치병을 얻어서 죽었는데, 그래서 그때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이란 뜻의 <병고황(病膏肓)에 들었다>라는 고사(故事)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자 그 후, 조무(趙武)는 한궐(韓厥)과 난서(欒書)의 도움을 받아서 도안가(屠岸賈)를 척살했으며, 그것으로 가문의 원수를 갚았다. 그러자 한궐(韓厥)과 난서(欒書) 그리고 지앵(智罃)과 사섭(士燮) 그리고 중행경(中行庚)으로부터 축사(祝辭)를 받았지만, 그러나 그 직후에 정영(程嬰)이 <지하에서 계신 조장자(趙荘子-趙朔)와 공손저구(公孫杵臼) 님께 이 사실을 고하고 싶다!>라고 말을 하고 자해(自害)하고 호읍(號泣)했다. 그 다음 기원전 573년, 조무(趙武)는 도공(悼公)으로부터 신군(新軍)의 장에 임명되었으며, 그것으로 비로소 경(卿)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기원전 560년에는 한궐(韓厥)의 아들이었던 한기(韓起)의 추거(推擧)를 받아서 상군(上軍)의 장으로 승격했지만, 그러나 과거 한번 멸족의 위기를 겪었던 교훈을 생각해서 교만하지 않았고, 덕을 베풀었으며, 항시 온화한 풍모를 유지했으며, 스스로 한발 물러나는 자세로 살았다.

 참고: 도공(悼公-기원전 587년부터 기원전 559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 재위는 기원전 573년부터 기원전 559년까지였다. 그리고 양공(襄公)의 증손(曾孫)이었으며, 아버지는 혜백담(惠伯談)이었다. 그리고 즉위하기 전에는 주(周)의 왕도(王都)에서 학문을 쌓았기 때문에, 그래서 주자(周子) 또는 손주(孫周)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난서(欒書)와 순언(荀偃)의 주도에 의해서 여공(厲公-亂政으로, 자객 程滑에게 죽음)이 죽자, 진(晋)으로 와서 군주가 되었다. 그 후, 현정(賢政)을 펼쳐서 나라를 잘 이끌어갔지만,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리하여 진(晋) 최후의 명군(名君)으로 칭송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시대에 왕실의 힘은 오히려 약해져서 귀족들의 힘은 증대되었다.

 아무튼 또 그 후, 기원전 548년에는 정경(正卿), 중군(中軍)의 장이 되었으며, 차경(次卿)의 한기(韓起)와 상담역이었던 숙향(叔向)과 함께, 당시 남쪽의 대국이었던 초(楚)와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46년 7월에 미병(弭兵)에서 회맹을 개최했고, 그 결과 초(楚)와 제(齊) 그리고 정(鄭), 송(宋) 등의 주변제국과의 강화를 실현시켰으며, 그것으로 진(晋)의 명재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기원전 541년이 되자 그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그러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조무(趙武)는 동년(同年) 12월 1일에 선조(先祖)들의 합제(合祭)를 치렀으며, 그리고 그 직후였던 12월 7일에 사망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향년 57세였다. 그러자 시(諡)로 헌문(獻文)이 내려졌으며, 그래서 조문자(趙文子)로도 불렸다.

 ♠ 조성(趙成-생몰불상)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성(成), 시(諡)는 경(景)이었다. 그래서 조경자(趙景子) 또는 조경숙(趙景叔)으로도 불렸고, 조무(趙武)의 아들, 조앙(趙鞅)의 아버지였다. 그는 기원전 541년에 부(父) 조무(趙武)가 죽자 그 뒤를 이어서 당주(當主)가 되었지만, 그러나 다른 조(趙)씨(氏)들에 비해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직급은 차경(次卿) 중군(中軍)의 좌(佐)까지 올랐기 때문에, 그래서 능력은 있었던 인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기원전 533년에는 진(晋)과 주(周)의 대부(大夫)들에 의한 영지(領地) 싸움이 일어나려고 했을 때, 그가 들어가서 중개를 했으며, 결국 화해시켰던 등, 나름대로의 확약도 펼쳤던 인물이었다.

 ♠ 조앙(趙鞅-?부터 기원전 463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시(諡)는 간(簡)으로 해서 조간자(趙簡子)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조성(趙成)의 아들이었으며,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아버지였다. 조앙(趙鞅)은 6대째의 당주였고, 처음에는 직급도 무슨 좌(佐)에 머무르는 등,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떤 때, 그 진(晋)에서 제일 현자(賢者)라고 이름이 높았던 숙향(叔向)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노(魯)의 재상 중손멸(仲孫蔑)은 자신을 위해서 싸우다 죽을 수도 있을 부하가 다섯 명이나 있다는데, 저에게는 어째서 그런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것입니까?!> 그러자 숙향(叔向)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것은 너에게 그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주마!(그 역할을 맡겠다는 의미)>

 참고: 양설 힐(羊舌肸-생몰불상)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양설(羊舌), 휘(諱)는 힐(肸), 자(字)는 숙향(叔向), 양설 직(羊舌職)의 아들이었고, 동모형(同母兄)에 양설 적(羊舌赤-伯華)이 있었으며, 이모제(異母弟)에 양설 호(羊舌虎-叔羆)가 있었다. 그리고 평공(平公)의 스승을 맡았고, 해박(該博)한 인물로 알려졌던 현인(賢人)이었다.

 참고: 평공(平公-?부터 기원전 532년. 재위:기원전 559년부터 기원전 532년)은 도공(悼公)의 아들이었고, 위의 숙향(叔向) 등, 현신(賢臣)들의 보좌를 받아서 패권을 유지했으며, 별 큰 허물없이 진(晋)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 도공(悼公)이 태자 표(彪-平公)의 성인식을 마치고 대상(臺上)에 올라서 도시(首都)를 내려다보다가 <아아, 즐거운 곳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여제(汝齊)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저곳이 아무리 즐거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덕의(德義)를 행하는 즐거움보다는 못합니다> 그러자 또 도공(悼公)이 <무엇을 덕의라고 말하는 것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또 여제(汝齊)가 <제후들의 행위를 보고, 선사(善事)를 행하고, 악사(惡事)를 경계하는 것, 그것이 덕의(德義)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또 도공(悼公)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덕의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요?> 그러자 또 여제(汝齊)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답을 했다. <양설 힐(羊舌肸)이 제국(諸國)의 역사들을 전부다 꿰고 있습니다> 그러자 도공(悼公)은 숙향(叔向)을 태자의 스승에 임명했다. 하지만 그 후, 도공(悼公)은 요절했고, 그 자리를 평공(平公)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는 슬픈 노래를 좋아했고, 여색(女色)을 밝히는 등, 군주로서의 자질에 결점을 드러냈다. 그러자 숙향(叔向)이 그를 지도해서 진(晋)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으며, 그러자 그 후로도 평공(平公)은 큰 허물없이 정치를 펼쳤다. 그러자 관인(官人) 반수(半數)가 숙향(叔向)의 덕을 기렸으며, 특히 초(楚)의 영윤(令尹)이었던 자목(子木)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진(晋)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는 바로 숙향(叔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초(楚)에는 그런 인물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초(楚)는 진(晋)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일화로, 어느 때 정경(正卿)이었던 한기(韓起)가 자신의 곤궁(困窮)함을 탄식하자 숙향(叔向)은 그것을 축하했다. 그러자 또 한기(韓起)가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러자 또 숙향(叔向)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난(欒)씨와 극(郤)씨는 부유하게 살았지만 거만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한을 사서 결국에는 망하고 말았소! 그리고 당신은 현재 가난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덕의(德義)를 펼칠 수가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축하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자 또 한기(韓起)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아, 내가 그것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깨우쳐주신데 가슴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40년에 제(齊)의 안영(晏嬰)이 사자로 진(晋)에 왔을 때,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런데 그때 안영(晏嬰)이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제(齊)의 정권은 모두 전(田)씨(氏)의 손아귀로 들어갔소!> 그러자 숙향(叔向)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 진(晋)도 말세(末世)이긴 마찬가지요! 진(晋)의 정치는 모두 경(卿)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기원전 536년에 정(鄭)의 자산(子産)이 형정(形鼎-成文法)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숙향(叔向)은 <정(鄭)은 이제 곧 망할 것이다! 무릇, 정치란 사람을 보고 행하는 것이거늘, 그러나 법률이 만들어진다면 그때부터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법(法)만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예언을 했다. 그렇듯, 숙향(叔向)은 비록 경(卿)의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평공(平公)의 측근에서 상담역을 맡으면서 진(晋)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조앙(趙鞅)은 그렇게 숙향(叔向)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520년에 주(周)의 경왕(景王)이 사냥을 하다가 심장발작을 일으켜서 사망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러자 태자 맹(猛-나중의 悼王)과 왕의 서자(庶子)였고, 서형(庶兄)이었던 왕자 조(朝) 사이에 후계를 타투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주(周)의 수도는 잿더미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조앙(趙鞅)은 태자 맹(猛)의 요청으로 진군(晋軍)을 이끌고 왕자 조(朝)의 군대를 쳤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516년에 태자 맹(猛)이 즉위했고, 조앙(趙鞅) 등은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기원전 514년에 조앙(趙鞅)은 당시, 정경(正卿)에다 중군(中軍)의 장이었던 위서(魏舒-晋의 무장, 정치가)와 다른 육경(六卿)의 꾐에 빠져서 공족(公族) 양설(羊舌-叔向의 아들 家系) 씨(氏)와 기(祁-祁奚・祁午의 子의 가계) 씨(氏)를 멸해버렸고, 그것으로 그 땅에 자식들을 대부(大夫)로 배치시켜서 세력을 공고히 했던 등, 조화를 목적으로 했던 자신의 조부(祖父) 조무(趙武)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513년에, 그는 중행인(中行寅)과 함께 범선자(范宣子-士匄)가 만들었던 법을 솥(鼎)에 새겨 넣었던 형정(形鼎)을 공개했으며, 그러자 또 그것이 진(晋)에서는 최초의 성문법이 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01년에는 노(魯)에서 많은 악명(惡名)을 떨치고 진(晋)으로 망명해왔던 양호(陽虎)를 전 가신(家臣)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자신의 부하로 삼았는데, 그러자 양호(陽虎)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나중에 조앙(趙鞅)을 위해서 분투했다.

 참고: 양호(陽虎)는 노(魯)의 정치가였고, 한때 노(魯)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505년에는 공자(孔子)를 초빙해서 자기 아래 벼슬시키려고 했고, 그러자 또 공자(孔子)도 그럴 의향이 있었지만, 그러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후, 권력투쟁에서 져서 노(魯)에서 추방되었으며, 진(晋)으로 가서 조앙(趙鞅)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앙(趙鞅)을 위해서 위(衛) 공실(公室)에 개입하면서 암약(暗躍)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소식이 두절되었다.

 아무튼 또 그 후의 어느 때, 조앙(趙鞅)은 고포자경(姑布子卿)이라는 관상의 명인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자기 자식들의 관상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고포자경(姑布子卿)이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에 장군에 버금갈 관상을 가진 자식은 없습니다> 그러자 조앙(趙鞅)은 낙담했지만, 그러나 사실, 조앙(趙鞅)은 그때 자신의 막내는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막내도 보여주었는데, 그러자 고포자경(姑布子卿)은 그 막내를 보았던 순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바로 이 아들이 장군에 버금갈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바로 조무휼(趙無恤)이었고, 그리고 또 조앙(趙鞅)은 당초 장자였던 백노(伯魯)에게 후계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조무휼(趙無恤)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때, 조앙(趙鞅)은 큰 병에 걸려서 꼬박 이틀하고도 반나절을 수면상태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그러자 또 당시 명의였던 편작(扁鵲)이 그의 집으로 가서 진찰을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그는 꿈을 꾸었다고 했으며, 그 꿈속에서 그는 천제(天帝)와 함께 백신(百神)들과 놀았다고 한다.

 참고: 편작(扁鵲-생몰불상)은, 중국 전국시대의 의사로, 특히 한(漢) 이전의 반(半) 전설적인 명의로 알려져 있으며, 성(姓)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었고,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상군(長桑君)으로부터 의술을 배운 후에 환자의 오장을 투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행동과 인격, 진료, 치료에 관한 것은 한비자(韓非子)와 사기(史記) 등에 일화로 남아있으며, 그 후의 한방(漢方)의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를 편작(扁鵲) 또는 기파편작(耆婆扁鵲)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이제는 명의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의하면 <그는 발해(渤海)군(郡), 정(鄭)의 사람이라고 했고, 성(姓)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고대의 역사가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이론을 제기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양자법언(揚子法言)>이나 <회남자(淮南子)> 등에서는 <편작(扁鵲)은 노(盧)의 사람>이라고 했고, 청(淸) 대의 사마정(司馬貞)과 서광(徐廣)은 <하북성(河北省)의 임구(任丘)현 사람>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가 전적(典籍)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은 전국시대 말의 한비자(韓非子-紀元前295年에서 紀元前233年)에서였지만, 그러나 또 사마천(司馬遷)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의하면, 그가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것은 기원전 655년으로, 곽(郭)이라는 소국(小國)이 멸망했을 때라고 했고, 그 활동이 끝났던 것은 기원전 350년, 진(秦)이 함양(咸陽)으로 천도했을 때였다고 해서, 그것을 서술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약 300년이나 살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그의 행동범위도 아주 광대했으며, 그 햇수도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행했던 일이었으며, 그래서 또 어떤 특정의 학파(學派)에 의한 활동이었지 않았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랬던 그가 앞의 그 조앙(趙鞅)의 진찰도 했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상황이 진(秦)의 목공(穆公)의 상태와 흡사했었고, 그래서 또 그때 목공(穆公) 역시도 천제(天帝)를 만난 꿈을 꾸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편작(扁鵲)은 조앙(趙鞅)의 상태를 보고나서 3일 이내에 깨어날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그러자 조앙(趙鞅)은 편작(扁鵲)에게 전지(田地)4만(萬)묘(畝 또는 무. 그리고 1묘=30평이므로 ∴ 120만평)를 내렸다고 한다.

 아무튼, 조앙(趙鞅)은 그 꿈속에서 두 마리의 곰을 죽였는데, 그러자 천제(天帝)가 기뻐했으며, 그래서 그에게 두 개의 상자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천제(天帝) 옆에는 1명의 남자아이가 서 있었는데, 그러자 또 천제(天帝)는 적(狄-오랑캐)의 개 한 마리를 그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아이가 장년(壯年)이 되면 돌려주도록 하라> 하지만 조앙(趙鞅)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또 천제(天帝)가 한 남자를 자신에게 보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게 해주었다. <첫째, 진(晋) 내에 있는 경(卿)들 중에서 두 집을 토벌할 것. 그리고 둘째는 조앙(趙鞅)의 아들이 적(狄)의 땅에서 두 나라와 싸워서 이기게 됨. 그리고 천제(天帝) 옆에 서있던 아이는 바로 당신(趙鞅)의 아들이며, 적(狄)의 개는 북방(北方)의 대(代)라는 지역을 통치할 군주, 그러나 나중에 당신의 아들이 그곳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조앙(趙鞅)과 조무휼(趙無恤)의 장래를 예견했던 것이었고, 그리고 또 그 두 집을 토벌하라고 했던 것은 중행(中行)씨(氏-荀氏 本家)와 범(范)씨(氏-士氏 分家)를 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조무휼(趙無恤)이 적(狄)에서 두 나라와 싸워서 이기게 될 것이라고 했던 것은 조무휼(趙無恤)이 대(代)를 공격해서 멸한 후 진(晋)의 경(卿) 중 하나였던 지(知)씨(氏-荀氏 分家)를 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진(晋)에서도 그때까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육경(六卿)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으며, 그러자 조앙(趙鞅)은 중행(中行)가(家)의 당주였던 중행인(中行寅)과 중행인(中行寅)의 처가였던 사(士)가(家)의 당주 사길사(士吉射-范吉射)와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晋) 공실(公室)을 명목상의 후견인으로 하고, 조가(趙家), 위가(魏家-魏侈), 지가(智家-智轢), 한가(韓家-韓不信) 그 4가(家)가 합동해서 그 두 가문을 멸했으며, 그리하여 그때부터 진(晋)에서는 제후(諸侯)에 필적할만한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그 네 가문이 대두(擡頭)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한편, 공자(孔子)는 그 일과 함께 상기(上記)의 법을 공개했던 일 등에 반감을 품고는 자신의 저서 춘추(春秋)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다. <조앙(趙鞅), 진양(晋陽)에서 모반(謀反)하다> 아무튼 그 후, 조앙(趙鞅)은 조무휼(趙無恤)에게 자신의 뒤를 맡기고 죽었다. 그러자 그에게 시(諡)로 간(簡)이 내려졌으며, 그 후로 조간자(趙簡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 조무휼(趙無恤-?부터 기원전 425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무휼(無恤), 시(諡)는 양(襄), 그래서 조양자(趙襄子)로도 불렸으며, 조앙(趙鞅)의 말자(末子)였다. 그리고 고포자경(姑布子卿)으로부터 대성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을 후에 조앙(趙鞅)의 후계자로 점 찍혀졌지만, 그러나 그때 그의 어머니는 적족(翟族=)출신으로, 신분도 낮았던 데다가 그는 말자(末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은 곧 잊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조앙(趙鞅)이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내가 보물(符) 하나를 상산(常山)의 정상에 숨겨놓았다. 그것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참고: 상산(常山)은 항산(恒山)을 의미하며, 중국의 도교(道敎) 오악(五嶽) 중 하나로, 북악(北岳) 즉, 북쪽에 있는 산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에 있으며, 최고(最高)표고(標高)는 2,016m이다. 그리고 그 산은 중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고로 높은 산이며,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장과로(張果老)가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참고로, 오악(五嶽)은 다음과 같다. 北岳 恒山 / 西岳 華山 / 中岳 嵩山 / 東岳 泰山 / 南岳 衡山

 아무튼,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자식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조무휼(趙無恤)만 다시 돌아와서 그것을 찾았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조앙(趙鞅)이 그것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 산의 정상에 오르니 그 아래에 대(代)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러자 저는 그것을 보고 내가 저곳을 가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던 조앙(趙鞅)은 자신의 후계자로 조무휼(趙無恤)을 결정했다. 그러자 장형(長兄)이었던 백노(伯魯)는 조앙(趙鞅)의 결정에 따랐으며, 그 후로도 조무휼(趙無恤)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보좌했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은 어렸을 때부터 잘 따랐던 백노(伯魯)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에 백노(伯魯)는 병이 나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앙(趙鞅)마저 죽어버렸고, 그러자 조앙(趙鞅)의 뒤를 이었던 조무휼(趙無恤)은 상복(喪服)을 입은 채로 대(代)의 왕<당시, 조무휼의 매형(妹兄=姊兄)>을 위한 연회를 열고는 그를 초대했다. 그러자 대왕(代王)이 그 연회에 참석을 했는데, 그러자 조무휼(趙無恤)은 그들을 토벌하고는 그 대(代)를 찬탈(簒奪)해서 손에 넣었다. 그러자 또 자기 남편이 조무휼(趙無恤)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의 누나는 조무휼(趙無恤)을 실컷 매도(罵倒)하고는 자살을 해버렸다. 그러자 그 후, 조무휼(趙無恤)은 그 땅에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장형(長兄) 백노(伯魯)의 아들 조주(趙周-成君)에게 맡겨서 다스리게 했고, 그것으로 백노(伯魯)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 그리고 그 후, 진(晋)의 육경(六卿) 중에서 최대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지(智)씨(氏)의 당주 지요(智瑤-智伯・智襄子)가 위(魏)씨(氏)의 당주 위구(魏駒-魏桓子)와 한(韓)씨(氏)의 당주 한호(韓虎-韓康子)의 세력을 인솔하고는 조무휼(趙無恤)의 본거지였던 진양(晋陽)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조무휼(趙無恤)은 한때 지요(智瑤)의 수공(水攻-강물을 막아서 고립시키는 것)에 낙성(落城)의 위기까지 겪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때 조무휼(趙無恤)은 위구(魏駒)와 한호(韓虎)에게 <지요(智瑤)는 욕심이 아주 많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죽고나면 그 다음은 바로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요!>라고 말을 하면서 그들을 회유했고, 그러자 그 후에 전세는 대역전되어서 지요(智瑤)는 패사(敗死)했다. 그러자 또 기원전 453년, 그때부터 진(晋)은 사실상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으로 3분(分)되었고, 그리하여 바로 그때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아무튼 그리고 또 덧붙여서, 조무휼(趙無恤)은 그 후에 지요(智瑤)의 구신(舊臣)이었던 예양(豫讓)에게 두 번이나 암살기도를 당했지만,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그러자 예양(豫讓)은 조무휼(趙無恤) 앞에서 자결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하지만 여기서는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는 관계로 소개는 생략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따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또 그 후, 조무휼(趙無恤)은 장자(長子) 백노(伯魯)의 은혜를 다시 갚기 위해서 조주(趙周)를 당주에 추대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조주(趙周)도 빨리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이었던 대군(代君) 조완(趙浣)을 차기 당주로 세웠다. 그리고 기원전 425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그 후에 양(襄)이란 시(諡)가 내려졌다. 하지만 또 그 후, 사기(史記)의 조세가(趙世家)에 의하면, 조무휼(趙無恤)은 공동 씨(空同氏-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戎의 一派)의 딸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런데 조무휼(趙無恤)이 나중에 형(兄)의 손자였던 조완(趙浣-献侯)을 후계자로 삼고는 자기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일족(一族)으로서 군주를 모시도록!> 그러자 그에 불만을 가졌던 그의 아들들은 그가 죽자 조완(趙浣)을 쫓아냈으며, 그 중에서 장형(長兄)을 내세워서 당주로 삼고는 조(趙)를 다스렸다. 그러자 또 조무휼(趙無恤)의 유지(遺志)를 받들지 않았던 그 불효행위에 대해서 백성들은 비난했고, 그 결과로 그 5명의 자식들을 모두 처형되었으며, 조완(趙浣)은 다시 당주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조무휼(趙無恤)의 유지(遺志)를 지켜졌다고 한다.





  <趙 氏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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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7)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참고: 직하(稷下)의 학(學)이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에서 부흥했던 제자(諸子=諸子百家)의 학(學)이며, 당시 제(齊)의 수도였던 임(臨)으로 모여들었던 사상가(思想家)와 변사(辯士) 등에 의해서, 그때까지 주장되고 있었던 여러 가지의 제(諸)사상들이 총합되었는데, 그리하여 많은 독자적인 사상(思想)그룹이 형성되었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 직하(稷下)라는 것은, 임(臨)의 직문(稷門) 즉, 임(臨)에 있었던 직문(稷門)이란 문(門)의 근처 어디라는 의미이며, 그리고 순자(荀子-기원전 313년부터 기원전 238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의 사상가로, 유학자였고, 휘(諱)는 황(況), 자(字)는 경(卿)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4세기 말에 조(趙)에서 탄생했으며, 나중에 제(齊)의 양왕(襄王)에게로 가서 벼슬을 했고,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 제주(祭酒=學長)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참언(讒言)을 받아서 제(齊)를 떠났으며, 초(楚)의 재상이었던 춘신군(春申君)에게로 가서 난능(蘭陵-중국 漢代에 현재의 山東省 棗庄의 南東에 위치해있었던 縣의 名이며, 戰國時代에는 楚의 邑이었다)의 영(令)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그곳에서 살았으며, 그리고 후한(後漢)의 순욱(荀彧)과 순유(荀攸)는 그의 후예였고, 성악설(性惡說)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그와 그의 후학(後學)들이 저작했던 것들은 전한(前漢) 말에 정리되어서 <손경신서(孫卿新書)>32편으로 모아졌고, 그것을 또 당(唐)의 양량(楊倞-그러나 양경이라고 쓴 곳도 많이 있으므로, 참고바람)이 또 정리를 해서 그 책이름을 <순자(荀子)>라고 개명했으며, 거기에다 주석을 첨가해서 20권으로 만들었다. 그 후 손경신서(孫卿新書)는 망실(亡失)되었으며, 그래서 현존하는 것들은 모두 그 양량(楊倞)이 주석했던 것들의 계통이다. 그리고 또 참고로 다음은 그 32편의 구성을 열거한 것이며, 따로 한글표기는 하지 않습니다.

 1. 勧学 2. 修身 3. 不苟 4. 栄辱 5. 非相 6. 非十二子 7. 仲尼 8. 儒效 9. 王制 10. 富国 11. 王霸 12. 君道 13. 臣道 14. 致士 15. 議兵 16. 彊国 17. 天論 18. 正論 19. 礼論 20. 楽論 21. 解蔽 22. 正名 23. 性悪 24. 君子 25. 成相 26. 賦 27. 大略 28. 宥坐 29. 子道 30. 法行 31. 哀公 32. 堯問

 아무튼, 그리고 또, 다른 유명한 사람들의 경우에서도 그렇지만,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자료들은 다른 훌륭한 곳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므로 가능하면 상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대략이나, 개요만 소개해드리고 있으므로, 그 점 미리 이해 당부 드리며, 그래서 또 순자(荀子)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1 권학(勸學)편에서는 배우는 것과 선(善)한 일들의 계속적인 노력을 강조했으며, 2 수신(修身)편에서는 예(禮)의 중(重)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또 9의 왕제(王制)편과 10의 부국(富國)편 등에서는 치정(治政)에서 실력주의와 성과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으며, 23의 성악(性惡)편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부터 나쁘므로, 그래서 후천적인 노력 또는 학문을 닦는 것으로써 선(善)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러한 성악설(性惡說)의 입장에서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비판했다. 그리고 또 순자(荀子)는 선(善)을 치(治)로, 악(惡)을 난(亂)으로 규정했고, 인간의 본성은 <한도(限度)가 없는 욕망(慾望)>이라고 전제(前提)한 후, 각자(各自)가 제각각의 욕망을 채우려든다면, 사회는 다툼과 살인이 만연해져서 난(亂)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성악설(性惡說)을 논증(論證)했다. 그리고 또, 각자의 욕망을 외적(外的)인 규범(禮)으로 규제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치(治=)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禮)를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으며, 그것은 또 일종의 사회계약설(社會契約說)로도 평가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17의 천론(天論)편에서는, 그 천(天)을 단지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또 그때까지 내려오던 천인상관사상(天人相關思想) 즉, 하늘이 인간의 행위에 감응(感應)해서 화복(禍福)을 내린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또한, 유성(流星)이나 일식(日食)도 진기한 자연현상의 하나일 뿐이므로, 그래서 또 그런 것들은 위정자들의 행동과는 무관하며, 길조(吉兆)라거나 흉조(凶兆)라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또, 그러한 것들을 봤을 때, 신기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하늘은 단지 자연현상일 뿐이므로, 그래서 그것을 숭배해서 공물(供物)을 바치기보다는, 그것을 연구해서 이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도(祈禱)나 초상(超常)적인 효과도 모두 부정했으며, 당시에 흔히 행해졌던 기우제(祈雨祭)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는 비가 오는 것은 그 기우제 때문이 아니라, 비가 내릴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내린 것일 뿐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는 점(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면서, 위정자는 중요한 결정에 앞서서 점을 치지만,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 점이란 것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무지(無知)한 백성들을 믿게 하려는, 한마디로 현혹시켜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하늘(天) 즉, 인간초월적인 상징 또는 경외(敬畏)로운 대상조차 부정했을 것이란 생각은 지나친 것이다. 아무튼 또, 그의 제자로는 한비(韓非)와 이기(李沂) 그리고 부구백(浮丘伯) 그 세 사람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부구백(浮丘伯)을 통해서 순자(荀子)의 사상은 한대(漢代)의 유학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한비(韓非)와 이기(李沂)는 외적(外的)인 규범인 예(禮)의 사상을, 거기에 더해서 법(法)에 의한 인간의 제어(制御)를 주장했으며, 특히 한비(韓非)는 법가사상의 대성자로, 그리고 이기(李沂)는 법가(法家)의 실무(實務) 완성자가 되었다. 하지만 단 <법가(法家)사상> 그 자체는 공자(孔子)와 한비자(韓非子) 이전부터 존재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순자(荀子)의 사상으로부터 그 법가사상이 탄생되었다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면 앞에서 이미 소개된 조쇠(趙衰-6-19참조)가 나오므로, 그래서 그 조쇠(趙衰)의 장남(長男)이었던 조순(趙盾)부터 차례로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 조순(趙盾-生沒不詳)은 조쇠(趙衰)의 장남으로,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순(盾), 시(謚)는 선(宣)이었다. 그리고 조(趙)씨(氏)의 시조(始祖)로서, 진(晋)에서 오랫동안 정권을 잡으면서 조(趙)씨(氏)의 존재를 세상에 크게 알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조선자(趙宣子) 또는 조선맹(趙宣孟)으로도 불렸다.

 아무튼, 그리고 앞의 이야기를 상기하는 차원에서 조금 소개하고 넘어가면, 그의 아버지 조쇠(趙衰)는 여희(麗姬)의 난 후에 중이(重耳)를 따라서 제국(諸國)을 유랑했으며, 망명지였던 적(狄)에서 족장의 딸이었던 숙외(叔隗)를 맞아들여서 조순(趙盾)을 낳았다. 그 후, 중이(重耳)는 귀국해서 문공(文公)이 되었고, 조쇠(趙衰)도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 후, 기원전 621년에 문공(文公)의 뒤를 이어서 양공(襄公)이 즉위했고, 호사고(狐射姑)가 중군(中軍)의 장(將)이 되었으며, 조순(趙盾)은 중군(中軍)의 좌(左)가 되었지만, 그 후에 양공(襄公)의 대부(大傅)였던 양처부(陽處父)의 추천을 받아서 중군(中軍)의 장(將)이 되었다. 그리고 중군(中軍), 상군(上軍), 하군(下軍), 그 삼군(三軍)에 대한 설명과 좌(左)에 대한 설명 등은 앞에서 이미 다 소개했으므로, 이하 생략하며, 그리고 그 동년(同年), 양공(襄公)이 몰(沒)하자, 당시 태자였던 이고(夷皋)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래서 군신(群臣)들은 양공(襄公)의 동생을 옹립하기로 합의를 했다. 그러자 조순(趙盾)은 당시, 진(秦)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공자 옹(雍)을 불러오자는 의견을 냈는데, 그러나 그때 호사고(狐射姑)가 진(陳)에 있던 공자(公子-樂)를 불러오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조순(趙盾)은 자객을 보내서 그 공자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호사고(狐射姑)는 적(狄)으로 망명을 했고, 그러자 또 그곳에서 호사고(狐射姑)가 옹(雍)의 반대파를 모을 것이 두려웠던 조순(趙盾)은, 그에 생각을 바꾸어서 원래 후계자였던 이고(夷皋)를 옹립하기로 결심을 했고, 그래서 또 그때 이미 진(秦)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晋)으로 오고 있던 옹(雍)을 군사를 보내서 도로 쫓아버렸다. 그러자 또 그때, 옹(雍)을 영접하기 위해서 그곳에 가있었던 선멸(先蔑)과 사회(士會)도 옹(雍)과 함께 진(秦)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그 후, 조순(趙盾)은 사회(士會)가 진(秦)에 남아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그러자 그는 또 책략을 써서 그를 진(晋)으로 불러들였다.

 
참고: 사회(士會-생몰불상)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무장이었고, 정치가였다. 성(姓)은 기(祁), 씨(氏)는 사(士) 혹은 봉지(封地)명으로부터 수(隨), 범(范)이며, 휘(諱)는 회(會), 자(字)는 계(季), 시(謚)는 무(武)였고, 그래서 범무자(范武子)로도 불렸다. 그리고 또 그는 사위(士蔿-士氏의 시조였고, 武公과 献公을 모시면서 晋 발전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이었다)의 손자였으며, 사결(士缺-士成伯)의 말자(末子)였다. 그리고 자식으로 사섭(士燮-范文子)과 사방(士魴-彘恭子)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자(末子)라는 입장에서(字의 季는 末子를 의미함) 가문을 이을 입장에 있지는 았았기 때문에, 그래서 기원전 632년의 <성복(城濮)의 싸움>에서 종군했고, 그 후에 진군(晋軍)이 귀환했을 때, 문공(文公)의 거우(車右-왕의 수레를 따라다니면서 보좌하는 일종의 시종이나 호위 관으로 해석함)로 지명되었다. 그리고 그 11년 후였던 기원전 621년에 정경(正卿) 조순(趙盾)을 명을 받고, 당시 진(秦)에 있던 공자 옹(雍)을 맞으러갔지만, 조순(趙盾)의 변심으로 인해서 사회(士會)는 옹(雍)과 함께 진(秦)에 망명했다. 그 후, 사회(士會)는 진(秦)에서 강공(康公)을 모시게 되었지만, 그러나 같이 망명했던 선멸(先蔑)과는 한 번도 만나지를 않았다. 아무튼, 그 후에 그는 강공(康公)의 군사(軍事)고문이 되었고, 기원전 615년에는 <하곡(河曲)의 싸움>에서 진(晋)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하는 등, 군재(軍才)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자 그 다음해, 조순(趙盾)의 주도로 극결(郤缺)이 나서서 사회(士會)를 진(晋)으로 불러들였으며, 그리고는 대부(大夫)의 지위를 주었다. 그리고 또 그때, 봉지(封地)로 수(隨)와 범(范) 받았는데, 그런 이유로 사회(士會)가 일가(一家)창립했던 분가는 그때부터 범(范)씨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사회(士會)는 조순(趙盾)과 자주 대립했고, 영공(靈公)의 난행(亂行)을 간(諫)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영공(靈公)은 전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그러다가 결국 기원전 607년에 암살되고 말았다.

 참고: 영공(靈公)은 조순(趙盾)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이고(夷皋)였지만, 그러나 그 후에 조순(趙盾)과 심하게 대립했고, 끝내는 자객을 보내서 죽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 자객(鉏麑)은 실패해서 스스로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으며, 그러자 영공(靈公)은 다시 조순(趙盾)을 연회에 참석시켜서 죽이려고 했지만, 그것을 눈치 챘던 조순(趙盾)은 급히 진(晋)을 탈출했다. 그러자 그 후, 영공(靈公)은 그런 사실에 격분했던 조순(趙盾)의 종형제(從兄弟)였던 조천(趙穿)에게 살해되었고, 그 후에 조순(趙盾)은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양공(襄公)의 동생이었던 공자 흑둔(黑臀)을 옹립했는데, 그가 바로 성공(成公)이었다.(이것으로 영공의 소개를 대신함)

 
아무튼 또 그 후였던 기원전 597년에는 정(鄭)을 구원하기 위해서 진(晋)이 출병했을 때, 그는 상군(上軍)의 장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전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는 시종(始終) 초(楚)의 장왕(莊王)과 화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필(邲)의 싸움>이 벌어졌고(6-21 참조), 진(晋)은 대패했다. 그러나 그때, 그가 이끌었던 상군(上軍)만은 손실을 거의 내지 않고 성공적으로 퇴각했다. 그 후, 기원전 593년 3월 29일에 그는 순림부(荀林父)의 후원을 받아서 정경(正卿-宰相)이 되었고, 동시에 중군(中軍)의 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러자 진(晋)에 있던 도적들이 사회(士會)가 무서워서 진(秦)으로 모두 도망을 갔다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겨울, 주(周)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수습을 했는데, 그러자 정왕(定王)이 그를 치하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예(禮)를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는 수치심으로 귀국 후에 전례(典禮)를 연구했고, 그 결과 새로운 법을 정했으며, 그 법은 후에 <범무자(范武子)의 법>으로 불리면서 진(晋)에서 아주 오래 존중되었다. 그리고 그는 재상의 자리에 앉았던지 2년 만에 물러났으며, 그러자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진(晋) 역사상, 사회(士會)만이 최고의 재상이었다>라고 절찬했다. 그리고 그 사후, 생전의 대활약의 공을 인정해서 시호(諡號)로 무(武)가 내려졌고, 그것으로 그는 범무자(范武子)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이고(夷皋)가 즉위해서 영공(靈公)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후로 점차로 조순(趙盾)과 사이가 나빠져 갔다. 그러자 기원전 607년 영공(靈公)은 기어이 조순(趙盾)을 죽일 자객(鉏麑)을 보냈고, 그 뒤의 이야기는 위에서 소개한 그대로였다. 그러자 그 후에 태사(太史-史官)는 그 때의 일을 두고 <조순(趙盾), 왕을 시(弑)함>이라고 기록했고, 그리고 시(弑)라고 기록했던 것은 윗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후에 조순(趙盾)은 자기가 했던 일이 아니었다고 항의했지만, 그러나 그에 대해서 동호(董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반박했다. <당신은 영공(靈公)을 죽인 후에 이 나라를 떠났고, 그 다음에 돌아온 것이요! 그리고 또, 바로 그 시점에서 당신은 진(晋)의 정경(正卿)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반역자였던 조천(趙穿)을 처형시킬 의무가 있었소!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영공(靈公)은 당신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오!> 그러자 조순(趙盾)은 그 후로 그 일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참고: 동호(董狐)는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사관(史官)(?~?)이었고, 폭군이었던 영왕(靈王)이 조천(趙穿)에게 살해되었을 때, 그를 처벌하지 않았던 조순(趙盾)의 행위를 죄(罪)라고 직필(直筆)로 기록했던 것으로, 후세에 양사(良史)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아무튼, 기원전 601년, 그는 장기집권 끝에 정경(正卿)의 지위를 극결(郤缺-춘추시대 晋의 정치가. ?~기원전 597년)에게 양도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며, 그가 죽자 선(宣)이란 시(諡)가 내려졌다. 그리하여 그 후로 조선자(趙宣子)라고 불려졌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하면, 그가 생전에 어떤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 꿈에 대해서 점을 쳐보니 <끊어지지만 뒤는 좋다>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점괘대로, 나중에 그의 아들 조삭(趙朔) 대(代)에 그 위세(威勢)를 질투당해서 일족이 전원 몰살을 당했는데, 그런데 그때, 유일하게 조무(趙武-태아 상태였음)는 그 난리를 피해서 도망을 갔고, 그 후에 다시 조(趙)씨를 부흥시켰다.





 <趙 氏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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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6)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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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빈(孫臏-기원전 4세기경)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의 군인이었고, 사상가였다. 그리고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사람이었으며, 손무(孫武)의 손자로 알려져 있고, 그 손무(孫武)와 함께 손자(孫子)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저작으로, 그가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손빈병법(孫臏兵法=竹簡兵法)이 있다.

 그는 아(阿-山東省 陽穀県)와 견(鄄-山東省 濮県) 사이 또는 그 주변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빈(臏-뜻은 종지뼈 또는 정강이뼈를 베는 형벌)이란 이름도 다리를 절단당하는 형(刑)을 받았던 것으로 해서 붙여졌던 일종의 별명으로, 그래서 그의 본명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본명이나 가족 또는 내력 등에 관해서는 일체 불명(不明)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 자신의 숙적이 되는 방연(龐涓)과 함께 어느 곳에서 병법을 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방연(龐涓)은 위(魏)에서 벼슬을 살았고,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지만, 그러나 방연(龐涓)은 항상 자기보다 뛰어났던 손빈(孫臏)을 경계했다. 그래서 어느 때, 그는 손빈(孫臏)을 위(魏)로 초대했고, 그런 다음 함정에 빠뜨려서 다리를 절단하는 형벌을 받게 했다. 그리고 경형(黥刑)까지 받게 했는데(그러나 또 그에는 孫臏 스스로의 잘못으로 魏의 朝廷으로부터 그런 형벌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자 그 후, 손빈(孫臏)은 제(齊)로 도망을 갔고, 그곳에서 사장(師將)이 되었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전에, 그러니까 손빈(孫臏)이 제(齊)로 도망을 갔을 때, 그는 먼저 제(齊)의 장군이었던 전기(田忌)의 집에서 객(客)의 신분으로 머물렀는데, 그런데 어느 때에, 제(齊)의 왕이었던 위왕(威王)이 자신의 공자(公子)들 그리고 전기(田忌)와 함께 승부를 겨루는 경마(競馬)경기를 개최했다. 그러자 손빈(孫臏)도 그 자리에 참석을 했는데, 그리고는 전기(田忌)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을 했다. <상대가 상등(上等)의 말을 타고 나오는 경기에서는 하등(下等)의 말을 타고 나가서 경기를 하시고, 상대가 중등(中等)의 말을 타고 나오는 경기에서는 상등(上等)의 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대가 하등(下等)의 말을 타고 나올 때는, 상등(上等)의 말을 타고 나가서 경기를 하십시오!> 그러자 그 결과 전기(田忌)는 2승 1패를란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왕으로부터 천금(千金)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자 기분이 몹시 좋아졌던 전기(田忌)는 손빈(孫臏)을 위왕(威王)에게 추천했고, 그러자 위왕(威王)은 그를 사장(師將)에 임명했다.

 그 후, 앞에서 소개했던 대로 손빈(孫臏)은 전기(田忌)를 내세워서 조(趙)를 구했는데<그때, 위위구조(圍魏救趙)의 故事를 남김>,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설명을 하면, 당시 위(魏)는 조(趙)를 공격했고, 그러자 조(趙)의 수도가 포위되었다. 그러자 조(趙)는 급히 제(齊)에 원군을 청했는데, 그때 위왕(威王)은 손빈(孫臏)을 장수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손빈(孫臏)이 극구 사양해서 전기(田忌)가 대장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조(趙)를 구원하러 나섰으며, 그리고 그 후에 손빈(孫臏)은 조(趙)로 향하던 도중에 전기(田忌)에게 군사를 돌려서 당시, 약소노병(弱小老兵)만 남아 있었던 위(魏)를 먼저 치게 했다. 그러자 위기를 느꼈던 위(魏)의 주력군이 조(趙)의 포위를 풀고 다시 위(魏)로 달려왔는데, 그러나 너무 강행군을 했던 나머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피로곤비(疲勞困憊)해서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다. 그러자 제군(齊軍)은 그것을 노려서 위군(魏軍)을 공격했고, 그것으로 그 <계릉(桂陵)의 싸움>은 제(齊)의 대승으로 끝났다.

 
참고: 말이 나온 차에 위위구조(圍魏救趙)의 고사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보고 넘어가면, 그 원문은 다음과 같고 <共敵不如分敵 敵陽不如敵陰>, 그리고 그 해석은 <적(敵)이 모여 있는 것은 분산(分散)되어 있는 것과 같지 않다! 즉, 적(敵)을 한곳에 모아놓고 치는(공략하기) 것보다는, 적을 분산시켜놓고 치는 것이 더 좋으며, 적(敵)의 밝은 쪽은 적의 어두운 쪽과 같지 않다! 즉, 적(敵)의 정면을 공격하기보다는, 적의 숨겨진 약점을 찾아내서 공격하는 것이 더 좋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상황은 또 앞에서 설명한 제군(齊軍)의 회군 시에 손빈(孫臏)이 전기(田忌)에게 했던 말로, 손빈(孫臏)은 그때 전기(田忌)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회군(回軍)을 조언했다. <엉킨 실타래를 풀 때는 무리하게 당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도 다른 나라를 구원하려고 할 때는 직접적으로 달려들어서 적(敵)과 맞서기보다는, 요소(要所-중요한 곳)을 치고, 허(虛-빈 곳)을 치고, 그래서 형세(形勢)를 무너뜨린다면, 실타래는 자연스럽게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敵)을 한곳에 모으지 않고 분주하게 만들어서 피로하게 한 후에 공격하는 전술을 위위구조(圍魏救趙)라고 부르게 되었다.(史記의 孫子吳起列傳)

 아무튼, 그 <계릉(桂陵)의 싸움>이 있었던 13년 후에 또 <마릉(馬陵)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러나 그에 대한 설명도 이미 앞에서 소개가 다 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같지만, 비슷한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제군(齊軍)은 <계릉(桂陵)의 싸움>에서와 같이 위(魏)의 수도를 공략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방연(龐涓)도 이미 준비를 다 끝냈던 상태였으며, 그래서 위(魏) 본국에도 정예부대를 남겨두고 한(韓) 공략에 나섰던 참이었다. 그러자 제군(齊軍)은 그곳에서 발이 묶여서 오도 가도 못하는 형국이 되었는데, 그러자 또 방연(龐涓)은 그때 위(魏)를 방어하고 있던 방위군과 자신이 이끌던 공략군이 협격(挾擊)해서 제군(齊軍)을 물리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계략을 미리 알아차렸던 손빈(孫臏)은 퇴각을 결정했고, 그러자 또 방연(龐涓)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군(齊軍)을 추격했으며, 그것은 또 철퇴(撤退)전(戰)에서는 추격 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빈(孫臏)은 그렇게 철퇴하면서도 방연(龐涓)의 <위군(魏軍)에는 죽음도 겁내지 않는 용맹한 군사들만 있지만, 제군(齊軍)은 원래부터 겁쟁이들이다!>라고 하는 오만방자함을 역이용하기 위해서, 제군(齊軍) 진영에 설치했던 아궁이의 수를 줄여가면서 후퇴를 했다. 그러자 그것을 확인했던 방연(龐涓)은 제군(齊軍)에 탈주병이 많다고 판단하고는 그 추격의 속도를 더욱 높여나갔다. 그런 한편, 손빈(孫臏)은 애로(隘路-좁고 험한 길, 難關)였던 마릉(馬陵)까지 방연(龐涓)을 유인하고는, 그 한 나무에 <龐涓死于此樹之下-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는다>라고 써두었다. 그리고는 그 길의 양측에 병사들을 매복시켰고, 그 나무 아래에서 불이 켜지면 화살을 쏘아라고 지시를 했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이며, 방연(龐涓)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후, 손빈(孫臏)의 이름은 대륙을 울렸으며, 그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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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자(孟子-기원전 372년?부터 기원전 289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학자였고, 성(姓)은 맹(孟), 휘(諱)는 가(軻), 자(字)는 자여(子輿)였으며, 아성(亞聖-유학에서 공자 다음가는 聖人=맹자)으로도 칭해졌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공맹(孔孟)의 가르침>이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언행(言行)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맹자(孟子)>이며,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고, 인의(仁義)에 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목표로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추(芻-현재의 山東省 鄒城市) 출신이었고,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와 관련되었던 맹모삼천(孟母三遷) 고사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그리고 또 사실(史實)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교육적인 모범으로 해서 현재, 추성 시(鄒城市)에는 맹모삼천사(孟母三遷祠)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나중에 공자(孔子)의 손자였던 자사(子思)의 문하로 들어가서 학문을 배웠으며, 그리고 또 그때, 그는 그 자사(子思)에게 직접 배웠다는 말도 있지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 연대(年代)에 무리가 있다.(아래 子思 참조) 아무튼 또 그 후, 그는 위(魏)와 제(齊) 그리고 송(宋)과 노(魯) 등지로 유세(遊說)를 떠났지만, 그러나 그의 뜻은 그 나라의 왕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제자들을 육성하는데 노력했으며, 그 사이에 저작활동도 겸행했다.

 참고: 자사(子思-기원전 483년?부터 기원전 402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학자였고, 성(姓)은 공(孔), 이름은 급(伋), 자(字)는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였고, 아버지는 공백어(孔伯魚)였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그래서 공자(孔子)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 후에 증자(曾子-6-24참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또 그 후, 그 역시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펼친 후에 노(魯)의 목공(穆公)에게 가서 벼슬을 했다. 그리고 그와 그 일파(一派)들이 저작했던 것으로 <자사자(子思子)>란 것이 있었다지만, 현존하지 않으며, 그리고 중용(中庸)도 자사(子思)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는 있지만, 그러나 또 현재에서는 중용(中庸)의 전반부 등과 예기(禮記)의 몇 편정도가 그 자사자(子思子)에서 전재(轉載)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성(誠)을 천지와 자연의 법칙으로 삼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철학을 제창하였다.

 아무튼 당시, 묵가(墨家)의 고자(告子)는 <사람의 성(性-천성, 성품 또는 품성)에는 선(善)도 없고, 불선(不善)도 없기 때문에,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같은 명군(明君)이 나타나면 백성들은 선(善)을 좋아하게 될 것이고, 그 반대로 유왕(幽王)이나 려왕(厲王) 같은 암군(暗君)이 나타나게 되면 백성들은 난폭(亂暴)한 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했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타고난 성품이 착한(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사람도 있다>라고도 주장하고 있었다.(性猶湍水-사람의 本性은 여울물과 같다는 뜻으로, 여울물이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흘러갈 수 있듯이, 천성적으로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했던 告子의 說)

 참고: 묵가(墨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노나라의 묵자(墨子)의 사상을 받들고 실천하던 제자백가의 한 파였으며, 절대적인 천명에 따라서 겸애(兼愛)와 흥리(興利)에 노력하여 근검할 것을 주장했고, 음악과 전쟁을 반대하였으며, 영혼과 귀신의 실재를 역설하여 종교적인 색채를 띠기도 했다. 그리고 <묵자(墨子)>는 묵자(墨子)의 사상서이며, 인간집단의 전체적 번영인 '이(利)'에 주목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강제적인 연대와 공동의 겸애를 주장하였으며, 침략주의를 배격하고, 다스리는 자의 사치를 추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또 묵자(墨子-B.C.480~B.C.390)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사상가·철학자였으며, 성(姓)은 묵(墨), 이름은 적(翟), 묵가(墨家)의 시조였고, 유가(儒家)에게서 배웠으나, 무차별적인 박애의 겸애(兼愛)를 설파하고, 평화론을 주장하여 유가(儒家)와 견줄만한 학파를 이루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설명함. 

 아무튼, 그에 대해서 맹자(孟子)는 <사람의 품성은 원래부터 선(善)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성인(聖人)이나 소인(小人-일반인)도 그 품성은 한가지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 성품이 선(善)한 사람이 때로 불선(不善)을 행하는 것은, 그 선(善)한 성품이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 상실돼버렸기 때문이다>라고도 했다. 그 때문에 또 맹자(孟子)는 <큰 덕(德)을 가진 사람이란, 그런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라고 했으며, 그리고 또 <학문의 길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심(放心-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잃어버렸던 마음)을 구(求)하는 것, 즉 인간의 본성(善)을 회복(回復)시키는데 있을 뿐이다>라고도 했다. 그리고 또 당시,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을 제창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은 유교(儒敎)주류(主流)파의 중심개념이 되어서 많은 유자(儒者)들에게 전해져서 계승되었다.

 
참고: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악하므로, 선(善) 행위는 후천적인 습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던 학설이며, 중국의 순자(荀子)가 주장하였
다. 그리고 또 그는 인간이란 선천적으로 한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대로 두면 싸움만이 일어나서 파멸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예(禮)로써 바로잡아야 한다고도 했다.(荀子는 차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소개함)

 아무튼, 맹자(孟子)는 또 <인간의 본성에 사단(四端)이 있다>고도 했으며, 그 사단(四端)은 간단하게,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로,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불쌍히 여겨서 언짢아하는 마음)과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예(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겸손히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과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이른다. 그래서 또 맹자(孟子)는 <그런 것을 노력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사람은 금수(禽獸)와 같게 될 것이다>라고도 말을 했다. 그리고 또 그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저절로 몸에 익혀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 때문에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군자(君子)는 금수(禽獸)와도 같은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다. 그리하여 맹자(孟子)는 낙관적(樂觀的)인 인간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의 주체적(主體的)인 노력으로 사회 전체를 통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리하여 맹자(孟子)의 사상은 후세에 주자학(朱子學)으로 이어졌으며, 순자(荀子)의 사상은 법가(法家)사상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그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서 인(仁)과 의(義) 즉, 인의(仁義)는 공자(孔子)의 인(仁)을 더욱 발전시켰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고금(古今)의 군주들을 왕자(王者)와 패자(覇者)로, 그리고 정도(政道)를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로 변별(辨別)했으며, 그리하여 전자(前者)가 후자(後者)보다 더 낫다고도 주장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천하(天下)를 얻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마음부터 먼저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리하여 영토와 군사력부터 확대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또 <왕도(王道)에 의해서 자국의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타국의 백성들에게까지도 왕자(王者)로서 존경받게 되면, 다른 제후들이 침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앞에서도 잠시 소개가 되었지만, 양(梁)의 혜왕(惠王)과 만났을 때, 혜왕(惠王)이 <이익(利益)으로 나라를 강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는 <군주(君主)는 이익(利益)이 아닌, 인의(仁義)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또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비록 소국(小國)이라도 대국(大國)에 지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그 인의(仁義)는 또 군주(君主)가 백성의 마음을 잘 알아 살펴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며,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적이 없게 된다(仁者無敵)라고도 말을 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아무리 소국(小國)의 군주(君主)라도 천하의 왕자(王者)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패자(覇者)의 사적(事績)에 관해서 제(齊)의 선왕(宣王)이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모름지기 군주(君主)란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王道)를 걸어야 하며, 그랬을 때만이 천하의 백성들은 그 왕의 치하(治下)에서 살고 싶어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또, 그 맹자(孟子)의 민본(民本)사상은 경제사상(經濟思想)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었으며, 당시 그가 제창했던 정전제(井田制)도 그러한 문맥(文脈)에서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급진적인 주장이었고, 그래서 당시의 군주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랬어도 맹자(孟子)는 일관되게 <백성이 최우선>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리고 또 그 자신 혁명(革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의 <천명(天命)설>은 나중에 <혁명(革命)설>의 원형(原型)이 되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순(舜)은 천하를 하늘로부터 내려 받았던 것이었지, 요(堯)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이 아니었다>라고 했고, 그래서 또 <천하를 얻게 해주는 것은 오직 하늘뿐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또 예를 들어서 <아무리 요(堯) 같은 천자(天子)라고 하더라도, 천명(天命)에 거슬러서 천하를 주고받는 일은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고 또 그 <하늘의 뜻> 또는 <천명(天命)>의 표현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백성들의 마음 또는 생각에 의해서 표시 또는 표현되는 것>이고, 그래서 또 <백성들이 어떤 사람을 천자(天子)로 인정하고, 그래서 또 그 치세(治世)에 만족을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 천명(天命)을 받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라는 뜻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맹자(孟子)는 그 <천명(天命)설>에 입각(立脚)해서 은주혁명(殷周革命-6-5~11참조)을 거론하면서 <주(周)의 무왕(武王)은 꼭 그렇게 은(殷)의 주왕(紂王)을 토벌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라고 했고, 그것은 또 역시 <가만 놔뒀어도 천명(天命)에 의해서 모든 것은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맹자(孟子)는 유가(儒家)의 제일 중요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의 지위는 송(宋)대(代) 이전에는 그다지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중당(中唐)시대에 한유(韓愈)가 <원도(原道)>를 저술했고, 거기서 한유(韓愈)는 <맹자(孟子)는 전국시대 유가 중에서 유일하게 공자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것을 시작으로, 그때부터 맹자(孟子)의 <승격(昇格)운동>이 현실화되었다.

 참고: 한유(韓愈-768~824)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하겠지만, 그러나 일단 약력을 소개하면, 그는 중국 당나라의 문인이었고 정치가였으며,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을 비판했고, 고문(古文)을 주장하였으며, 시문집에 <한창려집(韓昌黎集)40巻>과 <외집(外集)>이 있었다. 그리고 위의 중당(中唐)시대란 중국 당나라 때, 시(詩)의 발달을 기준으로 나누었던 역사의 4시기를 말했던 것으로, 송(宋)나라 때 <엄우>란 사람이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으로 나누었던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당(中唐)시대는 그 사당(四唐)의 세 번째 시기로, 대종(代宗) 때부터 14대 문종(文宗) 때까지의 약 70년간을 말하며, 그 시기에 한유나 유종원 또는 백거이 등, 뛰어난 시인들이 많이 나와서 고시(古詩)가 번창하였다. 그리고 또 참고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는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여덟 명의 뛰어난 문장가로, 당(唐)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그리고 송(宋)의 구양수(歐陽脩)와 왕안석(王安石) 그리고 증공(曾鞏)과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을 이른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3소(蘇)씨(氏)는 모두 친자(親子-父, 長子, 次子)관계로, 삼소(三蘇)라고도 불렸다.(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또는 변려문(騈儷文)은,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했던 한문 문체로, 문장 전편이 대구로 구성되어서 읽는 이에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 때문에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함.

 아무튼, 그 후에 맹자(孟子)는 점점 그 지위가 상승되었고, 그리하여 북송(北宋)시대 신종(神宗) 희령(熙寧)4년(1071년)에는 맹자(孟子)의 글이 처음으로 과거의 시험과목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원풍(元豊)6년(1083년)에는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추국공(芻國公)의 지위를 추증(追贈)받았으며, 그 다음해에는 공자(孔子)묘(廟)에 함께 병치(竝置)되어서 제사지내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맹자(孟子)>가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으로 승격되었으며, 남송(南宋)시대가 되자 주희(朱熹)가 그 <맹자(孟子)>에 주석을 달았고, 그리하여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와 함께 사서(四書)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다 또 실제적인 지위는 오경(五經)의 위로 올려 졌으며, 그 후였던 원(元)대(代)의 지순(至順)원년(元年)(1330년)에 맹자(孟子)는 <아성공(亞聖公)>에 봉해졌다. 그러자 그 후로 맹자(孟子)는 아성(亞聖)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공자(孔子)의 다음 지위로 승격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공자(孔子)의 출신지였던 산동성(山東省) 추성시(鄒城市)의 남교(南郊)에는 맹자(孟子)를 제사 지내는 맹묘(孟廟)가 지어져 있으며, 그 별명은 아성묘(亞聖廟)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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