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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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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그 후, 경후(敬侯)의 증손(曾孫)이었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騎馬)전술을 도입해서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에 조(趙)의 그 기마대(騎馬隊)는 제국(諸國)을 떨게 했고, 당시 위(魏)에 멸해졌던 후 재흥(再興)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다시 멸했다.
그리고 또 당시, 진(秦)에서는 효공(孝公)을 섬기고 있던 상앙(商鞅)이 정치개혁을 단행한 후, 엄격한 법치주의에 의한 통치체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진(秦)의 국력은 증대되었다. 그러자 또 위(魏)와 한(韓)이 그에 위협을 받았으며, 장의(張儀-6-26참조)의 책략에 의해서 초(楚)의 회왕(懷王)은 포로로 잡혔고, 진(秦)은 초(草)의 땅을 빼앗았다.
○ 효공(孝公-기원전 381년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제25대 군주였고, 헌공(獻公-師隰)의 적자(嫡子)였다. 그리고 또 그는 즉위와 동시에 포고(布告)를 내서 국정을 쇄신(刷新)하겠다고 포부를 밝혔고, 그 후에 위(魏)에서 왔던 상앙(商鞅)을 영입했던 것으로 발본(拔本)적인 국정개혁에 들어갔다.<상앙(商鞅)의 변법(變法)> 그리하여 목공(穆公) 사후부터 쇠퇴했던 진(秦)을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재탄생시켰으며, 수도를 역양(櫟陽)에서 함양(咸陽)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위(魏)를 격파하는 등, 부국강병에 노력했던 중흥(中興)의 시조(始祖)였다.
○상앙(商鞅-기원전 390년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 또는 위(衛)의 공족(公族)계였기 때문에 위앙(衛鞅)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또 상앙(商鞅)이란 호칭은 그가 나중에 진(秦)의 상(商)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상군앙(商君鞅)이라는 의미의 존칭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법가사상을 기초로 해서 진(秦)의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것이 또 나중에 진(秦)의 천하통일에 초석이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주변의 원한을 사서 처형당했다. 그는 위(衛)의 공족(公族) 출신이었고, 위(魏)의 혜왕(惠王)을 모시던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중서자(中庶子-公族을 담당했던 官職)를 지냈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가 되었으며,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그 길로 진(秦)으로 가서 당시 환관(宦官)이었던 경감(景監)이란 자를 만나서 당시 아직 젊었던 효공(孝公)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 만남은 이루어졌고, 그러자 상앙(商鞅)은 먼저 왕도(王道)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을 열변했는데, 하지만 효공(孝公)은 그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자 또 그 얼마 후에 그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상앙(商鞅)은 그때는 한단계정도 수준을 낮추어서 다시 왕도(王道)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때도 효공(孝公)의 반응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또 얼마 후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앞보다 더 수준을 낮추어서 패자(覇者)의 길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그러자 그때는 효공(孝公)도 열심히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상앙(商鞅) 쪽으로 다가와서 그 이야기를 경청했을 정도였다. 그 후, 그렇게 해서 신임을 얻었던 상앙(商鞅)은 국법을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그러나 정작 효공(孝公)이 비판을 두려워해서 망설였다. 그러자 또 상앙(商鞅)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격려했다. <疑行無名, 疑事無功> 즉, 여기서의 의(疑)란, 확신이 없는 애매한 태도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또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감(自信)을 가지고 단행(斷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나 마음가짐 상태로 무엇을 하려고 든다면, 그 일이 비록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그래서 명예 또한 얻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상앙(商鞅)의 그 말은 후세에 고사성어(故事成語)로 남게 되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자 감용(甘龍)이라든가, 두지(杜摯) 같은 자들이 반대하고 나왔는데, 그러자 상앙(商鞅)은 그들의 주장을 논파(論破)했고, 그러자 효공(孝公)도 상앙(商鞅)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기원전 359년, 효공(孝公)은 상앙(商鞅)을 좌서장(左庶長)에 임명했으며, 변법(變法)이라고 불렸던 국정개혁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1차 변법(變法)이라고 불렸던 것이며, 그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참고: 좌서장(左庶長)은 진(秦)의 20등작제(二十等爵制) 중에서 제12위를 가리켰던 것이며, 한편, 상군열전(商君列伝)에서는 그 시점(時點)에 좌서장이 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진본기(秦本紀)에서는 변법(變法) 실행 후 3년이 지났을 때부터였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며, 그리고 다음은 참고로 그 진20등작제(秦二十等爵制)에 대한 내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이 등작제는 진(秦)한(漢)시대에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그 등위는 다소 변동이 있을 수 있으며, 역시 한글표기는 하지 않습니다.
1.公士 /2.上造 /3.簪裊 /4.不更 /5.大夫 /6.官大夫 /7.公大夫 /8.公乗 /9.五大夫 /10.左庶長 /11.右庶長 /12.左更 /13.中更 /14.右更 /15.少上造 /16.大上造 /17.駟車庶長 /18.大庶長 /19.関内侯 /20.列侯
1. 호적(戶籍)을 만들어서 백성들을 5호(戶-伍) 또는 10호(戶-什)를 한 조(組)로 나눈다.(그것을 什伍라고 불렀음)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것을 의무로 할 것이며, 혹시라도 그 중에서 죄를 범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십오(什伍) 전체가 연좌(連座)로 벌을 받는다.(그것을 告座라고도 불렀음) 그러나 미리 신고를 한 경우에는 전쟁에서 적의 머리를 취한 것과 같은 공적이 인정된다.
2. 한 집에 두 명 이상의 성인 남자가 있는데도 분가하지 않은 자는, 부세(賦稅)를 배가(倍加)시킨다.
3.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을 때는 작위(爵位)로 보상한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지 않은 자에게는 그 정도에 상응하는 과형(課刑)을 부과한다.
4. 남자는 농업, 여자는 방적(紡績) 등, 가정 내의 수공업에 종사하고, 그 중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은 세금을 면제한다. 그러나 장사를 한다거나 게으름을 피워서 가난하게 된 자는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뜨린다.
5. 특권 계급이라고 해도 전공(戰功)이 없는 자는 그 신분을 박탈한다.
6. 법령(法令)을 사회규범의 요점으로 한다.
그런 다음 그는 나라에서 법을 확실하게 집행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3장(丈-1丈은 10尺 그러나 秦代의 度量衡에서는 1尺이 약 27.6㎝정도였으므로, 약 8.3m)도 더 되던 나무를 수도였던 옹(雍)의 남문(南門) 앞에 박아놓고 <그 나무를 북문(北門)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十金)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그 나무를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상금을 50금으로 올렸다. 그러자 어느 하루, 어떤 사람 한명이 와서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겼다. 그러자 상앙(商鞅)은 약속대로 그 남자에게 50금을 상금으로 주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백성들은 상앙(商鞅)이 만든 변법(變法)을 믿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최초의 신법(新法)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백성들의 불만은 높아갔지만, 그러나 상앙(商鞅)은 그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거기다 또 상앙(商鞅)은 그 법이 훌륭하게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이 그것을 반드시 지키려는 마음이 없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마침 그때, 효공(孝公)의 아들 태자 영사(嬴駟-나중의 惠文王)가 법을 어긴 일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효공(孝公)에게 그를 처벌할 것을 소원(訴願)했다. 그러자 또 효공(孝公)은 태자에게는 직접적인 벌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태자의 부(傅-후견役)였던 공자 건(虔)을 비삭(鼻削-코를 자름)형에 처했고,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공손가(公孫賈)에게는 이마에 글을 새겨 넣은 묵형(墨刑)에 처했으며, 거기다 또 한사람 태자의 시종(侍從)이었던 축환(祝懽)마저 태자를 잘 보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그러자 그 후, 공자 건(虔)과 공손가(公孫賈) 그 두 사람은 수치심에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고, 그러자 또 그 두 사람은 그때부터 상앙(商鞅)을 증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백성들은 그때서야 법의 지엄함을 알고는 따르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은 그때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자 전답(田畓)들은 아주 멋지게 개간되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그리고 또 백성들도 그때부터는 풍족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내 것이다!>하고 달려드는 사람 하나도 없을 정도가 되어갔다. 그러자 또 처음에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백성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때부터는 상앙(商鞅)을 칭찬하는데 입이 마를 지경이었고, 그것으로 상앙(商鞅)의 그 변법(變法)은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52년, 그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진(秦)은 위(魏)를 침공했으며, 그리고 기원전 350년에는 수도를 옹(雍)에서 함양(咸陽)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동년(同年) 상앙(商鞅)은 다시 변법(變法)을 시행했으며, 그것은 또 법가사상에 의한 군주독재권의 확립을 기도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의 주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1. 부자(父子)형제(兄弟)가 한집에 사는 것을 금한다.
2. 전국(全國)의 집락(集落)을 현(縣)으로 나누고(縣制로, 全國에 41縣을 設置함) 그곳에 각각 영(令-長官), 승(丞-補佐)을 설치하는 것으로 중앙집권화를 철저히 한다.
3. 정전(井田)을 폐(廢)하고, 전지(田地)의 구획(區劃)정리를 행한다.
4.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한다.
참고: 그때, 공평(公平)하게 계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승(升-되, 말)이 <상앙승(商鞅升)> 또는 <상앙량(商鞅量)>이라고 불렸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아무튼 당시까지 그곳에서는 부자형제가 한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중원(中原) 제국(諸國)들의 시각에서 그런 것은 야만(野蠻)의 풍습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상앙(商鞅)은 그것을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었고, 그 결과로 호수(戶數)가 늘어나서 진(秦)은 그때부터 더욱더 강대해져 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340년, 그 전 해에 이미 제(齊)의 손빈(孫臏)에 의해서 피폐(疲弊)해져 있었던 위(魏)를 다시 침공했으며, 그때 상앙(商鞅)은 스스로 군을 인솔해서 그 토벌에 나섰다. 그리고 또 옛날부터 친구사이였고, 당시 위(魏)의 총대장이었던 공자(公子) 공(邛)을 기만해서 포로로 잡았으며, 그것으로 황하(黃河) 이서(以西)의 땅을 빼앗았다. 그러자 위기를 느꼈던 위(魏)는 수도를 안읍(安邑-현재의 山西省 安邑)에서 동쪽의 대량(大梁-현재의 開封)으로 옮겼으며, 그러자 또 그때, 혜왕(惠王)은 <내가 일찍이 공숙좌(公叔座)의 말을 듣지 않아서 지금 이런 일을 겪는구나!>라고 하면서 크게 후회했다. 아무튼, 그 공적으로 상앙(商鞅)은 상(商)과 어(於)라는 땅의 15읍(邑)을 봉지로 내려 받았고, 그때부터 상앙(商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소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고의 절정을 맞고 있었던 상앙(商鞅)도 그 이면에는 많은 그림자들을 생산했고, 그들은 또 그를 제거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제일로 많은 피해를 봤던 사람들은 구(舊) 귀족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시 군주의 독재로 인해서 자신들의 권한이 많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상앙(商鞅)에 대한 증오가 더욱 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어느 때, 상앙(商鞅)의 심복이었던 조양(趙良)이 상앙(商鞅)에게 <지금 당장 재상의 직을 그만두고 타국(他國)으로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엄중하게 충고를 했다. 그러자 그에 대해서 상앙(商鞅)은 <네가 나의 안전을 염려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그것을 두고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조양(趙良)은 상앙(商鞅)에게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보고 그길로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338년, 마침내 효공(孝公)이 죽었고, 그러자 태자 사(駟)가 즉위해서 혜문왕(惠文王-그러나 그 시점에서는 惠文公)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만을 기다려왔던 상앙(商鞅)의 반대파(公子 虔・公孫 賈 등)들이 혜문왕(惠文王)에게 참소(讒訴)를 했고, 그것으로 상앙(商鞅)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상앙(商鞅)은 급히 도망을 갔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어느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여관의 주인은 그가 상앙(商鞅)인줄을 몰랐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의 숙박을 거부했다. <상앙(商鞅) 님의 엄명에 의해서 여권(旅券)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숙박시키지 못하도록 법률로 정해두었습니다> 그러자 상앙(商鞅)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아! 법을 위한 폐(弊), 여기에까지 이르렀던가?!(법률을 만들어서 철저하게 시켰던 폐해(弊害)가 이런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할 줄이야...)> 그 후, 그는 일단 위(魏)로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위(魏)에서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추방되었다. 그러자 하는 수가 없었던 상앙(商鞅)은 봉지였던 상(商)으로 가서 군사를 모았지만, 그것을 토벌하러왔던 진(秦)의 토벌군에 의해서 격퇴되었으며, 상앙(商鞅)도 그때 죽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엄명을 내려서 그 본보기로 삼기 위해 그의 유해를 면지(黽地-현재의 河南省 澠池県)에서 차열(車裂)형에 처하라고 했고, 그 결과 그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어진 후에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그것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또 그 진(秦)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고 끝을 내면, 그 진(秦)은 원래는 내륙의 오지(奧地)에 기원(起源)을 두었던 나라로, 그래서 당시의 중국 즉, 내륙인 중앙에 있던 제국(諸國)들과는 다소 이질(異質)적인 나라였고, 그 풍습이란 것도 거의 야만(野蠻)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상앙(商鞅)에 의해서 그 모든 것들은 개혁되었으며, 거기다 위(魏)까지 이기고는 강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상앙(商鞅) 사후, 즉 혜문왕(惠文王) 이후의 진(秦)의 역대군주들도 모두 상앙(商鞅)이 만들었던 그 법을 따랐으며(그것은 또 그 반세기전에 楚의 吳起도 그런 엄격한 법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가 죽고 나자 그것도 함께 없어졌다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또 그 후에 진(秦)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도 바로 그 상앙(商鞅)이 만들어두었던 그 <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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