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9)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
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 경후(敬侯-?부터 기원전 375년. 재위 기원전 387년부터 기원전 375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로, 아버지는 열후(列侯)였다.

 열후(列侯 또는 烈侯-?부터 기원전 400년. 재위 기원전 408년부터 기원전 400년)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군주였고, 조무휼(趙無恤-趙襄子)의 손자였다.
그리고 그는 한(韓)의 경후(景侯)와 위(魏)의 문후(文侯)와 함께 기원전 403년에 진(晋)의 열공(烈公)으로부터 제후(諸侯)로서 인정되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또 그때, 그에게는 영장(嬴章-나중의 敬侯)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동생이었던 무공(武公-武侯)에게 양위(讓位)되었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된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그는 생전에 음악을 아주 좋아했는데, 특히 정(鄭)나라 출신의 어떤 가수(歌手)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당시 상국(相國-재상)이었던 공중연(公仲連)에게 그의 신분을 높여주라고 명을 내렸는데, 그러자 공중연(公仲連)은 <그를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신분을 높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반대했다. 그러자 열후(列侯)는 <그렇다면 그에게 밭(田) 1만 묘(畝)를 내려라!>라고 또 명을 내렸다. 그러자 공중연(公仲連)은 알았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내켜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열후(列侯)가 언젠가는 그 결정을 후회할 날이 있겠지'하고 기다렸다는데, 그런데 그 1개월 후에 열후(列侯)가 그 결과를 물었다. 그러자 또 공중연(公仲連)이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 적당한 밭을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또 얼마 후에 열후(列侯)가 그것에 대해서 또 물으려고 하자 공중연(公仲連)은 병을 핑계로 참내(參內)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 얼마 후에 공중연(公仲連)은 우축(牛畜)과 서월(徐越) 그리고 순흔(荀欣)을 데리고 가서 열후(列侯)에게 소개하면서 추거(推擧)했다. 하지만 열후(列侯)는 그 일은 제쳐두고 끝까지 앞의 그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또 공중연(公仲連)은 그 말에는 애매하게 얼버무리고는, 자신이 데리고 갔던 자들이 모두 현자(賢者)들이라고 하면서 재차 그들을 추거했다. 그러자 열후(列侯)가 그들을 시험했는데, 그러자 우축(牛畜)은 인의(仁義)의 도에 대해서 설파했으며, 순흔(荀欣)은 현자(賢者)들을 등용시켜서 그들의 재능을 이용해야 한다고 설파했고, 이어서 서월(徐越)은 재화(財貨)를 검약(儉約)해서 공로(功勞)가 있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상을 내려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 열후(列侯)는 그때서야 언뜻 깨달았던 것이 있었고, 그래서 급히 공중연(公仲連)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잠깐,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던 것 같소! 그 악사(樂士)에게 내리려던 밭은 일단 보류시키시오!> 그 후, 우축(牛畜)은 사(師)에 그리고 서월(徐越)은 내사(內史)에, 그리고 순흔(荀欣)은 중위(中尉)에 각각 임명되었으며, 공중연(公仲連)에게도 의상(衣裳) 2벌이 내려졌다고 한다.

 아무튼, 경후(敬侯)는 기원전 400년에 열후(列侯)가 죽었을 때, 아직 나이가 어렸었기 때문에, 숙부(叔父)였던 무공(武公)이 그 대를 이었고, 열후(列侯)는 또 무공(武公)에게 <그 다음 대는 경후(敬侯)가 잇게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지만, 그러나 또 무공(武公)은 그 다음 대를 자신의 아들이었던 영조(嬴朝)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해서, 그때부터 경후(敬侯)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후(敬侯)도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무공(武公)이 건재(健在)하고 있었을 동안에는 그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도록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였던 기원전 387년에 드디어 무공(武公)이 죽자 경후(敬侯)는 자신이 마땅히 그 대를 이어야 한다면서 주변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어서 등극했다. 그러자 또 조조(趙朝-嬴朝)가 그에 반발해서 무력봉기를 일으켰는데, 그러자 경후(敬侯)는 중모(中牟-河南省 湯陰県 西部)에서 한단(邯鄲-河北省 邯鄲)으로 천도한 직후에, 그 한단(邯鄲)에서 조조(趙朝-嬴朝)를 진압했다. 그러자 또 조조(趙朝)는 위(魏) 무후(武侯)의 도움을 받아서 위(魏)로 도망을 갔고, 그러자 또 무후(武侯)는 오기(吳起)를 대장으로 해서 군을 조(趙)에 보냈지만, 그러나 위군(魏軍)의 작전착오로 인해서 오히려 조군(趙軍)에 졌고, 그 결과로 조조(趙朝)는 토벌되었으며, 그 후로 경후(敬侯)의 왕위는 확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75년에 그는 죽었다.

 그 후, 경후(敬侯)의 증손(曾孫)이었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騎馬)전술을 도입해서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에 조(趙)의 그 기마대(騎馬隊)는 제국(諸國)을 떨게 했고, 당시 위(魏)에 멸해졌던 후 재흥(再興)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다시 멸했다.

 ○ 무령왕(武靈王-?부터 기원전 295년. 재위: 기원전 326년부터 기원전 298년)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의 군주였고,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옹(雍-사기색은에 의함)이었다. 그리고 숙후(肅侯)의 아들이었고, 호복기사(胡服騎射)를 도입해서 조(趙)를 군사대국으로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326년에 숙후(肅侯)가 죽자 조후(趙侯)의 위를 이어받았지만, 그러나 그때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신하였던 비의(肥義)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기원전 319년 즈음에 제국(諸國)에서는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그는 <조(趙)는 아직 그만한 능력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군(君)의 호칭을 고집했다. 그리하여 왕호는 그의 아들이었던 혜문왕(惠文王) 때부터 사용했으며, 그러자 또 그 혜문왕(惠文王)은 무령왕(武靈王)의 시(諡)에도 왕호를 올리기도 했지만, 기원전 315년에 인접국이었던 연(燕)에서 대혼란이 발생했고, 그리하여 그 나라는 군주 부재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무령왕(武靈王)은 연(燕)의 공자였던 직(職)을 맞이해서 나중에 조(趙)의 뒤를 받쳐줄 수 있을 방패용으로 그를 옹립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소왕(昭王)이 군주의 자리에 올라버렸다. 그리고 또 기원전 311년에 무령왕(武靈王)은 꿈속에서 한 미녀(美女)를 보았는데, 그러자 그는 그 꿈의 해석을 구했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해 듣고 오광(吳廣)이란 남자가 찾아와서 그 꿈의 미녀가 바로 자신의 딸인 맹도(孟桃)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그 맹도(孟桃)를 그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그는 아주 크게 기뻐하면서 그 맹도(孟桃)를 맞이했고, 그 후로 총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맹도(孟桃)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나중의 혜문왕(惠文王)이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310년에 그는 교외(郊外-국경)에 야대(野臺-들에 지은 높은 臺)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그곳에서 중산국(中山國)과 제(齊)의 동태를 살피게 했으며, 그것으로 그 나라들을 정복하려는 자신의 야망을 내비쳤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307년에 그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로써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생각해냈는데, 그것은 또 당시, 중국에서의 귀족(貴族)전사의 전통적인 전술이란 것이, 3인의 전사(戰士) 즉, 마부(馬夫)와 궁사(弓射) 그리고 창(戈手)에 의한 백병전(白兵戰)을 분담(分擔)하는 전차(戰車)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당시 북방유목민족의 1인 특수훈련을 받은 전사가 직접적으로 1마리의 말에 올라타서 활을 쏘면서 싸우는 방법을 도입하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 대부(大夫)들은 윗옷자락이 길고, 아래는 스커트 형식의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말을 타려면 상당히 불편했던 점이 많았다. 그런데다 또 유목민족의 복장들은 말을 타기에 적합한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가 생각했을 때, 그런 복장의 도입이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에게 그것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자, 비의(肥義)는 바로 찬성했지만, 그의 숙부였던 공자(公子) 성(成)은 반대를 했다. 그것은 또 당시, 중화사상이 강했던 중국의 대륙에서는 그 유목민족을 만이(蠻夷)라고 부르면서 업신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들의 그런 방식을 도입한다는 자체가 이미 말도 되지 않는 만행(蠻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때, 비의(肥義)의 태도가 그들에게서는 신기하게 보였을 정도였는데, 그래서 또 그때 성(成)이 그런 반대를 하고 나왔던 것은, 그들의 수준으로서는 오히려 당연했던 결과였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포기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성(成)과 반대파들을 설득시켰으며, 그 결과 그의 뜻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동년(同年) 진(秦)의 무왕(武王)이 죽었고, 그러자 연(燕)에 있던 공자 직(稷)이 진군(秦君)이 되었는데, 그가 소양왕(昭襄王)이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8년에, 그는 그때까지 태자로 있었던 공자 장(章)을 폐했고, 공자 하(何)를 태자로 세운 뒤에 위(位)를 물려주었지만, 그러나 스스로 주부(主父)라고 칭하면서 실질적인 권력까지는 넘겨주지 않았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6년, 그때까지 몇 번이고 공격을 해서 반(半)정도는 정복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완전히 멸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5년에는 공자 장(章)에게 연민의 마음이 느껴져서 월(越)의 북쪽에 있던 대(代)의 군(君)으로 삼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공자 장(章)으로 하여금 혜문왕(惠文王)에 반란을 결의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하지만 장(章)은 반란에 실패하고는 그에게로 도망을 왔는데, 그러자 그는 장(章)을 숨겨주었다. 그러자 또 혜문왕(惠文王) 측의 이태(李兌)와 공자 성(成)이 그의 관저를 포위했으며, 그러자 또 공자 장(章)은 그 중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반란은 끝났지만, 하지만 또 그때, 감히 주부(主父)의 관저를 포위하고 병(兵)을 움직였던 것으로 해서 나중에 문책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이태(李兌) 등은, 그래서 그 포위를 풀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그 3개월 후에 그(主父)는 아사(餓死)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것을 두고 사마천(司馬遷)은 <무령왕(武靈王)이 후계(後繼)를 망설였던 결과, 그 자신 아사하고 말았던 것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為天下笑, 豈不痛乎)>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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