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6  秦王朝滅亡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1.출생(出生)

 그는, 패현군 풍현 중양리(沛縣郡 豊縣 中陽里=現 江蘇省 徐州市 沛縣-앞에서 소개되었음)에서 부(父) 유태공(劉太公)과 모(母) 유온(劉媼)의 삼남(三南)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형제로는 맏형에 유백(劉伯), 차형(次兄)에 유희(劉喜), 이모제(異母弟)로 유교(劉交)가 있었고, 그의 출생일화는 다음과 같다.

 유온(劉媼)은 유방(劉邦)을 출산하기 전(前) 어느 하루, 어느 연못 근처에서 잠깐 졸았는데, 그러자 '유온'은 꿈속에서 그 연못의 신(神)을 만났다. 그런데 그때 또 마침 그 근처에 있던 유태공(劉太公)이 그런 유온(劉媼)을 보았는데, 그때 용(龍) 한 마리가 유온(劉媼)을 휘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유방(劉邦)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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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소개

 1. 부(父)

 유태공(劉太公-?부터 기원전 197년)은 유방(劉邦)의 아버지이며,
칭호(稱號)는 한(漢)의 태상황(太上皇). 성(姓)은 유(劉). 이름은 단(煓). 혹은 집가(執嘉)라고 전하는 책도 있다.(史記索隱에 의한 것이나, 그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중국 初唐의 학자인 顔師古) 그리고 또 그의 전처(前妻)는 유온(劉媼)이며, 후처(後妻)의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태공(太公)이란 말은 연장자(年長者)를 의미했던 것으로, 우리말로는 <어르신>이라거나 <어른>처럼 친밀감을 담아서 불렀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원래 이름이 불릴 일도 별로 없었을 정도로, 그러니까 어르신(太公) 정도로만 불렀어도 아무 관계도 없었을 낮은 신분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또 일설(一說)에 의하면 유방(劉邦)이 패군(沛郡=沛縣)의 정장(亭長)이 되어서 단부현<單父縣=山東省 하택시(菏澤市)>'에서 이주해온 부호(富豪) 여 씨(呂氏)와 인척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해서, 패(沛)의 호농(豪農)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즉, 유방(劉邦)은 소작인까지 두었던 유복한 농가출신자였다는 것이다.(혹은 沛의 地主였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러했던 유태공(劉太公)은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에 살았던 농부였다. 그리고 유방(劉邦)이 자신의 처지(농부의 자식)를 잊고서 건달 짓으로 세월을 보냈다거나, 유협(遊俠)들과 어울렸다거나 했기 때문에 부자(父子) 간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그랬던 유방(劉邦)이 나중에 한왕(漢王)이 되었고, 그리고는 항우(項羽)와 다투게 되자 유태공(劉太公)도 본의 아니게 그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 유태공(劉太公)이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패하자 유방(劉邦)의 아내였던 여치(呂雉)와 함께 포로로 잡혀서 약 3년간이나 인질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 전세가 역전되어서 항우(項羽)가 불리해지자 그에 항우(項羽)는 그 두 사람을 이용해서 사태의 타개를 도모했다. 그리고는 <광무산(廣武山)의 싸움> 때, 항우(項羽)는 미리 큰 가마솥을 준비해 놓고 유방(劉邦)에게 다음과 같이 협박을 했다.

 <만약에 네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아버지를 이 가마솥에다 넣어서 삶아버릴 것이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진말(秦末)의 동란(動亂) 때, 두 사람이 함께 초(楚)나라의 회왕(懷王)을 모셨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그 답을 했다.

 <네가 벌써 잊었나본데, 우리는 과거 의형제였던 사이였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네가 꼭 아버지를 솥에다 삶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나중에 잘 끓인 국물을 나에게도 한 그릇 나눠주길 바란다!>

 그 후, 양자(兩者) 간에 강화가 성립되었고, 그러자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도 유방(劉邦)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에 유방(劉邦)은 강화를 파기해 버렸고, 그리고는 <해하(垓下)・오강(烏江)의 싸움>에서 항우(項羽)를 격파하고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자 유태공(劉太公)도 태상황(太上皇)의 칭호를 받게 되었
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중국 역사상 생존 중에 태상황(太上皇)의 칭호를 받았던 사람은 그 유태공(劉太公)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또 정작 본인은 그것을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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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모(母)

 유온(劉媼-生沒未詳)은 유방(劉邦)의 생모(生母)로, 시호(諡號)는 소령후(昭靈后). 성명은 미상(未詳-이유는 아래에서 설명함). 하지만 사기색은(史記索隱)과 사기정의(史記正義)의 인황보밀등(引皇甫謐等)에 의하면, 그녀의 성(姓)은 왕(王)이었으며, 이름은 함시(含始)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또 안사고(顔師古)가 이견을 보였다) 그리고 가족은 상기(上記)를 참조바라며, 그리고 또 그녀의 이름이 '유온'이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 유(劉)와 온(媼)은 위, 유태공(劉太公)의 예와 같이(太公), 연장자에 대한 친밀감을 담은 통칭이었으며, 하지만 또 굳이 표현하자면 <유가(劉家-유 씨 가문 또는 유태공)의 아내>나 <유가(劉家)의 안주인> 같은 의미였던 것으로, 그래서 또 그녀의 이름이 확실히 유온(劉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고조본기(高祖本紀) 및 한서(漢書) 그리고 또한 고제기(高帝記-고대역대황제들의 기록)'를 종합했을 때, 유방(劉邦)은 유온(劉媼)이 낮잠을 자던 중에 용(龍)이 조화를 부려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그러나 또 그런 설화나 전설의 예는 얼마든지 있으며(특히 朱全忠이나 朱元璋 등), 또 실제로는 용(龍)이 아니었고 '도적이었다'거나 '도망 중이었던 무사였다'는 등의 여러 가지 설도 있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서(史書)에 의하면 그녀는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202년에 유방(劉邦)이 즉위하자 <소령부인(昭靈夫人)>이란 칭호를 받았고, 또 유방(劉邦) 사후에는 여치(呂雉)로부터 <소령후(昭靈后)>로 승격된 칭호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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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맏형(長兄)

 유백(劉伯-生沒未詳)의
시호(諡號)는 무애후(武哀侯-그러나 뒤에는 武哀王)였고, 자식으로 갱갈후(羹頡侯) 유신(劉信)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젊어서 사망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전해지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러나 또 일부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들 부부사이는 나빴던 것 같고, 그것은 또 어느 날 유방(劉邦)이 자기 친구들 몇 명을 집으로 데리고 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유백의 아내는 빈 냄비를 보이면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유방(劉邦)이 확인을 해보니 집에 국(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었고, 그래서 또 일족과 공신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내렸는데, 그러나 유백(劉伯)의 자식이었던 유신(劉信)에게만은 그 어미의 고약했음을 가슴에 담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유태공(劉太公)이 나서서 사정했고,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유신(劉信)에게 작위를 내렸는데, 그 이름은 갱갈후(羹頡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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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차형(次兄)

 유희(劉喜-?부터 기원전 193년)의 자(字)는 중(仲). 시호(諡號)는 대경왕(代頃王), 기원전 201년에 유방(劉邦)에 의해서 대왕(代王)에 봉건(封建) 되었다. 그러나 영내(領內)에 흉노군(匈奴軍)이 침공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을 가버렸는데, 그것은 또 물론, 평상시라면 당연히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의 배려로 왕위(王位)만 박탈시키고 합양후(郃陽侯)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에 그의 자식 유비(劉濞)가 오왕(吳王)에 봉건 되었으며, 그는 그 3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에게 경왕(頃王)이란 시호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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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모제(異母弟)

 유교(劉交-?부터 기원전 179년)는 전한(前漢)의 제후왕(諸侯王)이었고, 시호(諡號)는 초원왕(楚元王), 그리고 그는 유방(劉邦)과는 달라 유학(儒學-詩經)을 배웠으며, 유방(劉邦)과 함께 종군했다. 그리고 또 노관(盧綰)과 함께 유방(劉邦)의 측근 역을 맡았으며, 유가(劉賈)와는 함께 별동대(別動隊)도 되었다. 기원전 201년, 모반죄로 실각했던 초왕(楚王)·한신(韓信)의 후임으로 그는 그 옛 영토를 남북으로 분할했던 북부(北部)의 초왕(楚王)으로 봉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 회남왕(淮南王)·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형왕(荊王)·유가(劉賈)가 영포(英布)에게 패하자 다시 영포(英布)와 싸웠지만 졌다. 그리고 또 그는 젊은 시절에 배웠던 유학(儒學)과의 연(緣)으로 유생(儒生)들을 많이 중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전한(前漢) 말기의 석학으로서 알려져 있는 유향(劉向)과 유흠(劉歆)부자(父子)는 그의 자손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동진(東晋)의 정치가였던 유외(劉隗)와 유송(劉宋)의 유유(劉裕=高祖・武帝)도 그의 후예를 자칭했던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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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처(妻)

 여치(呂雉-?부터 기원전 180년)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부인으로, 황후(皇后)였고, 혜제(惠帝)의 모(母)였다. 그리고 자(字)는 아후(娥姁). 시호는 고후(高后=高皇后)였으며, 유방(劉邦) 사후(死後)에는 황태후(皇太后)·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었고, 여후(呂后), 여태후(呂太后)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현재는 <중국의 3대(大) 악녀(惡女) 중 한명>으로 불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당대(唐代)의 무측천과 청대(淸代)의 서태후(西太后)가 있었다.(나머지는 후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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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휘(諱=諡號) <邦>은 사기(史記)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현재 남아있는 문헌 중에서 제일로 오래된 것인 후한(後漢)의 순열(荀悅-下述)이 지은 한기(漢記)에 그것은 기록되어 있으며,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주석(注釋)에서 그것을 인용하고 있다.

 <방(邦)>의 어의(語義)는 원래 <방(幇)=“bāng”=형(貴兄)>이란 의미의 일반명사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입장이 있다.<司馬遼太郎(시바료타로) ・ 佐竹靖彦(사타케야스히코)의 說> 다만, 현재 전하는 '방(幇)'이란 글자에 <형(兄)>이란 의미는 없다.

 ※ 순열(荀悅-148년-209년)은, 중국 후한(後漢)말기의 학자로, 자(字)는 중예(仲豫)였고, 영천군<潁川郡-潁은 江 이름(yǐng). 하남성 등봉현(登封縣)에서 회수(淮水)로 흐르는 강이며, 영천군은 그 지방) 영음(潁陰) 출신이었다. 그리고 전한(前漢)의 역사를 취급했던 편년사(編年史) <한기(漢記)>의 편자(編者)였던 순욱(荀彧)의 종형(從兄-사촌형)이었으며, 조조(曹操)의 부름을 받고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된 후, 헌제(獻帝)에 강의하였다. 다른 저서에 <신감> 등이 있었다.

 ★ 신감(申鑑)은 중국 후한(後漢)
순열(荀悅)이 지은 유가서(儒家書)이며, 정치의 향방과 사물의 도리 등을 기술하여 헌제(獻帝)에게 봉정했던 것으로, 당시의 정권이 조조(曹操)에게 이행됨을 우려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순열(荀悅)은 순자(荀子)에 대해서, 소순자(小荀子)로도 불린다. 5권.

 아무튼, 그의 부(父) 순검(荀儉)은 순상(荀爽) 등 여덟 명의 형제와 함께 <8龍>으로 불렸다지만, 그러나 빨리 죽었다. 그리고 또 그 순검(荀儉)의 부(父)였던 순숙(荀淑)은 대장군 양기(梁冀)에게 미움을 받았던 줏대가 아주 강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12세에 춘추(春秋)를 읽었으나, 집이 궁핍하여 책을 빌려서 읽었고, 그러나 한번만 읽으면 대충 다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착하고 아름다운 용모에 글쓰기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영제(靈帝) 시대에는 내시(內侍)가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은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순열(荀悅)도 병(病)을 칭하며 은거했다. 그래서 당시 그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그러나 또 가까이에 있던 그의 사촌동생 순욱(荀彧)이 그를 특히 존경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에 '순열'은 최초로 진동(鎭東)장군 조조(曹操)의 막부(幕府)에 초대되었고, 그 후에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헌제(獻帝)는 문학을 좋아했으므로, 그에 '순열'은 순욱(荀彧)과 소부(少府-관직 명) 공융(孔融)과 함께 '헌제(獻帝)'에게 강의했다.

 ★ 공융(孔融)은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153~208)로, 자는 문거(文擧). 건안칠자<建安七子-중국 후한 건안 때, 시문(詩文)에 뛰어난 일곱 사람의 유명한 문학가들을 이르던 말. 공융(孔融)·진림(陳琳)·왕찬(王粲)·서간(徐幹)·완우(阮瑀)·응창(應瑒)·유정(劉楨)을 이름>의 한 사람으로, 북해(北海)의 재상이 되어서 학교를 세웠고, 조조를 비판 · 조소하다가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저서에 <공북해집(孔北海集)>이 있었다.

 그 후, 순열(荀悅)은 승진을 거듭해서 비서감(秘書監)과 시중(侍中)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이 조조(曹操)에게로 옮겨가고 있었기 때문에, 헌제(獻帝)로서는 자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자 순열(荀悅)이 헌제(獻帝)를 보좌하려고 했지만, 그로서는 따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순열(荀悅)은 <申鑑 또는 申鑒 5편>을 만들어서 헌제(獻帝)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헌제(獻帝)는 그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헌제(獻帝)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가 대부분이 문장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춘추좌씨전> 형식으로 <한기(漢記)>를 만들도록 명했고, 그에 순열(荀悅)은 <한기(漢記) 30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한기(漢記)>는 <춘추좌씨전>과 같은 편년체로, 전한(前漢) 406년간의 역사를 적은 것이었다. 그리고 순열(荀悅)은 또 그 외에도 <숭덕(崇德)>이나 <정론(正論)> 등 수십 편을 더 저술했고, 건안(建安) 14년(209년)에 62세로 사망했다.

 출토사료(出土史料)로부터 그의 '시호(諡號)'가 <방(邦)>인 것은 대충 올바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자(字) <계(季)>는 ‘막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 그러나 중복되지만, 부모의 이름에서도 태공(太公)은 연장자(남성)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며, 온(媼)도 일반적으로 부르는 ‘아줌마’와 같은 호칭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맏형의 백(伯)은 장남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전술(前述)의 결과, 유방(劉邦)의 가족들에 대한 본명(本名)은 모두 불명(不明)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유방(劉邦)에 관해서 썼을 때, 과감하게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그런 한편 또 당시, 서민들은 정식적인 이름을 쓰지 않았고 <누구의 누구, 예를 들어서 유가(劉家)의 장남(長男)=유백(劉伯) 그리고 유가(劉家)의 막내=유계(劉季)> 등으로 표현해도 충분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다만, 차형(次兄)과 이모제(異母弟)의 경우에서는 희(喜)와 교(交)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가족 전체가 이름이 불명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또, 그에는 피휘(避諱)를 위해서 고의로 애매하게 그렇게 기술했을 것이란 설도 있다.

 
유방(劉邦)의 용모(容貌)는 콧대가 높고, 멋진 수염을 길렀으며, 이른바 용안(龍顔)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이 길어서 코가 돌출된 상(相)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대퇴부(넓적다리)에는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 그 ‘72’란 숫자는 1년 360일을 오행사상(五行思想)의 5로 나눈 수로, 당시에는 꽤 '길한 수(吉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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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9년 /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亂) 발발(勃發) - 중국 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


 1. 봉기(蜂起)

 기원전 210년, 시황제(始皇帝)가 붕어하자 그 막내였던 호해(胡亥)가 형(兄) 부소(扶蘇)를 자살로 몰고는 황제에 즉위했다. 그리고 그 원년(元年)이 되던 기원전 209년 7월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변경수비를 위해서 징병되었던 농민병(兵) 900명의 인솔(引率) 보좌를 명받아서 어양<漁陽-현재의 북경시 북부의 밀운현(密雲縣)>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경시 위치도>

<북경시의 밀운현 위치도>


 그런데 그들은 가던 도중에 대택향<大澤鄕-현재의 안미성(安微省) 숙주시(宿州市)의 동남부>에 접어들었을 때 큰 비를 만났다. 그리하여 길이 수몰(水沒)해서 기일 내에 어양(漁陽)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당시 진(秦)의 법(法)은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무조건 참수형이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그리고는 우선 점쟁이를 찾아가서 자신들이 성공을 할 수 있겠는지를 점쳤다. 그러자 점쟁이가 이렇게 말을 했다.

 <성공은 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들은 귀신이 될 것이다!>

 그러자 두 사람은 그 <귀신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고민했다. 그러나 곧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은 <귀신의 힘을 빌려서 사람들을 위복(威服=복종)시켜라!>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곧 행동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우선 <진승왕(陳勝王>이란 붉은 글씨를 쓴 헝겊을 배를 가른 물고기 속에다 넣어두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병사들이 아주 기분 나빠했는데, 그런데다 또 오광(吳廣)은 숙영(宿營) 근처에 있던 사당(祠堂)에 숨어들어서 밤중에 호화(狐火-도깨비불)를 피우고는 <대초(大楚-초나라)가 흥(興-일어난다)한다. 진승(陳勝)이 왕이 된다>라고 여우울음소리를 흉내 내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그 후 병사들은 진승(陳勝)을 보면 두려워하면서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

 그렇게 사전준비를 다 끝낸 두 사람은 마침내 결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선 농민병 인솔을 책임지고 있던 장(將)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오광(吳廣)이 먼저 연극을 시작했다.

 "나는 도망을 칠 것이다!"

 오광(吳廣)은 그때 술에 취해서 누워 있던 그 두 사람의 면전에서 이렇게 몇 번이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 중의 한 사람이 일어나서 화를 내며 그를 채찍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소리를 들었던 주변의 병사들이 몰려와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자 그들은 곧 분노했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책임자 한 사람이 칼을 놓쳤던 틈을 타서 오광(吳廣)이 그것을 얼른 주워들고 그 책임자를 찔렀다.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있던 진승(陳勝)도 같이 달려들어서 나머지 한 사람도 찔렀다.

 그 후 진승(陳勝)은 병사들을 소집했고,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들은 지금 큰 비를 만나서 약속된 기일 내에 어양(漁陽)에 당도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무조건 참수형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참수형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노역(勞役)으로 시달리다가 죽게 될 것이며, 만약에 또 그 노역에서도 죽지 않는다면 필시 귀도(歸途)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이름이라도 남기고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원래부터 사람에게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종족(種族-)이 따로 있을 것인가!>

 그러자 병사들은 일제히 그를 따를 것을 결의했다.

 그런데 그때, 그 두 사람은 민중들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서 진승(陳勝)은 부소(扶蘇)를, 그리고 오광(吳廣)은 항연(項燕)을 자칭했는데, 그것은 또 시황제(始皇帝)의 장자(長子)였던 부소(扶蘇)와 구초(舊楚)의 영웅이었던 항연(項燕)이 당시의 서민들에게서는 아주 인기가 많았던 때문이었고, 그리고 또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알지도 못했다거나 또는 그런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두 사람은 그들을 이용했던 것이었다.


<대택향 = 현, 안미성 숙주시 위치도. 노란색 부분>

 그 후, 두 사람은 우선 대택향(大澤鄕)을 점령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여러 지역을 점령했고, 특히 진(陳)을 취(取)했을 때는 병차(兵車)가 600승(乘), 기병(騎兵)이 1000여(余), 병사는 수만에 이르는 대 세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진(陳)을 공략했을 때, 군수(郡守)나 현령(縣令)들은 이미 도망을 가고 없었고, 그래서 또 그 아랫사람들(副官)이 잠시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진승(陳勝) 등은 그곳을 본거지로 했으며, 이어서 진승(陳勝)은 왕으로 즉위했고, 그 국호를 <장초(張楚)>로 정했다.

 ※ 진(陳)은 하남성(河南省)의 회양현(淮陽縣-市) 一帶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였다.


<하남성 위치도>

<하남성의 회양현 위치도>  


  2. 반란의 확대와 '장한(章邯)'의 반격

 그렇게 해서 <진승(陳勝), 봉기(蜂起)하다!>란 소문이 퍼지자, 그때까지 진(秦)의 압제(壓制)를 참아 왔던 각지의 민중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진승(陳勝)에 호응했다. 그러자 힘을 얻었던 진승(陳勝)은 오광(吳廣)을 가짜 왕으로 만들어서 제장(諸將)들을 통솔시켰다. 그리고는 서쪽을 정벌(征伐) 시키면서 동시에 무신(武臣)이란 자에게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란 자를 붙여서 조(趙)의 땅을 계략적으로 취했다. 그리고는 또 등종(鄧宗)이란 자에게는 구강군(九江郡)을 공략시켰으며, 그리고 또 위(魏)에는 주시(周市)란 자를 파견시켰다.

 ※ 보충 설명

 1.
장이(張耳) ?-기원전 202년.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및 조왕(趙王)
 2.
진여(陳余) ?-205년.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 초기의 무장(武將)
 3. 조(趙)는 나라 이름이며 지명(地名)으로, 현재의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의 일부를 가리킴

 

<산서성>

<하북성>


4. 구강군(九江郡)=구강시(九江市)는 강서성(江西省) 북부에 위치하는 지급 시(地級市)이며
시의 구분은 장강(長江=揚子江) 연안(沿岸)의 중요 항만도시.


<구강시>

 5. 위(魏)

 해설1. 원래 중국고대도시국가의 하나로, 현재의 산서성 예성현(芮城縣-運城市에 속함)에 상당(相當)했다.   그 후, 전국시대에 영역(領域)국가로 발전했고, 중국이 통일된 후부터 점차 국명(國名)으로 되었다.

 해설2. 중국 전국시대 칠웅(七雄) 중 하나로, 기원전 403년에 진(晉)나라의 세족(世族) 위 씨가 한(韓)·조(趙) 양 씨와 함께 진나라의 영토를 삼분(三分)하여 세운 나라. 지금의 山西省 남서부에서 河南省 북부 일대를 영유했으며, 문후(文侯)가 주왕(周王)에 의하여 제후로 봉해짐으로써 성립되었고, 이괴(李悝) 등을 중용하여 부국강병에 힘썼으나, 기원전 225년에 진(秦)나라에 멸망하였다.


<운성 시 위치도>


 그런데 그때 진(陳)나라에는 주장(周章=周文)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러자 진승(陳勝)은 그가 군사(軍事)에 통달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 그에게 장인(將印-將帥의 표식)을 주어서 서진(西進)하여 진(秦)을 토벌케 했다. 그러자 주장(周章)은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징병(徵兵)을 하면서 진군을 해나갔고, 그리하여 마침 함곡관(函谷関)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병차(兵車) 1000승(乘)에다, 병졸(兵卒)까지 수십만이나 되는 대 군단이 되어서 거의 무혈입성으로 함곡관(函谷関)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어서 그곳을 방위하러 달려왔던 진(秦)의 장한(章邯) 軍에게 주장(周章)은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다.

 ※ 장한<章邯(Zhang Han) ?부터 기원전 205년에 자살(自殺)>은, 진(秦)의 장군이었으며, 남동생에 장평(章平)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9경(卿)의 말석(末席)인 소부(少府)를 맡고 있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209년 겨울에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해서
주장(周章)이 도성인 함양(咸陽) 부근까지 침범해 오자 시황제(始皇帝)의 능(陵)에서 일하고 있던 죄수(罪囚) 20만 명을 방면(放免-免罪), 그들과 함께 반란군에 맞서겠다는 안(案-)을 올리고는 스스로 그들을 인솔해서 반란군에 맞섰다. 그러자 전공(戰功)을 올리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말을 들은 죄수들은 결사(決死)의 군대가 되어서 주장(周章)이 이끌던 반란군을 단번에 격파했고, 그것으로 결국 주장(周章)까지 민지(澠地-하남성에 있는 현)에서 자결하도록 만들었다.(이하, 차후 또는 생략함)

 그러자 주장(周章)은 패주(敗走)한 후에도 조양(曹陽)에서 진(秦)을 방어하려 사력을 다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수개월 후에는 그곳도 함락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다른 곳으로 가서 진군(秦軍)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곳에서도 실패해서 결국 자살했다. 그러자 그 대패(大敗)로 인해서 초군(楚軍)은 점점 전의(戰意)를 상실해갔고, 그리고 그때부터 장초(張楚)도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앞서 조(趙)를 평정했던 무신(武臣)은 한단(邯鄲)에 입성하자 그 스스로 왕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진승(陳勝)은 그에 격노했지만, 그러나 그 조(趙)마저 적(敵)이 되어버린다면 치명적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분을 삼키며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또 조왕(趙王)이 된 무신(武臣)은 한광(韓廣)이란 자를 시켜서 연(燕)을 평정하게 했는데, 그런데 또 그 한광(韓廣)이 무신(武臣)을 모방해서 그 스스로 연왕(燕王)이 되어버렸으므로, 그러자 또 부득이 무신(武臣)도 그것을 인정했다.


 3.
오광(吳廣)과 진승(陳勝)의 최후(最後)

 그리고 또 그때, 오광(吳廣)은 형양(滎陽)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삼천군(三川郡)의 태수(太守)였던 이유(李由-李斯의 長子)에게 막혀서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문(周文-周章)이 진군(秦軍)에 패배했고, 이어서 진군(秦軍)이 그 여세를 몰아서 오광(吳廣)을 압박해 들어왔다. 그런데다 또 그 와중에 오광(吳廣)의 부하 중, 전장(田臧)이란 자를 중심으로 해서 음모까지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결과 오광(吳廣)은 그들의 손에 죽임 당했고, 이어서 전장(田臧) 등이 그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오광(吳廣)의 머리를 진승(陳勝)에게로 보냈는데, 그 이유는 오광이 너무 무능해서 군을 잘 통솔하지 못했다는 것과, 그래서 또 그의 능력으로는 진을 이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또 부득이 진승(陳勝)은 그것을 인정했고, 전장(田臧)을 영윤(令尹)으로 삼았다.

 
영윤(令尹)
 1. 중국 주대(周代) 초나라의 관직 이름. 정치를 하는 최고의 직위이다.
 2. 중국의 지방장관을 달리 이르던 말. 진(秦)나라·한(漢)나라 이래 현 지사(縣知事)를 현령(縣令)이라고 하고, 원대(元代)에는 현윤(縣尹)이라고 하였으므로, 영과 윤을 합쳐서 이른 것.
 3. 여기서는 재상(宰相)

 하지만 그랬던 전장(田臧)도 곧 장한(章邯)에게 져서 전사했다. 그러자 장한(章邯)의 파죽(破竹) 진격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반란군을 물리쳤던 장한(章邯)은 마침내 진승(陳勝)의 본거지였던 진(陳)으로 향했고, 그리고는 우선 장초(張楚)의 상주국(上柱國-괴뢰 국)이었던 채사(蔡賜=房君.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음)'를 토벌했다. 그리고는 또 서쪽에서 장하(張賀)와 교전했고, 그러자 진승(陳勝)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와서 장하(張賀)를 지원했지만 졌으며, 그곳에서 장하(張賀)는 전사했다.

 12월이 되자 마침내 진승(陳勝)이 도망을 갔다. 그리고는 
여음(汝陰)으로, 그 다음에는 하성부(下城父)까지 도주를 했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자신의 마부(馬夫)였던 장가(莊賈)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진(秦)과의 전쟁은 초(楚)의 항량(項梁)으로 이어졌으며, 이어서 유방(劉邦)이 무관(武關)을 파(破)하자 앞서 기술했던 대로 자영(子嬰)이 항복을 했고, 그것으로 진(秦) 제국(帝國-子嬰이 항복했을 때는 王國)은 결국 멸망했다. 그리고 그때가 기원전 206년이었다.

 하지만 전란은 그것으로 종식되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대로 한(漢)의 유방(劉邦)과 초(楚)의 항우(項羽)가 맞서 싸우게 되는 초한전(楚漢戰)으로 이어져갔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죽은 진승(陳勝)은 양(陽)이란 곳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호(諡號)는 은왕(隱王)이며, 후에 유방(劉邦)은 그를 존경해서 그의 묘지 주변에다 민가(民家)를 두고는 대대로 그 묘를 지키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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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10년 /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5. 만년(晩年)

 시황제는 중국 통일 무렵부터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요구해서
 측근에 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으로 흔히 道士를 이름)들을 중용했다.
 


<미국 오하이오 주(Ohio州) 클리블랜드(Cleveland)에 있는 不老不死의 噴水>


 그리고 앞의 후생(侯生)과 노생(盧生) 또한 도사 출신이었지만
 그러나 특히 서복(徐福)의 업적은 유명했다.


 ※ 서복(徐福=?-?)은 중국 진(秦)나라 시대(기원전 3세기 경)의 방사(方士)로, 제(齊)의 랑사(琅邪) 출신이었고, 별명은 서시(徐巿)였으며, 자식으로 복영(福永)과 복만(福万) 그리고 서선(徐仙)과 복수(福壽)가 있었다고 한다.



<서복 상>


 그리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권(卷) 118, 회남충산열전(淮南衝山列傳)에 의하면, 그는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에게 <동방(東方)의 삼신산(三神山)에 가면 장생불로(長生不老=不老不死)의 영약(靈藥)이 있다>고 진언했고, 그러자 시황제는 그에게 <그곳으로 가서 그것을 구해올 것>을 명했다. 그러자 또 그는 3,000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들과 백공(百工-많은 기술자들)들 그리고 또 오곡(五穀)의 종자(種子)들을 가지고서 동방(東方)으로 출범(出帆)했는데, 그 후에 평원광택<平原廣澤-넓은 평야와 습지의 의미로, 즉 살기 좋은 넓은 땅을 의미함>을 만나자 그곳에서 왕이 되어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또 같은 사기(史記)의 진시황제본기(秦始皇帝本紀)에 등장하는 서씨(徐氏)는, 시황제(始皇帝)에게 불사(不死)의 약을 헌상하겠다고 하고는 원조(援助)를 얻어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시황제(始皇帝)가 순행(巡行)을 하자 그는 약을 구하러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시황제(始皇帝)가 재차 출범을 명했는데, 그러나 그 귀로에서 시황제가 사거(死去)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또 그 서 씨(徐氏)는 <불사의 약을 핑계로 시황제로부터 금품을 갈취했던 사기꾼>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현재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서복(徐福)은 대부분이 회남충산열전(淮南衝山列傳)'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가 출발했던 출항지(出航地)에 관해서는 현재의 산동성(山東省)에서부터 절강성(浙江省)까지 제설(諸說)이 있지만, 그러나 절강성(浙江省)의 영파시(寧波市)나 자계시(慈溪市)가 유력(有力)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그 도중에 한국의 제주도(濟州道) 서귀포(西歸浦)나 한반도(韓半島)의 서해안(西海岸)에도 잠시 들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 2번째의 순행 때 정(政)은 제(齊)에 체재(滯在=滯留)하면서 서복(徐福)에게 동방(東方)에 있다고 전해오던 봉래국(蓬萊國)으로 가서 선인(仙人=神仙)을 데려오도록 명했다. 그런데 그때의 그 봉래국(蓬萊國)은 일본(日本)을 가리켰던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또 현재 일본의 각지에서는 그가 <최후를 마친 땅>이란 곳이 여러 곳이 있다고 한다.(徐福傳說-일본의 입장).

 아무튼, 그러자 '서복(徐福)'을 비롯해서 도사(道士)들은 그 불로불사(不老不死)에 대해서 회의적(懷疑的)이었던가 보지만, 그런데 그 와중에 어떤 한 도사(道士)에 의해서 국고의 금전이 사취(詐取)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정(政)은 그 후에 도사(道士)들 외에도 내시(內侍)였던 조고(趙高)를 중용했고, 그 스스로는 또 함양(咸陽) 주변에 수백(數百)이나 되었던 궁전들을 복도(復道는 도로 위에다 걸친 도로이며, 가교나 일종의 구름다리)나 용도(甬道는 도로 양측에 벽이 있어서 밖에서는 그 안을 통행하는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도로)로 연결해서 그곳으로만 왕래했으며,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조정(朝政)으로 나가는 것도 삼가고는 조고(趙高) 등을 통해서만 조정(朝政)과 연결을 취해갔다. 그래서 또 그때부터 조고(趙高) 등이 조정(朝政)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몽념(蒙恬)에 의한 '흉노원정'도 그 시기에 어느 도사가 지참했던 예언서에 <진(秦)을 멸하는 것은 호(胡는 중국의 북방 및 북서쪽의 이민족. 오랑캐)가 될 것이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던 것에 연유했다고 한다.<그러나 나중에 그 호(胡)는 이민족의 호(胡)가 아니고 2세(世) 황제 호해(胡亥)의 호(胡)에 관한 일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무렵에 시황제는 도사(道士)들이 주었던 영약(靈藥) 때문에 몸을 망치게 되었다.<그 영약은 수은(水銀)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자 그는 기원전 210년, 5번째의 순행에서는 스스로 바다로 나가서 대어(大魚)를 잡는 등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바로 직후에 발병(發病)해서 함양(咸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순행 도중에 붕어(崩御)했다. 그러자 또 그의 죽음은 조고(趙高) 등에 의해서 비밀에 붙여졌고, 조고(趙高)는 또 그 시체의 부패 향을 숨기기 위해서 건어물을 가득 실은 차(車)까지 대동시켜가며 그를 함양(咸陽)까지 이송했다.

 그런데 그때, 정(政)은 자신의 후계자로 장자(長子)였던 부소(扶蘇)를 지목했는데, 그러나 그 부소(扶蘇)가 즉위하게 되면 자신들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조고(趙高)는 그래서 이사(李斯)와 결탁해서 <호해(胡亥)를 후계자로 한다>는 것으로 유조(遺詔-왕의 유언)를 날조했다. 그리고 시황제 정(政)이 죽은 바로 그 다음해에 <진승(陳勝) · 오광(吳廣)의 난-후술>이 발생했고, 그로써 진(秦)도 곧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

 호해(胡亥)는 진조(秦朝) 제2대 황제로, 제호(帝號)는 2세 황제. 성(姓)은 영(嬴). 시황제의 막내였으며, 맏형에 부소(扶蘇)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황제(始皇帝)' 사후(死後)에 즉위했으며, 그에는 많은 의문이 있었다. <호해(胡亥)는 이미 즉위 전부터 조고(趙高)의 권유로 부소(扶蘇)를 자살로 몰아넣었으며, 공자(公子) 고(高-?-기원전 209-구체적인 것은 不明이며, 姓은 嬴, 史記의 李斯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하 생략) 등, 형제들을 포함한 황족이나 중신들을 숙청했다는 것, 등> 그리고 '시황제(始皇帝)'의 능(陵)이나 '아방궁(阿房宮)' 그리고 '만리장성'의 건축을 추진했으며, '흉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대규모 징병을 행한 것으로 인심의 배반을 불렀다. 그리고 그 후, 기원전 209년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이 발생하자 거의 반년(半年) 만에 진압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그는 한층 더 토목사업이나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을 추구했으며, 그로써 또 인심은 더욱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아방궁(阿房宮)은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기원전 212년에 세웠다는 대궁전(大宮殿)이다. 유적은 협서성(陜西省) 서안시(西安市) 서방(西方) 13km의 아방촌(阿房村)에 있다고 하며, 시황제(始皇帝) 사후(死後)에도 공사가 계속 되었지만, 진(秦)이 멸망함으로 해서 미완(未完)인 채로 남겨졌다. 그리고 원래는 명칭이 없었던 것을 후세인들이 그 지명(地名)을 따서 아방궁(阿房宮)으로 지었다고 한다.


<清代中期의 画家 원요(袁耀)가 그렸다는「擬阿房宮圖軸」-일종의 상상도>


 그러자 이사(李斯)가 나서서 간언을 했지만, 그러나 이사(李斯)는 오히려 조고(趙高)의 중상모략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그런데 또 그 즈음부터 초(楚)의 항량(項梁-?~기원전 208년. 항우의 숙부)을 중심으로 했던 반진(反秦)세력이 강대 화되었다. 그러나 그때 호해(胡亥)는 조고(趙高)의 조작된 보고를 받으면서 후궁들에 둘러싸여 정무(政務)를 등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바로 그 시기에 조고(趙高)가 일부러 사슴을 가리키며 말(馬)이라고 했다는 <마록고사(馬鹿故事) 사건>이 있었다.

 ★ 마록고사(馬鹿故事)란 말은 필자가 임의로 쓴 것이며, 정확하게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이다. 그리고 그 뜻은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뜻으로, 옛날 중국의 진(秦)나라 때 조고(趙高)가 자신의 권세를 시험해보고자 당시 황제였던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일본에서는 그 단어를 '바보'란 뜻인 <마록(馬鹿-바카)>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무튼, 기원전 207년이 되자 '진군(秦軍)'은 각지에서 반란군에 패퇴했고, 유방(劉邦)이 이끌던 반란군도 이미 수도였던 함양(咸陽) 근교까지 진군해왔다. 그러자 그때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호해(胡亥)는 조고(趙高)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그러자 또 숙청을 무서워했던 조고(趙高)는 자신의 일족(一族)을 인솔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결과 호해(胡亥)는 그들에 붙잡혀서 24세에 자살 당했다.

 자영(子嬰)은 중국 진(秦)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호해(胡亥)'의 형(兄)의 아이(子)>라고 되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당시, 시황제(始皇帝) 사거(死去) 후에 진(秦)에서는 반란이 전 국토로 퍼졌고, 그러자 진(秦) 조정(朝政)으로서는 손도 대지 못하는 가운데 조고(趙高) 등의 쿠데타에 의해서 2세 황제(胡亥)가 자살했다. 그러자 그 다음으로 자영(子嬰)이 즉위했는데,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진(秦)으로서는 천하의 주도권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영(子嬰)은 황제가 아닌 진왕(秦王)이 되었다. 그런데다 바로 그 직전에 <조고(趙高)가 그때 이미 함양(咸陽) 근교까지 침공해 와있던 유방(劉邦)과 내통해서 자영(子嬰)의 목을 갖다 바치고는 관중(關中)의 왕이 되려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그에 위협을 느꼈던 자영(子嬰)은 그들을 숙청하기로 결정하고는 즉위식이 있던 당일 갑자기 병이 났다는 핑계로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조고(趙高)는 거듭 재촉을 구했지만 자영(子嬰)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그러자 또 그에 화가 치밀있던 조고(趙高)는 자영(子嬰)을 즉위식에 참석케 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영(子嬰)의 처소로 찾아갔다. 그러자 그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자영(子嬰)의 자식 내지 심복들에 의해서 조고(趙高)는 척살되었고, 이어서 그 일족들도 전부 처형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는 이미 유방(劉邦)이 이끌던 반란군이 함양(咸陽) 근교까지 진격해 와있었으므로, 그래서 진(秦)은 멸망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자영(子嬰)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백마(白馬)와 백차(白車) 소복(素服)을 준비해서 마치 장례식을 하는 것처럼 해서는, 거기다 자신의 목에 밧줄까지 걸고서 지참한 옥새(玉璽)와 함께 유방(劉邦)에게 투항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들 일족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이어서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에 입성(入城)하자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관중(關中)은 중국 협서성(陜西省) 위수분지(渭水盆地=渭河平原)의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했던 일대(一帶)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함곡관(函谷関)의 서쪽지역이며, 춘추전국시대 진(秦)의 영지였다. 그 후 전한(前漢)과 당(唐)도 그 지역에 수도(首都)를 두었다.



<협서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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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 토목사업(大土木事業)

 시황제(始皇帝)는 원정(遠征)과 함께 <대 토목사업>도 많이 실시해서 그로 인해 민중들은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것은 후에 그가 폭군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그러나 또한 만리장성 같은 필요성이 아주 높은 사업들도 그는 많이 실시했다. 그리고 또 한대(漢代)가 되면 흉노(匈奴)에서 목돌선우(冒頓單于-앞에서 설명되었음)란 자가 등장해서 한(漢)을 괴롭히게 되는데, 그런 것으로 보아서는 또 정(政)이 미리 만리장성을 쌓고, 또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그 흉노를 치게 했던 것은 일종의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韓)나라 출신의 정국(鄭國)이 진(秦)을 피폐(疲弊) 시키고자 대규모의 관개(灌漑)사업을 실시했는데, 그러나 그의 그런 의도는 곧 발각되었다. 하지만 그때 정(政)은 그의 기술을 아껴서 그 사업을 계속하게 했고, 이어서 성공까지 보았다. 그리하여 당시 황야나 다름없었던 토지를 옥토로 바꿔 놓았으며, 그것은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정국(鄭國-生沒不明)은 중국 전국시대 한(韓)나라 사람(정치가였다고도 함)으로, 전국시대 말기(末期) 진(秦)의 세력이 최대로 강대했을 때 태어났다. 그 후, 그는 토목(土木) 기술자(관리자로 생각됨)로 성장했고, 이어서 진(秦)에 대규모의 구거사업(溝渠事業-하천정비공사 등)을 실행시켜서 진을 피폐(疲弊) 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진(秦)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의도는 발각되어서 위기에 처했지만, 하지만 그는 <이곳의 토지가 척박한 관계로 농사가 잘 되지 않는데, 그래서 그 사업을 완성해야 만이 농업을 발전시킬 수가 있고, 그리면 얼마지 않아 큰 성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사업은 거의 만리장성 축조에 가까운 대규모의 사업이었던 것으로,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몇 십 년이나 걸려서야 그 사업을 완성했다. 그러자 그 구거(溝渠)는 <정국거(鄭國渠)>라고 불렸으며, 그 간선수로(幹線水路)의 연장(延長)은 150km, 관개면적(灌漑面積)은 67,000헥타르(ha=hectare-미터법에 의한 넓이의 단위이며, 1헥타르는 1아르의 100배로 1만㎡)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고대 중국의 3대(大) 수리시설(水利施設) 중 하나로 불렸고, 현재 협서성(陜西省) 경혜구관개구(涇惠渠灌漑區)로 이어졌다.

 
하지만 함양(咸陽)의 '대(大) 확장공사'라거나 , 미녀(美女)들을 3천명이나 모아 두었다는 아방궁(阿房宮)의 건축, 그리고 또 1974년에 발견된 병마용(兵馬俑)을 비롯한 대규모의 본인(本人) 능(陵)의 축조 등은 큰 재정적 부담이 되었고, 그리고 또 그 공사에 민중들을 강제적으로 징용한 것으로부터 결국에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까지 발생하게 했다. 그러므로 바로 그 대 토목공사들을 행했던 것이 결국 그 진(秦)을 붕괴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병마용>


<진시황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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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10년 /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4. 황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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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소개>

 ※ 장양
(또는 장량 張良-?부터 기원전 186년) 1



 그는 중국 한나라의 건국공신으로, 자(字)는 자방(子房), 한나라의 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통일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소하(蕭何) · 한신(韓信)과 함께 한나라 창업의 삼걸(三傑)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진(秦) 말기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였고, 모장(謀將)이었다. 시(諡)는 문성(文成). 그리고 또 그는 유방(劉邦)의 군사(軍師)로서 많은 작전을 입안(立案)했으며, 유방(劉邦)의 패업(霸業)을 크게 도왔다. 그리하여 유방(劉邦)으로부터 류<또는 유 : 留 - 강소성(江蘇省) 서주시(徐州市-舊 彭城) 패현(沛縣)의 東南>를 영지(領地)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유후(留侯)라고도 불렸다. 자식으로는 사자(嗣子-상속자, 대을 잇는 자식) 장불의(張不疑)와 소자(少子) 장벽강(張辟彊)이 있었다.


<강소성>

<서주시>

'패현'은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유방'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유'는 '패현'의 동남에 위치(정확한 자료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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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生涯)>

 1. 시황제(始皇帝) 암살

 그의 조부(祖父) 장개지(張開地)는 한(韓)의 소후(昭侯)와 선혜왕(宣惠王) 그리고 양왕(襄王)'의 재상(宰相)을 맡았던 사람이었고, 부(父) 장평(張平)은 리왕(釐王)과 환혜왕(桓惠王)의 재상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史記索隠>에 의하면 <그의 선조들은 한(韓)의 공족(公族)이었고, 주(周) 왕실과 같은 희 성(姬姓)이었지만, 그러나 진(秦)에 의한 적(賊)의 탐색이 실시되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장(張) 씨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부(父) 장평(張平)이 죽은 후 20년이 지났을 때 진(秦)이 한(韓)을 멸했다(
기원전 230년). 하지만 그때까지도 장양은 관(官職)에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그러나 남자 나이 20세정도면 성인(成人)으로, 그가 부(父) 장평(張平)이 죽기 바로 직전에 태어났던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때는 그도 관직에 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그가 그때까지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고 했던 것은, 아마도 한(韓)이 멸망했을 당시, 그 분위기와 함께 그의 나이는 대충 20대 전()반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측해 볼 수 있다.<그러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는 장양이 항백(項伯)보다 연하(年下)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 항백(項伯-?부터 기원전192년)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였고, 무장(武將)이었으며, 子는 항수(項睢=劉睢), 항우의 숙부였고, 항연(項燕)의 子였으며, 항양(項梁)의 형제였지만, 보다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

 아무튼 한(韓)이 진(秦)에 멸해지자, 그에 장양(張良)은 복수를 맹세했으며,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졌던 전 재산을 처분해서 그것을 자금으로 사용했다는데, 그것은 또 그 당시 자신의 남동생이 사망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그 비용이 아까워서 장례도 치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장량(張良)은 자신과 뜻을 같이할 동지(同志)를 찾기 위해서 동쪽으로 여행하던 중 창해군(倉海君)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대단한 역사(力士)를 구해서는 기원전 218년경에 순행(巡行)을 하던 시황제(始皇帝)를 암살하기 위해서 박랑사(博浪沙)에서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이어서 장양은 도망쳤다. 그러자 정(政)은 그에 격노하고는 전국에 장양을 잡으라는 포고를 내렸다. 그러자 또 장양은 가명을 사용하면서 하비(下邳-江蘇省 徐州市=앞에서 설명되었음. 그리고 邳는 丕로도 쓸 수 있음)로 숨어들었다.

 2.
하비(下邳) 시대의 일화(逸話)

 어느 날 장양(張良)이 다리를 건너가는데, 어느 거지 노인이 자신의 신발을 벗어서 다리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는 장양(張良)에게 <젊은이, 저 신발을 건져 오게!>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장양(張良)은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상대가 나이든 노인이라 그는 말없이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또 이번에는 자신의 다리를 쑥 내밀더니 <신겨라!>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장양은 기분이 더욱 나빴지만, 그러나 '이왕에 하는 것!' 하듯이 꾹 참으면서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또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아주 좋아하면서 대소(大笑)하더니 그에게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으니 5일 후 아침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러자 장량(張良)은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그 5일 후의 아침에 그곳으로 나가보니 그 노인은 이미 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또 그 노인은 <어른과의 약속인데 젊은이가 늦다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말을 하고는 <5일 후에 다시 와라!>라는 말을 남기고는 떠나버렸다. 그러자 또 장양(張良)은 이번에는 아주 전날 저녁때부터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또 얼마 후에 그 노인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매우 흡족한지 웃으면서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아, 이번에는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군! 그런 겸허함이야말로 (사람이 지녀야할) 정말로 소중한 것이야!> 그리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태공망(太公望-강태공)의 병법서(兵法書)를 그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것을 독파(讀破-通達)하면 왕(王)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지금으로부터 13년 후에 어느 산기슭에서 황색(黃色)의 돌(石)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일 것이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그 노인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13년 후 장양(張良)은 그 황색의 돌을 어느 산기슭에서 찾았고, 그래서 또 그것을 가보(家寶)로 삼았는데, 그의 사후(死後)에는 무덤에까지 넣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물론, 그 황석공(黃石公)의 일화는 당연히 전설로 보아야할 것이겠지만, 그러나 또 그 일화를 통해서 그가 어느 누군가에게서 병법을 배웠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며, 그리고 또 그 '황석공'이 주었다는 그 '태공망(太公望)'의 병법서는 <육도(六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하지만 현존하는 그 <육도(六韜)>의 성립 연도는 위진대(魏晋代)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적어도 그때 장양(張良)이 읽었을 그 병법서는 <육도(六韜)>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또 그 하비(下邳)에서 장양(張良)이 도피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항우(項羽)의 숙부였던 항백(項伯)이 사람을 죽이고 그곳으로 도망쳐 온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장양(張良)이 그를 숨겨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이하, 유방과의 이야기는 그때 가서 다시 소개하거나, 아니면 생략함)

 ※ 육도(六韜)=중국 주(周)나라 태공망이 지은 병법서(兵法書). 무경칠서의 하나로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견도(犬韜), 표도(豹韜)의 6장으로 되어 있다. 6권 60편


<黃石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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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10년 /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3. 통일(統一)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칠국(七國)의 군주 모두가 스스로 왕을 자칭(自稱)하고 있었다.<다만, 한때는 진왕(秦王)이 서제(西帝)로, 제왕(齊王)이 동제(東帝)로 칭해졌던 때는 있었다> 하지만 통일 후, 그런 칭호가 적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정(政)은 가신들에게 새로운 칭호의 고안을 명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옛날 전설상의 삼황(三皇)이었던 천황(天皇)과 지황(地皇), 태황(泰皇) 중에서 제일로 존경을 받았던 태황(泰皇)을 상주(上奏)하였으나, 정(政)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고, 태황의 황(皇)과 태고(太古)의 제(帝) 호(號)를 혼합해서 황제(皇帝)라고 칭할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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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에 있어서 신화전설시대의 제왕들을 말하는 것이며, 현재는 실제의 인물로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삼황(三皇)은 신(神)으로, 오제(五帝)는 성인(聖人)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며, 전설(傳說)에서는 최초의 세습왕조였던 하(夏) 이전(以前)의 시대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아래는 다만 참고일 뿐이므로, 한글표기는 가능한 생략합니다. 그리고 또한 더욱 상세한 것은 앞의 <참고>를 참조바랍니다. 

 <三皇>

 三皇에 관해서는 諸說이 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아래와 같은 5說이 잘 알려져 있다.

 1. 天皇 · 地皇 · 泰皇(人皇) - 前漢의 司馬遷이 쓴 史記의 秦始皇本紀에 의하면, 皇帝라고 칭하게 된 배경에는 옛날 중국 전설상의 三皇이 擧名되었으며, 그에 정(政-秦始皇)은 그 중에서 皇과 帝를 取해서 皇帝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만, 이 부분에서 司馬遷은 반드시 ‘三皇’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후에 司馬貞이 썼던 '史記索隱'에서는 <泰皇=人皇>으로 되어 있고, 그리하여 天皇 · 地皇 · 人皇을 三皇으로 하고 있으며, 그 前에 泰皇이 있었다는 등으로 썼다. 그리고 또 그가 보충했던 史記의 三皇本紀(補三皇本紀 또는 補史記라고도 한다)에서는 三皇을 伏羲, 女, 神農이라고 해놓고 또한 天皇 · 地皇 · 人皇이라고도 倂記해두었다.

 2. 伏羲 · 女 · 神農 - 춘추위운두추(春秋緯運斗樞)의 풍속통(風俗通) 황패편(黃覇篇)에 의함. 唐의 司馬貞 補 史記 三皇本紀도 그것을 承繼했다.

 3. 수인(燧人) · 伏羲 · 神農 - 예위함문가(禮緯含文嘉)의 風俗通 黃覇篇에 의함.

 4. 伏羲・神農・축융(祝融-불을 다스리는 신) - 後漢・班固의 白虎通 號篇

 5. 伏羲・神農・黄帝 - 西晋・황보밀(皇甫謐)의 帝王世紀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天皇 · 地皇 · 人皇이라고 하는 天地人 三才에 유래하는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인류에게 문명을 가져다주는 문화영웅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前漢 末부터 융성했던 신비주의적인 참위사상(讖緯思想-고대 중국에서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인간 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했던 학설)에 의해서 半獸半神의 모습을 한 神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또한 伏羲와 神農에 관해서는 일찍이 周易의 계사하전(繫辭下傳)에서 괘(卦-점괘)를 사용해서 文明을 가져다준 聖人으로서, 黃帝 · 堯 · 舜 앞에 존재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을 三皇에 넣어서 역사적인 帝王으로서 五帝 앞에 固定시켰던 것은 魏, 晋 이후의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五帝>

 그리고 五帝를 누구로 정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래 표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의 내용을 보아서는 많은 矛盾이 있다. 그리고 일단, 그들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은 司馬遷이었지만(史記의 五帝本紀), 그래서 그는 <黃帝傳說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民俗風土가 공통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고, 또한 그 속에 사실도 조금은 섞여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기록하는데서
가치를 찾아내려는 것이다>라고 부연을 해놓았다.




大載禮記, 史記


戰國策, 易經


禮記, 淮南子


世經


三統經

資治通鑑外記


伏羲




1










神農




2










太昊






1








炎帝






2








黃帝


1


3


3






1


少昊






4


1




2


顓頊


2




5


2




3




3






3


1


4




4


4




4


2


5




5


5




5


3














4














5



  

 <備考> 그 후, 중국의 지배자들은 모두 황제를 자칭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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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그와 동시에 왕명(王命)을 제(制)로, 왕령(王令)을 조(詔)로, 천자(天子)의 자칭(自稱)으로서는 짐(朕-나중에 眞人으로 고쳤다. 그러나 政 死後에는 다시 朕을 사용했다)을 사용할 것을 정했다. 그리고 또 시호(諡號)제도는 자식이나 신하들이 선군(先君)을 비평할 수 있다고 해서 불경(不敬)하다는 이유로 폐지했고, 이후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하면서, 그 다음으로 이세(二世)황제, 삼세(三世)황제... 만세(萬世)황제로 칭할 것도 정했다. 그리고 또 그 광대한 영토의 통치에 대해서는 <정(政)의 자식들을 지방으로 파견해서 봉건(封建)으로 통치하는 방법>을 신하들이 제안했으나, 하지만 이사(李斯)가 주(周)의 예를 들면서 군현제(郡縣制)를 주장해서 채택되었다. 정(政)은 그 후 전국(全國)을 36군(郡-나중에는 48군)으로 분할했고, 그 각각에 수(守-행정담당) · 위(尉-군사담당) · 감(監-감찰담당)을 설치했으며, 군(郡)의 하부에는 현(縣)을 설치해서 통치했다. 그리고 또 정(亭)이라는 일종의 파출소(派出所)를 제도화 해서, 가도(街道) 10리(里)마다 설치하고는 인부징병이나 치안유지 또는 관리용 숙박시설로 활용했다. 그리고 또한 도성(都城)인 함양(咸陽)에는 전국의 부호(富豪) 12만호를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거기에다 이미 멸망한 육국(六國)의 왕궁을 본뜬 건물도 세웠다. 그 다음, 정(政)은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지해서 몰수했고, 중국통일의 상징으로 거대한 상(像)도 만들었다. 그리고 또한 도량형(度量衡 : 度=길이, 量=체적, 衡=무게의 단위)과 화폐, 차(車)의 폭을 통일('軌를 하나로 한다’의 故事)했다. 그리고 또 한자(漢字)는 그때까지 지방마다 사용하는 것이 다 달랐지만, 그러나 그것까지도 고쳐서 진체(秦體)를 표준자체(標準字體)로 채용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후세(後世)에까지 통일왕조의 모범이 되는 정밀하고도 합리적인 지배체제를 가지는 중앙집권국가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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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斯

 중국 진나라의 정치가(?~B.C.208). 법가사상을 이용하여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시황제의 승상(丞相)으로서 군현제의 실시,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 분서(焚書) 등을 행하는 등, 통일 제국의 확립에 공헌했다. 그러나 시황제가 죽은 뒤, 이세(二世) 황제를 옹립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조고(趙高)의 참소로 실각하여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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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황제로서
 

<만리장성>
사진의 벽돌 장성은 明代의 것이며
시황제 시대의 것은 版築土壘로 되어 있었다
또 위치도 명대보다 북방에 있었다.


<장성의 모습= 赤色=明代>

 기원전 214년, 북방 '흉노(匈奴)'의 진입을 막기 위해서 '만리(의)장성'을 복구(復舊)했고, 장군 '몽염(蒙恬)'에게 명(命)해서 30만의 군세(軍勢)로 '흉노'를 토벌시켰으며, 그 여세를 몰아서 '오르도스 지방((앞에서 설명되었음)'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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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匈奴)는  중국의 이민족인 오호(五胡) 가운데 진(秦)나라와·한(漢)나라 때에 몽골고원에서 활약하던 기마민족으로, 기원전 3세기 말에 묵돌선우(冒頓單于=Maodun Chanyu)가 모든 부족을 통일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건설하고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였으나, 한(漢)나라 무제의 잦은 침공으로 쇠약해져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冒頓單于 때의 영토>

<冒頓單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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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죄인을 군사로 징병해서 남쪽의 영남(嶺南-베트남 북부)을 정복하고 군(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또 그때에 양자강의 지류 상강<湘江-湘은 강 이름, 광서성(廣西省) 흥안현(興安縣)에서 동정호에 흘러드는 강>과 광동(廣東)지방의 서강(西江)으로 흘러드는 '이강(漓江)'을 묶는 운하령거(運河靈渠-全長 33.1 ㎞)를 쌓아올렸다.
 

<상강 위치도>

<漓江>

 기원전 213년 '이사(李斯)'의 진언으로 '주조(周朝)'의 재흥(再興)을 바라서 '진조(秦朝)'를 비판하던 유생(儒生)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학서(醫學書)와 농서(農書) 등 실용(實用)서를 제외한 서적의 소각처분을 실시했다.(焚書)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에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靈藥)을 만들기를 명받았던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고는 자신들이 받을 罰이 무서워서 도망을 가버리자, 그에 화가 난 정(政)은 '함양(咸陽)'에 있던 학자(學者)들을 구속하고는 460명을 구덩이에 묻어버렸다.(坑儒).


<함양 시>

 그러자 장자(長子) '부소(扶蘇)'가 그러한 시정(施政)에 대해서 간(諫)했지만, 그러나 '정(政)'은 오히려 화를 내고는 그를 '몽념(蒙恬)' 휘하로 보내서 북방방위를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또 '정(政)'은 5회에 이르는 대규모 순행(巡行)을 실시하면서 전국의 교통망정비(古代道路)를 추진시켰고, 그와 더불어서 중국 국내의 장성(長城)도 파괴했다.

 그런데 그때 '항우(項羽)'와 '유방(劉邦)'도 그런 '정(政)'의 순행(巡行)을 지켜보다가 '항우(項羽)'가 <내가 곧 저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筆者 譯>라고 말을 했다고 하고, 그에 또 '유방(劉邦)'은 <남자로 태어난 이상, 그런 것은 당연한 것이다(희망사항이다)-筆者 譯>라고 말을 했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또 기원전 219년, 2번째의 순행에서는 '태산(泰山)'에서의 '봉선의식<封禪儀式-제왕(帝王)이 하늘과 땅에 자신의 즉위를 알리고, 천하가 태평한데 감사를 드리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러자 그때 그 의식의 상세(詳細)에 대한 고례(古例)를 유가(儒家)에게 물었지만, 고대의 의식이었기 때문에 유가의 답변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 '정(政)'은 자신 마음대로 의식을 실시했고, 그리고는 기념으로 그곳에다 '태산각석(泰山刻石)'을 설치했다.


<태산-세계유산 위치도>

<泰山 南天門>


 
그리고 또 기원전 218년의 3번째 순행에서는 '박랑사(博浪沙)'를 통과했을 때, 큰 철추<鐵鎚=철퇴(鐵槌)>가 '정(政)'이 타고 가던 차(車)를 노리고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차에 떨어졌고, 그에 '정(政)'은 목숨을 건졌다. 그러자 '정(政)'은 그 범인을 잡을 것을 명했지만, 하지만 주범이었던 '장량(또는 장양-張良)'은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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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랑사(博浪沙)는, 중국 허난 성(河南省) 우양현(武陽縣)의 고적으로, 진(秦)나라 무양 성의 남쪽에 있으며, 장량(張良-후술)이 역사(力士)들로 하여금 철퇴로 진나라 시황제를 저격하게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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