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10년 /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5. 만년(晩年)

 시황제는 중국 통일 무렵부터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요구해서
 측근에 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으로 흔히 道士를 이름)들을 중용했다.
 


<미국 오하이오 주(Ohio州) 클리블랜드(Cleveland)에 있는 不老不死의 噴水>


 그리고 앞의 후생(侯生)과 노생(盧生) 또한 도사 출신이었지만
 그러나 특히 서복(徐福)의 업적은 유명했다.


 ※ 서복(徐福=?-?)은 중국 진(秦)나라 시대(기원전 3세기 경)의 방사(方士)로, 제(齊)의 랑사(琅邪) 출신이었고, 별명은 서시(徐巿)였으며, 자식으로 복영(福永)과 복만(福万) 그리고 서선(徐仙)과 복수(福壽)가 있었다고 한다.



<서복 상>


 그리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권(卷) 118, 회남충산열전(淮南衝山列傳)에 의하면, 그는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에게 <동방(東方)의 삼신산(三神山)에 가면 장생불로(長生不老=不老不死)의 영약(靈藥)이 있다>고 진언했고, 그러자 시황제는 그에게 <그곳으로 가서 그것을 구해올 것>을 명했다. 그러자 또 그는 3,000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들과 백공(百工-많은 기술자들)들 그리고 또 오곡(五穀)의 종자(種子)들을 가지고서 동방(東方)으로 출범(出帆)했는데, 그 후에 평원광택<平原廣澤-넓은 평야와 습지의 의미로, 즉 살기 좋은 넓은 땅을 의미함>을 만나자 그곳에서 왕이 되어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또 같은 사기(史記)의 진시황제본기(秦始皇帝本紀)에 등장하는 서씨(徐氏)는, 시황제(始皇帝)에게 불사(不死)의 약을 헌상하겠다고 하고는 원조(援助)를 얻어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시황제(始皇帝)가 순행(巡行)을 하자 그는 약을 구하러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시황제(始皇帝)가 재차 출범을 명했는데, 그러나 그 귀로에서 시황제가 사거(死去)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또 그 서 씨(徐氏)는 <불사의 약을 핑계로 시황제로부터 금품을 갈취했던 사기꾼>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현재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서복(徐福)은 대부분이 회남충산열전(淮南衝山列傳)'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가 출발했던 출항지(出航地)에 관해서는 현재의 산동성(山東省)에서부터 절강성(浙江省)까지 제설(諸說)이 있지만, 그러나 절강성(浙江省)의 영파시(寧波市)나 자계시(慈溪市)가 유력(有力)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그 도중에 한국의 제주도(濟州道) 서귀포(西歸浦)나 한반도(韓半島)의 서해안(西海岸)에도 잠시 들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 2번째의 순행 때 정(政)은 제(齊)에 체재(滯在=滯留)하면서 서복(徐福)에게 동방(東方)에 있다고 전해오던 봉래국(蓬萊國)으로 가서 선인(仙人=神仙)을 데려오도록 명했다. 그런데 그때의 그 봉래국(蓬萊國)은 일본(日本)을 가리켰던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또 현재 일본의 각지에서는 그가 <최후를 마친 땅>이란 곳이 여러 곳이 있다고 한다.(徐福傳說-일본의 입장).

 아무튼, 그러자 '서복(徐福)'을 비롯해서 도사(道士)들은 그 불로불사(不老不死)에 대해서 회의적(懷疑的)이었던가 보지만, 그런데 그 와중에 어떤 한 도사(道士)에 의해서 국고의 금전이 사취(詐取)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정(政)은 그 후에 도사(道士)들 외에도 내시(內侍)였던 조고(趙高)를 중용했고, 그 스스로는 또 함양(咸陽) 주변에 수백(數百)이나 되었던 궁전들을 복도(復道는 도로 위에다 걸친 도로이며, 가교나 일종의 구름다리)나 용도(甬道는 도로 양측에 벽이 있어서 밖에서는 그 안을 통행하는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도로)로 연결해서 그곳으로만 왕래했으며,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조정(朝政)으로 나가는 것도 삼가고는 조고(趙高) 등을 통해서만 조정(朝政)과 연결을 취해갔다. 그래서 또 그때부터 조고(趙高) 등이 조정(朝政)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몽념(蒙恬)에 의한 '흉노원정'도 그 시기에 어느 도사가 지참했던 예언서에 <진(秦)을 멸하는 것은 호(胡는 중국의 북방 및 북서쪽의 이민족. 오랑캐)가 될 것이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던 것에 연유했다고 한다.<그러나 나중에 그 호(胡)는 이민족의 호(胡)가 아니고 2세(世) 황제 호해(胡亥)의 호(胡)에 관한 일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무렵에 시황제는 도사(道士)들이 주었던 영약(靈藥) 때문에 몸을 망치게 되었다.<그 영약은 수은(水銀)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자 그는 기원전 210년, 5번째의 순행에서는 스스로 바다로 나가서 대어(大魚)를 잡는 등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바로 직후에 발병(發病)해서 함양(咸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순행 도중에 붕어(崩御)했다. 그러자 또 그의 죽음은 조고(趙高) 등에 의해서 비밀에 붙여졌고, 조고(趙高)는 또 그 시체의 부패 향을 숨기기 위해서 건어물을 가득 실은 차(車)까지 대동시켜가며 그를 함양(咸陽)까지 이송했다.

 그런데 그때, 정(政)은 자신의 후계자로 장자(長子)였던 부소(扶蘇)를 지목했는데, 그러나 그 부소(扶蘇)가 즉위하게 되면 자신들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조고(趙高)는 그래서 이사(李斯)와 결탁해서 <호해(胡亥)를 후계자로 한다>는 것으로 유조(遺詔-왕의 유언)를 날조했다. 그리고 시황제 정(政)이 죽은 바로 그 다음해에 <진승(陳勝) · 오광(吳廣)의 난-후술>이 발생했고, 그로써 진(秦)도 곧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

 호해(胡亥)는 진조(秦朝) 제2대 황제로, 제호(帝號)는 2세 황제. 성(姓)은 영(嬴). 시황제의 막내였으며, 맏형에 부소(扶蘇)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황제(始皇帝)' 사후(死後)에 즉위했으며, 그에는 많은 의문이 있었다. <호해(胡亥)는 이미 즉위 전부터 조고(趙高)의 권유로 부소(扶蘇)를 자살로 몰아넣었으며, 공자(公子) 고(高-?-기원전 209-구체적인 것은 不明이며, 姓은 嬴, 史記의 李斯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하 생략) 등, 형제들을 포함한 황족이나 중신들을 숙청했다는 것, 등> 그리고 '시황제(始皇帝)'의 능(陵)이나 '아방궁(阿房宮)' 그리고 '만리장성'의 건축을 추진했으며, '흉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대규모 징병을 행한 것으로 인심의 배반을 불렀다. 그리고 그 후, 기원전 209년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이 발생하자 거의 반년(半年) 만에 진압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그는 한층 더 토목사업이나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을 추구했으며, 그로써 또 인심은 더욱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아방궁(阿房宮)은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기원전 212년에 세웠다는 대궁전(大宮殿)이다. 유적은 협서성(陜西省) 서안시(西安市) 서방(西方) 13km의 아방촌(阿房村)에 있다고 하며, 시황제(始皇帝) 사후(死後)에도 공사가 계속 되었지만, 진(秦)이 멸망함으로 해서 미완(未完)인 채로 남겨졌다. 그리고 원래는 명칭이 없었던 것을 후세인들이 그 지명(地名)을 따서 아방궁(阿房宮)으로 지었다고 한다.


<清代中期의 画家 원요(袁耀)가 그렸다는「擬阿房宮圖軸」-일종의 상상도>


 그러자 이사(李斯)가 나서서 간언을 했지만, 그러나 이사(李斯)는 오히려 조고(趙高)의 중상모략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그런데 또 그 즈음부터 초(楚)의 항량(項梁-?~기원전 208년. 항우의 숙부)을 중심으로 했던 반진(反秦)세력이 강대 화되었다. 그러나 그때 호해(胡亥)는 조고(趙高)의 조작된 보고를 받으면서 후궁들에 둘러싸여 정무(政務)를 등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바로 그 시기에 조고(趙高)가 일부러 사슴을 가리키며 말(馬)이라고 했다는 <마록고사(馬鹿故事) 사건>이 있었다.

 ★ 마록고사(馬鹿故事)란 말은 필자가 임의로 쓴 것이며, 정확하게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이다. 그리고 그 뜻은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뜻으로, 옛날 중국의 진(秦)나라 때 조고(趙高)가 자신의 권세를 시험해보고자 당시 황제였던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일본에서는 그 단어를 '바보'란 뜻인 <마록(馬鹿-바카)>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무튼, 기원전 207년이 되자 '진군(秦軍)'은 각지에서 반란군에 패퇴했고, 유방(劉邦)이 이끌던 반란군도 이미 수도였던 함양(咸陽) 근교까지 진군해왔다. 그러자 그때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호해(胡亥)는 조고(趙高)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그러자 또 숙청을 무서워했던 조고(趙高)는 자신의 일족(一族)을 인솔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결과 호해(胡亥)는 그들에 붙잡혀서 24세에 자살 당했다.

 자영(子嬰)은 중국 진(秦)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호해(胡亥)'의 형(兄)의 아이(子)>라고 되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당시, 시황제(始皇帝) 사거(死去) 후에 진(秦)에서는 반란이 전 국토로 퍼졌고, 그러자 진(秦) 조정(朝政)으로서는 손도 대지 못하는 가운데 조고(趙高) 등의 쿠데타에 의해서 2세 황제(胡亥)가 자살했다. 그러자 그 다음으로 자영(子嬰)이 즉위했는데,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진(秦)으로서는 천하의 주도권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영(子嬰)은 황제가 아닌 진왕(秦王)이 되었다. 그런데다 바로 그 직전에 <조고(趙高)가 그때 이미 함양(咸陽) 근교까지 침공해 와있던 유방(劉邦)과 내통해서 자영(子嬰)의 목을 갖다 바치고는 관중(關中)의 왕이 되려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그에 위협을 느꼈던 자영(子嬰)은 그들을 숙청하기로 결정하고는 즉위식이 있던 당일 갑자기 병이 났다는 핑계로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조고(趙高)는 거듭 재촉을 구했지만 자영(子嬰)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그러자 또 그에 화가 치밀있던 조고(趙高)는 자영(子嬰)을 즉위식에 참석케 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영(子嬰)의 처소로 찾아갔다. 그러자 그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자영(子嬰)의 자식 내지 심복들에 의해서 조고(趙高)는 척살되었고, 이어서 그 일족들도 전부 처형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는 이미 유방(劉邦)이 이끌던 반란군이 함양(咸陽) 근교까지 진격해 와있었으므로, 그래서 진(秦)은 멸망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자영(子嬰)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백마(白馬)와 백차(白車) 소복(素服)을 준비해서 마치 장례식을 하는 것처럼 해서는, 거기다 자신의 목에 밧줄까지 걸고서 지참한 옥새(玉璽)와 함께 유방(劉邦)에게 투항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들 일족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이어서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에 입성(入城)하자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관중(關中)은 중국 협서성(陜西省) 위수분지(渭水盆地=渭河平原)의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했던 일대(一帶)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함곡관(函谷関)의 서쪽지역이며, 춘추전국시대 진(秦)의 영지였다. 그 후 전한(前漢)과 당(唐)도 그 지역에 수도(首都)를 두었다.



<협서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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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 토목사업(大土木事業)

 시황제(始皇帝)는 원정(遠征)과 함께 <대 토목사업>도 많이 실시해서 그로 인해 민중들은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것은 후에 그가 폭군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그러나 또한 만리장성 같은 필요성이 아주 높은 사업들도 그는 많이 실시했다. 그리고 또 한대(漢代)가 되면 흉노(匈奴)에서 목돌선우(冒頓單于-앞에서 설명되었음)란 자가 등장해서 한(漢)을 괴롭히게 되는데, 그런 것으로 보아서는 또 정(政)이 미리 만리장성을 쌓고, 또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그 흉노를 치게 했던 것은 일종의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韓)나라 출신의 정국(鄭國)이 진(秦)을 피폐(疲弊) 시키고자 대규모의 관개(灌漑)사업을 실시했는데, 그러나 그의 그런 의도는 곧 발각되었다. 하지만 그때 정(政)은 그의 기술을 아껴서 그 사업을 계속하게 했고, 이어서 성공까지 보았다. 그리하여 당시 황야나 다름없었던 토지를 옥토로 바꿔 놓았으며, 그것은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정국(鄭國-生沒不明)은 중국 전국시대 한(韓)나라 사람(정치가였다고도 함)으로, 전국시대 말기(末期) 진(秦)의 세력이 최대로 강대했을 때 태어났다. 그 후, 그는 토목(土木) 기술자(관리자로 생각됨)로 성장했고, 이어서 진(秦)에 대규모의 구거사업(溝渠事業-하천정비공사 등)을 실행시켜서 진을 피폐(疲弊) 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진(秦)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의도는 발각되어서 위기에 처했지만, 하지만 그는 <이곳의 토지가 척박한 관계로 농사가 잘 되지 않는데, 그래서 그 사업을 완성해야 만이 농업을 발전시킬 수가 있고, 그리면 얼마지 않아 큰 성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사업은 거의 만리장성 축조에 가까운 대규모의 사업이었던 것으로,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몇 십 년이나 걸려서야 그 사업을 완성했다. 그러자 그 구거(溝渠)는 <정국거(鄭國渠)>라고 불렸으며, 그 간선수로(幹線水路)의 연장(延長)은 150km, 관개면적(灌漑面積)은 67,000헥타르(ha=hectare-미터법에 의한 넓이의 단위이며, 1헥타르는 1아르의 100배로 1만㎡)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고대 중국의 3대(大) 수리시설(水利施設) 중 하나로 불렸고, 현재 협서성(陜西省) 경혜구관개구(涇惠渠灌漑區)로 이어졌다.

 
하지만 함양(咸陽)의 '대(大) 확장공사'라거나 , 미녀(美女)들을 3천명이나 모아 두었다는 아방궁(阿房宮)의 건축, 그리고 또 1974년에 발견된 병마용(兵馬俑)을 비롯한 대규모의 본인(本人) 능(陵)의 축조 등은 큰 재정적 부담이 되었고, 그리고 또 그 공사에 민중들을 강제적으로 징용한 것으로부터 결국에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까지 발생하게 했다. 그러므로 바로 그 대 토목공사들을 행했던 것이 결국 그 진(秦)을 붕괴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병마용>


<진시황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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