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10년 /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3. 통일(統一)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칠국(七國)의 군주 모두가 스스로 왕을 자칭(自稱)하고 있었다.<다만, 한때는 진왕(秦王)이 서제(西帝)로, 제왕(齊王)이 동제(東帝)로 칭해졌던 때는 있었다> 하지만 통일 후, 그런 칭호가 적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정(政)은 가신들에게 새로운 칭호의 고안을 명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옛날 전설상의 삼황(三皇)이었던 천황(天皇)과 지황(地皇), 태황(泰皇) 중에서 제일로 존경을 받았던 태황(泰皇)을 상주(上奏)하였으나, 정(政)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고, 태황의 황(皇)과 태고(太古)의 제(帝) 호(號)를 혼합해서 황제(皇帝)라고 칭할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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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에 있어서 신화전설시대의 제왕들을 말하는 것이며, 현재는 실제의 인물로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삼황(三皇)은 신(神)으로, 오제(五帝)는 성인(聖人)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며, 전설(傳說)에서는 최초의 세습왕조였던 하(夏) 이전(以前)의 시대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아래는 다만 참고일 뿐이므로, 한글표기는 가능한 생략합니다. 그리고 또한 더욱 상세한 것은 앞의 <참고>를 참조바랍니다. 

 <三皇>

 三皇에 관해서는 諸說이 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아래와 같은 5說이 잘 알려져 있다.

 1. 天皇 · 地皇 · 泰皇(人皇) - 前漢의 司馬遷이 쓴 史記의 秦始皇本紀에 의하면, 皇帝라고 칭하게 된 배경에는 옛날 중국 전설상의 三皇이 擧名되었으며, 그에 정(政-秦始皇)은 그 중에서 皇과 帝를 取해서 皇帝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만, 이 부분에서 司馬遷은 반드시 ‘三皇’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후에 司馬貞이 썼던 '史記索隱'에서는 <泰皇=人皇>으로 되어 있고, 그리하여 天皇 · 地皇 · 人皇을 三皇으로 하고 있으며, 그 前에 泰皇이 있었다는 등으로 썼다. 그리고 또 그가 보충했던 史記의 三皇本紀(補三皇本紀 또는 補史記라고도 한다)에서는 三皇을 伏羲, 女, 神農이라고 해놓고 또한 天皇 · 地皇 · 人皇이라고도 倂記해두었다.

 2. 伏羲 · 女 · 神農 - 춘추위운두추(春秋緯運斗樞)의 풍속통(風俗通) 황패편(黃覇篇)에 의함. 唐의 司馬貞 補 史記 三皇本紀도 그것을 承繼했다.

 3. 수인(燧人) · 伏羲 · 神農 - 예위함문가(禮緯含文嘉)의 風俗通 黃覇篇에 의함.

 4. 伏羲・神農・축융(祝融-불을 다스리는 신) - 後漢・班固의 白虎通 號篇

 5. 伏羲・神農・黄帝 - 西晋・황보밀(皇甫謐)의 帝王世紀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天皇 · 地皇 · 人皇이라고 하는 天地人 三才에 유래하는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인류에게 문명을 가져다주는 문화영웅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前漢 末부터 융성했던 신비주의적인 참위사상(讖緯思想-고대 중국에서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인간 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했던 학설)에 의해서 半獸半神의 모습을 한 神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또한 伏羲와 神農에 관해서는 일찍이 周易의 계사하전(繫辭下傳)에서 괘(卦-점괘)를 사용해서 文明을 가져다준 聖人으로서, 黃帝 · 堯 · 舜 앞에 존재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을 三皇에 넣어서 역사적인 帝王으로서 五帝 앞에 固定시켰던 것은 魏, 晋 이후의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五帝>

 그리고 五帝를 누구로 정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래 표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의 내용을 보아서는 많은 矛盾이 있다. 그리고 일단, 그들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은 司馬遷이었지만(史記의 五帝本紀), 그래서 그는 <黃帝傳說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民俗風土가 공통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고, 또한 그 속에 사실도 조금은 섞여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기록하는데서
가치를 찾아내려는 것이다>라고 부연을 해놓았다.




大載禮記, 史記


戰國策, 易經


禮記, 淮南子


世經


三統經

資治通鑑外記


伏羲




1










神農




2










太昊






1








炎帝






2








黃帝


1


3


3






1


少昊






4


1




2


顓頊


2




5


2




3




3






3


1


4




4


4




4


2


5




5


5




5


3














4














5



  

 <備考> 그 후, 중국의 지배자들은 모두 황제를 자칭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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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그와 동시에 왕명(王命)을 제(制)로, 왕령(王令)을 조(詔)로, 천자(天子)의 자칭(自稱)으로서는 짐(朕-나중에 眞人으로 고쳤다. 그러나 政 死後에는 다시 朕을 사용했다)을 사용할 것을 정했다. 그리고 또 시호(諡號)제도는 자식이나 신하들이 선군(先君)을 비평할 수 있다고 해서 불경(不敬)하다는 이유로 폐지했고, 이후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하면서, 그 다음으로 이세(二世)황제, 삼세(三世)황제... 만세(萬世)황제로 칭할 것도 정했다. 그리고 또 그 광대한 영토의 통치에 대해서는 <정(政)의 자식들을 지방으로 파견해서 봉건(封建)으로 통치하는 방법>을 신하들이 제안했으나, 하지만 이사(李斯)가 주(周)의 예를 들면서 군현제(郡縣制)를 주장해서 채택되었다. 정(政)은 그 후 전국(全國)을 36군(郡-나중에는 48군)으로 분할했고, 그 각각에 수(守-행정담당) · 위(尉-군사담당) · 감(監-감찰담당)을 설치했으며, 군(郡)의 하부에는 현(縣)을 설치해서 통치했다. 그리고 또 정(亭)이라는 일종의 파출소(派出所)를 제도화 해서, 가도(街道) 10리(里)마다 설치하고는 인부징병이나 치안유지 또는 관리용 숙박시설로 활용했다. 그리고 또한 도성(都城)인 함양(咸陽)에는 전국의 부호(富豪) 12만호를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거기에다 이미 멸망한 육국(六國)의 왕궁을 본뜬 건물도 세웠다. 그 다음, 정(政)은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지해서 몰수했고, 중국통일의 상징으로 거대한 상(像)도 만들었다. 그리고 또한 도량형(度量衡 : 度=길이, 量=체적, 衡=무게의 단위)과 화폐, 차(車)의 폭을 통일('軌를 하나로 한다’의 故事)했다. 그리고 또 한자(漢字)는 그때까지 지방마다 사용하는 것이 다 달랐지만, 그러나 그것까지도 고쳐서 진체(秦體)를 표준자체(標準字體)로 채용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후세(後世)에까지 통일왕조의 모범이 되는 정밀하고도 합리적인 지배체제를 가지는 중앙집권국가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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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斯

 중국 진나라의 정치가(?~B.C.208). 법가사상을 이용하여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시황제의 승상(丞相)으로서 군현제의 실시,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 분서(焚書) 등을 행하는 등, 통일 제국의 확립에 공헌했다. 그러나 시황제가 죽은 뒤, 이세(二世) 황제를 옹립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조고(趙高)의 참소로 실각하여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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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황제로서
 

<만리장성>
사진의 벽돌 장성은 明代의 것이며
시황제 시대의 것은 版築土壘로 되어 있었다
또 위치도 명대보다 북방에 있었다.


<장성의 모습= 赤色=明代>

 기원전 214년, 북방 '흉노(匈奴)'의 진입을 막기 위해서 '만리(의)장성'을 복구(復舊)했고, 장군 '몽염(蒙恬)'에게 명(命)해서 30만의 군세(軍勢)로 '흉노'를 토벌시켰으며, 그 여세를 몰아서 '오르도스 지방((앞에서 설명되었음)'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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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匈奴)는  중국의 이민족인 오호(五胡) 가운데 진(秦)나라와·한(漢)나라 때에 몽골고원에서 활약하던 기마민족으로, 기원전 3세기 말에 묵돌선우(冒頓單于=Maodun Chanyu)가 모든 부족을 통일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건설하고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였으나, 한(漢)나라 무제의 잦은 침공으로 쇠약해져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冒頓單于 때의 영토>

<冒頓單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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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죄인을 군사로 징병해서 남쪽의 영남(嶺南-베트남 북부)을 정복하고 군(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또 그때에 양자강의 지류 상강<湘江-湘은 강 이름, 광서성(廣西省) 흥안현(興安縣)에서 동정호에 흘러드는 강>과 광동(廣東)지방의 서강(西江)으로 흘러드는 '이강(漓江)'을 묶는 운하령거(運河靈渠-全長 33.1 ㎞)를 쌓아올렸다.
 

<상강 위치도>

<漓江>

 기원전 213년 '이사(李斯)'의 진언으로 '주조(周朝)'의 재흥(再興)을 바라서 '진조(秦朝)'를 비판하던 유생(儒生)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학서(醫學書)와 농서(農書) 등 실용(實用)서를 제외한 서적의 소각처분을 실시했다.(焚書)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에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靈藥)을 만들기를 명받았던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고는 자신들이 받을 罰이 무서워서 도망을 가버리자, 그에 화가 난 정(政)은 '함양(咸陽)'에 있던 학자(學者)들을 구속하고는 460명을 구덩이에 묻어버렸다.(坑儒).


<함양 시>

 그러자 장자(長子) '부소(扶蘇)'가 그러한 시정(施政)에 대해서 간(諫)했지만, 그러나 '정(政)'은 오히려 화를 내고는 그를 '몽념(蒙恬)' 휘하로 보내서 북방방위를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또 '정(政)'은 5회에 이르는 대규모 순행(巡行)을 실시하면서 전국의 교통망정비(古代道路)를 추진시켰고, 그와 더불어서 중국 국내의 장성(長城)도 파괴했다.

 그런데 그때 '항우(項羽)'와 '유방(劉邦)'도 그런 '정(政)'의 순행(巡行)을 지켜보다가 '항우(項羽)'가 <내가 곧 저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筆者 譯>라고 말을 했다고 하고, 그에 또 '유방(劉邦)'은 <남자로 태어난 이상, 그런 것은 당연한 것이다(희망사항이다)-筆者 譯>라고 말을 했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또 기원전 219년, 2번째의 순행에서는 '태산(泰山)'에서의 '봉선의식<封禪儀式-제왕(帝王)이 하늘과 땅에 자신의 즉위를 알리고, 천하가 태평한데 감사를 드리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러자 그때 그 의식의 상세(詳細)에 대한 고례(古例)를 유가(儒家)에게 물었지만, 고대의 의식이었기 때문에 유가의 답변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 '정(政)'은 자신 마음대로 의식을 실시했고, 그리고는 기념으로 그곳에다 '태산각석(泰山刻石)'을 설치했다.


<태산-세계유산 위치도>

<泰山 南天門>


 
그리고 또 기원전 218년의 3번째 순행에서는 '박랑사(博浪沙)'를 통과했을 때, 큰 철추<鐵鎚=철퇴(鐵槌)>가 '정(政)'이 타고 가던 차(車)를 노리고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차에 떨어졌고, 그에 '정(政)'은 목숨을 건졌다. 그러자 '정(政)'은 그 범인을 잡을 것을 명했지만, 하지만 주범이었던 '장량(또는 장양-張良)'은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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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랑사(博浪沙)는, 중국 허난 성(河南省) 우양현(武陽縣)의 고적으로, 진(秦)나라 무양 성의 남쪽에 있으며, 장량(張良-후술)이 역사(力士)들로 하여금 철퇴로 진나라 시황제를 저격하게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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