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10년 /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4. 황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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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소개>

 ※ 장양
(또는 장량 張良-?부터 기원전 186년) 1



 그는 중국 한나라의 건국공신으로, 자(字)는 자방(子房), 한나라의 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통일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소하(蕭何) · 한신(韓信)과 함께 한나라 창업의 삼걸(三傑)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진(秦) 말기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였고, 모장(謀將)이었다. 시(諡)는 문성(文成). 그리고 또 그는 유방(劉邦)의 군사(軍師)로서 많은 작전을 입안(立案)했으며, 유방(劉邦)의 패업(霸業)을 크게 도왔다. 그리하여 유방(劉邦)으로부터 류<또는 유 : 留 - 강소성(江蘇省) 서주시(徐州市-舊 彭城) 패현(沛縣)의 東南>를 영지(領地)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유후(留侯)라고도 불렸다. 자식으로는 사자(嗣子-상속자, 대을 잇는 자식) 장불의(張不疑)와 소자(少子) 장벽강(張辟彊)이 있었다.


<강소성>

<서주시>

'패현'은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유방'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유'는 '패현'의 동남에 위치(정확한 자료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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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生涯)>

 1. 시황제(始皇帝) 암살

 그의 조부(祖父) 장개지(張開地)는 한(韓)의 소후(昭侯)와 선혜왕(宣惠王) 그리고 양왕(襄王)'의 재상(宰相)을 맡았던 사람이었고, 부(父) 장평(張平)은 리왕(釐王)과 환혜왕(桓惠王)의 재상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史記索隠>에 의하면 <그의 선조들은 한(韓)의 공족(公族)이었고, 주(周) 왕실과 같은 희 성(姬姓)이었지만, 그러나 진(秦)에 의한 적(賊)의 탐색이 실시되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장(張) 씨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부(父) 장평(張平)이 죽은 후 20년이 지났을 때 진(秦)이 한(韓)을 멸했다(
기원전 230년). 하지만 그때까지도 장양은 관(官職)에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그러나 남자 나이 20세정도면 성인(成人)으로, 그가 부(父) 장평(張平)이 죽기 바로 직전에 태어났던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때는 그도 관직에 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그가 그때까지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고 했던 것은, 아마도 한(韓)이 멸망했을 당시, 그 분위기와 함께 그의 나이는 대충 20대 전()반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측해 볼 수 있다.<그러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는 장양이 항백(項伯)보다 연하(年下)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 항백(項伯-?부터 기원전192년)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였고, 무장(武將)이었으며, 子는 항수(項睢=劉睢), 항우의 숙부였고, 항연(項燕)의 子였으며, 항양(項梁)의 형제였지만, 보다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

 아무튼 한(韓)이 진(秦)에 멸해지자, 그에 장양(張良)은 복수를 맹세했으며,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졌던 전 재산을 처분해서 그것을 자금으로 사용했다는데, 그것은 또 그 당시 자신의 남동생이 사망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그 비용이 아까워서 장례도 치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장량(張良)은 자신과 뜻을 같이할 동지(同志)를 찾기 위해서 동쪽으로 여행하던 중 창해군(倉海君)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대단한 역사(力士)를 구해서는 기원전 218년경에 순행(巡行)을 하던 시황제(始皇帝)를 암살하기 위해서 박랑사(博浪沙)에서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이어서 장양은 도망쳤다. 그러자 정(政)은 그에 격노하고는 전국에 장양을 잡으라는 포고를 내렸다. 그러자 또 장양은 가명을 사용하면서 하비(下邳-江蘇省 徐州市=앞에서 설명되었음. 그리고 邳는 丕로도 쓸 수 있음)로 숨어들었다.

 2.
하비(下邳) 시대의 일화(逸話)

 어느 날 장양(張良)이 다리를 건너가는데, 어느 거지 노인이 자신의 신발을 벗어서 다리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는 장양(張良)에게 <젊은이, 저 신발을 건져 오게!>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장양(張良)은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상대가 나이든 노인이라 그는 말없이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또 이번에는 자신의 다리를 쑥 내밀더니 <신겨라!>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장양은 기분이 더욱 나빴지만, 그러나 '이왕에 하는 것!' 하듯이 꾹 참으면서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또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아주 좋아하면서 대소(大笑)하더니 그에게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으니 5일 후 아침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러자 장량(張良)은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그 5일 후의 아침에 그곳으로 나가보니 그 노인은 이미 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또 그 노인은 <어른과의 약속인데 젊은이가 늦다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말을 하고는 <5일 후에 다시 와라!>라는 말을 남기고는 떠나버렸다. 그러자 또 장양(張良)은 이번에는 아주 전날 저녁때부터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또 얼마 후에 그 노인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매우 흡족한지 웃으면서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아, 이번에는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군! 그런 겸허함이야말로 (사람이 지녀야할) 정말로 소중한 것이야!> 그리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태공망(太公望-강태공)의 병법서(兵法書)를 그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것을 독파(讀破-通達)하면 왕(王)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지금으로부터 13년 후에 어느 산기슭에서 황색(黃色)의 돌(石)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일 것이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그 노인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13년 후 장양(張良)은 그 황색의 돌을 어느 산기슭에서 찾았고, 그래서 또 그것을 가보(家寶)로 삼았는데, 그의 사후(死後)에는 무덤에까지 넣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물론, 그 황석공(黃石公)의 일화는 당연히 전설로 보아야할 것이겠지만, 그러나 또 그 일화를 통해서 그가 어느 누군가에게서 병법을 배웠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며, 그리고 또 그 '황석공'이 주었다는 그 '태공망(太公望)'의 병법서는 <육도(六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하지만 현존하는 그 <육도(六韜)>의 성립 연도는 위진대(魏晋代)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적어도 그때 장양(張良)이 읽었을 그 병법서는 <육도(六韜)>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또 그 하비(下邳)에서 장양(張良)이 도피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항우(項羽)의 숙부였던 항백(項伯)이 사람을 죽이고 그곳으로 도망쳐 온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장양(張良)이 그를 숨겨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이하, 유방과의 이야기는 그때 가서 다시 소개하거나, 아니면 생략함)

 ※ 육도(六韜)=중국 주(周)나라 태공망이 지은 병법서(兵法書). 무경칠서의 하나로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견도(犬韜), 표도(豹韜)의 6장으로 되어 있다. 6권 60편


<黃石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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