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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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1.출생(出生)
그는, 패현군 풍현 중양리(沛縣郡 豊縣 中陽里=現 江蘇省 徐州市 沛縣-앞에서 소개되었음)에서 부(父) 유태공(劉太公)과 모(母) 유온(劉媼)의 삼남(三南)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형제로는 맏형에 유백(劉伯), 차형(次兄)에 유희(劉喜), 이모제(異母弟)로 유교(劉交)가 있었고, 그의 출생일화는 다음과 같다.
유온(劉媼)은 유방(劉邦)을 출산하기 전(前) 어느 하루, 어느 연못 근처에서 잠깐 졸았는데, 그러자 '유온'은 꿈속에서 그 연못의 신(神)을 만났다. 그런데 그때 또 마침 그 근처에 있던 유태공(劉太公)이 그런 유온(劉媼)을 보았는데, 그때 용(龍) 한 마리가 유온(劉媼)을 휘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유방(劉邦)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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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소개
1. 부(父)
유태공(劉太公-?부터 기원전 197년)은 유방(劉邦)의 아버지이며, 칭호(稱號)는 한(漢)의 태상황(太上皇). 성(姓)은 유(劉). 이름은 단(煓). 혹은 집가(執嘉)라고 전하는 책도 있다.(史記索隱에 의한 것이나, 그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중국 初唐의 학자인 顔師古) 그리고 또 그의 전처(前妻)는 유온(劉媼)이며, 후처(後妻)의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태공(太公)이란 말은 연장자(年長者)를 의미했던 것으로, 우리말로는 <어르신>이라거나 <어른>처럼 친밀감을 담아서 불렀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원래 이름이 불릴 일도 별로 없었을 정도로, 그러니까 어르신(太公) 정도로만 불렀어도 아무 관계도 없었을 낮은 신분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또 일설(一說)에 의하면 유방(劉邦)이 패군(沛郡=沛縣)의 정장(亭長)이 되어서 단부현<單父縣=山東省 하택시(菏澤市)>'에서 이주해온 부호(富豪) 여 씨(呂氏)와 인척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해서, 패(沛)의 호농(豪農)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즉, 유방(劉邦)은 소작인까지 두었던 유복한 농가출신자였다는 것이다.(혹은 沛의 地主였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러했던 유태공(劉太公)은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에 살았던 농부였다. 그리고 유방(劉邦)이 자신의 처지(농부의 자식)를 잊고서 건달 짓으로 세월을 보냈다거나, 유협(遊俠)들과 어울렸다거나 했기 때문에 부자(父子) 간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그랬던 유방(劉邦)이 나중에 한왕(漢王)이 되었고, 그리고는 항우(項羽)와 다투게 되자 유태공(劉太公)도 본의 아니게 그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 유태공(劉太公)이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패하자 유방(劉邦)의 아내였던 여치(呂雉)와 함께 포로로 잡혀서 약 3년간이나 인질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 전세가 역전되어서 항우(項羽)가 불리해지자 그에 항우(項羽)는 그 두 사람을 이용해서 사태의 타개를 도모했다. 그리고는 <광무산(廣武山)의 싸움> 때, 항우(項羽)는 미리 큰 가마솥을 준비해 놓고 유방(劉邦)에게 다음과 같이 협박을 했다.
<만약에 네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아버지를 이 가마솥에다 넣어서 삶아버릴 것이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진말(秦末)의 동란(動亂) 때, 두 사람이 함께 초(楚)나라의 회왕(懷王)을 모셨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그 답을 했다.
<네가 벌써 잊었나본데, 우리는 과거 의형제였던 사이였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네가 꼭 아버지를 솥에다 삶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나중에 잘 끓인 국물을 나에게도 한 그릇 나눠주길 바란다!>
그 후, 양자(兩者) 간에 강화가 성립되었고, 그러자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도 유방(劉邦)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에 유방(劉邦)은 강화를 파기해 버렸고, 그리고는 <해하(垓下)・오강(烏江)의 싸움>에서 항우(項羽)를 격파하고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자 유태공(劉太公)도 태상황(太上皇)의 칭호를 받게 되었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중국 역사상 생존 중에 태상황(太上皇)의 칭호를 받았던 사람은 그 유태공(劉太公)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또 정작 본인은 그것을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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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母)
유온(劉媼-生沒未詳)은 유방(劉邦)의 생모(生母)로, 시호(諡號)는 소령후(昭靈后). 성명은 미상(未詳-이유는 아래에서 설명함). 하지만 사기색은(史記索隱)과 사기정의(史記正義)의 인황보밀등(引皇甫謐等)에 의하면, 그녀의 성(姓)은 왕(王)이었으며, 이름은 함시(含始)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또 안사고(顔師古)가 이견을 보였다) 그리고 가족은 상기(上記)를 참조바라며, 그리고 또 그녀의 이름이 '유온'이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 유(劉)와 온(媼)은 위, 유태공(劉太公)의 예와 같이(太公), 연장자에 대한 친밀감을 담은 통칭이었으며, 하지만 또 굳이 표현하자면 <유가(劉家-유 씨 가문 또는 유태공)의 아내>나 <유가(劉家)의 안주인> 같은 의미였던 것으로, 그래서 또 그녀의 이름이 확실히 유온(劉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고조본기(高祖本紀) 및 한서(漢書) 그리고 또한 고제기(高帝記-고대역대황제들의 기록)'를 종합했을 때, 유방(劉邦)은 유온(劉媼)이 낮잠을 자던 중에 용(龍)이 조화를 부려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그러나 또 그런 설화나 전설의 예는 얼마든지 있으며(특히 朱全忠이나 朱元璋 등), 또 실제로는 용(龍)이 아니었고 '도적이었다'거나 '도망 중이었던 무사였다'는 등의 여러 가지 설도 있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서(史書)에 의하면 그녀는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202년에 유방(劉邦)이 즉위하자 <소령부인(昭靈夫人)>이란 칭호를 받았고, 또 유방(劉邦) 사후에는 여치(呂雉)로부터 <소령후(昭靈后)>로 승격된 칭호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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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맏형(長兄)
유백(劉伯-生沒未詳)의 시호(諡號)는 무애후(武哀侯-그러나 뒤에는 武哀王)였고, 자식으로 갱갈후(羹頡侯) 유신(劉信)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젊어서 사망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전해지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러나 또 일부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들 부부사이는 나빴던 것 같고, 그것은 또 어느 날 유방(劉邦)이 자기 친구들 몇 명을 집으로 데리고 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유백의 아내는 빈 냄비를 보이면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유방(劉邦)이 확인을 해보니 집에 국(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었고, 그래서 또 일족과 공신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내렸는데, 그러나 유백(劉伯)의 자식이었던 유신(劉信)에게만은 그 어미의 고약했음을 가슴에 담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유태공(劉太公)이 나서서 사정했고,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유신(劉信)에게 작위를 내렸는데, 그 이름은 갱갈후(羹頡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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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차형(次兄)
유희(劉喜-?부터 기원전 193년)의 자(字)는 중(仲). 시호(諡號)는 대경왕(代頃王), 기원전 201년에 유방(劉邦)에 의해서 대왕(代王)에 봉건(封建) 되었다. 그러나 영내(領內)에 흉노군(匈奴軍)이 침공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을 가버렸는데, 그것은 또 물론, 평상시라면 당연히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의 배려로 왕위(王位)만 박탈시키고 합양후(郃陽侯)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에 그의 자식 유비(劉濞)가 오왕(吳王)에 봉건 되었으며, 그는 그 3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에게 경왕(頃王)이란 시호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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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모제(異母弟)
유교(劉交-?부터 기원전 179년)는 전한(前漢)의 제후왕(諸侯王)이었고, 시호(諡號)는 초원왕(楚元王), 그리고 그는 유방(劉邦)과는 달라 유학(儒學-詩經)을 배웠으며, 유방(劉邦)과 함께 종군했다. 그리고 또 노관(盧綰)과 함께 유방(劉邦)의 측근 역을 맡았으며, 유가(劉賈)와는 함께 별동대(別動隊)도 되었다. 기원전 201년, 모반죄로 실각했던 초왕(楚王)·한신(韓信)의 후임으로 그는 그 옛 영토를 남북으로 분할했던 북부(北部)의 초왕(楚王)으로 봉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 회남왕(淮南王)·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형왕(荊王)·유가(劉賈)가 영포(英布)에게 패하자 다시 영포(英布)와 싸웠지만 졌다. 그리고 또 그는 젊은 시절에 배웠던 유학(儒學)과의 연(緣)으로 유생(儒生)들을 많이 중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전한(前漢) 말기의 석학으로서 알려져 있는 유향(劉向)과 유흠(劉歆)부자(父子)는 그의 자손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동진(東晋)의 정치가였던 유외(劉隗)와 유송(劉宋)의 유유(劉裕=高祖・武帝)도 그의 후예를 자칭했던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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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처(妻)
여치(呂雉-?부터 기원전 180년)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부인으로, 황후(皇后)였고, 혜제(惠帝)의 모(母)였다. 그리고 자(字)는 아후(娥姁). 시호는 고후(高后=高皇后)였으며, 유방(劉邦) 사후(死後)에는 황태후(皇太后)·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었고, 여후(呂后), 여태후(呂太后)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현재는 <중국의 3대(大) 악녀(惡女) 중 한명>으로 불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당대(唐代)의 무측천과 청대(淸代)의 서태후(西太后)가 있었다.(나머지는 후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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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휘(諱=諡號) <邦>은 사기(史記)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현재 남아있는 문헌 중에서 제일로 오래된 것인 후한(後漢)의 순열(荀悅-下述)이 지은 한기(漢記)에 그것은 기록되어 있으며,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주석(注釋)에서 그것을 인용하고 있다.
☆ <방(邦)>의 어의(語義)는 원래 <방(幇)=“bāng”=형(貴兄)>이란 의미의 일반명사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입장이 있다.<司馬遼太郎(시바료타로) ・ 佐竹靖彦(사타케야스히코)의 說> 다만, 현재 전하는 '방(幇)'이란 글자에 <형(兄)>이란 의미는 없다.
※ 순열(荀悅-148년-209년)은, 중국 후한(後漢)말기의 학자로, 자(字)는 중예(仲豫)였고, 영천군<潁川郡-潁은 江 이름(yǐng). 하남성 등봉현(登封縣)에서 회수(淮水)로 흐르는 강이며, 영천군은 그 지방) 영음(潁陰) 출신이었다. 그리고 전한(前漢)의 역사를 취급했던 편년사(編年史) <한기(漢記)>의 편자(編者)였던 순욱(荀彧)의 종형(從兄-사촌형)이었으며, 조조(曹操)의 부름을 받고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된 후, 헌제(獻帝)에 강의하였다. 다른 저서에 <신감> 등이 있었다.
★ 신감(申鑑)은 중국 후한(後漢) 순열(荀悅)이 지은 유가서(儒家書)이며, 정치의 향방과 사물의 도리 등을 기술하여 헌제(獻帝)에게 봉정했던 것으로, 당시의 정권이 조조(曹操)에게 이행됨을 우려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순열(荀悅)은 순자(荀子)에 대해서, 소순자(小荀子)로도 불린다. 5권.
아무튼, 그의 부(父) 순검(荀儉)은 순상(荀爽) 등 여덟 명의 형제와 함께 <8龍>으로 불렸다지만, 그러나 빨리 죽었다. 그리고 또 그 순검(荀儉)의 부(父)였던 순숙(荀淑)은 대장군 양기(梁冀)에게 미움을 받았던 줏대가 아주 강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12세에 춘추(春秋)를 읽었으나, 집이 궁핍하여 책을 빌려서 읽었고, 그러나 한번만 읽으면 대충 다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착하고 아름다운 용모에 글쓰기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영제(靈帝) 시대에는 내시(內侍)가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은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순열(荀悅)도 병(病)을 칭하며 은거했다. 그래서 당시 그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그러나 또 가까이에 있던 그의 사촌동생 순욱(荀彧)이 그를 특히 존경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에 '순열'은 최초로 진동(鎭東)장군 조조(曹操)의 막부(幕府)에 초대되었고, 그 후에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헌제(獻帝)는 문학을 좋아했으므로, 그에 '순열'은 순욱(荀彧)과 소부(少府-관직 명) 공융(孔融)과 함께 '헌제(獻帝)'에게 강의했다.
★ 공융(孔融)은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153~208)로, 자는 문거(文擧). 건안칠자<建安七子-중국 후한 건안 때, 시문(詩文)에 뛰어난 일곱 사람의 유명한 문학가들을 이르던 말. 공융(孔融)·진림(陳琳)·왕찬(王粲)·서간(徐幹)·완우(阮瑀)·응창(應瑒)·유정(劉楨)을 이름>의 한 사람으로, 북해(北海)의 재상이 되어서 학교를 세웠고, 조조를 비판 · 조소하다가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저서에 <공북해집(孔北海集)>이 있었다.
그 후, 순열(荀悅)은 승진을 거듭해서 비서감(秘書監)과 시중(侍中)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이 조조(曹操)에게로 옮겨가고 있었기 때문에, 헌제(獻帝)로서는 자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자 순열(荀悅)이 헌제(獻帝)를 보좌하려고 했지만, 그로서는 따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순열(荀悅)은 <申鑑 또는 申鑒 5편>을 만들어서 헌제(獻帝)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헌제(獻帝)는 그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헌제(獻帝)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가 대부분이 문장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춘추좌씨전> 형식으로 <한기(漢記)>를 만들도록 명했고, 그에 순열(荀悅)은 <한기(漢記) 30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한기(漢記)>는 <춘추좌씨전>과 같은 편년체로, 전한(前漢) 406년간의 역사를 적은 것이었다. 그리고 순열(荀悅)은 또 그 외에도 <숭덕(崇德)>이나 <정론(正論)> 등 수십 편을 더 저술했고, 건안(建安) 14년(209년)에 62세로 사망했다.
출토사료(出土史料)로부터 그의 '시호(諡號)'가 <방(邦)>인 것은 대충 올바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자(字) <계(季)>는 ‘막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 그러나 중복되지만, 부모의 이름에서도 태공(太公)은 연장자(남성)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며, 온(媼)도 일반적으로 부르는 ‘아줌마’와 같은 호칭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맏형의 백(伯)은 장남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전술(前述)의 결과, 유방(劉邦)의 가족들에 대한 본명(本名)은 모두 불명(不明)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유방(劉邦)에 관해서 썼을 때, 과감하게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그런 한편 또 당시, 서민들은 정식적인 이름을 쓰지 않았고 <누구의 누구, 예를 들어서 유가(劉家)의 장남(長男)=유백(劉伯) 그리고 유가(劉家)의 막내=유계(劉季)> 등으로 표현해도 충분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다만, 차형(次兄)과 이모제(異母弟)의 경우에서는 희(喜)와 교(交)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가족 전체가 이름이 불명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또, 그에는 피휘(避諱)를 위해서 고의로 애매하게 그렇게 기술했을 것이란 설도 있다.
유방(劉邦)의 용모(容貌)는 콧대가 높고, 멋진 수염을 길렀으며, 이른바 용안(龍顔)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이 길어서 코가 돌출된 상(相)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대퇴부(넓적다리)에는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 그 ‘72’란 숫자는 1년 360일을 오행사상(五行思想)의 5로 나눈 수로, 당시에는 꽤 '길한 수(吉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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