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9년 /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亂) 발발(勃發) - 중국 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


 1. 봉기(蜂起)

 기원전 210년, 시황제(始皇帝)가 붕어하자 그 막내였던 호해(胡亥)가 형(兄) 부소(扶蘇)를 자살로 몰고는 황제에 즉위했다. 그리고 그 원년(元年)이 되던 기원전 209년 7월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변경수비를 위해서 징병되었던 농민병(兵) 900명의 인솔(引率) 보좌를 명받아서 어양<漁陽-현재의 북경시 북부의 밀운현(密雲縣)>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경시 위치도>

<북경시의 밀운현 위치도>


 그런데 그들은 가던 도중에 대택향<大澤鄕-현재의 안미성(安微省) 숙주시(宿州市)의 동남부>에 접어들었을 때 큰 비를 만났다. 그리하여 길이 수몰(水沒)해서 기일 내에 어양(漁陽)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당시 진(秦)의 법(法)은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무조건 참수형이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그리고는 우선 점쟁이를 찾아가서 자신들이 성공을 할 수 있겠는지를 점쳤다. 그러자 점쟁이가 이렇게 말을 했다.

 <성공은 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들은 귀신이 될 것이다!>

 그러자 두 사람은 그 <귀신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고민했다. 그러나 곧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은 <귀신의 힘을 빌려서 사람들을 위복(威服=복종)시켜라!>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곧 행동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우선 <진승왕(陳勝王>이란 붉은 글씨를 쓴 헝겊을 배를 가른 물고기 속에다 넣어두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병사들이 아주 기분 나빠했는데, 그런데다 또 오광(吳廣)은 숙영(宿營) 근처에 있던 사당(祠堂)에 숨어들어서 밤중에 호화(狐火-도깨비불)를 피우고는 <대초(大楚-초나라)가 흥(興-일어난다)한다. 진승(陳勝)이 왕이 된다>라고 여우울음소리를 흉내 내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그 후 병사들은 진승(陳勝)을 보면 두려워하면서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

 그렇게 사전준비를 다 끝낸 두 사람은 마침내 결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선 농민병 인솔을 책임지고 있던 장(將)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오광(吳廣)이 먼저 연극을 시작했다.

 "나는 도망을 칠 것이다!"

 오광(吳廣)은 그때 술에 취해서 누워 있던 그 두 사람의 면전에서 이렇게 몇 번이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 중의 한 사람이 일어나서 화를 내며 그를 채찍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소리를 들었던 주변의 병사들이 몰려와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자 그들은 곧 분노했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책임자 한 사람이 칼을 놓쳤던 틈을 타서 오광(吳廣)이 그것을 얼른 주워들고 그 책임자를 찔렀다.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있던 진승(陳勝)도 같이 달려들어서 나머지 한 사람도 찔렀다.

 그 후 진승(陳勝)은 병사들을 소집했고,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들은 지금 큰 비를 만나서 약속된 기일 내에 어양(漁陽)에 당도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무조건 참수형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참수형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노역(勞役)으로 시달리다가 죽게 될 것이며, 만약에 또 그 노역에서도 죽지 않는다면 필시 귀도(歸途)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이름이라도 남기고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원래부터 사람에게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종족(種族-)이 따로 있을 것인가!>

 그러자 병사들은 일제히 그를 따를 것을 결의했다.

 그런데 그때, 그 두 사람은 민중들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서 진승(陳勝)은 부소(扶蘇)를, 그리고 오광(吳廣)은 항연(項燕)을 자칭했는데, 그것은 또 시황제(始皇帝)의 장자(長子)였던 부소(扶蘇)와 구초(舊楚)의 영웅이었던 항연(項燕)이 당시의 서민들에게서는 아주 인기가 많았던 때문이었고, 그리고 또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알지도 못했다거나 또는 그런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두 사람은 그들을 이용했던 것이었다.


<대택향 = 현, 안미성 숙주시 위치도. 노란색 부분>

 그 후, 두 사람은 우선 대택향(大澤鄕)을 점령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여러 지역을 점령했고, 특히 진(陳)을 취(取)했을 때는 병차(兵車)가 600승(乘), 기병(騎兵)이 1000여(余), 병사는 수만에 이르는 대 세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진(陳)을 공략했을 때, 군수(郡守)나 현령(縣令)들은 이미 도망을 가고 없었고, 그래서 또 그 아랫사람들(副官)이 잠시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진승(陳勝) 등은 그곳을 본거지로 했으며, 이어서 진승(陳勝)은 왕으로 즉위했고, 그 국호를 <장초(張楚)>로 정했다.

 ※ 진(陳)은 하남성(河南省)의 회양현(淮陽縣-市) 一帶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였다.


<하남성 위치도>

<하남성의 회양현 위치도>  


  2. 반란의 확대와 '장한(章邯)'의 반격

 그렇게 해서 <진승(陳勝), 봉기(蜂起)하다!>란 소문이 퍼지자, 그때까지 진(秦)의 압제(壓制)를 참아 왔던 각지의 민중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진승(陳勝)에 호응했다. 그러자 힘을 얻었던 진승(陳勝)은 오광(吳廣)을 가짜 왕으로 만들어서 제장(諸將)들을 통솔시켰다. 그리고는 서쪽을 정벌(征伐) 시키면서 동시에 무신(武臣)이란 자에게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란 자를 붙여서 조(趙)의 땅을 계략적으로 취했다. 그리고는 또 등종(鄧宗)이란 자에게는 구강군(九江郡)을 공략시켰으며, 그리고 또 위(魏)에는 주시(周市)란 자를 파견시켰다.

 ※ 보충 설명

 1.
장이(張耳) ?-기원전 202년.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및 조왕(趙王)
 2.
진여(陳余) ?-205년.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 초기의 무장(武將)
 3. 조(趙)는 나라 이름이며 지명(地名)으로, 현재의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의 일부를 가리킴

 

<산서성>

<하북성>


4. 구강군(九江郡)=구강시(九江市)는 강서성(江西省) 북부에 위치하는 지급 시(地級市)이며
시의 구분은 장강(長江=揚子江) 연안(沿岸)의 중요 항만도시.


<구강시>

 5. 위(魏)

 해설1. 원래 중국고대도시국가의 하나로, 현재의 산서성 예성현(芮城縣-運城市에 속함)에 상당(相當)했다.   그 후, 전국시대에 영역(領域)국가로 발전했고, 중국이 통일된 후부터 점차 국명(國名)으로 되었다.

 해설2. 중국 전국시대 칠웅(七雄) 중 하나로, 기원전 403년에 진(晉)나라의 세족(世族) 위 씨가 한(韓)·조(趙) 양 씨와 함께 진나라의 영토를 삼분(三分)하여 세운 나라. 지금의 山西省 남서부에서 河南省 북부 일대를 영유했으며, 문후(文侯)가 주왕(周王)에 의하여 제후로 봉해짐으로써 성립되었고, 이괴(李悝) 등을 중용하여 부국강병에 힘썼으나, 기원전 225년에 진(秦)나라에 멸망하였다.


<운성 시 위치도>


 그런데 그때 진(陳)나라에는 주장(周章=周文)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러자 진승(陳勝)은 그가 군사(軍事)에 통달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 그에게 장인(將印-將帥의 표식)을 주어서 서진(西進)하여 진(秦)을 토벌케 했다. 그러자 주장(周章)은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징병(徵兵)을 하면서 진군을 해나갔고, 그리하여 마침 함곡관(函谷関)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병차(兵車) 1000승(乘)에다, 병졸(兵卒)까지 수십만이나 되는 대 군단이 되어서 거의 무혈입성으로 함곡관(函谷関)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어서 그곳을 방위하러 달려왔던 진(秦)의 장한(章邯) 軍에게 주장(周章)은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다.

 ※ 장한<章邯(Zhang Han) ?부터 기원전 205년에 자살(自殺)>은, 진(秦)의 장군이었으며, 남동생에 장평(章平)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9경(卿)의 말석(末席)인 소부(少府)를 맡고 있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209년 겨울에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해서
주장(周章)이 도성인 함양(咸陽) 부근까지 침범해 오자 시황제(始皇帝)의 능(陵)에서 일하고 있던 죄수(罪囚) 20만 명을 방면(放免-免罪), 그들과 함께 반란군에 맞서겠다는 안(案-)을 올리고는 스스로 그들을 인솔해서 반란군에 맞섰다. 그러자 전공(戰功)을 올리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말을 들은 죄수들은 결사(決死)의 군대가 되어서 주장(周章)이 이끌던 반란군을 단번에 격파했고, 그것으로 결국 주장(周章)까지 민지(澠地-하남성에 있는 현)에서 자결하도록 만들었다.(이하, 차후 또는 생략함)

 그러자 주장(周章)은 패주(敗走)한 후에도 조양(曹陽)에서 진(秦)을 방어하려 사력을 다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수개월 후에는 그곳도 함락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다른 곳으로 가서 진군(秦軍)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곳에서도 실패해서 결국 자살했다. 그러자 그 대패(大敗)로 인해서 초군(楚軍)은 점점 전의(戰意)를 상실해갔고, 그리고 그때부터 장초(張楚)도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앞서 조(趙)를 평정했던 무신(武臣)은 한단(邯鄲)에 입성하자 그 스스로 왕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진승(陳勝)은 그에 격노했지만, 그러나 그 조(趙)마저 적(敵)이 되어버린다면 치명적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분을 삼키며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또 조왕(趙王)이 된 무신(武臣)은 한광(韓廣)이란 자를 시켜서 연(燕)을 평정하게 했는데, 그런데 또 그 한광(韓廣)이 무신(武臣)을 모방해서 그 스스로 연왕(燕王)이 되어버렸으므로, 그러자 또 부득이 무신(武臣)도 그것을 인정했다.


 3.
오광(吳廣)과 진승(陳勝)의 최후(最後)

 그리고 또 그때, 오광(吳廣)은 형양(滎陽)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삼천군(三川郡)의 태수(太守)였던 이유(李由-李斯의 長子)에게 막혀서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문(周文-周章)이 진군(秦軍)에 패배했고, 이어서 진군(秦軍)이 그 여세를 몰아서 오광(吳廣)을 압박해 들어왔다. 그런데다 또 그 와중에 오광(吳廣)의 부하 중, 전장(田臧)이란 자를 중심으로 해서 음모까지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결과 오광(吳廣)은 그들의 손에 죽임 당했고, 이어서 전장(田臧) 등이 그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오광(吳廣)의 머리를 진승(陳勝)에게로 보냈는데, 그 이유는 오광이 너무 무능해서 군을 잘 통솔하지 못했다는 것과, 그래서 또 그의 능력으로는 진을 이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또 부득이 진승(陳勝)은 그것을 인정했고, 전장(田臧)을 영윤(令尹)으로 삼았다.

 
영윤(令尹)
 1. 중국 주대(周代) 초나라의 관직 이름. 정치를 하는 최고의 직위이다.
 2. 중국의 지방장관을 달리 이르던 말. 진(秦)나라·한(漢)나라 이래 현 지사(縣知事)를 현령(縣令)이라고 하고, 원대(元代)에는 현윤(縣尹)이라고 하였으므로, 영과 윤을 합쳐서 이른 것.
 3. 여기서는 재상(宰相)

 하지만 그랬던 전장(田臧)도 곧 장한(章邯)에게 져서 전사했다. 그러자 장한(章邯)의 파죽(破竹) 진격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반란군을 물리쳤던 장한(章邯)은 마침내 진승(陳勝)의 본거지였던 진(陳)으로 향했고, 그리고는 우선 장초(張楚)의 상주국(上柱國-괴뢰 국)이었던 채사(蔡賜=房君.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음)'를 토벌했다. 그리고는 또 서쪽에서 장하(張賀)와 교전했고, 그러자 진승(陳勝)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와서 장하(張賀)를 지원했지만 졌으며, 그곳에서 장하(張賀)는 전사했다.

 12월이 되자 마침내 진승(陳勝)이 도망을 갔다. 그리고는 
여음(汝陰)으로, 그 다음에는 하성부(下城父)까지 도주를 했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자신의 마부(馬夫)였던 장가(莊賈)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진(秦)과의 전쟁은 초(楚)의 항량(項梁)으로 이어졌으며, 이어서 유방(劉邦)이 무관(武關)을 파(破)하자 앞서 기술했던 대로 자영(子嬰)이 항복을 했고, 그것으로 진(秦) 제국(帝國-子嬰이 항복했을 때는 王國)은 결국 멸망했다. 그리고 그때가 기원전 206년이었다.

 하지만 전란은 그것으로 종식되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대로 한(漢)의 유방(劉邦)과 초(楚)의 항우(項羽)가 맞서 싸우게 되는 초한전(楚漢戰)으로 이어져갔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죽은 진승(陳勝)은 양(陽)이란 곳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호(諡號)는 은왕(隱王)이며, 후에 유방(劉邦)은 그를 존경해서 그의 묘지 주변에다 민가(民家)를 두고는 대대로 그 묘를 지키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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