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4)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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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후(文侯-?부터 기원전 396년)는 중국 전국시대 초기 위(魏)의 군주였고(재위는 기원전 445년부터 기원전 396년), 성(姓)은 희(姬), 씨(氏)는 위(魏), 휘(諱)는 도(都)였다. 그리고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사(斯-斯其)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이극(李克), 오기(吳起), 악양(樂羊), 서문표(西門豹) 등,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서 위(魏)를 전국시대(戰國時代) 최고의 패국(覇國)으로 부상시켰다. 그리고 그는 위구(魏駒-魏桓子)의 손자였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불상(不詳)이다. 그리고 아들에 태자 격(擊-武侯)이 있었고, 나중에 재상의 부인이 되었던 공숙부인(公叔夫人-공주)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원조(遠祖)는 필(畢-陝西省 咸陽市)에 봉해졌던 주(周) 희창(姬昌-文王)의 서자(庶子)였던 필공고(畢公高)였다.

 참고: 畢公高는 서주(西周) 초기의 중신으로, 왕족이었다. 그리고 성(姓)은 희(姬)였고, 이름은 고(高)였으며, 주(周)의 무왕(武王)과 성왕(成王) 그리고 강왕(康王) 3대를 섬겼다. 그리고 그 필(畢)에 봉지(封地)를 내렸던 사람은 무왕(武王)이었고, 그래서 그때부터 필공(畢公)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필공(畢公)의 후예로 진(晋)의 대부였던 필만(畢萬)이 있었으며,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시조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 필(畢)이 언제 어떻게 멸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필공(畢公)의 먼 후예였던 필만(畢萬)이 진(晋)의 헌공(獻公-6-17참조)을 모셨고, 그런 다음에 위(魏)씨(氏)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필만(畢萬)의 손자 위주(魏犨-魏武子-6-19참조)의 대(代)가 되었을 때, 문공(文公)의 방랑에 함께 했던 공적으로 대부(大夫)가 되었다. 그리고 그 위무자(魏武子)의 현손(玄孫)으로, 문후(文侯)의 조부(祖父)였던 위환자(魏桓子)의 대(代)에, 진(晋)의 최고유력 씨족(氏族)이 되어있었던 지(知)씨(氏)가 멸해졌고, 그리하여 진(晋)은 위(魏)와 조(趙) 그리고 한(韓) 그 삼진(三晋)으로 분열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도 명목상으로는 진(晋)의 신하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것이 기원전 403년에, 문후(文侯)도 조(趙)씨(氏), 한(韓)씨(氏)들과 함께 주(周)의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정식으로 제후(諸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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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극(李克-?부터 기원전 395년)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정치가였고, 문후(文侯)를 도와서 위(魏)를 전국(戰國) 초기 패국(覇國)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회(李悝)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는 치세(治世) 시절에 곡물(穀物)의 가격조정을 시행해서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고취(鼓吹)시켰으며, 성문법을 제정해서 부국강병을 달성시켰다. 그래서 그의 정책은 나중에 상앙(商鞅)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그리고 또 문후(文侯)가 오기(吳起)를 등용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그러자 그는 <오기(吳起)는 욕심이 많은 자이지만, 그러나 용병(用兵)만큼은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고, 그러자 문후(文侯)는 오기(吳起)를 등용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법경(法經) 6편(編)과 이자(李子)32편을 저술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 법경(法經)이 실재했던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법경(法經)에 대한 소개임.

 참고: 法經은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이회(李悝)가 지었던 법률 책으로, 도법(盜法)·적법(賊法)·수법(囚法)·포법(捕法)·잡법(雜法)·구법(具法)으로 분류하였으며, 구법은 다시 오형(五刑)·십악(十惡)·팔의(八議)로 나누어서, 죄의 실제와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설명하였던 것이었다.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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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양(樂羊-생몰불명)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무장이었고, 문후(文侯)의 명령으로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해서 멸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한비자(韓非子)에 의하면 그가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하려고 했을 때쯤에 자신의 아들이 그 중산국(中山國)에 인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공격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중산국(中山國)은 그 아들을 죽였고, 그런 다음에는 그 시체를 삶아서(야채도 함께 넣어서 스프로 만들었다고 함) 요리를 해서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러자 그는 태연하게 그것을 맛봤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또 자신의 결의가 그만큼이라는 것을 그 적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며, 그런 다음에 그 중산국(中山國)을 멸망시켰다. 그 후, 문후(文侯)가 그 소리를 듣고 그의 충성에 감동했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 그를 비방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는데, 그러자 그는 문후(文侯)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 아들로 만든 요리도 먹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의 것은 더 말을 해서 무얼 하겠습니까?> 그 후, 악양(樂羊)은 중산국(中山國)에서도 제일 컸던 영수(靈壽)란 곳을 포상으로 받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식으로 만든 요리를 먹고 전공을 올렸다는 이유로, 오히려 문후(文侯)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그와 그의 자손들은 그 영수(靈壽)에서만 살았으며, 악양(樂羊)은 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명장(名將)이었던 악의(樂穀)의 선조로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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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문표(西門豹-생몰불명)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복상(卜商=子夏)의 문하에서 정치를 배웠다. 그리고 또, 같은 제자였던 이극(李克)과 함께 위(魏) 문후(文侯)를 섬겼으며, 당시 토지가 황폐해 있었다던 업(鄴)의 지사(知事)에 기용되었다. 그러자 그는 먼저 그곳의 농민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애로사항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또 당시, 그곳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미신(迷信)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또 해마다 그 근처 강에서 살고 있다던 신(神-河伯)에게 어린 처녀와 아주 많은 재보(財寶)를, 그것도 무녀(巫女)와 삼노(三老)라고 불리던 장노(長老)들과 그 의식을 관리하던 관리(官吏)들에게 바쳐서, 그것을 그 강에 빠뜨리는 인신공양(人身御供)이란 것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거기다 또 그렇게 모았던 재보(財寶)란 것이 아주 엄청난 양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또 그 즈음에는 어린 딸을 가졌던 집들이 멀리 도망을 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들이 경작하고 있던 논밭들은 그대로 방치되어서 황폐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서문표(西門豹)가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고, 그래서 또 백성들은 그 의식(儀式)에 대한 하소연을 했지만, 그러나 그때, 서문표(西門豹)는 그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그곳에 모였던 백성들은 서문표(西門豹) 역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모두들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때, 서문표(西門豹)는 이미 그런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며, 거기다 그곳에는 관개(灌漑) 또한 절실하다고 판단했지만, 그러나 그 강(江)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그 정리부터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의식이 거행되던 날이 왔고, 그러자 그 강(江)가에는 무녀(巫女)들이 모여들었으며, 서문표(西門豹)도 그것을 참관한다는 명목으로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그 행사에 참석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제물(祭物)이 될 처녀가 나타나자 서문표(西門豹)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래도 명색(名色)이 제물인데, 저렇게 못생긴 처녀로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내가 좀 더 고운 처녀를 데려올 것이니 강의 신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는 또 <아, 그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인데, 그러면 또 강의 신이 더욱 노(怒)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그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 강의 신과 친한 사람을 사자(使者)로 보내야겠군!> 그리고는 그 의식을 주관하던 노파(老婆) 무녀를 그 강에 빠뜨렸다. 그런데 조금 기다렸어도 그 노파(老婆)가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그 노파(老婆)가 데리고 왔던 제자 무녀(巫女)들을 그 사자(使者)로 모두 물에 빠뜨렸다.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노파(老婆) 무녀(巫女)를 보내도 소식이 없고, 그 제자 무녀들을 보냈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강의 신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하는 수 없이 저 삼노(三老)들을 보내볼 수밖에 없겠군!> 그런 다음 그 삼노(三老)들도 차례로 물에 빠뜨렸다. 하지만 또 잠시 기다렸어도 그들 역시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엄청난 재보(財寶)를 거둬들였던 관리들 차례인가?> 그러자 그 관리들이 그 앞으로 달려와서 엎드려 절하면서 이렇게 사정을 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하고! 그런 다음 그들은 이마를 땅에 찧어서 이마에서 피가 흘렀는데, 그러자 그는 잠시 더 그런 모습을 지켜본 후에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물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 그럭저럭 물의 신도 만족을 한 모양이군! 그러니 우리도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그러자 그 후로는 그런 의식이 사라졌다고 하며, 그곳에서 미신도 일절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서문표(西門豹)는 업(鄴) 부근 촌들의 장노(長老)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황하(黃河)와 장하(漳河)에서 물을 끌어들인 후, 업(鄴)의 논밭으로 관개(灌漑)하는 대사업을 실시했다. 그러자 업(鄴)의 백성들은 <지금 이대로도 그럭저럭 살만한데, 뭐 하러 저렇게 힘든 일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에 대해서 서문표(西門豹)는 <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이해시킬 마음이 전혀 없소! 왜냐하면, 그 결과로 당신들의 자손들이 혜택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요! 그러므로 또, 100년 정도 지나면 분명히 그때의 사람들은 이 일을 잘 한 일이라고 평가를 할 것이요!>라고 말을 하고는 그 공사를 계속했다. 그러자 그 후, 업(鄴)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위(魏)는 강국(强國)이 되었으며, 이어서 열후(列侯)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자 그 후, 업(鄴)의 사람들은 풍족하게 살았으며, 그리고 또 아주 나중이었던 한(漢)왕조가 그 수로(水路)를 변경하려고 했을 때, 그곳의 나이든 노인들은 그것을 반대했으며, 그것으로 서문표(西門豹)의 예언은 이루어졌고,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또 그를 기리는 사당(祠堂)은 그 장하(漳河) 주변에 다수(多數) 분포해 있다고 하며, 삼국시대 때, 조조(曹操)는 그 서문표(西門豹)의 사당 부근 서쪽에 자신의 묘를 만들어달라고 유언까지 남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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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하(子夏-기원전 507년?부터 기원전 420년)는 공자(孔子)의 문인(門人)으로, 성(姓)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字)는 자하(子夏)였고, 위(偉-河南省)나라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그는 진(晋)의 온국(溫國-河南省 焦作市)출신이었다고도 했는데, 그는 학문을 좋아해서 공문(孔門) 십철(十哲) 중 한사람이 되었다.

 참고: 공문십철(孔門十哲)은 四科十哲이라고도 하며, 공자(孔子)의 제자들 가운데, 특히 학덕이 뛰어났던 열 명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을 열거하면, 먼저 덕행(德行)에서 안연 또는 안회(顏淵=顔回)와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 또는 염옹(仲弓=冉雍)이 있었고, 언어(言語) 즉, 변설(辯舌)에서 재아(宰我)와 자공(子貢)이 있었으며, 정사(政事)에는 염유 또는 자유(冉有=子有)와 계로 또는 자로(季路=子路)가 있었고, 문학(文學) 즉, 학문(學文)에서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있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소개는 일단 생략하며, 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나친 것은 못 미친 것보다 못하다>라는 것으로, 불급(不及)으로 평가된 인물이었다.(論語의 先進편) 그리고 위(魏)의 문후(文侯)에게 초대되어서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었으며,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 서문표(西門豹) 등의 제자를 배출(輩出)했다. 그리고 또 예기(禮記)에 의하면, 자신의 자식이 죽었을 때, 그는 너무나도 슬퍼했던 나머지 실명(失明)까지 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동문(同門) 증자(曾子)가 그를 찾아갔는데,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왜, 나에게만 그런 불행한 일이 찾아오는가?!> 그러자 증자(曾子)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처자식을 돌보지 않아왔던 것은 바로 너였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하고는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 그 모든 것이 다 나의 잘못이었네!> 그리고 그의 학풍은 나중에 순자(荀子)에게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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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산국(中山國)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중남부(中南部)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중산(中山)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 전에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이래(以來) 중원(中原) 북부에 있었던 백적(白狄)이 건국했던 도시국가로, 선우(鮮虞)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당초에는 태행산맥(太行山脈-현재 중국의 북부에 위치해있는 산맥으로, 山西省, 河南省, 河北省 3省의 경계부분에 위치해 있음) 서쪽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414년에 무공(武公=中山武公. 재위 기원전 414년부터 기원전 407년까지. 中山国의 第2代 公이었음)이 백성들을 이끌고 그 태행산맥을 넘었으며, 그리하여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중부에 그 중산국(中山國)을 건국했다.(하지만 원래의 영토를 완전히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음) 그리고 그 무공(武公)은 주(周)나라 정왕(定王)의 손자였고, 그 때문에 이민족이었으면서도 주(周)왕조의 성(姓)인 희(姬)를 사용했다. 그리고 또, 그 나라는 당초부터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기원전 407년에는 위(魏) 악양(樂羊)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까지 함락 당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산(大山)이란 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나 그로부터 20년간이나 환공(桓公)의 지휘로 항전을 계속해서 결국 나라를 부흥시켰다. 그 후, 중산국(中山國)은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해서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또 기원전 296년에 조(趙)의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또 그 나라는 중원(中原)의 제국(諸國)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나라였고, 유목(遊牧)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남아있는 사료(史料)는 미흡하며, 그 때문에 또 <신비(神秘)의 왕국(王國)>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또 그랬던 것이 197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에 걸쳐서 석가장(石家莊) 부근의 평산(平山)현(縣)에서 그 나라의 도성(都城)이었던 영수(靈壽)고성(古城)이 발굴되었고, 그곳에서 금과 은, 동, 옥 그리고 도기(陶器) 등의 호화(豪華)화려(華麗)한 문물(文物)들과 함께, 유목적인 문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아주 호사(豪奢)스러운 천막(天幕)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리고 또 특히, 그 유물들 중에서는, 그 당시의 술(酒)이 보존상태가 아주 좋은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한때 그것이 화제(話題)가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중산국(中山國)의 역대 왕들을 소개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文公(?年-紀元前415年)
 武公(紀元前414年-紀元前406年)
 桓公(紀元前388年-紀元前340年)
 成公(紀元前340年-紀元前328年)
 王(黌) (紀元前327年-紀元前313年)
 王(次/虫) (紀元前312年-紀元前299年)
 王尚 (紀元前298年-紀元前296年)







  <戰國時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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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3)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춘추시대의 諸國>


  <춘추시대(春秋時代) 개요(槪要)>

 춘추시대(春秋時代)는 중국의 시대구분 중 하나로, 기원전 770년 주(周)의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 살해되었고, 그래서 낙읍(洛邑-成周)으로 천도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진(晋)이 삼국(三國-韓, 魏, 趙)으로 분열되었던 기원전 403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춘추(春秋)의 명칭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인 춘추(春秋)가 기술되었던 시대라는 의미도 함께 가진다. 그리고 그 춘추시대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아울러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동주(東周)시대라고도 말해진다. 그리고 몇 번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지만, 그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소개하는 것은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그리고 또, 앞의 이야기를 상기하는 차원에서 조금 설명하고 넘어가면, 주(周) 유왕(幽王)의 악정에 의해서 제후들 간에 불만이 높아졌고, 그리하여 기원전 771년에 제후들은 유왕(幽王)을 배신해서 살해했다. 그러자 그 다음해에 유왕(幽王)의 아들(宜臼=平王)은 정(鄭) 무공(武公)의 도움을 받아서 낙읍(洛邑)에서 주(周)를 재흥(再興)시켰으며, 그 후에는 동주(東周)라고 불리면서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까 주(周)가 동천(東遷)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정(鄭)의 무공(武公)은 그 후에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그 후에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던 장공(莊公)의 시대에는 오히려 주(周)에 배척당했으며, 거기다 주(周) 환왕(桓王)에게 공격까지도 받았다. 하지만 장공(莊公)은 그것을 보기 좋게 물리쳤고, 그러자 또 신하들이 끝까지 추격할 것을 진언했지만, 그러나 장공(莊公)은 <그래도 천자(天子)인데, 그런 모습은 좋지가 않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또, 그 일화(逸話)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주왕(周王)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과 함께, 그래도 그때까지는 제후들 간에 주왕(周王)에 대한 일말(一抹)의 경의(敬意)는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지만 그 정(鄭)도 장공(莊公) 이후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그에는 또, 왕실의 경사(卿士-왕실직속)들이 모두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다스리는 땅도 부족했고, 그래서 또 정(鄭)의 국력 자체는 중하(中下)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정(鄭)을 대신하고 나왔던 나라가 바로 제(齊)였으며, 제(齊)는 또 주(周) 건국의 대(大)공신이었던 태공망(太公望)을 시조로 해서 당시 동방(東方)의 대국이 되어 있었던 나라였는데, 하지만 또 제15대째의 희공(釐公)이 사망하자 그 후계를 놓고 다툼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내란을 수습했던 환공(桓公)과 그 재상 관중(管仲)의 활약으로 크게 비약(飛躍)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당시, 동방(東方)에서는 신참(新參)이라고 할 수 있었던 초(楚)가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당시, 주(周)는 그 초(楚)에 흡수되고 있었던 소국(小國)들조차 도울 힘이 없었고, 그 결과로 주변의 소국들은 초(楚)에 의해서 무너져갔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 환공(桓公)이 등장해서 그 초(楚)에 대항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까지 초(楚)에 아직 흡수되지 않았던 소국들은 그때부터 제(齊)를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환공(桓公)은 초(楚)와 대결해서 물리치고는 소릉(召陵)에서 초(楚)가 주(周)에 대해서 무례했던 일에 대해서 질책만 했고, 초(楚)를 침공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환공(桓公)은 제후들 간에 맹주가 되었으며, 기원전 651년에는 규구(葵丘-현재의 河南省 藺考)에서 회맹을 가졌다. 그러자 제후들은 환공(桓公)이 주왕(周王)을 대신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고, 그 업적에 의해서 환공(桓公)은 패자로 불리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했던 환공(桓公)도 관중(管仲) 사후에는 총기가 흐려져서 국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 환공(桓公)이 죽은 후에는 또 그 후계를 놓고 쟁탈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제(齊)는 그때부터 패권(覇權)을 내놓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신해서 나타났던 사람이 바로 송(宋)의 양공(襄公)이었는데, 그런데 이미 소개한대로 그 송(宋)은 은(殷)의 유민들이 세웠던 나라로, 당시 국력은 중간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양공(襄公)의 등장으로 인해서 환공(桓公) 사후의 혼란스러웠던 천하는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 후, 양공(襄公)은 효공(孝公)을 제(齊)의 왕으로 즉위시켰으며, 그 후에 우(盂-河南省 睢)에서 회맹을 열었지만, 그러나 또 송(宋)이 회맹의 주도권을 가진데 불만을 품었던 초(楚)의 자옥(子玉)에게 양공(襄公)은 납치되어서 감금당했다. 그리고 그 후, 양공(襄公)은 귀국해서 초(楚)와의 결전에 들어가기도 했지만(泓水의 싸움), 그러나 또 이미 소개한 <송양(宋襄)의 인(仁)> 때문에 대패했고, 그것으로 그 역시 패권을 내놓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 다음에 나타났던 사람이 진(晋)의 문공(文公)이었고, 그 진(晋)은 또 무공(武公)과 헌공(獻公) 그 2대(代)에 주변의 제국들을 병합해서 크게 신장했지만, 그러나 헌공(獻公)의 애첩 여희(驪姬)가 일으켰던 소동에 의해서 문공(文公) 외에 공자(公子)들은 국외로 도망을 가야하는 신세까지 겪었다. 하지만 결국 문공(文公)은 그 10수년 후에 진(秦)의 도움을 받아서 귀국했고,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문공(文公)은 주(周)왕실의 내분을 수습했고, 초(楚)와 성복(城濮)에서 싸워서 대승했던 등, 업적을 쌓았으며, 그 결과 천토(踐土-河南省 温県)에서 주(周)의 양왕(襄王)을 초대해서 회맹을 가진 후, 제후들의 맹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문공(文公)은 환공(桓公)과 더불어서 춘추오패의 대표 격이 되었으며, 나중에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 문공(文公)에 전후해서 활약했던 사람 중에 서(西)쪽의 대국이었던 진(秦)의 목공(穆公)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목공(穆公)은 서융(西戎)과 싸워서 승리했으며, 백리해(百里奚) 등, 타국 출신자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소국들을 병합해서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또, 그 여희(驪姬)의 난(亂) 때, 진(晋)에서 혜공(惠公)을 옹립시켜주었으며, 하지만 그 후에 그 혜공(惠公)이 배신을 하자 한(韓)의 땅에서 대파했다. 그 후, 목공(穆公)은 혜공(惠公)의 뒤를 이어서 혜공(惠公)의 형도 옹립시켰는데, 그가 바로 문공(文公)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았지만, 문공(文公)이 죽자 다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러자 또 목공(穆公)은 진(晋)을 대파했다. 그러나 그 목공(穆公)도 죽었을 때 가신(家臣)들을 거의 다 순사(殉死)시켰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의 진(秦)은 크게 후퇴했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 패권을 잡았던 사람은 남쪽의 대국이었던 초(楚)의 장왕(莊王)이었다. 그리고 그 초(楚)는 처음부터 주(周)와 관계없이 성립했던 나라였고, 그 후에 실력으로 호북(湖北)과 호남(湖南)을 거머쥐었으며, 그러자 또 주(周)에서 자작(子爵)의 위(位)를 내렸지만, 그러나 국력에 비해서 그 위(位)가 너무 낮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왕으로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장왕(莊王)의 시대가 되자 장왕(莊王)은 그때까지 조정을 어지럽혔던 악신(惡臣)들을 모두 일소(一掃)했으며, 그 자리에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시켰다. 그리하여 국내를 다스리게 된 장왕(莊王)은 풍부했던 병력으로 북상해서 주변의 소국들을 위복(威服)시켰고, 낙양(洛陽) 근처까지 진출해서 대(大)열병식(閱兵式)을 거행했던 것으로 주(周) 왕실을 위협했다. 거기다 정(鄭)의 수도까지 포위했기 때문에,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달려왔던 진군(晋軍)을 필(邲)에서 대파했다. 그러자 그 결과 중원(中原)의 소국들은 모두 초(楚)에 복종했다.

 그 후, 제후들의 싸움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또 당시, 제후(諸侯) 아래였던 대부(大夫)와 사(士)로 불리던 중급에서 하급의 귀족계급들이 발흥(勃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또 그 후에는 제국(諸國)의 실권이 그들에게 옮겨갔다거나, 그러자 또 그들은 타국과의 싸움보다는 국내에서 같은 귀족들과 싸우는데 더 많이 바빴던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러했던 귀족들에 대해서도 조금 살펴보면, 먼저 진(晋)의 6경<卿-智・魏・韓・趙・中行・士(范)의 六氏>이 있었고, 그 다음에 제(齊)의 6경<国・高・鮑・崔・慶・陳(田)의 六氏>이 있었으며, 노(魯)에도 3환<桓-仲(孟)・叔・季의 三氏>이 있었고, 정(鄭)에도 7목(穆-罕・駟・豊・游・印・国・良의 七氏)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서로 싸우고 반목했던 일도 있었지만, 그러나 동맹을 채결해서 다른 귀족들과 대립했던 일도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군주와도 대립해서 그 군주를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했던 현상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통적인 신분체제를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그 때문에 또 당시 유교(儒敎)를 일으켰던 공자(孔子) 또한 그 전통체제의 붕괴에 대해서 분개(憤慨)했으며, 그것이 또 그의 학문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러했던 배경으로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대립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기원전 546년에 미병(弭兵-전쟁을 그친다는 의미임)의 회(會)가 진(晋)과 초(楚)의 사이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또 당시, 귀족들의 신장(伸張)은, 그때까지는 그다지 국정(國政)에 참가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국정(國政)의 무대에 서게 해주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그 때문에 또 그 시기에는 명재상이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이었던 사람으로 제(齊)의 안영(晏嬰)과 정(鄭)의 자산(子産) 그리고 진(晋)의 숙향(叔向) 등이 있었으며, 그리고 또 당시에는 대국(大國) 동사(同士)들이 직접 마주치는 것은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정(鄭)의 자산(子産)이나 노(魯)의 공자(孔子) 등이 활약했던 소국(小國)외교가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자산(子産)은 중국 최초로 성문법(成文法)을 제정했던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것은 또 그 당시까지만 했어도 법률이란 상류계층에서만 암묵적으로 행해져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당시 새로 발흥하고 있었던 계층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성문법의 필요성은 그만큼 컸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즈음에는, 군주(君主)는 귀족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될 정도까지 되었고, 그래서 또 진(晋)에서는 선술(先述)했던 그 6경(卿)에서 둘이 탈락하고 남았던 4씨(氏-知・魏・韓・趙)가 모든 것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제(齊)에서는 또 일찍이 진(陣)에서 망명해 왔던 전 씨(田氏)의 힘이 특히 강했고, 초(楚)에서는 유력(有力)귀족과 왕족과의 싸움으로 인해서 국정이 혼란했다.

 그런 한편, 남쪽의 장강(長江) 유역에서는 오(吳)와 월(越)이 신흥세력을 펴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吳)에서는 합려(闔閭)와 부차(夫差) 그 두 군주와 함께 명신이었던 손무(孫武)와 오자서(伍子胥)가 힘을 합쳤고, 그리고 또 월(越)에서는 구천(句踐)과 범려(范蠡)가 힘을 합쳐서 그 두 나라는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 오(吳)는 초(楚)의 수도를 함락시켜서 멸망직전까지 몰아갔던 적도 있었고, 이어서 월(越)을 쳐서 복속시켰으며, 그리하여 황하(黃河)유역까지 진출해서 당시, 제후들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었던 진(晋)과도 맞붙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착실하게 내정(內政)을 가다듬었던 월(越)이 그 오(吳)를 쳤고, 그러자 오(吳)는 멸망했다. 그리고 그 월(越)도 구천(句踐) 사후에 초(楚)에 멸망했다. 그리하여 완전한 이민족(異民族)인 초(楚)가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그것으로 그때까지 주(周)왕조를 중심으로 내려왔던 질서는 무의미화 되었으며, 오월(吳越)은 제철(製鐵)의 선구(先驅)지(地)로서, 그 즈음부터 본격적인 철기시대에 들어갔었다든지 했던 것으로부터, 그래서 그 오월(吳越)항쟁 직후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는 것이다.

 아
무튼 또, 그때를 전후해서 제(齊)에서는 거의 완전하게 전 씨(田氏)가 국정을 주무르고 있었고, 그리하여 기원전 386년에는 전화(田和)에 의해서 나라가 찬탈(簒奪)되었으며, 그리하여 또, 태공망(太公望) 이래, 내려왔던 제(齊)는 결국 멸망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 그 후로 제(齊)는 전제(田齊)로 불리게 되었으며, 앞의 제(齊)와는 구분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춘추시대(春秋時代)의 군제(軍制) 등에서도 알아보면, 그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종법(宗法)에 기초한 군제(軍制)가 기본이었으며, 일군(一軍)을 12500명 정도로 했고, 대국(大國)에서는 삼군(三軍), 그 다음의 나라는 2군, 그리고 제일 작은 소국들은 일군(一軍)으로 정해두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그에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참고: 종법(宗法)은 제사의 계승과 종족의 결합을 위한 친족제도의 기본이 되는 법으로, 원래는 중국 주나라 때에 적장자상속제 확립을 위하여 생겨난 제도였으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초기에 전래되었고, 고려 말기에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또 그에는 조종묘의 제사나 공동향찬, 복상(服喪), 동종불혼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또, 삼군(三軍)을 보유했던 나라는 진(晋)과 초(楚) 그리고 제(齊) 정도였으며, 제(齊)의 경우에서는 또, 일군(一軍)이 약 1만 명 정도의 규모였다. 그리고 또 6군(軍)을 가졌던 나라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주(周) 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 주(周)는 춘추시대 때부터 급속하게 쇠퇴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6군(軍)도 해체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 후에 진(晋)도 새로운 삼군(三軍)을 더해서 6군(軍)으로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그것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의 전쟁은 주로 병차전(兵車戰)이었으며, 기마(騎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철제(鐵製)무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의 중화(中華)사상은 주로 차(車-馬車・兵車)를 사용하는 것이 대세였고, 기마(騎馬)는 적융(狄戎-이민족)들이나 타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대부(大夫)들은 병차(兵車)를 타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그 주위로 보병(步兵)을 배치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는 전쟁에 임하기 전에 점(占)을 치는 풍습도 있었으며, 전쟁에 임해서도 상대방에게 예(禮)를 다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하지만 그것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라졌다.





  <春秋時代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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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2)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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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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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의 위치도>


 ♣ 월(越-기원전 600년경부터 기원전 334년)은 춘추시대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주변에 있던 나라로, 수도는 회계(會稽-현재의 浙江省 紹興市)였고, 나중에 한민족(漢民族)형성의 중핵(中核)이 되었던 황하(黃河)유역의 도시국가 군(群)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異質的)이었으며, 백월(百越)에 속하는 민족을 주체(主體)로 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인접국이었던 오(吳)와 자주 다투었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515년에 초(楚)로 원정을 떠났던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나라를 비웠던 사이에 월왕(越王) 윤상(允常-春秋左氏傳에서는 公子 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음)은 오(吳)를 공격했고, 그리하여 오(吳)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그 혼란했던 틈을 타서 실제(實弟)였던 공자(公子) 부개(夫槪)가 모반을 일으켰던 등, 합려(闔閭)의 입장은 크게 위협을 받기도 했었고, 그러자 또 합려(闔閭)는 그 월(越)을 한껏 증오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496년에 윤상(允常)이 사망했고, 그러자 그 자리를 구천(句踐)이 이어받았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합려(闔閭)가 월(越) 공략에 나섰지만, 그러나 오히려 부상을 당하고는 죽었다.

 
그 후, 오(吳)에서는 부차(夫差)가 즉위해서 합려(闔閭)의 복수를 맹세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또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 후에 부차(夫差)는 합려(闔閭)의 원수를 갚았으며, 그 결과로 구천(句踐)은 부차(夫差)로부터 오(吳)에서 종살이를 할 것을 명받았다.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그 사이에 복수심을 키우면서 범려(范蠡)의 도움을 받았고, 그러자 또 범려(范蠡)는 착실하게 월(越)의 힘을 키워갔다. 그리고 또 그 이후는 이미 소개한대로 부차(夫差)가 회맹을 가졌을 때, 월(越)은 오(吳)를 공격했으며, 그것으로 대 타격을 받았던 오(吳)는 결국 기원전 473년에 멸망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월(越)의 수도를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낭사(琅邪)로 천도했으며(그러나 江蘇省 連雲港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 다음 제후들과 회맹해서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구천(句踐)은 참언을 받아서 자신의 심복이었던 문종(文種)을 숙청했으며, 그 전에 범려(范蠡)는 구천(句踐)의 시의심(猜疑心)을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제(齊)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그 후, 범려(范蠡)는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불리면서 대부호(大富豪)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465년에 구천(句踐)도
사망했다.

 
시이광(施夷光=西施. 생몰불명)은 중국의 유명한 미녀로,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 등과 아울러서 중국 고대의 4대(大)미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이며, 중국에서는 서자(西子)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리고 또 그녀는 기원전 5세기였던 춘추시대 말기에 절강성(浙江省) 소흥 시(紹興市) 제기 현(諸曁県-현재의 諸曁市)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 현대에 널리 알려진 그 서시(西施)라는 이름은 당시 그녀의 출신지였던 저라촌(苧蘿村)에는 시(施)라는 성(姓)을 가진 가족들이 동서(東西) 두 마을로 나뉘어서 살고 있었는데, 그리고 또 그녀는 그때 서쪽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서촌(西村)의 시(施)→서시(西施)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녀는 그 후에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획책하던 중에 부차(夫差)에게 헌상되었던 미녀들 중 한명이었고, 그 중에는 또 서시(西施) 외에도 정단(鄭旦)이란 미녀 등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려운 가정에서 나무장수의 딸로 태어났다는 시이광(施夷光)은 냇가에서 자주 빨래를 했었다고 하며, 그리고 또 부차(夫差)에 대한 책략은, 부차(夫差)로 하여금 그녀에게 빠지게 한 후, 오(吳)를 약체(弱體)화 시키겠다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결국 월(越)은 오(吳)를 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하지만 또 전해오는 소문에 의하면, 구천(句踐)의 부인이 그녀의 미모를 시기해서 구천(句踐)과 다시 만나지 못하게 했다든지, 오(吳)의 백성들이 그녀가 오(吳)를 멸망시킨 요괴(妖怪)라고 판단하고는 그녀를 산 채로 가죽부대에 넣어서 장강(長江)에 던져버렸는데, 그런데 또 그 후에 장강(長江)에서 대합(大蛤)이 잘 잡혔기 때문에, 그래서 또 사람들은 그것이 그녀의 혀(舌)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중국에서는 대합을 가리켜서 <서시(西施)의 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미인계(美人計)를 책안(策案)했던 범려(范蠡)를 따라갔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그녀의 다리가 무 다리였기 때문에, 그래서 항시 긴 옷을 입는 것으로 그것을 감추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강에서 빨래를 했을 때 다리를 내놓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봤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을 잊었다라고 하는 속설로부터 <침어미인(沈魚美人)>이란 말도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로부터 생긴 고사(故事) 중에서 유명한 것으로 <동시효빈(東施效顰-동시, 곧 못생긴 여자가 西施의 눈썹 찌푸림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是非나 善惡의 判斷 없이 남을 흉내 냄을 이르는 말)>이란 것이 있으며, 그것은 위의 설명과 함께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설명은 생략할 것이지만, 그러나 또 그냥 넘어가기에는 약간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서 대충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장자(莊子)의 천운(天運)에 의하면, 서시(西施)에게는 가슴이 아픈 지병(持病)이 있었는데, 그래서 어느 날 그 때문에 발작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누르면서 미간(眉間)을 찌푸렸다고 했으며, 그 후로도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모습은 어느덧 그녀의 버릇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동네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연약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했으며, 그 후로는 또 그녀를 볼 때마다 동네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어느 마을(東施로 봄)에 아주 못생긴 추녀(醜女)가 한명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어느 날, 서시(西施)의 그런 모습을 보고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을 목격한 그녀는 자신도 그 서시(西施)처럼 가슴이 아픈 듯이 흉내를 내고 또 미간(眉間)도 찌푸리면서 동네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자 또 그렇지 않아도 못생긴 얼굴에 잔뜩 찡그리기까지 했으니 그 얼굴은 더욱 못 봐줄만 했다고 하며, 그러자 또 동네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기괴한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만 나타나면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는데, 심지어는 거지들조차도 모두 그 동네를 떠나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그 후에 남을 흉내 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을 동시효빈(東施效顰)이라고 말하게 되었으며, 다른 말로는 <서시봉심(西施捧心)>이라고도 표현한다고 한다.


<蘇州市에 있는 西施橋>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334년에 구천(句踐)의 6세(世) 손(孫)이었던 무강(無疆)의 대(代)에 초(楚)의 위왕(威王)이 월(越)을 공격했고, 그러자 무강(無疆)은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또 초(楚)의 포로로 잡힌 후에 바로 처형당했으며, 그것으로 월(越)은 멸망했다. 그러자 또 그때, 일부의 월(越)왕족들이 민(閩-현재의 福建省)이란 곳으로 도망을 가서 민월(閩越)이라고 불리면서 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서 진(秦)에 멸해졌다. 그리고 또 일설에는 그 중에서 베트남으로 내려갔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의 베트남은 그 남하(南下)했던 월(越) 부족의 후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 월(越)에서는 동(銅)을 생성(生成)하는 기술이 탁월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앞에서 소개한 구천(句踐)의 검도 만들어졌고, 그리고 또 장자(莊子)에 의하면, 당시 월(越)의 사람들은 단발(斷髮)을 하고 있었으며, 상반신은 벗고 다녔고, 몸에는 문신(文身)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래는 월(越)의 역대군주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越王 勾践(在位 紀元前496年-紀元前494年)
 呉의 支配로 인해서 空位:紀元前 494年-紀元前491年
 越王 勾践(在位 紀元前491年-紀元前464年)
 越王 鹿郢(適郢) (在位 紀元前 463年-紀元前458年)
 越王 不壽(在位 紀元前 457年-紀元前448年)
 越王 翁(州句) (在位 紀元前 447年-紀元前411年)
 越王 翳(在位 紀元前 410年-紀元前375年)
 越王 錯枝(在位 紀元前374年-紀元前373年)
 越王 無余(之侯) (在位 紀元前 372年-紀元前361年)
 越王 無顓(在位 紀元前 360年-紀元前343年)
 越王 無彊(在位 紀元前 342年-紀元前306年)




  <越 끝>

  <춘추오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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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1)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
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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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의 위치도>


 ♣ 월(越-기원전 600년경부터 기원전 334년)은 춘추시대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주변에 있던 나라로, 수도는 회계(會稽-현재의 浙江省 紹興市)였고, 나중에 한민족(漢民族)형성의 중핵(中核)이 되었던 황하(黃河)유역의 도시국가 군(群)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異質的)이었으며, 백월(百越)에 속하는 민족을 주체(主體)로 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인접국이었던 오(吳)와 자주 다투었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515년에 초(楚)로 원정을 떠났던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나라를 비웠던 사이에 월왕(越王) 윤상(允常-春秋左氏傳에서는 公子 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음)은 오(吳)를 공격했고, 그리하여 오(吳)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그 혼란했던 틈을 타서 실제(實弟)였던 공자(公子) 부개(夫槪)가 모반을 일으켰던 등, 합려(闔閭)의 입장은 크게 위협을 받기도 했고, 그러자 또 합려(闔閭)는 그 월(越)을 한껏 증오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496년에 윤상(允常)이 사망했고, 그러자 그 자리를 구천(句踐)이 이어받았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합려(闔閭)가 월(越) 공략에 나섰지만, 그러나 오히려 부상을 당하고는 죽었다.

 
그 후, 오(吳)에서는 부차(夫差)가 즉위해서 합려(闔閭)의 복수를 맹세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또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 후에 부차(夫差)는 합려(闔閭)의 원수를 갚았으며, 그 결과로 구천(句踐)은 부차(夫差)로부터 오(吳)에서 종살이를 할 것을 명받았다.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그 사이에 복수심을 키우면서 범려(范蠡)의 도움을 받았고, 그러자 또 범려(范蠡)는 착실하게 월(越)의 힘을 키워갔다. 그리고 또 그 이후는 이미 소개한대로 부차(夫差)가 회맹을 가졌을 때, 월(越)은 오(吳)를 공격했으며, 그것으로 대 타격을 받았던 오(吳)는 결국 기원전 473년에 멸망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월(越)의 수도를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낭사(琅邪)로 천도했으며(그러나 江蘇省 連雲港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 다음 제후들과 회맹해서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구천(句踐)은 참언을 받아서 자신의 심복이었던 문종(文種)을 숙청했으며, 그 전에 범려(范蠡)는 구천(句踐)의 시의심(猜疑心)을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제(齊)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그 후, 범려(范蠡)는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불리면서 대부호(大富豪)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465년에 구천(句踐)도 사망했다.

 ○ 구천(句踐-?부터 기원전 465년)은 중국 춘추시대 후기 월(越)의 왕이었고, 범려(范蠡)의 도움을 받아서 오(吳)를 멸했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었으며, 구천(勾踐)으로도 표기된다. 그리고 윤상(允常)의 아들이었으며, 초(楚) 혜왕(惠王)의 외조부였다. 그는 기원전 496년에 월왕(越王) 윤상(允常)이 서거하자 즉위했으며, 그러자 숙적이었던 합려(闔閭)는 그 상(喪) 중에 대군을 이끌고 월(越)을 공격했다. 그러나 범려(范蠡)의 기책(奇策)으로 오군(吳軍)은 대패했으며, 합려(闔閭)는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 후, 구천(勾踐)은 범려(范蠡)의 진언을 받아서 부차(夫差)와 화해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던 부차(夫差)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 후, 구천(句踐)은 부차(夫差)에게 패해서 종이 되었으며, 그 사이에 범려(范蠡)가 물밑공작을 펴서 구천(句踐)을 오(吳)에서 빼냈다. 그 후, 월(越)로 다시 돌아갔던 구천(勾踐)은 오(吳)에서의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 방에다 쓴 간(肝 또는 쓸개)을 걸어두고 매일 그것을 핥으면서 오(吳)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갔다. 그리하여 앞 부차(夫差)의 <와신(臥薪)> 고사와 더불어서 <상담(臥薪)> 고사가 생겨났고, 그것으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이 되었는데, 아무튼 그 후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며, 그리고 또 오(吳)가 망한 후에 구천(句踐)은 자신의 심복 문종(文種)을 자살시켰으며, 범려(范蠡)는 제(齊)로 도망을 갔고, 그 결과 월(越)은 쇠퇴(衰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또 구천(句踐)은 <월왕구천검(越王句踐劍)>이라고 불리던 동(銅)으로 만든 8자루의 명검(名劍)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런데 그 중의 한 자루가 1965년에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県) 망산(望山) 1호 묘(墓)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아래 그림 참조. 그리고 글씨는 검에 세겨진 것이며, 내용은 越王自作이라고 되어 있으나, 진위는 알 수 없음)




 그리고 상태는 매우 훌륭하며, 그래서 또 그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서 X선 회절(回折)법으로 분석해본 결과, 검의 표면이 유화동(硫化銅=黃化銅은 황과 구리의 화합물이며, 황화 제1구리와 황화 제2구리 두 가지가 있음. 화학식은 CuS, Cu2S)의 피막으로 덮여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한편, 부차(夫差)의 창도 같은 호북(湖北)성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 범려(范蠡-생몰불명)는 중국 춘추시대 월(越)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었다. 그리고 씨(氏)는 범(范), 휘(諱)는 려(蠡), 자(字)는 소백(少伯), 월왕 구천(勾踐)을 섬겼으며, 구천(勾踐)을 춘추오패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최대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없으며, 그래서 또 그가 어떻게 윤상(允常)의 신하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인접국이었던 오(吳)에서는 합려(闔閭)가 손무(孫武)와 오자서(伍子胥)의 도움을 받아서 국강(國强)을 과시하고 있었으며, 그러자 또 윤상(允常)은 그 범려(范蠡)를 옆에 끼고 국력신장에 혼신(渾身)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기원전 496년에 윤상(允常)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구천(勾踐)이 그 자리를 잇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상중(喪中)에 합려(闔閭)는 월(越)에 대한 대공세를 폈다는 것은 이미 소개한 내용 그대로이다. 그리고 또, 그 후에 합려는 부상으로 사망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러니까 그 싸움 중에 범려(范蠡)가 펼쳤던 기책(奇策)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그때 범려(范蠡)는 결사대(決死隊-春秋左氏傳에서는 罪人들을 이용했다고 함)를 조직해서 적들 앞으로까지 행진하게 했고, 그런 다음에는 스스로 그 적군들 앞에서 목을 잘라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군(吳軍)들은 그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허둥대었다. 그러자 또 그 사이에 월군(越軍)이 쳐들어가서 그 오군(吳軍)을 격파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오(吳)에서는 부차(夫差)가 등극했고, 그는 또 월(越)에 대한 복수심을 키웠다. 그러자 또 구천(勾踐)은 그때가 호기라고 보고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는데, 그러자 범려(范蠡)가 그런 구천(勾踐)을 말렸다. 하지만 구천(勾踐)은 범려(范蠡)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기어이 출병해서 대패했으며,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부차(夫差)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 후, 구천(句踐)의 심복이었던 문종(文種)이 부차(夫差)의 측근이었던 백비(伯嚭)에게 뇌물을 주고, 부차(夫差)가 구천(句踐)을 도와줄 수 있도록 획책했다. 그리고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는 부차(夫差)에게 구천(句踐)을 죽일 것을 강변(强辯)했지만, 그러자 부차(夫差)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그 후에 구천(句踐)을 마구간지기로 삼았다.<嘗膽> 그 후에 다시 월(越)로 돌아갔던 구천(句踐)은 국정(國政)을 범려(范蠡)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그러나 범려(范蠡)는 오히려 문종(文種)을 추천했다. 그러자 구천(勾踐)은 그 두 사람을 모두 채용했고, 그때부터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구천(句踐)은 자신의 그런 속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래서 부차(夫差)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부차(夫差)의 의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범려(范蠡)는 계속해서 백비(伯嚭)에게 뇌물을 보냈으며, 오자서(伍子胥)를 모함하게 해서 부차(夫差)와의 이간을 획책했다. 그러자 역시, 오자서(伍子胥)는 결국 부차(夫差)에 의해서 자살 당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부터 부차(夫差)의 앞길을 막는 사람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부차(夫差)는 북쪽으로만 눈을 돌려서 월(越)을 경계하는데 게을리 했고, 그 후에 북(北)에서 회맹을 가졌을 때, 범려(范蠡)의 독려(督勵)를 받았던 구천(句踐)이 오(吳)를 쳤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부차(夫差)는 다시 회군(回軍)했고, 그에 또 오(吳)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구천(句踐)은 일단 부차(夫差)와 화목(和睦)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부차(夫差)는 무리하게 북(北)으로 출병해서 국력을 소모시켜갔으며, 그러자 결국 그 4년 후에 월(越)은 오(吳)와 결전에 들어갔고, 그 결과 부차(夫差)는 고소(姑蘇)산에서 자결했다. 하지만 또 그 후, 구천(勾踐)은 더 이상 적수가 없다는 생각에 교만해져 갔고, 그러자 또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범려(范蠡)는 월(越)에서 탈출했다. 그리고는 문종(文種)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 교토(狡免-교활한 토끼 또는 영리한 토끼)가 죽으면 주구(走狗-사냥개)는 삶기고, 고조(高鳥-높이 나는 새)가 사라지면 양궁(良弓-좋은 활)은 창고신세가 된다고 했다.(이 말은 나중에 韓信도 인용했음) 그리고 현재 월왕(越王)의 모습은 마치 장경오훼(長頸烏喙) 같다. 그런데 그러한 상(相)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과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어도, 그 환락(歡樂)은 함께 누리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왜 아직도 그곳에 머물고 있는가?>

 참고: 장경오훼(長頸烏喙)는 긴 목에 까마귀 부리 같이 뾰족한 입이라는 뜻으로, 특히 관상에서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한 상(相)을 이르는 말이며, 그런 사람은 참을성이 많아서 고생을 이겨 내기도 하지만, 그러나 잔인하고 욕심이 많으며, 남을 의심하는 마음이 강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안락을 누리기 어려운 상(相)이라고 함.

 그러자 문종(文種)은 범려(范蠡)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자신도 화(禍)를 피하기 위해서 칭병(稱病)하면서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그러자 또 그때, 그가 모반을 꾀한다고 하는 참언을 한 자가 나타났고, 그러자 구천(句踐)은 문종(文種)에게 칼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당신은 나에게 오(吳)를 이길 7가지의 비책(秘策)을 들려주었소. 그런데 나는 그 중에서 3가지를 사용해서 오(吳)를 물리쳤소. 그러므로 이제 남은 그 4가지의 비책은 당신의 몫이요. 그러므로 또, 나 때문에 당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을 부왕(父王-允常)께 고하고, 그 능(陵)에서 그 비책을 시험해보길 바라오!> 그러자 문종(文種)은 자살했다.

 그런데 전해오는 전설(傳說)에 따르면, 범려(范蠡)는 부차(夫差)에게 패했을 때, 그 부차(夫差)의 총기를 흐리게 하기 위해서, 당시 절세의 미인이었던 시이광(施夷光-일명 西施)을 비밀리에 부차(夫差)에게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부차(夫差)는 범려(范蠡)의 생각대로 그 시이광(施夷光)에게 빠져서 거만해지게 되었고, 그 후에 부차(夫差)가 죽은 후, 범려(范蠡)는 그 시이광(施夷光)과 함께 제(齊)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범려(范蠡)는 제(齊)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개명을 하고는 장사를 해서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제(齊)에서 범려(范蠡)의 이름을 알고는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범려(范蠡)는 <사람은 이름이 높아질수록 불행도 높아진다>라고 생각하고는, 그때까지 모아두었던 재산을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범려(范蠡)는 원래는 조(曹)의 수도였지만, 그러나 그때는 송(宋)나라 땅이 되어 있었던 정도(定陶-山東省 陶県)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도주공(陶朱公)이란 이름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도 장사를 아주 잘해서 거부(巨富)가 되었으며, 나중에 늙어서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것들을 모두 물려주고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 도주공(陶朱公)이란 이름은 후세에 대상인(大商人)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하며(陶朱의 富 故事), 그에 대한 이야기는 사기(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伝)에 묘사되어 있으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참고: 도주(陶朱)의 富 故事는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이었던 큰 부자 도주의돈(陶朱-猗頓)을 가리켰던 것으로 <도주=의돈=큰 부자>의 공식이 성립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의돈(猗頓)은 처음에는 궁(窮)한 서생에 불과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소금과 목축으로 큰 돈을 벌었고, 그래서 의씨(猗氏-山西省 安沢県)에 살면서 왕보다도 더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의돈(猗頓)의 돈(頓)은 비축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며, 그 후로 세상 사람들이 거부(巨富)를 논할 때는 도주공(陶朱公)과 의돈(猗頓)의 이름을 들먹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절강성(浙江省) 제기(諸曁) 시내에 도주(陶朱)산(山)이 있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 범려(范蠡)의 훌륭했던 활약과 출처진퇴(出處進退-관직에 남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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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0)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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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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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吳-기원전 585년경부터 기원전 473년)는 중국 춘추시대에 존재했던 군국(君國)의 하나로, 현재의 소주(蘇州) 주변을 지배했던 나라였고, 군주(君主)의 성(姓)은 희(姬), 원(元) 국호(國號)는 구오(句吳)였다. 그리고 후에 같은 국명으로, 삼국시대였던 222년에 손권이 건업(建業)에 도읍하고 강남에 세운 나라로, 280년에 서진(西晉)에 멸망했던 나라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오대십국 가운데 902년에 양행밀(楊行密)이 양저우(揚州)에 도읍하고 화이난(淮南), 장둥(江東)에 세운 나라로, 937년에 남당(南唐)에 의해 멸망했던 나라가 있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춘추시대에 존재했던 나라 오(吳)에 대해서 소개함.

 오(吳)는 그 성립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 있다. 그러니까 주(周)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6-12참조)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말자(末子)였던 계력(季歷-6-12참조)이 총명해서 그를 후계로 삼았다. 그러자 나머지 두 아들은 주(周)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바로 구오(句吳)였다. 그리고 태백(太伯)이 죽자, 우중(虞仲)이 그 뒤를 이었으며, 아주 나중에 수몽(壽夢)이 오(吳)로 개칭했다.

 아무튼, 그 6대째였던 합려(闔閭)의 시대에 오(吳)는 강국이 되었고, 그러자 합려(闔閭)는 명신(名臣)들이었던 손무(孫武=孫子)와 오자서(伍子胥) 등과 함께 당시에 초 대국이었던 초(楚)를 공략해서 수도를 빼앗았으며, 그리하여 초(楚)를 멸망 바로 직전까지 몰아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신흥국이었던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의 공격을 받아서 합려(闔閭)는 중상을 입었는데, 그러자 그는 아들이었던 부차(夫差)에게 꼭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받고 죽었다.

 ※앞에서 소개된 부분들과 중복되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러나 일단 상기하는 차원에서 계속 진행하는 것이니, 진부하게 여기시는 분께는 넓은 이해 당부 드립니다.

 
그러자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보좌를 받아서 회계(會稽)에서 구천(句踐)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그러자 또 구천(句踐)이 용서를 구했기 때문에 부차(夫差)는 구천(句踐)을 종으로 삼았다. 그러자 그 후에 구천(句踐)은 부차(夫差)를 안심시키면서 국력을 축척해나갔고, 부차(夫差)는 또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펼쳐졌던 월(越)의 책략에 빠져서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를 자살로 몰아갔고, 그런 다음 중원(中原)에서 제후들을 모아서 회맹(會盟)했지만, 그러나 또 그 사이에 오(吳)의 수도는 월(越)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 부차(夫差-?부터 기원전 473년)는 중국 춘추시대 오(吳)의 제7대 왕이었던 동시에, 최후의 왕이었다. 성(姓)은 희(姬),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한명이었으며, 선대(先代) 합려(闔閭)의 차남이었다. 그리고 오자서(伍子胥)의 도움을 받아서 한때 패자(覇者)로 이름을 올렸지만, 그러나 구천(句踐)에게 패배해서 자결했다. 그리고 원래대로였다면 제(齊)나라의 공주를 맞이했던 장형(長兄) 파(波)가 태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 파(波)는 상처(喪妻) 후에 요절(夭折)했고, 그리고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부차(夫差)에게도 왕위승계쟁탈전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가 되었으므로 생략하며, 아무튼 그 후에 합려(闔閭)는 구천(句踐)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는데, 그러자 합려(闔閭)는 자신이 죽고 나면 분명히 형제들끼리 후계를 둘러싸고 다툴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급히 부차(夫差)를 불러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는 꼭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합려(闔閭)는 죽었으며, 그리하여 부차(夫差)는 왕 위에 올랐다. 그 후, 그는 합려(闔閭)의 유언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자신의 부하에게 시켜서 합려(闔閭)의 유언을 다시 읊게 했고, 그리고 또 본인 스스로도 그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신(薪-섶나무, 땔감으로 장작 같은 것을 말하며,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이 편하게 잠들 수 없을만한 거친 풀 같은 것으로 해석함) 위에서 잤다고 해서 <와신(臥薪)>의 고사를 남겼다.(史記의 呉太伯 및 越王 句践 世家의 臥薪嘗胆에서) 아무튼 그 후,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보좌를 받아서 오(吳)의 국력을 충실하게 신장시켰고, 그러자 또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구천(句踐)이 공격을 해왔지만, 그러나 구천(句踐)은 오히려 반격 당해서 부차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그 기회에 구천(句踐)을 죽여야한다고 말을 했지만, 그러나 당시 월(越)에 뇌물을 받았던 재상(宰相) 백비(伯嚭)의 말을 받아들여서 부차(夫差)는 구천(句踐)을 살려주었다. 그 후, 부차(夫差)는 신장(伸張)했던 국력을 배경으로 북쪽으로 눈을 돌려서 황하(黃河) 유역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패자(覇者)를 꿈꾸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월(越)의 복수를 경계하면서 그런 부차(夫差)를 말렸지만, 그러나 그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기원전 484년에 오자서(伍子胥)는 백비(伯嚭)의 참언을 받아서 자결했는데, 그런데 그 이면에는 또 범려(范蠡)의 이간(離間)계(計)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또 기원전 485년, 부차(夫差)는 군을 통솔해서 제(齊)를 쳤는데, 그것은 오(吳)가 제후들의 맹주임을 각성(覺醒)시켜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처음부터 화북(華北)의 맹주 격이었던 진(晋)이 그에 반대를 했다. 그러자 또 기원전 482년, 진(晋)과 오(吳)는 맹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 틈을 노리고 월(越)이 오(吳)를 침범해서 태자 우(友)와 동족(同族)이었던 공손 미용(公孫弥庸) 그리고 장군이었던 수어요(壽於姚) 등을 포로로 데려갔다.

 
참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공손미용(公孫弥庸)이 왕손미용(王孫弥庸)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친족이나 혈연 상의 계보관계는 불명(不明)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공자(公子) 고멸(姑蔑)이라고 되어 있으며, 그가 죽은 자기 아버지의 군기(軍旗)를 월(越)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것은 월(越)의 포로가 되었던 나의 아버지의 군기(軍旗)다! 그러므로 월(越)은 나와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태자 우(友)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나라는 망한다. 그러므로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공손미용(公孫弥庸)은 우(友)의 말을 듣지 않고 군사 5천명을 데리고 월(越)에 맞섰고,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부차(夫差)의 말자(末子)였던 공자(公子) 지(地-春秋左氏傳에서는 王子 地)가 그를 원조했다. 그러자 그 결과 공손미용(公孫弥庸)은 월(越)의 무장 주무여(疇無餘)를 그리고 공자(公子) 지(地)는 같은 장수 구양(謳陽)을 포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공자(公子) 지(地)에 관해서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인솔했던 본군(本軍)이 도착하자 진영(陣營)을 더욱 공고(鞏固)히 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무튼, 하지만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고(春秋左氏傳), 그 보고를 받은 부차(夫差)는 몹시 놀라서 허둥댔다. 그리고 또 그 일이 제후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또 자연 주도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모두에게 입막음을 시켰다. 하지만 그 후, 어떤 자가 그 일을 세간에 흘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격노했던 부차(夫差)는 그 자가 누구인지를 조사했으며, 그러자 결국 일곱 명의 용의자가 적발되어서 처형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오(吳)는 진(晋)과 맹주의 자리를 다투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대부(大夫)였던 조앙(趙鞅)이 공갈(恐喝)을 쳤기 때문에(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음) 하는 수 없이 부차(夫差)는 단념했다. 그리고 그 돌아오던 도중에 백비(伯嚭)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여서 의도적으로 천천히 귀국했으며, 그리하여 그 도중에 송(宋)을 공략했다. 하지만 그때, 월(越)도 오(吳)를 단숨에 제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일단 두 나라는 화목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월(越)에 의한 격심한 공세는 계속되었으며, 그리고 또 기원전 475년에는 오(吳)의 공자(公子) 경기(慶忌)가 부차(夫差)에게 <왕은 자신의 품행을 고치지 않으면 언젠가는 망할 것이요!>라고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자 또 경기(慶忌)는 영지(領地)였던 애(艾)로 돌아갔다가 곧바로 초(楚)로 가버렸다.

 참고: 경기(慶忌)는 오월춘추(吳越春秋) 및 동주열국지(東周列国志)에 의하면, 오왕(吳王) 요(僚)의 아들로,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던 합려(闔閭)와 오자서(伍子胥)가 보냈던 자객 석요리(石要離 또는 要離)에게 참살(慘殺)되었다고 설정되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겨울에, 월(越)이 오(吳)를 공격하자 경기(慶忌)는 다시 귀국했으며, 그리고는 다시 부차(夫差)에게 다음과 같은 진언을 올렸다. <지금이라도 불충(不忠)자들을 제거하시고 월(越)과 손을 잡으십시오!> 그러자 부차(夫差)는 격노했다. 그리고는 대부(大夫)들과 결탁해서 기어이 그 경기(慶忌)를 죽여 버렸다.(春秋左氏傳) 그리고 또 기원전 473년, 드디어 수도(首都) 고소(姑蘇)가 함락되었다. 그러자 부차(夫差)는 근처에 있던 고소산(姑蘇山)으로 도망을 갔고, 그 다음에 대부(大夫)였던 공손웅(公孫雄-吳의 公族?)을 파견해서 화목을 구(걸)했다. 그리고 그때, 그러니까 공손웅(公孫雄)이 구천(句踐)에게 화목을 구걸했을 때, 그는 벗은 몸으로 엎드려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부차(夫差) 님은 전에 구천(句踐) 님을 한번 살려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구천(句踐) 님께서 부차(夫差) 님을 한번 살려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그러자 범려(范蠡)가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구천(句踐)에게 말을 했다. <하늘로부터 받은 기회를 버렸기 때문에 지금의 오(吳)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22년간이나 당했던 치욕을 벌써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러자 잠시 고민을 했던 구천(句踐)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정 그렇다면 부차(夫差)를 용동(甬東-吳의 땅에 면한 동쪽 바다에 떠있는 群島)으로 보내버립시다. 그러면 다시 재기하지 못할 것이요!> 그러자 공손웅(公孫雄)은 다시 돌아가서 부차(夫差)에게 그런 구천(句踐)의 결정을 전했다. 하지만 부차(夫差)는 <내가 이 나이에 누구를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말을 하고는 다시 <내가 죽어서도 오자서(伍子胥)를 볼 면목이 없구나!>라고 말을 하고는 얼굴에다 포(布)를 두르고 자살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부차(夫差)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러주었으며, 그런
다음 오(吳) 망국의 원흉이었던 백비(伯嚭)를 처형했고, 그리하여 오(吳)는 멸망했다.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473년, 오(吳)는 월(越)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리고 또 그때, 부차(夫差)는 구천(句踐)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그러나 그 뒤의 이야기는 위 부차(夫差)에서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오(吳)는 멸망했고, 그리고 그 두 나라의 다툼으로 인해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든가, <오월동주(吳越同舟)>란 고사도 남겼으며, 그리고 또 아래는 오(吳)의 역대 군주(君主)를 소개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한글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1. 太伯(句呉建国)
 
2. 虞仲
 
3. 季簡
 
4. 叔達
 
5. 周章
 
6. 熊遂
 
7. 柯相
 
8. 彊鳩夷
 
9. 余橋疑吾
 
10. 柯盧
 
11. 周繇
 
12. 屈羽
 
13. 夷吾
 14. 禽処
 1
5. 転
 1
6. 頗高
 
17. 句卑
 
18. 去斉

 呉王

 
1. 寿夢(紀元前585年-紀元前561年) 국명(國名)을 오(吳)로 개명(改名)
 
2. 諸樊(紀元前560年-紀元前548年)
 
3. 余祭(紀元前547年-紀元前544年)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서는 기원전 531에 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余昧(紀元前543年-紀元前527年)
    사기(史記)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서는 기원전 530년에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 僚(紀元前526年-紀元前516年)
 
6. 闔閭(紀元前515年-紀元前496年)
 
7. 夫差(紀元前495年-紀元前473年)




 <吳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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