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0)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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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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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吳-기원전 585년경부터 기원전 473년)는 중국 춘추시대에 존재했던 군국(君國)의 하나로, 현재의 소주(蘇州) 주변을 지배했던 나라였고, 군주(君主)의 성(姓)은 희(姬), 원(元) 국호(國號)는 구오(句吳)였다. 그리고 후에 같은 국명으로, 삼국시대였던 222년에 손권이 건업(建業)에 도읍하고 강남에 세운 나라로, 280년에 서진(西晉)에 멸망했던 나라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오대십국 가운데 902년에 양행밀(楊行密)이 양저우(揚州)에 도읍하고 화이난(淮南), 장둥(江東)에 세운 나라로, 937년에 남당(南唐)에 의해 멸망했던 나라가 있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춘추시대에 존재했던 나라 오(吳)에 대해서 소개함.

 오(吳)는 그 성립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 있다. 그러니까 주(周)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6-12참조)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말자(末子)였던 계력(季歷-6-12참조)이 총명해서 그를 후계로 삼았다. 그러자 나머지 두 아들은 주(周)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바로 구오(句吳)였다. 그리고 태백(太伯)이 죽자, 우중(虞仲)이 그 뒤를 이었으며, 아주 나중에 수몽(壽夢)이 오(吳)로 개칭했다.

 아무튼, 그 6대째였던 합려(闔閭)의 시대에 오(吳)는 강국이 되었고, 그러자 합려(闔閭)는 명신(名臣)들이었던 손무(孫武=孫子)와 오자서(伍子胥) 등과 함께 당시에 초 대국이었던 초(楚)를 공략해서 수도를 빼앗았으며, 그리하여 초(楚)를 멸망 바로 직전까지 몰아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신흥국이었던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의 공격을 받아서 합려(闔閭)는 중상을 입었는데, 그러자 그는 아들이었던 부차(夫差)에게 꼭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받고 죽었다.

 ※앞에서 소개된 부분들과 중복되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러나 일단 상기하는 차원에서 계속 진행하는 것이니, 진부하게 여기시는 분께는 넓은 이해 당부 드립니다.

 
그러자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보좌를 받아서 회계(會稽)에서 구천(句踐)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그러자 또 구천(句踐)이 용서를 구했기 때문에 부차(夫差)는 구천(句踐)을 종으로 삼았다. 그러자 그 후에 구천(句踐)은 부차(夫差)를 안심시키면서 국력을 축척해나갔고, 부차(夫差)는 또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펼쳐졌던 월(越)의 책략에 빠져서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를 자살로 몰아갔고, 그런 다음 중원(中原)에서 제후들을 모아서 회맹(會盟)했지만, 그러나 또 그 사이에 오(吳)의 수도는 월(越)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 부차(夫差-?부터 기원전 473년)는 중국 춘추시대 오(吳)의 제7대 왕이었던 동시에, 최후의 왕이었다. 성(姓)은 희(姬),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한명이었으며, 선대(先代) 합려(闔閭)의 차남이었다. 그리고 오자서(伍子胥)의 도움을 받아서 한때 패자(覇者)로 이름을 올렸지만, 그러나 구천(句踐)에게 패배해서 자결했다. 그리고 원래대로였다면 제(齊)나라의 공주를 맞이했던 장형(長兄) 파(波)가 태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 파(波)는 상처(喪妻) 후에 요절(夭折)했고, 그리고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부차(夫差)에게도 왕위승계쟁탈전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가 되었으므로 생략하며, 아무튼 그 후에 합려(闔閭)는 구천(句踐)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는데, 그러자 합려(闔閭)는 자신이 죽고 나면 분명히 형제들끼리 후계를 둘러싸고 다툴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급히 부차(夫差)를 불러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는 꼭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합려(闔閭)는 죽었으며, 그리하여 부차(夫差)는 왕 위에 올랐다. 그 후, 그는 합려(闔閭)의 유언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자신의 부하에게 시켜서 합려(闔閭)의 유언을 다시 읊게 했고, 그리고 또 본인 스스로도 그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신(薪-섶나무, 땔감으로 장작 같은 것을 말하며,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이 편하게 잠들 수 없을만한 거친 풀 같은 것으로 해석함) 위에서 잤다고 해서 <와신(臥薪)>의 고사를 남겼다.(史記의 呉太伯 및 越王 句践 世家의 臥薪嘗胆에서) 아무튼 그 후,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보좌를 받아서 오(吳)의 국력을 충실하게 신장시켰고, 그러자 또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구천(句踐)이 공격을 해왔지만, 그러나 구천(句踐)은 오히려 반격 당해서 부차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그 기회에 구천(句踐)을 죽여야한다고 말을 했지만, 그러나 당시 월(越)에 뇌물을 받았던 재상(宰相) 백비(伯嚭)의 말을 받아들여서 부차(夫差)는 구천(句踐)을 살려주었다. 그 후, 부차(夫差)는 신장(伸張)했던 국력을 배경으로 북쪽으로 눈을 돌려서 황하(黃河) 유역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패자(覇者)를 꿈꾸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월(越)의 복수를 경계하면서 그런 부차(夫差)를 말렸지만, 그러나 그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기원전 484년에 오자서(伍子胥)는 백비(伯嚭)의 참언을 받아서 자결했는데, 그런데 그 이면에는 또 범려(范蠡)의 이간(離間)계(計)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또 기원전 485년, 부차(夫差)는 군을 통솔해서 제(齊)를 쳤는데, 그것은 오(吳)가 제후들의 맹주임을 각성(覺醒)시켜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처음부터 화북(華北)의 맹주 격이었던 진(晋)이 그에 반대를 했다. 그러자 또 기원전 482년, 진(晋)과 오(吳)는 맹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 틈을 노리고 월(越)이 오(吳)를 침범해서 태자 우(友)와 동족(同族)이었던 공손 미용(公孫弥庸) 그리고 장군이었던 수어요(壽於姚) 등을 포로로 데려갔다.

 
참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공손미용(公孫弥庸)이 왕손미용(王孫弥庸)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친족이나 혈연 상의 계보관계는 불명(不明)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공자(公子) 고멸(姑蔑)이라고 되어 있으며, 그가 죽은 자기 아버지의 군기(軍旗)를 월(越)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것은 월(越)의 포로가 되었던 나의 아버지의 군기(軍旗)다! 그러므로 월(越)은 나와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태자 우(友)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나라는 망한다. 그러므로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공손미용(公孫弥庸)은 우(友)의 말을 듣지 않고 군사 5천명을 데리고 월(越)에 맞섰고,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부차(夫差)의 말자(末子)였던 공자(公子) 지(地-春秋左氏傳에서는 王子 地)가 그를 원조했다. 그러자 그 결과 공손미용(公孫弥庸)은 월(越)의 무장 주무여(疇無餘)를 그리고 공자(公子) 지(地)는 같은 장수 구양(謳陽)을 포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공자(公子) 지(地)에 관해서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인솔했던 본군(本軍)이 도착하자 진영(陣營)을 더욱 공고(鞏固)히 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무튼, 하지만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고(春秋左氏傳), 그 보고를 받은 부차(夫差)는 몹시 놀라서 허둥댔다. 그리고 또 그 일이 제후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또 자연 주도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모두에게 입막음을 시켰다. 하지만 그 후, 어떤 자가 그 일을 세간에 흘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격노했던 부차(夫差)는 그 자가 누구인지를 조사했으며, 그러자 결국 일곱 명의 용의자가 적발되어서 처형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오(吳)는 진(晋)과 맹주의 자리를 다투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대부(大夫)였던 조앙(趙鞅)이 공갈(恐喝)을 쳤기 때문에(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음) 하는 수 없이 부차(夫差)는 단념했다. 그리고 그 돌아오던 도중에 백비(伯嚭)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여서 의도적으로 천천히 귀국했으며, 그리하여 그 도중에 송(宋)을 공략했다. 하지만 그때, 월(越)도 오(吳)를 단숨에 제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일단 두 나라는 화목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월(越)에 의한 격심한 공세는 계속되었으며, 그리고 또 기원전 475년에는 오(吳)의 공자(公子) 경기(慶忌)가 부차(夫差)에게 <왕은 자신의 품행을 고치지 않으면 언젠가는 망할 것이요!>라고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자 또 경기(慶忌)는 영지(領地)였던 애(艾)로 돌아갔다가 곧바로 초(楚)로 가버렸다.

 참고: 경기(慶忌)는 오월춘추(吳越春秋) 및 동주열국지(東周列国志)에 의하면, 오왕(吳王) 요(僚)의 아들로,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던 합려(闔閭)와 오자서(伍子胥)가 보냈던 자객 석요리(石要離 또는 要離)에게 참살(慘殺)되었다고 설정되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겨울에, 월(越)이 오(吳)를 공격하자 경기(慶忌)는 다시 귀국했으며, 그리고는 다시 부차(夫差)에게 다음과 같은 진언을 올렸다. <지금이라도 불충(不忠)자들을 제거하시고 월(越)과 손을 잡으십시오!> 그러자 부차(夫差)는 격노했다. 그리고는 대부(大夫)들과 결탁해서 기어이 그 경기(慶忌)를 죽여 버렸다.(春秋左氏傳) 그리고 또 기원전 473년, 드디어 수도(首都) 고소(姑蘇)가 함락되었다. 그러자 부차(夫差)는 근처에 있던 고소산(姑蘇山)으로 도망을 갔고, 그 다음에 대부(大夫)였던 공손웅(公孫雄-吳의 公族?)을 파견해서 화목을 구(걸)했다. 그리고 그때, 그러니까 공손웅(公孫雄)이 구천(句踐)에게 화목을 구걸했을 때, 그는 벗은 몸으로 엎드려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부차(夫差) 님은 전에 구천(句踐) 님을 한번 살려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구천(句踐) 님께서 부차(夫差) 님을 한번 살려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그러자 범려(范蠡)가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구천(句踐)에게 말을 했다. <하늘로부터 받은 기회를 버렸기 때문에 지금의 오(吳)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22년간이나 당했던 치욕을 벌써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러자 잠시 고민을 했던 구천(句踐)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정 그렇다면 부차(夫差)를 용동(甬東-吳의 땅에 면한 동쪽 바다에 떠있는 群島)으로 보내버립시다. 그러면 다시 재기하지 못할 것이요!> 그러자 공손웅(公孫雄)은 다시 돌아가서 부차(夫差)에게 그런 구천(句踐)의 결정을 전했다. 하지만 부차(夫差)는 <내가 이 나이에 누구를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말을 하고는 다시 <내가 죽어서도 오자서(伍子胥)를 볼 면목이 없구나!>라고 말을 하고는 얼굴에다 포(布)를 두르고 자살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부차(夫差)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러주었으며, 그런
다음 오(吳) 망국의 원흉이었던 백비(伯嚭)를 처형했고, 그리하여 오(吳)는 멸망했다.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473년, 오(吳)는 월(越)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리고 또 그때, 부차(夫差)는 구천(句踐)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그러나 그 뒤의 이야기는 위 부차(夫差)에서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오(吳)는 멸망했고, 그리고 그 두 나라의 다툼으로 인해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든가, <오월동주(吳越同舟)>란 고사도 남겼으며, 그리고 또 아래는 오(吳)의 역대 군주(君主)를 소개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한글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1. 太伯(句呉建国)
 
2. 虞仲
 
3. 季簡
 
4. 叔達
 
5. 周章
 
6. 熊遂
 
7. 柯相
 
8. 彊鳩夷
 
9. 余橋疑吾
 
10. 柯盧
 
11. 周繇
 
12. 屈羽
 
13. 夷吾
 14. 禽処
 1
5. 転
 1
6. 頗高
 
17. 句卑
 
18. 去斉

 呉王

 
1. 寿夢(紀元前585年-紀元前561年) 국명(國名)을 오(吳)로 개명(改名)
 
2. 諸樊(紀元前560年-紀元前548年)
 
3. 余祭(紀元前547年-紀元前544年)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서는 기원전 531에 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余昧(紀元前543年-紀元前527年)
    사기(史記)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서는 기원전 530년에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 僚(紀元前526年-紀元前516年)
 
6. 闔閭(紀元前515年-紀元前496年)
 
7. 夫差(紀元前495年-紀元前473年)




 <吳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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