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2)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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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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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의 위치도>


 ♣ 월(越-기원전 600년경부터 기원전 334년)은 춘추시대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주변에 있던 나라로, 수도는 회계(會稽-현재의 浙江省 紹興市)였고, 나중에 한민족(漢民族)형성의 중핵(中核)이 되었던 황하(黃河)유역의 도시국가 군(群)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異質的)이었으며, 백월(百越)에 속하는 민족을 주체(主體)로 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인접국이었던 오(吳)와 자주 다투었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515년에 초(楚)로 원정을 떠났던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나라를 비웠던 사이에 월왕(越王) 윤상(允常-春秋左氏傳에서는 公子 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음)은 오(吳)를 공격했고, 그리하여 오(吳)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그 혼란했던 틈을 타서 실제(實弟)였던 공자(公子) 부개(夫槪)가 모반을 일으켰던 등, 합려(闔閭)의 입장은 크게 위협을 받기도 했었고, 그러자 또 합려(闔閭)는 그 월(越)을 한껏 증오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496년에 윤상(允常)이 사망했고, 그러자 그 자리를 구천(句踐)이 이어받았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합려(闔閭)가 월(越) 공략에 나섰지만, 그러나 오히려 부상을 당하고는 죽었다.

 
그 후, 오(吳)에서는 부차(夫差)가 즉위해서 합려(闔閭)의 복수를 맹세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또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 후에 부차(夫差)는 합려(闔閭)의 원수를 갚았으며, 그 결과로 구천(句踐)은 부차(夫差)로부터 오(吳)에서 종살이를 할 것을 명받았다.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그 사이에 복수심을 키우면서 범려(范蠡)의 도움을 받았고, 그러자 또 범려(范蠡)는 착실하게 월(越)의 힘을 키워갔다. 그리고 또 그 이후는 이미 소개한대로 부차(夫差)가 회맹을 가졌을 때, 월(越)은 오(吳)를 공격했으며, 그것으로 대 타격을 받았던 오(吳)는 결국 기원전 473년에 멸망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월(越)의 수도를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낭사(琅邪)로 천도했으며(그러나 江蘇省 連雲港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 다음 제후들과 회맹해서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구천(句踐)은 참언을 받아서 자신의 심복이었던 문종(文種)을 숙청했으며, 그 전에 범려(范蠡)는 구천(句踐)의 시의심(猜疑心)을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제(齊)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그 후, 범려(范蠡)는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불리면서 대부호(大富豪)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465년에 구천(句踐)도
사망했다.

 
시이광(施夷光=西施. 생몰불명)은 중국의 유명한 미녀로,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 등과 아울러서 중국 고대의 4대(大)미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이며, 중국에서는 서자(西子)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리고 또 그녀는 기원전 5세기였던 춘추시대 말기에 절강성(浙江省) 소흥 시(紹興市) 제기 현(諸曁県-현재의 諸曁市)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 현대에 널리 알려진 그 서시(西施)라는 이름은 당시 그녀의 출신지였던 저라촌(苧蘿村)에는 시(施)라는 성(姓)을 가진 가족들이 동서(東西) 두 마을로 나뉘어서 살고 있었는데, 그리고 또 그녀는 그때 서쪽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서촌(西村)의 시(施)→서시(西施)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녀는 그 후에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획책하던 중에 부차(夫差)에게 헌상되었던 미녀들 중 한명이었고, 그 중에는 또 서시(西施) 외에도 정단(鄭旦)이란 미녀 등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려운 가정에서 나무장수의 딸로 태어났다는 시이광(施夷光)은 냇가에서 자주 빨래를 했었다고 하며, 그리고 또 부차(夫差)에 대한 책략은, 부차(夫差)로 하여금 그녀에게 빠지게 한 후, 오(吳)를 약체(弱體)화 시키겠다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결국 월(越)은 오(吳)를 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하지만 또 전해오는 소문에 의하면, 구천(句踐)의 부인이 그녀의 미모를 시기해서 구천(句踐)과 다시 만나지 못하게 했다든지, 오(吳)의 백성들이 그녀가 오(吳)를 멸망시킨 요괴(妖怪)라고 판단하고는 그녀를 산 채로 가죽부대에 넣어서 장강(長江)에 던져버렸는데, 그런데 또 그 후에 장강(長江)에서 대합(大蛤)이 잘 잡혔기 때문에, 그래서 또 사람들은 그것이 그녀의 혀(舌)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중국에서는 대합을 가리켜서 <서시(西施)의 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미인계(美人計)를 책안(策案)했던 범려(范蠡)를 따라갔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그녀의 다리가 무 다리였기 때문에, 그래서 항시 긴 옷을 입는 것으로 그것을 감추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강에서 빨래를 했을 때 다리를 내놓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봤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을 잊었다라고 하는 속설로부터 <침어미인(沈魚美人)>이란 말도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로부터 생긴 고사(故事) 중에서 유명한 것으로 <동시효빈(東施效顰-동시, 곧 못생긴 여자가 西施의 눈썹 찌푸림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是非나 善惡의 判斷 없이 남을 흉내 냄을 이르는 말)>이란 것이 있으며, 그것은 위의 설명과 함께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설명은 생략할 것이지만, 그러나 또 그냥 넘어가기에는 약간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서 대충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장자(莊子)의 천운(天運)에 의하면, 서시(西施)에게는 가슴이 아픈 지병(持病)이 있었는데, 그래서 어느 날 그 때문에 발작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누르면서 미간(眉間)을 찌푸렸다고 했으며, 그 후로도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모습은 어느덧 그녀의 버릇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동네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연약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했으며, 그 후로는 또 그녀를 볼 때마다 동네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어느 마을(東施로 봄)에 아주 못생긴 추녀(醜女)가 한명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어느 날, 서시(西施)의 그런 모습을 보고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을 목격한 그녀는 자신도 그 서시(西施)처럼 가슴이 아픈 듯이 흉내를 내고 또 미간(眉間)도 찌푸리면서 동네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자 또 그렇지 않아도 못생긴 얼굴에 잔뜩 찡그리기까지 했으니 그 얼굴은 더욱 못 봐줄만 했다고 하며, 그러자 또 동네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기괴한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만 나타나면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는데, 심지어는 거지들조차도 모두 그 동네를 떠나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그 후에 남을 흉내 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을 동시효빈(東施效顰)이라고 말하게 되었으며, 다른 말로는 <서시봉심(西施捧心)>이라고도 표현한다고 한다.


<蘇州市에 있는 西施橋>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334년에 구천(句踐)의 6세(世) 손(孫)이었던 무강(無疆)의 대(代)에 초(楚)의 위왕(威王)이 월(越)을 공격했고, 그러자 무강(無疆)은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또 초(楚)의 포로로 잡힌 후에 바로 처형당했으며, 그것으로 월(越)은 멸망했다. 그러자 또 그때, 일부의 월(越)왕족들이 민(閩-현재의 福建省)이란 곳으로 도망을 가서 민월(閩越)이라고 불리면서 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서 진(秦)에 멸해졌다. 그리고 또 일설에는 그 중에서 베트남으로 내려갔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의 베트남은 그 남하(南下)했던 월(越) 부족의 후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 월(越)에서는 동(銅)을 생성(生成)하는 기술이 탁월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앞에서 소개한 구천(句踐)의 검도 만들어졌고, 그리고 또 장자(莊子)에 의하면, 당시 월(越)의 사람들은 단발(斷髮)을 하고 있었으며, 상반신은 벗고 다녔고, 몸에는 문신(文身)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래는 월(越)의 역대군주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越王 勾践(在位 紀元前496年-紀元前494年)
 呉의 支配로 인해서 空位:紀元前 494年-紀元前491年
 越王 勾践(在位 紀元前491年-紀元前464年)
 越王 鹿郢(適郢) (在位 紀元前 463年-紀元前458年)
 越王 不壽(在位 紀元前 457年-紀元前448年)
 越王 翁(州句) (在位 紀元前 447年-紀元前411年)
 越王 翳(在位 紀元前 410年-紀元前375年)
 越王 錯枝(在位 紀元前374年-紀元前373年)
 越王 無余(之侯) (在位 紀元前 372年-紀元前361年)
 越王 無顓(在位 紀元前 360年-紀元前343年)
 越王 無彊(在位 紀元前 342年-紀元前306年)




  <越 끝>

  <춘추오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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