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3)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춘추시대의 諸國>


  <춘추시대(春秋時代) 개요(槪要)>

 춘추시대(春秋時代)는 중국의 시대구분 중 하나로, 기원전 770년 주(周)의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 살해되었고, 그래서 낙읍(洛邑-成周)으로 천도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진(晋)이 삼국(三國-韓, 魏, 趙)으로 분열되었던 기원전 403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춘추(春秋)의 명칭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인 춘추(春秋)가 기술되었던 시대라는 의미도 함께 가진다. 그리고 그 춘추시대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아울러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동주(東周)시대라고도 말해진다. 그리고 몇 번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지만, 그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소개하는 것은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그리고 또, 앞의 이야기를 상기하는 차원에서 조금 설명하고 넘어가면, 주(周) 유왕(幽王)의 악정에 의해서 제후들 간에 불만이 높아졌고, 그리하여 기원전 771년에 제후들은 유왕(幽王)을 배신해서 살해했다. 그러자 그 다음해에 유왕(幽王)의 아들(宜臼=平王)은 정(鄭) 무공(武公)의 도움을 받아서 낙읍(洛邑)에서 주(周)를 재흥(再興)시켰으며, 그 후에는 동주(東周)라고 불리면서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까 주(周)가 동천(東遷)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정(鄭)의 무공(武公)은 그 후에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그 후에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던 장공(莊公)의 시대에는 오히려 주(周)에 배척당했으며, 거기다 주(周) 환왕(桓王)에게 공격까지도 받았다. 하지만 장공(莊公)은 그것을 보기 좋게 물리쳤고, 그러자 또 신하들이 끝까지 추격할 것을 진언했지만, 그러나 장공(莊公)은 <그래도 천자(天子)인데, 그런 모습은 좋지가 않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또, 그 일화(逸話)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주왕(周王)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과 함께, 그래도 그때까지는 제후들 간에 주왕(周王)에 대한 일말(一抹)의 경의(敬意)는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지만 그 정(鄭)도 장공(莊公) 이후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그에는 또, 왕실의 경사(卿士-왕실직속)들이 모두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다스리는 땅도 부족했고, 그래서 또 정(鄭)의 국력 자체는 중하(中下)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정(鄭)을 대신하고 나왔던 나라가 바로 제(齊)였으며, 제(齊)는 또 주(周) 건국의 대(大)공신이었던 태공망(太公望)을 시조로 해서 당시 동방(東方)의 대국이 되어 있었던 나라였는데, 하지만 또 제15대째의 희공(釐公)이 사망하자 그 후계를 놓고 다툼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내란을 수습했던 환공(桓公)과 그 재상 관중(管仲)의 활약으로 크게 비약(飛躍)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당시, 동방(東方)에서는 신참(新參)이라고 할 수 있었던 초(楚)가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당시, 주(周)는 그 초(楚)에 흡수되고 있었던 소국(小國)들조차 도울 힘이 없었고, 그 결과로 주변의 소국들은 초(楚)에 의해서 무너져갔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 환공(桓公)이 등장해서 그 초(楚)에 대항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까지 초(楚)에 아직 흡수되지 않았던 소국들은 그때부터 제(齊)를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환공(桓公)은 초(楚)와 대결해서 물리치고는 소릉(召陵)에서 초(楚)가 주(周)에 대해서 무례했던 일에 대해서 질책만 했고, 초(楚)를 침공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환공(桓公)은 제후들 간에 맹주가 되었으며, 기원전 651년에는 규구(葵丘-현재의 河南省 藺考)에서 회맹을 가졌다. 그러자 제후들은 환공(桓公)이 주왕(周王)을 대신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고, 그 업적에 의해서 환공(桓公)은 패자로 불리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했던 환공(桓公)도 관중(管仲) 사후에는 총기가 흐려져서 국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 환공(桓公)이 죽은 후에는 또 그 후계를 놓고 쟁탈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제(齊)는 그때부터 패권(覇權)을 내놓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신해서 나타났던 사람이 바로 송(宋)의 양공(襄公)이었는데, 그런데 이미 소개한대로 그 송(宋)은 은(殷)의 유민들이 세웠던 나라로, 당시 국력은 중간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양공(襄公)의 등장으로 인해서 환공(桓公) 사후의 혼란스러웠던 천하는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 후, 양공(襄公)은 효공(孝公)을 제(齊)의 왕으로 즉위시켰으며, 그 후에 우(盂-河南省 睢)에서 회맹을 열었지만, 그러나 또 송(宋)이 회맹의 주도권을 가진데 불만을 품었던 초(楚)의 자옥(子玉)에게 양공(襄公)은 납치되어서 감금당했다. 그리고 그 후, 양공(襄公)은 귀국해서 초(楚)와의 결전에 들어가기도 했지만(泓水의 싸움), 그러나 또 이미 소개한 <송양(宋襄)의 인(仁)> 때문에 대패했고, 그것으로 그 역시 패권을 내놓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 다음에 나타났던 사람이 진(晋)의 문공(文公)이었고, 그 진(晋)은 또 무공(武公)과 헌공(獻公) 그 2대(代)에 주변의 제국들을 병합해서 크게 신장했지만, 그러나 헌공(獻公)의 애첩 여희(驪姬)가 일으켰던 소동에 의해서 문공(文公) 외에 공자(公子)들은 국외로 도망을 가야하는 신세까지 겪었다. 하지만 결국 문공(文公)은 그 10수년 후에 진(秦)의 도움을 받아서 귀국했고,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문공(文公)은 주(周)왕실의 내분을 수습했고, 초(楚)와 성복(城濮)에서 싸워서 대승했던 등, 업적을 쌓았으며, 그 결과 천토(踐土-河南省 温県)에서 주(周)의 양왕(襄王)을 초대해서 회맹을 가진 후, 제후들의 맹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문공(文公)은 환공(桓公)과 더불어서 춘추오패의 대표 격이 되었으며, 나중에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 문공(文公)에 전후해서 활약했던 사람 중에 서(西)쪽의 대국이었던 진(秦)의 목공(穆公)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목공(穆公)은 서융(西戎)과 싸워서 승리했으며, 백리해(百里奚) 등, 타국 출신자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소국들을 병합해서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또, 그 여희(驪姬)의 난(亂) 때, 진(晋)에서 혜공(惠公)을 옹립시켜주었으며, 하지만 그 후에 그 혜공(惠公)이 배신을 하자 한(韓)의 땅에서 대파했다. 그 후, 목공(穆公)은 혜공(惠公)의 뒤를 이어서 혜공(惠公)의 형도 옹립시켰는데, 그가 바로 문공(文公)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았지만, 문공(文公)이 죽자 다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러자 또 목공(穆公)은 진(晋)을 대파했다. 그러나 그 목공(穆公)도 죽었을 때 가신(家臣)들을 거의 다 순사(殉死)시켰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의 진(秦)은 크게 후퇴했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 패권을 잡았던 사람은 남쪽의 대국이었던 초(楚)의 장왕(莊王)이었다. 그리고 그 초(楚)는 처음부터 주(周)와 관계없이 성립했던 나라였고, 그 후에 실력으로 호북(湖北)과 호남(湖南)을 거머쥐었으며, 그러자 또 주(周)에서 자작(子爵)의 위(位)를 내렸지만, 그러나 국력에 비해서 그 위(位)가 너무 낮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왕으로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장왕(莊王)의 시대가 되자 장왕(莊王)은 그때까지 조정을 어지럽혔던 악신(惡臣)들을 모두 일소(一掃)했으며, 그 자리에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시켰다. 그리하여 국내를 다스리게 된 장왕(莊王)은 풍부했던 병력으로 북상해서 주변의 소국들을 위복(威服)시켰고, 낙양(洛陽) 근처까지 진출해서 대(大)열병식(閱兵式)을 거행했던 것으로 주(周) 왕실을 위협했다. 거기다 정(鄭)의 수도까지 포위했기 때문에,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달려왔던 진군(晋軍)을 필(邲)에서 대파했다. 그러자 그 결과 중원(中原)의 소국들은 모두 초(楚)에 복종했다.

 그 후, 제후들의 싸움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또 당시, 제후(諸侯) 아래였던 대부(大夫)와 사(士)로 불리던 중급에서 하급의 귀족계급들이 발흥(勃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또 그 후에는 제국(諸國)의 실권이 그들에게 옮겨갔다거나, 그러자 또 그들은 타국과의 싸움보다는 국내에서 같은 귀족들과 싸우는데 더 많이 바빴던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러했던 귀족들에 대해서도 조금 살펴보면, 먼저 진(晋)의 6경<卿-智・魏・韓・趙・中行・士(范)의 六氏>이 있었고, 그 다음에 제(齊)의 6경<国・高・鮑・崔・慶・陳(田)의 六氏>이 있었으며, 노(魯)에도 3환<桓-仲(孟)・叔・季의 三氏>이 있었고, 정(鄭)에도 7목(穆-罕・駟・豊・游・印・国・良의 七氏)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서로 싸우고 반목했던 일도 있었지만, 그러나 동맹을 채결해서 다른 귀족들과 대립했던 일도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군주와도 대립해서 그 군주를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했던 현상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통적인 신분체제를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그 때문에 또 당시 유교(儒敎)를 일으켰던 공자(孔子) 또한 그 전통체제의 붕괴에 대해서 분개(憤慨)했으며, 그것이 또 그의 학문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러했던 배경으로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대립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기원전 546년에 미병(弭兵-전쟁을 그친다는 의미임)의 회(會)가 진(晋)과 초(楚)의 사이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또 당시, 귀족들의 신장(伸張)은, 그때까지는 그다지 국정(國政)에 참가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국정(國政)의 무대에 서게 해주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그 때문에 또 그 시기에는 명재상이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이었던 사람으로 제(齊)의 안영(晏嬰)과 정(鄭)의 자산(子産) 그리고 진(晋)의 숙향(叔向) 등이 있었으며, 그리고 또 당시에는 대국(大國) 동사(同士)들이 직접 마주치는 것은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정(鄭)의 자산(子産)이나 노(魯)의 공자(孔子) 등이 활약했던 소국(小國)외교가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자산(子産)은 중국 최초로 성문법(成文法)을 제정했던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것은 또 그 당시까지만 했어도 법률이란 상류계층에서만 암묵적으로 행해져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당시 새로 발흥하고 있었던 계층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성문법의 필요성은 그만큼 컸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즈음에는, 군주(君主)는 귀족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될 정도까지 되었고, 그래서 또 진(晋)에서는 선술(先述)했던 그 6경(卿)에서 둘이 탈락하고 남았던 4씨(氏-知・魏・韓・趙)가 모든 것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제(齊)에서는 또 일찍이 진(陣)에서 망명해 왔던 전 씨(田氏)의 힘이 특히 강했고, 초(楚)에서는 유력(有力)귀족과 왕족과의 싸움으로 인해서 국정이 혼란했다.

 그런 한편, 남쪽의 장강(長江) 유역에서는 오(吳)와 월(越)이 신흥세력을 펴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吳)에서는 합려(闔閭)와 부차(夫差) 그 두 군주와 함께 명신이었던 손무(孫武)와 오자서(伍子胥)가 힘을 합쳤고, 그리고 또 월(越)에서는 구천(句踐)과 범려(范蠡)가 힘을 합쳐서 그 두 나라는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 오(吳)는 초(楚)의 수도를 함락시켜서 멸망직전까지 몰아갔던 적도 있었고, 이어서 월(越)을 쳐서 복속시켰으며, 그리하여 황하(黃河)유역까지 진출해서 당시, 제후들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었던 진(晋)과도 맞붙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착실하게 내정(內政)을 가다듬었던 월(越)이 그 오(吳)를 쳤고, 그러자 오(吳)는 멸망했다. 그리고 그 월(越)도 구천(句踐) 사후에 초(楚)에 멸망했다. 그리하여 완전한 이민족(異民族)인 초(楚)가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그것으로 그때까지 주(周)왕조를 중심으로 내려왔던 질서는 무의미화 되었으며, 오월(吳越)은 제철(製鐵)의 선구(先驅)지(地)로서, 그 즈음부터 본격적인 철기시대에 들어갔었다든지 했던 것으로부터, 그래서 그 오월(吳越)항쟁 직후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는 것이다.

 아
무튼 또, 그때를 전후해서 제(齊)에서는 거의 완전하게 전 씨(田氏)가 국정을 주무르고 있었고, 그리하여 기원전 386년에는 전화(田和)에 의해서 나라가 찬탈(簒奪)되었으며, 그리하여 또, 태공망(太公望) 이래, 내려왔던 제(齊)는 결국 멸망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 그 후로 제(齊)는 전제(田齊)로 불리게 되었으며, 앞의 제(齊)와는 구분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춘추시대(春秋時代)의 군제(軍制) 등에서도 알아보면, 그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종법(宗法)에 기초한 군제(軍制)가 기본이었으며, 일군(一軍)을 12500명 정도로 했고, 대국(大國)에서는 삼군(三軍), 그 다음의 나라는 2군, 그리고 제일 작은 소국들은 일군(一軍)으로 정해두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그에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참고: 종법(宗法)은 제사의 계승과 종족의 결합을 위한 친족제도의 기본이 되는 법으로, 원래는 중국 주나라 때에 적장자상속제 확립을 위하여 생겨난 제도였으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초기에 전래되었고, 고려 말기에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또 그에는 조종묘의 제사나 공동향찬, 복상(服喪), 동종불혼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또, 삼군(三軍)을 보유했던 나라는 진(晋)과 초(楚) 그리고 제(齊) 정도였으며, 제(齊)의 경우에서는 또, 일군(一軍)이 약 1만 명 정도의 규모였다. 그리고 또 6군(軍)을 가졌던 나라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주(周) 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 주(周)는 춘추시대 때부터 급속하게 쇠퇴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6군(軍)도 해체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 후에 진(晋)도 새로운 삼군(三軍)을 더해서 6군(軍)으로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그것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의 전쟁은 주로 병차전(兵車戰)이었으며, 기마(騎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철제(鐵製)무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의 중화(中華)사상은 주로 차(車-馬車・兵車)를 사용하는 것이 대세였고, 기마(騎馬)는 적융(狄戎-이민족)들이나 타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대부(大夫)들은 병차(兵車)를 타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그 주위로 보병(步兵)을 배치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는 전쟁에 임하기 전에 점(占)을 치는 풍습도 있었으며, 전쟁에 임해서도 상대방에게 예(禮)를 다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하지만 그것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라졌다.





  <春秋時代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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