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1)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
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


<월의 위치도>


 ♣ 월(越-기원전 600년경부터 기원전 334년)은 춘추시대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주변에 있던 나라로, 수도는 회계(會稽-현재의 浙江省 紹興市)였고, 나중에 한민족(漢民族)형성의 중핵(中核)이 되었던 황하(黃河)유역의 도시국가 군(群)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異質的)이었으며, 백월(百越)에 속하는 민족을 주체(主體)로 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인접국이었던 오(吳)와 자주 다투었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515년에 초(楚)로 원정을 떠났던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나라를 비웠던 사이에 월왕(越王) 윤상(允常-春秋左氏傳에서는 公子 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음)은 오(吳)를 공격했고, 그리하여 오(吳)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그 혼란했던 틈을 타서 실제(實弟)였던 공자(公子) 부개(夫槪)가 모반을 일으켰던 등, 합려(闔閭)의 입장은 크게 위협을 받기도 했고, 그러자 또 합려(闔閭)는 그 월(越)을 한껏 증오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496년에 윤상(允常)이 사망했고, 그러자 그 자리를 구천(句踐)이 이어받았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합려(闔閭)가 월(越) 공략에 나섰지만, 그러나 오히려 부상을 당하고는 죽었다.

 
그 후, 오(吳)에서는 부차(夫差)가 즉위해서 합려(闔閭)의 복수를 맹세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또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 후에 부차(夫差)는 합려(闔閭)의 원수를 갚았으며, 그 결과로 구천(句踐)은 부차(夫差)로부터 오(吳)에서 종살이를 할 것을 명받았다.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그 사이에 복수심을 키우면서 범려(范蠡)의 도움을 받았고, 그러자 또 범려(范蠡)는 착실하게 월(越)의 힘을 키워갔다. 그리고 또 그 이후는 이미 소개한대로 부차(夫差)가 회맹을 가졌을 때, 월(越)은 오(吳)를 공격했으며, 그것으로 대 타격을 받았던 오(吳)는 결국 기원전 473년에 멸망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월(越)의 수도를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낭사(琅邪)로 천도했으며(그러나 江蘇省 連雲港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 다음 제후들과 회맹해서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구천(句踐)은 참언을 받아서 자신의 심복이었던 문종(文種)을 숙청했으며, 그 전에 범려(范蠡)는 구천(句踐)의 시의심(猜疑心)을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제(齊)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그 후, 범려(范蠡)는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불리면서 대부호(大富豪)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465년에 구천(句踐)도 사망했다.

 ○ 구천(句踐-?부터 기원전 465년)은 중국 춘추시대 후기 월(越)의 왕이었고, 범려(范蠡)의 도움을 받아서 오(吳)를 멸했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었으며, 구천(勾踐)으로도 표기된다. 그리고 윤상(允常)의 아들이었으며, 초(楚) 혜왕(惠王)의 외조부였다. 그는 기원전 496년에 월왕(越王) 윤상(允常)이 서거하자 즉위했으며, 그러자 숙적이었던 합려(闔閭)는 그 상(喪) 중에 대군을 이끌고 월(越)을 공격했다. 그러나 범려(范蠡)의 기책(奇策)으로 오군(吳軍)은 대패했으며, 합려(闔閭)는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 후, 구천(勾踐)은 범려(范蠡)의 진언을 받아서 부차(夫差)와 화해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던 부차(夫差)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 후, 구천(句踐)은 부차(夫差)에게 패해서 종이 되었으며, 그 사이에 범려(范蠡)가 물밑공작을 펴서 구천(句踐)을 오(吳)에서 빼냈다. 그 후, 월(越)로 다시 돌아갔던 구천(勾踐)은 오(吳)에서의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 방에다 쓴 간(肝 또는 쓸개)을 걸어두고 매일 그것을 핥으면서 오(吳)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갔다. 그리하여 앞 부차(夫差)의 <와신(臥薪)> 고사와 더불어서 <상담(臥薪)> 고사가 생겨났고, 그것으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이 되었는데, 아무튼 그 후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며, 그리고 또 오(吳)가 망한 후에 구천(句踐)은 자신의 심복 문종(文種)을 자살시켰으며, 범려(范蠡)는 제(齊)로 도망을 갔고, 그 결과 월(越)은 쇠퇴(衰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또 구천(句踐)은 <월왕구천검(越王句踐劍)>이라고 불리던 동(銅)으로 만든 8자루의 명검(名劍)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런데 그 중의 한 자루가 1965년에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県) 망산(望山) 1호 묘(墓)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아래 그림 참조. 그리고 글씨는 검에 세겨진 것이며, 내용은 越王自作이라고 되어 있으나, 진위는 알 수 없음)




 그리고 상태는 매우 훌륭하며, 그래서 또 그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서 X선 회절(回折)법으로 분석해본 결과, 검의 표면이 유화동(硫化銅=黃化銅은 황과 구리의 화합물이며, 황화 제1구리와 황화 제2구리 두 가지가 있음. 화학식은 CuS, Cu2S)의 피막으로 덮여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한편, 부차(夫差)의 창도 같은 호북(湖北)성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 범려(范蠡-생몰불명)는 중국 춘추시대 월(越)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었다. 그리고 씨(氏)는 범(范), 휘(諱)는 려(蠡), 자(字)는 소백(少伯), 월왕 구천(勾踐)을 섬겼으며, 구천(勾踐)을 춘추오패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최대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없으며, 그래서 또 그가 어떻게 윤상(允常)의 신하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인접국이었던 오(吳)에서는 합려(闔閭)가 손무(孫武)와 오자서(伍子胥)의 도움을 받아서 국강(國强)을 과시하고 있었으며, 그러자 또 윤상(允常)은 그 범려(范蠡)를 옆에 끼고 국력신장에 혼신(渾身)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기원전 496년에 윤상(允常)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구천(勾踐)이 그 자리를 잇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상중(喪中)에 합려(闔閭)는 월(越)에 대한 대공세를 폈다는 것은 이미 소개한 내용 그대로이다. 그리고 또, 그 후에 합려는 부상으로 사망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러니까 그 싸움 중에 범려(范蠡)가 펼쳤던 기책(奇策)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그때 범려(范蠡)는 결사대(決死隊-春秋左氏傳에서는 罪人들을 이용했다고 함)를 조직해서 적들 앞으로까지 행진하게 했고, 그런 다음에는 스스로 그 적군들 앞에서 목을 잘라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군(吳軍)들은 그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허둥대었다. 그러자 또 그 사이에 월군(越軍)이 쳐들어가서 그 오군(吳軍)을 격파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오(吳)에서는 부차(夫差)가 등극했고, 그는 또 월(越)에 대한 복수심을 키웠다. 그러자 또 구천(勾踐)은 그때가 호기라고 보고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는데, 그러자 범려(范蠡)가 그런 구천(勾踐)을 말렸다. 하지만 구천(勾踐)은 범려(范蠡)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기어이 출병해서 대패했으며,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부차(夫差)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 후, 구천(句踐)의 심복이었던 문종(文種)이 부차(夫差)의 측근이었던 백비(伯嚭)에게 뇌물을 주고, 부차(夫差)가 구천(句踐)을 도와줄 수 있도록 획책했다. 그리고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는 부차(夫差)에게 구천(句踐)을 죽일 것을 강변(强辯)했지만, 그러자 부차(夫差)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그 후에 구천(句踐)을 마구간지기로 삼았다.<嘗膽> 그 후에 다시 월(越)로 돌아갔던 구천(句踐)은 국정(國政)을 범려(范蠡)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그러나 범려(范蠡)는 오히려 문종(文種)을 추천했다. 그러자 구천(勾踐)은 그 두 사람을 모두 채용했고, 그때부터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구천(句踐)은 자신의 그런 속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래서 부차(夫差)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부차(夫差)의 의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범려(范蠡)는 계속해서 백비(伯嚭)에게 뇌물을 보냈으며, 오자서(伍子胥)를 모함하게 해서 부차(夫差)와의 이간을 획책했다. 그러자 역시, 오자서(伍子胥)는 결국 부차(夫差)에 의해서 자살 당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부터 부차(夫差)의 앞길을 막는 사람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부차(夫差)는 북쪽으로만 눈을 돌려서 월(越)을 경계하는데 게을리 했고, 그 후에 북(北)에서 회맹을 가졌을 때, 범려(范蠡)의 독려(督勵)를 받았던 구천(句踐)이 오(吳)를 쳤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부차(夫差)는 다시 회군(回軍)했고, 그에 또 오(吳)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구천(句踐)은 일단 부차(夫差)와 화목(和睦)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부차(夫差)는 무리하게 북(北)으로 출병해서 국력을 소모시켜갔으며, 그러자 결국 그 4년 후에 월(越)은 오(吳)와 결전에 들어갔고, 그 결과 부차(夫差)는 고소(姑蘇)산에서 자결했다. 하지만 또 그 후, 구천(勾踐)은 더 이상 적수가 없다는 생각에 교만해져 갔고, 그러자 또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범려(范蠡)는 월(越)에서 탈출했다. 그리고는 문종(文種)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 교토(狡免-교활한 토끼 또는 영리한 토끼)가 죽으면 주구(走狗-사냥개)는 삶기고, 고조(高鳥-높이 나는 새)가 사라지면 양궁(良弓-좋은 활)은 창고신세가 된다고 했다.(이 말은 나중에 韓信도 인용했음) 그리고 현재 월왕(越王)의 모습은 마치 장경오훼(長頸烏喙) 같다. 그런데 그러한 상(相)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과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어도, 그 환락(歡樂)은 함께 누리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왜 아직도 그곳에 머물고 있는가?>

 참고: 장경오훼(長頸烏喙)는 긴 목에 까마귀 부리 같이 뾰족한 입이라는 뜻으로, 특히 관상에서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한 상(相)을 이르는 말이며, 그런 사람은 참을성이 많아서 고생을 이겨 내기도 하지만, 그러나 잔인하고 욕심이 많으며, 남을 의심하는 마음이 강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안락을 누리기 어려운 상(相)이라고 함.

 그러자 문종(文種)은 범려(范蠡)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자신도 화(禍)를 피하기 위해서 칭병(稱病)하면서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그러자 또 그때, 그가 모반을 꾀한다고 하는 참언을 한 자가 나타났고, 그러자 구천(句踐)은 문종(文種)에게 칼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당신은 나에게 오(吳)를 이길 7가지의 비책(秘策)을 들려주었소. 그런데 나는 그 중에서 3가지를 사용해서 오(吳)를 물리쳤소. 그러므로 이제 남은 그 4가지의 비책은 당신의 몫이요. 그러므로 또, 나 때문에 당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을 부왕(父王-允常)께 고하고, 그 능(陵)에서 그 비책을 시험해보길 바라오!> 그러자 문종(文種)은 자살했다.

 그런데 전해오는 전설(傳說)에 따르면, 범려(范蠡)는 부차(夫差)에게 패했을 때, 그 부차(夫差)의 총기를 흐리게 하기 위해서, 당시 절세의 미인이었던 시이광(施夷光-일명 西施)을 비밀리에 부차(夫差)에게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부차(夫差)는 범려(范蠡)의 생각대로 그 시이광(施夷光)에게 빠져서 거만해지게 되었고, 그 후에 부차(夫差)가 죽은 후, 범려(范蠡)는 그 시이광(施夷光)과 함께 제(齊)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범려(范蠡)는 제(齊)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개명을 하고는 장사를 해서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제(齊)에서 범려(范蠡)의 이름을 알고는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범려(范蠡)는 <사람은 이름이 높아질수록 불행도 높아진다>라고 생각하고는, 그때까지 모아두었던 재산을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범려(范蠡)는 원래는 조(曹)의 수도였지만, 그러나 그때는 송(宋)나라 땅이 되어 있었던 정도(定陶-山東省 陶県)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도주공(陶朱公)이란 이름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도 장사를 아주 잘해서 거부(巨富)가 되었으며, 나중에 늙어서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것들을 모두 물려주고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 도주공(陶朱公)이란 이름은 후세에 대상인(大商人)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하며(陶朱의 富 故事), 그에 대한 이야기는 사기(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伝)에 묘사되어 있으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참고: 도주(陶朱)의 富 故事는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이었던 큰 부자 도주의돈(陶朱-猗頓)을 가리켰던 것으로 <도주=의돈=큰 부자>의 공식이 성립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의돈(猗頓)은 처음에는 궁(窮)한 서생에 불과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소금과 목축으로 큰 돈을 벌었고, 그래서 의씨(猗氏-山西省 安沢県)에 살면서 왕보다도 더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의돈(猗頓)의 돈(頓)은 비축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며, 그 후로 세상 사람들이 거부(巨富)를 논할 때는 도주공(陶朱公)과 의돈(猗頓)의 이름을 들먹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절강성(浙江省) 제기(諸曁) 시내에 도주(陶朱)산(山)이 있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 범려(范蠡)의 훌륭했던 활약과 출처진퇴(出處進退-관직에 남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