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원소<袁紹-영흥(永興) 2년(154년) 이전(以前 ?)부터 건안(建安) 7년(202년) 5월>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정치가, 자(字)는 본초(本初).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출신. 대장군이었던 하진(何進)과 협력해서 환관들과 대립했고, 동탁(董卓)의 난(亂) 때는 하내(河內郡)에서 거병했다. 그 후, 하북(河北) 사주(四州)를 지배하기까지 세력을 확대했지만, 그러나 관도(官渡)의 싸움에서 자신의 우유부단(優柔不斷)으로 인해서 조조(曹操)에게 패했고, 그 후, 병(病)을 얻어서 죽었다.

 그는 후한(後漢) 시대에, 4대에 걸쳐서 삼공(三公)을 배출했던 명문(名門) 원가(袁家)의 출신이었으며, 그리하여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주위에 영향력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父)는 원성(袁成)이었고, 그리고 원술(袁術)은 원성(袁成)의 동생이었던 원봉(袁逢)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하지만 또 위서(魏書)의 왕심찬(王沈撰)이나 후한서(後漢書)의 원산송찬(袁山松撰)에 의하면, 원소(袁紹)는 원술(袁術)의 이모형제(異母兄弟)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왕심(王沈) 등의 설(說)에 근거하면, 원소(袁紹)는 원봉(袁逢)의 서자(庶子)였는데, 다시 백부(伯父)였던 원성(袁成)의 양자로 들어가서 그 후계를 이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왕심(王沈)은 왕침(王沈)으로 쓰고 있는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

 아무튼, 원봉(袁逢)과 원외(袁隗) 다음 세대의 원씨(袁氏) 종족(宗族)의 장(長)은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그 두 사람 중 하나였으며<혹은, 異母兄(袁術과 同母兄弟)이었던 袁基>, 그래서 당시, 도(首都)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지방호족의 자제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두 사람의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 과거, 大家의 집 등으로 인사를 갔다거나, 食客으로 머무는 등, 사교 등을 목적으로 해서 찾아다니던 것을 말함.

 그런데 당시, 원소(袁紹)는 원술(袁術)보다 명망(名望)이 높았다고 하며, 예를 들어서 하옹(何顒=後漢의 정치가)이나 허유(許攸=後漢 말기의 參謀, 정치가) 같은 사람들은 원술(袁術)을 결코 찾았던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원술(袁術)은 그런 일에 불만이 있었고, 그래서 또 원소(袁紹)도 싫어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의 숙부(叔父)는 원외(袁隗)였으며, 자식으로는 원담(袁譚), 원희(袁熙), 원상(袁尙) 등이 있었다. 그리고 또 원매(袁買)라는 인물도 있었다고 하며, 그는 또 원상(袁尙)의 아우였거나, 아니면 원상(袁尙)의 형의 아들이었다는 이설(二說)이 있다.

 그는 또 삼국지(三國志) 위서원소전(魏書袁紹傳)에 의하면, 출사(出仕)하기 전까지는 유협(遊俠은 俠客 같은 무거운 의미도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을 사귀면서 浩然之氣를 키우는 일 등,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것을 의미함)을 좋아해서 장막(張邈=孟卓=後漢 말기의 정치가)이나 하옹(何顒=伯求), 허유(許攸=子遠), 오부(伍孚=徳瑜), 오자경(呉子卿=諱 不詳) 등의 명사(名士)들과 <분주(奔走)의 友>란 친목회(親睦會=親友會)까지 결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의 영제(靈帝) 때, 대장군이었던 하진(何進)과의 연(緣)도 있었고 해서였던지, 그는 젊었을 때 이미 시어사(侍御史-관직명의 하나로 주로 감찰과 탄핵의 일을 맡았다)가 되었고, 그 후에는 중군교위(中軍校尉)를 거쳐서 이윽고는 사례교위(司隷校尉-조정 내, 대신들과 황제의 친척 등을 감찰했던 직)에까지 올랐다.

 

 그 후, 영제(靈帝)가 죽자 그는 하진(何進)에게 신속하게 환관들을 제거할 것을 진언을 했지만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던 중에 오히려 하진(何進)이 그 환관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그는 그것을 기회로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어서 궁중으로 난입해서 환관들과 그 외에 무고한 사람들까지 합쳐서 약 2천명 정도를 죽였다. 그리고 또 그 후, 한(漢)의 실권을 장악했던 동탁(董卓)이 소제(少帝)를 폐(廢)하고 진류왕(陳留王=獻帝)을 옹립시키려 했을 때, 태부(太傅=天子의 師) 원외(袁隗)를 숙부(叔父)로 두었던 그의 의향을 묻는 상담이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겉으로는 그에 찬성했지만, 그러나 후환이 두려워서 그대로 기주(冀州)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에 격노했지만, 하지만 그 후로부터는 명문이었던 원 씨(袁氏) 세력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에게도 발해군(勃海郡)의 태수(太守) 직이 주어졌다.

 190년, 교모(橋瑁)의 요청(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曹操)으로 제후들이 동탁(董卓)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켰고, 그리하여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그러자 그때,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라고 생각되어졌던 그가 그 맹주(盟主)에 추천되었다. 그리고 또한 그때, 그를 맹주로 추천했던 자가 바로 조조(曹操)였다고 전해진다.(이하, 후술 또는 생략함)




 원술(袁術-155년 이후?부터 199년)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정치가, 군웅(群雄). 중(仲=)의 초대황제. 부(父) 등, 가족관계는 원소(袁紹) 참조.

 그는 청년기에는 협인(俠人=그러나 여기서는 俠客 등, 일종의 패거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리하여 같은 패들과 방탕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후에 개심(改心)해서 효렴(孝廉)에까지 추천되었고, 그 후에는 관(官)이 하남윤(河南尹),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虎賁은 황제 직속의 부대)에 이르게 되었다.

 ※ 효렴(孝廉)은 중국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제정했던 향거리선(鄕擧里選)의 찰거과목(察擧科目) 중 하나였고, 부모에게 효순(孝順)하고 평소 염정(廉正-결백하고 공명정대함)한 태도를 지녔던 사람들을 추천했으며, 찰거상과(察擧常科) 중 제일로 중요시 되었던 과목이었다.

 189년, 영제(靈帝)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숙부였던 원외(袁隗)와 원소(袁紹)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농락하고 있었던 환관들을 수천 명이나 주살했다. 그리고 동탁(董卓)이 입경(入京)한 후에는 후장군(後將軍)에 임명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또 그 뒤에 닥칠 화(禍)가 두려워서 형주(荊州) 남양(南陽)으로 도망을 쳐버렸다.

 그 후, 장사(長沙) 태수(太守) 손견(孫堅)에 의해서 남양(南陽) 태수가 살해되자 그는 그 후임으로 태수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남양(南陽)을 지배했고, 이어서 손견(孫堅)을 자기 휘하에 두고는 그를 예주(豫州) 자사(刺史)에 임명했다. 그리고는 또 그 손견(孫堅)으로 하여금 동탁(董卓)을 공격하게 했으며, 그 결과로 191년에 손견(孫堅)은 낙양(洛陽)을 점령했다. 그리고 또 그때, 남양군(南陽郡)은 인구가 많아서 대부분이 풍족하게 살았지만, 그러나 원술(袁術)이 사치스런 생활을 추구하며 징세를 가혹하게 부과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그곳에 살던 백성들은 무척 많은 괴로움을 당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이하, 후술 또는 생략)
 



 동탁<董卓-?부터 초평(初平) 3년 4월 23일(192年5月22日)>





 후한(後漢) 말기의 군인, 정치가. 헌제(獻帝)를 옹립했고, 궁정에서 마음껏 권세를 휘둘렀지만, 그러나 자신의 양자였던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는 농서군(隴西郡) 임도(臨洮) 출신이었으며, 자(字)는 중영(仲穎), 부(父)는 동군아(董君雅), 형은 동탁(董擢), 동생으로는 동민(董旻)이 있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요절했던 아들이 있었으며, 조카로는 동황(董璜), 그리고 손녀 동백(董白)이 있었다.

 그는 성질이나 행동이 거칠고 난폭했으나 지략(智略)이 뛰어났고, 무예에 능했으며, 완력(腕力)이 특히 강했고, 그리고 또 마상(馬上)에서는 오른손이든 왼손이든 어느 쪽으로도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젊었을 때는 강(羌=羌族=중국 西北部의 티베트계 민족)과도 교류했으며, 그래서 어느 때 그 족장들이 그를 만나러 왔을 때는 농경에 사용하던 경우(耕牛)를 잡아서 그 고기를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족장들은 그에 모두 감격해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뒤 축수(畜獸=家畜)를 천두(千頭)나 선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병마연(兵馬掾=변방의 軍事를 담당했던 職名)이 되었고, 그러자 기병(騎兵)을 인솔해서 당시, 약탈을 일삼고 있던 호(胡=漢民族이 중국의 북부와 서부에서 살아가던 이민족 특히, 유목민족을 낮추어서 불렀던 말) 토벌에 들어가서 대승했다.

 환제(桓帝) 말년(末年), 그는 양가(良家=좋은 집안)의 자제(子弟)였던 점이 참작되어서 우림랑(羽林郞-羽林은 前漢 때 설치했던 황제 직속 부대 名)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장환(張奐)이 인솔했던 군(軍)에 종군해서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강족(羌族)과 싸웠으며, 그 결과로 장환(張奐) 군은 그 부족의 장을 비롯해서 1만여 부족 인들을 처형하고 대승했다. 그리고 또 그는 그 공적으로 낭중(郎中)에 임명되었으며, 비단 9천 필(匹)을 하사받았지만, 그러나 그 모두를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그는 다시 변경에서 활약했으며, 이민족들과 싸우면서 서역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 병주(幷州) 자사(刺史), 하동(河東) 태수(太守)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하지만 중평(中平) 원년(元年-184年)에 그는 다시 동(東)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황건적(黃巾賊) 토벌에 나섰지만, 그러나 패배해서 면직(免職)되었다.

 동년(同年) 겨울, 양주(凉州)에서 변장(邊章), 한수(韓遂), 마등(馬騰) 등이 강(羌)과 호(胡)의 협력을 받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 다음해 그는 다시 중랑장(中郞將)에 복귀했고, 이어서 그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되었으며, 파로장군(破虜將軍)에 임명되며 장온(張溫)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 후, 후한(後漢) 군은 위기를 맞게 되었지만, 그런데 또 바로 그때, 갑자기 황건군(黃巾軍)의 진영으로 유성(流星)이 떨어졌다. 그러자 그것을 불길하게 여겼던 황건군(黃巾軍)이 철수했는데, 그러자 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군(漢軍)은 그들을 추격해서 대파(大破)했다.

 그 후, 장온(張溫)과 동탁(董卓)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했지만, 그러나 오히려 동탁(董卓)이 그들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기지(機智)를 발휘해서 강둑을 막아서 물을 채웠다. 그러자 추격군은 그 아래로 지나갔으며, 그 사이에 또 동탁(董卓)은 둑을 터트려서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또 그 결과, 후한(後漢) 군은 6개 사단(師團) 중 5개 사단(師團)이 패배했다지만, 그러나 동탁(董卓)이 이끌던 군대만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 그는 태향후(斄鄕侯)에 봉해졌다.

 중평(中平) 5년(188年), 그는 다시 전장군(前将軍)에 임명되었고, 양주(涼州)에서 난(亂)을 일으켰던 황건적(黃巾賊)의 본거지를 토벌하기 위해서 나섰다. 그런데 그때, 적을 토벌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병법에 통달했던 황보숭(皇甫嵩)과 그의 의견이 달랐다. 그래서 결국 동탁(董卓)의 의견과 정면배치 되었던 황보숭(皇甫嵩)의 임기응변(臨機應變) 작전으로 한군(漢軍)은 대승했고, 그 결과로 또 동탁(董卓)은 상황의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상대적으로 그에 대한 공적은 모두 황보숭(皇甫嵩)에게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다시 소부(少府)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조정으로부터 군을 모두 황보숭(皇甫嵩)에게 넘겨주고 귀환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변경의 치안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핑계로 대며 그 명령에 불응했다. 그러자 그 다음해 그는 다시 병주(幷州) 자사(刺史)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또, 그와 동시에 다시 귀환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도 그 명령을 거부했다.

 중평(中平) 6년에 영제(靈帝)가 몰(沒)했다. 그러자 대장군이었던 하진(何進) 등은 환관들을 일소할 계획을 세웠고, 그러자 동탁(董卓)에게도 소환명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동탁(董卓)은 그때서야 수도(首都)였던 낙양(洛陽-그러나 당시에는 雒陽)으로 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러나 그 후, 환관주살 계획이 진행되던 중 하진(何進)이 살해되었고, 이어서 원소(袁紹) 등이 반격을 가했다. 그러자 환관 중에서 중상시(中常侍)였던 단규(段珪) 등이 새로운 황제 유변(劉弁=少帝)과 그의 동생 진류왕(陳留王)을 데리고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동탁(董卓)이 그들(유변과 진류왕)을 구출했다.

 그 후, 동탁(董卓)은 그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귀로(歸路)에 올랐는데, 그런데 그때, 유변(劉弁)은 황제였거나, 형이었는데도 언변이 선명치가 않았으며, 그러나 그 동생이었던 진류왕(陳留王)은 오히려 말을 잘했기 때문에, 그래서 동탁(董卓)은 진류왕(陳留王)이 더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으로 들어갔을 때는 병력이 약 300명 정도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하진(何進)의 군사들을 흡수했고, 이어서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는 또 집금오(執金吾-漢代의 官名이며, 秦代에는 武官 中尉에 해당했음) 정원(丁原-漢代의 정치가)의 군사들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정원(丁原)을 암살하려 기도했지만, 그러나 당시, 무용(武勇)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여포(呂布)가 정원(丁原)을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 여포(呂布)를 꾀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그리고는 그 여포(呂布)로 하여금 정원(丁原)을 살해하게 했다.

 참고: 그러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동탁(董卓)이 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가서 소제(少帝)를 폐위시켰고, 이어서 헌제(獻帝)를 옹립하려 하자 정원(丁原)이 반발함으로 해서 그 두 사람은 곧 전투상태에 돌입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또 당시 그 정원(丁原)에게는 무용(武勇)을 자랑하던 여포(呂布)가 있었기 때문에 동탁(董卓)은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그는 당시 여포(呂布)와는 동향(同鄕)의 인물이었고, 그리고 또 그때는 이미 여포(呂布)와 안면까지 트고 있었던 이숙(李肅)을 이용해서 여포(呂布)를 꾀게 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 이숙(李肅)은 적토마(赤兎馬)를 여포(呂布)에게 선물로 주고는 정원(丁原)을 배신하게 했다고 되어있다.

 아무튼 그 후, 동탁(董卓)은 집금오(執金吾)의 군사들마저 손에 넣었고, 그리하여 대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여포(呂布)를 양자(養子)로 삼았으며, 그 병력(兵力)을 배경으로 사공(司空-관직의 하나이며, 알기 쉽게 周代에서는 三公 다음이었으며, 6卿 중 하나였다)까지 되었다. 그러자 또 그는 유변(劉弁)의 생모였던 하 태후(何太后)를 협박해서 유변(劉弁)을 폐했고(弘農王), 진류왕(陳留王)을 황제에 옹립했다.(獻帝) 그리고 또 그 하 태후(何太后)가 영제(靈帝)의 모(母)였던 동 태후(董太后)를 압박했던 것을 문제 삼아서, 하 태후(何太后)의 권력을 박탈했으며, 그리고는 또 이어서 그녀를 영안궁(永安宮)에 유폐(幽閉)한 뒤, 그 얼마 후에 살해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다시 태위(太尉)에 올랐으며, 그 다음에는 결국 상국(相國)까지 되었다.

 참고: 相國이란 계급(지위)은 漢 창건의 공이 있었던 功臣, 蕭何와 曹参 그리고 呂雉의 조카였던 呂産이 즉위했던 적이 있었으며, 그 후 쿠데타에 의해서 呂産이 誅殺된 以後, 약 300年 以上 永久欠番 상태에 있었던 지위였다. 그리고 또 演義에서는 太師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조정(朝廷)에서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권리와 칼을 차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자 또 그의 포악(暴惡)은 한계에 다다라서 낙양(洛陽)에 있던 부호(富豪)들의 집들을 습격해서 금품을 탈취했다거나, 마을축제에 참가했던 농민들을 학살했다거나 했다. 그리고 또한 색향(色香)에 눈이 멀었던 그의 만병(蠻兵)들도 매일 밤마다 궁녀들을 능욕하는 등, 그 악도비도(惡道非道)는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그러자 그런 동탁(董卓)의 전횡(專橫)에 반발심을 가졌던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등, 당시 유력자(有力者)들은 교모(橋瑁)의 요청(演義에서는 曹操)으로 초평(初平) 원년(190년)에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을 조직했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홍농왕(弘農王)을 독살(毒殺)하고는 당시 방위에 불리했던 낙양(洛陽)을 버리고 장안(長安)으로 강제 천도(遷都)했다.

 참고: 그때 董卓은 洛陽에 있던 역대 황제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財寶들을 챙겼고, 이어서 궁전과 민가들을 다 불태웠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는 낙양(洛陽)에 계속해서 주둔하면서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과 싸웠다. 그리고 또 그는 하양진(河陽津)에서 양동작전(陽動作戰)을 이용해서 왕광(王匡)을 크게 격파했으며, 이어서 서영(徐榮)을 파견해서 형양현(滎陽縣) 변수(汴水)에서 조조(曹操)와 포신(鮑信)을 크게 격파했다. 그리고 또 양현(梁縣)에서 손견(孫堅)도 격파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손견(孫堅)과 다시 싸워서 패배했고(陽人의 싸움), 그러자 그는 낙양(洛陽)의 마을들을 다 태우고는 장안(長安)으로 물러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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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국 명대(明代)에 쓰인 것이며, 후한(後漢) 말과 삼국시대를 무대로 했던 시대(時代)소설 또는 통속(通俗)소설을 말한다.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이며, 삼국연의(三國演義),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고도 불린다. 저자(著者)는 정설(定説)이 없으며, 시내암(施耐庵) 혹은 나관중(羅貫中)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형제>


 하지만 후한(後漢) 말(末)과 삼국시대를 무대로 했던 설화(說話)나 강담(講談) 등은 본서(本書)가 나오기 전부터도 있어왔으며, 그 중에서도 그보다 훨씬 전이었던 북송(北宋)의 시대에서도 유비(劉備)와 촉한(蜀漢)을 선(善)으로 그리고 조조(曹操)와 위(魏)를 악역(惡役)으로 했던 이미지가 이미 정착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또 원대(元代)에는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全 페이지 揷畵入 三國志)란 책도 간행되었으며, 그것은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원형(元型)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그리하여 그러했던 조류(潮流)를 타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탄생했으며, 그 탄생 시기는 또 원 말(元末)과 명 초(明初)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본서(本書)는 촉한(蜀漢)을 정통(正統) 선자(善者)로 취급하는 선(線)을 유지했으면서도, 하지만 그때까지의 설화(說話) 등에서 나타났던 극단적이고도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고 여겨지는 사건들 그리고 역사연대를 무시했던 전개를 적극적으로 배제했으며, 황건(黃巾)의 난(亂)부터 오(吳) 멸망까지의 시기와 함께 후한(後漢) 말의 중요했던 사건 등, 진수(陳壽)가 삼국지(三國志)에서 취급했던 범위까지를 망라(網羅)했다.

 ※ 진수(陳壽-233년부터 297년)는, 중국 서진(西晉)의 역사가였고, 자는 승조(承祚)였다. 삼국시대에는 촉나라의 관료였으나, 후에는 진(晉)나라로 넘어갔다.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인 <삼국지(三國志)>를 편찬했다.(후술 또는 생략)

 그리고 또 본서(本書)는 한(漢)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았던 고결한 주인공 유비(劉備)와 왕조를 지배해서 전횡했던 조조(曹操)와의 대립을 중심축으로 했던 수준 높은 이야기 성(性)을 보여주었고, 사서(史書)의 정통성을 보장 받았던 일화(逸話)들을 솜씨 좋게 선택했음과 동시에, 그 계기성(繼起性)과 함께 백화(白話=口語)를 이용한 세련된 문장을 선보여서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아주 높았다. 그리하여 백천서지(百川書志)는 문중(文中)에서 본서(本書)를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정사(正史)에 근거를 두었으면서도 속전(俗傳)으로 장식했고, 사문(史文)을 고증(考證)해 나갔으면서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저속(低俗)하지도 않고, 허구(虛構)도 아니어서, 대중들이 읽기도 쉽고 접하기에도 쉬웠다. 그리고 또한 사가(史家)들의 전통적인 고문(古文)에 근거해서 쓴 것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또 맹목적인 서술과 흥미 성(性) 그리고 또한 의문을 자아내게 하는 괴이한 태도에서 벗어나서, 백년간을 서술했으면서도 거의 모든 사건들을 다 포괄했다>

 하여 본서(本書)는 중국의 소설로서는 아주 드문 것이며, 그래서 또한 지식인들이 접해도 좋을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한 자주 장서목록(藏書目錄)에 수호전(水滸傳)과 함께 나란히 게재(揭載)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본서(本書)의 명칭에 대해서는, 청대(淸代)에서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삼국연의(三國演義) 등으로 불리며 통일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또 민국(民國) 기(期)에는 소설연구 등에서 노신(魯迅)이 중국소설사략(中国小説史略)에서 그리고 호적(胡適)이 백화문학사(白話文學史)에서 각각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란 명칭을 사용했었지만, 그러나 신(新) 중국 성립 후에는 삼국연의(三國演義)로 통일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중국에서는 전부 삼국연의(三國演義)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또 혹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 부연으로, 본서(本書)는 성립 당초부터 삼국지(三國志)라고 불렸던 일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서(歷史書) 삼국지(三國志)와 혼동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청대(淸代)에 들어서 그런 것이 비판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중국에서는 본서(本書)를 삼국지(三國志)라고 부르는 일은 전혀 없고, 오로지 삼국연의(三國演義)로 통일되어 있다고 한다.



 <황건(黄巾)의 난(乱) = 황건지난(黃巾之亂)>

 중국 후한(後漢) 말기였던 184년(中平 1年)에 태평도(太平道)의 교조(教祖)였던 장각(張角)이 일으켰던 농민반란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표식으로 머리에 황색 두건(頭巾)을 맸던 것으로부터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들을 황건(黃巾) “적(賊)”이라고 표현했으며, 그리고 또 그 사건은 후한(後漢)을 쇠퇴 시켰고, 그리하여 시대를 삼국시대로 옮겨가게 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태평도(太平道)는, 중국 후한 말기에 장각(張角)이 창시했으며, 정치 색채가 강했던 민간 종교였다.(또는 그 결사) 그리고 주문으로 병을 다스린다고 해서 수십만의 신자들을 모았고, 그리하여 황건의 난을 일으켰다. 오두미도와 함께 도교의 원류가 되었다.

 ※ 오두미도(
五斗米道)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장릉(張陵)이 창시했던 질병의 치료를 중심으로 했던 교법(敎法) 또는 그런 교단이었으며, 병을 고치는 대가로 쌀 다섯 말을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장각(張角-?부터 184년)은, 태평도의 교조였고, 기주(冀州) 거록(鉅鹿=현재의 河北省 平鄕縣)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대현양사(大賢良師 또는 太平道人)이라고 칭했고, 그 외에도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고 칭하며 신자(信者)들을 모았다. 그리고는 184년에 <창천(蒼天=後漢) 이사(已死) 황천(黃天=太平道) 당립(當立)...>으로 시작하는 슬로건을 내걸고는 자신의 동생이었던 장보(張寶)와 장양(張梁) 등과 함께 후한(後漢)에 반기(反旗)를 들었다.

 참고: 그때, 그가 내걸었다고 하는 [蒼天已死 黄天當立 歳在甲子 天下大吉]이란 슬로건에 대해서는 종래(從來) 오행사상(五行思想)에 근거했던 것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하지만 후한(後漢)은 <화덕(火德)=火⋅赤>의 왕조였다는 관점에서 위, 후한(後漢)을 창천(蒼天=木⋅靑)으로 표현했던 것에는 뭔가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설(說)이 있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는, 그 창천이사(蒼天已死)란 말은 장각(張角)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고, 그래서 <장각(張角)은 단지 그 말에다 황천(黃天)을 결부시켰던 것뿐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난(亂)은 한(漢) 왕실의 지배에 불만을 가져왔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만, 그러나 장각(張角)의 갑작스런 죽음(病死)으로 인해서 그 기세가 한풀 꺾였고, 그러자 또 이어서 진압에 나섰던 후한(後漢)의 장군 황보숭(皇甫嵩)과 주준(朱儁) 등의 활약에 힘입어서 난(亂)은 급속히 진정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황건(黃巾)을 자칭했던 봉기는 각지에서 이어졌고, 그러자 더 이상 수습이 불가능했던 후한(後漢)의 권위는 점점 더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자 결국 한(漢)은 무너졌고, 이어서 그 황건 병(黃巾兵)들을 흡수했던 조조(曹操=)와 손권(孫權=) 그리고 유비(劉備=蜀漢)에 의해서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일설에는 그가 원래는 당고(黨錮)의 금(禁) 이후에 억압 받았던 당인(黨人=淸流派 지식인) 중 한사람이었을 것이란 설이 있다. 그리고 또 그 이유는,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한(後漢)은 당고(黨錮)의 금(禁)을 해제시켰지만, 그러나 <장각(張角)만은 제외한다>라고 했던 것으로부터, 그래서 또 당시 후한(後漢)에서는 그를 당인(黨人)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그 이유라고 했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도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따르면 장각(張角) 등 3형제는 원래 아주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산으로 가서 약초 등을 채집해서 시장에 내다팔거나, 상인들의 짐을 운반하면서 근근이 살았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장각(張角)이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남화노선(南華老仙=莊子가 죽고 나서 신선이 되었을 때 불렸다는 이름)을 만났다. 그러자 그 남화노선(南華老仙)은 그에게 한 권의 책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태평요술(太平要術)이란 책이었다. 그러자 평소 한(漢) 왕조의 부패를 미워하고 있었던 장각(張角)은 그 남화노선(南華老仙)의 가르침을 배워서 마침내 풍우(風雨)를 다루는 힘까지 체득했고, 그 후에 어떤 사람이 병상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그가 부수(符水=부적을 담근 물을 의미하며, 주술을 건 물)를 먹여서 죽어가던 그를 살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들었던 백성들을 모두 그를 높이 평가했고, 이어서 황색 옷감을 몸에 감는 것으로 그와 한 동지임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당시 후한(後漢)의 부패했던 조정(朝廷)을 타도하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황건당(黃巾黨)을 결성했으며, 그는 또 스스로 대현양사(大賢良師)를 자칭했다. 그로부터 수년(數年) 후, 황건당(黃巾黨)은 장각(張角)의 이상과는 크게 배치되게 타락했고, 가는 곳마다에서 약탈과 강도 그리고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으면서 폭도화 되어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그때부터 그들을 황마(黃魔)라거나 황귀(黃鬼) 또는 황건적(黃巾賊)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하지만 그 후, 장각(張角)의 병사(病死)에 이어서 장보(張寶), 장양(張梁)이 전사하자 세력이 약화되어 난(亂)은 결국 종결되었다.

 아무튼, 장각(張角)은 처음에,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에 근거하여 도교(道敎)적인 회과(悔過)의 방법으로 치병(治病)을 시행했다. 그 결과 대중들의 전폭적인 신앙심을 얻게 되었고, 그러자 그는 곧 정치색을 짙게 했던 태평도(太平道)의 교조(敎祖)로서 수십만(數十萬)의 신도(信徒)들을 36개로 나누었고, 이어서 그 한 단위를 방(方)이라고 하면서 군사조직화 했다. 그리고는 또 한(漢) 왕조에 대항하기 위해서 봉기를 계획했으며,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근거했던 슬로건을 내걸고는 관아(官衙)의 문(門) 등에 <갑자(甲子)>란 글을 쓰고 다니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참고 : 황건(黃巾)의 황(黃色)은 오행사상(五行思想)에 의하면, 흙 또는 땅(土)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래서 목(木) 화(火)토(土) 금(金) 수(水)의 순환법칙에 맞추게 되면, 황(黃=)은 화(火=赤色=漢朝) 다음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는 184년(光和7년, 干支年 甲子), 그 전에 미리 형주(荊州)와 양주(揚州)로 보내서 군사들을 모집하라고 시켰던 마원의(馬元義)를 낙양(洛陽)으로 보내서 당시, 중상시(中常侍)였던 봉서(封諝)와 서봉(徐奉) 등과 내통하게 했다. 그리고는 3월 5일에 안과 밖에서 동시에 봉기하기로 밀약을 맺게 했지만, 그런데 또 당시, 장각(張角)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당주(唐周)란 자가 그 일을 미리 알고는 환관들에게 밀고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은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그러자 또 마원의(馬元義)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참고 : 거열형(車裂刑)은 마차 두 대에다 죄인의 다리를 각각 묶은 다음, 그 두 마차를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해서 죄인을 찢어서 죽였던 형벌이었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던 영제(靈帝)는 곧 삼공(三公)과 사예(司隸) 등에 명해서 궁중의 위병(衛兵)들과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을 조사하게 했다. 그러자 그와 관련 되었던 사람이 천여 명이나 발각되었고, 그들은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그리고 또한 그 즉시 영제(靈帝)는 장각(張角)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자 2월, 계획의 차질을 깨달았던 장각(張角)은 예정보다 빠른 봉기를 서둘렀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고 칭하며 자신의 아우였던 장보(張寶)와 장양(張梁)에게도 각각 지공(地公)과 인공장군(人公將軍)이란 칭호를 내렸다. 3월, 영제(靈帝)는 하진(何進)을 대장군으로 삼고 장병(將兵)들을 도정(都亭)에 주둔시켰다. 그리고는 8개의 관(關)에 도위(都尉)들을 각각 배치시켜서 낙양(洛陽)을 수호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는 또 황보숭(皇甫嵩)과 여강(呂强) 등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당고(黨錮)의 금(禁)을 풀어주었고, 그리하여 관계(官界)로부터 추방되었던 청류(淸流) 지식인들이 황건적(黃巾賊)과 합류하는 것을 막았던 동시에 또한 그들을 이용했다. 그리고는 또 궁중 안에 있던 모든 창고를 열어서 그 안에 들어있던 돈()과 서원(西園)의 말(馬)들을 풀어서 인재(人材)들을 모집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노식(盧植)을 장각(張角)이 진을 치고 있던 기주(冀州)방면으로, 그리고 황보숭(皇甫嵩)과 주준(朱儁)은 당시 황건(黃巾)의 세력이 가장 강했던 예주(豫州)영천(潁川) 방면으로 각각 파견했다. 그러자 4월, 우선 주준(朱儁)이 영천(潁川)에서 파재(波才)와 격돌했지만 패해서 도주했다. 그리고 5월, 황보숭(皇甫嵩)과 주준(朱儁)은 장사(長社)에서 농성(籠城)을 했고, 그러자
다시 파재(波才)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그곳을 포위했다. 그러자 또 그 열세(劣勢) 속에서 황보숭(皇甫嵩)은 군(軍)을 고무(鼓舞)시키면서 화계(火計)로 맞섰고, 이어서 파재(波才) 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황보숭(皇甫嵩)은 성을 나와서 파재(波才) 군을 쳤고, 그에 파재(波才) 군은 물러났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 때를 꼭 맞추어서 조조(曹操)의 원군이 도착했다. 그러자 황보숭(皇甫嵩)은 그 조조(曹操) 군과 합류해서 그들을 추격했고, 이어서 양적(陽翟)에서 주둔하고 있던 파재(波才) 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6월에는 서화(西 華)가 팽탈(彭脫) 군을 괴멸시켰으며, 이어서 왕윤(王允)이 황건(黃巾)의 별동대를 격파하면서 예주(豫州)가 평정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였던 3월, 형주(荊州) 남양(南陽)에서는 장만성(張曼成)이란 자가 남양황건군(南陽黃巾軍)이란 이름으로 봉기했다. 그리고는 그곳 태수(太守) 저공(褚貢)을 공격하여 죽인 후, 스스로를 <神上使>라고 칭하며 완(宛)에 주둔했다.

 참고: 위, 장만성(張曼成)이 자칭했다는 신상사(神上使)에서, 신상(神上)은 그가 붙인 사연호(私年號=異年號 등)이며, 그리고 사연호(私年號)는 아직 인정되지 않은 국가 등 단체가 연호를 붙였을 때 부르는 명칭이다. 그러므로 대충 풀이하면, 신상(神上)이란 연호와 결합시켜서 자신을 <하늘이 내린 사자 또는 神託 받은 자>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출처가 정체불명인 것으로 인하여, 그래서 그가 그 연호를 실제로 사용했었는지 그리고 또 신상사(神上使)가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그러자 6월, 새로이 남양(南陽) 태수가 되었던 진힐(秦頡)이 장만성(張曼成)을 공격해서 그를 죽였지만, 그러나 그 후에도 남양황건군(南陽黃巾軍)은 항복하지 않고 장만성(張曼成)의 뒤를 이어서 조홍(趙弘)이란 자를 새롭게 두령으로 삼고는 완성(宛城)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그러자 또 그때 마침 예주(豫州) 평정을 끝냈던 주준(朱儁)이 형주(荊州) 자사(刺史=道知事 또는 지방長官)였던 서구(徐璆)와 함께 진힐(秦頡)에 합류해서 완성(宛城)을 포위했다. 그런데 8월, 주준(朱儁) 등이 완성(宛城)을 포위하고 있던 중, 누군가가 주준(朱儁)을 경질(更迭)하기 위해서 황제에게 진언을 올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그에 깜짝 놀랐던 주준(朱儁)은 급히 공격을 개시했고, 그 결과 조홍(趙弘)도 참수되었다. 그러자 또 조홍(趙弘)을 잃게 된 남양황건군(南陽黃巾軍)은 다시 한충(韓忠)이란 자를 내세우고는 농성을 계속했다. 그러자 또 그때, 주준(朱儁) 휘하에 있었던 손견(孫堅) 등의 활약으로 완성(宛城)은 결국 함락되었고, 그러자 또 한충(韓忠)은 탈출을 해서 한(漢)에 항복하려 했지만, 그러나 주준(朱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한충(韓忠)은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남양황건군(南陽黃巾軍)은 다시 손하(孫夏)란 자를 우두머리에 세우고는 저항을 계속했다. 10월, 주준(朱儁)은 격렬하게 저항하던 손하(孫夏) 군을 쳐부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남양(南陽)의 황건군(黃巾軍)도 괴멸되었다. 그리고 또 그 전 6월, 기주(冀州)에서는 황건군(黃巾軍)에 연전연승했던 노식(盧植) 군이 장각(張角)이 광종(廣宗)에서 농성을 하자 그곳을 포위하고는 공략을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노식(盧植) 군이 우세했는데, 그런데 또 바로 그때, 조정에서 파견되었던 소황문(小黃門-43회 蔡倫 참조) 좌풍(左豊)이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식(盧植)을 중상모략 했다. 그래서 노식(盧植)은 결국 파직되었는데, 그러자 그 노식(盧植) 대신으로 동탁(董卓)이 파견되어 왔지만, 그러나 동탁(董卓)은 황건군(黃巾軍)에 패했다. 8월, 영제(靈帝)는 예주(豫州)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주(兗州) 동군(東郡)에서 복기군(卜己軍)을 격파했던 황보숭(皇甫嵩)을 급히 기주(冀州)로 파견시켰다. 10월, 황보숭(皇甫嵩)은 광종(廣宗)에서 황건군(黃巾軍)에 기습을 감행했고, 그 결과로 장양(張梁)이 죽었다. 하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장각(張角)이 병사(病死)했으므로, 그래서 정벌군은 그의 유체를 찾아내서 만인이 다 볼 수 있게 전시하는 것으로 그를 모욕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거록(鉅鹿) 태수(太守)였던 곽전(郭典)과 함께 곡양(曲陽)에서 장보(張寶)마저 격파했으며, 그 결과로 장보(張寶)도 참수에 처해졌다. 그러자 그때부터는 황건(黃巾)의 무리들도 힘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난(難)은 수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후에도 황건군(黃巾軍)의 잔당들은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져서 발호(跋扈)했고, 다시 반란을 반복했다거나 또는 산적(山賊)질, 도적질을 일삼았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도 청주(靑州)는 거의 그들의 아지트 화 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약 100만정도의 군세(軍勢)로 중국의 북부를 크게 황폐화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는 또 그들은 192년에 연주(兗州) 자사(刺史)였던 유대(劉岱)까지 죽였는데, 그러자 조정으로부터 조조(曹操)에게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이 내려졌고, 그래서 조조(曹操)가 나서서 그들 중 병(兵) 약 30만과 비전투원 약 100만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참고: 그때 조조(曹操)는 항복해 왔던 황건군(黃巾軍)을 중핵(中核) 전력으로 재편성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때부터 청주군(靑州軍) 또는 청주병(兵)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후에 모두 조조(曹操)에게만 충성을 다했으며, 그리하여 조조(曹操)가 죽고 문제(文帝=曹丕)가 즉위했을 때야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에도 황건적(黃巾賊)의 세력이 약했던 양주(凉州) 등의 지역에서도 후한(後漢)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던 틈을 타서 한수(韓遂) 같은 자들이 연달아서 상식에서 벗어난 반란이나 자립(自立) 또는 항쟁을 반복했고, 그러자 또 그런 틈을 타서 이민족들까지도 변경에서 약탈행위를 일삼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자구행위(自救行爲)로 지방 등에서는 호족들이 중심이 되어서 촌락공동체(村落共同體) 규모로 자위(自衛), 자경(自警)의 무장(武裝)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그와 더불어서 또 그런 치안의 악화로 인해 지식인을 포함했던 많은 사람들이 난(亂)을 피해서 형주(荊州), 양주(揚州), 익주(益州) 등 강남(江南)이나 사천(四川) 변경(邊境)지역으로 이주했고, 그런 일은 또 그 지역들의 문화수준의 향상과 개발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또 그런 곳들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 그 후의 삼국시대나 그리고 남북조시대의 발생을 용이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 모든 사건들로 인해서 그때까지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던 호족들과 넓은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무장과 함께 군벌화 양상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것은 또 하나의 난(亂)을 부르는 잠재된 형태로 점점 더 군웅할거의 양상으로 발전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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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166년


 대진(大秦=로마)의 왕 안돈(安敦)이 사자를 보내왔다



 후한서(後漢書) 권 88 열전(列傳) 78 <서역(西域) 대진(大秦)>

 [至桓帝延熹九年, 大秦王安敦遣使自日南徼外獻象牙, 犀角, 瑇瑁, 始乃一通焉]

 해석해보면...

 [환제(桓帝) 연희(延憙) 9년(166년)에 대진(大秦)의 왕 안돈(安敦=안톤)이 파견했던 사자가 일남군(日南郡)을 방문해서 상아(象牙)와 서각(犀角), 대모(玳瑁)를 헌상했다]

 이며...

 그리고 위, 안돈(안톤)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였거나 또는 그 선대(先代)의 황제였던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안토니우스>란 음을 묘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86-161

 로마의 황제. 관리의 지위를 안정되게 했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는 등, 관대하고 온건한 통치를 하였다. 재위 기간은 138-161년이며, 상세한 것은 차기 또는 생략함.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

 로마의 황제.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였고, 제국 동쪽과 도나우 강 양쪽의 변경 방어에 힘썼으며, 스토아 철학으로 기울어서 전장의 참호 속에서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을 저술하기도 했다. 재위기간은 161년-180년이며, 이하 상세한 것은 차기 또는 생략함.

 





 그리고 또, 로마 측의 사서(史書)에서는 사자를 파견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그리고 그 헌상 품이었다는 것도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나온 물건이었던 것 등으로 미루어서, 그래서 아마도 당시 로마의 상인 누군가가 자신을 로마황제의 사자라고 속이고는 중국과의 무역을 기도(企圖)하려고 그렇게 했던 아니었겠는가, 하고 추측될 뿐이다. 그리고 또한, 그 일남군(日南郡)이란 곳은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의 중부 도시 <후에> 부근에 있었던 후한(後漢)의 군(郡)이었다.
그리고 또, 상아(象牙)는 코끼리의 엄니이며, 서각(犀角)은 코뿔소의 뿔, 그리고 대모(玳瑁) 또는 대모갑(玳瑁甲)은 바다거북의 껍질을 의미한다.


 166년


 당고(黨錮)의 금(禁)이 일어나다



 당고(黨錮)의 금(禁)=당고지화(黨錮之禍)

 후한(後漢) 말기에 일어났던 탄압사건으로 <당고(黨錮)의 화(禍)>라고도 한다. 그리고 당시, 환관(宦官) 세력에 비판적이었던 청류파(淸流派) 사대부(士大夫=黨人) 등을 환관들이 탄압했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많았던 것이 금고형(禁錮刑=그러나 현대의 금고형과는 다른 것으로, 그때의 금고형은 관직에서 추방하는 것과 出仕를 금지시켰던 것을 말했다)에 처해졌던 것으로부터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건은 166년<연희(延熹)9년>과 169년<건녕(建寧)2년> 2번에 걸쳐서 발생했는데, 그래서 앞의 것을 <제1차 당고(黨錮)의 금(禁)>, 뒤의 것을 <제2차 당고(黨錮)의 금(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뒤에 쓰게 될 삼국지(三國志)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배경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하면, 그러니까 후한(後漢)의 화제(和帝)가 두헌(竇憲) 등을 배제(排除)하려 했던 환관(宦官)들을 등용한 이후, 그 환관들의 세력은 날로 강해져갔다. 그러자 그들은 곧 자신들의 이권(利權)을 추구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고, 그리하여 외척들이 전횡(專橫)을 했던 때 이상으로 오직(汚職=瀆職)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러했던 상황에서 일부 사대부(士大夫=豪族)들은 스스로를 청류파(淸流派)라고 이름을 짓고는 도당(徒黨)을 조직했고, 그리고는 환관 또는 그들과 결부되었던 세력들을 탁류파(濁流派)라고 매도하면서 공공연하게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부터 불붙기 시작했던 사대부(士大夫)들과 환관(宦官)들의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하게 발전해갔는데, 그리하여 또 166년, 사례교위(司隷校尉)였던 이응(李膺)과 태학(太學)의 학생이었던 곽태(郭泰) 그리고 고표(賈彪) 등, 이른바 청류파(淸流派)라고 자칭했던 일단(一團)의 무리들이 조정(朝廷)으로 몰려가서 중상시(中常侍)의 전횡을 비판하며 그 죄상(罪狀)을 고발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중상시(中常侍) 등이 <黨人들이 조정을 비방했다>라는 역공(逆攻)을 받아서 오히려 체포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그들은 호족(豪族)들의 구명(求命)운동으로 인해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는 종신(終身)금고(禁錮) 형에 처해졌으며, 그리고 여기까지가 제1차 당고(黨錮)의 금(禁)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제2차의 禁은 169년에 일어났으며, 그래서 그에 대해서도 설명을 조금 하면, 당시 외척이었던 두무(竇武)와 청류파(淸流派)의 당인(黨人)이었던 진번(陣蕃) 등이 결탁을 해서 환관들을 배제하려 거병했지만, 그러나 그 거병은 실패했고 이어서 두무(竇武)는 자살했다. 그러자 다시 그 관련자들에게 탄압이 내려졌고, 그러자 그것을 제2차 당고(黨錮)의 금(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176년에는 그 금(禁)이 당인(黨人)들의 일족(一族)에까지 확대되었는데, 하지만 또 그러던 중에 황건(黃巾賊)의 난(亂)이 발생하자, 그들이 그 난에 가담할 것이 두려웠던 한(漢) 조정으로부터 그 금(禁)이 풀리게 되어, 그에 그 금(禁)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또 그 황건(黃巾)의 난(亂)이 진압되자 십상시(十常侍)를 시작으로 했던 환관들과 당시 외척이었던 하진(何進)과의 사이에서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환관들은 그 하진(何進)을 모살(謀殺)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하진(何進)을 죽인 것에 격노했던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등의 군사들이 궁중으로 난입했던 것으로 해서 그들은 모두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환관과 외척의 권력투쟁은 공도동망(共倒同亡)의 형태로 종결되게 되는데, 하지만 또 그 틈을 타서 낙양(洛陽)을 점거했던 동탁(董卓)에 의해서 후한(後漢)의 왕조는 통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발하다



 십상시(十常侍)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영제(靈帝) 시대에 전권을 장악했던 환관의 무리를 이름.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을 중심으로 하운(夏惲), 곽승(郭勝), 손장(孫璋), 필람(畢嵐), 율숭(栗嵩), 단규(段珪), 고망(高望), 장공(張恭), 한회(韓悝-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한리’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참고 바람), 송전(宋典) 그 12명의 중상시(中常侍)를 가리켰으나, 하지만 그 어림수(槪數)로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무튼,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환관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상에서 권력을 쥐게 되었던 것은 환제(桓帝) 때, 외척이었던 양기(梁冀)의 배척에 공을 세웠던 단초(單超)와 서황(徐璜) 그리고 구원(具瑗)과 좌관(左悺) 그리고 또 당형(唐衡) 그 5명을 중용하며 그들을 <5후(侯)>라고 불렀던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단초(單超)가 죽어버리자 오만했던 5후(五侯)도 실각했다지만, 하지만 또 그 후의 영제(靈帝) 때 후람(侯覽)과 조절(曹節) 그리고 왕보(王甫)란 자가 또 나타나서 당고(黨錮)의 금(禁) 등 무수한 정쟁(政爭)에서 승리했으며, 그 결과로 그들의 권세는 하늘도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에 여남원 씨(汝南袁氏) 같은 명문(名門)에서도 원사(袁赦)와 같은 환관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후람(侯覽)은 자살했으며, 왕보(王甫)는 사형에 처해졌지만, 하지만 조절(曹節)만은 181년까지 살아남아서 천수(天壽)를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조절(曹節) 사후(死後)에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렸던 환관 집단이 존재했다는 것이 기록상으로 확인되고 있으므로, 그래서 그들은 당시 영제(靈帝)의 총애를 흠뻑 받으면서 절대적인 권세를 누렸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도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의 권력은 실로 엄청나서 당시 그 두 사람에게 황제는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고까지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들은 자신의 일족들을 지방관(地方官) 등, 모든 요직에 앉혔으며, 백성들을 마구 착취했고, 그러자 또 그런 것을 걱정하던 사람들을 잡아들여서는 정신이상자로 몰아서 처벌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여강(呂强)이나 장균(張均) 같은 양식(良識)있던 인물들이 그들을 탄핵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십상시(十常侍)의 모략으로 처벌되었다. 그러자 또 그들의 권세에 힘을 입어서 관직을 얻으려던 사람들이 그들의 문전에 줄을 서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또 그때, 그런 어수선했던 틈을 타서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발했다. 그러자 환관들 중에서 봉서(封諝)란 자 같은 내통자가 나와서 환관들의 세력은 축소되었다. 그런데다 또 그 후, 외척에서 나왔던 대장군 하진(何進)이 십상시(十常侍)를 필두로 했던 환관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진(何進)은 영제(靈帝)가 죽자 영제(靈帝)에게서 총애를 받았던 환관 건석(蹇碩)을 살해했으며, 이어서 환관의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서 군세(軍勢)를 모으려고 했지만, 하지만 또 장양(張讓) 등이 하태후(何太后)를 이용해서 함정으로 그를 유인한 뒤 살해하고는 그 난국을 수습했다. 하지만 또 그때, 이미 전술한대로 하진(何進)의 죽음을 듣고 격노했던 원소(袁紹) 등이 궁중으로 난입했고, 이어서 환관들과 그 세력들을 거의 다 몰살했다. 그런데 또 그때, 장양(張讓)과 단규(段珪)는 황제였던 유변(劉弁)과 한(漢) 최후의 황제가 되는 유협(劉協)과 함께 도망을 쳤는데, 그러나 뒤쫓아 오던 추격 군을 뿌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리하여 강에 투신해서 자살했으며, 그때가 189년이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는 그 두 황제를 보필하겠다고 나섰던 동탁(董卓)이 십상시(十常侍)를 대신해서 권력을 잡게 된다.

 아무튼 그 후, 후한(後漢)으로부터 선양(禪讓)했던 위(魏)가 세워졌고, 그러자 환관들의 작태를 뼈저리게 경험했던 그들은 더 이상 내시에게는 권한을 주지 않는 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 십상시(十常侍)를 張譲, 趙忠, 封諝, 段珪, 曹節, 侯覧, 蹇碩, 程曠, 夏惲, 郭勝 10명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曹節과 侯覧은 張譲과 趙忠이 나타나기 이전에 王甫 등과 함께 권력을 누렸던 환관이었다.

 

 하진(何進)


 하진(何進) ?-광희(光熹) 원년(元年) 8월 29일(189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자(字)는 수고(遂高). 남양(南陽=河南省南陽) 완(宛) 출신. 이모매(異母妹)가 황후가 되자 현관(顯官=높은 벼슬)을 역임했고, 대장군이 되었다. 그 후 황건(黃巾)의 난(亂)이 진정된 후 전권(專權)을 손에 쥐었으나, 그러나 환관들에게 살해당했다. 부(父)는 하진(何眞).

 그의 하 씨(何氏) 가(家)는 원래 도살 업(屠殺業)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러다가 동도(同郡) 출신의 환관이었던 곽승(郭勝)의 도움을 받아서 이모매(異母妹)가 궁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후, 그녀는 영제(靈帝)의 총애를 받아서 황후가 되었고, 그 영향으로 하진(何進)에게도 영달(榮達)이 주어졌다.

 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발하자 그는 대장군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전장에는 일절 나가지 않고 항시 낙양(洛陽)에 머물면서 당시, 전선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던 장온(張温), 황보숭(皇甫嵩), 주준(朱儁), 노식(盧植), 동탁(董卓), 주신(周慎) 등을 지휘했다.

 그런데 그 무렵, 중앙에서는 영제(靈帝)의 황후 하 씨(何氏)와 영제(靈帝)의 모(母)였던 동 씨(董氏) 사이에서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후, 황건(黃巾)의 난(亂)이 진정되자 영제(靈帝)는 군제개혁을 실시해서 서원삼군(西園三軍=西園八校尉)을 설치했고, 다시 상군교위(上軍校尉)에 대장군 이하를 계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는데, 그러자 동 씨(董氏)와 하 씨(何氏)의 대립은 환관이었던 건석(蹇碩)을 끌어들이는 등 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그러자 또 당시 중군교위(中軍校尉)였던 원소(袁紹)는 하진(何進)에게 적극 협력하면서 건석(蹇碩) 등과 대립했다. 그러자 또 위치가 불리하게 되었던 건석(蹇碩)이 하진(何進)을 살해하려 기도했다는 것으로 해서 곽승(郭勝)을 중심으로 했던 환관들은 건석(蹇碩)과의 사이를 멀리했고, 그러자 또 하진(何進)은 건석(蹇碩)과 동 씨(董氏) 일당을 제거했다.

 그 후, 영제(靈帝)가 몰(沒)했다. 그러자 그때까지의 악정(惡政)을 참고 있었던 자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그것은 또 특히 환관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하진(何進)은 자신이 건석(蹇碩)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일도 있었고 해서, 그래서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환관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원소(袁紹) 등 막료(幕僚)들을 모아서 적극적으로 상의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일은 오히려 하(何) 황태후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그러자 또 이번에는 같은 하 씨(何氏)끼리의 대립으로 일이 발전되어갔다.

 그리고 또 그때, 하진(何進)이 하(何) 황태후의 반대를 받고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사이, 원소(袁紹)가 지방의 제장(諸將)들을 도(都)로 불러올리는 것으로 태후에게 압력을 가하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노식(盧植)과 진림(陳琳)이 반대를 하고 나왔는데, 그러나 원소(袁紹)는 굽히지 않고 재삼(再三) 주장했고, 그 결과 하진(何進)은 그 안을 수용했다. 그리고 또 그때, 조조(曹操)도 그 반대편에 섰다고 왕심(王沈)은 <위서(魏書-그러나 北齊의 魏收가 편찬했던 魏書와는 구별됨>에서 전했지만, 하지만 당시의 조조(曹操)는 아직 정치적인 발언권이 약했던 등으로 해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또 당시 원소(袁紹)가 대장군의 명(命)이라고 속이고는 각지에 지령을 내렸던 적도 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러했던 긴박한 정세(情勢) 속에서 원소(袁紹)는 극구(極口) 하진(何進)에게 경솔하게 궁중을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지만, 하지만 하진(何進)은 결국 그 충고를 무시하고 아무 생각 없이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환관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환관들은 천자의 칙서를 위조해서 도내(都內)의 병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 전에 원소(袁紹)가 먼저 거병을 했고, 이어서 환관들은 일소(一掃)되었다.


 

 삼국지
 (三國志)


 삼국지(三國志)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국 명대(明代)에 쓰인 것이며, 후한(後漢) 말과 삼국시대를 무대로 했던 시대(時代)소설 또는 통속(通俗)소설을 말한다.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이며, 삼국연의(三國演義),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고도 불린다. 저자(著者)는 정설(定説)이 없으며, 시내암(施耐庵) 혹은 나관중(羅貫中)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형제>



 ※ 시내암(施耐庵) ?-?

 중국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의 소설가(작가)였으며, 이름은 자안(子安), 그리고 내암은 그의 자(字)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또 중국의 유명한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지(水滸志=水滸傳)>와 함께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 <지여(志餘)> 등을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또는 실재(實在)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그리고 또 칠수유고(七修類稿)와 백천서지(百川書志) 등에서는 그가 전당(銭塘=지금의 杭州市)의 사람이었다고 기록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상태이다.



<杭州市의 西湖>



 그리고 또 민국(中華民國) 17년에 호서정(胡瑞亭)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그의 태생이 밝혀졌다고 주장을 했고, 그 증거로서 시내암(施耐庵)의 묘지(墓誌)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또 그 묘지(墓誌)에 의하면 시내암(施耐庵)의 본명은 자안(子安)이고, 자(字)는 내암(耐庵)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그는 회안(淮安) 사람으로, 진사(進士)가 되어서 벼슬길에 올랐지만, 그러나 뒤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75세에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수호전(水滸傳)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그리고 평요전(平妖傳) 등을 집필해서 문인(門人=弟子=門下生)이었던 나관중(羅貫中)에게 교정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설(一說)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저자가 시내암(施耐庵)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 묘지(墓誌)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묘지(墓誌)의 신빙성(信憑性)에 대해서는 아직도 강한 의문이 있다. 아무튼, 그 후였던 20세기 후반에도 강소성(江蘇省) 흥화시(興化市)에서 그가 살았던 거주지가 발견되었고, 그래서 또 그곳에서 시 씨 족보(施氏族譜)와 시 씨 장문보(施氏長門譜) 등의 자료가 차례로 발견되어 지금까지도 시내암(施耐庵)의 상세한 전기가 전해지고 있다지만, 하지만 역시, 그것 또한 신빙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나관중(羅貫中) 생몰불명

 중국 원(元) 말과 명(明) 초기의 작가. 그리고 역시 시내암(施耐庵)과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의 편자(編者)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잔당오대사연의(残唐五代史演義) 수당양조지화(隋唐兩朝志話) 등, 수종(數種)의 통속백화소설(通俗白話小説-白話는 중국의 구어체 언어)의 편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산서(山西省) 태원(太原)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으며(録鬼簿続編), 산동(山東省) 동원(東原)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지만(三国志演義-蒋大器序 등), 그러나 절강(浙江省)의 항주(杭州)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다.(七修類稿) 그리고 휘(諱)는 본(本)이며, 관중(貫中)은 자(字-그러나 続文献通考에서는 諱를 貫, 字를 本中이라고 했다) 그리고 호(號)는 호해산인(湖海散人-여기서의 散人은 세상을 잊고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文人을 의미하기도 한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수호전(水滸傳)을 편집했다든지(七修類稿에서는 원래 원작이 있었고, 그래서 그가 정리만 했으므로 編했다 라고 기술한다 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또 서호유람지여(西湖遊覽志余)에서는 그가 소설 수십(數十) 종(種)을 편찬(編撰)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현재 그가 편자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과 수종(數種)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 동(同) 서호유람지여(西湖遊覽志余)에 의하면 그가 통속소설 같은 저질스런 글만 썼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자손 삼대(三代)는
벙어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가중명(賈仲明)의 녹귀부속편(錄鬼簿續編)에서는 그가 희곡(戱曲)도 수십(數十)곡(曲)이나 썼지만, 그러나 사람과 잘 사귀지 못하는 나쁜 성격 때문에 마지막에는 행방불명되어 버렸다고 써두었다. 그리고 또한 청대(淸代)의 속설(俗說)<탑영원집(塔影園集)>과 서병소회수호일백단팔장도제발(徐鈵所繪水滸一百單八將圖題跋)>에서는 원(元) 말의 혼란기에 그가 장사성(張士誠)의 휘하에 있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적벽(赤壁)의 싸움에 대한 묘사는 주원장(朱元璋)과 진우량(陳友諒)의 파양호(鄱陽湖)의 싸움을 모델로 했던 것이었다... 라고 했다. 하지만 또, 그에 관계된 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래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많은 강담사(講談師)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서 출판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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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74년


 서역도호(西域都護)와 무기교위(戊己校尉)를 부활시켜서
 후한(後漢)이 직접 서역(西域) 경영을 행했다.(~76년)



 서역도호(西域都護)는, 서역(西域)을 총괄했던 중국의 관명(官名)이었으며, 전한(前漢) 지절(地節) 2년(기원전68년)에 한(漢)에서 서역(西域)으로 파견되었던 정길(鄭吉)이 차사(車師)를 굴복시키자 한(漢)은 그를 호선선이서남도(護鄯善以西南道=西域 南道의 감독 역)로 삼았다.

 정길(鄭吉-?~B.C.48)은, 중국 한나라 때의 장군이었고, 선제(宣帝) 때 차사국(車師國)을 쳐서 멸했으며, 흉노의 항복을 받아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역 도호(都護)가 되어서 전한(前漢)의 국세(國勢)를 널리 떨쳤던 사람이었다.(후술 또는 생략)

 ※
차사(車師)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북위(北魏)시대까지 톈산(天山)산맥 동부에 있었던 나라로, 현재의 동(東) 투르키스탄(Turkistan)에 상당하는 곳에 있었던 오아시스도시국가였다.

 그 후, 신작(新爵) 3년(기원전 59년)에 흉노(匈奴)의 일축왕(日逐王)도 항복시킴으로 해서 정길(鄭吉)은 호차사이서북도(護車師以西北道-뜻은 위와 유사함)에 겸임되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서역(西域)의 남북도(南北道) 두 길을 모두 통괄하게 되어서 서역도호(西域都護-여기서의 都는 크다는 뜻과 전부라는 의미임)라고 칭해지게 되었으며, 또한 그 말의 유래가 되었다. 하지만 그 서역도위(西域都尉)는 가관(加官)이었으며, 본관(本官)은 기도위(騎都尉=官秩比2千石)와 간대부(諫大夫=官秩比8百石)였다. 그리고 또 부관(副官)으로서는 부교위(副校尉=官秩比 2千石)가 설치되어 승(丞) 1인과 사마(司馬) 2인, 후(候) 2인, 천인(千人) 2인이 그에 속했다. 그리고 또한 서역(西域) 중앙부의 오루성(烏壘城)에 막부(幕府)를 두고 서역(西域) 36국(國)을 진무(鎭撫)했으며, 또한 제국(諸國)을 호령(號令)했다. 하지만 후한(後漢)에 들어서는 그 힘이 약해져서 자주 폐지와 설치를 반복했다. 그리고 또, 아래는 당시의 중요했던 西域都護들에 대한 소개이며, 다만 이름만 밝힙니다.

 <前漢>

 鄭吉-前(기원전)59年 - 前48年
 韓宣-前48年 - 前45年
 甘延寿-前36年 - 前33年
 段會宗-前33年 - 前30年
 廉褒-前30年 - 前27年
 段會宗-前21年 - 前18年(再任)
 郭舜-前15 - 前12年
 孫建-前12年 - 前9年
 但欽-서력(西曆)1年 - 13年

 

 <新>

 但欽-1年 - 13年-殺
 李崇-13年 - 23年

 <後漢>

 莎車王賢-大都護를 사칭함
 陳睦-74年 - 75年-殺
 班超-91年 - 102年
 任尚-102年 - 106年
 段禧-106年 - 107年



 무기교위(戊己校尉)는, 중국 전한(前漢) 이후의 관직명으로, 서역(西域)을 관리했던 직명이었다. 그리고 한서(漢書)의 백관공경표상(百官公卿表上)에 의하면, 원제(元帝) 초원(初元) 원년(元年)에 설치되었고, 동(同) 서역전상(西域傳上)에서는 차사(車師) 전왕(前王)의 토지(高昌)에 둔전(屯田)을 열었다고 한다.

 ※ 둔전(屯田)은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했던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토지로, 군인이 직접 경작했던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가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는 각(各) 궁(宮)과 관아에 속했던 토지로, 관노비나 일반농민들이 경작했으며, 그 소출의 일부를 거두어 들여서 경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음은 그 예를 열거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둔전답(屯田畓)은 둔전과 둔답을 아울러서 일렀던 말이며

 2. 국둔전(國屯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자리(戍자리-국경을 지키던 일. 또는 그런 병사)를 살던 군사가 경작하여 그 수확을 모두 군자(軍資)에 충당했던 토지였으며, 왜구를 막기 위하여 연해(沿海) 지방에 많이 두었다. 그리고 또 시행과 폐지를 반복했지만, 그러나 세조 6년(1460)에 토지제도의 하나로 확정하였다.

 3. 그리고 관둔전(官屯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지방 관아에 두었던 둔전(屯田)으로, 본래는 군자(軍資)에 보충하려고 두었으나, 그러나 실제로는 관아의 일반경비나 수령의 사사로운 수입이 되는 등 많은 폐해가 있었다.

 4. 영둔전(營屯田)은 조선시대에 각 영문(營門=軍門)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나라에서 지급했던
둔전이며

 5. 영문둔전(營門屯田)은 조선후기에 각 군병 아문(軍兵衙門)에서 소유했던 둔전이었고

 6. 아문둔전(衙門屯田)은 조선후기에 관아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서 두었던 둔전이었으며

 7. 궁둔전(宮屯田)은 각 궁(宮)에 속했던 둔전(屯田)

 8. 그리고 역둔전(驛屯田) 또는 역(驛)둔토(屯土)란 것도 있었고

 9. 가호둔전(家戶屯田)은 고려말기에, 둔전을 경작하지 않는 가호에도 씨앗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짓게 한 다음, 가을에 몇 배를 거두어들였던 것을 말했다.

 아무튼, 속관(屬官)으로서 상기(上記)와 같게 승(丞), 사마(司馬) 각(各) 1명과 후(候) 5명을 두었으며, 질석비(秩石比=官秩比)는 600석(石)이었다. 그리고 그 명칭의 유래는 한서(漢書) 백관공경표상(百官公卿表上)의 안사고(顔師古) 주(注)에 의하면, 십간(十干) 중 갑을병정경신임계(甲乙丙丁庚辛壬癸)들은 각각의 방위를 가지지만, 그러나 무(戊)와 기(己)는 가리키는 방위가 없으므로, 그래서 마땅히 정주(定住)할 장소를 가지지 않은 교위(校尉)를 그에 비유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무(戊)와 기(己)는 중앙에 위치해서 사방(四方)을 진무(鎭撫)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서역(西域)의 중심에 위치해서 주변을 진무(鎭撫)하는 것에 비유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 등이 있지만, 물론 둘 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후한서(後漢書)의 서역전(西域傳)에서는 <무기(戊己)2교위(校尉)>라고 했고, 그것은 또 무(戊)교위와 기(己)교위 2인을 말했던 것으로, 그래서 그 총칭으로 무기교위(戊己校尉)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

 아무튼, 왕망(王莽)의 시대에 서역(西域)이 배신을 했고, 이어서 열렸던 후한(後漢) 초기에도 그 직(職)은 설치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영평(永平) 16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하지만 또 당시의 서역(西域) 정세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기 때문에, 그래서 건초(建初) 원년(元年)에는 다시 불러 들였다. 하지만 또 그 후였던 영원(永元) 3년에 반초(班超)의 활약에 힘입어서 다시 설치되었다.(後漢書 西域傳) 그러나 또 그 후였던 후한(後漢) 말경에는 서역(西域)과의 교통이 모두 끊어졌다. 그런데 삼국(三國)의 위(魏) 황초(黃初) 3년에 서역(西域)으로부터 사자가 왔고, 그러자 또 그것을 계기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어서 양주(凉州) 자사(刺史)가 그 직을 맡게 되었다.(三国志 文帝紀, 晋書 地理志上)

 ※ 자사(刺史)는

 1. 발해에서는 각 주(州)의 으뜸 벼슬을 말했으며
 2. 고려 때는 성종 14년(995)에 두었던 외관(外官)을 이름.
 3. 그리고 중국 한나라 때는 군(郡)과 국(國)을 감독하기 위해서 각 주에 설치했던 감찰관으로, 나중에 당(唐)과 송(宋)을 거쳐서 명(明)나라 때 없어졌다.
 4. 그리고 중국의 전한(前漢)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 때까지 존재했던 관직명으로, 당초에는 감찰의 역할을 맡았으나, 나중에는 주(州)의 장관(長官)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3과 4가 해당되며, 그 중에서도 4가 더욱 가까움.

 87년


 북흉노(北匈奴)의 우류선우(優留鄯于)가 선비(鮮卑)에서 살해 되었고
 그러자 그 땅에 살던 58부(部)의 20만 백성들이 한(漢)에 내항(來降)했다

 88년


 두태후(竇太后)가 임조(臨朝)했다(~97년)

 효문황후<孝文皇后=두의(竇漪)>

 91년


 반초(班超)가 서역(西域) 평정의 공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었다(~102년)

 97년


 감영(甘英)이 반초(班超)의 명(命)을 받아 로마로 파견되었고, 파르티아에 도착했다



 <감영(甘英)> 2

 감영(生没年不詳)은 당시, 대진(大秦)이라고 불렸던 ‘로마(Rome)’에 파견되었던 중국의 대사(大使)였으며, 반초(班超)로부터 로마와의 국교(國交)를 개설할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는 당시 7만 정도의 규모를 가졌던 반초(班超) 원정군의 일원(一員)이었으며, 일단(一團)의 군을 이끌고 파르티아왕국의 서쪽 경계에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까지 가는 데는 실패했다고 여겨지지만, 그러나 적어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로는, 고대 중국인으로서는 서쪽으로 제일 멀리까지 여행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후한서(後漢書=後漢 25-22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화제(和帝) 제(第)9년(기원97년) 반초(班超)는 자신의 부관(副官) 감영(甘英)에게 시켜서 ‘서쪽바다’의 해안과 가는 길에 존재하는 여러 지역들을 둘러보고 오라고 명했다. 그 전까지는 누구도 그곳까지 갔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지역들에 관한 정보는 ‘산해경(山海經)’조차에도 상세한 기술이 없었다.

 
산해경(山海經)은, 고대 중국의 지리책으로, 작가와 연대는 미상이며, 뤄양(洛陽)을 중심으로 해서 산맥과 하천 그리고 신화와 전설, 産物 등을 수록했다. 중국의 자연관과 신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5부18권.

 그러자 감영(甘英)은 그 탐험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들(나라들과 관습 그리고 地勢 등에 관한 것)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분의 기술은 아래와 같다.

 <화제(和帝) 제(第)9년(기원97년), 반초(班超)는 자신의 부관(副官)이었던 감영(甘英)을 대진(大秦)으로 파견했고, 그러자 감영(甘英)은 조지(條支=Tiaozhi=현재의 시리아 지역)를 통과해서 안식(安息=Anxi=파르티아)의 서쪽 경계에 있던 아주큰 바다(大海=페르시아 만)에 도착했다>(後漢書88)

 그리하여 그는 로마(大秦)에 관한 보고서도 남기게 되었다지만, 하지만 그것은 본인이 직접 가서 보고 들었던 것은 아니었고, 간접적으로 얻었던 자료에 근거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대진(大秦)을 ‘바다’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비정(比定-일종의 추정)했으며, 그리고 또 아래는 그가 쓴 기술의 일부분이다.

 <그 판도(版圖=領域)는 몇 천리(千里-그러나 여기서의 里는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던 里의 개념이 아니고, 약 5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말함)를 가도 그 끝을 알 수가 없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400곳도 더 되는 도시들이 그 안에 있다. 그리하여 그 주변 수십(數十)의 소국(小國)들이 그 나라를 따르고 있으며, 도시의 외벽들은 모두 돌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또한 역사제도(驛舍制度)가 확립되어 있고...(중략)... 그리고 소나무와 사이프레스(糸杉)가 자라고 있다>

 그는 또 ‘네르바’에 의한 양자제도(養子制度)와 제위계승(帝位継承)에 대해서도 기술(記述)했고(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서 제위를 물려주었다), 로마인들의 신체와 외견(外見) 그리고
또 그곳에서 생산되던 물건 등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네르바(Nerva, Marcus Cocceius)



 로마의 황제(30~98)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여 원로원과 협조하며 선정을 베풀었고,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열었다. 재위 기간은 96~98년.

 ※
트라야누스(Trajanus, Marcus Ulpius)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53~117)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으로, 로마제국사상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혔으며, 도로를 건설하여 상업과 교통의 발달을 꾀하였다. 재위 기간은 98~117년.

 
로마의 오현제(五賢帝)=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 나라의 왕(王)은 세습(世襲)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가장 자질이 뛰어나다고 생각된 사람을 선택해서 왕위에 올리고 있다...그 나라 사람들은 장신(長身)이며, 아주 균형 잡힌 용모(容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중국인(中國人)과 닮았으며, 그것이 또 바로 그 나라를 대진(大秦=Da Qin=아주 큰 秦)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나라의 토지(土地)에서는 많은 금(金)과 은(銀)이 생산되고 있으며, 그리고 야간에 빛을 발하는 보석을 포함해서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진귀한 보석들도 산출되고 있다...사람들은 다채(多彩)로운 색을 가진 태피스트리(tapestry)나 다마스크를 만들기 위해서 금사(金絲)를 사용해서 자수(刺繡)를 한 옷감들을 재봉한다. 그리고 또한 금(金)으로 도장(塗裝)한 옷감이나 <불에 씻은 옷감(石絲=石綿=아스베스트=아스베스토스(asbestos)>도 만들고 있다>

 
tapestry는,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로, 벽걸이나 가리개 등의 실내장식품으로 사용하며, 일반적으로 날실에는 마사, 씨실에는 양모사나 견사를 쓰는데, 고블랭직이 가장 발달한 것이라고 한다.


<16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Gobelins>



 
※ 다마스크(damask)= 피륙의 하나이며, 능직이나 수자직 바탕에 금실과 은실 등의 아름다운 실로 무늬를 짜 넣는데, 주로 커튼이나 책상보 등에 쓴다고 함.

 ※
석면(石綿)은, 사문석(蛇紋石) 또는 각섬석(角閃石)이 섬유질(纖維質)로 변한 규산염(硅酸鹽) 광물이며, 산성이나 알칼리성에 강하고, 열과 전기가 잘 통하지 않아서 방열재, 방화재, 절연용 재료 등으로 많이 씀.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감영(甘英)은 당시 실크로드의 서쪽 끝에 있었던 로마를 올바르게 파악했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실크로드>



 그리고 아래는 그가 남겼던 기술 중 마지막 부분이라고 추정되는 글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경탄해마지 않을 또한 희귀한 종류의 외국물품들은 모두다 그 나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기원전 50년경의 파르티아 위치도>

 100년


 허신(許愼)이 <説文解字>를 成立시켰다(완성이라고 표현하지 않음)



 <허신(許愼)> 58年?-147年? 또는 30년-124년



 후한(後漢)의 유학자였으며, 문학(文學)학자 그리고 최고(最古)의 부수별(部首別) 한자자전(漢字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작자(作者)로 알려져 있다. 성(姓)은 許. 이름은 신(愼). 자(字)는 숙중(叔重). 출신은 여남소릉(汝南召陵=現 河南省 郾城県), 경서(經書)에 밝았고, 가규(賈逵=22賢 중 1인)로부터 고문학(古文學)을 전수(傳受)받아 고문경학(古文經學)의 대가(大家) 중 1인이 되었다.

 ※ 22현(賢)은, 중국 당나라 정관(貞觀) 21년(647)에 공자묘에 배향 되었던 22명의 현인(賢人)으로, 좌구명, 복자하(卜子夏), 공양고, 곡량적(穀梁赤), 복승(伏勝), 고당생(高堂生), 대성(戴聖), 모장(毛萇), 공안국, 유향(劉向), 정중(鄭衆), 가규(賈逵), 두자춘(杜子春), 마융, 노식(盧植), 정현(鄭玄), 복건(服虔), 하휴(何休), 왕숙, 왕필, 두예, 범녕(范寗)을 이르며,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

 그에 마융(馬融)은 항시 그를 존경했다고 하며, 세상에서 <오경무쌍(五經無雙)의 허숙중(許叔重)>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외에 오경이의(五經異義)와 회남홍열간고(淮南鴻烈間詁) 등도 있었지만, 그러나 원래대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중국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편찬했던 자전(字典)으로, 문자학의 기본적인 고전 중 하나이며, 한자 9,353자를 수집하여 540부(部)로 분류했고, 육서(六書)에 따라서 글자의 모양을 분석, 해설하였다. 15권.


 105년


 채윤(蔡倫)이 종이를 화제(和帝)에게 헌상했다



 <채윤(蔡倫)> ? 또는 50년경-121년 또는 121년경

 



 중국 후한(後漢) 때의 환관(宦官)으로, 자(字)는 경중(敬仲). 제지법(製紙法)을 개량해서 실용적인 종이의 제조보급에 막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계양(桂陽=현재의 湖南省 郴州市) 출신으로, 명제(明帝) 영평(永平) 말년(75년)부터 환관으로 궁정에 등용 되었지만, 그러나 그 연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다. 그리고 장제(章帝) 대에는 소황문(小黃門)에 머물러 있었지만, 화제(和帝) 즉위 후였던 89년에는 중상시(中常侍)로 승진했다.

 황문(黃門)은 내시(內侍)를 의미하며, 소황문(小黃門)은 내시 중에서도 낮은 직급의 내시를 의미했다. 그리고 또 참고로, 홍수황문(紅袖黃門)은 붉은 소매와 누런 문이란 뜻으로, 궁녀와 환관을 아울러서 이르렀던 말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과거 궁녀의 웃옷에는 붉은 소매가 달려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환관들이 지키던 궁성 안의 작은 문(門)에는 누런 칠을 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거기다 성실한 인품과 학문을 좋아했고 또 무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점 등이 인정되었고, 또한 결벽(潔癖)한 몸가짐 등이 평가되어 97년에는 상방령(尙方令)이란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그것은 또한 검(劍) 등의 무기류나 여러 가지의 물품들을 제작, 감독, 제조기술 확립 등을 임무로 했던 것이었다.

 105년, 그는 나무의 껍질과 마(麻)의 쓰레기, 못쓰게 된 어망(魚網) 등의 재료들을 이용해서 실용적인 종이를 제조했고, 그것을 화제(和帝)에게 헌상했다. 그리고 그 제법(製法)은 아주 잘게 부순 재료들을 물에 녹인 후 대나무로 만든 책(簀-格子 板)에다 넣어(담아서) 뜬 후 말리는 공정을 거쳐서 완성시켰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의 독창적인 기술은 아니었고, 당시에는 그와 유사한 수법으로 이미 비단이나 풀솜의 찌꺼기 등을 이용해서 만드는 서(絮)라는 방한(防寒) 등에 이용되었던 염가의 부직포가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그가 만들었던 것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그러했던 기술을 집약해서 개선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당시 <종이(紙)>라는 말은 <서(絮)>와 같은 비단찌꺼기 등으로 만든 것을 의미했으며, 그래서 그가 만들었다는 종이는 <채후지(蔡侯紙)>라는 존칭으로 불리며 그것과 구별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그는 화제(和帝)로부터 신뢰가 두꺼워져서 유악(帷幄=帷幕=전략회의 등 비밀스러운 일을 의논하던 곳=국가계획을 입안하는 중요한 기관)에도 참가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도 자주 화제(和帝)에게 간언도 했다. 그리고 또 유자(儒者) 유진(劉珍) 등의 고전(古典) 교정 작업도 감독하는 등, 유능한 문신(文臣)으로서의 능력도 발휘했다.

 하지만 105년에 화제(和帝)가 몰(沒)했고, 그 뒤를 이었던 어린 상제(殤帝)도 1년 만에 죽어버리자 당시의 정치를 장악했던 등태후(鄧太后)는 장제(章帝)의 아들이었던 황태자를 폐하고 청하효왕(淸河孝王)이 되었던 유경(劉慶)의 당시 13세의 아들이었던 유호(劉祜)를 안제(安帝)에 옹립시켰다. 그리고는 섭정(攝政)을 하며 외척(外戚)과 환관(宦官)들을 병용(倂用)해서 실권을 잡았다. 그리하여 그 역시도 그 시기였던 114년에는 용정후(龍亭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등태후(鄧太后)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 121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또 안제(安帝)는 내시들의 협력을 받아서 등 씨(鄧氏) 일족의 숙청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또 그렇게 계획이 착실하게 진행되던 중, 안제(安帝)는 자신의 부(父)였던 유경(劉慶)이 황태자를 폐(廢)했던 사건을 조사시켰는데, 그러자 조모(祖母)였던 송귀인(宋貴人)이 무고(巫蠱-巫術로써 남을 저주함)를 행했다는 중상모략을 받아서 자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또 당시(82년) 그 송귀인(宋貴人)의 주저(呪詛)가 사실이었다고 보고를 했던 자가 바로 그 소황문(小黃門)이었던 채윤(蔡倫)이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러자 안제(安帝)는 그에게 정위(廷尉=형벌담당장관)에 출두하라고 칙명을 내렸다. 하지만 또 당시,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사대부(士大夫)에게는 예(禮)를 지켜서 형벌에까지는 미치지 않게 하는 관례가 있었고(禮記), 그래서 그 칙명을 받들었던 사자는 독약을 함께 가지고 그에게로 찾아갔다. 그러자 그는 공순(恭順)했고, 목욕재계(沐浴齋戒) 후 그것을 마시고 죽었다. 그리하여 그도 결국 비운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러나 그가 사망했던 연월(年月)에 관해서는 제설(諸說)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등태후(鄧太后)가 사망했던 121년 이후의 일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현재 호남성(湖南省) 계양(桂陽) 교외에는 그의 묘라고 전해지는 장소가 있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1950년대에 그 현(縣)에서 수복(修復)작업을 하던 중 그 무덤 안에서 맷돌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그가 종이를 만들었을 때 사용했던 것이라는 억측도 난무했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은 지금까지도 진위가 불명하다.

 아무튼, 그는 종래부터 제지법의 발명자였다고 평가되고 있었지만, 그러나 전한(前漢) 대(代)의 유적에서 식물섬유로 만든 종이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로서는 그가 이미 상용(常用)하고 있던 그 기술을 집약해서 통합했던 것일 뿐이었고, 그래서 또 그는 실용적인 종이의 제조법을 정립했던 개량자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전한(前漢) 대의 종이란 청동제의 거울을 포장했던 포장지였을 뿐이었으며, 문자를 기록했던 종이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계속해서 개량되었고, 그러자 그 후, 그의 제자였던 좌백(左伯)이란 사람이 좌백지(左伯紙)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종이는 개량과 보급을 거듭하며 실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윽고는 이슬람을 거쳐서 서양에까지 전파되어 서양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하여 또, 그는 중국에서는 <종이의 수호신>으로까지 숭배되었고, 이후 학자였던 '마이클 할트(Michael H. Hart)'란 사람은 <역사를 만든(창조한) 100인>에서 그를 일곱 번째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할트'는 그 제1위로 '마호메트'를 그리고 제2위는 '뉴턴'을 그리고 제3위는 '예수'로 올려 놓았다.

 107년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다시 폐지되었고, 한(漢)과 서역(西域)의 교류가 단절되었다

 123년


 반초(班超)의 아들 반용(班勇)이 서역장사(西域長史)가 되었고
 선(鄯)과 고창(高昌)이 한(漢)에 복속(服屬)했다




 <
고창(高昌)>

 5~7세기에 동(東)투르키스탄의 투루판분지에 있던 나라로, 전한(前漢) 시대에 이주했던 한인(漢人)의 자손들이 투르크계 토착민을 제압하고 세웠던 식민지 왕조였지만, 640년에 중국 당나라에 멸망하였다.



<高昌 古城 유적>

 148년



 파르티아 출신의 안세고(安世高)가 한(漢)의 낙양(洛陽)으로 와서 불전(佛典)의 번역에 종사했다




 <안세고(安世高)> 生沒未詳 또는 ?-?170년 정도

 후한(後漢) 대에 서역(西域)에서 왔던 역경승(譯經僧)으로, 자(字)는 세고(世高)였다. 그리고 원래 그는 안식국(安息國=파르티아)의 태자(太子)였지만, 왕위를 백부(伯父)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출가수도에 뜻을 두어서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 후, 환제(桓帝) 대 건화(建和) 2년(148년)에 수도 낙양(뤄양=洛陽)으로 와서 입궐, 알현했고, 그 후 20년 동안 역경(譯經)을 행해서 30부(部)에 달하는 경전을 한역(漢譯)했다. 그러자 후세에 승(僧) 우(祐)는 그를 평하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고 한다.

 <그는 폭넓게 경전을 공부했으며, 그 중에서도 아비달마(阿毘達磨)에 정통(精通)했다. 그리고 또 선(禪)에 관한 경전도 암송했으며, 그 강요(綱要)도 거의 다 이해하고 있었다>(出三藏記集 卷 13)

 ※ 아비달마(阿毘達磨)는, 불전(佛典) 중에 경전을 해설하거나 주석한 논(論)을 이르는 말로, 교법에 관한 연구라는 의미임.

 그리고 다음은 그의 주요한 한역(漢譯) 경전으로, 간단히 소개만 합니다.

 安般守意経/ 陰持入経/ 大道地経/ 人本欲生経/ 四諦経/ 八正道経/ 転法輪経/ 阿毘曇五味経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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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73년


 두고(竇固)가 북흉노(北匈奴)를 공격해서 호연왕(呼衍王)을 쳤고
 반초(班超)가 서역(西域)으로 파견되었다



 두고(竇固-?부터 88년)

 자(字)는 맹손(孟孫)이며, 부풍군(扶風郡) 평능(平陵) 출신의 사람이었고, 명문(名門) 두(竇)씨 가문에서 출생해서, 아버지였던 두융(竇融)의 공적에 의해서 광무제(光武帝)의 딸 열양공주(涅陽公主)와 결혼했지만, 그러나 명제(明帝) 시대에 일시 실각(失脚)했고, 그 후에 다시 흉노(匈奴) 전쟁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 후에 북방(北方)과 서역(西域)정책에 성공했던 공적으로 장제(章帝)시대에도 고관(高官)을 역임했으며, 반초(班超)를 발굴해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천산(天山)산맥을 넘어서 원정해서 대승리를 거둔 후한(後漢)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알려졌으며, 대부호로도 알려졌지만,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아주 검약한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도왔던 인물이었다.

 

<반초의 진군 圖>



 
반초<班超-32년부터 102년(建武9년-永元14년)>

 그는 중국 후한(後漢) 때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였으며, 자(字)는 중승(仲升)이었다. 그리고 반고(班固)의 동생이었고, 31년간이나 서역<西域-Xinjiang Weiur-현재의 新疆(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 근처>에서 머물면서 당시, 흉노(匈奴)의 지배 아래에 있던 서역(西域)의 국가들을 정복했고, 그리하여 후한(後漢)의 세력권을 파미르지방 동서(東西)에까지 넓혔으며, 그 공으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에서는 그를 칭해 <연함호발(燕頷虎髮)>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부(父)는 반표(班彪). 여동생은 반소(班昭)였으며, 일가(一家)는 역사가의 집안이었다. 자(子)는 三男 반용(班勇) 등이 있었다.

 반소(班昭-45년?부터 117년? 또는 49년부터 120년)는, 중국 후한(後漢)의 작가(作家) 또는 시인(詩人)이었고, 중국 최초의 여성역사가였다. 그리고 일명(一名) 희(姬), 자(字)는 혜희(惠姬) 또는 혜반(惠班)이었고, 부풍안륙(扶風安陸=湖北省) 출신의 사람이었다.


<晩笑堂竹 荘畫傳에서>



 그녀는 역사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14세에 조세숙(曹世叔)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에 남편이 죽자 그녀의 재명(才名)을 전해들은 화제(和帝)의 초청으로 궁중으로 들어갔고, 그 후, 후궁(後宮)들과 후비(后妃)들의 스승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서 조대가(曹大家)로 불려졌다. 그 후, 오빠였던 반고(班固)가 투옥되어 한서(漢書)를 끝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8표(八表) 천문지(天文志)를 자신이 써서 완성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저작으로는 <여계(女誡) 7장(章)>과 <속(續) 열녀전(列女傳)> 2권도 그녀가 선정(選定)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그녀 자신의 저서로는 조대가집(曹大家集)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사부(辭賦)에 길이 남을 부(父) 표(彪)의 <북정부(北征賦)>에 답해서 동정부(東征賦)를 지었다고 하며, 그리하여 <문선(文選)>에 수록된 한대(漢代) 여성작가들 중에서 제일로 손꼽혔다고 한다.

 
사부(辭賦)는, 중국의 초사(楚辭) 형식에 의거한 산문에 가까운 운문(韻文)을 말하며, 서정적 시(詩)인 사(辭)와 서사적 시(詩)인 부(賦)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곧 시문(詩文)을 이른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중심으로 해서 한(漢)나라 때 발전하였고, 궁전의 장관(壯觀)이나, 도성의 번화함 그리고 사냥의 호쾌함 등을 노래했다.

 ○
문선(文選)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양(梁)의 소명(昭明)태자 소통(蕭統)에 의해서 편찬되었던 시문집(詩文集)으로, 전(全) 30권. 춘추전국시대부터 양(梁)까지의(약 천년) 문학자 131명이 썼던 부(賦)와 시(詩) 문장(文章) 800여 작품을 37장르로 분류해서 수록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으나, 거의 안제(安帝)시대였던 원초(元初) 연간(年間) 114년에서 119년 사이에 사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때가 향년(享年) 70여세였다고 후한서(後漢書)는 전한다.


 아무튼, 그는 형 반고(班固)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배웠다. 그러나 명제(明帝)의 칙명(勅命)에 의해서 두고(竇固)의 흉노토벌군이 조직되자 그도 참전했다.
그 후, 그가 선선국(鄯善國)에 사자로 갔을 때, 그 나라는 처음에는 그를 환대하더니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로 분위기가 나빠졌다. 그래서 알아본즉, 그곳에는 흉노(匈奴)의 사자도 함께 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때문에 몹시도 두려워 하던 부하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말을 했다. <不入虎穴焉得虎子!-호랑이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또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새끼를 얻을 수 없다!> 그 다음,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서 무작정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숫자는 불과 36명뿐이었다. 그리고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았는데,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기습을 받았던 때문이었던지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대로 흩어졌고, 그들은 대승(大勝)했다. 그 후에도 그는 그 근처에 있던 흉노(匈奴)들을 모두 토벌했고, 그리하여 서역(西域)의 남쪽은 완전히 후한(後漢)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75년(永平 18년)에 명제(明帝)가 죽었고, 이어서 장제(章帝)가 즉위하자 그들에게 귀환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또 한군(漢軍)이 철수하면 그곳은 당연히 흉노(匈奴)들의 차지가 될 것이었고, 그리고 또한 그때까지 한(漢)에 협조를 했던 사람들은 몰살을 당할 것이 뻔했다. 그러자 또 그때,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서역(西域)의 왕들과 귀족들이 그를 찾아와서 울며불며 매달렸고, 그러자 그는 결국 그곳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음 91년(永元 3년), 그는 흉노(匈奴)의 후원을 받고 있던 구자(龜茲)를 토벌했고, 이어서 조정(朝廷)으로부터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었다.


<구자 위치도 - 중앙>


 그 다음 또 97년(永元 9년), 그는 부하였던 감영(甘英)을 사자로 보내서 대진(大秦=로마제국)과 조지(條支=현재의 시리아 지역)에 국교(國交)를 요구하려 했지만, 감영(甘英)은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 감영(甘英-생몰불상)은, 중국 후한(後漢)의 무장으로, 영원(永元) 9년(97)에 반초(班超)의 명을 받아서 대진(大秦)으로 가기 위해 서역(西域)을 거쳐서 시리아에 도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그 후, 중국에 서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전했다.(후술)

 아무튼 또 100년, 그는 서역(西域)에서 체류한지 31년 만에 한(漢)나라 땅이 그리워져서 조정(朝廷)에 귀국 탄원서를 냈다. 그러자 102년에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고, 이어서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망했다. 그러자 그 후, 그가 없었던 서역(西域)은 다시 흉노(匈奴)의 독무대가 되었고, 그러자 또 한(漢)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아들이었던 반용(班勇) 등을 파견해서 다시 그곳을 회복해보려 했지만, 그러나 그 후로도 그가 있던 당시만큼의 세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반고<班固-32년부터 92년(建武8年-永元4年)>

 중국 후한(後漢) 초기의 역사가, 문학자.
 자(字)는 맹견(孟堅). 반초(班超)의 兄이었다.




 그는 한서(漢書)의 편찬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문학자로서 <양도부(兩都賦)> 등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父) 반표(班彪)도 역사가로서, 반고(班固) 이전에 벌써 65편을 편찬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반고(班固)는 칙명(勅命)에 의해서 부(父)의 업적을 계승했으며, 그리하여 한서(漢書)를 거의 완성했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에, 사원(私怨)에 의해서 중상(中傷)을 받아서 투옥되었고, 그 옥중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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