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73년


 두고(竇固)가 북흉노(北匈奴)를 공격해서 호연왕(呼衍王)을 쳤고
 반초(班超)가 서역(西域)으로 파견되었다



 두고(竇固-?부터 88년)

 자(字)는 맹손(孟孫)이며, 부풍군(扶風郡) 평능(平陵) 출신의 사람이었고, 명문(名門) 두(竇)씨 가문에서 출생해서, 아버지였던 두융(竇融)의 공적에 의해서 광무제(光武帝)의 딸 열양공주(涅陽公主)와 결혼했지만, 그러나 명제(明帝) 시대에 일시 실각(失脚)했고, 그 후에 다시 흉노(匈奴) 전쟁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 후에 북방(北方)과 서역(西域)정책에 성공했던 공적으로 장제(章帝)시대에도 고관(高官)을 역임했으며, 반초(班超)를 발굴해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천산(天山)산맥을 넘어서 원정해서 대승리를 거둔 후한(後漢)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알려졌으며, 대부호로도 알려졌지만,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아주 검약한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도왔던 인물이었다.

 

<반초의 진군 圖>



 
반초<班超-32년부터 102년(建武9년-永元14년)>

 그는 중국 후한(後漢) 때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였으며, 자(字)는 중승(仲升)이었다. 그리고 반고(班固)의 동생이었고, 31년간이나 서역<西域-Xinjiang Weiur-현재의 新疆(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 근처>에서 머물면서 당시, 흉노(匈奴)의 지배 아래에 있던 서역(西域)의 국가들을 정복했고, 그리하여 후한(後漢)의 세력권을 파미르지방 동서(東西)에까지 넓혔으며, 그 공으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에서는 그를 칭해 <연함호발(燕頷虎髮)>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부(父)는 반표(班彪). 여동생은 반소(班昭)였으며, 일가(一家)는 역사가의 집안이었다. 자(子)는 三男 반용(班勇) 등이 있었다.

 반소(班昭-45년?부터 117년? 또는 49년부터 120년)는, 중국 후한(後漢)의 작가(作家) 또는 시인(詩人)이었고, 중국 최초의 여성역사가였다. 그리고 일명(一名) 희(姬), 자(字)는 혜희(惠姬) 또는 혜반(惠班)이었고, 부풍안륙(扶風安陸=湖北省) 출신의 사람이었다.


<晩笑堂竹 荘畫傳에서>



 그녀는 역사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14세에 조세숙(曹世叔)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에 남편이 죽자 그녀의 재명(才名)을 전해들은 화제(和帝)의 초청으로 궁중으로 들어갔고, 그 후, 후궁(後宮)들과 후비(后妃)들의 스승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서 조대가(曹大家)로 불려졌다. 그 후, 오빠였던 반고(班固)가 투옥되어 한서(漢書)를 끝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8표(八表) 천문지(天文志)를 자신이 써서 완성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저작으로는 <여계(女誡) 7장(章)>과 <속(續) 열녀전(列女傳)> 2권도 그녀가 선정(選定)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그녀 자신의 저서로는 조대가집(曹大家集)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사부(辭賦)에 길이 남을 부(父) 표(彪)의 <북정부(北征賦)>에 답해서 동정부(東征賦)를 지었다고 하며, 그리하여 <문선(文選)>에 수록된 한대(漢代) 여성작가들 중에서 제일로 손꼽혔다고 한다.

 
사부(辭賦)는, 중국의 초사(楚辭) 형식에 의거한 산문에 가까운 운문(韻文)을 말하며, 서정적 시(詩)인 사(辭)와 서사적 시(詩)인 부(賦)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곧 시문(詩文)을 이른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중심으로 해서 한(漢)나라 때 발전하였고, 궁전의 장관(壯觀)이나, 도성의 번화함 그리고 사냥의 호쾌함 등을 노래했다.

 ○
문선(文選)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양(梁)의 소명(昭明)태자 소통(蕭統)에 의해서 편찬되었던 시문집(詩文集)으로, 전(全) 30권. 춘추전국시대부터 양(梁)까지의(약 천년) 문학자 131명이 썼던 부(賦)와 시(詩) 문장(文章) 800여 작품을 37장르로 분류해서 수록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으나, 거의 안제(安帝)시대였던 원초(元初) 연간(年間) 114년에서 119년 사이에 사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때가 향년(享年) 70여세였다고 후한서(後漢書)는 전한다.


 아무튼, 그는 형 반고(班固)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배웠다. 그러나 명제(明帝)의 칙명(勅命)에 의해서 두고(竇固)의 흉노토벌군이 조직되자 그도 참전했다.
그 후, 그가 선선국(鄯善國)에 사자로 갔을 때, 그 나라는 처음에는 그를 환대하더니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로 분위기가 나빠졌다. 그래서 알아본즉, 그곳에는 흉노(匈奴)의 사자도 함께 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때문에 몹시도 두려워 하던 부하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말을 했다. <不入虎穴焉得虎子!-호랑이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또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새끼를 얻을 수 없다!> 그 다음,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서 무작정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숫자는 불과 36명뿐이었다. 그리고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았는데,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기습을 받았던 때문이었던지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대로 흩어졌고, 그들은 대승(大勝)했다. 그 후에도 그는 그 근처에 있던 흉노(匈奴)들을 모두 토벌했고, 그리하여 서역(西域)의 남쪽은 완전히 후한(後漢)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75년(永平 18년)에 명제(明帝)가 죽었고, 이어서 장제(章帝)가 즉위하자 그들에게 귀환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또 한군(漢軍)이 철수하면 그곳은 당연히 흉노(匈奴)들의 차지가 될 것이었고, 그리고 또한 그때까지 한(漢)에 협조를 했던 사람들은 몰살을 당할 것이 뻔했다. 그러자 또 그때,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서역(西域)의 왕들과 귀족들이 그를 찾아와서 울며불며 매달렸고, 그러자 그는 결국 그곳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음 91년(永元 3년), 그는 흉노(匈奴)의 후원을 받고 있던 구자(龜茲)를 토벌했고, 이어서 조정(朝廷)으로부터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었다.


<구자 위치도 - 중앙>


 그 다음 또 97년(永元 9년), 그는 부하였던 감영(甘英)을 사자로 보내서 대진(大秦=로마제국)과 조지(條支=현재의 시리아 지역)에 국교(國交)를 요구하려 했지만, 감영(甘英)은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 감영(甘英-생몰불상)은, 중국 후한(後漢)의 무장으로, 영원(永元) 9년(97)에 반초(班超)의 명을 받아서 대진(大秦)으로 가기 위해 서역(西域)을 거쳐서 시리아에 도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그 후, 중국에 서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전했다.(후술)

 아무튼 또 100년, 그는 서역(西域)에서 체류한지 31년 만에 한(漢)나라 땅이 그리워져서 조정(朝廷)에 귀국 탄원서를 냈다. 그러자 102년에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고, 이어서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망했다. 그러자 그 후, 그가 없었던 서역(西域)은 다시 흉노(匈奴)의 독무대가 되었고, 그러자 또 한(漢)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아들이었던 반용(班勇) 등을 파견해서 다시 그곳을 회복해보려 했지만, 그러나 그 후로도 그가 있던 당시만큼의 세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반고<班固-32년부터 92년(建武8年-永元4年)>

 중국 후한(後漢) 초기의 역사가, 문학자.
 자(字)는 맹견(孟堅). 반초(班超)의 兄이었다.




 그는 한서(漢書)의 편찬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문학자로서 <양도부(兩都賦)> 등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父) 반표(班彪)도 역사가로서, 반고(班固) 이전에 벌써 65편을 편찬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반고(班固)는 칙명(勅命)에 의해서 부(父)의 업적을 계승했으며, 그리하여 한서(漢書)를 거의 완성했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에, 사원(私怨)에 의해서 중상(中傷)을 받아서 투옥되었고, 그 옥중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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