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166년


 대진(大秦=로마)의 왕 안돈(安敦)이 사자를 보내왔다



 후한서(後漢書) 권 88 열전(列傳) 78 <서역(西域) 대진(大秦)>

 [至桓帝延熹九年, 大秦王安敦遣使自日南徼外獻象牙, 犀角, 瑇瑁, 始乃一通焉]

 해석해보면...

 [환제(桓帝) 연희(延憙) 9년(166년)에 대진(大秦)의 왕 안돈(安敦=안톤)이 파견했던 사자가 일남군(日南郡)을 방문해서 상아(象牙)와 서각(犀角), 대모(玳瑁)를 헌상했다]

 이며...

 그리고 위, 안돈(안톤)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였거나 또는 그 선대(先代)의 황제였던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안토니우스>란 음을 묘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86-161

 로마의 황제. 관리의 지위를 안정되게 했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는 등, 관대하고 온건한 통치를 하였다. 재위 기간은 138-161년이며, 상세한 것은 차기 또는 생략함.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

 로마의 황제.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였고, 제국 동쪽과 도나우 강 양쪽의 변경 방어에 힘썼으며, 스토아 철학으로 기울어서 전장의 참호 속에서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을 저술하기도 했다. 재위기간은 161년-180년이며, 이하 상세한 것은 차기 또는 생략함.

 





 그리고 또, 로마 측의 사서(史書)에서는 사자를 파견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그리고 그 헌상 품이었다는 것도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나온 물건이었던 것 등으로 미루어서, 그래서 아마도 당시 로마의 상인 누군가가 자신을 로마황제의 사자라고 속이고는 중국과의 무역을 기도(企圖)하려고 그렇게 했던 아니었겠는가, 하고 추측될 뿐이다. 그리고 또한, 그 일남군(日南郡)이란 곳은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의 중부 도시 <후에> 부근에 있었던 후한(後漢)의 군(郡)이었다.
그리고 또, 상아(象牙)는 코끼리의 엄니이며, 서각(犀角)은 코뿔소의 뿔, 그리고 대모(玳瑁) 또는 대모갑(玳瑁甲)은 바다거북의 껍질을 의미한다.


 166년


 당고(黨錮)의 금(禁)이 일어나다



 당고(黨錮)의 금(禁)=당고지화(黨錮之禍)

 후한(後漢) 말기에 일어났던 탄압사건으로 <당고(黨錮)의 화(禍)>라고도 한다. 그리고 당시, 환관(宦官) 세력에 비판적이었던 청류파(淸流派) 사대부(士大夫=黨人) 등을 환관들이 탄압했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많았던 것이 금고형(禁錮刑=그러나 현대의 금고형과는 다른 것으로, 그때의 금고형은 관직에서 추방하는 것과 出仕를 금지시켰던 것을 말했다)에 처해졌던 것으로부터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건은 166년<연희(延熹)9년>과 169년<건녕(建寧)2년> 2번에 걸쳐서 발생했는데, 그래서 앞의 것을 <제1차 당고(黨錮)의 금(禁)>, 뒤의 것을 <제2차 당고(黨錮)의 금(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뒤에 쓰게 될 삼국지(三國志)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배경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하면, 그러니까 후한(後漢)의 화제(和帝)가 두헌(竇憲) 등을 배제(排除)하려 했던 환관(宦官)들을 등용한 이후, 그 환관들의 세력은 날로 강해져갔다. 그러자 그들은 곧 자신들의 이권(利權)을 추구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고, 그리하여 외척들이 전횡(專橫)을 했던 때 이상으로 오직(汚職=瀆職)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러했던 상황에서 일부 사대부(士大夫=豪族)들은 스스로를 청류파(淸流派)라고 이름을 짓고는 도당(徒黨)을 조직했고, 그리고는 환관 또는 그들과 결부되었던 세력들을 탁류파(濁流派)라고 매도하면서 공공연하게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부터 불붙기 시작했던 사대부(士大夫)들과 환관(宦官)들의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하게 발전해갔는데, 그리하여 또 166년, 사례교위(司隷校尉)였던 이응(李膺)과 태학(太學)의 학생이었던 곽태(郭泰) 그리고 고표(賈彪) 등, 이른바 청류파(淸流派)라고 자칭했던 일단(一團)의 무리들이 조정(朝廷)으로 몰려가서 중상시(中常侍)의 전횡을 비판하며 그 죄상(罪狀)을 고발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중상시(中常侍) 등이 <黨人들이 조정을 비방했다>라는 역공(逆攻)을 받아서 오히려 체포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그들은 호족(豪族)들의 구명(求命)운동으로 인해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는 종신(終身)금고(禁錮) 형에 처해졌으며, 그리고 여기까지가 제1차 당고(黨錮)의 금(禁)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제2차의 禁은 169년에 일어났으며, 그래서 그에 대해서도 설명을 조금 하면, 당시 외척이었던 두무(竇武)와 청류파(淸流派)의 당인(黨人)이었던 진번(陣蕃) 등이 결탁을 해서 환관들을 배제하려 거병했지만, 그러나 그 거병은 실패했고 이어서 두무(竇武)는 자살했다. 그러자 다시 그 관련자들에게 탄압이 내려졌고, 그러자 그것을 제2차 당고(黨錮)의 금(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176년에는 그 금(禁)이 당인(黨人)들의 일족(一族)에까지 확대되었는데, 하지만 또 그러던 중에 황건(黃巾賊)의 난(亂)이 발생하자, 그들이 그 난에 가담할 것이 두려웠던 한(漢) 조정으로부터 그 금(禁)이 풀리게 되어, 그에 그 금(禁)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또 그 황건(黃巾)의 난(亂)이 진압되자 십상시(十常侍)를 시작으로 했던 환관들과 당시 외척이었던 하진(何進)과의 사이에서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환관들은 그 하진(何進)을 모살(謀殺)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하진(何進)을 죽인 것에 격노했던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등의 군사들이 궁중으로 난입했던 것으로 해서 그들은 모두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환관과 외척의 권력투쟁은 공도동망(共倒同亡)의 형태로 종결되게 되는데, 하지만 또 그 틈을 타서 낙양(洛陽)을 점거했던 동탁(董卓)에 의해서 후한(後漢)의 왕조는 통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발하다



 십상시(十常侍)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영제(靈帝) 시대에 전권을 장악했던 환관의 무리를 이름.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을 중심으로 하운(夏惲), 곽승(郭勝), 손장(孫璋), 필람(畢嵐), 율숭(栗嵩), 단규(段珪), 고망(高望), 장공(張恭), 한회(韓悝-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한리’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참고 바람), 송전(宋典) 그 12명의 중상시(中常侍)를 가리켰으나, 하지만 그 어림수(槪數)로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무튼,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환관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상에서 권력을 쥐게 되었던 것은 환제(桓帝) 때, 외척이었던 양기(梁冀)의 배척에 공을 세웠던 단초(單超)와 서황(徐璜) 그리고 구원(具瑗)과 좌관(左悺) 그리고 또 당형(唐衡) 그 5명을 중용하며 그들을 <5후(侯)>라고 불렀던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단초(單超)가 죽어버리자 오만했던 5후(五侯)도 실각했다지만, 하지만 또 그 후의 영제(靈帝) 때 후람(侯覽)과 조절(曹節) 그리고 왕보(王甫)란 자가 또 나타나서 당고(黨錮)의 금(禁) 등 무수한 정쟁(政爭)에서 승리했으며, 그 결과로 그들의 권세는 하늘도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에 여남원 씨(汝南袁氏) 같은 명문(名門)에서도 원사(袁赦)와 같은 환관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후람(侯覽)은 자살했으며, 왕보(王甫)는 사형에 처해졌지만, 하지만 조절(曹節)만은 181년까지 살아남아서 천수(天壽)를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조절(曹節) 사후(死後)에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렸던 환관 집단이 존재했다는 것이 기록상으로 확인되고 있으므로, 그래서 그들은 당시 영제(靈帝)의 총애를 흠뻑 받으면서 절대적인 권세를 누렸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도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의 권력은 실로 엄청나서 당시 그 두 사람에게 황제는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고까지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들은 자신의 일족들을 지방관(地方官) 등, 모든 요직에 앉혔으며, 백성들을 마구 착취했고, 그러자 또 그런 것을 걱정하던 사람들을 잡아들여서는 정신이상자로 몰아서 처벌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여강(呂强)이나 장균(張均) 같은 양식(良識)있던 인물들이 그들을 탄핵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십상시(十常侍)의 모략으로 처벌되었다. 그러자 또 그들의 권세에 힘을 입어서 관직을 얻으려던 사람들이 그들의 문전에 줄을 서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또 그때, 그런 어수선했던 틈을 타서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발했다. 그러자 환관들 중에서 봉서(封諝)란 자 같은 내통자가 나와서 환관들의 세력은 축소되었다. 그런데다 또 그 후, 외척에서 나왔던 대장군 하진(何進)이 십상시(十常侍)를 필두로 했던 환관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진(何進)은 영제(靈帝)가 죽자 영제(靈帝)에게서 총애를 받았던 환관 건석(蹇碩)을 살해했으며, 이어서 환관의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서 군세(軍勢)를 모으려고 했지만, 하지만 또 장양(張讓) 등이 하태후(何太后)를 이용해서 함정으로 그를 유인한 뒤 살해하고는 그 난국을 수습했다. 하지만 또 그때, 이미 전술한대로 하진(何進)의 죽음을 듣고 격노했던 원소(袁紹) 등이 궁중으로 난입했고, 이어서 환관들과 그 세력들을 거의 다 몰살했다. 그런데 또 그때, 장양(張讓)과 단규(段珪)는 황제였던 유변(劉弁)과 한(漢) 최후의 황제가 되는 유협(劉協)과 함께 도망을 쳤는데, 그러나 뒤쫓아 오던 추격 군을 뿌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리하여 강에 투신해서 자살했으며, 그때가 189년이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는 그 두 황제를 보필하겠다고 나섰던 동탁(董卓)이 십상시(十常侍)를 대신해서 권력을 잡게 된다.

 아무튼 그 후, 후한(後漢)으로부터 선양(禪讓)했던 위(魏)가 세워졌고, 그러자 환관들의 작태를 뼈저리게 경험했던 그들은 더 이상 내시에게는 권한을 주지 않는 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 십상시(十常侍)를 張譲, 趙忠, 封諝, 段珪, 曹節, 侯覧, 蹇碩, 程曠, 夏惲, 郭勝 10명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曹節과 侯覧은 張譲과 趙忠이 나타나기 이전에 王甫 등과 함께 권력을 누렸던 환관이었다.

 

 하진(何進)


 하진(何進) ?-광희(光熹) 원년(元年) 8월 29일(189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자(字)는 수고(遂高). 남양(南陽=河南省南陽) 완(宛) 출신. 이모매(異母妹)가 황후가 되자 현관(顯官=높은 벼슬)을 역임했고, 대장군이 되었다. 그 후 황건(黃巾)의 난(亂)이 진정된 후 전권(專權)을 손에 쥐었으나, 그러나 환관들에게 살해당했다. 부(父)는 하진(何眞).

 그의 하 씨(何氏) 가(家)는 원래 도살 업(屠殺業)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러다가 동도(同郡) 출신의 환관이었던 곽승(郭勝)의 도움을 받아서 이모매(異母妹)가 궁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후, 그녀는 영제(靈帝)의 총애를 받아서 황후가 되었고, 그 영향으로 하진(何進)에게도 영달(榮達)이 주어졌다.

 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발하자 그는 대장군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전장에는 일절 나가지 않고 항시 낙양(洛陽)에 머물면서 당시, 전선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던 장온(張温), 황보숭(皇甫嵩), 주준(朱儁), 노식(盧植), 동탁(董卓), 주신(周慎) 등을 지휘했다.

 그런데 그 무렵, 중앙에서는 영제(靈帝)의 황후 하 씨(何氏)와 영제(靈帝)의 모(母)였던 동 씨(董氏) 사이에서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후, 황건(黃巾)의 난(亂)이 진정되자 영제(靈帝)는 군제개혁을 실시해서 서원삼군(西園三軍=西園八校尉)을 설치했고, 다시 상군교위(上軍校尉)에 대장군 이하를 계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는데, 그러자 동 씨(董氏)와 하 씨(何氏)의 대립은 환관이었던 건석(蹇碩)을 끌어들이는 등 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그러자 또 당시 중군교위(中軍校尉)였던 원소(袁紹)는 하진(何進)에게 적극 협력하면서 건석(蹇碩) 등과 대립했다. 그러자 또 위치가 불리하게 되었던 건석(蹇碩)이 하진(何進)을 살해하려 기도했다는 것으로 해서 곽승(郭勝)을 중심으로 했던 환관들은 건석(蹇碩)과의 사이를 멀리했고, 그러자 또 하진(何進)은 건석(蹇碩)과 동 씨(董氏) 일당을 제거했다.

 그 후, 영제(靈帝)가 몰(沒)했다. 그러자 그때까지의 악정(惡政)을 참고 있었던 자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그것은 또 특히 환관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하진(何進)은 자신이 건석(蹇碩)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일도 있었고 해서, 그래서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환관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원소(袁紹) 등 막료(幕僚)들을 모아서 적극적으로 상의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일은 오히려 하(何) 황태후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그러자 또 이번에는 같은 하 씨(何氏)끼리의 대립으로 일이 발전되어갔다.

 그리고 또 그때, 하진(何進)이 하(何) 황태후의 반대를 받고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사이, 원소(袁紹)가 지방의 제장(諸將)들을 도(都)로 불러올리는 것으로 태후에게 압력을 가하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노식(盧植)과 진림(陳琳)이 반대를 하고 나왔는데, 그러나 원소(袁紹)는 굽히지 않고 재삼(再三) 주장했고, 그 결과 하진(何進)은 그 안을 수용했다. 그리고 또 그때, 조조(曹操)도 그 반대편에 섰다고 왕심(王沈)은 <위서(魏書-그러나 北齊의 魏收가 편찬했던 魏書와는 구별됨>에서 전했지만, 하지만 당시의 조조(曹操)는 아직 정치적인 발언권이 약했던 등으로 해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또 당시 원소(袁紹)가 대장군의 명(命)이라고 속이고는 각지에 지령을 내렸던 적도 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러했던 긴박한 정세(情勢) 속에서 원소(袁紹)는 극구(極口) 하진(何進)에게 경솔하게 궁중을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지만, 하지만 하진(何進)은 결국 그 충고를 무시하고 아무 생각 없이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환관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환관들은 천자의 칙서를 위조해서 도내(都內)의 병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 전에 원소(袁紹)가 먼저 거병을 했고, 이어서 환관들은 일소(一掃)되었다.


 

 삼국지
 (三國志)


 삼국지(三國志)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국 명대(明代)에 쓰인 것이며, 후한(後漢) 말과 삼국시대를 무대로 했던 시대(時代)소설 또는 통속(通俗)소설을 말한다.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이며, 삼국연의(三國演義),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고도 불린다. 저자(著者)는 정설(定説)이 없으며, 시내암(施耐庵) 혹은 나관중(羅貫中)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형제>



 ※ 시내암(施耐庵) ?-?

 중국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의 소설가(작가)였으며, 이름은 자안(子安), 그리고 내암은 그의 자(字)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또 중국의 유명한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지(水滸志=水滸傳)>와 함께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 <지여(志餘)> 등을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또는 실재(實在)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그리고 또 칠수유고(七修類稿)와 백천서지(百川書志) 등에서는 그가 전당(銭塘=지금의 杭州市)의 사람이었다고 기록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상태이다.



<杭州市의 西湖>



 그리고 또 민국(中華民國) 17년에 호서정(胡瑞亭)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그의 태생이 밝혀졌다고 주장을 했고, 그 증거로서 시내암(施耐庵)의 묘지(墓誌)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또 그 묘지(墓誌)에 의하면 시내암(施耐庵)의 본명은 자안(子安)이고, 자(字)는 내암(耐庵)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그는 회안(淮安) 사람으로, 진사(進士)가 되어서 벼슬길에 올랐지만, 그러나 뒤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75세에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수호전(水滸傳)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그리고 평요전(平妖傳) 등을 집필해서 문인(門人=弟子=門下生)이었던 나관중(羅貫中)에게 교정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설(一說)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저자가 시내암(施耐庵)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 묘지(墓誌)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묘지(墓誌)의 신빙성(信憑性)에 대해서는 아직도 강한 의문이 있다. 아무튼, 그 후였던 20세기 후반에도 강소성(江蘇省) 흥화시(興化市)에서 그가 살았던 거주지가 발견되었고, 그래서 또 그곳에서 시 씨 족보(施氏族譜)와 시 씨 장문보(施氏長門譜) 등의 자료가 차례로 발견되어 지금까지도 시내암(施耐庵)의 상세한 전기가 전해지고 있다지만, 하지만 역시, 그것 또한 신빙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나관중(羅貫中) 생몰불명

 중국 원(元) 말과 명(明) 초기의 작가. 그리고 역시 시내암(施耐庵)과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의 편자(編者)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잔당오대사연의(残唐五代史演義) 수당양조지화(隋唐兩朝志話) 등, 수종(數種)의 통속백화소설(通俗白話小説-白話는 중국의 구어체 언어)의 편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산서(山西省) 태원(太原)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으며(録鬼簿続編), 산동(山東省) 동원(東原)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지만(三国志演義-蒋大器序 등), 그러나 절강(浙江省)의 항주(杭州)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다.(七修類稿) 그리고 휘(諱)는 본(本)이며, 관중(貫中)은 자(字-그러나 続文献通考에서는 諱를 貫, 字를 本中이라고 했다) 그리고 호(號)는 호해산인(湖海散人-여기서의 散人은 세상을 잊고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文人을 의미하기도 한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수호전(水滸傳)을 편집했다든지(七修類稿에서는 원래 원작이 있었고, 그래서 그가 정리만 했으므로 編했다 라고 기술한다 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또 서호유람지여(西湖遊覽志余)에서는 그가 소설 수십(數十) 종(種)을 편찬(編撰)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현재 그가 편자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과 수종(數種)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 동(同) 서호유람지여(西湖遊覽志余)에 의하면 그가 통속소설 같은 저질스런 글만 썼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자손 삼대(三代)는
벙어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가중명(賈仲明)의 녹귀부속편(錄鬼簿續編)에서는 그가 희곡(戱曲)도 수십(數十)곡(曲)이나 썼지만, 그러나 사람과 잘 사귀지 못하는 나쁜 성격 때문에 마지막에는 행방불명되어 버렸다고 써두었다. 그리고 또한 청대(淸代)의 속설(俗說)<탑영원집(塔影園集)>과 서병소회수호일백단팔장도제발(徐鈵所繪水滸一百單八將圖題跋)>에서는 원(元) 말의 혼란기에 그가 장사성(張士誠)의 휘하에 있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적벽(赤壁)의 싸움에 대한 묘사는 주원장(朱元璋)과 진우량(陳友諒)의 파양호(鄱陽湖)의 싸움을 모델로 했던 것이었다... 라고 했다. 하지만 또, 그에 관계된 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래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많은 강담사(講談師)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서 출판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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