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국 명대(明代)에 쓰인 것이며, 후한(後漢) 말과 삼국시대를 무대로 했던 시대(時代)소설 또는 통속(通俗)소설을 말한다.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이며, 삼국연의(三國演義),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고도 불린다. 저자(著者)는 정설(定説)이 없으며, 시내암(施耐庵) 혹은 나관중(羅貫中)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형제>


 하지만 후한(後漢) 말(末)과 삼국시대를 무대로 했던 설화(說話)나 강담(講談) 등은 본서(本書)가 나오기 전부터도 있어왔으며, 그 중에서도 그보다 훨씬 전이었던 북송(北宋)의 시대에서도 유비(劉備)와 촉한(蜀漢)을 선(善)으로 그리고 조조(曹操)와 위(魏)를 악역(惡役)으로 했던 이미지가 이미 정착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또 원대(元代)에는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全 페이지 揷畵入 三國志)란 책도 간행되었으며, 그것은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원형(元型)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그리하여 그러했던 조류(潮流)를 타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탄생했으며, 그 탄생 시기는 또 원 말(元末)과 명 초(明初)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본서(本書)는 촉한(蜀漢)을 정통(正統) 선자(善者)로 취급하는 선(線)을 유지했으면서도, 하지만 그때까지의 설화(說話) 등에서 나타났던 극단적이고도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고 여겨지는 사건들 그리고 역사연대를 무시했던 전개를 적극적으로 배제했으며, 황건(黃巾)의 난(亂)부터 오(吳) 멸망까지의 시기와 함께 후한(後漢) 말의 중요했던 사건 등, 진수(陳壽)가 삼국지(三國志)에서 취급했던 범위까지를 망라(網羅)했다.

 ※ 진수(陳壽-233년부터 297년)는, 중국 서진(西晉)의 역사가였고, 자는 승조(承祚)였다. 삼국시대에는 촉나라의 관료였으나, 후에는 진(晉)나라로 넘어갔다.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인 <삼국지(三國志)>를 편찬했다.(후술 또는 생략)

 그리고 또 본서(本書)는 한(漢)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았던 고결한 주인공 유비(劉備)와 왕조를 지배해서 전횡했던 조조(曹操)와의 대립을 중심축으로 했던 수준 높은 이야기 성(性)을 보여주었고, 사서(史書)의 정통성을 보장 받았던 일화(逸話)들을 솜씨 좋게 선택했음과 동시에, 그 계기성(繼起性)과 함께 백화(白話=口語)를 이용한 세련된 문장을 선보여서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아주 높았다. 그리하여 백천서지(百川書志)는 문중(文中)에서 본서(本書)를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정사(正史)에 근거를 두었으면서도 속전(俗傳)으로 장식했고, 사문(史文)을 고증(考證)해 나갔으면서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저속(低俗)하지도 않고, 허구(虛構)도 아니어서, 대중들이 읽기도 쉽고 접하기에도 쉬웠다. 그리고 또한 사가(史家)들의 전통적인 고문(古文)에 근거해서 쓴 것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또 맹목적인 서술과 흥미 성(性) 그리고 또한 의문을 자아내게 하는 괴이한 태도에서 벗어나서, 백년간을 서술했으면서도 거의 모든 사건들을 다 포괄했다>

 하여 본서(本書)는 중국의 소설로서는 아주 드문 것이며, 그래서 또한 지식인들이 접해도 좋을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한 자주 장서목록(藏書目錄)에 수호전(水滸傳)과 함께 나란히 게재(揭載)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본서(本書)의 명칭에 대해서는, 청대(淸代)에서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삼국연의(三國演義) 등으로 불리며 통일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또 민국(民國) 기(期)에는 소설연구 등에서 노신(魯迅)이 중국소설사략(中国小説史略)에서 그리고 호적(胡適)이 백화문학사(白話文學史)에서 각각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란 명칭을 사용했었지만, 그러나 신(新) 중국 성립 후에는 삼국연의(三國演義)로 통일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중국에서는 전부 삼국연의(三國演義)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또 혹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 부연으로, 본서(本書)는 성립 당초부터 삼국지(三國志)라고 불렸던 일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서(歷史書) 삼국지(三國志)와 혼동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청대(淸代)에 들어서 그런 것이 비판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중국에서는 본서(本書)를 삼국지(三國志)라고 부르는 일은 전혀 없고, 오로지 삼국연의(三國演義)로 통일되어 있다고 한다.



 <황건(黄巾)의 난(乱) = 황건지난(黃巾之亂)>

 중국 후한(後漢) 말기였던 184년(中平 1年)에 태평도(太平道)의 교조(教祖)였던 장각(張角)이 일으켰던 농민반란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표식으로 머리에 황색 두건(頭巾)을 맸던 것으로부터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들을 황건(黃巾) “적(賊)”이라고 표현했으며, 그리고 또 그 사건은 후한(後漢)을 쇠퇴 시켰고, 그리하여 시대를 삼국시대로 옮겨가게 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태평도(太平道)는, 중국 후한 말기에 장각(張角)이 창시했으며, 정치 색채가 강했던 민간 종교였다.(또는 그 결사) 그리고 주문으로 병을 다스린다고 해서 수십만의 신자들을 모았고, 그리하여 황건의 난을 일으켰다. 오두미도와 함께 도교의 원류가 되었다.

 ※ 오두미도(
五斗米道)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장릉(張陵)이 창시했던 질병의 치료를 중심으로 했던 교법(敎法) 또는 그런 교단이었으며, 병을 고치는 대가로 쌀 다섯 말을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장각(張角-?부터 184년)은, 태평도의 교조였고, 기주(冀州) 거록(鉅鹿=현재의 河北省 平鄕縣)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대현양사(大賢良師 또는 太平道人)이라고 칭했고, 그 외에도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고 칭하며 신자(信者)들을 모았다. 그리고는 184년에 <창천(蒼天=後漢) 이사(已死) 황천(黃天=太平道) 당립(當立)...>으로 시작하는 슬로건을 내걸고는 자신의 동생이었던 장보(張寶)와 장양(張梁) 등과 함께 후한(後漢)에 반기(反旗)를 들었다.

 참고: 그때, 그가 내걸었다고 하는 [蒼天已死 黄天當立 歳在甲子 天下大吉]이란 슬로건에 대해서는 종래(從來) 오행사상(五行思想)에 근거했던 것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하지만 후한(後漢)은 <화덕(火德)=火⋅赤>의 왕조였다는 관점에서 위, 후한(後漢)을 창천(蒼天=木⋅靑)으로 표현했던 것에는 뭔가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설(說)이 있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는, 그 창천이사(蒼天已死)란 말은 장각(張角)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고, 그래서 <장각(張角)은 단지 그 말에다 황천(黃天)을 결부시켰던 것뿐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난(亂)은 한(漢) 왕실의 지배에 불만을 가져왔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만, 그러나 장각(張角)의 갑작스런 죽음(病死)으로 인해서 그 기세가 한풀 꺾였고, 그러자 또 이어서 진압에 나섰던 후한(後漢)의 장군 황보숭(皇甫嵩)과 주준(朱儁) 등의 활약에 힘입어서 난(亂)은 급속히 진정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황건(黃巾)을 자칭했던 봉기는 각지에서 이어졌고, 그러자 더 이상 수습이 불가능했던 후한(後漢)의 권위는 점점 더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자 결국 한(漢)은 무너졌고, 이어서 그 황건 병(黃巾兵)들을 흡수했던 조조(曹操=)와 손권(孫權=) 그리고 유비(劉備=蜀漢)에 의해서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일설에는 그가 원래는 당고(黨錮)의 금(禁) 이후에 억압 받았던 당인(黨人=淸流派 지식인) 중 한사람이었을 것이란 설이 있다. 그리고 또 그 이유는,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한(後漢)은 당고(黨錮)의 금(禁)을 해제시켰지만, 그러나 <장각(張角)만은 제외한다>라고 했던 것으로부터, 그래서 또 당시 후한(後漢)에서는 그를 당인(黨人)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그 이유라고 했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도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따르면 장각(張角) 등 3형제는 원래 아주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산으로 가서 약초 등을 채집해서 시장에 내다팔거나, 상인들의 짐을 운반하면서 근근이 살았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장각(張角)이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남화노선(南華老仙=莊子가 죽고 나서 신선이 되었을 때 불렸다는 이름)을 만났다. 그러자 그 남화노선(南華老仙)은 그에게 한 권의 책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태평요술(太平要術)이란 책이었다. 그러자 평소 한(漢) 왕조의 부패를 미워하고 있었던 장각(張角)은 그 남화노선(南華老仙)의 가르침을 배워서 마침내 풍우(風雨)를 다루는 힘까지 체득했고, 그 후에 어떤 사람이 병상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그가 부수(符水=부적을 담근 물을 의미하며, 주술을 건 물)를 먹여서 죽어가던 그를 살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들었던 백성들을 모두 그를 높이 평가했고, 이어서 황색 옷감을 몸에 감는 것으로 그와 한 동지임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당시 후한(後漢)의 부패했던 조정(朝廷)을 타도하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황건당(黃巾黨)을 결성했으며, 그는 또 스스로 대현양사(大賢良師)를 자칭했다. 그로부터 수년(數年) 후, 황건당(黃巾黨)은 장각(張角)의 이상과는 크게 배치되게 타락했고, 가는 곳마다에서 약탈과 강도 그리고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으면서 폭도화 되어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그때부터 그들을 황마(黃魔)라거나 황귀(黃鬼) 또는 황건적(黃巾賊)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하지만 그 후, 장각(張角)의 병사(病死)에 이어서 장보(張寶), 장양(張梁)이 전사하자 세력이 약화되어 난(亂)은 결국 종결되었다.

 아무튼, 장각(張角)은 처음에,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에 근거하여 도교(道敎)적인 회과(悔過)의 방법으로 치병(治病)을 시행했다. 그 결과 대중들의 전폭적인 신앙심을 얻게 되었고, 그러자 그는 곧 정치색을 짙게 했던 태평도(太平道)의 교조(敎祖)로서 수십만(數十萬)의 신도(信徒)들을 36개로 나누었고, 이어서 그 한 단위를 방(方)이라고 하면서 군사조직화 했다. 그리고는 또 한(漢) 왕조에 대항하기 위해서 봉기를 계획했으며,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근거했던 슬로건을 내걸고는 관아(官衙)의 문(門) 등에 <갑자(甲子)>란 글을 쓰고 다니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참고 : 황건(黃巾)의 황(黃色)은 오행사상(五行思想)에 의하면, 흙 또는 땅(土)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래서 목(木) 화(火)토(土) 금(金) 수(水)의 순환법칙에 맞추게 되면, 황(黃=)은 화(火=赤色=漢朝) 다음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는 184년(光和7년, 干支年 甲子), 그 전에 미리 형주(荊州)와 양주(揚州)로 보내서 군사들을 모집하라고 시켰던 마원의(馬元義)를 낙양(洛陽)으로 보내서 당시, 중상시(中常侍)였던 봉서(封諝)와 서봉(徐奉) 등과 내통하게 했다. 그리고는 3월 5일에 안과 밖에서 동시에 봉기하기로 밀약을 맺게 했지만, 그런데 또 당시, 장각(張角)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당주(唐周)란 자가 그 일을 미리 알고는 환관들에게 밀고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은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그러자 또 마원의(馬元義)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참고 : 거열형(車裂刑)은 마차 두 대에다 죄인의 다리를 각각 묶은 다음, 그 두 마차를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해서 죄인을 찢어서 죽였던 형벌이었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던 영제(靈帝)는 곧 삼공(三公)과 사예(司隸) 등에 명해서 궁중의 위병(衛兵)들과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을 조사하게 했다. 그러자 그와 관련 되었던 사람이 천여 명이나 발각되었고, 그들은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그리고 또한 그 즉시 영제(靈帝)는 장각(張角)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자 2월, 계획의 차질을 깨달았던 장각(張角)은 예정보다 빠른 봉기를 서둘렀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고 칭하며 자신의 아우였던 장보(張寶)와 장양(張梁)에게도 각각 지공(地公)과 인공장군(人公將軍)이란 칭호를 내렸다. 3월, 영제(靈帝)는 하진(何進)을 대장군으로 삼고 장병(將兵)들을 도정(都亭)에 주둔시켰다. 그리고는 8개의 관(關)에 도위(都尉)들을 각각 배치시켜서 낙양(洛陽)을 수호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는 또 황보숭(皇甫嵩)과 여강(呂强) 등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당고(黨錮)의 금(禁)을 풀어주었고, 그리하여 관계(官界)로부터 추방되었던 청류(淸流) 지식인들이 황건적(黃巾賊)과 합류하는 것을 막았던 동시에 또한 그들을 이용했다. 그리고는 또 궁중 안에 있던 모든 창고를 열어서 그 안에 들어있던 돈()과 서원(西園)의 말(馬)들을 풀어서 인재(人材)들을 모집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노식(盧植)을 장각(張角)이 진을 치고 있던 기주(冀州)방면으로, 그리고 황보숭(皇甫嵩)과 주준(朱儁)은 당시 황건(黃巾)의 세력이 가장 강했던 예주(豫州)영천(潁川) 방면으로 각각 파견했다. 그러자 4월, 우선 주준(朱儁)이 영천(潁川)에서 파재(波才)와 격돌했지만 패해서 도주했다. 그리고 5월, 황보숭(皇甫嵩)과 주준(朱儁)은 장사(長社)에서 농성(籠城)을 했고, 그러자
다시 파재(波才)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그곳을 포위했다. 그러자 또 그 열세(劣勢) 속에서 황보숭(皇甫嵩)은 군(軍)을 고무(鼓舞)시키면서 화계(火計)로 맞섰고, 이어서 파재(波才) 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황보숭(皇甫嵩)은 성을 나와서 파재(波才) 군을 쳤고, 그에 파재(波才) 군은 물러났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 때를 꼭 맞추어서 조조(曹操)의 원군이 도착했다. 그러자 황보숭(皇甫嵩)은 그 조조(曹操) 군과 합류해서 그들을 추격했고, 이어서 양적(陽翟)에서 주둔하고 있던 파재(波才) 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6월에는 서화(西 華)가 팽탈(彭脫) 군을 괴멸시켰으며, 이어서 왕윤(王允)이 황건(黃巾)의 별동대를 격파하면서 예주(豫州)가 평정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였던 3월, 형주(荊州) 남양(南陽)에서는 장만성(張曼成)이란 자가 남양황건군(南陽黃巾軍)이란 이름으로 봉기했다. 그리고는 그곳 태수(太守) 저공(褚貢)을 공격하여 죽인 후, 스스로를 <神上使>라고 칭하며 완(宛)에 주둔했다.

 참고: 위, 장만성(張曼成)이 자칭했다는 신상사(神上使)에서, 신상(神上)은 그가 붙인 사연호(私年號=異年號 등)이며, 그리고 사연호(私年號)는 아직 인정되지 않은 국가 등 단체가 연호를 붙였을 때 부르는 명칭이다. 그러므로 대충 풀이하면, 신상(神上)이란 연호와 결합시켜서 자신을 <하늘이 내린 사자 또는 神託 받은 자>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출처가 정체불명인 것으로 인하여, 그래서 그가 그 연호를 실제로 사용했었는지 그리고 또 신상사(神上使)가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그러자 6월, 새로이 남양(南陽) 태수가 되었던 진힐(秦頡)이 장만성(張曼成)을 공격해서 그를 죽였지만, 그러나 그 후에도 남양황건군(南陽黃巾軍)은 항복하지 않고 장만성(張曼成)의 뒤를 이어서 조홍(趙弘)이란 자를 새롭게 두령으로 삼고는 완성(宛城)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그러자 또 그때 마침 예주(豫州) 평정을 끝냈던 주준(朱儁)이 형주(荊州) 자사(刺史=道知事 또는 지방長官)였던 서구(徐璆)와 함께 진힐(秦頡)에 합류해서 완성(宛城)을 포위했다. 그런데 8월, 주준(朱儁) 등이 완성(宛城)을 포위하고 있던 중, 누군가가 주준(朱儁)을 경질(更迭)하기 위해서 황제에게 진언을 올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그에 깜짝 놀랐던 주준(朱儁)은 급히 공격을 개시했고, 그 결과 조홍(趙弘)도 참수되었다. 그러자 또 조홍(趙弘)을 잃게 된 남양황건군(南陽黃巾軍)은 다시 한충(韓忠)이란 자를 내세우고는 농성을 계속했다. 그러자 또 그때, 주준(朱儁) 휘하에 있었던 손견(孫堅) 등의 활약으로 완성(宛城)은 결국 함락되었고, 그러자 또 한충(韓忠)은 탈출을 해서 한(漢)에 항복하려 했지만, 그러나 주준(朱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한충(韓忠)은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남양황건군(南陽黃巾軍)은 다시 손하(孫夏)란 자를 우두머리에 세우고는 저항을 계속했다. 10월, 주준(朱儁)은 격렬하게 저항하던 손하(孫夏) 군을 쳐부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남양(南陽)의 황건군(黃巾軍)도 괴멸되었다. 그리고 또 그 전 6월, 기주(冀州)에서는 황건군(黃巾軍)에 연전연승했던 노식(盧植) 군이 장각(張角)이 광종(廣宗)에서 농성을 하자 그곳을 포위하고는 공략을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노식(盧植) 군이 우세했는데, 그런데 또 바로 그때, 조정에서 파견되었던 소황문(小黃門-43회 蔡倫 참조) 좌풍(左豊)이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식(盧植)을 중상모략 했다. 그래서 노식(盧植)은 결국 파직되었는데, 그러자 그 노식(盧植) 대신으로 동탁(董卓)이 파견되어 왔지만, 그러나 동탁(董卓)은 황건군(黃巾軍)에 패했다. 8월, 영제(靈帝)는 예주(豫州)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주(兗州) 동군(東郡)에서 복기군(卜己軍)을 격파했던 황보숭(皇甫嵩)을 급히 기주(冀州)로 파견시켰다. 10월, 황보숭(皇甫嵩)은 광종(廣宗)에서 황건군(黃巾軍)에 기습을 감행했고, 그 결과로 장양(張梁)이 죽었다. 하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장각(張角)이 병사(病死)했으므로, 그래서 정벌군은 그의 유체를 찾아내서 만인이 다 볼 수 있게 전시하는 것으로 그를 모욕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거록(鉅鹿) 태수(太守)였던 곽전(郭典)과 함께 곡양(曲陽)에서 장보(張寶)마저 격파했으며, 그 결과로 장보(張寶)도 참수에 처해졌다. 그러자 그때부터는 황건(黃巾)의 무리들도 힘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난(難)은 수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후에도 황건군(黃巾軍)의 잔당들은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져서 발호(跋扈)했고, 다시 반란을 반복했다거나 또는 산적(山賊)질, 도적질을 일삼았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도 청주(靑州)는 거의 그들의 아지트 화 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약 100만정도의 군세(軍勢)로 중국의 북부를 크게 황폐화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는 또 그들은 192년에 연주(兗州) 자사(刺史)였던 유대(劉岱)까지 죽였는데, 그러자 조정으로부터 조조(曹操)에게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이 내려졌고, 그래서 조조(曹操)가 나서서 그들 중 병(兵) 약 30만과 비전투원 약 100만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참고: 그때 조조(曹操)는 항복해 왔던 황건군(黃巾軍)을 중핵(中核) 전력으로 재편성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때부터 청주군(靑州軍) 또는 청주병(兵)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후에 모두 조조(曹操)에게만 충성을 다했으며, 그리하여 조조(曹操)가 죽고 문제(文帝=曹丕)가 즉위했을 때야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에도 황건적(黃巾賊)의 세력이 약했던 양주(凉州) 등의 지역에서도 후한(後漢)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던 틈을 타서 한수(韓遂) 같은 자들이 연달아서 상식에서 벗어난 반란이나 자립(自立) 또는 항쟁을 반복했고, 그러자 또 그런 틈을 타서 이민족들까지도 변경에서 약탈행위를 일삼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자구행위(自救行爲)로 지방 등에서는 호족들이 중심이 되어서 촌락공동체(村落共同體) 규모로 자위(自衛), 자경(自警)의 무장(武裝)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그와 더불어서 또 그런 치안의 악화로 인해 지식인을 포함했던 많은 사람들이 난(亂)을 피해서 형주(荊州), 양주(揚州), 익주(益州) 등 강남(江南)이나 사천(四川) 변경(邊境)지역으로 이주했고, 그런 일은 또 그 지역들의 문화수준의 향상과 개발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또 그런 곳들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 그 후의 삼국시대나 그리고 남북조시대의 발생을 용이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 모든 사건들로 인해서 그때까지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던 호족들과 넓은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무장과 함께 군벌화 양상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것은 또 하나의 난(亂)을 부르는 잠재된 형태로 점점 더 군웅할거의 양상으로 발전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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