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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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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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袁紹-영흥(永興) 2년(154년) 이전(以前 ?)부터 건안(建安) 7년(202년) 5월>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정치가, 자(字)는 본초(本初).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출신. 대장군이었던 하진(何進)과 협력해서 환관들과 대립했고, 동탁(董卓)의 난(亂) 때는 하내(河內郡)에서 거병했다. 그 후, 하북(河北) 사주(四州)를 지배하기까지 세력을 확대했지만, 그러나 관도(官渡)의 싸움에서 자신의 우유부단(優柔不斷)으로 인해서 조조(曹操)에게 패했고, 그 후, 병(病)을 얻어서 죽었다.
그는 후한(後漢) 시대에, 4대에 걸쳐서 삼공(三公)을 배출했던 명문(名門) 원가(袁家)의 출신이었으며, 그리하여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주위에 영향력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父)는 원성(袁成)이었고, 그리고 원술(袁術)은 원성(袁成)의 동생이었던 원봉(袁逢)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하지만 또 위서(魏書)의 왕심찬(王沈撰)이나 후한서(後漢書)의 원산송찬(袁山松撰)에 의하면, 원소(袁紹)는 원술(袁術)의 이모형제(異母兄弟)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왕심(王沈) 등의 설(說)에 근거하면, 원소(袁紹)는 원봉(袁逢)의 서자(庶子)였는데, 다시 백부(伯父)였던 원성(袁成)의 양자로 들어가서 그 후계를 이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왕심(王沈)은 왕침(王沈)으로 쓰고 있는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
아무튼, 원봉(袁逢)과 원외(袁隗) 다음 세대의 원씨(袁氏) 종족(宗族)의 장(長)은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그 두 사람 중 하나였으며<혹은, 異母兄(袁術과 同母兄弟)이었던 袁基>, 그래서 당시, 도(首都)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지방호족의 자제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두 사람의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 과거, 大家의 집 등으로 인사를 갔다거나, 食客으로 머무는 등, 사교 등을 목적으로 해서 찾아다니던 것을 말함.
그런데 당시, 원소(袁紹)는 원술(袁術)보다 명망(名望)이 높았다고 하며, 예를 들어서 하옹(何顒=後漢의 정치가)이나 허유(許攸=後漢 말기의 參謀, 정치가) 같은 사람들은 원술(袁術)을 결코 찾았던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원술(袁術)은 그런 일에 불만이 있었고, 그래서 또 원소(袁紹)도 싫어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의 숙부(叔父)는 원외(袁隗)였으며, 자식으로는 원담(袁譚), 원희(袁熙), 원상(袁尙) 등이 있었다. 그리고 또 원매(袁買)라는 인물도 있었다고 하며, 그는 또 원상(袁尙)의 아우였거나, 아니면 원상(袁尙)의 형의 아들이었다는 이설(二說)이 있다.
그는 또 삼국지(三國志) 위서원소전(魏書袁紹傳)에 의하면, 출사(出仕)하기 전까지는 유협(遊俠은 俠客 같은 무거운 의미도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을 사귀면서 浩然之氣를 키우는 일 등,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것을 의미함)을 좋아해서 장막(張邈=孟卓=後漢 말기의 정치가)이나 하옹(何顒=伯求), 허유(許攸=子遠), 오부(伍孚=徳瑜), 오자경(呉子卿=諱 不詳) 등의 명사(名士)들과 <분주(奔走)의 友>란 친목회(親睦會=親友會)까지 결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의 영제(靈帝) 때, 대장군이었던 하진(何進)과의 연(緣)도 있었고 해서였던지, 그는 젊었을 때 이미 시어사(侍御史-관직명의 하나로 주로 감찰과 탄핵의 일을 맡았다)가 되었고, 그 후에는 중군교위(中軍校尉)를 거쳐서 이윽고는 사례교위(司隷校尉-조정 내, 대신들과 황제의 친척 등을 감찰했던 직)에까지 올랐다.
그 후, 영제(靈帝)가 죽자 그는 하진(何進)에게 신속하게 환관들을 제거할 것을 진언을 했지만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던 중에 오히려 하진(何進)이 그 환관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그는 그것을 기회로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어서 궁중으로 난입해서 환관들과 그 외에 무고한 사람들까지 합쳐서 약 2천명 정도를 죽였다. 그리고 또 그 후, 한(漢)의 실권을 장악했던 동탁(董卓)이 소제(少帝)를 폐(廢)하고 진류왕(陳留王=獻帝)을 옹립시키려 했을 때, 태부(太傅=天子의 師) 원외(袁隗)를 숙부(叔父)로 두었던 그의 의향을 묻는 상담이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겉으로는 그에 찬성했지만, 그러나 후환이 두려워서 그대로 기주(冀州)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에 격노했지만, 하지만 그 후로부터는 명문이었던 원 씨(袁氏) 세력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에게도 발해군(勃海郡)의 태수(太守) 직이 주어졌다.
190년, 교모(橋瑁)의 요청(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曹操)으로 제후들이 동탁(董卓)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켰고, 그리하여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그러자 그때,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라고 생각되어졌던 그가 그 맹주(盟主)에 추천되었다. 그리고 또한 그때, 그를 맹주로 추천했던 자가 바로 조조(曹操)였다고 전해진다.(이하, 후술 또는 생략함)
원술(袁術-155년 이후?부터 199년)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정치가, 군웅(群雄). 중(仲=成)의 초대황제. 부(父) 등, 가족관계는 원소(袁紹) 참조.
그는 청년기에는 협인(俠人=그러나 여기서는 俠客 등, 일종의 패거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리하여 같은 패들과 방탕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후에 개심(改心)해서 효렴(孝廉)에까지 추천되었고, 그 후에는 관(官)이 하남윤(河南尹),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虎賁은 황제 직속의 부대)에 이르게 되었다.
※ 효렴(孝廉)은 중국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제정했던 향거리선(鄕擧里選)의 찰거과목(察擧科目) 중 하나였고, 부모에게 효순(孝順)하고 평소 염정(廉正-결백하고 공명정대함)한 태도를 지녔던 사람들을 추천했으며, 찰거상과(察擧常科) 중 제일로 중요시 되었던 과목이었다.
189년, 영제(靈帝)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숙부였던 원외(袁隗)와 원소(袁紹)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농락하고 있었던 환관들을 수천 명이나 주살했다. 그리고 동탁(董卓)이 입경(入京)한 후에는 후장군(後將軍)에 임명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또 그 뒤에 닥칠 화(禍)가 두려워서 형주(荊州) 남양(南陽)으로 도망을 쳐버렸다.
그 후, 장사(長沙) 태수(太守) 손견(孫堅)에 의해서 남양(南陽) 태수가 살해되자 그는 그 후임으로 태수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남양(南陽)을 지배했고, 이어서 손견(孫堅)을 자기 휘하에 두고는 그를 예주(豫州) 자사(刺史)에 임명했다. 그리고는 또 그 손견(孫堅)으로 하여금 동탁(董卓)을 공격하게 했으며, 그 결과로 191년에 손견(孫堅)은 낙양(洛陽)을 점령했다. 그리고 또 그때, 남양군(南陽郡)은 인구가 많아서 대부분이 풍족하게 살았지만, 그러나 원술(袁術)이 사치스런 생활을 추구하며 징세를 가혹하게 부과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그곳에 살던 백성들은 무척 많은 괴로움을 당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이하, 후술 또는 생략)
동탁<董卓-?부터 초평(初平) 3년 4월 23일(192年5月22日)>

후한(後漢) 말기의 군인, 정치가. 헌제(獻帝)를 옹립했고, 궁정에서 마음껏 권세를 휘둘렀지만, 그러나 자신의 양자였던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는 농서군(隴西郡) 임도(臨洮) 출신이었으며, 자(字)는 중영(仲穎), 부(父)는 동군아(董君雅), 형은 동탁(董擢), 동생으로는 동민(董旻)이 있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요절했던 아들이 있었으며, 조카로는 동황(董璜), 그리고 손녀 동백(董白)이 있었다.
그는 성질이나 행동이 거칠고 난폭했으나 지략(智略)이 뛰어났고, 무예에 능했으며, 완력(腕力)이 특히 강했고, 그리고 또 마상(馬上)에서는 오른손이든 왼손이든 어느 쪽으로도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젊었을 때는 강(羌=羌族=중국 西北部의 티베트계 민족)과도 교류했으며, 그래서 어느 때 그 족장들이 그를 만나러 왔을 때는 농경에 사용하던 경우(耕牛)를 잡아서 그 고기를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족장들은 그에 모두 감격해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뒤 축수(畜獸=家畜)를 천두(千頭)나 선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병마연(兵馬掾=변방의 軍事를 담당했던 職名)이 되었고, 그러자 기병(騎兵)을 인솔해서 당시, 약탈을 일삼고 있던 호(胡=漢民族이 중국의 북부와 서부에서 살아가던 이민족 특히, 유목민족을 낮추어서 불렀던 말) 토벌에 들어가서 대승했다.
환제(桓帝) 말년(末年), 그는 양가(良家=좋은 집안)의 자제(子弟)였던 점이 참작되어서 우림랑(羽林郞-羽林은 前漢 때 설치했던 황제 직속 부대 名)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장환(張奐)이 인솔했던 군(軍)에 종군해서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강족(羌族)과 싸웠으며, 그 결과로 장환(張奐) 군은 그 부족의 장을 비롯해서 1만여 부족 인들을 처형하고 대승했다. 그리고 또 그는 그 공적으로 낭중(郎中)에 임명되었으며, 비단 9천 필(匹)을 하사받았지만, 그러나 그 모두를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그는 다시 변경에서 활약했으며, 이민족들과 싸우면서 서역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 병주(幷州) 자사(刺史), 하동(河東) 태수(太守)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하지만 중평(中平) 원년(元年-184年)에 그는 다시 동(東)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황건적(黃巾賊) 토벌에 나섰지만, 그러나 패배해서 면직(免職)되었다.
동년(同年) 겨울, 양주(凉州)에서 변장(邊章), 한수(韓遂), 마등(馬騰) 등이 강(羌)과 호(胡)의 협력을 받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 다음해 그는 다시 중랑장(中郞將)에 복귀했고, 이어서 그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되었으며, 파로장군(破虜將軍)에 임명되며 장온(張溫)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 후, 후한(後漢) 군은 위기를 맞게 되었지만, 그런데 또 바로 그때, 갑자기 황건군(黃巾軍)의 진영으로 유성(流星)이 떨어졌다. 그러자 그것을 불길하게 여겼던 황건군(黃巾軍)이 철수했는데, 그러자 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군(漢軍)은 그들을 추격해서 대파(大破)했다.
그 후, 장온(張溫)과 동탁(董卓)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했지만, 그러나 오히려 동탁(董卓)이 그들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기지(機智)를 발휘해서 강둑을 막아서 물을 채웠다. 그러자 추격군은 그 아래로 지나갔으며, 그 사이에 또 동탁(董卓)은 둑을 터트려서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또 그 결과, 후한(後漢) 군은 6개 사단(師團) 중 5개 사단(師團)이 패배했다지만, 그러나 동탁(董卓)이 이끌던 군대만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 그는 태향후(斄鄕侯)에 봉해졌다.
중평(中平) 5년(188年), 그는 다시 전장군(前将軍)에 임명되었고, 양주(涼州)에서 난(亂)을 일으켰던 황건적(黃巾賊)의 본거지를 토벌하기 위해서 나섰다. 그런데 그때, 적을 토벌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병법에 통달했던 황보숭(皇甫嵩)과 그의 의견이 달랐다. 그래서 결국 동탁(董卓)의 의견과 정면배치 되었던 황보숭(皇甫嵩)의 임기응변(臨機應變) 작전으로 한군(漢軍)은 대승했고, 그 결과로 또 동탁(董卓)은 상황의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상대적으로 그에 대한 공적은 모두 황보숭(皇甫嵩)에게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다시 소부(少府)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조정으로부터 군을 모두 황보숭(皇甫嵩)에게 넘겨주고 귀환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변경의 치안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핑계로 대며 그 명령에 불응했다. 그러자 그 다음해 그는 다시 병주(幷州) 자사(刺史)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또, 그와 동시에 다시 귀환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도 그 명령을 거부했다.
중평(中平) 6년에 영제(靈帝)가 몰(沒)했다. 그러자 대장군이었던 하진(何進) 등은 환관들을 일소할 계획을 세웠고, 그러자 동탁(董卓)에게도 소환명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동탁(董卓)은 그때서야 수도(首都)였던 낙양(洛陽-그러나 당시에는 雒陽)으로 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러나 그 후, 환관주살 계획이 진행되던 중 하진(何進)이 살해되었고, 이어서 원소(袁紹) 등이 반격을 가했다. 그러자 환관 중에서 중상시(中常侍)였던 단규(段珪) 등이 새로운 황제 유변(劉弁=少帝)과 그의 동생 진류왕(陳留王)을 데리고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동탁(董卓)이 그들(유변과 진류왕)을 구출했다.
그 후, 동탁(董卓)은 그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귀로(歸路)에 올랐는데, 그런데 그때, 유변(劉弁)은 황제였거나, 형이었는데도 언변이 선명치가 않았으며, 그러나 그 동생이었던 진류왕(陳留王)은 오히려 말을 잘했기 때문에, 그래서 동탁(董卓)은 진류왕(陳留王)이 더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으로 들어갔을 때는 병력이 약 300명 정도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하진(何進)의 군사들을 흡수했고, 이어서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는 또 집금오(執金吾-漢代의 官名이며, 秦代에는 武官 中尉에 해당했음) 정원(丁原-漢代의 정치가)의 군사들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정원(丁原)을 암살하려 기도했지만, 그러나 당시, 무용(武勇)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여포(呂布)가 정원(丁原)을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 여포(呂布)를 꾀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그리고는 그 여포(呂布)로 하여금 정원(丁原)을 살해하게 했다.
참고: 그러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동탁(董卓)이 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가서 소제(少帝)를 폐위시켰고, 이어서 헌제(獻帝)를 옹립하려 하자 정원(丁原)이 반발함으로 해서 그 두 사람은 곧 전투상태에 돌입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또 당시 그 정원(丁原)에게는 무용(武勇)을 자랑하던 여포(呂布)가 있었기 때문에 동탁(董卓)은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그는 당시 여포(呂布)와는 동향(同鄕)의 인물이었고, 그리고 또 그때는 이미 여포(呂布)와 안면까지 트고 있었던 이숙(李肅)을 이용해서 여포(呂布)를 꾀게 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 이숙(李肅)은 적토마(赤兎馬)를 여포(呂布)에게 선물로 주고는 정원(丁原)을 배신하게 했다고 되어있다.
아무튼 그 후, 동탁(董卓)은 집금오(執金吾)의 군사들마저 손에 넣었고, 그리하여 대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여포(呂布)를 양자(養子)로 삼았으며, 그 병력(兵力)을 배경으로 사공(司空-관직의 하나이며, 알기 쉽게 周代에서는 三公 다음이었으며, 6卿 중 하나였다)까지 되었다. 그러자 또 그는 유변(劉弁)의 생모였던 하 태후(何太后)를 협박해서 유변(劉弁)을 폐했고(弘農王), 진류왕(陳留王)을 황제에 옹립했다.(獻帝) 그리고 또 그 하 태후(何太后)가 영제(靈帝)의 모(母)였던 동 태후(董太后)를 압박했던 것을 문제 삼아서, 하 태후(何太后)의 권력을 박탈했으며, 그리고는 또 이어서 그녀를 영안궁(永安宮)에 유폐(幽閉)한 뒤, 그 얼마 후에 살해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다시 태위(太尉)에 올랐으며, 그 다음에는 결국 상국(相國)까지 되었다.
참고: 相國이란 계급(지위)은 漢 창건의 공이 있었던 功臣, 蕭何와 曹参 그리고 呂雉의 조카였던 呂産이 즉위했던 적이 있었으며, 그 후 쿠데타에 의해서 呂産이 誅殺된 以後, 약 300年 以上 永久欠番 상태에 있었던 지위였다. 그리고 또 演義에서는 太師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조정(朝廷)에서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권리와 칼을 차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자 또 그의 포악(暴惡)은 한계에 다다라서 낙양(洛陽)에 있던 부호(富豪)들의 집들을 습격해서 금품을 탈취했다거나, 마을축제에 참가했던 농민들을 학살했다거나 했다. 그리고 또한 색향(色香)에 눈이 멀었던 그의 만병(蠻兵)들도 매일 밤마다 궁녀들을 능욕하는 등, 그 악도비도(惡道非道)는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그러자 그런 동탁(董卓)의 전횡(專橫)에 반발심을 가졌던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등, 당시 유력자(有力者)들은 교모(橋瑁)의 요청(演義에서는 曹操)으로 초평(初平) 원년(190년)에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을 조직했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홍농왕(弘農王)을 독살(毒殺)하고는 당시 방위에 불리했던 낙양(洛陽)을 버리고 장안(長安)으로 강제 천도(遷都)했다.
참고: 그때 董卓은 洛陽에 있던 역대 황제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財寶들을 챙겼고, 이어서 궁전과 민가들을 다 불태웠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는 낙양(洛陽)에 계속해서 주둔하면서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과 싸웠다. 그리고 또 그는 하양진(河陽津)에서 양동작전(陽動作戰)을 이용해서 왕광(王匡)을 크게 격파했으며, 이어서 서영(徐榮)을 파견해서 형양현(滎陽縣) 변수(汴水)에서 조조(曹操)와 포신(鮑信)을 크게 격파했다. 그리고 또 양현(梁縣)에서 손견(孫堅)도 격파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손견(孫堅)과 다시 싸워서 패배했고(陽人의 싸움), 그러자 그는 낙양(洛陽)의 마을들을 다 태우고는 장안(長安)으로 물러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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