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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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연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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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
서역도호(西域都護)와 무기교위(戊己校尉)를 부활시켜서 후한(後漢)이 직접 서역(西域) 경영을 행했다.(~76년)
서역도호(西域都護)는, 서역(西域)을 총괄했던 중국의 관명(官名)이었으며, 전한(前漢) 지절(地節) 2년(기원전68년)에 한(漢)에서 서역(西域)으로 파견되었던 정길(鄭吉)이 차사(車師)를 굴복시키자 한(漢)은 그를 호선선이서남도(護鄯善以西南道=西域 南道의 감독 역)로 삼았다.
※ 정길(鄭吉-?~B.C.48)은, 중국 한나라 때의 장군이었고, 선제(宣帝) 때 차사국(車師國)을 쳐서 멸했으며, 흉노의 항복을 받아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역 도호(都護)가 되어서 전한(前漢)의 국세(國勢)를 널리 떨쳤던 사람이었다.(후술 또는 생략)
※ 차사(車師)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북위(北魏)시대까지 톈산(天山)산맥 동부에 있었던 나라로, 현재의 동(東) 투르키스탄(Turkistan)에 상당하는 곳에 있었던 오아시스도시국가였다.
그 후, 신작(新爵) 3년(기원전 59년)에 흉노(匈奴)의 일축왕(日逐王)도 항복시킴으로 해서 정길(鄭吉)은 호차사이서북도(護車師以西北道-뜻은 위와 유사함)에 겸임되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서역(西域)의 남북도(南北道) 두 길을 모두 통괄하게 되어서 서역도호(西域都護-여기서의 都는 크다는 뜻과 전부라는 의미임)라고 칭해지게 되었으며, 또한 그 말의 유래가 되었다. 하지만 그 서역도위(西域都尉)는 가관(加官)이었으며, 본관(本官)은 기도위(騎都尉=官秩比2千石)와 간대부(諫大夫=官秩比8百石)였다. 그리고 또 부관(副官)으로서는 부교위(副校尉=官秩比 2千石)가 설치되어 승(丞) 1인과 사마(司馬) 2인, 후(候) 2인, 천인(千人) 2인이 그에 속했다. 그리고 또한 서역(西域) 중앙부의 오루성(烏壘城)에 막부(幕府)를 두고 서역(西域) 36국(國)을 진무(鎭撫)했으며, 또한 제국(諸國)을 호령(號令)했다. 하지만 후한(後漢)에 들어서는 그 힘이 약해져서 자주 폐지와 설치를 반복했다. 그리고 또, 아래는 당시의 중요했던 西域都護들에 대한 소개이며, 다만 이름만 밝힙니다.
<前漢>
鄭吉-前(기원전)59年 - 前48年 韓宣-前48年 - 前45年 甘延寿-前36年 - 前33年 段會宗-前33年 - 前30年 廉褒-前30年 - 前27年 段會宗-前21年 - 前18年(再任) 郭舜-前15 - 前12年 孫建-前12年 - 前9年 但欽-서력(西曆)1年 - 13年
<新>
但欽-1年 - 13年-殺 李崇-13年 - 23年
<後漢>
莎車王賢-大都護를 사칭함 陳睦-74年 - 75年-殺 班超-91年 - 102年 任尚-102年 - 106年 段禧-106年 - 107年
무기교위(戊己校尉)는, 중국 전한(前漢) 이후의 관직명으로, 서역(西域)을 관리했던 직명이었다. 그리고 한서(漢書)의 백관공경표상(百官公卿表上)에 의하면, 원제(元帝) 초원(初元) 원년(元年)에 설치되었고, 동(同) 서역전상(西域傳上)에서는 차사(車師) 전왕(前王)의 토지(高昌)에 둔전(屯田)을 열었다고 한다.
※ 둔전(屯田)은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했던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토지로, 군인이 직접 경작했던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가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는 각(各) 궁(宮)과 관아에 속했던 토지로, 관노비나 일반농민들이 경작했으며, 그 소출의 일부를 거두어 들여서 경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음은 그 예를 열거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둔전답(屯田畓)은 둔전과 둔답을 아울러서 일렀던 말이며
2. 국둔전(國屯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자리(戍자리-국경을 지키던 일. 또는 그런 병사)를 살던 군사가 경작하여 그 수확을 모두 군자(軍資)에 충당했던 토지였으며, 왜구를 막기 위하여 연해(沿海) 지방에 많이 두었다. 그리고 또 시행과 폐지를 반복했지만, 그러나 세조 6년(1460)에 토지제도의 하나로 확정하였다.
3. 그리고 관둔전(官屯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지방 관아에 두었던 둔전(屯田)으로, 본래는 군자(軍資)에 보충하려고 두었으나, 그러나 실제로는 관아의 일반경비나 수령의 사사로운 수입이 되는 등 많은 폐해가 있었다.
4. 영둔전(營屯田)은 조선시대에 각 영문(營門=軍門)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나라에서 지급했던 둔전이며
5. 영문둔전(營門屯田)은 조선후기에 각 군병 아문(軍兵衙門)에서 소유했던 둔전이었고
6. 아문둔전(衙門屯田)은 조선후기에 관아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서 두었던 둔전이었으며
7. 궁둔전(宮屯田)은 각 궁(宮)에 속했던 둔전(屯田)
8. 그리고 역둔전(驛屯田) 또는 역(驛)둔토(屯土)란 것도 있었고
9. 가호둔전(家戶屯田)은 고려말기에, 둔전을 경작하지 않는 가호에도 씨앗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짓게 한 다음, 가을에 몇 배를 거두어들였던 것을 말했다.
아무튼, 속관(屬官)으로서 상기(上記)와 같게 승(丞), 사마(司馬) 각(各) 1명과 후(候) 5명을 두었으며, 질석비(秩石比=官秩比)는 600석(石)이었다. 그리고 그 명칭의 유래는 한서(漢書) 백관공경표상(百官公卿表上)의 안사고(顔師古) 주(注)에 의하면, 십간(十干) 중 갑을병정경신임계(甲乙丙丁庚辛壬癸)들은 각각의 방위를 가지지만, 그러나 무(戊)와 기(己)는 가리키는 방위가 없으므로, 그래서 마땅히 정주(定住)할 장소를 가지지 않은 교위(校尉)를 그에 비유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무(戊)와 기(己)는 중앙에 위치해서 사방(四方)을 진무(鎭撫)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서역(西域)의 중심에 위치해서 주변을 진무(鎭撫)하는 것에 비유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 등이 있지만, 물론 둘 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후한서(後漢書)의 서역전(西域傳)에서는 <무기(戊己)2교위(校尉)>라고 했고, 그것은 또 무(戊)교위와 기(己)교위 2인을 말했던 것으로, 그래서 그 총칭으로 무기교위(戊己校尉)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
아무튼, 왕망(王莽)의 시대에 서역(西域)이 배신을 했고, 이어서 열렸던 후한(後漢) 초기에도 그 직(職)은 설치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영평(永平) 16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하지만 또 당시의 서역(西域) 정세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기 때문에, 그래서 건초(建初) 원년(元年)에는 다시 불러 들였다. 하지만 또 그 후였던 영원(永元) 3년에 반초(班超)의 활약에 힘입어서 다시 설치되었다.(後漢書 西域傳) 그러나 또 그 후였던 후한(後漢) 말경에는 서역(西域)과의 교통이 모두 끊어졌다. 그런데 삼국(三國)의 위(魏) 황초(黃初) 3년에 서역(西域)으로부터 사자가 왔고, 그러자 또 그것을 계기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어서 양주(凉州) 자사(刺史)가 그 직을 맡게 되었다.(三国志 文帝紀, 晋書 地理志上)
※ 자사(刺史)는
1. 발해에서는 각 주(州)의 으뜸 벼슬을 말했으며 2. 고려 때는 성종 14년(995)에 두었던 외관(外官)을 이름. 3. 그리고 중국 한나라 때는 군(郡)과 국(國)을 감독하기 위해서 각 주에 설치했던 감찰관으로, 나중에 당(唐)과 송(宋)을 거쳐서 명(明)나라 때 없어졌다. 4. 그리고 중국의 전한(前漢)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 때까지 존재했던 관직명으로, 당초에는 감찰의 역할을 맡았으나, 나중에는 주(州)의 장관(長官)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3과 4가 해당되며, 그 중에서도 4가 더욱 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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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
북흉노(北匈奴)의 우류선우(優留鄯于)가 선비(鮮卑)에서 살해 되었고 그러자 그 땅에 살던 58부(部)의 20만 백성들이 한(漢)에 내항(來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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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
두태후(竇太后)가 임조(臨朝)했다(~97년)
효문황후<孝文皇后=두의(竇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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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
반초(班超)가 서역(西域) 평정의 공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었다(~1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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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
감영(甘英)이 반초(班超)의 명(命)을 받아 로마로 파견되었고, 파르티아에 도착했다
<감영(甘英)> 2
감영(生没年不詳)은 당시, 대진(大秦)이라고 불렸던 ‘로마(Rome)’에 파견되었던 중국의 대사(大使)였으며, 반초(班超)로부터 로마와의 국교(國交)를 개설할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는 당시 7만 정도의 규모를 가졌던 반초(班超) 원정군의 일원(一員)이었으며, 일단(一團)의 군을 이끌고 파르티아왕국의 서쪽 경계에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까지 가는 데는 실패했다고 여겨지지만, 그러나 적어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로는, 고대 중국인으로서는 서쪽으로 제일 멀리까지 여행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후한서(後漢書=後漢 25-22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화제(和帝) 제(第)9년(기원97년) 반초(班超)는 자신의 부관(副官) 감영(甘英)에게 시켜서 ‘서쪽바다’의 해안과 가는 길에 존재하는 여러 지역들을 둘러보고 오라고 명했다. 그 전까지는 누구도 그곳까지 갔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지역들에 관한 정보는 ‘산해경(山海經)’조차에도 상세한 기술이 없었다.
※ 산해경(山海經)은, 고대 중국의 지리책으로, 작가와 연대는 미상이며, 뤄양(洛陽)을 중심으로 해서 산맥과 하천 그리고 신화와 전설, 産物 등을 수록했다. 중국의 자연관과 신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5부18권.
그러자 감영(甘英)은 그 탐험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들(나라들과 관습 그리고 地勢 등에 관한 것)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분의 기술은 아래와 같다.
<화제(和帝) 제(第)9년(기원97년), 반초(班超)는 자신의 부관(副官)이었던 감영(甘英)을 대진(大秦)으로 파견했고, 그러자 감영(甘英)은 조지(條支=Tiaozhi=현재의 시리아 지역)를 통과해서 안식(安息=Anxi=파르티아)의 서쪽 경계에 있던 아주큰 바다(大海=페르시아 만)에 도착했다>(後漢書88)
그리하여 그는 로마(大秦)에 관한 보고서도 남기게 되었다지만, 하지만 그것은 본인이 직접 가서 보고 들었던 것은 아니었고, 간접적으로 얻었던 자료에 근거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대진(大秦)을 ‘바다’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비정(比定-일종의 추정)했으며, 그리고 또 아래는 그가 쓴 기술의 일부분이다.
<그 판도(版圖=領域)는 몇 천리(千里-그러나 여기서의 里는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던 里의 개념이 아니고, 약 5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말함)를 가도 그 끝을 알 수가 없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400곳도 더 되는 도시들이 그 안에 있다. 그리하여 그 주변 수십(數十)의 소국(小國)들이 그 나라를 따르고 있으며, 도시의 외벽들은 모두 돌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또한 역사제도(驛舍制度)가 확립되어 있고...(중략)... 그리고 소나무와 사이프레스(糸杉)가 자라고 있다>
그는 또 ‘네르바’에 의한 양자제도(養子制度)와 제위계승(帝位継承)에 대해서도 기술(記述)했고(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서 제위를 물려주었다), 로마인들의 신체와 외견(外見) 그리고 또 그곳에서 생산되던 물건 등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 네르바(Nerva, Marcus Cocceius)

로마의 황제(30~98)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여 원로원과 협조하며 선정을 베풀었고,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열었다. 재위 기간은 96~98년.
※ 트라야누스(Trajanus, Marcus Ulpius)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53~117)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으로, 로마제국사상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혔으며, 도로를 건설하여 상업과 교통의 발달을 꾀하였다. 재위 기간은 98~117년.
☆ 로마의 오현제(五賢帝)=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 나라의 왕(王)은 세습(世襲)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가장 자질이 뛰어나다고 생각된 사람을 선택해서 왕위에 올리고 있다...그 나라 사람들은 장신(長身)이며, 아주 균형 잡힌 용모(容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중국인(中國人)과 닮았으며, 그것이 또 바로 그 나라를 대진(大秦=Da Qin=아주 큰 秦)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나라의 토지(土地)에서는 많은 금(金)과 은(銀)이 생산되고 있으며, 그리고 야간에 빛을 발하는 보석을 포함해서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진귀한 보석들도 산출되고 있다...사람들은 다채(多彩)로운 색을 가진 태피스트리(tapestry)나 다마스크를 만들기 위해서 금사(金絲)를 사용해서 자수(刺繡)를 한 옷감들을 재봉한다. 그리고 또한 금(金)으로 도장(塗裝)한 옷감이나 <불에 씻은 옷감(石絲=石綿=아스베스트=아스베스토스(asbestos)>도 만들고 있다>
※ tapestry는,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로, 벽걸이나 가리개 등의 실내장식품으로 사용하며, 일반적으로 날실에는 마사, 씨실에는 양모사나 견사를 쓰는데, 고블랭직이 가장 발달한 것이라고 한다.

<16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Gobelins>
※ 다마스크(damask)= 피륙의 하나이며, 능직이나 수자직 바탕에 금실과 은실 등의 아름다운 실로 무늬를 짜 넣는데, 주로 커튼이나 책상보 등에 쓴다고 함.
※ 석면(石綿)은, 사문석(蛇紋石) 또는 각섬석(角閃石)이 섬유질(纖維質)로 변한 규산염(硅酸鹽) 광물이며, 산성이나 알칼리성에 강하고, 열과 전기가 잘 통하지 않아서 방열재, 방화재, 절연용 재료 등으로 많이 씀.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감영(甘英)은 당시 실크로드의 서쪽 끝에 있었던 로마를 올바르게 파악했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실크로드>
그리고 아래는 그가 남겼던 기술 중 마지막 부분이라고 추정되는 글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경탄해마지 않을 또한 희귀한 종류의 외국물품들은 모두다 그 나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기원전 50년경의 파르티아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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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
허신(許愼)이 <説文解字>를 成立시켰다(완성이라고 표현하지 않음)
<허신(許愼)> 58年?-147年? 또는 30년-124년

후한(後漢)의 유학자였으며, 문학(文學)학자 그리고 최고(最古)의 부수별(部首別) 한자자전(漢字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작자(作者)로 알려져 있다. 성(姓)은 許. 이름은 신(愼). 자(字)는 숙중(叔重). 출신은 여남소릉(汝南召陵=現 河南省 郾城県), 경서(經書)에 밝았고, 가규(賈逵=22賢 중 1인)로부터 고문학(古文學)을 전수(傳受)받아 고문경학(古文經學)의 대가(大家) 중 1인이 되었다.
※ 22현(賢)은, 중국 당나라 정관(貞觀) 21년(647)에 공자묘에 배향 되었던 22명의 현인(賢人)으로, 좌구명, 복자하(卜子夏), 공양고, 곡량적(穀梁赤), 복승(伏勝), 고당생(高堂生), 대성(戴聖), 모장(毛萇), 공안국, 유향(劉向), 정중(鄭衆), 가규(賈逵), 두자춘(杜子春), 마융, 노식(盧植), 정현(鄭玄), 복건(服虔), 하휴(何休), 왕숙, 왕필, 두예, 범녕(范寗)을 이르며,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
그에 마융(馬融)은 항시 그를 존경했다고 하며, 세상에서 <오경무쌍(五經無雙)의 허숙중(許叔重)>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외에 오경이의(五經異義)와 회남홍열간고(淮南鴻烈間詁) 등도 있었지만, 그러나 원래대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중국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편찬했던 자전(字典)으로, 문자학의 기본적인 고전 중 하나이며, 한자 9,353자를 수집하여 540부(部)로 분류했고, 육서(六書)에 따라서 글자의 모양을 분석, 해설하였다. 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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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년 |
채윤(蔡倫)이 종이를 화제(和帝)에게 헌상했다
<채윤(蔡倫)> ? 또는 50년경-121년 또는 121년경

중국 후한(後漢) 때의 환관(宦官)으로, 자(字)는 경중(敬仲). 제지법(製紙法)을 개량해서 실용적인 종이의 제조보급에 막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계양(桂陽=현재의 湖南省 郴州市) 출신으로, 명제(明帝) 영평(永平) 말년(75년)부터 환관으로 궁정에 등용 되었지만, 그러나 그 연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다. 그리고 장제(章帝) 대에는 소황문(小黃門)에 머물러 있었지만, 화제(和帝) 즉위 후였던 89년에는 중상시(中常侍)로 승진했다.
※ 황문(黃門)은 내시(內侍)를 의미하며, 소황문(小黃門)은 내시 중에서도 낮은 직급의 내시를 의미했다. 그리고 또 참고로, 홍수황문(紅袖黃門)은 붉은 소매와 누런 문이란 뜻으로, 궁녀와 환관을 아울러서 이르렀던 말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과거 궁녀의 웃옷에는 붉은 소매가 달려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환관들이 지키던 궁성 안의 작은 문(門)에는 누런 칠을 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거기다 성실한 인품과 학문을 좋아했고 또 무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점 등이 인정되었고, 또한 결벽(潔癖)한 몸가짐 등이 평가되어 97년에는 상방령(尙方令)이란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그것은 또한 검(劍) 등의 무기류나 여러 가지의 물품들을 제작, 감독, 제조기술 확립 등을 임무로 했던 것이었다.
105년, 그는 나무의 껍질과 마(麻)의 쓰레기, 못쓰게 된 어망(魚網) 등의 재료들을 이용해서 실용적인 종이를 제조했고, 그것을 화제(和帝)에게 헌상했다. 그리고 그 제법(製法)은 아주 잘게 부순 재료들을 물에 녹인 후 대나무로 만든 책(簀-格子 板)에다 넣어(담아서) 뜬 후 말리는 공정을 거쳐서 완성시켰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의 독창적인 기술은 아니었고, 당시에는 그와 유사한 수법으로 이미 비단이나 풀솜의 찌꺼기 등을 이용해서 만드는 서(絮)라는 방한(防寒) 등에 이용되었던 염가의 부직포가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그가 만들었던 것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그러했던 기술을 집약해서 개선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당시 <종이(紙)>라는 말은 <서(絮)>와 같은 비단찌꺼기 등으로 만든 것을 의미했으며, 그래서 그가 만들었다는 종이는 <채후지(蔡侯紙)>라는 존칭으로 불리며 그것과 구별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그는 화제(和帝)로부터 신뢰가 두꺼워져서 유악(帷幄=帷幕=전략회의 등 비밀스러운 일을 의논하던 곳=국가계획을 입안하는 중요한 기관)에도 참가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도 자주 화제(和帝)에게 간언도 했다. 그리고 또 유자(儒者) 유진(劉珍) 등의 고전(古典) 교정 작업도 감독하는 등, 유능한 문신(文臣)으로서의 능력도 발휘했다.
하지만 105년에 화제(和帝)가 몰(沒)했고, 그 뒤를 이었던 어린 상제(殤帝)도 1년 만에 죽어버리자 당시의 정치를 장악했던 등태후(鄧太后)는 장제(章帝)의 아들이었던 황태자를 폐하고 청하효왕(淸河孝王)이 되었던 유경(劉慶)의 당시 13세의 아들이었던 유호(劉祜)를 안제(安帝)에 옹립시켰다. 그리고는 섭정(攝政)을 하며 외척(外戚)과 환관(宦官)들을 병용(倂用)해서 실권을 잡았다. 그리하여 그 역시도 그 시기였던 114년에는 용정후(龍亭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등태후(鄧太后)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 121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또 안제(安帝)는 내시들의 협력을 받아서 등 씨(鄧氏) 일족의 숙청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또 그렇게 계획이 착실하게 진행되던 중, 안제(安帝)는 자신의 부(父)였던 유경(劉慶)이 황태자를 폐(廢)했던 사건을 조사시켰는데, 그러자 조모(祖母)였던 송귀인(宋貴人)이 무고(巫蠱-巫術로써 남을 저주함)를 행했다는 중상모략을 받아서 자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또 당시(82년) 그 송귀인(宋貴人)의 주저(呪詛)가 사실이었다고 보고를 했던 자가 바로 그 소황문(小黃門)이었던 채윤(蔡倫)이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러자 안제(安帝)는 그에게 정위(廷尉=형벌담당장관)에 출두하라고 칙명을 내렸다. 하지만 또 당시,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사대부(士大夫)에게는 예(禮)를 지켜서 형벌에까지는 미치지 않게 하는 관례가 있었고(禮記), 그래서 그 칙명을 받들었던 사자는 독약을 함께 가지고 그에게로 찾아갔다. 그러자 그는 공순(恭順)했고, 목욕재계(沐浴齋戒) 후 그것을 마시고 죽었다. 그리하여 그도 결국 비운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러나 그가 사망했던 연월(年月)에 관해서는 제설(諸說)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등태후(鄧太后)가 사망했던 121년 이후의 일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현재 호남성(湖南省) 계양(桂陽) 교외에는 그의 묘라고 전해지는 장소가 있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1950년대에 그 현(縣)에서 수복(修復)작업을 하던 중 그 무덤 안에서 맷돌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그가 종이를 만들었을 때 사용했던 것이라는 억측도 난무했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은 지금까지도 진위가 불명하다.
아무튼, 그는 종래부터 제지법의 발명자였다고 평가되고 있었지만, 그러나 전한(前漢) 대(代)의 유적에서 식물섬유로 만든 종이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로서는 그가 이미 상용(常用)하고 있던 그 기술을 집약해서 통합했던 것일 뿐이었고, 그래서 또 그는 실용적인 종이의 제조법을 정립했던 개량자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전한(前漢) 대의 종이란 청동제의 거울을 포장했던 포장지였을 뿐이었으며, 문자를 기록했던 종이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계속해서 개량되었고, 그러자 그 후, 그의 제자였던 좌백(左伯)이란 사람이 좌백지(左伯紙)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종이는 개량과 보급을 거듭하며 실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윽고는 이슬람을 거쳐서 서양에까지 전파되어 서양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하여 또, 그는 중국에서는 <종이의 수호신>으로까지 숭배되었고, 이후 학자였던 '마이클 할트(Michael H. Hart)'란 사람은 <역사를 만든(창조한) 100인>에서 그를 일곱 번째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할트'는 그 제1위로 '마호메트'를 그리고 제2위는 '뉴턴'을 그리고 제3위는 '예수'로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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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년 |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다시 폐지되었고, 한(漢)과 서역(西域)의 교류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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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년 |
반초(班超)의 아들 반용(班勇)이 서역장사(西域長史)가 되었고 선(鄯)과 고창(高昌)이 한(漢)에 복속(服屬)했다
<고창(高昌)>
5~7세기에 동(東)투르키스탄의 투루판분지에 있던 나라로, 전한(前漢) 시대에 이주했던 한인(漢人)의 자손들이 투르크계 토착민을 제압하고 세웠던 식민지 왕조였지만, 640년에 중국 당나라에 멸망하였다.

<高昌 古城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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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년 |
파르티아 출신의 안세고(安世高)가 한(漢)의 낙양(洛陽)으로 와서 불전(佛典)의 번역에 종사했다
<안세고(安世高)> 生沒未詳 또는 ?-?170년 정도
후한(後漢) 대에 서역(西域)에서 왔던 역경승(譯經僧)으로, 자(字)는 세고(世高)였다. 그리고 원래 그는 안식국(安息國=파르티아)의 태자(太子)였지만, 왕위를 백부(伯父)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출가수도에 뜻을 두어서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 후, 환제(桓帝) 대 건화(建和) 2년(148년)에 수도 낙양(뤄양=洛陽)으로 와서 입궐, 알현했고, 그 후 20년 동안 역경(譯經)을 행해서 30부(部)에 달하는 경전을 한역(漢譯)했다. 그러자 후세에 승(僧) 우(祐)는 그를 평하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고 한다.
<그는 폭넓게 경전을 공부했으며, 그 중에서도 아비달마(阿毘達磨)에 정통(精通)했다. 그리고 또 선(禪)에 관한 경전도 암송했으며, 그 강요(綱要)도 거의 다 이해하고 있었다>(出三藏記集 卷 13)
※ 아비달마(阿毘達磨)는, 불전(佛典) 중에 경전을 해설하거나 주석한 논(論)을 이르는 말로, 교법에 관한 연구라는 의미임.
그리고 다음은 그의 주요한 한역(漢譯) 경전으로, 간단히 소개만 합니다.
安般守意経/ 陰持入経/ 大道地経/ 人本欲生経/ 四諦経/ 八正道経/ 転法輪経/ 阿毘曇五味経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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