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여포(呂布)> 1

 ?- 건안(建安) 3年(198年).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군웅(群雄). 자(字)는 봉선(奉先).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현재의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內> 출생. 빼어난 무용(武勇)을 자랑했고, 삼국지(三國志) 관계의 이야기 등에서는 최강의 무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그는 그 용맹(勇猛)함으로 인해서 당시, 하내(河內)에서 병주(幷州) 자사(刺史)로 주둔하고 있었던 기도위(騎都尉) 정원(丁原) 휘하에서 주부(主簿)를 지내며 중용(重用)되었다. 그러다 중평(中平) 6년(189년)에 영제(靈帝)가 죽자 나라에 혼란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그 한중간에 그는 정원(丁原)과 함께 수도였던 낙양(洛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또 당시 중앙 권력을 장악하려던 동탁(董卓)과 충돌했지만, 그러나 또 그 후에는 오히려 동탁(董卓)의 꾐에 넘어가서 정원(丁原)을 죽이고 동탁(董卓)에게 붙었다.

 그 후, 그는 동탁(董卓)의 양자가 되었고, 이어서 정원(丁原)의 자리였던 기도위(騎都尉)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 얼마 후에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했으며, 이어서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동탁(董卓)의 방약무인(傍若無人)했던 전횡을 보고서도 그 여포(呂布) 때문에 제대로 말도 하질 못했다.

 그리고 여포(呂布)는 원래부터 완력(腕力)이 뛰어났기 때문에, 궁술이나 마술(馬術)에도 뛰어나서, 전한(前漢) 때 활약했던 이광(李廣)에 비견되며 비장(飛將)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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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소개 <이광(李廣-?-기원전 119년)>

 중국 전한(前漢)의 무장이었으며,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무제(武帝)를 섬겼다. 그리고 무용(武勇)이 뛰어났지만 전공(戰功)을 인정받지 못하고 분사(憤死)했던 비운의 장군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진(秦)의 명장(名將)이었던 이신(李信)의 자손이었으며, 종제(從弟)로는 승상을 지냈던 이채(李蔡)가 있었고, 손(孫)에 이능(李陵)이 있었다. 그리고 본적지(本籍地)는 농서군(隴西郡) 성기현(成紀縣=현재의 甘肅省 天水市 泰安縣).

 그는 기원전 166년, 흉노정벌에 공이 있어 낭(郎)이 되었고, 문제(文帝)의 곁에서 기사(騎士)를 지냈다. 그러던 중에 수렵(狩獵)을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맹수와 싸워서 죽이는 무용(武勇)을 보였기 때문에, 문제(文帝)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만약 네가 고조(高祖=劉邦)시대에 살았더라면, 1만호(萬戶)의 제후에 봉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후, 그는 경제(景帝) 시대에 효기도위(驍騎都尉)에 임명되었고, 주아부(周亞夫) 휘하에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을 진압하는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단, 양왕(梁王) 무(武)의 장군에 임명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漢)으로부터의 은상(恩賞)은 없었다.

 그 후, 그는 상곡(上谷)의 태수(太守)와 상군(上郡)의 태수(太守)를 역임했으며, 그리고 또 그때 10배의 흉노군(匈奴軍)에 포위당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기치를 발휘해서 오히려 느긋하게 행동하면서 마치 자신의 배후에 복병을 숨겨둔 것처럼 처신했다. 그러자 흉노군(匈奴軍)은 더 이상 그를 쫓지 않고 돌아갔다.

 그 후에 또 그는 농서(隴西)와 북지(北地) 그리고 응문(應門), 운중(雲中)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그러나 그 모든 지역은 北邊이었으며 匈奴에 가까웠다) 그러자 당시, 흉노(匈奴)는 그를 몹시 두려워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 후에 그와 같이 무용(武勇)이 뛰어난 자나 나타나면 그를 모방해서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다음 무제(武帝) 때, 그를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위위(衛尉)로 승진했다. 그리고 그 후, 무제(武帝)가 마읍(馬邑)에서 주둔하고 있던 흉노(匈奴)를 꾀어내서 공격하려 했을 때, 그는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종군했지만, 그러나 공적은 없었다.

 기원전 129년, 그는 흉노(匈奴)와 싸워서 패했고,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탈출해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지만, 그러나 죄를 추궁 당하고는 평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또 우북평(右北平)의 태수(太守)가 되었고, 이어서 낭중령(郎中令)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흉노(匈奴)와 자주 싸웠지만, 전과(戰果)를 올리지는 못했고, 기원전 119년 흉노(匈奴) 공격 때는 고령이라는 이유로 열외(列外)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그는 그에 대해서 맹렬한 항의를 했고, 그 결과 다시 복귀되었다. 그러나 또 그는 전(前) 장군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무제(武帝)의 밀명(密命)을 받았던 대장군 위청(衛靑)에 의해서 후방군에 배치되었다. 그러자 또 그는 그 결정에 반발해서 단독으로 다른 방면으로 진군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서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전장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자 또 위청(衛靑)이 그에 대해서 보고서를 올리기 위해 이광(李廣)의 부하들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이광(李廣)이 갑자기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소리쳤다고 한다. <나는 성인(成人)이 된 이후, 흉노(匈奴)와 크고 작게 70여 차례나 싸워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위청(衛靑) 대장군을 따라서 그 흉노(匈奴)와 싸울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는데, 그런데 대장군이 나를 후방으로 돌려버리는 차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말았다. 아! 그러니 이것이 바로 천명(天命)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해버렸다. 그러자 또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그의 부하들은 물론, 모든 민중(民衆)들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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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삼국지(三國志)의 주석(注釋)에 해당되는 조만전(曹瞞傳-自體는 散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애마(愛馬)였던 적토(赤免)와 함께 <사람 중에는 여포(呂布)가 있고, 말(馬) 중에는 적토(赤免)가 있다>라고 송찬(頌讚)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반면(反面)으로, 그는 지모(智謀)가 결핍되어 적의 꾐에 잘 넘어가는 성격이었으며, 절조(節操)가 없고, 물욕이 강했던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후, 그는 왕윤(王允)의 꼬임에 넘어가서 동탁(董卓)을 살해했고, 그로써 동탁(董卓)의 공포정치도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설(諸說)이 있으며(董卓 참조), 그러자 또 그는 그 후에, 동탁(董卓)의 고향이었던 양주(凉州) 출신자들을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증오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양주(凉州) 사람들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또 원인 중 하나가 되어서, 동탁(董卓)의 수하였던 곽사(郭汜)와 이각(李傕) 등, 양주(凉州) 세력들이 장안(長安)을 습격했다. 그러자 또 여포(呂布)는 그것을 막기 위해 응전(應戰)했지만 막지 못했고, 그 결과로 그들에게 장안(長安)을 빼앗겼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삼국지(三國志)의 주석(注釋) 영웅기(英雄記)에 의하면, 그 공방전(攻防戰) 때 여포(呂布)는 곽사(郭汜)에게 일대일 대결을 신청해서 그를 부상시켰지만, 하지만 곽사(郭汜)는 자신의 편에 의해서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여포(呂布)는 수백(數百) 기(騎)를 이끌고 무관(武關)으로 도망쳤다.

 그 후에 그는 원술(袁術)에게 의지하려 했지만 거부되었다. 그러자 그는 장연(張燕) 등 흑산적(黑山賊)과 싸우는 것으로 하북(河北)의 원소(袁紹)를 도왔다. 그러자 그 후에 그의 군은 더욱 강해졌고, 이어서 정강(精强)을 자랑했던 흑산적(黑山賊)도 격파했다.

 하지만 그 후, 여포(呂布)는 원소(袁紹)에게 병력의 보충을 요구했다거나, 병력을 약탈했다거나 해서 원소(袁紹)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것을 알게 된 그는 원소(袁紹)에게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또 원소(袁紹)는 그에게 자객을 보냈지만 실패했고, 여포(呂布)는 끝내 원소(袁紹)의 손아귀에서 탈출했다.

 그 후, 그는 중원(中原)의 유랑객(流浪客) 신세가 되었고, 그러다가 진류(陳留)를 통과해서 당시, 조조(曹操)의 친구였고, 신뢰도 두꺼웠던 진류(陳留) 태수(太守) 장막(張邈)에게로 가서 환대를 받았다. 그러자 원소(袁紹)는 그것을 몹시 분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결국 그는 하내(河內)의 장양(張楊)에게로 가서
의지했다.

 그런데 그 이전(以前), 원소(袁紹)는 장막(張邈)과 말다툼을 벌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원소(袁紹)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조조(曹操)에게 장막(張邈)을 살해할 것을 사주(使嗾)했다. 그러자 조조(曹操)는 그때 원소(袁紹)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만 마음을 접어주길 원하오. 그리고 또 지금은 같은 편끼리 서로 싸울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오!>

 그러자 그 후, 장막(張邈)은 조조(曹操)에게 은의(恩義)를 가지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장막(張邈)은 당시의 실력자였던 원소(袁紹)에게 미움을 많이 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원소(袁紹)가 조조(曹操)에게 시켜서 자신을 공격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싸이게 되었다. 거기다 또 장막(張邈)은 조조(曹操)의 부하였으면서도 또한 그 조조(曹操)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진궁(陣宮)에게 설득 당해서 여포(呂布)를 맹주로 맞아 들였던 한편, 그를 연주(兗州) 자사(刺史)로 세우고는 조조(曹操)에게 대항하게 된다. 그러자 또 그 두 진영은 황해(蝗害=蝗災=메뚜깃과의 곤충인 풀무치 떼가 날아와서 농작물을 남김없이 먹어버리는 큰 재해)에 시달리면서도 1년 이상 격렬하게 싸웠고, 그러던 중 또 여포 군(呂布軍)이 조조(曹操)에게 큰 상처를 입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결국 여포 군(呂布軍)은 조조 군(曹操軍)에게 졌다. 그러자 여포(呂布)와 진궁(陣宮)은 당시 서주(徐州)에서 주둔하고 있던 유비(劉備)를 찾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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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劉備)> 1

 161년-223년 6월 10일. 후한(後漢) 말에서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촉(蜀漢)의 초대황제. 황건(黄巾)의 난(亂) 때((靈帝) 공적을 올렸으나 그 후로는 각지로 전전했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을 만나면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수용(受容)했고, 촉(蜀)으로 가서 세력을 키웠다. 그 후, 후한(後漢)이 멸망하자 황제에 즉위했고,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자(字)는 현덕(玄德). 시호(諡號)는 소열황제(昭烈皇帝). 재위(在位)는 221-223년. 부(父)는 유홍(劉弘).



 


 명대(明代)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는, 탁군(涿郡) 탁현(涿縣=현재의 河北省 保定市 涿州) 출신이었고, 전한(前漢)의 중산정왕 유승(中山靖王 劉勝)의 말예(末裔)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涿州 (市)>

 

 ※ 유승(劉勝-?-기원전 113년)은 전한(前漢)의 황족이었으며, 제후왕(諸侯王)이었고, 제6대 황제 경제(景帝)의 제8자(子)였다. 생모는 가부인(賈夫人)이었고, 동모형(同母兄)이었던 조(趙)의 경숙왕(敬肅王) 유팽조(劉彭祖)가 있었다. 시호(諡號)는 정왕(靖王).

 아무튼, 유비(劉備)는 황건(黃巾)의 난(亂) 때,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과 함께 의용군을 결성했고, 그 진압에 공(功)을 올렸다. 그러자 일단 공직(公職)에는 올랐지만, 그러나 곧 그 직을 버리고 유랑객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각지를 전전하다가 공손찬(公孫瓚), 원소(袁紹) 등의 휘하에서 싸웠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서주(徐州) 자사(刺史), 예주(豫州) 목(牧) 등의 지위를 얻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일정한 본거지를 정하지는 못했고, 그 후에 관도(官渡)의 싸움에서는 원소군(袁紹軍)에 참가했으며, 이어서 조조(曹操)에게 군사들을 맡기고는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그리고 또 그러던 중에 그는 제갈량(諸葛亮)을 만났으며, 그에게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듣고 수용(受容)했다. 그리고 또 유표(劉表) 사후(死後), 그는 손권(孫權)과 연합해서 조조(曹操)에 대항했으며, 그 후에는 또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에 근거해서 촉(蜀)을 나라로 정했다. 그리고는 또 자칭 한중왕(漢中王)이 되어서는 삼국(三國)의 구도를 완성했고, 그 후에는 헌제(獻帝)였던 조비(曹丕)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았으며, 이어서 부하들의 추대로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참고: 그리고 그때, 유비(劉備)는 황제(獻帝가 살해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뒤를 계승한다는 형식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때, 실제로는 헌제(獻帝)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에 그는 손권(孫權)을 치기 위해서 친정(親征)까지 감행했지만, 그러나 이능(夷陵)의 싸움에서 육손(陸遜)에게 대패하고는 백제성(白帝城)으로 도망간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향년(享年) 63세였고, 후계자는 적자(嫡子)였던 유선(劉禪)으로 결정했으며, 제갈량(諸葛亮)에게는 유선(劉禪)의 보좌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시호(諡號)는 소열황제(昭烈皇帝)로 정해졌으며, 그리고 그 소열(昭烈)에서 소(昭)는 빛(光)과 통하는 것이고, 또 열(烈)은 무(武)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은 후한(後漢)을 부흥(復興)시켜서 촉한(蜀漢)을 일으켰던 그의 사적(事績)을 찬양했던 것이었다고 하며, 그것은 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전한(前漢)을 부흥시켰던 것을 의식해서 지어졌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호칭(呼稱)에 대해서도 조금 설명하고 넘어가면, 삼국지(三國志-正史)에서는 그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고 하지 않고 <선주(先主)>라고 표현했으며, <촉서(蜀書)>의 유비전(劉備傳)에서도 그를 선주공(先主公)으로, 그리고 유선(劉禪)을 후주(後主)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면, 그것은 또 당시 삼국지(三國志)를 썼던 진수(陳壽)의 입장이 위(魏)만을 정통(正統)으로 보았었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또, 그의 계보(系譜)에 대해서도 조금 살펴보면, 그는 후한(後漢) 경제(景帝)의 8자(子)였던 중산정왕 유승(中山靖王 劉勝)의 서자(庶子) 유정(劉貞)의 말예(末裔=後裔)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 유승(劉勝)은 자(字)와 손(孫)을 포함해서 120명 이상의 자손을 남겼는데, 그래서 그 중의 한사람이었던 유비(劉備)의 조(祖)라고 생각되는 유정(劉貞)은 기원전 117년에 탁군(涿郡) 탁현(涿縣)의 열후(列侯)로서 육성정후(陸城亭侯)란 작위(爵位)을 하사 받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 한서(漢書)의 왕자후표(王子侯表)에 의하면, 육성후(陸城侯)라고 되어 있고, 정후(亭侯)는 후한(後漢)의 작위 제도였다. 그러므로 전한(前漢) 때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왕자후표(王子侯表)에서 유정(劉貞)은 127년에 후(侯)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112년 연초(年初-正月)에 당시, 열후(列侯)들에게만 부과 되었던 상납금(上納金=酎金)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후국(侯國)에서 제외 되었고, 그 결과 사서(史書)에서도 계보(系譜)가 끊기게 되었다.

 참고: 주금(酎金)은 전한(前漢) 때, 조정(朝廷)에서 제사(祭祀)를 올렸을 때 갹출(醵出=拠出)했던 금(金)을 말했다. 그리고 한서(漢書)의 무제기(武帝紀)의 안사고(顔師古) 등의 주(注)에 의하면, 주(酎)는 순도 높은 술이며, 그리고 한(漢)에서는 8월에 그 술을 종묘(宗廟)에 공양했던 의식이 있었는데, 그러면 또 그때 열후(列侯)들은 봉국(封國)의 호수(戶數)에 상당하는 양의 황금을 황제에게 헌상해야만 했다고 한다.(하략)

 그래서 선주전(先主傳) 주(注) 인용 전략(典略)에서는, 유비(劉備)를 임읍후(臨邑侯)의 서류(庶流-서자계통)였다고 기록했다.

 참고: 그런데 후한서(後漢書)에는 3명의 임읍후(臨邑侯)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또 살펴보면, 그 중의 한 사람은 건무(建武)2년(서력26년)에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楊)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유양(劉讓)이었고, 그리고 또 한사람은 건무(建武) 30년(54년)에 임읍후(臨邑侯)에 봉해졌던 유복(劉復)이었으며, 그리고 또 나머지 한사람은 그 유복(劉復)의 자(子) 유도흥(劉騊興)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또 유양(劉讓)과 유양(劉楊)은 형제 사이였고, 유양(劉楊)은 또 후한(後漢) 경제(景帝)의 7대손(代孫)이었다. 그리고 유복(劉復)은 북해정왕(北海靖王) 유흥(劉興)의 아들이었고, 유흥(劉興)은 또 광무제(光武帝)의 형이었던 제무왕(齊武王) 유연(劉縯-字는 伯升)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또 다음은 참고로, 유비(劉備)의 계보(系譜)에 대한 것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景帝-劉勝-劉貞-劉昴-劉禄-劉恋-劉英-劉健-劉哀-劉憲-劉舒-劉誼-劉必-劉達-劉不疑-劉恵-劉雄-劉弘-劉備 (三国志演義)

 景帝-常山憲王 劉舜-真定頃王 劉平-真定烈王 劉偃-真定孝王 劉由-真定安王 劉雍-真定共王 劉普-臨邑侯 劉譲(典略)

 景帝-長沙定王 劉発-舂陵節侯 劉買-鬱林太守 劉外-鉅鹿都尉 劉回-南頓県令 劉欽-斉武王 劉縯-北海靖王 劉興-臨邑侯 劉復-臨邑侯 劉騊駼

 그리고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과 그의 아들 육성정후(陸城亭侯) 유정(劉貞) 이후의 계보로,(다음은 그 아들을 - 로 표시함) 유정(劉貞)-유묘(劉昴)는 패후(沛侯)-유록(劉祿)은 장후(漳侯)-유연(劉戀)은 기수후(沂水侯)-유영(劉英)은 흠양후(欽陽侯)에 봉해졌고, 유정(劉貞) 이후 수대(數代)는 열후(列侯)의 작록(爵祿)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가문이 쇠퇴해서 유비(劉備)의 부모 대(代)에 이르렀을 때는 겨우 신발이나, 돗자리를 팔아가며 생계를 이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또 유비(劉備) 대(代)에 이르자 헌제(獻帝)를 알현했으며, 이어서 한(漢)의 종친(宗親)으로 인정 받았고, 그리고는 좌장군(左將軍) 선성정후(宜城亭侯)에까지 봉해졌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또 그 후로는 가운(家運)이 상승했으며, 이어서 후한(後漢)이 멸하자 촉한(蜀漢)의 황제에 등극했다고도 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창작이다. 그리고 또, 그의 풍모(風貌)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 보자면, 그는 키가 7척5촌(七尺五寸=172.5cm)이었고, 팔이 무릎에까지 닿았으며, 귀도 너무 커서 스스로도 그 귀를 볼 수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 와타나베 세이이치(渡辺精一)의 <三国志人物鑑定辞典>에서는 <무릎까지 늘어지는 긴 손>은 <손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는 뜻으로, 그것은 곧 다재(多才)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고, 거기다 <자신의 귀를 볼 수도 있는 눈>은 <세세한 것까지도 잘 볼 수 있다>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그의 신체적인 묘사는 곧 그가 <총명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자기 주관이다.

 그리고 또, 현재 남아 있는 유비(劉備)의 초상화에는 훌륭한 수염을 그려두고 있지만(위의 그림 참조), 그러나 촉서(蜀書)의 주군전(周羣傳)에서는 <유비(劉備)가 장유(張裕)에게 노탁군(潞涿君=수염이 엷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라는 따짐을 받았다>라고 했다.

 참고: 노(潞)는 노(露=드러남, 露出)와 동음(同音)이고, 탁(涿)은 탁(啄=입, 口)과 동음(同音)이므로, 그래서 풀이를 하면, 입가가 훤한 사람, 또는 수염이 없는 또는 빈약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유비(劉備)는 그때의 일에 한(恨)을 품고는 자신이 황제에 즉위한 후, 그 죄를 물어서 장유(張裕)를 처형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사연에 대한 참고로, 장유(張裕)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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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유<張裕-?-221년. 장무(章武) 원년>

 후한(後漢) 말기부터 삼국시대의 학자, 정치가. 촉(蜀)에 종사(從事)했으며, 자(字)는 남화(南和). 촉군(蜀郡) 출신. 삼국지의 촉지(蜀志)에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천공(天空)의 자연현상(自然現象)을 이용해서 예언을 하는 술법(術法)에 뛰어났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그의 재능으로 말하자면, 양후(楊厚)에게서 도식(圖識)의 술(術)을 배웠다던 주군(周羣)보다도 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무명(無名)의 청년이었던 등지(鄧芝)의 관상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하며 <너는 70세가 넘으면 대장군이 되고, 제후에 봉해질 것이다> 그러자 그 후,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고, 등지(鄧芝)는 70세가 넘은 고령에 차기장군(車騎將軍)과 강주(江州) 도독(都督)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유장(劉璋)의 휘하에서 종사(從事-일종의 副官)를 지내고 있었을 때, 문제의 유비(劉備)가 유장(劉璋)과 의논할 것이 있다며 찾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동석(同席) 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유비(劉備)가 장유(張裕)의 수염이 풍성한 것을 보고 몇 마디 했다. 그러자 장유(張裕)는 그것이 기분 나빠서 유비(劉備)에게 비꼬듯이 노탁군(潞涿君)이라고 쏘아 붙였다.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그에게 한(恨)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이하, 후술 또는 생략)

 

 

 

 

 

 <유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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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손견(孫堅)> 2

 155년 또는 156년-191년 또는 192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자(字)는 문대(文臺). 오군부춘현(吳郡富春縣-현재의 浙江省 杭州市 富陽縣) 출신. 삼국시대에 성립되었던 오(吳)의 황제 손권(孫權)의 부(父). 묘호(廟號)는 시조(始祖). 시(諡)는 무열황제(武烈皇帝). 가계(家系)는 손 씨(孫氏). 손견(孫堅)은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병가(兵家)였던 손무(孫武)의 자손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물론, 그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등에 대해서는 현재 불명(不明)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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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년, 승진과 동시에 그는 양주(凉州)에서 변장(邊章)과 한수(韓遂)가 일으켰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진했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는 이미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동탁(董卓)이 출진해 있었는데, 하지만 동탁(董卓)이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대신으로 사공(司空-三公의 다음, 六卿의 하나 位)이었던 장온(張溫)이 그 지휘권을 넘겨 받았고, 그러자 손견(孫堅)은 그 장온(張溫)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동탁(董卓)이 몇 번에 걸쳐서 군법을 어기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장온(張溫)에게 동탁(董卓)을 처형할 것을 진언했다. 하지만 장온(張溫)은 나중에 동탁(董卓)의 힘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또 그 후, 동탁(董卓)은 그 일을 잊지 않고 두고두고 장온(張溫)과 손견(孫堅)을 증오했다.

 아무튼 또 그 후, 후한(後漢)의 대군이 몰려 온다는 첩보를 받았던 변장(邊章)과 한수(韓遂) 등은 관군에 항복을 했고, 그러자 또 그는 의랑(議郞)이 되었다.

 참고: 의랑(議郞)은 郎中令(光錄勲)의 属官으로 顧問과 應對 등을 담당했다.

 그 후에 또 손견(孫堅)은 장사(長沙) 태수(太守)에 임명되었음과 동시에, 형주(荊州) 남부에서 일어났던 구성(區星)의 난 진압을 명받았다. 그러자 그는 다양한 계략을 써서 그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그 구성(區星)을 원조했던 영능(零陵)과 계양(桂陽) 2군(郡)까지 진격해서 나머지 잔당들도 전부 진압했다.

 참고: <呉書>의 정보전(程普傳)에 의하면, 손가삼대(孫家三代)에 종속했던 손군단(孫軍團)의 중핵(中核)을 담당했던 정보(程普)는 그 황건적(黃巾賊) 토벌 때, 손견(孫堅)의 군단에 참가했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는 그 공으로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각지의 인재들을 손에 넣게 된 손견(孫堅)은 전장을 누비면서 실전 경험을 충분히 쌓았고, 그리하여 점차 군벌화(軍閥化) 되어갔다.

 참고: 위의 오정후(烏程侯)는 조정후(鳥程侯)와 혼용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참고하시며, 그리고 <오서(吳書)>의 황개전(黃蓋傳)에 따르면, 그 황개(黃蓋)는 바로 그 시점에서 손견(孫堅)의 부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즈음, 낙양(洛陽)에서는 동탁(董卓)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동탁(董卓)은 이미 전술(前述)한 것 외에도 장온(張溫)을 점(占)의 결과를 보고 살해하는 횡포까지도 저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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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장온(張溫)> ?-191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자(字)는 백신(伯愼). 후한(後漢)의 태위(太尉)를 지냈고, 호향후(互鄕侯)에 봉해졌다. 남양군(南陽郡) 양현(穰縣) 출신이었으며, 청(淸)의 왕선겸(王先謙)이 지은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 의하면, 그의 처(妻)는 채모(蔡瑁)의 백모(伯母=蔡諷의 長姉)였다고 한다.

 참고: <後漢書>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송나라의 범엽(范曄)이 펴냈던 후한의 정사(正史)이며,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 중 하나이다. 그리고 또 그것은 기전체로 쓴 것이며, 본기(本紀) 10권과 열전(列傳) 80권 그리고 지(志) 30권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양나라 때 유소(劉昭)가 그것을 보충하였고, 지(志)는 또 진나라의 사마표(司馬彪)가 지었다고 한다. 120권. 그리고 또 왕선겸(王先謙=왕-셴첸=Wang Xianqian)은 중국 청나라 말기의 학자(1842~1917)였으며, 자(字)는 이우(益吾), 호(號)는 쿠이위안(葵園老人)이었고, 학관(學官)을 지냈으며, 저서에 <속황청경해(續皇淸經解)>와 <십조동화록(十朝東華錄)> 그리고 <순자집해(荀子集解)>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채모(蔡瑁)는 생몰불명(生沒不明)이며,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이었고, 채풍(蔡諷)의 아들이었다. 자(字)는 덕규(德珪-襄陽記). 유표(劉表)의 처(妻)였던 채 씨(蔡氏)는 그의 누나(姉)였다.

 아무튼, 그는 조조(曹操)의 유조부(猶祖父-혈연관계는 아니었다는 의미임)였던 조등(曹騰)의 추천을 받아서 등용되었고, 그 후에 상서랑(尙書郞)에서부터 사공(司空), 태위(太尉)까지 지냈다. 그리고 185년, 그는 관서지방에서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차기장군(車騎將軍=都督이며, 位는 三公 다음. 그리고 驃騎장군에 버금가는 직책이었다. 그 예로는 張飛, 張翼 등)에 임명되어 손견(孫堅), 도겸(陶謙) 등을 참모로 세웠고, 파로장군(破虜將軍) 동탁(董卓)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까 그들이 출전식(出戰式)을 가졌을 때, 영제(靈帝)가 그것을 열병(閱兵)했는데, 그러나 그는 군례(軍禮)를 따라서 배례(拜禮)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것은 고전적인 군례(軍禮)에서는 일단 한번 장군(將軍)이 되면, 황제에게 배명(拜命이라는 儀禮)할 필요가 없다는 관례(慣例)를 따랐던 때문으로 보였지만, 하지만 또 그 당시에는 실제로 <불배(不拝)>를 했던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 했으므로, 그래서 또 그것으로 보아서 그는 그런 용감한 일면도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하지만 또 그 이면(裏面)으로는, 당시 동격(同格)의 동탁(董卓)이 <반란을 진압할 필요 없이 내시들만 제거해 버리면 반란은 곧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했던 말을 듣고, 그는 몹시 두려워 하며 동탁(董卓)을 만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실제로, 반란 진압이 계속되고 있던 도중에 동탁(董卓)이 몇 번이나 군령(軍令)을 어겼는데, 그러자 또 손견(孫堅)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런 동탁(董卓)을 처형할 것을 진언했다지만, 그러나 그는 당시 실력자였던 동탁(董卓)이 무서워서 그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도겸(陶謙)이 그런 그를 비난했다고는 했지만, 아무튼 그 이후로 동탁(董卓)은 장온(張溫)과 손견(孫堅)을 증오했고, 그래서 또 언젠가는 꼭 그들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맹세까지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는 많은 공적을 세웠지만, 그러나 당시 세력을 가졌던 환관들과 얽혔고, 그로 인해서 많은 비방도 들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삼공(三公)은 원래 도(首都)에서 모든 정무를 봤지만, 그러나 후한(後漢) 말 이후에는 재외(在外=都外)에서도 태위(太尉)가 나오게 되었고, 그리고 또 그 시작이 바로 장온(張溫)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 후에 위위(衛尉)로 전임했다.

 참고: 위위(衛尉)는 九卿이며, 宮門의 衛士와 宮中의 巡察을 맡았다. 그리고 宮城과 宮門의 護衛와 監察도 담당했으며, 그 예로는 또 程昱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1년 겨울 10월에, 양주(凉州) 원정 이후 서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어있었던 동탁(董卓)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래서 또 그 연유를 잠시 말해보면, 어느 때에 태사(太史-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그래서 太史令이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음)가 점을 쳐서 <대신(大臣) 중에 형사(刑死-처형되어 죽음)를 당할 사람이 있다>라고 했고, 거기다 또 그 얼마 후에 나라에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그러자 동탁(董卓)은 그것을 문제 삼아서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온(張溫)을 원술(袁術)과 내통했다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무고(誣告)하게 했다. 그래서 장온(張溫)은 태형(笞刑)을 받고 죽었는데,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를 너무 깊이 증오했던 나머지 그의 목을 다시 베었고, 그리고는 또 술좌석에서 그의 머리를 공공연하게 전시해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손견(孫堅)이 유표(劉表)와 싸우다가 전사했던 일을 기뻐했던 동탁(董卓)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연(酒宴)을 열었고, 그러자 또 그때, 그 자리에 참석을 했던 장온(張溫)을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에게 시켜서 목을 베게 했으며,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장온(張溫)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서 주연장(酒宴場)에 전시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자 또 그 자리에 참석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서 소리를 질렀고, 그리고 또 그 중에는 들었던 술잔까지 떨어뜨렸다거나, 쥐고 있던 젓가락을 손에서 놓쳤다든지,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먹었던 것을 토하는 광경까지 벌어졌다지만, 그러나 정작 동탁(董卓) 자신은 그런 것을 보고서도 오히려 더욱 통쾌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술과 음식까지 들었다고 묘사함으로 해서, 그의 잔인성을 최고조로 강조하는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그리고 또, 장온(張溫)은 왕윤(王允)과는 오랜 친구사이였다고 설정했으며, 그래서 또 그 자리에 함께 참석을 했던 왕윤(王允)이 친구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하고는 미녀연환계(美女連環計)를 써서 동탁(董卓) 암살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구성했다.

 일화(逸話)

 후한서(後漢書)의 일민전(逸民傳)에서는 환제(桓帝)의 치세(治世)에 상서시랑(尙書侍郞)을 지냈던 장온(張溫)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환제(桓帝)의 재위(在位)는 146년에서 166년까지였기 때문에, 그래서 일민전(逸民傳)에서는 연희(延熹) 연간(158년부터 166년)에 경능(竟陵)으로 행차를 나갔을 때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인물이 동일(同一)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불명(不明)하다.

 그리고 또 그 환제(桓帝)가 경능(竟陵)으로 행행(行幸-임금이 대궐 밖으로 행차함)해서 한수(漢水)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러자 그곳의 사람들이 그 진기한 황제의 행차를 보고자 모두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노인만은 묵묵히 그냥 밭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또 그것이 신기했던 남양(南陽) 출신의 상서시랑(尙書侍郞) 장온(張溫)이 그 노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구경을 한다고 난리인데, 어째서 노인께서는 계속해서 일만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장온(張溫)은 마차에서 내려서 그 노인에게 꼭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그 노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다만 백성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까다로운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한 가지 질문할 것은 있습니다>

 그러자 장온(張溫)이 그것이 무슨 질문인지 말을 보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그 노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천하(天下)가 어지럽기 때문에 천자(天子)를 세운 것입니까? 아니면 천하(天下)가 안정 되었다고 생각해서 천자(天子)를 세운 것입니까? 그리고 그 천자(天子)를 세운 것은 천하 백성들의 아버지로 삼기 위함이었습니까? 아니면 천하 백성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해서 천자(天子)에게 봉사시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리고 또 제가 듣기로 그 옛날, 고(古-堯舜時代)의 성천자(聖天子=聖帝=덕망이 높은 임금 즉 堯舜을 말함)들께서 세상을 다스렸을 때는 새로 지붕을 올렸을 때, 그 지붕을 지지하기 위한 목재(木材)를 자른 그대로 사용했었기 때문에(장식 등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쓸데없이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서 살기 바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다는 뜻) 만백성들이 모두가 다 편안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왕은 어떻습니까? 그 왕은 백성들을 전부 일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은 그 덕으로 유람(遊覽)이나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머리조차 들지 못하겠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오히려 그런 나에게 왜 구경을 오지 않는가 하고 묻는군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장온(張溫)은 깊게 뉘우치며 그 노인에게 성함을 물었다. 하지만 그 노인은 대답도 않고 그냥 떠나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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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190년, 원소(袁紹)를 중심으로 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결성되었고, 그러자 또 손견(孫堅)도 그에 참가하기 위해서 거병했다. 그리고 그 후, 손견(孫堅)은 우선 장사(長沙)에서 북상해서 형주(荊州)를 통과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동탁(董卓)의 반대편에 서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평소 자신에게 모욕적으로 대해왔던 형주(荊州) 자사(刺史) 왕예(王叡)를 살해했다.

 참고: 오록(吳錄)이란 책에 의하면, 손견(孫堅)이 그때 왕예(王叡)를 살해했던 이유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었다고 해서 잠시 소개하고 넘어갑니다.(단, 번호는 읽기 쉽게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1. 왕예(王叡)는 동탁(董卓) 토벌의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 전, 그리고 또 손견(孫堅)이 형주(荊州) 남부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던 무렵부터 공공연하게 손견(孫堅)을 모독했고, 말로써 그를 비하하며 창피를 주었다.

 2. 왕예(王叡)는 당시, 손견(孫堅)과 동격(同格)으로 자신의 지령 계통 하부에 속해 있던 무능(武陵) 태수(太守) 조인(曹寅)과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그는 <나는 동탁(董卓)보다 우선적으로 조인(曹寅)부터 죽일 것이다>라는 방언(放言)을 자주 발설했다.

 3. 그러자 왕예(王叡)의 말에 겁을 먹었던 조인(曹寅)은 공문서를 위조해서 손견(孫堅)으로 하여금 왕예(王叡)를 토벌하도록, 마치 조정에서 명령이 내려온 것처럼 계획했다.

 4. 그 후, 조인(曹寅)이 위조했던 명령서를 받아 들었던 손견(孫堅)은 그 즉시 병사를 이끌고 왕예(王叡)의 성을 포위했다.

 5. 그러자 왕예(王叡)는 성을 포위하고 있던 손견(孫堅)의 군사 한 명을 꾀어서 물어본즉, 그들이 재물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왕예(王叡)는 그들을 전부 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6. 그 후, 손견(孫堅)을 만나게 된 왕예(王叡)는 손견(孫堅)이 병사들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비난했다.

 7. 그러자 또 손견(孫堅)은 자신은 다만 조정을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왕예(王叡)가 자신의 죄 없음을 주장했고, 그러자 또 손견(孫堅)은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고 한다. <당신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죄다!>

 8. 그러자 왕예(王叡)는 어쩔 수 없이 음독자살했다.

 그리고 또 위의 사실에 대해서는, 삼국지(三國志)의 공손도전(公孫度傳) 주(注) <위략(魏略)>에 의하면, 228년 위국(魏國) 조정은 공손연(公孫淵)에게 보냈던 공문서에서, 손견(孫堅)이 위의 사건을 저질렀던 일을 예로 들면서 손오(孫吳)를 비난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러한 者의 아들인 손권(孫權) 또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이므로, 그래서 더욱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그래서 공손연(公孫淵)이 뒤에서 오(吳)와 동맹을 맺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라고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남양군(南陽郡)의 태수(太守)였던 장자(張咨)도 자신의 장해물(障害物)이라고 생각해서 살해했고, 그 후 계속 전진해서 노양(魯陽)에서 주둔하고 있던 원술(袁術)을 알현했다. 그러자 원술(袁術)은 상표(上表)해서 그를 파로장군(破虜將軍) 대행(代行)과 예주(豫州) 자사(刺史)에 임명되게 했다.

 그 후, 자군(自軍)의 손실을 두려워 했던 제후들이 동탁 군(董卓軍)과 제대로 싸우지 않는 것을 보고, 그것을 참다 못했던 조조(曹操)와 손견(孫堅)이 군을 인솔해서 동탁 군(董卓軍)과 몇 번이나 부딪혔다. 그러나 그 결과, 조조 군(曹操軍)은 동탁(董卓)의 부하였던 서영(徐榮)에게 패했고, 그러자 손견(孫堅)은 분전(奮戰)하며 동탁 군(董卓軍)에 졌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또 191년 양인(陽人)의 싸움에서 대승하면서 동탁(董卓)의 부하였던 화웅(華雄)의 머리도 취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를 두려워해서 이각(李傕)을 사자로 보내서 그를 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했고, 그러자 또 어쩔 수가 없었던 동탁(董卓)은 장안(長安) 천도를 결행했다. 그 후, 손견(孫堅)은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동탁(董卓)에 의해서 파헤쳐지고 약탈되었던 능묘들을 복구했고, 그 후 다시 원술(袁術)에게로 돌아갔다.

 참고: 강표전(江表傳)에 의하면 손견(孫堅)은 그때 한(漢)의 옥새(玉璽)를 발견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그러자 또 배송지(裵松之=372年-451年. 東晋 末 宋初의 政治家. 歴史家)는 <그는 충열지사(忠烈之士)였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마땅히 세상에 공표를 했을 것이다-중략-그리고 강표전(江表傳)의 내용대로라면 그는 그것을 자신의 가문(家門=孫氏)에 맡겼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러한 것을 혼자서 숨겨 두어서 좋을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했던 사실은 전혀 없었다고 반론했다.

 아무튼 그 후, 손견(孫堅)은 예주(豫州) 자사(刺史)를 지냈지만, 그런데 그때 갑자기 원소(袁紹)가 주우(周喁)를 예주(豫州) 자사(刺史)로 파견했다. 그러자 손견(孫堅)은 그 주우(周喁) 3형제와 다투게 된다.(앞에서 일부 설명이 되었으므로, 간략하게 하고 넘어감) 그리하여 사실상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은 와해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군웅(群雄)들은 그때부터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을 중심으로 해서 할거(割據)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손견(孫堅)은 원술(袁術)과 함께 주우(周喁)와 주흔(周昕)을 패주시켰다. 그리고 초평(初平) 2년(191년) 또는 3년에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에게 양양(襄陽)의 유표(劉表)를 공격하게 했다.

 참고: 삼국지(三國志)의 유표전(劉表傳)에 의하면, 유표(劉表)는 그때 이미 손견(孫堅)이 살해했던 형주(荊州) 자사(刺史) 왕예(王叡)의 후임으로 결정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원술(袁術)이 방해를 하자 할 수 없이 양양(襄陽)으로 도피했고, 그러자 또 그곳에서 원소(袁紹)와 손을 잡고는 원술(袁術)과 대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손견(孫堅)은 유표(遊標)의 부하였던 황조(黃祖)와 일전을 벌여서 격파했고, 이어서 양양(襄陽)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때, 양양(襄陽) 부근의 현산(峴山)에서 혼자 앉아 있다가 황조(黃祖)의 부하들에 의해서 사살(射殺)되었다.(이견 多數) 그러자 그때, 그의 나이 향년(享年) 37세였고, 그것으로 손견 군(孫堅軍)은 와해되었으며, 그 잔군(殘軍)들은 원술(袁術)의 군대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의 장자(長子) 손책(孫策)이 원술(袁術)로부터 독립해서 그의 뒤를 이었다.




 <손견(孫堅)> 끝

 

 

 

 

 

 

 

 

 

 

  중국 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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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손견(孫堅)> 1

 155년 또는 156년-191년 또는 192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자(字)는 문대(文臺). 오군부춘현(吳郡富春縣-현재의 浙江省 杭州市 富陽縣) 출신. 삼국시대에 성립되었던 오(吳)의 황제 손권(孫權)의 부(父). 묘호(廟號)는 시조(始祖). 시(諡)는 무열황제(武烈皇帝). 가계(家系)는 손 씨(孫氏). 손견(孫堅)은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병가(兵家)였던 손무(孫武)의 자손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물론, 그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등에 대해서는 현재 불명(不明)하다.

 참고: 본문 중의 기술은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손파노토역전<孫破虜討逆傳-그러나 孫破慮()討逆傳으로 기록된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 그리고 여기서는 孫破虜(노 또는 로)討逆傳으로 기록함>에 의함. 그리고 남조(南朝) 송대(宋代)에 저술된 <이원(異苑)>이란 책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과물(瓜物-오이나 참외 등의 농작물)을 팔던 손종(孫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같은 대(代)의 문헌이라고 생각되는 <유명록(幽明錄)-현재는 散逸>에도 손종(孫鐘)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고 하며, 더구나 동진(東晋) 때 배계(裵啓)가 저술했던 배자어림(裴子語林)이란 책에서도 손종(孫鐘)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17세 때, 전당(錢唐)이란 곳에서 해적(海賊)들이 약탈을 일삼고 있던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자 그는 곧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고, 그리고는 이어서 탁 트인 곳으로 가서는 자신이 마치 대군을 지휘하며 그 해적들을 곧 섬멸할 것처럼 몸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행동했다. 그러자 그것을 본 해적들은 그때 정말로 대군이 공격해 오는 줄로 착각을 하고는 모두 다 도망을 갔다. 그러자 그 후 그는 곧 유명하게 되었고, 이어서 관청에 초대되어 가위(假尉=경찰이나 軍事 담당)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사마(司馬-兵員管理擔當)가 된 그는 회계군(會稽郡)에서 일어났던 허창(許昌)의 난(亂)을 진압했다.

 참고: 위의 허창(許昌)은 하남성(河南省)의 허창(許昌)이 아닌 인명(人名)임. 그리고 그 허창(許昌)은 회계(會稽) 출신으로, 황제를 자칭하며 구장(句章-현재의 浙江省 寧波市) 근처에서 난(亂)을 일으켰던 종교지도자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 그때 가담했던 사람들은 수만(數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그 강동(江東) 일대에는 종교(宗敎) 세력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반란을 진압한 후, 그는 그 공적으로 몇 곳의 현(縣) 차관(次官)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좋은 평을 받았으며, 그래서 관리들뿐만이 아니라 백성들도 모두 그를 잘 따랐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그는 자신의 군단(軍團)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184년, 태평도(太平道)의 장각(張角)이 일으켰던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그 역시도 당시 중랑장(中郞將)이었던 주준(朱儁)의 휘하로 들어가서 참전했다. 그리고는 황건(黃巾)의 거수(渠帥-악당의 우두머리)였던 파재(波才) 공격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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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주준(朱儁)> ?-195년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정치가. 자(字)는 공위(公偉). 회계군(會稽郡) 상우현(上虞縣) 출신. 자(子)에는 주호(朱皓)와 주부(朱符)가 있었다고 한다.(後漢書) 주준(朱儁)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몹시 궁핍하게 살았다. 그러자 그는 홀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셔서 효성(孝誠)이 자자했고, 자라서는 의(義)를 좋아하고, 재물을 멀리했기 때문에, 현(縣)의 문하서좌(門下書佐)가 되었다.

 참고: 縣의 門下書佐에서 門下란, 佐原康夫(사와라 야스오) 著 <漢代都市機構의 研究> 第二部 <都市의 財政과 官僚機構> 第三章 <漢代의 官衙와 属吏>에 의하면, 대충 장관(長官)과 사종적(私從的)인 측면(側面)에 있었던 직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장관의 비서(秘書) 같은 직이었을 것이란 추측도 하면서, 그러나 관질(官秩)은 극히 낮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상우현(上虞縣)의 장(長)으로부터 직접 발탁되었던 주준(朱儁)이었던 관계로, 장(長)의 직속 부하였을 가능성 또한 언급했다. 그리고 또 <속한서(續漢書)>의 백관지(百官志)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으므로, 그래서 또 서기관(書記官)을 연상할 수 있다고 한다. 단, 번역은 하지 않으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簿曹書佐主簿書. 其餘都官書佐及毎郡國, 各有典郡書佐一人, 各主一郡文書, 以郡吏補, 歳滿一更>

 아무튼, 그는 또 동도(同郡)의 주규(周規)라는 자가 삼공(三公)의 초빙을 받아서 상경하려 했을 때, 여비 등이 모자라는 것을 알고는 자기 어머니의 돈을 훔쳐서 그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그를 꾸짖었는데, 그러자 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 제가 그 사람에게 준 돈은 우리 집으로 볼 때는 작은 손실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큰 이익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현장(縣長)이었던 도상(度尙)의 추천을 받아서 위의(韋毅)가 태수(太守)하던 시절에 군(郡)에 등용되었고, 이어서 윤단(尹端)이 태수하던 시대에는 주부(主簿)가 되었다.

 참고: 주부(主簿)는 관리(官吏)를 감독하던 직이며, 문서심사(文書審査)를 하던 직에 상당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막료(幕僚)의 장(長)적(的)인 존재로 변화했고, 어사대(御史臺) 또는 군현(郡縣)에 두었으며, 넓게는 각부(各府)와 군국(君國) 그리고 장군부(將軍府)에도 설치되었다.(陣琳)

 그런데 그 후, 윤단(尹端)이 도적이었던 허소(許昭)를 토벌하는데 실패했다. 그러자 당시 양주(揚州) 자사(刺史)가 상소(上訴)를 올려서 그를 사형(死刑)에 처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은밀하게 수도(首都)로 올라가서 그곳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는 그 상주문을 정정(訂正)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윤단(尹端)은 겨우 사형만은 면할 수 있게 되어 기뻐했는데,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몰랐다고 한다.

 그런 다음, 서규(徐珪)가 태수(太守)가 되었던 시절에 그는 효렴(孝廉)에 추천되었고, 이어서 난능(蘭陵)이란 곳의 현령(縣令)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의 일하는 태도가 동해국(東海國) 상(相)의 눈에 띄어서 중앙에 보고되었다. 그리고 또 178년, 교지(交趾)의 반란이 길어지자, 그는 그곳의 자사(刺史)로 발탁되었다.

 참고: 교지(交趾)는 전한(前漢)에서 당(唐)까지 설치되었던 중국 군(郡)의 한 명칭이었으며, 현재로서는 베트남 북부의 송코이 강(紅河) 유역의 지역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 후에 독립해서 교지(交趾) 또는 교지(交阯)라고 불리게 되었다.



<송코이 강의 석양>


 그 후, 그는 반란진압에 나섰는데, 그런데 그 전에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데려왔던 5천명의 군사들을 한곳에 집결시키고는 적의 동태를 충분히 정찰했다. 그런 다음, 군을 둘로 나누어서 각각 다른 방향에서 그 교지(交趾)를 향해서 가게 했다. 그리고는 그 교지(交趾) 시가(市街)를 당당하게 입성하는 것으로 적의 사기를 꺾은 다음, 교주(交州) 7군(郡)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런 다음, 진압에 들어가서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두목 양용(梁龍)의 목을 베고 그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자 그는 그 공으로 1500호(戶)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고, 중앙으로 불려져서 간의대부(諫議大夫-過失을 諫하는 職)가 되었다.

 184년, 황건(黄巾)의 난(亂)이 일어나자 그는 우중랑장(右中郞將)에 임명되었고, 좌중랑장(左中郞將) 황보숭(皇甫嵩) 등과 각지를 전전하면서 난을 평정했다. 그러자 또 그 공으로 그는 서향후(西鄕侯)와 진적중랑장(鎭賊中郞將)에 임명되었고, 그러자 또 바로 그때, 같은 양주(揚州) 출신의 손견(孫堅)을 천거(薦擧)했다고 한다.(三國志 吳志 孫破虜討逆傳)

 그 후에 또 그는 남양(南陽)의 조홍(趙弘)을 사마(司馬) 장초(張超)와 형주(荊州) 자사(刺史) 서구(徐璆) 그리고 남양(南陽) 태수(太守) 진힐(秦頡) 등과 함께 장시간(長時間)의 포위전(包圍戰) 끝에 격파했고, 그 후에는 또, 그때 도망을 가서 완(宛)에 주둔하고 있던 한충(韓忠)의 군대를 격파해서 목을 베었으며, 그 잔당이었던 손하(孫夏)도 제압했다. 그리고 또 이어서 185년에, 그는 우차기장군(右車騎將軍), 광록대부(光祿大夫), 전당후(錢塘侯) 등에 봉해지는 특진(特進)을 받았으며, 식읍(食邑) 5천도 증가되었다. 하지만 그 후, 모(母)의 상(喪)을 위해 사임한 후, 다시 중앙으로 불려가서 장작대장(將作大匠), 소부(少府), 태복(太僕)을 역임했다.

 그 후, 황건(黃巾)의 잔당들이 각지에서 봉기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장연(張燕)이란 자는 일시 조정에 항복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다시 반기(反旗)를 들고 낙양(洛陽)을 위협했다. 그러자 주준(朱儁)은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전출(轉出)되어서 그들을 퇴각시켰고, 그러자 또 그 공으로 광록태부(光祿太夫)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차례로 성문교위(城門校尉), 하남윤(河南尹)으로 전임(轉任)했다.

 그 후,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조정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동탁(董卓)은 겉으로는 주준(朱儁)을 우대했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를 아주 싫어했다. 그러자 주준(朱儁)도 동탁(董卓)의 전횡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한 천도(遷都) 계획에도 반대했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를 태복(太僕)에 임명하며 자신의 수하(手下)에 두려고 하였으나,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 후,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천도(遷都)했고, 그는 낙양(洛陽)에 남겨졌다. 그러자 또 그때 산동(山東)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손길이 뻗쳐왔고, 그러자 그는 또 그에 동조하기로 약속까지 했지만, 그러나 또 동탁(董卓)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해서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도망쳤다.

 그 후에 그는 또 병사를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당시, 동탁(董卓)이 임명했던 하남윤(河南尹) 양의(楊懿)를 추방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곳은 이미 전란으로 인해서 황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중모(中牟)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주둔했다.

 그 후, 그는 독자적으로 동탁(董卓)을 타도하기 위해서 제군(諸郡)들과 거병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서주(徐州) 자사(刺史)였던 도겸(陶謙) 등이 호응했지만, 그러나 그때,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에 주둔시켜 두었던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동탁(董卓) 사후(死後)에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장안(長安)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도겸(陶謙)으로부터 태사(太師)를 권유받았다. 그리고 도겸(陶謙)과 공융(孔融) 그리고 응소(應劭)와 서구(徐璆) 그리고 또 복건(服虔)과 정현(鄭玄)들은 연명(連名)해서 헌제(獻帝)를 맞이할 것을 상주(上奏)했다. 그러자 또 이각(李傕) 등은 태위(太尉)였던 주충(周忠)과 상서(尙書)였던 가후(賈詡)의 권유를 받아서 주준(朱儁)을 중앙으로 초빙했다. 그러자 또 주준(朱儁)은 초빙에 응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생각해서 도겸(陶謙) 등과 함께 입조(入朝)했다. 그러자 그 후에 또 그는 태복(太僕)이 되었고, 그리고 193년에는 태위(太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참고: 녹상서사(錄尙書事)는 중국 후한(後漢)부터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까지 존재했던 관직으로, 상서(尙書)를 통솔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재상(宰相) 직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수대(隋代)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는 일식(日食)이 일어나자 면직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194년에는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었다.

 참고: 표기장군(驃騎將軍)은 都督이며, 位는 三公 다음. 通常 武官의 最高位(近衛騎兵師團長)였음. 그리고 그 직에 있었던 사람으로, 曹洪과 馬超 그리고 呉班 등이 있었음.

 그 후, 그가 관동(關東)으로 출진하려 했을 때, 이각(李傕) 등이 내분(內紛)을 일으켜서 조정이 혼란해졌다.
 그러자 그는 출진을 포기하고 장안(長安)에 머물렀고, 이어서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

 
참고: 大司農은 九卿이며, 전곡금금(錢穀金錦) 등 諸 화폐를 관할했고, 농정(農政)과 국가재정을 담당했다. 그리고 또 참고로, 대창령(大倉令)은 연공미(年貢米)의 수송을 감독했으며, 균수령(均輸令)은 전매물자(專賣物資)를 감독했다.

 하지만 그 후, 그는 이각(李傕) 등과의 화목(和睦)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무슨 연유로 곽사(郭汜)의 인질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분노로 인한 병을 얻어서 그날로 죽었다.

 그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도 황건(黃巾)의 난(亂)을 진압하기 위해서 관군의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오만한 성격에다 부패관리의 전형으로 묘사되었고, 그래서 의용군을 인솔해서 난 진압에 참가했던 유비(劉備) 등을 처음에는 함부로 대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유비(劉備) 등의 활약을 보고나자 자신의 공명(功名)에 그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사실과 같게, 이각(李傕) 등과의 갈등으로 장안(長安)에서 분사(憤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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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주준(朱儁)이 여남(汝南)의 영천(潁川) 등지로 전전했을 때, 그도 함께하며 군공(軍功)을 세웠다. 그리고 또 완 성(宛城)을 공략했을 때는, 그 스스로 선봉에 서서 성벽을 기어올랐고, 서남 방면의 관군들을 인솔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 공적으로 그는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참고: 별부사마(別部司馬)는 行破賊都尉라고도 하며, 小隊의 副官 정도의 직급이었음.

 

 

 

 

 

 

 <손견(孫堅)>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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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조조(曹操)> 1



 영수(永壽) 원년(元年=155년)-건안(建安) 25년 1월 23일(220년 3월 15일). 중국 후한(後漢) 말(末)의 무장, 정치가, 시인(詩人), 병법가(兵法家)로서 업적을 남겼다. 자(字)는 맹덕(孟德), 유명(幼名)은 아만(阿瞞) 또는 길리(吉利). 패(沛) 국초 현(國譙縣-그러나 현재의 河南省 永城市라는 설이 있다) 출신. 후한(後漢)에서 승상(丞相)을 지냈고, 나중에 위왕(魏王)으로서 삼국시대 위(魏)의 기초를 닦았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무황제(武皇帝). 후세(後世)에서는 위무제(魏武帝), 위무(魏武)라고도 불렸다. 부(父)는 조숭(曹嵩). 그러나 그 조숭(曹嵩)은 원래는 하후 씨(夏候氏)였지만, 나중에 중상시(中常侍)였던 대장추(大長秋) 조등(曹騰)의 양자가 되면서 조 씨(曹氏)를 승계했고, 이어서 태위(太尉)가 되었다.

 참고: 그 당시에는 환관이었어도 고위직에 있던 자들은 양자를 가질 수도 있었고, 가명(家名)을 존속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리고 대장추(大長秋)는 중국 왕조에서 황제부(皇帝府)를 도맡아서 관리하던 환관의 최고위였으며, 후한(後漢) 이전에는 민간 출신이었어도 임명이 가능했지만, 그러나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였던 광무제(光武帝) 때는 오직 환관만이 그 직에 임명되도록 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또 특히, 위(魏)의 조조(曹操)의 조부(祖父)였던 조등(曹騰)이 임명되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 씨(曹氏)의 선조는 원래 전한(前漢)의 평양후(平陽侯)였던 조참(曹参)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에는 의문(의심)이 있다. 그리고 또 조숭(曹嵩)의 친가였던 하후 씨(夏候氏)의 선조는 전한(前漢)의 여음후(汝陰侯)였던 하후영(夏候嬰)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또 그가 거병했을 때부터 함께 종군했던 하후돈(夏候惇)과 하후연(夏候淵) 등은 사촌형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나중에 아들 조비(曹丕)에 의해서 후한(後漢)을 대신해서 위(魏)가 건국되었다.

 <치세능신난세간웅(治世能臣 乱世奸雄)>

 그는 젊었을 때부터 기지(機知)와 권모(権謀)가 풍부했지만, 그러나 방탕(放蕩)을 좋아했기 때문에 세평(世評)이 좋지가 못했다. 다만, 태위(太尉)였던 교현(橋玄)이 <이런 난세(亂世)는 당대(當代)의 일재(一才)만이 구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사람이 바로 너인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교현(橋玄)이 소개했다고 하고, 월단평(月旦評)으로 유명했다던 후한(後漢)의 인물감정가(人物鑑定家) 허자장(許子將=許劭)도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하며, 그러나 잘 알려진 내용이고, 또 위
제목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해석은 생략합니다. <子治世之能臣亂世之奸(姦)雄)> 또는 <君清平之奸賊亂世之英雄>

 
교현(橋玄-109년-183년)은, 후한(後漢) 대(代)의 정치가, 자(字)는 공조(公祖), 양국(梁國) 수양현(睢陽縣)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7대(代) 전조(前祖)였던 교인(橋仁)은 전한(前漢)의 대홍려(大鴻臚=9卿의 하나)를 지냈고, 조부(祖父) 교기(橋基)는 광릉(廣陵) 태수(太守)를 지냈다. 그리고 또 부(父) 교숙(橋肅)은 동래(東萊)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족가(族子=조카 또는 조카뻘 되는 사람)에 교모(橋瑁)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젊었을 때 현(縣)의 공조(功曹=郡의 宰相으로 불리며 當代의 出世 엘리트코스였다고 한다. 그리고 主로 공로가 있던 자를 선발해서 공무 직을 담당하게 하는 일을 그 職務로 했다고 함)가 되었다. 그리고 또 어느 때, 예주(豫州) 자사(刺史)였던 주경(周景)이 양국(梁國)에 이르렀는데, 그러자 교현(橋玄)은 그 주경(周景)을 만나서 땅에 엎드린 채로 진국(陣國) 재상(宰相) 양창(羊昌)의 죄악(罪惡)을 낱낱이 고하면서 자신을 진국(陣國)의 종사(從事)로 임명해서 그 일을 철저하게 조사하게 해줄 것을 원했다.

 참고: 당시 刺史는 太守와 國相의 監察을 主務로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管轄 下 郡國들의 여러 가지의 일을
담당, 처리하는 '従事'를 属官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자 주경(周景)은 그의 의지(意志)에 감동하여 그를 종사(從事)에 임명하고는 진국(陣國)으로 파견했다. 그러자 또 교현(橋玄)은 그곳으로 가서 양창(羊昌)의 빈객(賓客)들을 모조리 수감(收監)했고, 그리고는 장죄(贓罪=臧罪=贈收賂罪=贈收賄罪)의 죄상에 대해서 취조했다. 그러자 또 그때, 대장군이었던 양기(梁冀)가 평소 양창(羊昌)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격문(檄文)을 띄워서 그를 소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조사를 더욱 엄격하게 했고, 결국 그 양창(羊昌)을 함차<檻車-죄인 등을 이송시킬 때 사용했던 우리 형태의 檻을 얹은 馬車 또는 牛車)에 태워서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그 단 한 건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서 효렴(孝廉)에도 추천되어서 낙양(洛陽) 좌위(左尉=洛陽縣에 2名 두었던 縣尉 중 一人)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승진했고, 결국 제국(齊國)의 상(相)까지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어떤 사건에 연좌(連座)되어서 노역형(勞役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또 그 후에 형기를 다 마치고 나와서 초빙(招聘)을 받아서 상곡(上谷)의 태수(太守)가 되었으며,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한양(漢陽)의 태수(太守)가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상규(上邽)의 현령(縣令)이었던 황보정(皇甫禎)에 장죄(贓罪)를 물어서 곤태(髡笞-머리카락을 자르고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 형에 처했다. 그러자 황보정(皇甫禎)은 죽었고, 그로 인해서 그의 이름은 세상을 또 한 번 울렸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군(郡)의 명사(名士)였던 강기(姜岐)란 자를 소환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나 그 강기(姜岐)가 병을 칭하며 응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그는 화를 내며 독우(督郵-縣의 공무원들을 監査하는 職)를 그 집으로 파견했고, 그리고는 그를 압박하기 위해서 <만약, 당신이 계속해서 소환에 불응한다면, 당신의 어머니를 내 처(妻 또는 妾)로 만들어버릴 것이다!>라고까지 말을 하게 했다. 하지만 또 그때, 그 도내(都內)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달려와서 그를 말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겨우 단념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사도(司徒=丞相)였던 장사(長史)에 의해서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다.

 ※
장작대장(將作大匠)은 진(秦)과 전한(前漢) 때의 관직명이었으며, 궁전과 종묘(宗廟) 등의 건축 등을 맡았던 직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장작소부(將作少府)라고 불렀는데, 관질(官秩)은 2천석(千石)이었으며, 광무제(光武帝) 때 잠시 폐지되었다가 장제(章帝) 원년에 다시 부활했다.

 그리고 환제(桓帝) 말기에 대장군과 삼공부(三公府)의 추천을 받아서 도요장군(度遼將軍-前漢 이후의 관직명이며, 遼水를 건너서 北族을 토벌하는 장군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황월(假黃鉞)이 되었다.

 참고: 假黃鉞은 黄金으로 손도끼나 큰 도끼의 모양을 장식품 레플리카(replica) 같이 만들어서, 그것으로 내외(內外) 제군(諸軍)들의 통수(統帥) 권한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 때는 군의 통수자(統帥者) 자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것을 반드시 휴대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임지(任地)에 이르자 병사들을 충분히 쉬게 한 다음 제장(諸將)들을 인솔해서 고구려의 백고(伯固=고구려 제8대 왕이었던 ‘신대왕’의 이름) 등과 싸워서 이겼다. 그러자 그 후, 그가 재직 중이던 3년 동안은 그곳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영제(靈帝)의 시대가 되자 그는 다시 귀환해서 하남윤(河南尹)이 되었고, 이어서 9경(卿)과 삼공(三公)을 역임했다. 그러나 광화(光和-靈帝 때의 3번째 元號) 원년(178년)에 그는 태위(太尉)가 된지 수개월 만에 병을 얻어서 면직했다. 그러자 그에게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내려졌고, 이어서 자택에서 요양에 들어갔지만, 그러나 광화(光和) 6년(183년)에 결국 사망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의 향년(享年) 75세였으며, 그리고 평소 강직했던 성품과 타인들로부터 존경받았던 생전의 인격에 걸맞게, 그를 이용해서 고위에 올랐던 가족과 친척들은 없었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그가 죽자 생업이 없어져서 그의 상중(喪中)에는 빈소(殯所)도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일화(逸話)>

 그가 낙양(洛陽)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당시 무명(無名)의 조조(曹操)가 그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조조(曹操)의 相을 보고는 감탄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여태까지 천하의 명사(名士)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므로 자네는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야. 그러나 나는 이제 늙었고, 그래서 현재 이 늙은이에게 원(願)이 있다면, 다만 내가 떠난 후에 처자(妻子)를 좀 돌봐달라는 것뿐일세!> 그런 일이 있고나자 조조(曹操)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또 그 후였던 건안(建安) 7년(202년)에 군사를 이끌고는 교현(橋玄)의 묘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는 사람들에게 시켜서 태뢰(太牢=大牢=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소를 통째로 바쳤던 일. 원래는 소, 양, 돼지를 모두 바쳤으나 뒤에는 소만 바쳤다고 함)의 예(禮)로서 제사를 올렸으며, 그 스스로도 제문(祭文)을 봉(奉)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의 교공(橋公)>

 삼국지연의(三国志演義)에서는 '강동(江東)의 2교(二喬=大喬, 小喬)'
의 부친으로 교공(喬公)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이교(二喬) 중 대교(大喬)는 손책(孫策)의 처(妻)로, 그리고 소교(小喬)는 수군대도독(水軍大都督) 주유(周瑜)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 교공(喬公)은 교국노(喬國老)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 후, 그 교공(喬公)은 오(吳)를 방문했던 유비(劉備)의 인품(人品)에 감탄해서 손권(孫權)과의 대립을 피할 목적으로 손권(孫權)의 이복매(異腹妹)였던 손부인(孫夫人)을 유비(劉備)에게 시집보내는데 적극 협력했다. 그리고 또 그 책의 내용 중에서 조조(曹操)가 <일찍이 내가 교 공(喬公)과 인연을 주고받았던 적이 있었다>라고 말을 하는 것으로, 그 이교(二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밝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 교공(喬公)은 역사 상의 교현(橋玄)을 모델로 했던 것 같으며, 다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 교공(喬公)의 이름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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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단평(月旦評)은, 후한(後漢) 때, 허소(許劭)가 행했다는 인물평론(人物評論) 고사(故事)에 관련된 용어(用語)이며, 일반적으로 품평(品評)이나 인물평(人物評)을 했던 것을 월단평(月旦評)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의 본전(本傳)에 의하면, 허소(許劭)는 종형(從兄)이었던 허정(許靖) 등과 함께 매월 1일에 향리(鄕里)의 인물비평을 행했는데, 그것을 월단평(月旦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는 그 영향력이 아주 막강했기 때문에, 월단평(月旦評)으로 칭찬을 받은 사람은 출세를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은 몰락(沒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영향으로 당시 아주 유력자(有力者)였던 원소(袁紹)나 조조(曹操)까지도 그 때문에 크게 신경을 썼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허소(許劭)의 조조(曹操)에 대한 평가(論評)는 상기(上記)대로 <삼국지(三國志) 注>와 후한서(後漢書)에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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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소(許劭-150년부터 195년)는, 후한(後漢) 말기의 인물비평가(人物批評家)로, 자(字)는 자장(子將), 유비(劉備)의 휘하로 들어가서 사도(司徒)가 되었던 허정(許靖)과 종형(從兄=四寸) 사이였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허혼(許混)의 부(父)였으며, 진지(陣祗)는 그의 질(姪女)의 자(子)였다. 그리고 친척으로 허경(許敬)과 허훈(許訓), 허상(許相)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삼공(三公)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평여현(平與縣) 출신의 사람이었으며, 18세 때 사견(謝甄=謝子微)에게서 인물평을 받았고, 그 후에는 스스로도 인물평론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三國志) 그 후, 그는 허정(許靖)과 함께 매월 한 번씩 월단평(月旦評)이라고 불렸던 인물평론회를 열었다.(後漢書) 그리고 그 결과,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絶對的)인 것이 되었고, 그에게서 칭찬을 받았던 사람은 출세를 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太平御覽) 그리고 또 당시, 동향(同郷)의 원소(袁紹)는 그에게서 비판을 받을 것을 두려워 해서 화려하게 꾸며둔 것들을 모두 바꾸었을 정도였다고 한다.(後漢書) 그리고 또, 젊은 시절의 조조(曹操)도 교현(橋玄)의 추천으로 그에게서 평가를 받았고, 그러자 그는 조조(朝朝)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子治世之能臣亂世之奸雄-三国志 魏書武帝紀> 또는 <君清平之奸賊亂世之英雄-後漢書 許劭傳> 아무튼, 그러자 조조(曹操)는 그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三国志) 그 후, 여남(汝南)의 태수(太守)가 되었던 서구(徐璆)는 그를 공조(功曹)로 등용시켰다. 그리고 그 후에 조조(曹操)와 양표(楊彪) 등이 그를 초빙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後漢書) 그 후, 전란(戰亂)이 발생하자 그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강남(江南)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195년, 그의 나이 46세 때 병을 얻어서 예장군(豫章郡)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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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효렴(孝廉)에 추천되어서 랑(郞)이 된 후,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 돈구(頓丘) 현령(縣令), 의랑(議郞)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가 낙양북도위(洛陽北部尉)를 지내고 있었을 때는 범법자들을 엄격히 단속했으며, 그리고 또 그 예로는, 당시 영제(靈帝)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환관 건석(蹇碩)의 숙부(叔父)가 야간통행 금지법을 어겼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조조(曹操)는 그를 잡아 들여서 그 즉석에서 때려 죽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후로는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으며, 그리고 또 그런 그를 싫어했던 환관들이 그를 추방하려고 획책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흠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추천을 받아서 현령(縣令)이 되었고, 그렇게 해서 그는 낙양(洛陽)을 떠나게 된다.

 광화(光和) 7년(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그는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고, 영천(潁川)에서 토벌 전을 벌였으며, 그 공으로 제남(濟南)의 상(相)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제남(済南)에서 오직(汚職) 관리들을 파면하고, 음사사교(淫祠邪敎-淫祠는 내력이 불분명한 귀신 등, 邪神을 제사지내는 사당)를 금지시키는 등, 평온한 통치를 실시해서 나중에 동군(東郡) 태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赴任)을 거부하고는 병(病)을 핑계로 귀향(歸鄕)했으며,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잠시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도 문무(文武)의 단련은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어서 중평(中平) 5년(188년)에 황건(黃巾)의 난(亂) 평정에 공(功)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는 다시 선택되어져서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에 임명되었다.

 ※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는, 중국 後漢 말기였던 188년에 설치되었던 官職의 총칭으로, 또는 서원삼군(西園三軍)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皇帝 직속의 부대 서원군(西園軍)을 창설한 후, 그 군을 이끌었던 인물로 당시 영제(靈帝)의 총애를 받았던 건석(蹇碩-三國志演義에서는 十常侍 중 一人이라고 되어있다)과 원소(袁紹) 그리고 포홍(鮑鴻) 그 3명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가 고향에서 은둔하고 있었을 때, 왕분(王芬)과 허유(許攸) 그리고 주정(周旌) 등으로부터 영제(靈帝) 폐위의 쿠데타에 참가할 것을 권유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이윤(伊尹)과 곽광(霍光) 등의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을 예로 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王沈의 魏書)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에 참가하다>

 이미 전술(前述)되었지만, 그러나 잠시 상기(想起)를 위하여 앞전의 상황을 조금 설명하고 넘어가면...

 그러니까 후한(後漢) 말기, 황건(黃巾)의 난(亂) 이전에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환관 십상시(十常侍)를 숙청하기 위해서 대장군이었던 하진(何進)이 제후들에게 상경(上京)을 재촉하는 격문을 날렸을 때, 조조(曹操)는 그 계획을 비판했다고 한다.(王沈의 魏書) 그러나 그 후였던 중평(中平) 6년(189년) 8월 27일에 주모자였던 하진(何進)이 단규(段珪)에게 살해 당했고, 이어서 원소(袁紹) 등이 궁전으로 난입해서 환관들을 모두 죽여 버리자, 그에 환관들의 영화(榮華)로웠던 시대는 종언(終焉)을 고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비극을 맞이했던 것은 그 환관들뿐만이 아니었고, 대환관(大宦官)이었던 조등(曹騰)의 손(孫)이었던 조조(曹操) 또한 출세가도가 막히게 되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그리고 또 그때, 하진(何進)의 격문에 재빨리 반응을 했던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이미 전술(前述)한 대로 헌제(獻帝)를 옹립한 후 조정을 장악했다. 그리고는 조조(曹操)에게도 자신과 뜻을 같이 할 것을 권유했는데, 그러나 동탁(董卓)의 포학 상을 직접 목격했던 조조(曹操)는 그에 겁을 먹고는 낙양(洛陽)을 탈출해서 자신의 고향으로 도망을 쳤다.

 참고: 그리고 그때의 유명한 일화(逸話) 중 하나가 여백사(呂伯奢) 가족의 살해사건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참고에서 설명하려는 것은, 그에 대한 내용이 정작 삼국지(三國志) 본문에는 없기 때문인데, 그리고 또 그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여 소개하려는 자체에서 벌써 모순(矛盾)이 느껴질 정도이지만, 하지만 어쨌든 그때 조조(曹操)는 여백사(呂伯奢)와는 지인(知人) 사이였고, 그런데 또 마침 조조(曹操)가 동탁 군(董卓軍)에게 쫓겨서 그 여백사(呂伯奢)의 집을 찾았을 때, 여백사(呂伯奢)는 외출을 하고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왕심(王沈)은 위서(魏書)에서 여백사(呂伯奢)의 아들들이 먼저 조조(曹操)를 습격했기 때문에 조조(曹操)는 정당방위(正當防衛)였다고 했고, 하지만 또 세어(世語)에서는 여백사(呂伯奢)의 아들들이 배신할 것을 두려워했던 조조(曹操)가 일방적으로 그들을 학살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이동잡어(異同雜語)에서는 식기(食器)를 준비하려 했던 소리를 조조(曹操)가 자신을 살해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으므로, 그래서 그것은 사고적(事故的) 과잉방위(過剩防衛)였다고 했다. 그리고 또 그 이동잡어(異同雜語)에서는 조조(曹操)가 그때 <내가 다른 사람을 배반할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이 나를 배반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말도 했었던 것으로 고려했는데, 그래서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 말을 이용함으로 해서, 그때 함께 동행을 했던 진궁(陣宮)이 그의 행동에 치를 떨며 떠나가게 하는 계기로 구성을 했고, 그리고 또한 그것으로 조조(曹操)의 악역 적인 이미지가 결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후, 조조(曹操)는 사재(私財)를 투자해서 진류군(陳留郡) 기오(己吾)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참고: 그리고 세어(世語)에서는 그때, 조조(曹操)는 진류군(陳留郡)의 효렴(孝廉)이었던 위자(衛玆)의 원조를 받았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 조조(曹操)에게 협력했던 사람들은 하후돈(夏候惇)과 하후연(夏候淵) 그리고 조홍(曹洪)과 조인(曹仁) 조순(曹純) 형제 등, 주로 가족 중심이었으며, 그 세력 또한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또 그 무렵, 동탁(董卓)과 제후(諸侯)들의 알력(軋轢)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고, 그러자 또 그것을 보다 못했던 동군(東郡)의 태수(太守)였던 교모(橋瑁)가 조칙(詔勅)을 위조해서 각지의 제후들에게 연합(連合)을 호소하는 격문을 날리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또 초평(初平) 원년(190년), 결국 원소(袁紹)를 맹주로 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때 조조(曹操)도 부(父) 조숭(曹嵩)의 원조를 받아서 당시, 친구였던 원소(袁紹-그러나 曹操 자신은 袁紹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와 합류했다.

 그리고 이하(以下)는 앞에서 설명이 충분히 되었으므로 생략하며, 190년 이후의 기록은 때에 맞춰서 다시 소개할 예정
임.

 

 

 이상, 조조(曹操)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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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동탁(董卓)> ?-초평(初平) 3년 4월 23일(192年5月22日)




 후한(後漢) 말기의 군인, 정치가. 헌제(獻帝)를 옹립했고, 궁정에서 마음껏 권세를 휘둘렀지만, 그러나 자신의 양자였던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는 농서군(隴西郡) 임도(臨洮) 출신이었으며, 자(字)는 중영(仲穎), 부(父)는 동군아(董君雅), 형은 동탁(董擢), 동생으로는 동민(董旻)이 있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요절한 아들이 있었고, 조카로는 동황(董璜), 그리고 손녀 동백(董白)이 있었다.

 양인(陽人)의 싸움

 191년,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이 인솔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의 <손견(孫堅) 군(軍)>과 <조정군(朝廷軍)>을 지휘했던 동탁(董卓)의 군대가 사예(司隸) 하남윤(河南尹) 양현(梁縣)의 양인(陽人)에서 충돌했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당시, 동탁(董卓)은 자기 마음대로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헌제(獻帝)를 세웠으며, 낙양(洛陽) 부호(富豪)들의 금품을 강취했고, 여관(女官)들을 능욕하는 등, 그 포악(暴惡)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190년, 그 동탁(董卓)의 전횡(專橫)을 보다 못했던 <교모(橋瑁)>가 요청을 했고, 그리하여 원소(袁紹), 원술(袁術), 포신(鮑信), 왕광(王匡), 공주(孔伷), 유대(劉岱), 장막(張邈), 원유(袁遺), 한복(韓馥) 등은, 각각 수만(數萬)의 병사들을 인솔해서 동시에 거병했다. 그리고는 원소(袁紹)를 그 맹주로 삼고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을 결성했다.

 
교모(橋瑁-?부터 191년)는,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東郡 太守)였고, 자(字)는 원위(元偉)였다. 그리고 문헌(文献)에 따라서는 교모(喬瑁)라고 기록되어 있는 곳도 있고,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서 산견(散見)되는 인물이다. 그는 예주(豫州) 양국(梁國) 수양현(睢陽縣) 출신이며, 무제기(武帝紀)의 영웅기(英雄記)에 의하면, 그는 태위(太尉)였던 교현(橋玄)의 일족이었던 것으로만 생각될 뿐, 그 외는 불명(不明)하다. 그리고 그는 연주(兗州) 자사(刺史)와 동군(東郡) 태수(太守)를 지냈으므로, 그래서 그것으로 미루어서 위엄과 자애로운 마음을 겸비했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89년에 하진(何進)이 십상시(十常侍)와 대립했고, 그로 인해 각지의 군사를 모집했을 때, 교모(橋瑁)도 그 명령을 받아서 성고(成皋)에 군사를 주둔시켰다.(後漢書) 그러나 그 후에 하진(何進)과 십상시(十常侍)가 공(共)히 멸했고, 이어서 동탁(董卓)이 조정(朝廷)을
장악했다. 그러자 교모(橋瑁)는 삼공(三公)의 공문서를 위조해서 동탁(董卓)에 대항하기 위해 거병을 독려하는 격문(檄文)을 작성했다.(後漢書) 그리하여 190년, 동탁(董卓)에 반대했던 관동(關東)의 제후(諸侯)들이 먼저 거병했고(反董卓連合軍), 그러자 또 교모(橋瑁)는 공주(孔伷), 유대(劉岱), 장막(張邈), 장초(張超), 원유(袁遺) 등과 함께 참전했다.

 참고: 그러나 장홍전(臧洪傳)에 의하면, 처음 거병했던 것은 교모(橋瑁) 등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나 원소(袁紹)를 맹주로 삼은 뒤, 사태의 진전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교모(橋瑁)도 산조(酸棗)에서 유대(劉岱)와 장막(張邈), 원유(袁遺), 포신(鮑信), 조조(曹操) 등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자 또 조조(曹操)는 매일 주연(酒宴)만 벌이고 있던 제후(諸侯)들을 보고는 한탄했고, 이어서 진군계획을 세운 다음 싸움을 독려했지만,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주는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얼마 후, 산조(酸棗)의 군대는 병량(兵糧)이 고갈되었고, 이윽고는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後漢書) 그리고 또 그 후, 교모(橋瑁)는 유대(劉岱)와 대립하다가 살해되었다.

 
참고: 그러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격문을 작성했던 사람은 조조(曹操)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또 그때, 교모(橋瑁)와 유대(劉岱)가 대립했던 이유는 병량(兵糧)을 둘러싼 문제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당시, 손견(孫堅) 또한 수만(數萬)의 군사를 이끌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원술(袁術)에 종속되어 그 전쟁에 참가했고, 조조(曹操)는 자신의 자산을 처분해서 의병을 모집했는데 <세어(世語)>에 의하면, 그때 약 5천 정도의 군사를 모집해서 그 전쟁에 참가했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또 그때, 손견(孫堅)에게 살해 당했던 왕예(王叡)를 대신해서 형주(荊州) 자사(刺史)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유표(劉表)도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에 참가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동탁(董卓)은 그 주모자가 원소(袁紹)란 것을 알고는 그의 숙부였던 원외(袁隗)와 그 삼족(三族)을 함께 처형했다. 그리고는 유변(劉弁)을 독살했으며, 이어서 방위에 불리했던 낙양(洛陽)을 버리고는 강제적으로 장안(長安)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또 그때,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은 수십만(數十萬)의 병사들을 모으고 있었으면서도 매일 회의(會議)와 술잔치를 벌이면서 적극적으로 싸우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190년 3월, 조조(曹操)와 포신(鮑信)은 그런 소극적이었던 원소(袁紹) 등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는 자신들만이라도 적극적으로 동탁 군(董卓軍)에 맞서 봤지만, 그러나 또 형양(滎陽)의 변수(汴水)에서 동탁(董卓)의 부하였던 서영(徐榮)에게 대패했고, 그리고 또 그때,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의 위자(衛玆)와 포도(鮑韜-鮑信의 弟) 등이 전사했다.

 포신(鮑信-152년부터 192년)은,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으로, 사례교위(司隷校尉)였던 포선(鮑宣)의 후예였으며, 포단(鮑丹)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포도(鮑韜)의 형이었고, 자식으로는 포소(鮑邵)와 포훈(鮑勛)이 있었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 그리고 무제기(武帝紀)와 동탁전(董卓傳) 그리고 원소전(袁紹傳) 등에서 산견(散見)되는 인물이며,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평양(平陽)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는 관대(寬大)했고, 절의(節義)가 분명했으며, 지모(智謀) 또한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대대로 유학(儒學)으로 이름을 이룬 가문의 출신자였기 때문에 항상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그런 연고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後漢書, 魏書) 그리고 그 후, 후한(後漢) 영제(靈帝) 시대에 그는 하진(何進)의 초빙을 받아서 기도위(騎都尉)가 되었고, 십상시(十常侍)와 대결하기 위해서 하진(何進)과 결의했으며, 그 결과 하진(何進)의 명령을 받아서 왕광(王匡)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군사를 모집했다.(後漢書) 그러나 성고(成皋)에 겨우 도착했을 때, 하진(何進)이 암살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鮑勛傳 인용 魏書) 그러자 그는 병(兵)을 인솔해서 다시 돌아갔는데, 그런데 그 후, 정권을 장악했던 동탁(董卓)이 전횡을 일삼자 원소(袁紹)에게 동탁(董卓)을 제거할 것을 진언했지만, 그러나 원소(袁紹)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2만여 명의 보병과 700기(騎)의 기병(騎兵)들 그리고 치중(輜重-군수품) 5천여를 마련했다.(鮑勛傳 인용 魏書와 董卓傳) 그리고 또 원소(袁紹)가 동탁(董卓)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는 그 토벌군에 참가했고, 원소(袁紹)를 맹주(盟主)로 할 것을 관동(關東)의 제후들과 맹약했다.(後漢書, 武帝紀) 그러자 그 후, 그는 원소(袁紹)와 조조(曹操)에 의해서 행파로장군(行破虜將軍)에 임명될 수 있도록 상표(上表=上疏)되었다.(鮑勛傳 인용 魏書) 그리고 또 그 후, 그는 연주(兗州) 자사(刺史)였던 유대(劉岱)와 진류(陳留) 태수(太守)였던 장막(張邈) 그리고 산양(山陽) 태수(太守)였던 원유(袁遺), 동군(東郡) 태수(太守)였던 교모(橋瑁) 등과 함께 산조(酸棗)에서 주둔했다. 그러나 그 후, 제후(諸侯)들은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매일 주연(酒宴)으로 흥청거리자 조조(曹操)가 나서서 호소했다.(武帝紀) 그러나 그 후에도 별 변화가 없자 그는 조조(曹操)와 함께 동탁 군(董卓軍)과 맞서기 위해서 출진했지만, 그러나 그때 동탁(董卓)이 파견했던 서영(徐榮)에게 대패했고, 그 결과로 그의 동생 포도(鮑韜)는 전사했으며, 그 자신도 큰 부상을 입었다.(鮑勛傳 인용 魏書) 그 후, 병량(兵糧)이 다해서 산조(酸棗)에 모였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자 그도 임지로 돌아갔다.(後漢書) 192년, 그는 조조(曹操)와 함께 청주황건적(靑州黃巾賊)의 잔당 토벌에 나섰다. 그러던 중 조조(曹操)와 함께 정찰을 나갔다가 적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했는데, 그러자 그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백병전(白兵戰)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자 또 포신(鮑信)은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조조(曹操)를 구출해냈고, 그렇게 해서 조조(曹操)는 어떻게든 탈출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조조(曹操)의 탈출을 도우면서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으며, 그러자 조조(曹操)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시체라도 찾으려고 했다지만, 그러나 끝내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는 유학자(儒學者)의 가계(家系) 출신답게, 평소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그리고 부하들에게도 잘했기 때문에 인망(人望)이 높았고, 그리고 또한 사후에 남긴 재산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의 아들 포소(鮑邵)는 포신(鮑信)의 풍격(風格)을 그대로 계승했고, 그리하여 조조(曹操)는 그를 기도위(騎都尉)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 포소(鮑邵)가 죽자, 그의 아들 포융(鮑融)이 또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아래는 일종의 에피소드로, 연대(年代)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차례로 소개만 합니다.

 1. 원소(袁紹)가 기주(冀州)를 취하고는 세력을 넓히려 했을 때, 그는 조조(曹操)에게 원소(袁紹)가 제2의 동탁(董卓)이 될 것이라며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일단 황하(黃河)의 남쪽을 평정하는데
진력을 다한 다음,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려야할 것이라고 조언했다.(鮑勛傳 인용 魏書)

 2. 청주(靑州) 황건적(黃巾賊)이 연주(兗州)에 침입했을 때, 그 즉시 토벌에 나서려 했던 연주(兗州) 자사(刺史) 유대(劉岱)에게 그는 자중(自重)할 것을 권했지만, 그러나 유대(劉岱)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토벌에 나섰다가 전사했다.

 3. 조조(曹操)의 부하였던 진궁(陣宮)이 조조(曹操)를 연주(兗州) 목(牧)으로 추대(推戴)하기 위해서 연주(兗州)의 별가종사<別駕從事=別駕는 州 刺史의 補佐官(屬官)이며, 従事는 그 別駕를 補佐했던 職>와 치중종사(治中從事=公文書를 총괄해서 담당했던 職)를 설득했다. 그러자 그때, 그도 찬성하며 조조(曹操)를 연주(兗州) 목(牧)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들과는 달리,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의 그는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의 관동(關東) 제후(諸侯)들 중에서도 특히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하여 선봉을 명 받았던 손견(孫堅)을 앞지르기 위해서 자신의 아우였던 포충(鮑忠)과 함께 서둘러서 출진했고, 그 결과로 화웅(華雄)에게
대패했다. 그리고 또 그때, 자신의 아우였던 포충(鮑忠)은 화웅(華雄)에게 당해서 죽었으며, 그리고 또 그 또한 정사(正史)대로 청주황건적(靑州黃巾賊)과 싸우다 죽게는 되지만, 그러나 그때도 조조(曹操)를 돕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자신의 공적을 올리려고 초조해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던 것으로 취급되어 있으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편, 손견(孫堅)도 양(梁)의 동부(東部)에서 서영(徐榮)에게 패했으며, 그리하여 당시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에 편들고 있었던 영천(潁川) 태수(太守) 이민(李旻)이 포로로 잡혀서 쪄 죽임(煮殺)을 당했다. 그러자 그해 겨울, 이번에는 왕광(王匡)이 동탁(董卓)을 습격하기 위해서 하양진(河陽津)에서 군사를 모았지만,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양동작전(陽動作戰)으로 그 왕광 군(王匡軍)의 배후를 급습해서 크게 대파했다.
그리하여 191년, 손견(孫堅)은 패잔병들을 모아서 양현(梁縣)의 양인(陽人)에서 주둔했다. 그러자 또 191년 2월, 동탁(董卓)은 대독호(大督護)였던 호진(胡軫)과 기독(騎督)이었던 여포(呂布)를 파견해서 양인(陽人)의 손견(孫堅)을 공격케 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떠나고 양인(陽人)에서 불과 수십(數十) 리(里) 쯤 떨어져 있던 광성(廣成)에 도착했을 때 날이 저물었다. 그러자 그때 여포(呂布) 등은 군사들이 피곤해 하는 것을 알면서도 호진(胡軫)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호진(胡軫)을 곤란하게 만들 목적으로 <지금, 孫堅이 도망을 가고 있기 때문에, 바로 추격하지 않으면 놓치게 됩니다>라고 거짓 정보를 고했다. 그러자 행군은 다시 시작되었고, 그렇게 해서 밤을 달려서 도착했던 양인(陽人)에는 손견(孫堅)이 이미 견고한 방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략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호진(胡軫) 등은 그때서야 투구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쉬려고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여포(呂布)가 달려와서 <지금 孫堅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라고 또 거짓 정보를 고했다. 그러자 또 호진(胡軫) 등은 그대로 도망을 쳤는데, 그러나 그 어디에도 적군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날이 밝고 확인해 보니 양인성(陽人城)의 방비는 변함 없이 견고했다. 그래서 호진(胡軫) 등은 양인 성(陽人城) 공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철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또 그때, 그것을 보고 달려온 손견 군(孫堅軍)에 동탁 군(董卓軍)은 대패했으며, 그리자 또 그때, 도위(都尉)였던 화웅(華雄)도 전사했다. 그런데 또 그 즈음, 누군가가 원술(袁術)에게 손견(孫堅)을 모함했고, 그러자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에게 병량(兵糧)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손견(孫堅)은 스스로 노양(魯陽)에서 주둔하고 있던 원술(袁術)을 만나러가서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들이 현재 자신의 귀한 몸을 던져서 싸우고 있는 것은, 위로는 국가를 위함이요, 아래로는 장군(袁術) 가문의 원수를 갚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장군은 누구의 모함은 받아들이고 우리의 충정은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그러자 그 즉시 원술(袁術)은 병량(兵糧)을 준비시켰고, 손견(孫堅)은 그것을 가지고는 다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손견(孫堅)은 동탁 군(董卓軍)을 맞아서 잘 싸웠다. 그러자 어쩔 수가 없었던 동탁(董卓)은 그에 낙양(洛陽)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고는 장안(長安)으로 물러갔다. 그러자 손견(孫堅)은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옛 황제들의 능묘들을 복구했다. 그리고 또 <강표전(江表傳)>에 의하면, 바로 그때, 손견(孫堅)은 한(漢)의 옥새(玉璽)를 찾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손견(孫堅)은 노양(魯陽)까지 물러났다. 그리고 또 그때, 손견(孫堅)은 이미 예주(豫州) 자사(刺史)였는데, 그런데 원소(袁紹)가 갑자기 주우(周喁)란 자를 예주(豫州) 자사(刺史)로 파견했다. 그러자 손견(孫堅)과 원술(袁術)은 주우(周喁)와 주앙(周昻) 그리고 주흔(周昕) 그 주 씨(周氏) 삼형제와 예주(豫州)를 놓고 한판 다투게 된다. 그리고 또,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의 대립은 더욱 더 깊어졌고, 그 결과로 또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은 붕괴했으며, 그리하여 많은 무장들이 각자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군웅화(群雄化) 되어갔다. 그리고 또 그리하여 후한(後漢)의 지배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그때부터 전란(戰亂)의 시대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호뇌관(虎牢關)의 싸움>이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 191년에 원소(袁紹)가 인솔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과 동탁 군(董卓軍)이 낙양(洛陽) 교외의 사수관(汜水關)에서 일시적으로 충돌했던 싸움을 말했다. 그리고 그 서전(緖戰)은 연합군이 우세했지만, 그러나 곧 이어서 나타난 맹장 여포(呂布)의 분전으로 동탁 군(董卓軍)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또 이어서 나타났던 관우(關羽)가 화웅(華雄)을 죽이는 등 분전했던 결과 다시 연합군이 우세해졌고, 그러자 동탁(董卓)은 어쩔 수 없이 장안(長安)으로 퇴각한다는 내용이므로, 궁금하신 분은 참고 바랍니다.

 아무튼, 그러나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퇴각한 후, 연합군 측에서는 유대(劉岱)와 교모(橋瑁)의 반목(反目)이 있었고, 그 결과로 교모(橋瑁)가 살해 당했다거나, 또한 병량(兵糧)이 고갈 되었다거나 하는 등 해서, 연합군들은 자연 해산되었다.

 참고: 그러나 演義에서는 그때, 董卓이 焦土作戰을 펼쳤기 때문에, 反董卓連合軍의 보급이 곤란해졌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곳에 모였던 무장 등, 유력자들은 그때부터 각자의 세력들을 키우기 위해서 군웅화(群雄化) 되어갔다. 그런 한편, 그렇게 도망을 갔던 동탁(董卓)은 장안(長安)에서도 폭정을 일삼았다. 그리고 또 동화(銅貨)였던 <오수전(五銖錢)>을 개량해서 화폐 가치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인플레이션도 발생시켰다.


<오수전(五銖錢)>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장안(長安) 근처의 <미(郿)>라는 곳에다 장안 성(長安城)과 같은 높이의 성벽을 쌓게 해서<郿城 또는 미오(郿塢)라고 불렀다> 그곳에다 30년 분(分)의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포학(暴虐)한 짓거리는 변함 없이 행해져서, 자신에게 반항했던 포로들은 모두 혀를 뽑았고, 또한 눈을 도려냈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열탕(熱湯)의 큰 솥에다 넣어서 삶기는 괴로움을 당하게 하면서 죽게 했다. 그리하여 또 그곳에서는 그 포로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매일같이 하늘 끝까지 메아리쳤다지만, 그러나 정작에 그 자신은 태연했으며, 또한 그런 그들을 보면서도 흐뭇하게 웃으면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또 동탁(董卓)의 사위였던 우보(牛輔)란 자는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등을 파견해서 중모(中牟)에서 주준(朱儁)을 파(破)했으며, 이어서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과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의 제현(諸縣)들을 공략했고, 그리하여 약탈과 살육(殺戮), 유괴(誘拐) 등의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렇게 오만하고 잔학했던 동탁(董卓)도 운명을 비켜 가지는 못했고, 그리하여 결국 초평(初平) 3년 4월(192년)에 사도(司徒)였던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자(親子)의 약속까지 맺었던 여포(呂布)가 그를 살해했던 동기에 대해서 논하자면, 정사(正史)에서는 어느 때 여포(呂布)가 아주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동탁(董卓)이 여포(呂布)를 죽이려고까지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에 앙심을 품고 여포(呂布)가 동탁(董卓)을 살해했다거나, 혹은 또 동탁(董卓)의 시녀(侍女)와 여포(呂布)가 밀통을 했는데, 그런데 그 일이 발각이 되자 여포(呂布)는 자신이 받게 될 벌이 무서워서 먼저 그를 죽이게 되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또 <연의(演義)>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왕윤(王允)이 자신의 양녀였던 <초선(貂蟬)>을 이용해서 그런 결과를 낳게 했다고 묘사되어 있다.<(美女) 連環計>





 아무튼 그 후, 장안(長安)과 미(郿)에 거주했던 동민(董旻)과 동황(董璜)을 시작으로 해서 동탁(董卓)의 일족들은 여포(呂布)의 부하들과 원 씨(袁氏) 일족 등에 의해서 전부 살해 당했고, 거기다 당시 동탁(董卓)의 90세나 되었던 노모(老母)까지도 남김 없이 살해 당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동탁(董卓)에 의해서 살해 당했던 원 씨(袁氏) 일족들에 대한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으며, 그와 동시에 그때 살해 당했던 동 씨(董氏) 일족들의 시체들은 모두 한곳에 모아져서 불 질러졌다. 그리고 또 그때, 사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탁(董卓)은 몹시 비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야영을 하던 한 병사가 그의 시체에다 등심(燈心-심지)을 꽂아 두었더니 며칠이나 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어람인동탁별전(御覽引董卓別傳)에서는 <그가 죽자 백성들은 모두 기뻐서 춤을 추었고, 이어서 그들은 집안의 가재(家財)들을 전부 다 내다 팔아서 술과 맛있는 음식들을 샀다. 그리고는 서로 나눠 먹으면서 축하잔치를 벌렸는데, 그러자 그 때문에 장안(長安)의 술과 고기값이 급등했다... >라고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의 부하 중 누군가가 그의 시체가 타고난 재를 모아서 미성(郿城)에다 매장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연의(演義)에서는 그 장면을 각색(脚色)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이각(李傕) 등, 네 장군(四將)이 명령을 내려서 동탁(董卓)의 시체를 찾게 했는데, 그러자 몇 안 되는 뼈와 가죽들만 수거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향나무를 조각해서 동탁(董卓)의 상(像)을 만들어서 그의 유체 대용(代用)으로 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미오(郿塢)로 가서 아주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고, 이어서 왕자(王者)의 의관(衣冠)과 관(棺)으로 그를 매장하려 하였으나, 그런데 마침 또 그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렸고, 이어서 수척(數尺) 깊이의 폭우가 쏟아졌으며, 끝내는 낙뢰가 하늘에서 떨어져서 동탁(董卓)의 유체(遺體)를 산산이 흩어 버렸다. 그리하여 때를 기다려 세 번이나 다시 매장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렸고, 그 후 번개에 맞아서 동탁(董卓)의 유체(遺體)는 이미 이 지상(地上)에서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보아, 그때 그에 대한 하늘의 분노 또한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아무튼, 연의(演義)는 그렇게 동탁(董卓)을 편타(鞭打)했고, 그리고 또 그 <세 번이나>에서 3이란 숫자는 안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가 죽고 난 다음의 세상은 안정을 되찾게 된다, 또는 안정되길 바란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던 것 같지만, 하지만 그 후의 전란(戰亂)의 시대를 보게 되면, 생각을 바꾸어서 그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독재자가 죽음으로 해서, 세상의 안정도 끝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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