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여포(呂布)> 1

 ?- 건안(建安) 3年(198年).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군웅(群雄). 자(字)는 봉선(奉先).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현재의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內> 출생. 빼어난 무용(武勇)을 자랑했고, 삼국지(三國志) 관계의 이야기 등에서는 최강의 무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그는 그 용맹(勇猛)함으로 인해서 당시, 하내(河內)에서 병주(幷州) 자사(刺史)로 주둔하고 있었던 기도위(騎都尉) 정원(丁原) 휘하에서 주부(主簿)를 지내며 중용(重用)되었다. 그러다 중평(中平) 6년(189년)에 영제(靈帝)가 죽자 나라에 혼란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그 한중간에 그는 정원(丁原)과 함께 수도였던 낙양(洛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또 당시 중앙 권력을 장악하려던 동탁(董卓)과 충돌했지만, 그러나 또 그 후에는 오히려 동탁(董卓)의 꾐에 넘어가서 정원(丁原)을 죽이고 동탁(董卓)에게 붙었다.

 그 후, 그는 동탁(董卓)의 양자가 되었고, 이어서 정원(丁原)의 자리였던 기도위(騎都尉)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 얼마 후에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했으며, 이어서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동탁(董卓)의 방약무인(傍若無人)했던 전횡을 보고서도 그 여포(呂布) 때문에 제대로 말도 하질 못했다.

 그리고 여포(呂布)는 원래부터 완력(腕力)이 뛰어났기 때문에, 궁술이나 마술(馬術)에도 뛰어나서, 전한(前漢) 때 활약했던 이광(李廣)에 비견되며 비장(飛將)으로 불렸다.

 -------------------------------------------------------------------------------------------


 
※ 인물소개 <이광(李廣-?-기원전 119년)>

 중국 전한(前漢)의 무장이었으며,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무제(武帝)를 섬겼다. 그리고 무용(武勇)이 뛰어났지만 전공(戰功)을 인정받지 못하고 분사(憤死)했던 비운의 장군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진(秦)의 명장(名將)이었던 이신(李信)의 자손이었으며, 종제(從弟)로는 승상을 지냈던 이채(李蔡)가 있었고, 손(孫)에 이능(李陵)이 있었다. 그리고 본적지(本籍地)는 농서군(隴西郡) 성기현(成紀縣=현재의 甘肅省 天水市 泰安縣).

 그는 기원전 166년, 흉노정벌에 공이 있어 낭(郎)이 되었고, 문제(文帝)의 곁에서 기사(騎士)를 지냈다. 그러던 중에 수렵(狩獵)을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맹수와 싸워서 죽이는 무용(武勇)을 보였기 때문에, 문제(文帝)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만약 네가 고조(高祖=劉邦)시대에 살았더라면, 1만호(萬戶)의 제후에 봉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후, 그는 경제(景帝) 시대에 효기도위(驍騎都尉)에 임명되었고, 주아부(周亞夫) 휘하에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을 진압하는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단, 양왕(梁王) 무(武)의 장군에 임명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漢)으로부터의 은상(恩賞)은 없었다.

 그 후, 그는 상곡(上谷)의 태수(太守)와 상군(上郡)의 태수(太守)를 역임했으며, 그리고 또 그때 10배의 흉노군(匈奴軍)에 포위당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기치를 발휘해서 오히려 느긋하게 행동하면서 마치 자신의 배후에 복병을 숨겨둔 것처럼 처신했다. 그러자 흉노군(匈奴軍)은 더 이상 그를 쫓지 않고 돌아갔다.

 그 후에 또 그는 농서(隴西)와 북지(北地) 그리고 응문(應門), 운중(雲中)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그러나 그 모든 지역은 北邊이었으며 匈奴에 가까웠다) 그러자 당시, 흉노(匈奴)는 그를 몹시 두려워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 후에 그와 같이 무용(武勇)이 뛰어난 자나 나타나면 그를 모방해서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다음 무제(武帝) 때, 그를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위위(衛尉)로 승진했다. 그리고 그 후, 무제(武帝)가 마읍(馬邑)에서 주둔하고 있던 흉노(匈奴)를 꾀어내서 공격하려 했을 때, 그는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종군했지만, 그러나 공적은 없었다.

 기원전 129년, 그는 흉노(匈奴)와 싸워서 패했고,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탈출해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지만, 그러나 죄를 추궁 당하고는 평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또 우북평(右北平)의 태수(太守)가 되었고, 이어서 낭중령(郎中令)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흉노(匈奴)와 자주 싸웠지만, 전과(戰果)를 올리지는 못했고, 기원전 119년 흉노(匈奴) 공격 때는 고령이라는 이유로 열외(列外)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그는 그에 대해서 맹렬한 항의를 했고, 그 결과 다시 복귀되었다. 그러나 또 그는 전(前) 장군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무제(武帝)의 밀명(密命)을 받았던 대장군 위청(衛靑)에 의해서 후방군에 배치되었다. 그러자 또 그는 그 결정에 반발해서 단독으로 다른 방면으로 진군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서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전장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자 또 위청(衛靑)이 그에 대해서 보고서를 올리기 위해 이광(李廣)의 부하들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이광(李廣)이 갑자기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소리쳤다고 한다. <나는 성인(成人)이 된 이후, 흉노(匈奴)와 크고 작게 70여 차례나 싸워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위청(衛靑) 대장군을 따라서 그 흉노(匈奴)와 싸울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는데, 그런데 대장군이 나를 후방으로 돌려버리는 차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말았다. 아! 그러니 이것이 바로 천명(天命)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해버렸다. 그러자 또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그의 부하들은 물론, 모든 민중(民衆)들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했었다고 한다.

------------------------------------------------------------------------------------------


 그리고 또 삼국지(三國志)의 주석(注釋)에 해당되는 조만전(曹瞞傳-自體는 散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애마(愛馬)였던 적토(赤免)와 함께 <사람 중에는 여포(呂布)가 있고, 말(馬) 중에는 적토(赤免)가 있다>라고 송찬(頌讚)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반면(反面)으로, 그는 지모(智謀)가 결핍되어 적의 꾐에 잘 넘어가는 성격이었으며, 절조(節操)가 없고, 물욕이 강했던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후, 그는 왕윤(王允)의 꼬임에 넘어가서 동탁(董卓)을 살해했고, 그로써 동탁(董卓)의 공포정치도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설(諸說)이 있으며(董卓 참조), 그러자 또 그는 그 후에, 동탁(董卓)의 고향이었던 양주(凉州) 출신자들을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증오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양주(凉州) 사람들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또 원인 중 하나가 되어서, 동탁(董卓)의 수하였던 곽사(郭汜)와 이각(李傕) 등, 양주(凉州) 세력들이 장안(長安)을 습격했다. 그러자 또 여포(呂布)는 그것을 막기 위해 응전(應戰)했지만 막지 못했고, 그 결과로 그들에게 장안(長安)을 빼앗겼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삼국지(三國志)의 주석(注釋) 영웅기(英雄記)에 의하면, 그 공방전(攻防戰) 때 여포(呂布)는 곽사(郭汜)에게 일대일 대결을 신청해서 그를 부상시켰지만, 하지만 곽사(郭汜)는 자신의 편에 의해서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여포(呂布)는 수백(數百) 기(騎)를 이끌고 무관(武關)으로 도망쳤다.

 그 후에 그는 원술(袁術)에게 의지하려 했지만 거부되었다. 그러자 그는 장연(張燕) 등 흑산적(黑山賊)과 싸우는 것으로 하북(河北)의 원소(袁紹)를 도왔다. 그러자 그 후에 그의 군은 더욱 강해졌고, 이어서 정강(精强)을 자랑했던 흑산적(黑山賊)도 격파했다.

 하지만 그 후, 여포(呂布)는 원소(袁紹)에게 병력의 보충을 요구했다거나, 병력을 약탈했다거나 해서 원소(袁紹)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것을 알게 된 그는 원소(袁紹)에게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또 원소(袁紹)는 그에게 자객을 보냈지만 실패했고, 여포(呂布)는 끝내 원소(袁紹)의 손아귀에서 탈출했다.

 그 후, 그는 중원(中原)의 유랑객(流浪客) 신세가 되었고, 그러다가 진류(陳留)를 통과해서 당시, 조조(曹操)의 친구였고, 신뢰도 두꺼웠던 진류(陳留) 태수(太守) 장막(張邈)에게로 가서 환대를 받았다. 그러자 원소(袁紹)는 그것을 몹시 분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결국 그는 하내(河內)의 장양(張楊)에게로 가서
의지했다.

 그런데 그 이전(以前), 원소(袁紹)는 장막(張邈)과 말다툼을 벌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원소(袁紹)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조조(曹操)에게 장막(張邈)을 살해할 것을 사주(使嗾)했다. 그러자 조조(曹操)는 그때 원소(袁紹)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만 마음을 접어주길 원하오. 그리고 또 지금은 같은 편끼리 서로 싸울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오!>

 그러자 그 후, 장막(張邈)은 조조(曹操)에게 은의(恩義)를 가지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장막(張邈)은 당시의 실력자였던 원소(袁紹)에게 미움을 많이 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원소(袁紹)가 조조(曹操)에게 시켜서 자신을 공격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싸이게 되었다. 거기다 또 장막(張邈)은 조조(曹操)의 부하였으면서도 또한 그 조조(曹操)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진궁(陣宮)에게 설득 당해서 여포(呂布)를 맹주로 맞아 들였던 한편, 그를 연주(兗州) 자사(刺史)로 세우고는 조조(曹操)에게 대항하게 된다. 그러자 또 그 두 진영은 황해(蝗害=蝗災=메뚜깃과의 곤충인 풀무치 떼가 날아와서 농작물을 남김없이 먹어버리는 큰 재해)에 시달리면서도 1년 이상 격렬하게 싸웠고, 그러던 중 또 여포 군(呂布軍)이 조조(曹操)에게 큰 상처를 입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결국 여포 군(呂布軍)은 조조 군(曹操軍)에게 졌다. 그러자 여포(呂布)와 진궁(陣宮)은 당시 서주(徐州)에서 주둔하고 있던 유비(劉備)를 찾아가게 된다.

 ----------------------------------------------------------------------------------------------


 <유비(劉備)> 1

 161년-223년 6월 10일. 후한(後漢) 말에서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촉(蜀漢)의 초대황제. 황건(黄巾)의 난(亂) 때((靈帝) 공적을 올렸으나 그 후로는 각지로 전전했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을 만나면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수용(受容)했고, 촉(蜀)으로 가서 세력을 키웠다. 그 후, 후한(後漢)이 멸망하자 황제에 즉위했고,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자(字)는 현덕(玄德). 시호(諡號)는 소열황제(昭烈皇帝). 재위(在位)는 221-223년. 부(父)는 유홍(劉弘).



 


 명대(明代)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는, 탁군(涿郡) 탁현(涿縣=현재의 河北省 保定市 涿州) 출신이었고, 전한(前漢)의 중산정왕 유승(中山靖王 劉勝)의 말예(末裔)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涿州 (市)>

 

 ※ 유승(劉勝-?-기원전 113년)은 전한(前漢)의 황족이었으며, 제후왕(諸侯王)이었고, 제6대 황제 경제(景帝)의 제8자(子)였다. 생모는 가부인(賈夫人)이었고, 동모형(同母兄)이었던 조(趙)의 경숙왕(敬肅王) 유팽조(劉彭祖)가 있었다. 시호(諡號)는 정왕(靖王).

 아무튼, 유비(劉備)는 황건(黃巾)의 난(亂) 때,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과 함께 의용군을 결성했고, 그 진압에 공(功)을 올렸다. 그러자 일단 공직(公職)에는 올랐지만, 그러나 곧 그 직을 버리고 유랑객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각지를 전전하다가 공손찬(公孫瓚), 원소(袁紹) 등의 휘하에서 싸웠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서주(徐州) 자사(刺史), 예주(豫州) 목(牧) 등의 지위를 얻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일정한 본거지를 정하지는 못했고, 그 후에 관도(官渡)의 싸움에서는 원소군(袁紹軍)에 참가했으며, 이어서 조조(曹操)에게 군사들을 맡기고는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그리고 또 그러던 중에 그는 제갈량(諸葛亮)을 만났으며, 그에게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듣고 수용(受容)했다. 그리고 또 유표(劉表) 사후(死後), 그는 손권(孫權)과 연합해서 조조(曹操)에 대항했으며, 그 후에는 또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에 근거해서 촉(蜀)을 나라로 정했다. 그리고는 또 자칭 한중왕(漢中王)이 되어서는 삼국(三國)의 구도를 완성했고, 그 후에는 헌제(獻帝)였던 조비(曹丕)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았으며, 이어서 부하들의 추대로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참고: 그리고 그때, 유비(劉備)는 황제(獻帝가 살해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뒤를 계승한다는 형식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때, 실제로는 헌제(獻帝)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에 그는 손권(孫權)을 치기 위해서 친정(親征)까지 감행했지만, 그러나 이능(夷陵)의 싸움에서 육손(陸遜)에게 대패하고는 백제성(白帝城)으로 도망간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향년(享年) 63세였고, 후계자는 적자(嫡子)였던 유선(劉禪)으로 결정했으며, 제갈량(諸葛亮)에게는 유선(劉禪)의 보좌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시호(諡號)는 소열황제(昭烈皇帝)로 정해졌으며, 그리고 그 소열(昭烈)에서 소(昭)는 빛(光)과 통하는 것이고, 또 열(烈)은 무(武)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은 후한(後漢)을 부흥(復興)시켜서 촉한(蜀漢)을 일으켰던 그의 사적(事績)을 찬양했던 것이었다고 하며, 그것은 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전한(前漢)을 부흥시켰던 것을 의식해서 지어졌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호칭(呼稱)에 대해서도 조금 설명하고 넘어가면, 삼국지(三國志-正史)에서는 그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고 하지 않고 <선주(先主)>라고 표현했으며, <촉서(蜀書)>의 유비전(劉備傳)에서도 그를 선주공(先主公)으로, 그리고 유선(劉禪)을 후주(後主)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면, 그것은 또 당시 삼국지(三國志)를 썼던 진수(陳壽)의 입장이 위(魏)만을 정통(正統)으로 보았었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또, 그의 계보(系譜)에 대해서도 조금 살펴보면, 그는 후한(後漢) 경제(景帝)의 8자(子)였던 중산정왕 유승(中山靖王 劉勝)의 서자(庶子) 유정(劉貞)의 말예(末裔=後裔)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 유승(劉勝)은 자(字)와 손(孫)을 포함해서 120명 이상의 자손을 남겼는데, 그래서 그 중의 한사람이었던 유비(劉備)의 조(祖)라고 생각되는 유정(劉貞)은 기원전 117년에 탁군(涿郡) 탁현(涿縣)의 열후(列侯)로서 육성정후(陸城亭侯)란 작위(爵位)을 하사 받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 한서(漢書)의 왕자후표(王子侯表)에 의하면, 육성후(陸城侯)라고 되어 있고, 정후(亭侯)는 후한(後漢)의 작위 제도였다. 그러므로 전한(前漢) 때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왕자후표(王子侯表)에서 유정(劉貞)은 127년에 후(侯)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112년 연초(年初-正月)에 당시, 열후(列侯)들에게만 부과 되었던 상납금(上納金=酎金)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후국(侯國)에서 제외 되었고, 그 결과 사서(史書)에서도 계보(系譜)가 끊기게 되었다.

 참고: 주금(酎金)은 전한(前漢) 때, 조정(朝廷)에서 제사(祭祀)를 올렸을 때 갹출(醵出=拠出)했던 금(金)을 말했다. 그리고 한서(漢書)의 무제기(武帝紀)의 안사고(顔師古) 등의 주(注)에 의하면, 주(酎)는 순도 높은 술이며, 그리고 한(漢)에서는 8월에 그 술을 종묘(宗廟)에 공양했던 의식이 있었는데, 그러면 또 그때 열후(列侯)들은 봉국(封國)의 호수(戶數)에 상당하는 양의 황금을 황제에게 헌상해야만 했다고 한다.(하략)

 그래서 선주전(先主傳) 주(注) 인용 전략(典略)에서는, 유비(劉備)를 임읍후(臨邑侯)의 서류(庶流-서자계통)였다고 기록했다.

 참고: 그런데 후한서(後漢書)에는 3명의 임읍후(臨邑侯)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또 살펴보면, 그 중의 한 사람은 건무(建武)2년(서력26년)에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楊)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유양(劉讓)이었고, 그리고 또 한사람은 건무(建武) 30년(54년)에 임읍후(臨邑侯)에 봉해졌던 유복(劉復)이었으며, 그리고 또 나머지 한사람은 그 유복(劉復)의 자(子) 유도흥(劉騊興)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또 유양(劉讓)과 유양(劉楊)은 형제 사이였고, 유양(劉楊)은 또 후한(後漢) 경제(景帝)의 7대손(代孫)이었다. 그리고 유복(劉復)은 북해정왕(北海靖王) 유흥(劉興)의 아들이었고, 유흥(劉興)은 또 광무제(光武帝)의 형이었던 제무왕(齊武王) 유연(劉縯-字는 伯升)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또 다음은 참고로, 유비(劉備)의 계보(系譜)에 대한 것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景帝-劉勝-劉貞-劉昴-劉禄-劉恋-劉英-劉健-劉哀-劉憲-劉舒-劉誼-劉必-劉達-劉不疑-劉恵-劉雄-劉弘-劉備 (三国志演義)

 景帝-常山憲王 劉舜-真定頃王 劉平-真定烈王 劉偃-真定孝王 劉由-真定安王 劉雍-真定共王 劉普-臨邑侯 劉譲(典略)

 景帝-長沙定王 劉発-舂陵節侯 劉買-鬱林太守 劉外-鉅鹿都尉 劉回-南頓県令 劉欽-斉武王 劉縯-北海靖王 劉興-臨邑侯 劉復-臨邑侯 劉騊駼

 그리고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과 그의 아들 육성정후(陸城亭侯) 유정(劉貞) 이후의 계보로,(다음은 그 아들을 - 로 표시함) 유정(劉貞)-유묘(劉昴)는 패후(沛侯)-유록(劉祿)은 장후(漳侯)-유연(劉戀)은 기수후(沂水侯)-유영(劉英)은 흠양후(欽陽侯)에 봉해졌고, 유정(劉貞) 이후 수대(數代)는 열후(列侯)의 작록(爵祿)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가문이 쇠퇴해서 유비(劉備)의 부모 대(代)에 이르렀을 때는 겨우 신발이나, 돗자리를 팔아가며 생계를 이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또 유비(劉備) 대(代)에 이르자 헌제(獻帝)를 알현했으며, 이어서 한(漢)의 종친(宗親)으로 인정 받았고, 그리고는 좌장군(左將軍) 선성정후(宜城亭侯)에까지 봉해졌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또 그 후로는 가운(家運)이 상승했으며, 이어서 후한(後漢)이 멸하자 촉한(蜀漢)의 황제에 등극했다고도 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창작이다. 그리고 또, 그의 풍모(風貌)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 보자면, 그는 키가 7척5촌(七尺五寸=172.5cm)이었고, 팔이 무릎에까지 닿았으며, 귀도 너무 커서 스스로도 그 귀를 볼 수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 와타나베 세이이치(渡辺精一)의 <三国志人物鑑定辞典>에서는 <무릎까지 늘어지는 긴 손>은 <손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는 뜻으로, 그것은 곧 다재(多才)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고, 거기다 <자신의 귀를 볼 수도 있는 눈>은 <세세한 것까지도 잘 볼 수 있다>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그의 신체적인 묘사는 곧 그가 <총명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자기 주관이다.

 그리고 또, 현재 남아 있는 유비(劉備)의 초상화에는 훌륭한 수염을 그려두고 있지만(위의 그림 참조), 그러나 촉서(蜀書)의 주군전(周羣傳)에서는 <유비(劉備)가 장유(張裕)에게 노탁군(潞涿君=수염이 엷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라는 따짐을 받았다>라고 했다.

 참고: 노(潞)는 노(露=드러남, 露出)와 동음(同音)이고, 탁(涿)은 탁(啄=입, 口)과 동음(同音)이므로, 그래서 풀이를 하면, 입가가 훤한 사람, 또는 수염이 없는 또는 빈약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유비(劉備)는 그때의 일에 한(恨)을 품고는 자신이 황제에 즉위한 후, 그 죄를 물어서 장유(張裕)를 처형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사연에 대한 참고로, 장유(張裕)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함.

-------------------------------------------------------------------------------------------


 ※ 장유<張裕-?-221년. 장무(章武) 원년>

 후한(後漢) 말기부터 삼국시대의 학자, 정치가. 촉(蜀)에 종사(從事)했으며, 자(字)는 남화(南和). 촉군(蜀郡) 출신. 삼국지의 촉지(蜀志)에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천공(天空)의 자연현상(自然現象)을 이용해서 예언을 하는 술법(術法)에 뛰어났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그의 재능으로 말하자면, 양후(楊厚)에게서 도식(圖識)의 술(術)을 배웠다던 주군(周羣)보다도 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무명(無名)의 청년이었던 등지(鄧芝)의 관상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하며 <너는 70세가 넘으면 대장군이 되고, 제후에 봉해질 것이다> 그러자 그 후,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고, 등지(鄧芝)는 70세가 넘은 고령에 차기장군(車騎將軍)과 강주(江州) 도독(都督)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유장(劉璋)의 휘하에서 종사(從事-일종의 副官)를 지내고 있었을 때, 문제의 유비(劉備)가 유장(劉璋)과 의논할 것이 있다며 찾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동석(同席) 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유비(劉備)가 장유(張裕)의 수염이 풍성한 것을 보고 몇 마디 했다. 그러자 장유(張裕)는 그것이 기분 나빠서 유비(劉備)에게 비꼬듯이 노탁군(潞涿君)이라고 쏘아 붙였다. 그러자 또 유비(劉備)는 그에게 한(恨)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이하, 후술 또는 생략)

 

 

 

 

 

 <유비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