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손견(孫堅)> 1

 155년 또는 156년-191년 또는 192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자(字)는 문대(文臺). 오군부춘현(吳郡富春縣-현재의 浙江省 杭州市 富陽縣) 출신. 삼국시대에 성립되었던 오(吳)의 황제 손권(孫權)의 부(父). 묘호(廟號)는 시조(始祖). 시(諡)는 무열황제(武烈皇帝). 가계(家系)는 손 씨(孫氏). 손견(孫堅)은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병가(兵家)였던 손무(孫武)의 자손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물론, 그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등에 대해서는 현재 불명(不明)하다.

 참고: 본문 중의 기술은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손파노토역전<孫破虜討逆傳-그러나 孫破慮()討逆傳으로 기록된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 그리고 여기서는 孫破虜(노 또는 로)討逆傳으로 기록함>에 의함. 그리고 남조(南朝) 송대(宋代)에 저술된 <이원(異苑)>이란 책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과물(瓜物-오이나 참외 등의 농작물)을 팔던 손종(孫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같은 대(代)의 문헌이라고 생각되는 <유명록(幽明錄)-현재는 散逸>에도 손종(孫鐘)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고 하며, 더구나 동진(東晋) 때 배계(裵啓)가 저술했던 배자어림(裴子語林)이란 책에서도 손종(孫鐘)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17세 때, 전당(錢唐)이란 곳에서 해적(海賊)들이 약탈을 일삼고 있던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자 그는 곧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고, 그리고는 이어서 탁 트인 곳으로 가서는 자신이 마치 대군을 지휘하며 그 해적들을 곧 섬멸할 것처럼 몸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행동했다. 그러자 그것을 본 해적들은 그때 정말로 대군이 공격해 오는 줄로 착각을 하고는 모두 다 도망을 갔다. 그러자 그 후 그는 곧 유명하게 되었고, 이어서 관청에 초대되어 가위(假尉=경찰이나 軍事 담당)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사마(司馬-兵員管理擔當)가 된 그는 회계군(會稽郡)에서 일어났던 허창(許昌)의 난(亂)을 진압했다.

 참고: 위의 허창(許昌)은 하남성(河南省)의 허창(許昌)이 아닌 인명(人名)임. 그리고 그 허창(許昌)은 회계(會稽) 출신으로, 황제를 자칭하며 구장(句章-현재의 浙江省 寧波市) 근처에서 난(亂)을 일으켰던 종교지도자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 그때 가담했던 사람들은 수만(數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그 강동(江東) 일대에는 종교(宗敎) 세력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반란을 진압한 후, 그는 그 공적으로 몇 곳의 현(縣) 차관(次官)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좋은 평을 받았으며, 그래서 관리들뿐만이 아니라 백성들도 모두 그를 잘 따랐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그는 자신의 군단(軍團)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184년, 태평도(太平道)의 장각(張角)이 일으켰던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그 역시도 당시 중랑장(中郞將)이었던 주준(朱儁)의 휘하로 들어가서 참전했다. 그리고는 황건(黃巾)의 거수(渠帥-악당의 우두머리)였던 파재(波才) 공격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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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주준(朱儁)> ?-195년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정치가. 자(字)는 공위(公偉). 회계군(會稽郡) 상우현(上虞縣) 출신. 자(子)에는 주호(朱皓)와 주부(朱符)가 있었다고 한다.(後漢書) 주준(朱儁)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몹시 궁핍하게 살았다. 그러자 그는 홀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셔서 효성(孝誠)이 자자했고, 자라서는 의(義)를 좋아하고, 재물을 멀리했기 때문에, 현(縣)의 문하서좌(門下書佐)가 되었다.

 참고: 縣의 門下書佐에서 門下란, 佐原康夫(사와라 야스오) 著 <漢代都市機構의 研究> 第二部 <都市의 財政과 官僚機構> 第三章 <漢代의 官衙와 属吏>에 의하면, 대충 장관(長官)과 사종적(私從的)인 측면(側面)에 있었던 직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장관의 비서(秘書) 같은 직이었을 것이란 추측도 하면서, 그러나 관질(官秩)은 극히 낮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상우현(上虞縣)의 장(長)으로부터 직접 발탁되었던 주준(朱儁)이었던 관계로, 장(長)의 직속 부하였을 가능성 또한 언급했다. 그리고 또 <속한서(續漢書)>의 백관지(百官志)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으므로, 그래서 또 서기관(書記官)을 연상할 수 있다고 한다. 단, 번역은 하지 않으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簿曹書佐主簿書. 其餘都官書佐及毎郡國, 各有典郡書佐一人, 各主一郡文書, 以郡吏補, 歳滿一更>

 아무튼, 그는 또 동도(同郡)의 주규(周規)라는 자가 삼공(三公)의 초빙을 받아서 상경하려 했을 때, 여비 등이 모자라는 것을 알고는 자기 어머니의 돈을 훔쳐서 그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그를 꾸짖었는데, 그러자 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 제가 그 사람에게 준 돈은 우리 집으로 볼 때는 작은 손실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큰 이익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현장(縣長)이었던 도상(度尙)의 추천을 받아서 위의(韋毅)가 태수(太守)하던 시절에 군(郡)에 등용되었고, 이어서 윤단(尹端)이 태수하던 시대에는 주부(主簿)가 되었다.

 참고: 주부(主簿)는 관리(官吏)를 감독하던 직이며, 문서심사(文書審査)를 하던 직에 상당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막료(幕僚)의 장(長)적(的)인 존재로 변화했고, 어사대(御史臺) 또는 군현(郡縣)에 두었으며, 넓게는 각부(各府)와 군국(君國) 그리고 장군부(將軍府)에도 설치되었다.(陣琳)

 그런데 그 후, 윤단(尹端)이 도적이었던 허소(許昭)를 토벌하는데 실패했다. 그러자 당시 양주(揚州) 자사(刺史)가 상소(上訴)를 올려서 그를 사형(死刑)에 처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은밀하게 수도(首都)로 올라가서 그곳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는 그 상주문을 정정(訂正)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윤단(尹端)은 겨우 사형만은 면할 수 있게 되어 기뻐했는데,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몰랐다고 한다.

 그런 다음, 서규(徐珪)가 태수(太守)가 되었던 시절에 그는 효렴(孝廉)에 추천되었고, 이어서 난능(蘭陵)이란 곳의 현령(縣令)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의 일하는 태도가 동해국(東海國) 상(相)의 눈에 띄어서 중앙에 보고되었다. 그리고 또 178년, 교지(交趾)의 반란이 길어지자, 그는 그곳의 자사(刺史)로 발탁되었다.

 참고: 교지(交趾)는 전한(前漢)에서 당(唐)까지 설치되었던 중국 군(郡)의 한 명칭이었으며, 현재로서는 베트남 북부의 송코이 강(紅河) 유역의 지역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 후에 독립해서 교지(交趾) 또는 교지(交阯)라고 불리게 되었다.



<송코이 강의 석양>


 그 후, 그는 반란진압에 나섰는데, 그런데 그 전에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데려왔던 5천명의 군사들을 한곳에 집결시키고는 적의 동태를 충분히 정찰했다. 그런 다음, 군을 둘로 나누어서 각각 다른 방향에서 그 교지(交趾)를 향해서 가게 했다. 그리고는 그 교지(交趾) 시가(市街)를 당당하게 입성하는 것으로 적의 사기를 꺾은 다음, 교주(交州) 7군(郡)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런 다음, 진압에 들어가서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두목 양용(梁龍)의 목을 베고 그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자 그는 그 공으로 1500호(戶)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고, 중앙으로 불려져서 간의대부(諫議大夫-過失을 諫하는 職)가 되었다.

 184년, 황건(黄巾)의 난(亂)이 일어나자 그는 우중랑장(右中郞將)에 임명되었고, 좌중랑장(左中郞將) 황보숭(皇甫嵩) 등과 각지를 전전하면서 난을 평정했다. 그러자 또 그 공으로 그는 서향후(西鄕侯)와 진적중랑장(鎭賊中郞將)에 임명되었고, 그러자 또 바로 그때, 같은 양주(揚州) 출신의 손견(孫堅)을 천거(薦擧)했다고 한다.(三國志 吳志 孫破虜討逆傳)

 그 후에 또 그는 남양(南陽)의 조홍(趙弘)을 사마(司馬) 장초(張超)와 형주(荊州) 자사(刺史) 서구(徐璆) 그리고 남양(南陽) 태수(太守) 진힐(秦頡) 등과 함께 장시간(長時間)의 포위전(包圍戰) 끝에 격파했고, 그 후에는 또, 그때 도망을 가서 완(宛)에 주둔하고 있던 한충(韓忠)의 군대를 격파해서 목을 베었으며, 그 잔당이었던 손하(孫夏)도 제압했다. 그리고 또 이어서 185년에, 그는 우차기장군(右車騎將軍), 광록대부(光祿大夫), 전당후(錢塘侯) 등에 봉해지는 특진(特進)을 받았으며, 식읍(食邑) 5천도 증가되었다. 하지만 그 후, 모(母)의 상(喪)을 위해 사임한 후, 다시 중앙으로 불려가서 장작대장(將作大匠), 소부(少府), 태복(太僕)을 역임했다.

 그 후, 황건(黃巾)의 잔당들이 각지에서 봉기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장연(張燕)이란 자는 일시 조정에 항복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다시 반기(反旗)를 들고 낙양(洛陽)을 위협했다. 그러자 주준(朱儁)은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전출(轉出)되어서 그들을 퇴각시켰고, 그러자 또 그 공으로 광록태부(光祿太夫)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차례로 성문교위(城門校尉), 하남윤(河南尹)으로 전임(轉任)했다.

 그 후,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조정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동탁(董卓)은 겉으로는 주준(朱儁)을 우대했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를 아주 싫어했다. 그러자 주준(朱儁)도 동탁(董卓)의 전횡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한 천도(遷都) 계획에도 반대했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를 태복(太僕)에 임명하며 자신의 수하(手下)에 두려고 하였으나,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 후,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천도(遷都)했고, 그는 낙양(洛陽)에 남겨졌다. 그러자 또 그때 산동(山東)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손길이 뻗쳐왔고, 그러자 그는 또 그에 동조하기로 약속까지 했지만, 그러나 또 동탁(董卓)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해서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도망쳤다.

 그 후에 그는 또 병사를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당시, 동탁(董卓)이 임명했던 하남윤(河南尹) 양의(楊懿)를 추방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곳은 이미 전란으로 인해서 황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중모(中牟)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주둔했다.

 그 후, 그는 독자적으로 동탁(董卓)을 타도하기 위해서 제군(諸郡)들과 거병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서주(徐州) 자사(刺史)였던 도겸(陶謙) 등이 호응했지만, 그러나 그때,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에 주둔시켜 두었던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동탁(董卓) 사후(死後)에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장안(長安)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도겸(陶謙)으로부터 태사(太師)를 권유받았다. 그리고 도겸(陶謙)과 공융(孔融) 그리고 응소(應劭)와 서구(徐璆) 그리고 또 복건(服虔)과 정현(鄭玄)들은 연명(連名)해서 헌제(獻帝)를 맞이할 것을 상주(上奏)했다. 그러자 또 이각(李傕) 등은 태위(太尉)였던 주충(周忠)과 상서(尙書)였던 가후(賈詡)의 권유를 받아서 주준(朱儁)을 중앙으로 초빙했다. 그러자 또 주준(朱儁)은 초빙에 응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생각해서 도겸(陶謙) 등과 함께 입조(入朝)했다. 그러자 그 후에 또 그는 태복(太僕)이 되었고, 그리고 193년에는 태위(太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참고: 녹상서사(錄尙書事)는 중국 후한(後漢)부터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까지 존재했던 관직으로, 상서(尙書)를 통솔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재상(宰相) 직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수대(隋代)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는 일식(日食)이 일어나자 면직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194년에는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었다.

 참고: 표기장군(驃騎將軍)은 都督이며, 位는 三公 다음. 通常 武官의 最高位(近衛騎兵師團長)였음. 그리고 그 직에 있었던 사람으로, 曹洪과 馬超 그리고 呉班 등이 있었음.

 그 후, 그가 관동(關東)으로 출진하려 했을 때, 이각(李傕) 등이 내분(內紛)을 일으켜서 조정이 혼란해졌다.
 그러자 그는 출진을 포기하고 장안(長安)에 머물렀고, 이어서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

 
참고: 大司農은 九卿이며, 전곡금금(錢穀金錦) 등 諸 화폐를 관할했고, 농정(農政)과 국가재정을 담당했다. 그리고 또 참고로, 대창령(大倉令)은 연공미(年貢米)의 수송을 감독했으며, 균수령(均輸令)은 전매물자(專賣物資)를 감독했다.

 하지만 그 후, 그는 이각(李傕) 등과의 화목(和睦)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무슨 연유로 곽사(郭汜)의 인질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분노로 인한 병을 얻어서 그날로 죽었다.

 그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도 황건(黃巾)의 난(亂)을 진압하기 위해서 관군의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오만한 성격에다 부패관리의 전형으로 묘사되었고, 그래서 의용군을 인솔해서 난 진압에 참가했던 유비(劉備) 등을 처음에는 함부로 대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유비(劉備) 등의 활약을 보고나자 자신의 공명(功名)에 그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사실과 같게, 이각(李傕) 등과의 갈등으로 장안(長安)에서 분사(憤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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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주준(朱儁)이 여남(汝南)의 영천(潁川) 등지로 전전했을 때, 그도 함께하며 군공(軍功)을 세웠다. 그리고 또 완 성(宛城)을 공략했을 때는, 그 스스로 선봉에 서서 성벽을 기어올랐고, 서남 방면의 관군들을 인솔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 공적으로 그는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참고: 별부사마(別部司馬)는 行破賊都尉라고도 하며, 小隊의 副官 정도의 직급이었음.

 

 

 

 

 

 

 <손견(孫堅)>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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