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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손견(孫堅)> 2
155년 또는 156년-191년 또는 192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 자(字)는 문대(文臺). 오군부춘현(吳郡富春縣-현재의 浙江省 杭州市 富陽縣) 출신. 삼국시대에 성립되었던 오(吳)의 황제 손권(孫權)의 부(父). 묘호(廟號)는 시조(始祖). 시(諡)는 무열황제(武烈皇帝). 가계(家系)는 손 씨(孫氏). 손견(孫堅)은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병가(兵家)였던 손무(孫武)의 자손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물론, 그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등에 대해서는 현재 불명(不明)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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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년, 승진과 동시에 그는 양주(凉州)에서 변장(邊章)과 한수(韓遂)가 일으켰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진했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는 이미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동탁(董卓)이 출진해 있었는데, 하지만 동탁(董卓)이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대신으로 사공(司空-三公의 다음, 六卿의 하나 位)이었던 장온(張溫)이 그 지휘권을 넘겨 받았고, 그러자 손견(孫堅)은 그 장온(張溫)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동탁(董卓)이 몇 번에 걸쳐서 군법을 어기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장온(張溫)에게 동탁(董卓)을 처형할 것을 진언했다. 하지만 장온(張溫)은 나중에 동탁(董卓)의 힘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또 그 후, 동탁(董卓)은 그 일을 잊지 않고 두고두고 장온(張溫)과 손견(孫堅)을 증오했다.
아무튼 또 그 후, 후한(後漢)의 대군이 몰려 온다는 첩보를 받았던 변장(邊章)과 한수(韓遂) 등은 관군에 항복을 했고, 그러자 또 그는 의랑(議郞)이 되었다.
참고: 의랑(議郞)은 郎中令(光錄勲)의 属官으로 顧問과 應對 등을 담당했다.
그 후에 또 손견(孫堅)은 장사(長沙) 태수(太守)에 임명되었음과 동시에, 형주(荊州) 남부에서 일어났던 구성(區星)의 난 진압을 명받았다. 그러자 그는 다양한 계략을 써서 그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그 구성(區星)을 원조했던 영능(零陵)과 계양(桂陽) 2군(郡)까지 진격해서 나머지 잔당들도 전부 진압했다.
참고: <呉書>의 정보전(程普傳)에 의하면, 손가삼대(孫家三代)에 종속했던 손군단(孫軍團)의 중핵(中核)을 담당했던 정보(程普)는 그 황건적(黃巾賊) 토벌 때, 손견(孫堅)의 군단에 참가했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는 그 공으로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각지의 인재들을 손에 넣게 된 손견(孫堅)은 전장을 누비면서 실전 경험을 충분히 쌓았고, 그리하여 점차 군벌화(軍閥化) 되어갔다.
참고: 위의 오정후(烏程侯)는 조정후(鳥程侯)와 혼용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참고하시며, 그리고 <오서(吳書)>의 황개전(黃蓋傳)에 따르면, 그 황개(黃蓋)는 바로 그 시점에서 손견(孫堅)의 부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즈음, 낙양(洛陽)에서는 동탁(董卓)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동탁(董卓)은 이미 전술(前述)한 것 외에도 장온(張溫)을 점(占)의 결과를 보고 살해하는 횡포까지도 저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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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소개 <장온(張溫)> ?-191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자(字)는 백신(伯愼). 후한(後漢)의 태위(太尉)를 지냈고, 호향후(互鄕侯)에 봉해졌다. 남양군(南陽郡) 양현(穰縣) 출신이었으며, 청(淸)의 왕선겸(王先謙)이 지은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 의하면, 그의 처(妻)는 채모(蔡瑁)의 백모(伯母=蔡諷의 長姉)였다고 한다.
참고: <後漢書>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송나라의 범엽(范曄)이 펴냈던 후한의 정사(正史)이며,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 중 하나이다. 그리고 또 그것은 기전체로 쓴 것이며, 본기(本紀) 10권과 열전(列傳) 80권 그리고 지(志) 30권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양나라 때 유소(劉昭)가 그것을 보충하였고, 지(志)는 또 진나라의 사마표(司馬彪)가 지었다고 한다. 120권. 그리고 또 왕선겸(王先謙=왕-셴첸=Wang Xianqian)은 중국 청나라 말기의 학자(1842~1917)였으며, 자(字)는 이우(益吾), 호(號)는 쿠이위안(葵園老人)이었고, 학관(學官)을 지냈으며, 저서에 <속황청경해(續皇淸經解)>와 <십조동화록(十朝東華錄)> 그리고 <순자집해(荀子集解)>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채모(蔡瑁)는 생몰불명(生沒不明)이며,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이었고, 채풍(蔡諷)의 아들이었다. 자(字)는 덕규(德珪-襄陽記). 유표(劉表)의 처(妻)였던 채 씨(蔡氏)는 그의 누나(姉)였다.
아무튼, 그는 조조(曹操)의 유조부(猶祖父-혈연관계는 아니었다는 의미임)였던 조등(曹騰)의 추천을 받아서 등용되었고, 그 후에 상서랑(尙書郞)에서부터 사공(司空), 태위(太尉)까지 지냈다. 그리고 185년, 그는 관서지방에서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차기장군(車騎將軍=都督이며, 位는 三公 다음. 그리고 驃騎장군에 버금가는 직책이었다. 그 예로는 張飛, 張翼 등)에 임명되어 손견(孫堅), 도겸(陶謙) 등을 참모로 세웠고, 파로장군(破虜將軍) 동탁(董卓)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까 그들이 출전식(出戰式)을 가졌을 때, 영제(靈帝)가 그것을 열병(閱兵)했는데, 그러나 그는 군례(軍禮)를 따라서 배례(拜禮)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것은 고전적인 군례(軍禮)에서는 일단 한번 장군(將軍)이 되면, 황제에게 배명(拜命이라는 儀禮)할 필요가 없다는 관례(慣例)를 따랐던 때문으로 보였지만, 하지만 또 그 당시에는 실제로 <불배(不拝)>를 했던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 했으므로, 그래서 또 그것으로 보아서 그는 그런 용감한 일면도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하지만 또 그 이면(裏面)으로는, 당시 동격(同格)의 동탁(董卓)이 <반란을 진압할 필요 없이 내시들만 제거해 버리면 반란은 곧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했던 말을 듣고, 그는 몹시 두려워 하며 동탁(董卓)을 만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실제로, 반란 진압이 계속되고 있던 도중에 동탁(董卓)이 몇 번이나 군령(軍令)을 어겼는데, 그러자 또 손견(孫堅)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런 동탁(董卓)을 처형할 것을 진언했다지만, 그러나 그는 당시 실력자였던 동탁(董卓)이 무서워서 그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도겸(陶謙)이 그런 그를 비난했다고는 했지만, 아무튼 그 이후로 동탁(董卓)은 장온(張溫)과 손견(孫堅)을 증오했고, 그래서 또 언젠가는 꼭 그들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맹세까지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는 많은 공적을 세웠지만, 그러나 당시 세력을 가졌던 환관들과 얽혔고, 그로 인해서 많은 비방도 들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삼공(三公)은 원래 도(首都)에서 모든 정무를 봤지만, 그러나 후한(後漢) 말 이후에는 재외(在外=都外)에서도 태위(太尉)가 나오게 되었고, 그리고 또 그 시작이 바로 장온(張溫)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 후에 위위(衛尉)로 전임했다.
참고: 위위(衛尉)는 九卿이며, 宮門의 衛士와 宮中의 巡察을 맡았다. 그리고 宮城과 宮門의 護衛와 監察도 담당했으며, 그 예로는 또 程昱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1년 겨울 10월에, 양주(凉州) 원정 이후 서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어있었던 동탁(董卓)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래서 또 그 연유를 잠시 말해보면, 어느 때에 태사(太史-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그래서 太史令이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음)가 점을 쳐서 <대신(大臣) 중에 형사(刑死-처형되어 죽음)를 당할 사람이 있다>라고 했고, 거기다 또 그 얼마 후에 나라에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그러자 동탁(董卓)은 그것을 문제 삼아서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온(張溫)을 원술(袁術)과 내통했다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무고(誣告)하게 했다. 그래서 장온(張溫)은 태형(笞刑)을 받고 죽었는데,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를 너무 깊이 증오했던 나머지 그의 목을 다시 베었고, 그리고는 또 술좌석에서 그의 머리를 공공연하게 전시해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손견(孫堅)이 유표(劉表)와 싸우다가 전사했던 일을 기뻐했던 동탁(董卓)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연(酒宴)을 열었고, 그러자 또 그때, 그 자리에 참석을 했던 장온(張溫)을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에게 시켜서 목을 베게 했으며,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장온(張溫)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서 주연장(酒宴場)에 전시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자 또 그 자리에 참석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서 소리를 질렀고, 그리고 또 그 중에는 들었던 술잔까지 떨어뜨렸다거나, 쥐고 있던 젓가락을 손에서 놓쳤다든지,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먹었던 것을 토하는 광경까지 벌어졌다지만, 그러나 정작 동탁(董卓) 자신은 그런 것을 보고서도 오히려 더욱 통쾌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술과 음식까지 들었다고 묘사함으로 해서, 그의 잔인성을 최고조로 강조하는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그리고 또, 장온(張溫)은 왕윤(王允)과는 오랜 친구사이였다고 설정했으며, 그래서 또 그 자리에 함께 참석을 했던 왕윤(王允)이 친구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하고는 미녀연환계(美女連環計)를 써서 동탁(董卓) 암살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구성했다.
일화(逸話)
후한서(後漢書)의 일민전(逸民傳)에서는 환제(桓帝)의 치세(治世)에 상서시랑(尙書侍郞)을 지냈던 장온(張溫)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환제(桓帝)의 재위(在位)는 146년에서 166년까지였기 때문에, 그래서 일민전(逸民傳)에서는 연희(延熹) 연간(158년부터 166년)에 경능(竟陵)으로 행차를 나갔을 때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인물이 동일(同一)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불명(不明)하다.
그리고 또 그 환제(桓帝)가 경능(竟陵)으로 행행(行幸-임금이 대궐 밖으로 행차함)해서 한수(漢水)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러자 그곳의 사람들이 그 진기한 황제의 행차를 보고자 모두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노인만은 묵묵히 그냥 밭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또 그것이 신기했던 남양(南陽) 출신의 상서시랑(尙書侍郞) 장온(張溫)이 그 노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구경을 한다고 난리인데, 어째서 노인께서는 계속해서 일만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장온(張溫)은 마차에서 내려서 그 노인에게 꼭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그 노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다만 백성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까다로운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한 가지 질문할 것은 있습니다>
그러자 장온(張溫)이 그것이 무슨 질문인지 말을 보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그 노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천하(天下)가 어지럽기 때문에 천자(天子)를 세운 것입니까? 아니면 천하(天下)가 안정 되었다고 생각해서 천자(天子)를 세운 것입니까? 그리고 그 천자(天子)를 세운 것은 천하 백성들의 아버지로 삼기 위함이었습니까? 아니면 천하 백성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해서 천자(天子)에게 봉사시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리고 또 제가 듣기로 그 옛날, 고(古-堯舜時代)의 성천자(聖天子=聖帝=덕망이 높은 임금 즉 堯舜을 말함)들께서 세상을 다스렸을 때는 새로 지붕을 올렸을 때, 그 지붕을 지지하기 위한 목재(木材)를 자른 그대로 사용했었기 때문에(장식 등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쓸데없이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서 살기 바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다는 뜻) 만백성들이 모두가 다 편안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왕은 어떻습니까? 그 왕은 백성들을 전부 일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은 그 덕으로 유람(遊覽)이나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머리조차 들지 못하겠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오히려 그런 나에게 왜 구경을 오지 않는가 하고 묻는군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장온(張溫)은 깊게 뉘우치며 그 노인에게 성함을 물었다. 하지만 그 노인은 대답도 않고 그냥 떠나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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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190년, 원소(袁紹)를 중심으로 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결성되었고, 그러자 또 손견(孫堅)도 그에 참가하기 위해서 거병했다. 그리고 그 후, 손견(孫堅)은 우선 장사(長沙)에서 북상해서 형주(荊州)를 통과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동탁(董卓)의 반대편에 서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평소 자신에게 모욕적으로 대해왔던 형주(荊州) 자사(刺史) 왕예(王叡)를 살해했다.
참고: 오록(吳錄)이란 책에 의하면, 손견(孫堅)이 그때 왕예(王叡)를 살해했던 이유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었다고 해서 잠시 소개하고 넘어갑니다.(단, 번호는 읽기 쉽게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1. 왕예(王叡)는 동탁(董卓) 토벌의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 전, 그리고 또 손견(孫堅)이 형주(荊州) 남부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던 무렵부터 공공연하게 손견(孫堅)을 모독했고, 말로써 그를 비하하며 창피를 주었다.
2. 왕예(王叡)는 당시, 손견(孫堅)과 동격(同格)으로 자신의 지령 계통 하부에 속해 있던 무능(武陵) 태수(太守) 조인(曹寅)과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그는 <나는 동탁(董卓)보다 우선적으로 조인(曹寅)부터 죽일 것이다>라는 방언(放言)을 자주 발설했다.
3. 그러자 왕예(王叡)의 말에 겁을 먹었던 조인(曹寅)은 공문서를 위조해서 손견(孫堅)으로 하여금 왕예(王叡)를 토벌하도록, 마치 조정에서 명령이 내려온 것처럼 계획했다.
4. 그 후, 조인(曹寅)이 위조했던 명령서를 받아 들었던 손견(孫堅)은 그 즉시 병사를 이끌고 왕예(王叡)의 성을 포위했다.
5. 그러자 왕예(王叡)는 성을 포위하고 있던 손견(孫堅)의 군사 한 명을 꾀어서 물어본즉, 그들이 재물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왕예(王叡)는 그들을 전부 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6. 그 후, 손견(孫堅)을 만나게 된 왕예(王叡)는 손견(孫堅)이 병사들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비난했다.
7. 그러자 또 손견(孫堅)은 자신은 다만 조정을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왕예(王叡)가 자신의 죄 없음을 주장했고, 그러자 또 손견(孫堅)은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고 한다. <당신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죄다!>
8. 그러자 왕예(王叡)는 어쩔 수 없이 음독자살했다.
그리고 또 위의 사실에 대해서는, 삼국지(三國志)의 공손도전(公孫度傳) 주(注) <위략(魏略)>에 의하면, 228년 위국(魏國) 조정은 공손연(公孫淵)에게 보냈던 공문서에서, 손견(孫堅)이 위의 사건을 저질렀던 일을 예로 들면서 손오(孫吳)를 비난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러한 者의 아들인 손권(孫權) 또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이므로, 그래서 더욱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그래서 공손연(公孫淵)이 뒤에서 오(吳)와 동맹을 맺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라고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남양군(南陽郡)의 태수(太守)였던 장자(張咨)도 자신의 장해물(障害物)이라고 생각해서 살해했고, 그 후 계속 전진해서 노양(魯陽)에서 주둔하고 있던 원술(袁術)을 알현했다. 그러자 원술(袁術)은 상표(上表)해서 그를 파로장군(破虜將軍) 대행(代行)과 예주(豫州) 자사(刺史)에 임명되게 했다.
그 후, 자군(自軍)의 손실을 두려워 했던 제후들이 동탁 군(董卓軍)과 제대로 싸우지 않는 것을 보고, 그것을 참다 못했던 조조(曹操)와 손견(孫堅)이 군을 인솔해서 동탁 군(董卓軍)과 몇 번이나 부딪혔다. 그러나 그 결과, 조조 군(曹操軍)은 동탁(董卓)의 부하였던 서영(徐榮)에게 패했고, 그러자 손견(孫堅)은 분전(奮戰)하며 동탁 군(董卓軍)에 졌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또 191년 양인(陽人)의 싸움에서 대승하면서 동탁(董卓)의 부하였던 화웅(華雄)의 머리도 취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그를 두려워해서 이각(李傕)을 사자로 보내서 그를 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했고, 그러자 또 어쩔 수가 없었던 동탁(董卓)은 장안(長安) 천도를 결행했다. 그 후, 손견(孫堅)은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동탁(董卓)에 의해서 파헤쳐지고 약탈되었던 능묘들을 복구했고, 그 후 다시 원술(袁術)에게로 돌아갔다.
참고: 강표전(江表傳)에 의하면 손견(孫堅)은 그때 한(漢)의 옥새(玉璽)를 발견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그러자 또 배송지(裵松之=372年-451年. 東晋 末 宋初의 政治家. 歴史家)는 <그는 충열지사(忠烈之士)였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마땅히 세상에 공표를 했을 것이다-중략-그리고 강표전(江表傳)의 내용대로라면 그는 그것을 자신의 가문(家門=孫氏)에 맡겼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러한 것을 혼자서 숨겨 두어서 좋을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했던 사실은 전혀 없었다고 반론했다.
아무튼 그 후, 손견(孫堅)은 예주(豫州) 자사(刺史)를 지냈지만, 그런데 그때 갑자기 원소(袁紹)가 주우(周喁)를 예주(豫州) 자사(刺史)로 파견했다. 그러자 손견(孫堅)은 그 주우(周喁) 3형제와 다투게 된다.(앞에서 일부 설명이 되었으므로, 간략하게 하고 넘어감) 그리하여 사실상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은 와해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군웅(群雄)들은 그때부터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을 중심으로 해서 할거(割據)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손견(孫堅)은 원술(袁術)과 함께 주우(周喁)와 주흔(周昕)을 패주시켰다. 그리고 초평(初平) 2년(191년) 또는 3년에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에게 양양(襄陽)의 유표(劉表)를 공격하게 했다.
참고: 삼국지(三國志)의 유표전(劉表傳)에 의하면, 유표(劉表)는 그때 이미 손견(孫堅)이 살해했던 형주(荊州) 자사(刺史) 왕예(王叡)의 후임으로 결정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원술(袁術)이 방해를 하자 할 수 없이 양양(襄陽)으로 도피했고, 그러자 또 그곳에서 원소(袁紹)와 손을 잡고는 원술(袁術)과 대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손견(孫堅)은 유표(遊標)의 부하였던 황조(黃祖)와 일전을 벌여서 격파했고, 이어서 양양(襄陽)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때, 양양(襄陽) 부근의 현산(峴山)에서 혼자 앉아 있다가 황조(黃祖)의 부하들에 의해서 사살(射殺)되었다.(이견 多數) 그러자 그때, 그의 나이 향년(享年) 37세였고, 그것으로 손견 군(孫堅軍)은 와해되었으며, 그 잔군(殘軍)들은 원술(袁術)의 군대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의 장자(長子) 손책(孫策)이 원술(袁術)로부터 독립해서 그의 뒤를 이었다.
<손견(孫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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