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조조(曹操)> 1

영수(永壽) 원년(元年=155년)-건안(建安) 25년 1월 23일(220년 3월 15일). 중국 후한(後漢) 말(末)의 무장, 정치가, 시인(詩人), 병법가(兵法家)로서 업적을 남겼다. 자(字)는 맹덕(孟德), 유명(幼名)은 아만(阿瞞) 또는 길리(吉利). 패(沛) 국초 현(國譙縣-그러나 현재의 河南省 永城市라는 설이 있다) 출신. 후한(後漢)에서 승상(丞相)을 지냈고, 나중에 위왕(魏王)으로서 삼국시대 위(魏)의 기초를 닦았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무황제(武皇帝). 후세(後世)에서는 위무제(魏武帝), 위무(魏武)라고도 불렸다. 부(父)는 조숭(曹嵩). 그러나 그 조숭(曹嵩)은 원래는 하후 씨(夏候氏)였지만, 나중에 중상시(中常侍)였던 대장추(大長秋) 조등(曹騰)의 양자가 되면서 조 씨(曹氏)를 승계했고, 이어서 태위(太尉)가 되었다.
참고: 그 당시에는 환관이었어도 고위직에 있던 자들은 양자를 가질 수도 있었고, 가명(家名)을 존속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리고 대장추(大長秋)는 중국 왕조에서 황제부(皇帝府)를 도맡아서 관리하던 환관의 최고위였으며, 후한(後漢) 이전에는 민간 출신이었어도 임명이 가능했지만, 그러나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였던 광무제(光武帝) 때는 오직 환관만이 그 직에 임명되도록 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또 특히, 위(魏)의 조조(曹操)의 조부(祖父)였던 조등(曹騰)이 임명되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 씨(曹氏)의 선조는 원래 전한(前漢)의 평양후(平陽侯)였던 조참(曹参)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에는 의문(의심)이 있다. 그리고 또 조숭(曹嵩)의 친가였던 하후 씨(夏候氏)의 선조는 전한(前漢)의 여음후(汝陰侯)였던 하후영(夏候嬰)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또 그가 거병했을 때부터 함께 종군했던 하후돈(夏候惇)과 하후연(夏候淵) 등은 사촌형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나중에 아들 조비(曹丕)에 의해서 후한(後漢)을 대신해서 위(魏)가 건국되었다.
<치세능신난세간웅(治世能臣 乱世奸雄)>
그는 젊었을 때부터 기지(機知)와 권모(権謀)가 풍부했지만, 그러나 방탕(放蕩)을 좋아했기 때문에 세평(世評)이 좋지가 못했다. 다만, 태위(太尉)였던 교현(橋玄)이 <이런 난세(亂世)는 당대(當代)의 일재(一才)만이 구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사람이 바로 너인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교현(橋玄)이 소개했다고 하고, 월단평(月旦評)으로 유명했다던 후한(後漢)의 인물감정가(人物鑑定家) 허자장(許子將=許劭)도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하며, 그러나 잘 알려진 내용이고, 또 위 제목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해석은 생략합니다. <子治世之能臣亂世之奸(姦)雄)> 또는 <君清平之奸賊亂世之英雄>
※ 교현(橋玄-109년-183년)은, 후한(後漢) 대(代)의 정치가, 자(字)는 공조(公祖), 양국(梁國) 수양현(睢陽縣)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7대(代) 전조(前祖)였던 교인(橋仁)은 전한(前漢)의 대홍려(大鴻臚=9卿의 하나)를 지냈고, 조부(祖父) 교기(橋基)는 광릉(廣陵) 태수(太守)를 지냈다. 그리고 또 부(父) 교숙(橋肅)은 동래(東萊) 태수(太守)를 지냈으며, 족가(族子=조카 또는 조카뻘 되는 사람)에 교모(橋瑁)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젊었을 때 현(縣)의 공조(功曹=郡의 宰相으로 불리며 當代의 出世 엘리트코스였다고 한다. 그리고 主로 공로가 있던 자를 선발해서 공무 직을 담당하게 하는 일을 그 職務로 했다고 함)가 되었다. 그리고 또 어느 때, 예주(豫州) 자사(刺史)였던 주경(周景)이 양국(梁國)에 이르렀는데, 그러자 교현(橋玄)은 그 주경(周景)을 만나서 땅에 엎드린 채로 진국(陣國) 재상(宰相) 양창(羊昌)의 죄악(罪惡)을 낱낱이 고하면서 자신을 진국(陣國)의 종사(從事)로 임명해서 그 일을 철저하게 조사하게 해줄 것을 원했다.
참고: 당시 刺史는 太守와 國相의 監察을 主務로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管轄 下 郡國들의 여러 가지의 일을 담당, 처리하는 '従事'를 属官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자 주경(周景)은 그의 의지(意志)에 감동하여 그를 종사(從事)에 임명하고는 진국(陣國)으로 파견했다. 그러자 또 교현(橋玄)은 그곳으로 가서 양창(羊昌)의 빈객(賓客)들을 모조리 수감(收監)했고, 그리고는 장죄(贓罪=臧罪=贈收賂罪=贈收賄罪)의 죄상에 대해서 취조했다. 그러자 또 그때, 대장군이었던 양기(梁冀)가 평소 양창(羊昌)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격문(檄文)을 띄워서 그를 소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조사를 더욱 엄격하게 했고, 결국 그 양창(羊昌)을 함차<檻車-죄인 등을 이송시킬 때 사용했던 우리 형태의 檻을 얹은 馬車 또는 牛車)에 태워서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그 단 한 건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서 효렴(孝廉)에도 추천되어서 낙양(洛陽) 좌위(左尉=洛陽縣에 2名 두었던 縣尉 중 一人)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승진했고, 결국 제국(齊國)의 상(相)까지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어떤 사건에 연좌(連座)되어서 노역형(勞役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또 그 후에 형기를 다 마치고 나와서 초빙(招聘)을 받아서 상곡(上谷)의 태수(太守)가 되었으며,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한양(漢陽)의 태수(太守)가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상규(上邽)의 현령(縣令)이었던 황보정(皇甫禎)에 장죄(贓罪)를 물어서 곤태(髡笞-머리카락을 자르고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 형에 처했다. 그러자 황보정(皇甫禎)은 죽었고, 그로 인해서 그의 이름은 세상을 또 한 번 울렸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군(郡)의 명사(名士)였던 강기(姜岐)란 자를 소환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나 그 강기(姜岐)가 병을 칭하며 응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그는 화를 내며 독우(督郵-縣의 공무원들을 監査하는 職)를 그 집으로 파견했고, 그리고는 그를 압박하기 위해서 <만약, 당신이 계속해서 소환에 불응한다면, 당신의 어머니를 내 처(妻 또는 妾)로 만들어버릴 것이다!>라고까지 말을 하게 했다. 하지만 또 그때, 그 도내(都內)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달려와서 그를 말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겨우 단념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사도(司徒=丞相)였던 장사(長史)에 의해서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다.
※ 장작대장(將作大匠)은 진(秦)과 전한(前漢) 때의 관직명이었으며, 궁전과 종묘(宗廟) 등의 건축 등을 맡았던 직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장작소부(將作少府)라고 불렀는데, 관질(官秩)은 2천석(千石)이었으며, 광무제(光武帝) 때 잠시 폐지되었다가 장제(章帝) 원년에 다시 부활했다.
그리고 환제(桓帝) 말기에 대장군과 삼공부(三公府)의 추천을 받아서 도요장군(度遼將軍-前漢 이후의 관직명이며, 遼水를 건너서 北族을 토벌하는 장군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황월(假黃鉞)이 되었다.
참고: 假黃鉞은 黄金으로 손도끼나 큰 도끼의 모양을 장식품 레플리카(replica) 같이 만들어서, 그것으로 내외(內外) 제군(諸軍)들의 통수(統帥) 권한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 때는 군의 통수자(統帥者) 자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것을 반드시 휴대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임지(任地)에 이르자 병사들을 충분히 쉬게 한 다음 제장(諸將)들을 인솔해서 고구려의 백고(伯固=고구려 제8대 왕이었던 ‘신대왕’의 이름) 등과 싸워서 이겼다. 그러자 그 후, 그가 재직 중이던 3년 동안은 그곳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영제(靈帝)의 시대가 되자 그는 다시 귀환해서 하남윤(河南尹)이 되었고, 이어서 9경(卿)과 삼공(三公)을 역임했다. 그러나 광화(光和-靈帝 때의 3번째 元號) 원년(178년)에 그는 태위(太尉)가 된지 수개월 만에 병을 얻어서 면직했다. 그러자 그에게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내려졌고, 이어서 자택에서 요양에 들어갔지만, 그러나 광화(光和) 6년(183년)에 결국 사망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의 향년(享年) 75세였으며, 그리고 평소 강직했던 성품과 타인들로부터 존경받았던 생전의 인격에 걸맞게, 그를 이용해서 고위에 올랐던 가족과 친척들은 없었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그가 죽자 생업이 없어져서 그의 상중(喪中)에는 빈소(殯所)도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일화(逸話)>
그가 낙양(洛陽)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당시 무명(無名)의 조조(曹操)가 그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조조(曹操)의 相을 보고는 감탄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여태까지 천하의 명사(名士)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므로 자네는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야. 그러나 나는 이제 늙었고, 그래서 현재 이 늙은이에게 원(願)이 있다면, 다만 내가 떠난 후에 처자(妻子)를 좀 돌봐달라는 것뿐일세!> 그런 일이 있고나자 조조(曹操)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또 그 후였던 건안(建安) 7년(202년)에 군사를 이끌고는 교현(橋玄)의 묘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는 사람들에게 시켜서 태뢰(太牢=大牢=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소를 통째로 바쳤던 일. 원래는 소, 양, 돼지를 모두 바쳤으나 뒤에는 소만 바쳤다고 함)의 예(禮)로서 제사를 올렸으며, 그 스스로도 제문(祭文)을 봉(奉)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의 교공(橋公)>
삼국지연의(三国志演義)에서는 '강동(江東)의 2교(二喬=大喬, 小喬)'의 부친으로 교공(喬公)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이교(二喬) 중 대교(大喬)는 손책(孫策)의 처(妻)로, 그리고 소교(小喬)는 수군대도독(水軍大都督) 주유(周瑜)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 교공(喬公)은 교국노(喬國老)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 후, 그 교공(喬公)은 오(吳)를 방문했던 유비(劉備)의 인품(人品)에 감탄해서 손권(孫權)과의 대립을 피할 목적으로 손권(孫權)의 이복매(異腹妹)였던 손부인(孫夫人)을 유비(劉備)에게 시집보내는데 적극 협력했다. 그리고 또 그 책의 내용 중에서 조조(曹操)가 <일찍이 내가 교 공(喬公)과 인연을 주고받았던 적이 있었다>라고 말을 하는 것으로, 그 이교(二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밝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 교공(喬公)은 역사 상의 교현(橋玄)을 모델로 했던 것 같으며, 다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 교공(喬公)의 이름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
※ 월단평(月旦評)은, 후한(後漢) 때, 허소(許劭)가 행했다는 인물평론(人物評論) 고사(故事)에 관련된 용어(用語)이며, 일반적으로 품평(品評)이나 인물평(人物評)을 했던 것을 월단평(月旦評)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의 본전(本傳)에 의하면, 허소(許劭)는 종형(從兄)이었던 허정(許靖) 등과 함께 매월 1일에 향리(鄕里)의 인물비평을 행했는데, 그것을 월단평(月旦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는 그 영향력이 아주 막강했기 때문에, 월단평(月旦評)으로 칭찬을 받은 사람은 출세를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은 몰락(沒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영향으로 당시 아주 유력자(有力者)였던 원소(袁紹)나 조조(曹操)까지도 그 때문에 크게 신경을 썼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허소(許劭)의 조조(曹操)에 대한 평가(論評)는 상기(上記)대로 <삼국지(三國志) 注>와 후한서(後漢書)에서 전하고 있다.
-------------------------------------------------------------------------------------------
※ 허소(許劭-150년부터 195년)는, 후한(後漢) 말기의 인물비평가(人物批評家)로, 자(字)는 자장(子將), 유비(劉備)의 휘하로 들어가서 사도(司徒)가 되었던 허정(許靖)과 종형(從兄=四寸) 사이였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허혼(許混)의 부(父)였으며, 진지(陣祗)는 그의 질(姪女)의 자(子)였다. 그리고 친척으로 허경(許敬)과 허훈(許訓), 허상(許相)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삼공(三公)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평여현(平與縣) 출신의 사람이었으며, 18세 때 사견(謝甄=謝子微)에게서 인물평을 받았고, 그 후에는 스스로도 인물평론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三國志) 그 후, 그는 허정(許靖)과 함께 매월 한 번씩 월단평(月旦評)이라고 불렸던 인물평론회를 열었다.(後漢書) 그리고 그 결과,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絶對的)인 것이 되었고, 그에게서 칭찬을 받았던 사람은 출세를 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太平御覽) 그리고 또 당시, 동향(同郷)의 원소(袁紹)는 그에게서 비판을 받을 것을 두려워 해서 화려하게 꾸며둔 것들을 모두 바꾸었을 정도였다고 한다.(後漢書) 그리고 또, 젊은 시절의 조조(曹操)도 교현(橋玄)의 추천으로 그에게서 평가를 받았고, 그러자 그는 조조(朝朝)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子治世之能臣亂世之奸雄-三国志 魏書武帝紀> 또는 <君清平之奸賊亂世之英雄-後漢書 許劭傳> 아무튼, 그러자 조조(曹操)는 그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三国志) 그 후, 여남(汝南)의 태수(太守)가 되었던 서구(徐璆)는 그를 공조(功曹)로 등용시켰다. 그리고 그 후에 조조(曹操)와 양표(楊彪) 등이 그를 초빙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後漢書) 그 후, 전란(戰亂)이 발생하자 그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강남(江南)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195년, 그의 나이 46세 때 병을 얻어서 예장군(豫章郡)에서 죽었다.
---------------------------------------------------------------------------------------------
아무튼,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효렴(孝廉)에 추천되어서 랑(郞)이 된 후,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 돈구(頓丘) 현령(縣令), 의랑(議郞)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가 낙양북도위(洛陽北部尉)를 지내고 있었을 때는 범법자들을 엄격히 단속했으며, 그리고 또 그 예로는, 당시 영제(靈帝)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환관 건석(蹇碩)의 숙부(叔父)가 야간통행 금지법을 어겼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조조(曹操)는 그를 잡아 들여서 그 즉석에서 때려 죽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후로는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으며, 그리고 또 그런 그를 싫어했던 환관들이 그를 추방하려고 획책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흠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추천을 받아서 현령(縣令)이 되었고, 그렇게 해서 그는 낙양(洛陽)을 떠나게 된다.
광화(光和) 7년(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생하자 그는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고, 영천(潁川)에서 토벌 전을 벌였으며, 그 공으로 제남(濟南)의 상(相)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제남(済南)에서 오직(汚職) 관리들을 파면하고, 음사사교(淫祠邪敎-淫祠는 내력이 불분명한 귀신 등, 邪神을 제사지내는 사당)를 금지시키는 등, 평온한 통치를 실시해서 나중에 동군(東郡) 태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赴任)을 거부하고는 병(病)을 핑계로 귀향(歸鄕)했으며,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잠시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도 문무(文武)의 단련은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어서 중평(中平) 5년(188년)에 황건(黃巾)의 난(亂) 평정에 공(功)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는 다시 선택되어져서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에 임명되었다.
※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는, 중국 後漢 말기였던 188년에 설치되었던 官職의 총칭으로, 또는 서원삼군(西園三軍)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皇帝 직속의 부대 서원군(西園軍)을 창설한 후, 그 군을 이끌었던 인물로 당시 영제(靈帝)의 총애를 받았던 건석(蹇碩-三國志演義에서는 十常侍 중 一人이라고 되어있다)과 원소(袁紹) 그리고 포홍(鮑鴻) 그 3명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가 고향에서 은둔하고 있었을 때, 왕분(王芬)과 허유(許攸) 그리고 주정(周旌) 등으로부터 영제(靈帝) 폐위의 쿠데타에 참가할 것을 권유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이윤(伊尹)과 곽광(霍光) 등의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을 예로 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王沈의 魏書)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에 참가하다>
이미 전술(前述)되었지만, 그러나 잠시 상기(想起)를 위하여 앞전의 상황을 조금 설명하고 넘어가면...
그러니까 후한(後漢) 말기, 황건(黃巾)의 난(亂) 이전에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환관 십상시(十常侍)를 숙청하기 위해서 대장군이었던 하진(何進)이 제후들에게 상경(上京)을 재촉하는 격문을 날렸을 때, 조조(曹操)는 그 계획을 비판했다고 한다.(王沈의 魏書) 그러나 그 후였던 중평(中平) 6년(189년) 8월 27일에 주모자였던 하진(何進)이 단규(段珪)에게 살해 당했고, 이어서 원소(袁紹) 등이 궁전으로 난입해서 환관들을 모두 죽여 버리자, 그에 환관들의 영화(榮華)로웠던 시대는 종언(終焉)을 고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비극을 맞이했던 것은 그 환관들뿐만이 아니었고, 대환관(大宦官)이었던 조등(曹騰)의 손(孫)이었던 조조(曹操) 또한 출세가도가 막히게 되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그리고 또 그때, 하진(何進)의 격문에 재빨리 반응을 했던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이미 전술(前述)한 대로 헌제(獻帝)를 옹립한 후 조정을 장악했다. 그리고는 조조(曹操)에게도 자신과 뜻을 같이 할 것을 권유했는데, 그러나 동탁(董卓)의 포학 상을 직접 목격했던 조조(曹操)는 그에 겁을 먹고는 낙양(洛陽)을 탈출해서 자신의 고향으로 도망을 쳤다.
참고: 그리고 그때의 유명한 일화(逸話) 중 하나가 여백사(呂伯奢) 가족의 살해사건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참고에서 설명하려는 것은, 그에 대한 내용이 정작 삼국지(三國志) 본문에는 없기 때문인데, 그리고 또 그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여 소개하려는 자체에서 벌써 모순(矛盾)이 느껴질 정도이지만, 하지만 어쨌든 그때 조조(曹操)는 여백사(呂伯奢)와는 지인(知人) 사이였고, 그런데 또 마침 조조(曹操)가 동탁 군(董卓軍)에게 쫓겨서 그 여백사(呂伯奢)의 집을 찾았을 때, 여백사(呂伯奢)는 외출을 하고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왕심(王沈)은 위서(魏書)에서 여백사(呂伯奢)의 아들들이 먼저 조조(曹操)를 습격했기 때문에 조조(曹操)는 정당방위(正當防衛)였다고 했고, 하지만 또 세어(世語)에서는 여백사(呂伯奢)의 아들들이 배신할 것을 두려워했던 조조(曹操)가 일방적으로 그들을 학살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이동잡어(異同雜語)에서는 식기(食器)를 준비하려 했던 소리를 조조(曹操)가 자신을 살해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으므로, 그래서 그것은 사고적(事故的) 과잉방위(過剩防衛)였다고 했다. 그리고 또 그 이동잡어(異同雜語)에서는 조조(曹操)가 그때 <내가 다른 사람을 배반할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이 나를 배반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말도 했었던 것으로 고려했는데, 그래서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 말을 이용함으로 해서, 그때 함께 동행을 했던 진궁(陣宮)이 그의 행동에 치를 떨며 떠나가게 하는 계기로 구성을 했고, 그리고 또한 그것으로 조조(曹操)의 악역 적인 이미지가 결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후, 조조(曹操)는 사재(私財)를 투자해서 진류군(陳留郡) 기오(己吾)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참고: 그리고 세어(世語)에서는 그때, 조조(曹操)는 진류군(陳留郡)의 효렴(孝廉)이었던 위자(衛玆)의 원조를 받았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 조조(曹操)에게 협력했던 사람들은 하후돈(夏候惇)과 하후연(夏候淵) 그리고 조홍(曹洪)과 조인(曹仁) 조순(曹純) 형제 등, 주로 가족 중심이었으며, 그 세력 또한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또 그 무렵, 동탁(董卓)과 제후(諸侯)들의 알력(軋轢)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고, 그러자 또 그것을 보다 못했던 동군(東郡)의 태수(太守)였던 교모(橋瑁)가 조칙(詔勅)을 위조해서 각지의 제후들에게 연합(連合)을 호소하는 격문을 날리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또 초평(初平) 원년(190년), 결국 원소(袁紹)를 맹주로 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때 조조(曹操)도 부(父) 조숭(曹嵩)의 원조를 받아서 당시, 친구였던 원소(袁紹-그러나 曹操 자신은 袁紹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와 합류했다.
그리고 이하(以下)는 앞에서 설명이 충분히 되었으므로 생략하며, 190년 이후의 기록은 때에 맞춰서 다시 소개할 예정임.
이상, 조조(曹操) 1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