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삼국지(三國志)


 <삼국지(三國志)>



<삼형제>


 


 <동탁(董卓)> ?-초평(初平) 3년 4월 23일(192年5月22日)




 후한(後漢) 말기의 군인, 정치가. 헌제(獻帝)를 옹립했고, 궁정에서 마음껏 권세를 휘둘렀지만, 그러나 자신의 양자였던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는 농서군(隴西郡) 임도(臨洮) 출신이었으며, 자(字)는 중영(仲穎), 부(父)는 동군아(董君雅), 형은 동탁(董擢), 동생으로는 동민(董旻)이 있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요절한 아들이 있었고, 조카로는 동황(董璜), 그리고 손녀 동백(董白)이 있었다.

 양인(陽人)의 싸움

 191년,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이 인솔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의 <손견(孫堅) 군(軍)>과 <조정군(朝廷軍)>을 지휘했던 동탁(董卓)의 군대가 사예(司隸) 하남윤(河南尹) 양현(梁縣)의 양인(陽人)에서 충돌했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당시, 동탁(董卓)은 자기 마음대로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헌제(獻帝)를 세웠으며, 낙양(洛陽) 부호(富豪)들의 금품을 강취했고, 여관(女官)들을 능욕하는 등, 그 포악(暴惡)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190년, 그 동탁(董卓)의 전횡(專橫)을 보다 못했던 <교모(橋瑁)>가 요청을 했고, 그리하여 원소(袁紹), 원술(袁術), 포신(鮑信), 왕광(王匡), 공주(孔伷), 유대(劉岱), 장막(張邈), 원유(袁遺), 한복(韓馥) 등은, 각각 수만(數萬)의 병사들을 인솔해서 동시에 거병했다. 그리고는 원소(袁紹)를 그 맹주로 삼고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을 결성했다.

 
교모(橋瑁-?부터 191년)는,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東郡 太守)였고, 자(字)는 원위(元偉)였다. 그리고 문헌(文献)에 따라서는 교모(喬瑁)라고 기록되어 있는 곳도 있고,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서 산견(散見)되는 인물이다. 그는 예주(豫州) 양국(梁國) 수양현(睢陽縣) 출신이며, 무제기(武帝紀)의 영웅기(英雄記)에 의하면, 그는 태위(太尉)였던 교현(橋玄)의 일족이었던 것으로만 생각될 뿐, 그 외는 불명(不明)하다. 그리고 그는 연주(兗州) 자사(刺史)와 동군(東郡) 태수(太守)를 지냈으므로, 그래서 그것으로 미루어서 위엄과 자애로운 마음을 겸비했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89년에 하진(何進)이 십상시(十常侍)와 대립했고, 그로 인해 각지의 군사를 모집했을 때, 교모(橋瑁)도 그 명령을 받아서 성고(成皋)에 군사를 주둔시켰다.(後漢書) 그러나 그 후에 하진(何進)과 십상시(十常侍)가 공(共)히 멸했고, 이어서 동탁(董卓)이 조정(朝廷)을
장악했다. 그러자 교모(橋瑁)는 삼공(三公)의 공문서를 위조해서 동탁(董卓)에 대항하기 위해 거병을 독려하는 격문(檄文)을 작성했다.(後漢書) 그리하여 190년, 동탁(董卓)에 반대했던 관동(關東)의 제후(諸侯)들이 먼저 거병했고(反董卓連合軍), 그러자 또 교모(橋瑁)는 공주(孔伷), 유대(劉岱), 장막(張邈), 장초(張超), 원유(袁遺) 등과 함께 참전했다.

 참고: 그러나 장홍전(臧洪傳)에 의하면, 처음 거병했던 것은 교모(橋瑁) 등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나 원소(袁紹)를 맹주로 삼은 뒤, 사태의 진전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교모(橋瑁)도 산조(酸棗)에서 유대(劉岱)와 장막(張邈), 원유(袁遺), 포신(鮑信), 조조(曹操) 등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자 또 조조(曹操)는 매일 주연(酒宴)만 벌이고 있던 제후(諸侯)들을 보고는 한탄했고, 이어서 진군계획을 세운 다음 싸움을 독려했지만,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주는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얼마 후, 산조(酸棗)의 군대는 병량(兵糧)이 고갈되었고, 이윽고는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後漢書) 그리고 또 그 후, 교모(橋瑁)는 유대(劉岱)와 대립하다가 살해되었다.

 
참고: 그러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격문을 작성했던 사람은 조조(曹操)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또 그때, 교모(橋瑁)와 유대(劉岱)가 대립했던 이유는 병량(兵糧)을 둘러싼 문제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당시, 손견(孫堅) 또한 수만(數萬)의 군사를 이끌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원술(袁術)에 종속되어 그 전쟁에 참가했고, 조조(曹操)는 자신의 자산을 처분해서 의병을 모집했는데 <세어(世語)>에 의하면, 그때 약 5천 정도의 군사를 모집해서 그 전쟁에 참가했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또 그때, 손견(孫堅)에게 살해 당했던 왕예(王叡)를 대신해서 형주(荊州) 자사(刺史)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유표(劉表)도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에 참가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동탁(董卓)은 그 주모자가 원소(袁紹)란 것을 알고는 그의 숙부였던 원외(袁隗)와 그 삼족(三族)을 함께 처형했다. 그리고는 유변(劉弁)을 독살했으며, 이어서 방위에 불리했던 낙양(洛陽)을 버리고는 강제적으로 장안(長安)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또 그때,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은 수십만(數十萬)의 병사들을 모으고 있었으면서도 매일 회의(會議)와 술잔치를 벌이면서 적극적으로 싸우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190년 3월, 조조(曹操)와 포신(鮑信)은 그런 소극적이었던 원소(袁紹) 등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는 자신들만이라도 적극적으로 동탁 군(董卓軍)에 맞서 봤지만, 그러나 또 형양(滎陽)의 변수(汴水)에서 동탁(董卓)의 부하였던 서영(徐榮)에게 대패했고, 그리고 또 그때,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의 위자(衛玆)와 포도(鮑韜-鮑信의 弟) 등이 전사했다.

 포신(鮑信-152년부터 192년)은,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으로, 사례교위(司隷校尉)였던 포선(鮑宣)의 후예였으며, 포단(鮑丹)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포도(鮑韜)의 형이었고, 자식으로는 포소(鮑邵)와 포훈(鮑勛)이 있었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 그리고 무제기(武帝紀)와 동탁전(董卓傳) 그리고 원소전(袁紹傳) 등에서 산견(散見)되는 인물이며,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평양(平陽)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는 관대(寬大)했고, 절의(節義)가 분명했으며, 지모(智謀) 또한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대대로 유학(儒學)으로 이름을 이룬 가문의 출신자였기 때문에 항상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그런 연고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後漢書, 魏書) 그리고 그 후, 후한(後漢) 영제(靈帝) 시대에 그는 하진(何進)의 초빙을 받아서 기도위(騎都尉)가 되었고, 십상시(十常侍)와 대결하기 위해서 하진(何進)과 결의했으며, 그 결과 하진(何進)의 명령을 받아서 왕광(王匡)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군사를 모집했다.(後漢書) 그러나 성고(成皋)에 겨우 도착했을 때, 하진(何進)이 암살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鮑勛傳 인용 魏書) 그러자 그는 병(兵)을 인솔해서 다시 돌아갔는데, 그런데 그 후, 정권을 장악했던 동탁(董卓)이 전횡을 일삼자 원소(袁紹)에게 동탁(董卓)을 제거할 것을 진언했지만, 그러나 원소(袁紹)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2만여 명의 보병과 700기(騎)의 기병(騎兵)들 그리고 치중(輜重-군수품) 5천여를 마련했다.(鮑勛傳 인용 魏書와 董卓傳) 그리고 또 원소(袁紹)가 동탁(董卓)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는 그 토벌군에 참가했고, 원소(袁紹)를 맹주(盟主)로 할 것을 관동(關東)의 제후들과 맹약했다.(後漢書, 武帝紀) 그러자 그 후, 그는 원소(袁紹)와 조조(曹操)에 의해서 행파로장군(行破虜將軍)에 임명될 수 있도록 상표(上表=上疏)되었다.(鮑勛傳 인용 魏書) 그리고 또 그 후, 그는 연주(兗州) 자사(刺史)였던 유대(劉岱)와 진류(陳留) 태수(太守)였던 장막(張邈) 그리고 산양(山陽) 태수(太守)였던 원유(袁遺), 동군(東郡) 태수(太守)였던 교모(橋瑁) 등과 함께 산조(酸棗)에서 주둔했다. 그러나 그 후, 제후(諸侯)들은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매일 주연(酒宴)으로 흥청거리자 조조(曹操)가 나서서 호소했다.(武帝紀) 그러나 그 후에도 별 변화가 없자 그는 조조(曹操)와 함께 동탁 군(董卓軍)과 맞서기 위해서 출진했지만, 그러나 그때 동탁(董卓)이 파견했던 서영(徐榮)에게 대패했고, 그 결과로 그의 동생 포도(鮑韜)는 전사했으며, 그 자신도 큰 부상을 입었다.(鮑勛傳 인용 魏書) 그 후, 병량(兵糧)이 다해서 산조(酸棗)에 모였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자 그도 임지로 돌아갔다.(後漢書) 192년, 그는 조조(曹操)와 함께 청주황건적(靑州黃巾賊)의 잔당 토벌에 나섰다. 그러던 중 조조(曹操)와 함께 정찰을 나갔다가 적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했는데, 그러자 그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백병전(白兵戰)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자 또 포신(鮑信)은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조조(曹操)를 구출해냈고, 그렇게 해서 조조(曹操)는 어떻게든 탈출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조조(曹操)의 탈출을 도우면서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으며, 그러자 조조(曹操)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시체라도 찾으려고 했다지만, 그러나 끝내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는 유학자(儒學者)의 가계(家系) 출신답게, 평소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그리고 부하들에게도 잘했기 때문에 인망(人望)이 높았고, 그리고 또한 사후에 남긴 재산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의 아들 포소(鮑邵)는 포신(鮑信)의 풍격(風格)을 그대로 계승했고, 그리하여 조조(曹操)는 그를 기도위(騎都尉)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 포소(鮑邵)가 죽자, 그의 아들 포융(鮑融)이 또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아래는 일종의 에피소드로, 연대(年代)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차례로 소개만 합니다.

 1. 원소(袁紹)가 기주(冀州)를 취하고는 세력을 넓히려 했을 때, 그는 조조(曹操)에게 원소(袁紹)가 제2의 동탁(董卓)이 될 것이라며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일단 황하(黃河)의 남쪽을 평정하는데
진력을 다한 다음,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려야할 것이라고 조언했다.(鮑勛傳 인용 魏書)

 2. 청주(靑州) 황건적(黃巾賊)이 연주(兗州)에 침입했을 때, 그 즉시 토벌에 나서려 했던 연주(兗州) 자사(刺史) 유대(劉岱)에게 그는 자중(自重)할 것을 권했지만, 그러나 유대(劉岱)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토벌에 나섰다가 전사했다.

 3. 조조(曹操)의 부하였던 진궁(陣宮)이 조조(曹操)를 연주(兗州) 목(牧)으로 추대(推戴)하기 위해서 연주(兗州)의 별가종사<別駕從事=別駕는 州 刺史의 補佐官(屬官)이며, 従事는 그 別駕를 補佐했던 職>와 치중종사(治中從事=公文書를 총괄해서 담당했던 職)를 설득했다. 그러자 그때, 그도 찬성하며 조조(曹操)를 연주(兗州) 목(牧)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들과는 달리,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의 그는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의 관동(關東) 제후(諸侯)들 중에서도 특히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하여 선봉을 명 받았던 손견(孫堅)을 앞지르기 위해서 자신의 아우였던 포충(鮑忠)과 함께 서둘러서 출진했고, 그 결과로 화웅(華雄)에게
대패했다. 그리고 또 그때, 자신의 아우였던 포충(鮑忠)은 화웅(華雄)에게 당해서 죽었으며, 그리고 또 그 또한 정사(正史)대로 청주황건적(靑州黃巾賊)과 싸우다 죽게는 되지만, 그러나 그때도 조조(曹操)를 돕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자신의 공적을 올리려고 초조해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던 것으로 취급되어 있으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편, 손견(孫堅)도 양(梁)의 동부(東部)에서 서영(徐榮)에게 패했으며, 그리하여 당시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에 편들고 있었던 영천(潁川) 태수(太守) 이민(李旻)이 포로로 잡혀서 쪄 죽임(煮殺)을 당했다. 그러자 그해 겨울, 이번에는 왕광(王匡)이 동탁(董卓)을 습격하기 위해서 하양진(河陽津)에서 군사를 모았지만, 그러자 또 동탁(董卓)은 양동작전(陽動作戰)으로 그 왕광 군(王匡軍)의 배후를 급습해서 크게 대파했다.
그리하여 191년, 손견(孫堅)은 패잔병들을 모아서 양현(梁縣)의 양인(陽人)에서 주둔했다. 그러자 또 191년 2월, 동탁(董卓)은 대독호(大督護)였던 호진(胡軫)과 기독(騎督)이었던 여포(呂布)를 파견해서 양인(陽人)의 손견(孫堅)을 공격케 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떠나고 양인(陽人)에서 불과 수십(數十) 리(里) 쯤 떨어져 있던 광성(廣成)에 도착했을 때 날이 저물었다. 그러자 그때 여포(呂布) 등은 군사들이 피곤해 하는 것을 알면서도 호진(胡軫)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호진(胡軫)을 곤란하게 만들 목적으로 <지금, 孫堅이 도망을 가고 있기 때문에, 바로 추격하지 않으면 놓치게 됩니다>라고 거짓 정보를 고했다. 그러자 행군은 다시 시작되었고, 그렇게 해서 밤을 달려서 도착했던 양인(陽人)에는 손견(孫堅)이 이미 견고한 방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략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호진(胡軫) 등은 그때서야 투구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쉬려고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여포(呂布)가 달려와서 <지금 孫堅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라고 또 거짓 정보를 고했다. 그러자 또 호진(胡軫) 등은 그대로 도망을 쳤는데, 그러나 그 어디에도 적군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날이 밝고 확인해 보니 양인성(陽人城)의 방비는 변함 없이 견고했다. 그래서 호진(胡軫) 등은 양인 성(陽人城) 공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철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또 그때, 그것을 보고 달려온 손견 군(孫堅軍)에 동탁 군(董卓軍)은 대패했으며, 그리자 또 그때, 도위(都尉)였던 화웅(華雄)도 전사했다. 그런데 또 그 즈음, 누군가가 원술(袁術)에게 손견(孫堅)을 모함했고, 그러자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에게 병량(兵糧)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손견(孫堅)은 스스로 노양(魯陽)에서 주둔하고 있던 원술(袁術)을 만나러가서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들이 현재 자신의 귀한 몸을 던져서 싸우고 있는 것은, 위로는 국가를 위함이요, 아래로는 장군(袁術) 가문의 원수를 갚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장군은 누구의 모함은 받아들이고 우리의 충정은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그러자 그 즉시 원술(袁術)은 병량(兵糧)을 준비시켰고, 손견(孫堅)은 그것을 가지고는 다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손견(孫堅)은 동탁 군(董卓軍)을 맞아서 잘 싸웠다. 그러자 어쩔 수가 없었던 동탁(董卓)은 그에 낙양(洛陽)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고는 장안(長安)으로 물러갔다. 그러자 손견(孫堅)은 낙양(洛陽)으로 들어가서 옛 황제들의 능묘들을 복구했다. 그리고 또 <강표전(江表傳)>에 의하면, 바로 그때, 손견(孫堅)은 한(漢)의 옥새(玉璽)를 찾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손견(孫堅)은 노양(魯陽)까지 물러났다. 그리고 또 그때, 손견(孫堅)은 이미 예주(豫州) 자사(刺史)였는데, 그런데 원소(袁紹)가 갑자기 주우(周喁)란 자를 예주(豫州) 자사(刺史)로 파견했다. 그러자 손견(孫堅)과 원술(袁術)은 주우(周喁)와 주앙(周昻) 그리고 주흔(周昕) 그 주 씨(周氏) 삼형제와 예주(豫州)를 놓고 한판 다투게 된다. 그리고 또,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의 대립은 더욱 더 깊어졌고, 그 결과로 또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은 붕괴했으며, 그리하여 많은 무장들이 각자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군웅화(群雄化) 되어갔다. 그리고 또 그리하여 후한(後漢)의 지배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그때부터 전란(戰亂)의 시대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호뇌관(虎牢關)의 싸움>이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 191년에 원소(袁紹)가 인솔했던 반동탁연합군(反董卓連合軍)과 동탁 군(董卓軍)이 낙양(洛陽) 교외의 사수관(汜水關)에서 일시적으로 충돌했던 싸움을 말했다. 그리고 그 서전(緖戰)은 연합군이 우세했지만, 그러나 곧 이어서 나타난 맹장 여포(呂布)의 분전으로 동탁 군(董卓軍)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또 이어서 나타났던 관우(關羽)가 화웅(華雄)을 죽이는 등 분전했던 결과 다시 연합군이 우세해졌고, 그러자 동탁(董卓)은 어쩔 수 없이 장안(長安)으로 퇴각한다는 내용이므로, 궁금하신 분은 참고 바랍니다.

 아무튼, 그러나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퇴각한 후, 연합군 측에서는 유대(劉岱)와 교모(橋瑁)의 반목(反目)이 있었고, 그 결과로 교모(橋瑁)가 살해 당했다거나, 또한 병량(兵糧)이 고갈 되었다거나 하는 등 해서, 연합군들은 자연 해산되었다.

 참고: 그러나 演義에서는 그때, 董卓이 焦土作戰을 펼쳤기 때문에, 反董卓連合軍의 보급이 곤란해졌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곳에 모였던 무장 등, 유력자들은 그때부터 각자의 세력들을 키우기 위해서 군웅화(群雄化) 되어갔다. 그런 한편, 그렇게 도망을 갔던 동탁(董卓)은 장안(長安)에서도 폭정을 일삼았다. 그리고 또 동화(銅貨)였던 <오수전(五銖錢)>을 개량해서 화폐 가치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인플레이션도 발생시켰다.


<오수전(五銖錢)>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장안(長安) 근처의 <미(郿)>라는 곳에다 장안 성(長安城)과 같은 높이의 성벽을 쌓게 해서<郿城 또는 미오(郿塢)라고 불렀다> 그곳에다 30년 분(分)의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포학(暴虐)한 짓거리는 변함 없이 행해져서, 자신에게 반항했던 포로들은 모두 혀를 뽑았고, 또한 눈을 도려냈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열탕(熱湯)의 큰 솥에다 넣어서 삶기는 괴로움을 당하게 하면서 죽게 했다. 그리하여 또 그곳에서는 그 포로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매일같이 하늘 끝까지 메아리쳤다지만, 그러나 정작에 그 자신은 태연했으며, 또한 그런 그들을 보면서도 흐뭇하게 웃으면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또 동탁(董卓)의 사위였던 우보(牛輔)란 자는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등을 파견해서 중모(中牟)에서 주준(朱儁)을 파(破)했으며, 이어서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과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의 제현(諸縣)들을 공략했고, 그리하여 약탈과 살육(殺戮), 유괴(誘拐) 등의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렇게 오만하고 잔학했던 동탁(董卓)도 운명을 비켜 가지는 못했고, 그리하여 결국 초평(初平) 3년 4월(192년)에 사도(司徒)였던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자(親子)의 약속까지 맺었던 여포(呂布)가 그를 살해했던 동기에 대해서 논하자면, 정사(正史)에서는 어느 때 여포(呂布)가 아주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동탁(董卓)이 여포(呂布)를 죽이려고까지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에 앙심을 품고 여포(呂布)가 동탁(董卓)을 살해했다거나, 혹은 또 동탁(董卓)의 시녀(侍女)와 여포(呂布)가 밀통을 했는데, 그런데 그 일이 발각이 되자 여포(呂布)는 자신이 받게 될 벌이 무서워서 먼저 그를 죽이게 되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또 <연의(演義)>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왕윤(王允)이 자신의 양녀였던 <초선(貂蟬)>을 이용해서 그런 결과를 낳게 했다고 묘사되어 있다.<(美女) 連環計>





 아무튼 그 후, 장안(長安)과 미(郿)에 거주했던 동민(董旻)과 동황(董璜)을 시작으로 해서 동탁(董卓)의 일족들은 여포(呂布)의 부하들과 원 씨(袁氏) 일족 등에 의해서 전부 살해 당했고, 거기다 당시 동탁(董卓)의 90세나 되었던 노모(老母)까지도 남김 없이 살해 당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동탁(董卓)에 의해서 살해 당했던 원 씨(袁氏) 일족들에 대한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으며, 그와 동시에 그때 살해 당했던 동 씨(董氏) 일족들의 시체들은 모두 한곳에 모아져서 불 질러졌다. 그리고 또 그때, 사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탁(董卓)은 몹시 비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야영을 하던 한 병사가 그의 시체에다 등심(燈心-심지)을 꽂아 두었더니 며칠이나 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어람인동탁별전(御覽引董卓別傳)에서는 <그가 죽자 백성들은 모두 기뻐서 춤을 추었고, 이어서 그들은 집안의 가재(家財)들을 전부 다 내다 팔아서 술과 맛있는 음식들을 샀다. 그리고는 서로 나눠 먹으면서 축하잔치를 벌렸는데, 그러자 그 때문에 장안(長安)의 술과 고기값이 급등했다... >라고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의 부하 중 누군가가 그의 시체가 타고난 재를 모아서 미성(郿城)에다 매장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연의(演義)에서는 그 장면을 각색(脚色)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이각(李傕) 등, 네 장군(四將)이 명령을 내려서 동탁(董卓)의 시체를 찾게 했는데, 그러자 몇 안 되는 뼈와 가죽들만 수거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향나무를 조각해서 동탁(董卓)의 상(像)을 만들어서 그의 유체 대용(代用)으로 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미오(郿塢)로 가서 아주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고, 이어서 왕자(王者)의 의관(衣冠)과 관(棺)으로 그를 매장하려 하였으나, 그런데 마침 또 그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렸고, 이어서 수척(數尺) 깊이의 폭우가 쏟아졌으며, 끝내는 낙뢰가 하늘에서 떨어져서 동탁(董卓)의 유체(遺體)를 산산이 흩어 버렸다. 그리하여 때를 기다려 세 번이나 다시 매장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렸고, 그 후 번개에 맞아서 동탁(董卓)의 유체(遺體)는 이미 이 지상(地上)에서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보아, 그때 그에 대한 하늘의 분노 또한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아무튼, 연의(演義)는 그렇게 동탁(董卓)을 편타(鞭打)했고, 그리고 또 그 <세 번이나>에서 3이란 숫자는 안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가 죽고 난 다음의 세상은 안정을 되찾게 된다, 또는 안정되길 바란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던 것 같지만, 하지만 그 후의 전란(戰亂)의 시대를 보게 되면, 생각을 바꾸어서 그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독재자가 죽음으로 해서, 세상의 안정도 끝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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