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8)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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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吳
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송의 위치도-下中>


 송(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286년)은 중국의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였고, 도(都)는 상구(商丘)였다. 그리고 송(宋)은 주(周)에 의해서 멸해졌던 은(殷) 주왕(紂王)의 이모형(異母兄)이었던 미자계(微子啓-참고 6-13참조)가 봉해졌던 나라였고, 그 후에도 국력은 그렇게 크게 신장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또, 전(前) 왕조와 연결된 나라라는 것으로 해서, 최고위의 공작(公爵)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 나중 후, 양공(襄公)의 시대에 힘이 조금 생겨서 제(齊)의 환공(桓公-참고 6-15, 16참조)이 사망한 후에 제후들의 회맹을 주도했다. 그러자 초(楚)의 성왕(成王)이 그것을 몹시 못마땅해 했고, 그 결과로 회맹을 끝내고 왔던 양공(襄公)을 감금시켜 버렸다. 그러자 또 양공(襄公)은 일단 성왕(成王)에게 그 일에 대해서 사죄를 하고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양공(襄公)은 그 일을 설욕(雪辱)하기 위해서 홍수(泓水-현재의 河南省 柘城)에서 초(楚)와의 결전에 임했다. 그러자 그 초군(楚軍)의 도하(渡河) 시에, 그것이 호기라고 보았던 송군(宋軍)의 재상(宰相)이 그에 대한 공격허가를 양공(襄公)에게 구했지만, 그러나 양공(襄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곧 이어서 초군(楚軍)은 무사히 도하해서 대열을 정비했고,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재상이 다시 공격허가를 요청했지만, 그러나 그때도 양공(襄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사이에 초군(楚軍)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송군(宋軍)을 쳤으며, 그 결과로 송(宋)은 참패했다. <홍수(泓水)의 싸움>

 그 후 <그때 왜 공격허가를 내리지 않았는가?> 하고 묻자 양공(襄公)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름지기 군자(君子)란, 상대의 약한 틈을 이용해서 이기는 짓은 삼가는 법이다!> 그러자 후세의 사람들은 그 양공(襄公)의 말에 빗대어서, 자신의 분수도 모르는 쓸데도 없는 인(仁)이라고 했고, 그것을 또한 <양공(襄公)의 인(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홍수(泓水)의 싸움 후에, 진(晋)의 공자(公子)였던 중이(重耳)가 송(宋)으로 망명해왔다. 그러자 그가 당대의 일재(逸才)라는 것을 간파했던 양공(襄公)은, 그때가 바로 패전 후였던 것에도 관계없이 그 중이(重耳)를 후히 대접하면서 맞이했다. 그러자 또 중이(重耳)는 그때의 은혜를 잊지 않고 나중에 자신이 진(晋)의 군주가 되었을 때, 그리고 또 그 후에 초(楚)가 그 송(宋)을 공격했을 때, 그는 대군(大軍)을 일으켜서 송(宋)을 구원했다. 하지만 그 중이(重耳) 사후에도 그런 관계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래서 또 그 후에도 초(楚)가 아무리 송(宋)을 괴롭혔어도, 송(宋)은 진(晋)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초(楚)는 서서히 북상(北上)을 시도했는데, 하지만 또 진(晋)이 그것을 물리치는 형태로 춘추시대 중기의 모습은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그 후, 그 나마의 양공(襄公)도 죽어버리자, 그 후에 송(宋)은 제(齊)와 초(楚) 그리고 진(晋)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겨우 명맥(命脈)만 유지해가는 꼴로 전락해갔으며, 그런데다 또 송(宋) 최후의 왕이었던 강왕(康王)이 폭군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그 송은 기원전 286년에 제(齊)에 의해서 멸해졌다.

 
⊙ 성왕(成王-?부터 기원전 626년 10월 20일)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군주였고, 재위는 기원전 671년부터 기원전 626년까지였다. 그리고 성(姓)은 미(羋)였으며, 씨(氏)는 웅(熊) 그리고 휘(諱)는 운(惲)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선선(先先) 대(代)의 문왕(文王)이었고, 그 다음은 형 장오(荘敖)가 왕위를 이었지만, 그러나 성왕(成王)은 그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덕(德)을 깨달아서 은혜를 베풀 줄 알았으며, 제후들과도 깊게 사귀었던 한편, 주왕(周王)에게 조공(朝貢)도 했다. 그러자 그는 그 주왕(周王)으로부터 <남방(南方)을 진정(鎭定)시키시오!>라는 말을 내려받았고, 그러자 그 후로 그는 적극적으로 주변의 제국(諸國)들을 병탄(倂呑)해서 천리(千里)를 개척했다. 그러자 그 후로 초(楚)의 국력은 급속도로 신장되었고,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제(齊)의 재상(宰相) 관중(管仲)은 환공(桓公)에게 그 초(楚)를 토벌할 것을 진언(進言)했다. 그러자 또 당시, 아무리 기세등등했던 성왕(成王)이었어도 그러나 당시의 패자(覇者)였던 환공(桓公)에게는 적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성왕(成王)은 화목의 의미로 환공(桓公)이 주재(主宰)했던 회맹(會盟)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 환공(桓公)이 죽자 이번에는 송(宋)의 양공(襄公)이 그 회맹을 주재해서 성왕(成王)을 초대했는데, 그러자 성왕(成王)은 <소국(小國)인 송(宋)이 나를 초대했다니, 그것은 무례(無禮)다!>라고 말을 하고는 자신의 부하 장군 자옥(子玉)을 그 회맹의 자리에 보내서 양공(襄公)을 아주 크게 모욕했다. 그러자 그 후, 성왕(成王)은 그 공으로 자옥(子玉)에게 영윤(令尹-宰相에 상당)의 벼슬을 내렸다.

 ○ 자옥(子玉)은 성득신(成得臣-?부터 기원전 632년)이며,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장군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벼슬은 영윤(令尹)을 지냈으며, 자(字)가 자옥(子玉)이었고, 성왕(成王)을 모셨다. 그리고 또한 맹장(猛將)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기원전 640년에 진(晋)의 공자(公子)였던 중이(重耳)가 초(楚)로 망명을 갔는데,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와 그 측근들의 재능을 알아차리고는 제후(諸侯)의 예에 버금가게 극진히 대접했다. 그리고 또한 중이(重耳)의 귀국을 지원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던 성왕(成王)은 농담 삼아서 <만약에 당신이 귀국하게 된다면, 나에게 그 보답을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중이(重耳)는 <진(晋)초(楚) 양군이 중원(中原)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3사(舍)를 양보해드리겠습니다>라고 답을 했는데, 여기서 <1사(舍)>는 그 당시, 군대의 하루 행군거리를 가리켰던 것이므로, 그래서 중이(重耳)는 3일간의 행군거리를 양보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 지금의 거리로 따지면 약 60킬로미터에 해당되는 거리였다. 그러자 그 말을 전해 들었던 자옥(子玉)은 대노(大怒)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말은 너무 불손(不遜)하므로, 그 무례(無禮)를 물어서 당장 죽여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성왕(成王)은 자옥(子玉)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기원전 637년에 진(陳)이 송(宋)의 길을 빌려서 초(楚)의 배후를 위협했다. 그러자 자옥(子玉)은 군을 이끌고 가서 그것을 토벌했으며,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이 회맹을 주재(主宰)했을 때, 그곳으로 가서 그 수좌(首座)에 앉아 있던 양공(襄公)을 납치해서 초(楚)로 데려갔고, 그로써 양공(襄公)의 체면은 완전하게 모욕당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공으로 자옥(子玉)에게 영윤(令尹)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또 다시 기원전 633년에, 초(楚)의 성왕(成王)이 송(宋)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모았다. 그리고는 자옥(子玉)과 자문(子文)에게 그 군사의 훈련을 맡겼다. 그러자 또 자문(子文)은 자옥(子玉)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아침식사 전에 연습을 끝냈으며, 단 한 사람의 병사도 벌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옥(子玉)은 하루 종일 훈련을 시켰으며, 7명의 병사에게 편타(鞭打-채찍으로 때리는 笞刑)를 가했고, 그 중에 3명을 죽였다. 그러자 귀족(貴族)들은 그러했던 자옥(子玉)의 유능함을 칭찬했으며, 자문(子文)에게도 축하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때, 단 한사람 위가(蔿賈)만은 축하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자문(子文)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또 위가(蔿賈)가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도대체 뭘 축하하라는 말이요?! 그리고 만약에 자옥(子玉)이 군사(軍事)로서 실패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 그를 추천한 당신들의 책임이요! 그리고 또 그 자옥(子玉)은 기(氣質)가 강한 사람이고, 예의를 모르는 사람을 다스리는데도 부적격인 사람이요! 그렇기 때문에 또 300승(乘=臺) 이상의 군을 통솔하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그 군을 무사히 귀환시킬 수 없을 것이요!> 그리하여 기원전 632년에 성왕(成王)이 다시 중원(中原)을 노리고는 그곳으로 군을 진군시켰다. 그리고는 제국(諸國)을 토벌하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는 이미 문공(文公)이 되어있었던 중이(重耳)가 원군을 보냈기 때문에 그래서 성왕(成王)은 하는 수 없이 본국으로 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또 위가(蔿賈)의 예언을 알고 있었던 자옥(子玉)이 그런 성왕(成王)을 말리면서 문공(文公)과 싸울 것을 권했지만, 그러나 성왕(成王)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자옥(子玉)이 성왕(成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제가 문공(文公)과 싸우자고 하는 것은 단지 공을 세우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저를 비방하는 자(蔿賈)의 입을 막으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는 자옥(子玉)이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그 문공(文公)과 싸우려고 하자, 성왕(成王)은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고는 자옥(子玉)만 그곳에 남겨두고 초(楚)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자 결국 자옥(子玉)은 성복(城濮)이란 곳에서 진군(晋軍)과 격돌했고(城濮의 싸움), 그 결과 문공(文公)에게 패했다. 그러자 자옥(子玉)은 패군지장(敗軍之將)이 되어서 다시 초(楚)로 도망을 갔는데, 하지만 그 후에 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살했다. 그리고 또 그때, 문공(文公)도 싸움에는 이겼지만, 그러나 그 자옥(子玉)을 놓친 것을 두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궁서(窮鼠)는 고양이에게도 덤벼드는 법인데, 하물며 일국(一國)의 재상(宰相)을 말해서 무엇 하랴!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다시 복수를 하러 올 것이다!> 그리고는 승리의 기쁨도 누리지 않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하지만 그 후에 자옥(子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그때서야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아, 이제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구나!>(窮鼠는 고양이도 문다의 故事)

 ○ 자문(子文)은 투곡어도(鬬穀於菟)이며, 생몰은 불명하다. 그리고 그는 춘추시대에 초(楚)의 재상을 지냈으며(令尹), 성(姓)은 미(羋), 씨(氏)는 투(鬬), 휘(諱)는 곡어도<穀於菟-穀은 젖(乳)이고, 於菟는 호랑이(虎)란 뜻임>, 자(字)는 자문(子文)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투백비(鬬伯比)의 아들이었으며, 청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초(楚)나라 굴지(屈指)의 현상(賢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하는 자문(子文)으로 명기(名記)함. 그는 아버지 투백비란 자가 당시, 운공(鄖公)이란 사람의 딸과 밀통(密通)을 해서 생겼던 자식이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운몽(雲夢)이란 못(또는 늪-澤) 한중간에다 그를 버렸다. 그런데 그 후에 사냥을 나갔던 운공(鄖公)이 마침 또 그때 호랑이가 키우고 있던 그를 발견했고, 그러자 또 운공(鄖公)은 그를 데려가서 자신의 딸이 키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후, 기원전 664년에 그는 영윤(令尹)에 발탁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사재(私財)를 풀어서 초(楚)의 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때문에 가난해져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었던 그에게 몇 번이고 봉록(俸祿)을 올려주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그는 관직마저 버리고 하야(下野)했다. 그러자 또 성왕(成王)은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취소하자 그가 다시 돌아왔으며, 그러자 또 성왕(成王)은 그 대신으로 그에게 말린 육포(肉脯) 1속(束-다발 또는 묶음)과 조반(朝飯) 1롱(籠-한바구니 또는 한 그릇)을 내렸는데, 그러자 그 후로 그것이 관습(慣習)이 되어서 초(楚)의 영윤(令尹)이 되었던 사람에게는 그것이 계속해서 내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그의 동생이었던 자양(子良)이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을 자월(子越)이라고 지었는데, 그러자 그는 자양(子良)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너는 이 아이를 키울 수 없으므로, 반드시 너의 손으로 죽여야 할 것이다> 그러자 자양(子良)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아이의 모습은 마치 곰이나 호랑이와 같고, 그 목소리는 또 들개나 이리 같다. 그러므로 이 아이는 훗날 분명히 우리 약오 씨(若敖氏)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양(子良)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는 임종(臨終) 시에 일가족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초(椒=子越)가 만약에 정권을 잡게 된다면, 너희들은 모두 이 楚를 떠나서 그 難을 피하도록 하라> 그런 다음에 그는 다시 <약오 씨(若敖氏)의 영혼들은 모두 허덕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울었으며, 그것으로 그 약오 씨(若敖氏)의 멸망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문(子文) 사후, 자월(子越)은 자문(子文)의 예언대로 당시 명군(名君)이었던 장왕(莊王)을 배신했기 때문에 약오 씨(若敖氏)는 멸문(滅門)했다. 그러자 또 장왕(莊王)은 <그 때문에 저 자문(子文)의 가계(家系)가 멸문하게 된다면 후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善行)을 행하라고 말을 할 자격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또 당시 그 배신에 가담하지 않고 초(楚)를 떠나 있었던 일족 중에서 투극황(鬬克黃)이란 사람에게 그 가계를 계속해서 잇게 했다.

 아무튼 그 후, 송(宋)은 그 설욕(雪辱)을 위해서 초(楚)에 도전했고, 그 결과로 홍수(泓水)에서 격돌했지만(泓水의 싸움), 전술(前述)대로 초(楚)에 졌다. 그리고 또 그 후, 방랑 중이던 진(晋)의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초(楚)로 들어오자 그는 그 그릇을 알아보고 중이(重耳)를 환대했으며, 그 후에 또 진(晋)에서 혜공(惠公)이 몰(沒)하고 회공(懷公)이 즉위하자 그는 중이(重耳)에게 후한 선물을 안긴 후, 진(晋)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진(秦)으로 보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제(齊) 환공(桓公)의 공자(公子)들 7명이 초(楚)로 망명을 왔을 때도 그는 그들 전원을 상대부(上大夫)에 봉했다. 그 후, 성왕(成王)이 송(宋)을 공격하자 진(晋)의 중이(重耳) 문공(文公)이 원군을 보냈으므로, 성왕(成王)은 그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초(楚)로 다시 회군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 영윤(令尹)이었던 자옥(子玉)이 싸우기를 원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때 자옥(子玉)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중이(重耳)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타국에서 망명생활을 했지만, 그러나 결국 천의(天意)에 의해서 진(晋)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옥(子玉)이 계속해서 고집을 하자 성왕(成王)은 화가 나서 자옥(子玉)에게 소수(小數)의 병력만 주고는 철수해버렸다. 그러자 결국 초군(楚軍)은 패했으며, 자옥(子玉)도 그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그 후, 성왕(成王)은 포학(暴虐)했던 공자(公子) 상신(商臣)을 폐하고, 서자였던 공자(公子) 직(職)을 후계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공자(公子) 상신(商臣)이 병(兵)을 이끌고 들어가서 성왕(成王)을 포위했으며, 그 결과로 성왕(成王)은 오히려 그 상신(商臣) 앞에서 자살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죽기 전에 곰발바닥요리를 먹고 싶다는 말을 했지만, 그러나 상신(商臣)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 후, 상신(商臣)은 목왕(穆王)이 되었고, 그래서 성왕(成王)에게 영(靈)이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는데, 그러나 성왕(成王)의 눈이 감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상신(商臣)은 다시 성(成)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그러자 또 그때서야 성왕(成王)의 눈이 감겼다고 한다.(成王 끝)

 <송(宋)에 관한 일화(逸話)>

 옛날, 송(宋)에 어떤 남자가 들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 근처 숲에서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는 나무의 그루터기에 머리를 부딪쳐서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사내는 손 하나 까딱 안하고 그 토끼를 얻게 되어서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또 그 다음날, 그 남자는 다시 또 그런 일이 생길까 해서 하루 종일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 사이에 그의 밭은 잡초만 무성해졌다고 하며, 그리고 또 이 이야기는 한비(韓非)가 구습(舊習=舊來)의 제도(制度)에만 매달리는 자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일화(逸話)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래는 송(宋)의 역대(歷代) 군주(君主)들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1. 微子啓(啓)
 2. 微仲衍(衍)
 3. 宋公稽(稽)
 4. 丁公(申)
 5. 湣公(共)
 6. 煬公(熙)
 7. 厲公(鮒祀):? — 紀元前859年
 8. 釐公(舉):紀元前859年 — 紀元前831年
 9. 恵公(覵):紀元前831年 — 紀元前801年
 10. 哀公:紀元前801年 — 紀元前800年
 11. 戴公:紀元前800年 — 紀元前766年
 12. 武公(司空):紀元前766年 — 紀元前748年
 13. 宣公(力):紀元前748年 — 紀元前729年
 14. 穆公(和):紀元前729年 — 紀元前720年
 15. 殤公(與夷):紀元前720年 — 紀元前711年
 16. 荘公(馮):紀元前711年 — 紀元前692年
 17. 湣公(捷):紀元前692年 — 紀元前682年
 18. 宋子游(游):紀元前682年
 19. 桓公(禦説):紀元前682年 — 紀元前651年
 20. 襄公(兹甫):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21. 成公(王臣):紀元前637年 — 紀元前620年
 22. 宋君禦(禦):紀元前620年
 23. 昭公(杵臼):紀元前620年 — 紀元前611年
 24. 文公(鮑革):紀元前611年 — 紀元前589年
 25. 共公(瑕):紀元前589年 — 紀元前576年
 26. 平公(成):紀元前576年 — 紀元前532年
 27. 元公(佐):紀元前532年 — 紀元前517年
 28. 景公(頭曼):紀元前517年 — 紀元前469年
 29. 宋公啓(啓):紀元前469年
 30. 昭公(特):紀元前469年 — 紀元前404年
 31. 悼公(購由):紀元前404年 — 紀元前385年
 32. 休公(田):紀元前385年 — 紀元前363年
 33. 桓公(辟兵):紀元前363年 — 紀元前350年?
 34. 剔成君(剔成):紀元前350年? — 紀元前329年
 35. 康王(偃):紀元前329年 — 紀元前286年





 <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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