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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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 진(秦-기원전 778년부터 기원전 206년)

<진 제국의 판도>
중국 왕조 중 하나였으며,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존재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했지만, 기원전 206년에 멸망했다. 그리하여 통일부터 멸망까지의 기간(기원전 221년부터 기원전 206년)을 진대(秦代)라고 부른다. 국성(國姓)은 영(嬴), 통일 때의 수도는 함양(咸陽)이었다.
아무튼, 진(秦)은 춘추시대에 들어서자마자 제후(諸侯)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러나 원래부터 이민족이었기 때문에 풍속적으로 중원(中原) 제국(諸國)들과 크게 차이를 보였다. 그리하여 당초에는 그 야만성으로 인해서 멸시를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대를 이어가면서 진(秦侯)은 주로 서융(西戎)과 항쟁해 나가면서 영토를 넓혀갔고, 그 사이에 또 법률을 정비하는 등, 점차로 국가의 모습으로 변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677년에는 수도를 옹(雍-현재의 陝西省 鳳翔県=宝鷄市)에 두게 되었다. 그 후, 9대째의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 등의 타국(他國) 출신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해서 적절하게 배치했고, 신의(信義)를 지키는 자세로 임해서 서융(西戎)을 크게 무찔러서 그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든지, 그런 후에는 또 주변의 소국(小國)들을 병합해서 영토를 확장했으며, 그리하여 결국에는 이웃의 대국(大國)이었던 진(晋)에도 필적(匹敵)할만한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
⊙ 목공(穆公)은 중국 춘추시대 진(秦)의 제9대 군주였고, 목공(繆公)으로도 표현했다. 그는 제6대 덕공(德公)의 아들로 제8대 성공(成公)의 아우였지만, 형제상속에 의해서 진공(秦公)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진(晋) 헌공(獻公)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그런데 그때, 백리해(百里奚)가 시신(侍臣)으로 따라왔다. 그러자 목공(穆公)은 그를 가신으로 삼았으며, 그 후에는 백리해(百里奚)에게 국정을 맡기게 되었다.
○ 백리해(百里奚)는 중국 춘추시대 진(秦)의 재상(宰相)으로,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맹명시(孟明視)의 아버지로도 알려졌고, 백리혜(百里傒)라고도 불렸다. 그는 초(楚)나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그의 1세대 전에 허(許)나라에 백리(百里)라는 이름을 가진 대부(大夫)가 있었다는 것이 춘추좌씨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출신지는 아마도 그 허(許)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는 장성해서 제(齊)로 갔는데, 그때 기아(飢餓)로 길거리에서 쓰러져버렸다. 그러자 그 제(齊)의 사람이었던 건숙(蹇叔)이란 사람이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당시의 제공(齊公-襄公 또는 公孫無知)을 모시려고 했지만, 그러나 건숙이 그를 말렸다. 그러자 그 후, 제공(齊公)은 곧 살해당했고, 그것으로 또 그는 그 건숙에게 두 번의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또 주(周)로 가서 공자(公子) 퇴(頹)를 모시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건숙이 말렸다. 그러자 또 그 퇴(頹)는 기원전 675년에 혜왕(惠王)을 쫓아내고 잠시 왕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그 2년 후였던 673년에 패사(敗死)했다. 그러자 또 그것으로 백리해(百里奚)는 건숙에게 세 번째의 큰 은혜를 입었다. 그 다음에 그는 또 주(周) 왕실에 연(連)이 있었던 우<虞-성(姓)은 희(姬), 문왕(文王)의 백부(伯父)였던 우중(虞仲-雍)의 계통>에게 가려했으나, 그러자 또 건숙이 그를 말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리해(百里奚)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虞)에게로 가서 대부(大夫)가 되었다. 그러자 그 후로 건숙(蹇叔)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655년 겨울에 진(晋)의 헌공(獻公)이 우후(虞侯)에게 벽<璧-얇게 고리 모양으로 만든 옥(玉). 중국(中國) 주(周)나라 때부터 한(漢)나라 때에 걸쳐서 제기(祭器)ㆍ보물(寶物)ㆍ장식품(裝飾品)으로서 애호(愛好)되었음. 여러 가지 무늬가 있다고 함>과 명마(名馬)를 선물로 가져와서, 당시 그 우(虞)의 친척이었던 곽<霍-개조(開祖)는 무왕(武王)의 이모제(異母弟)였던 곽숙처(霍叔處)>과 괵<虢-개조(開祖)는 문왕의 아우였던 괵중(虢仲)>을 토벌하러 갈 때, 자신들이 그 길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우후(虞侯)에게 요구했다. 그러자 백리해(百里奚)는 현신(賢臣)이자 고명(高名)했던 궁지기(宮之奇)와 함께 그것을 거절하라고 우후(虞侯)에게 간언했지만, 그러나 우후(虞侯)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헌공(獻公)의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그러자 결국 헌공(獻公)은 그 곽(霍)과 괵(虢)을 쳐서 괴멸시켰고, 돌아오던 길에는 우(虞)마저 습격해서 멸했으며, 그러자 또 우후(虞侯)와 백리해(百里奚) 등은 포로가 된 후, 종의 신분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또 백리해(百里奚)는 그때서야 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로부터 또 얼마 후, 헌공(獻公)의 딸이 진(秦)의 목공(穆公)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그러자 백리해(百里奚)는 그 딸의 종 신분으로 진(秦)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의 어느 날 백리해(百里奚)는 목공(穆公)의 신하 중 한사람과 정치에 관해서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신하가 그를 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목공(穆公)에게 그를 추천했다고 한다. <당신을 재상의 자리에 앉히면 진(秦)의 세력은 천리(千里)를 헤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백리해(百里奚) 본인은 그것이 싫어서 외국으로 도망을 가버렸는데, 그런데 그 도망을 갔던 초(楚)의 땅에서 그는 노예의 신분이 되었고, 그런데 또 그때, 우연히 목공(穆公)의 신하 중 한명이 그를 알아보고는 양피(羊皮)5장(五羖)를 주고 그를 사서 다시 진(秦)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또, 그런 연유로 해서 그는 그 후로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목공(穆公)은 그와 3일 밤을 마주앉아 국사에 대해서 논했고, 그 결과 그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또 그때, 백리해(百里奚)의 나이는 70여세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백리해(百里奚)는 철저한 덕정(德政)을 펼쳤고, 그것은 또, 주변의 제국(諸國)들을 배려하는 정책이 되었다. 그러자 주변의 10개국(個國)이 그 진(秦)에 복속하기를 신청해 왔고, 그러자 또 진(秦)은 문자 그대로 천리(千里-1國=百里, 10국=千里)에 그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바로 그것은, 후의 시황제(始皇帝) 때 그 진(秦)이 전국통일을 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또 백리해(百里奚)는 말 그대로 청렴결백했기 때문에, 겨울에도 외투를 입지 않았고, 국내를 순찰했을 때도 그 위병(衛兵)들에게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그는 과거 큰 은혜를 입었던 건숙(蹇叔)을 목공(穆公)에게 천거했고, 그러자 또 목공(穆公)은 그 뜻을 받아들여서 건숙(蹇叔)을 진(秦)으로 초빙했으며, 이어서 상대부(上大夫)란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백리해(百里奚)가 재상이 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90을 넘겼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래서 또 그가 사망했던 나이는 아마도 100세 근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의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또 사기(史記)의 몽념(蒙恬)전(傳)에는 <몽곡(蒙穀-蒙恬의 아우)이 말하기를, 옛날 우리 진(秦)의 목공(穆公)은 삼량(三良-세 명의 훌륭한 신하)을 죽였고(殉死로, 주군을 따라서 같이 죽는 것.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구의 순사인지는 알 수 없음), 백리해(百里奚)를 처벌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호(號-諡號)를 목(繆=穆. 誤字로 봄.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뜻으로 말을 하자면, 얽을 무와 목멜 규 자로도 쓰이기 때문에, 그 繆 字의 진위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음)으로 올린 것입니다>라고 그가 처형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다. 그래서 또, 목공(穆公)은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백리해(百里奚)의 아들이었던 맹명시(孟明視)를 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진(秦)의 남녀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전부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애도했다고 하며, 아이들조차도 평소 동네에서 놀면서 부르던 노래조차도 부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 맹명시와 건숙(蹇叔)은 재상이 되어서 목공(穆公)을 잘 보좌했다.
☆ 혜공(惠公)은 주조(周朝) 제17대왕으로, 희공(釐公)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희공(釐公)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으며(기원전 676년), 그 원년(元年)에 논에다 야수(野獸)를 사육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참고: 그러나 일설에는, 왕자 퇴(頹)와 아래 5대부(大夫)의 횡포가 너무 심해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곳에다 일종의 동물원을 건립했기 때문에, 그 불만으로 퇴(頹)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함.
그러자 또 그 결과로, 그 다음해 가을에, 변백(邊伯)이란 자와 석속(石速) 그리고 첨보(詹父)와 자금(子禽), 축궤(祝跪) 그 5인의 대부(大夫)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어서 연(燕)과 위(衛)의 군사를 끌어들여서 혜왕(惠王)을 공격했다. 그러자 또 혜왕(惠王)은 온(溫-현재의 河南省 温県 南部)으로 도망을 갔고, 그러자 또 정(鄭)의 여공(厲公)이 역지(櫟地-현재의 禹州市)에서 그를 맞이해 주었다. 그러자 그해 겨울, 혜왕(惠王)의 조부(祖父)였던 장왕(莊王)의 첩(妾-姚氏)이 낳았던 아들이었으며, 혜왕(惠王)의 숙부(叔父)에 해당되었던 미숙퇴(弭叔頹)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의 참고도>
그 후, 혜왕(惠王) 4년이었던 기원전 673년에 정(鄭)은 괵(虢)의 원조를 받아서 퇴(頹)를 공격해서 죽였고, 그 결과로 다시 혜왕(惠王)이 복위했다. 그러자 또 그 후, 정(鄭)은 은상(恩賞)로서 호뢰(虎牢-현재의 河南省 滎陽 汜水鎮) 이동(以東)의 땅을 받았으며, 괵(虢) 또한 같은 뜻으로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혜왕(惠王) 10년(기원전 667년)에, 혜왕(惠王)은 제(齊)의 환공(桓公)에게 백(伯)의 위(位)를 하사했으며, 25년(기원전 652년)에 죽었다.
☆ 헌공(獻公-?부터 기원전 651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재위는 기원전 676년부터 기원전 651년)로, 성(姓)은 희(姬), 휘(諱)는 궤제(詭諸)였고,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다. 그는 태자(太子)로서 아버지 무공(武公)의 진(晋) 재통일에서 활약했고, 무공(武公)의 뒤를 잇게 되었던 것은 괵(虢)과 위(魏) 등의 주변 제국(諸國)들을 병탄(倂呑-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했던 것과, 사위(士蔿)를 헌책(獻策)했던 일, 그리고 또 환(桓)과 장(莊)의 족속들을 멸해서 종가(宗家)의 권위를 확립시켰고, 그리하여 진(晋)을 융성시켰던 점 등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만년에는 그 역시 총기가 흐려져서 애첩이었던 <여희(驪姬)>의 참언(讒言)을 믿고 태자(太子) 신생(申生-共太子)을 죽였으며, 이어서 공자(公子) 중이(重耳-나중의 文公이며, 후술함)와 공자(公子) 이오(夷吾-나중의 惠公이며, 후술함) 등을 먼 곳으로 쫓아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진(晋)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을 <여희(驪姬)의 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후로 진(晋)은 태자(太子) 이외의 공자(公子)들은 모두 국외로 내보내는 전통을 지키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또 공족(公族)의 힘이 그때부터 현저하게 약해지게 되었다.
☆ 사위(士蔿)는 생몰년불명이며,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다. 성(姓)은 기(祁)였으며, 씨는 사(士), 그리고 휘(諱)는 위(蔿), 자(字)는 자여(子與)였다. 그는 또 무공(武公)과 헌공(獻公)을 모셨으며, 그리하여 진(晋) 발전의 기초를 구축했다. 그는 또 진(晋)의 공실(公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으며, 그리고 또 당시 진(晋) 공실(公室)의 위세를 위협하기 시작했던 환(桓)과 장(莊) 족(族-桓叔과 莊伯에서 떨어져 나온 分家)을 모략(謀略)으로 제거한 공적으로, 헌공(獻公)으로부터 대사공(大司空)에 임해져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또 그 대사공(大司空)이란 벼슬은 전무후무하게 오직 그만 누렸던 직책으로, 사실상의 재상(宰相) 직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법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국법(國法)을 정했으며, 그것은 또 나중에 그의 손자였던 사회(士會)가 정했던 <범무자(范武子)의 법>과 함께 오래 존중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소위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하자 그는 <하나의 나라에 왕이 3명이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도대체 누구를 모셔야 좋단 말인가?>라고 말을 하고는 사직(辭職-隱退)했다고 한다.
☆ 여희(驪姬-?부터 기원전 651년)는 진(晋) 헌공(獻公)의 총희(寵姬)였고, 이민족 여융(驪戎)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헌공(獻公)이 첫눈에 반해서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을 함께 후궁으로 들인 후, 총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에 진(晋)으로 갔을 때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주 탄식도 했다지만, 그러나 그 후에 헌공(獻公)의 총애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궁중 사치에 길들여지자 이윽고 그랬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헌공(獻公)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들 해제(奚齊)를 태자에 세우려고 헌공(獻公)을 조종했으며, 그 결과로 그녀 외의 여성과의 사이에서 났던 헌공(獻公)의 자식들, 신생(申生) 등을 책략을 써서 차례로 모두 말살시켜 버렸다. 그러자 또 그때, 나중에 진(晋)을 잇게 되는 중이(重耳)와 이오(夷吾) 형제도 그 때문에 도망을 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여희(驪姬)의 난>이었고, 그러자 또 진(晋)에서는 정치적인 혼란과 함께 국력이 한때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헌공(獻公)이 죽고 1개월 후, 헌공(獻公)의 부하였던 이극(里克)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러자 그때 여희(驪姬)와 해제(奚齊) 그리고 여희의 여동생 등, 일족이 모두 참살되었다.
아무튼, 기원전 651년에 인접국이었던 진(晋)의 헌공(獻公)이 사망하자, 그 후계를 놓고 진(晋) 내에서는 일대(一大) 혼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또 진(晋)의 공자(公子)였던 이오(夷吾)는 진공(晋公)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목공(穆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또 목공(穆公)은 그때 실제로는 중이(重耳)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그러나 계산상으로 봤을 때 당시 총명함으로 이름이 높았던 이오(夷吾)의 형 중이(重耳)보다는, 그 이오(夷吾)를 진공(晋公)에 세우는 것이 자신에게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오(夷吾)를 지원했고, 그러자 이오(夷吾)는 보답으로 목공(穆公)에게 영토의 할양(割讓) 약속했고, 이어서 진(晋)으로 들어가서 혜공(惠公)이 되었다. 하지만 이오(夷吾)는 왕좌에 앉게 되자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폭정(暴政)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647년, 진(晋)에 흉년이 들었고, 그러자 또 모든 식료(食料)가 부족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이오(夷吾)는 목공(穆公)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그러자 진(秦)의 신하들은 이오(夷吾)의 배은망덕을 이유로 해서 그것을 거절하라고 목공(穆公)에게 간언했다. 하지만 목공(穆公)은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아주 엄청난 양의 식료품을 진(晋)에 수출(輸出)했다고 한다. <혜공(惠公)의 짓거리는 밉지만, 그러나 그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런데 또 그 다음 해에, 이번에는 진(秦)이 흉년을 맞았다. 그러자 목공(穆公)은 진(晋)에 요청을 해서 물품의 지원을 부탁했다. 하지만 또 혜공(惠公)은 그때 진(秦)에 아무 것도 보내지 않았다. 거기다 오히려 그 때문에 진(秦)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진(秦)을 공격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목공(穆公)도 대노(大怒)했다. 그리하여 그 다음해, 두 나라의 군대는 결국 한원(韓原)에서 격돌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결국 진(秦)이 대승했으며, 그러자 혜공(惠公)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목공(穆公)은 그 혜공(惠公)을 제단(祭壇)의 산 제물로 바치려고 했는데, 그러나 또 그 혜공(惠公)의 누나였던 그의 부인이 반대를 해서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목공(穆公)은 혜공(惠公)의 아들이었던 태자(太子) 어(圉)를 인질로 삼고는 혜공(惠公)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또 기원전 638년에 그 혜공(惠公)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어(圉)는 진(秦)에서 도망쳐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또 그 혜공(惠公)에게 몇 번이나 배신을 당했던 목공(穆公)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시 초(楚)에 머물러 있던 중이(重耳)를 불러들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자 그 중이(重耳)는 그 후에 문공(文公)이 되었다. 기원전 624년, 문공(文公)이 죽자 진(晋)을 쳐서 대파(大破)했으며, 이어서 서융(西戎)도 쳐서 진(秦)이 서융의 패자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621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그때에 신하 177명이 함께 순사(殉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진(秦)의 국력은 현저히 약해졌으며, 그리하여 또 일순간 진(秦)은 국제정치의 표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목공 끝)
아무튼, 상기(上記)대로, 목공(穆公)은 문공(文公) 사후, 다시 진(晋)을 쳐서 대파(大破)했고, 그 영토를 빼앗았으며, 그 업적으로 목공(穆公)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서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가 죽었을 때 순사(殉死)했던 신하들로 인해서 국력은 급격하게 약해졌고, 이어서 영토도 축소되었다. 그리하여 그 춘추 중기 이후부터는 북쪽으로는 진(晋)과 초(楚)가 자리를 잡았고, 서쪽으로는 진(秦) 그리고 동쪽으로는 제(齊)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변칙적인 4강(强)시대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秦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