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레앙의 처녀 서문문고 306
프리트리히 쉴러 지음, 최석희 옮김 / 서문당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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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 독일의 정신은 이제 역사철학의 틀 안에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절대정신의 역사 속에 나타남을 이웃나라의 혁명을 통해 목도하면서, 또 한편으론 그 파국의 모습인 영웅 혹은 참주(僭主)인 나폴레옹에 짓밟히는 자기 조국의 현실 앞에 괴로와 한다.

예나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쉴러가 표현한 15세기의 영웅 쟌다르크(독일명 요한나)는 그래서 이런 독일적 상황과 역사에 대한 한 빛을 던지고자 한다. 절대정신의 나타남이지만, 그 형태에 있어 철저히 민족적인 배타성을 띤 역사 속의 정신이다. 그녀에게 영국은 철저히 응징의 대상이며 프랑스, [내가 태어난 곳]은 그 이유만으로도 목숨으로 지켜야 할 곳이다. 침략해 오는 프랑스에게 19세기의 독일이 그러하듯이...이것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인 [자유]를 거스르거나 되돌리려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자유의 정신인 프랑스 삼색기에 맞설 명확한 독일적 이유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 친프랑스적이었다 회의를 품게 된 독일 지성에게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던진다. 나의 조국.

그래서 쉴러가 그리는 요한나는 1429년, 역사 속의 쟌다르크와는 다른 변형을 거친다. 그녀는 더 이상 우연히 신의 음성을 듣고 전쟁에 뛰어든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곧 절대정신의 현현이다. 그녀의 죽음은 이제 탑에서의 마녀심판과 그리스도의 법정의 유사성을 넘어,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주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시험을 거쳐 예정된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전장에서 죽었던 그녀는 [이미 생명이 끊어진]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선포한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은 역사가 그녀에게 준 사명의 깃발이었음을... 그녀는 떠오른다. 갑옷은 날개옷이 되며 땅은 점점 멀어진다.

내가 바이마르에 앉았던 독일인이라도 이 결말에 벌떡 일어나 눈물지으며 열광하였으리라. 그리고 독일 역사철학을 다시 썼으리라. 이제 독일이라는 땅에 태어난 한 개인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민족을 구원하여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국민정신의 나타나는 모습인 열정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리스도적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19, 20 세기 프랑스, 독일 이 두 민족이 저지른 민족적 범죄 또한 이런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이들의 [암흑의 핵심]은 이들의, 또 그 사상의 마녀성을 감추지 못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된 독일인의 학살과 프랑스인의 식민지전쟁과 자신들의 호사를 지탱키 위한 수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국민정신이 또 있을까? 혹 스스로 세계의 수호자라 여기며 현재 聖戰중인 국가도 이런 모더니즘적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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