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 VS 자유로움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과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은 마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마음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지만
그 자유를 경험할수록 두고 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진다는 것도 알게 되니 말이다.
자유로울 수는 있으나 동시에 예속되고야 마는 것.
그러기에 여행은 돌아갈 곳이 있을 때 가장 즐거운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만약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역시 안정보다는 자유 쪽이다.
안정보다는 자유.
반드시 떠나야만 하는 인생.
그렇다, 나는 스스로르 그렇게 규정지어 왔다.
그런데 아기가 생기면서부터 이 마음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남편만 혼자 있을 땐 언제고 맘 편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 나에게 '다음' 여행이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런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바로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는, 자타공인 '사람여행 전문가' 오소희 작가다.
터키부터 라오스, 아프리카, 이번에 내사랑 남미까지.
오소희 작가의 여행 동행자인 그녀의 아들 중빈, JB는 너무 익숙해서
바로 옆 집에 사는 아이처럼 느껴진다.
넘쳐나는 여행 에세이, 글 잘 쓰는 작가들 사이에서
오소희 작가만의 개성이자 강점은 바로 JB다.
어쩌면 그와 함꼐 여행을 다니면서부터 여행작가가 되었으니
그녀에게 그는 꿈을 실현시켜준 통로이자 기회였으리라.
내가 준영이를 통해 작가가 되고 싶은 오랜 꿈에 도전하고 있는 것처럼.
따라서 여행가이자 작가이자 엄마인 그녀의 남미 에세이에는
지금까지 재밌게 읽은 다른 남미 여행기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엄마'의 시선이 담겨 있다.
세상에 대한 연민, 아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 그녀의 책은 선배엄마의 육아 에세이자 여행 에세이다.
이러고저러고 덧붙일 것 없이,
오늘은 오롯이 그녀의 글을 옮겨적어 본다.
#1
"엄마들은 참 이상하다.
수목이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듯
세상의 아이들이 때가 되면 해내는 자연스러운 성장을
매번 울보가 되어 새삼스러운 격정으로 맞이한다.
그제야 알았다.
내 몸을 빠져나온 저 아이가 어느덧 나보다 큰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겁에 질려 나가가지 못하는 순간에 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내가 오르지 못하는 언덕에 오르는 사람.
나는 이제 저 아이를 함부로 재단하거나 혼낼 수는 없겠구나."
#2
"결국 어린 아이도 알아가는 것이다.
존재의 아름다움은 그 안에 내재한 것들 때문이란 걸,
외관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그럴싸해도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망가지거나, 망가지지 않더라도 보는 이를 질리게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가슴속 마음 조각에 있다.
내 마음 한 조각을 누군가에게 떼어주면 그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이 머무는 그곳도 아름다운 곳이 된다.
그래, 정말 아름답구나.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3
"중빈은 방언이 터졌다...... 방언은 멈추지 않았다.
갑작스런 열정에 깜짝 놀라서
나는 한 번도 그리스 신화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아이의 이야기를 경청해주었다.
늘 밀착해 지내던 사람들도 여행 중에는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그 순간, 나는 그곳의 그림 가운데 하나를 바라보듯 아이의 새로운 면모를 바라보았다.
울면 안아주고, 넘어지면 약을 발라주고,
책을 꺼내면 만사 제치고 읽어주던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 여기 아이가 하나의 그림으로 우뚝 서 있구나.
이 그림의 참된 아름다움은 계속해서 섞이고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명화가 아니어도 좋다.
나는 열린 자세와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아이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한 채 걸었다."
#4
"가슴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데에는 ‘여성’이라는 입지가 그야말로 유리하다.
자신 안의 모성을 발견하는 순간 절로 가슴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늦된 사람이라. 어미가 되고서야 제대로 가슴을 쓰는 법을 배웠다.
늦은 만큼 통렬히 배웠다.
젖꼭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젖을 먹이면서,
자의식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면서, 오늘처럼 똥 묻은 오렌지를 주우면서.
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하지만 나름 공평한 구석도 있으니,
그것은 바로 누구에게나 새로운 성장의 국면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결혼이나 출산처럼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성장의 국면 속에서
나탈리는 어쩌면 자신도 한때 이득 될 것 없는 어린 사람이었으며,
세상의 너그러운 보호가 자신을 돌보았다는,
그 아름답고 감사한 순환의 원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저절로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소중히 챙기게 될 것이다."
#5
"나는 한동안 집이 어색했다.
값비싼 물건은 없는 공간이었지만,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이 중복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여겨졌다.
비슷한 제목의 책, 비슷한 크기의 그릇....
어수선한 욕망과 채집 욕구가 집안 구석구석 고스란히 배어 있어 부끄러웠다.
줄 서서 들어갈 필요가 없는 화장실은 물론 거의 비어 있었고,
그 또한 묘한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핸드폰은 오래전 방전되었지만 충전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이 없고 차가 없고 가방 하나 정도의 짐으로 충분했던 시간들.
공간을 나눠 쓰고 소유하지 않던 시간들.
내가 핸드폰을 버리고, 차도 팔 것이며, 집을 원룸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남편은 입을 조금 벌리고 나를 쳐다볼 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다. 내가 긴 여행에서, 특히 제3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온 때면
언제나 같은 단계를 밟아, 천천히 일상에 합류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우리 부부는 중대한 합의를 했다.
호주일주 에세이를 출간한 뒤
다시 떠나기로.
호주로 갔던 3년 전부터
내 마음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그곳,
내사랑 나의 꿈 남미로.
내일은 없는 것처럼 치열하게 살기 위하여.
떠남은 언제나 옮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