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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
윤성근 엮음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헌책, 책방, 청춘의 글씨.

 

겉표지부터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 죽 늘어서 있다.

'헌책방' 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딱 한 명 있는데,

이 책도 그의 신작이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작가에 대한 얘기부터 해봐야겠다.

 

그의 책을 처음 본 건 2011년 가을,

내가 일하던 곳에선 일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이었다.

밤을 새도 모자라는 일더미에 파묻혀 있을 때면

왜 그리 책 생각은 더욱 간절한지.

잠은 부족하고 늘 긴장하고 있느라 벌건 눈을 하고서도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책을 읽는 기쁨이란!

 

사실 그의 책은 어지럽고 번잡한 마음을 달래줄 만큼

간단한 책이 아니었다.

저자의 책과 작가에 대한 방대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였고

그래서 꽤 어렵게 읽혔다.

 

나도 그만할 때(초등학교)는 책벌레란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그가 몇시간씩 걸어서 책방을 찾아다녔던 것 만큼

나는 열정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서글펐다.

그가 언급한 책들을 모조리 찾아 읽고 싶은 쓸데 없는 욕망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기도 했다.

남들이 안정을 찾아가는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회사를, 세상을 박차고 나온 용기와

이름마저 근사한, 자기가 읽고 추천하는 책만 파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는 그가 부러웠고, 난 그래서

그가 나와 같은 부류, 그러니까

늘 자유롭기를 갈망하고 진실한 삶에 대해 고민하며

종이책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105쪽)

사람일거라고 멋대로 정의내리며 그의 친구가 되고자 했다.

여백이 별로 없던 그 책은 어쩌면

그가 세상과 나누고 싶은, 소통하고픈 이야기가 많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전작에 비하면

상당히 대중적이라고 할 만 하다.

헌 책 속에 새겨진 편지나 문장들로 시작하는 그의 글은

어렵고 고지식하고 따분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뒤에 가려져 있는

평범하고 여린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래서

정성들여 꾹꾹 눌러쓴 사랑의 증표든,

술 먹고 휘갈긴 철학의 고뇌든,

그 속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은

나의 것, 우리들의 것이다.

그들의 심정과 진심을 헤아려 소중하게 모아두고,

급기야 수십년 전 메모의 주인공까지 만난 저자의 노력이 고맙다.

 

특히 1980년대 9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이들이라면

자유와 진리, 선과 정의, 희망과 절망을 탐색하고

책에서 그 정답을, 자신에 대해 고민했던 이들이라면(69쪽)

그리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 당신이라면,

낡고 오래되고 헌 것을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당신이라면,

이 책은 큰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가을은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탈서울을 실천한 것이 무척 기쁘다.

 

이사날짜를 며칠 앞두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재 정리였다.

아이가 잠든 사이 치킨 한마리를 주문해 놓고 남편은 책장을 나는 서랍을 맡았다.

그가 크기별로 꼼꼼히 꾸려놓은 책들을 보고 있자니

한때 불꽃처럼 거세게 타올랐고

영원한 것을 찾아 헤맸던 내 청춘이 생각났다.

 

그 때 난 저렇게 책 아랫면에 이름을 써두었고,

가끔은 그가 내 대신 누구누구꺼라고 쓰기도 했다.

그건 이 책 주인이 나란 뜻이자 책 주인인 내가 그의 것이라는,

유치한 우리만의 대화법이었다.

이름 옆에 찍혀 있는 도장은 서점에서 계산을 마친 뒤 찍어준 것이다.

 

지금 난 대부분의 책을 인터넷에서 산다.

그가 책에 내 이름을 써주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난 여전히 책이 좋다.

책을 선물하고 선물받는 것도 좋다.

 

내 청춘을 바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대신

그 영원하지 못한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싶게 만든,

한결같이 내 옆에 있어준 그가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한 가지 다짐했다.

 

전에는 엽서나 편지지에 글을 적어 표지 뒤에 끼워두곤 했는데

앞으론 맨 앞 장에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이름과 보낸 날짜를 적어 두기로.

그리하여 훗날 누군가가 그 책을 다시 들춰봐도

(선물받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 책을 선물하던 나의 마음을, 우리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끈질기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당신이 그렇게 눌러 쓰며 결심한 것처럼(216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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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가을, 청명한 하늘과 바람과 책의 계절이 왔다.

반갑고 설렌다.

 

이번 에세이 신간 목록을 준비하면서

유난히 '제목'에 눈이 가 멈추었다.

곧 출간을 앞둔 작가 혹은 편집자 입장에서의 고민이기도 했을 것이다.

 

에세이 분야의 특징이겠지만

문득 요즘 책들의 제목이 무척 길고 난해하다는 생각을 했다.

목적이 여행에세이든 자기계발서든,

저자가 청년이든 노인이든.

제목만 들여다 봐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짐작을 할 수 없을 만한 것들도 있었다.

 

선물로 치면 제목은 포장같다.

선물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줄뿐만 아니라

선물을 준비한 사람의 세밀한 감정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포장은, 제목은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래도 포장은 포장이지 내용이 아니다.

"좋은 글을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오덕 선생의 말이 생각나는 건 이 대목에서다.

아무리 포장이 좋아도 내용마저 바꿀 수는 없으므로.

 

부쩍 날카로워진 바람 때문인가.

제목에 대한 소회라고는 적었지만

사실 책을 보며 드는 생각은 늘 한가지다.

 

어떻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니 어떻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좋은 글을 쓰기는 커녕 좋은 책을 고르는 일도,

무엇이 진실인지조차 가려내기도 어렵고 두려운 세상...

그래서 이번엔 그 자체로 제목이고 내용이 되어버린 작가들의 책을

(맘 편히) 골랐다.

공교롭게도 모두 외국작가들이다.

 

 

 

1.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문예춘추사, 2013, 08

 

 

나는 작가들, 특히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일상도 소설처럼 느껴지게 하는 치밀한 관찰력이나

오랜 고찰에서 나오는 깨달음,

나도 그랬다고 다독여주는 배려가 좋다.
 

이 책이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앞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연장선이었다.
시대를 논하지 않는 작가는 결국 껍데기라고 믿으므로.
자신이 믿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므로.

 

알라딘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 가운데 일부,

<대립>에 대한 부분을 옮겨 적어본다.
 

"건강하고 씩씩하며 낙천적인 것, 모든 심각한 문제들도 웃으면서 대할 줄 아는 자세,

비난의 말은 거부하며, 순간을 즐기면서 얻는 생명력.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내세우는 슬로건이다.

이런 식으로 이 시대는 세계 대전에 대한 부담스러운 기억을

허위(虛僞) 속에 잊어버리려고 한다.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과장되게 행동하고, 지극히 미국적인 것을 따라한다.

살찐 아기처럼, 분장한 배우처럼 일부러 과장되고 어리석게 굴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행복해하고 환하게 웃는다.

영어로 ‘스마일링smiling’이라고 하던가.

그런 낙관주의가 팽배하다.

환하게 빛나는 꽃잎들로 매일 새로운 치장을 하고
새로운 영화배우의 사진들을 걸고, 신기록을 나타내는 숫자들을 보며 즐거워한다."

 

 

 

2. <책으로 가는 문>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3, 08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은 그의 작품이다.

아니, 내가 본 것들의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라고 하는게 더 맞겠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들이 그렇지만

그의 영화에는 등장하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아이도 노인도 남자 아이도 여자아이도 선한 쪽도 악한 쪽도.

 

많은 이들이 그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내지만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부러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런 그가 말한다.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문학은… 인간 존재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 달리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절망을 말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아이들 일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이런 마음을 가진 그가 추천하는 책들이니

당연히 들여다보고 싶을 수밖에.

 

 

 

3. <이윽고 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문학사상사, 2013, 08

 

 

노르웨이의 숲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그리고 <이윽고 슬픈 외국어>라니.

 

이보다 더 다채로운 제목의 책을 낸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화제의 한 가운데에 있는 그의 책을 고르는 게

유행을 따라가는 것만 같아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잘 알려진 작가라고 해서 일부러 배제하는 것도

무조건 추앙하는 것 못지 않게 불공정한 것 같아 목록에 추가했다.
 

말이 필요 없는 작가들의 책을 골랐다고 해놓고는
자꾸 말이 길어지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말로 마무리를 하련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연유인지 내게 자명성을 지니지 않은 언어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과 비슷한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한 사람의 작가로서,

나는 아마도 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끌어안고 계속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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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희 남미 여행 에세이 세트 - 전3권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남미편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여행가이자 작가이자 엄마인 그녀의 남미 에세이에는 다른 남미 여행기에는 없는 `엄마`의 시선이 담겨 있다. 세상에 대한 연민, 아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 그녀의 책은 선배엄마의 육아 에세이자 여행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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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희 남미 여행 에세이 세트 - 전3권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남미편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안정 VS 자유로움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과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은 마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마음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지만

그 자유를 경험할수록 두고 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진다는 것도 알게 되니 말이다.

 

자유로울 수는 있으나 동시에 예속되고야 마는 것.

그러기에 여행은 돌아갈 곳이 있을 때 가장 즐거운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만약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역시 안정보다는 자유 쪽이다.

 

안정보다는 자유.

반드시 떠나야만 하는 인생.

그렇다, 나는 스스로르 그렇게 규정지어 왔다.

그런데 아기가 생기면서부터 이 마음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남편만 혼자 있을 땐 언제고 맘 편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 나에게 '다음' 여행이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런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바로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는, 자타공인 '사람여행 전문가' 오소희 작가다.

터키부터 라오스, 아프리카, 이번에 내사랑 남미까지.

오소희 작가의 여행 동행자인 그녀의 아들 중빈, JB는 너무 익숙해서

바로 옆 집에 사는 아이처럼 느껴진다.

 

넘쳐나는 여행 에세이, 글 잘 쓰는 작가들 사이에서

오소희 작가만의 개성이자 강점은 바로 JB다.

어쩌면 그와 함꼐 여행을 다니면서부터 여행작가가 되었으니

그녀에게 그는 꿈을 실현시켜준 통로이자 기회였으리라.

내가 준영이를 통해 작가가 되고 싶은 오랜 꿈에 도전하고 있는 것처럼.

 

따라서 여행가이자 작가이자 엄마인 그녀의 남미 에세이에는

지금까지 재밌게 읽은 다른 남미 여행기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엄마'의 시선이 담겨 있다.

세상에 대한 연민, 아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 그녀의 책은 선배엄마의 육아 에세이자 여행 에세이다.


 

이러고저러고 덧붙일 것 없이,

오늘은 오롯이 그녀의 글을 옮겨적어 본다.

 

 

#1

"엄마들은 참 이상하다.

수목이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듯

세상의 아이들이 때가 되면 해내는 자연스러운 성장을

매번 울보가 되어 새삼스러운 격정으로 맞이한다.
그제야 알았다.

내 몸을 빠져나온 저 아이가 어느덧 나보다 큰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겁에 질려 나가가지 못하는 순간에 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내가 오르지 못하는 언덕에 오르는 사람.

나는 이제 저 아이를 함부로 재단하거나 혼낼 수는 없겠구나."

 

#2

"결국 어린 아이도 알아가는 것이다.

존재의 아름다움은 그 안에 내재한 것들 때문이란 걸,

외관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그럴싸해도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망가지거나, 망가지지 않더라도 보는 이를 질리게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가슴속 마음 조각에 있다.

내 마음 한 조각을 누군가에게 떼어주면 그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이 머무는 그곳도 아름다운 곳이 된다.

그래, 정말 아름답구나.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3

"중빈은 방언이 터졌다...... 방언은 멈추지 않았다.

갑작스런 열정에 깜짝 놀라서

나는 한 번도 그리스 신화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아이의 이야기를 경청해주었다.

늘 밀착해 지내던 사람들도 여행 중에는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그 순간, 나는 그곳의 그림 가운데 하나를 바라보듯 아이의 새로운 면모를 바라보았다.

울면 안아주고, 넘어지면 약을 발라주고,

책을 꺼내면 만사 제치고 읽어주던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 여기 아이가 하나의 그림으로 우뚝 서 있구나.

이 그림의 참된 아름다움은 계속해서 섞이고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명화가 아니어도 좋다.

나는 열린 자세와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아이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한 채 걸었다."

 

#4

"가슴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데에는 ‘여성’이라는 입지가 그야말로 유리하다.

자신 안의 모성을 발견하는 순간 절로 가슴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늦된 사람이라. 어미가 되고서야 제대로 가슴을 쓰는 법을 배웠다.

늦은 만큼 통렬히 배웠다.

젖꼭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젖을 먹이면서,

자의식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면서, 오늘처럼 똥 묻은 오렌지를 주우면서.
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하지만 나름 공평한 구석도 있으니,

그것은 바로 누구에게나 새로운 성장의 국면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결혼이나 출산처럼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성장의 국면 속에서

나탈리는 어쩌면 자신도 한때 이득 될 것 없는 어린 사람이었으며,

세상의 너그러운 보호가 자신을 돌보았다는,

그 아름답고 감사한 순환의 원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저절로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소중히 챙기게 될 것이다."

 

#5

"나는 한동안 집이 어색했다.

값비싼 물건은 없는 공간이었지만,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이 중복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여겨졌다.

비슷한 제목의 책, 비슷한 크기의 그릇....

어수선한 욕망과 채집 욕구가 집안 구석구석 고스란히 배어 있어 부끄러웠다.

줄 서서 들어갈 필요가 없는 화장실은 물론 거의 비어 있었고,

그 또한 묘한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핸드폰은 오래전 방전되었지만 충전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이 없고 차가 없고 가방 하나 정도의 짐으로 충분했던 시간들.

공간을 나눠 쓰고 소유하지 않던 시간들.

내가 핸드폰을 버리고, 차도 팔 것이며, 집을 원룸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남편은 입을 조금 벌리고 나를 쳐다볼 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다. 내가 긴 여행에서, 특히 제3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온 때면

언제나 같은 단계를 밟아, 천천히 일상에 합류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우리 부부는 중대한 합의를 했다.

호주일주 에세이를 출간한 뒤

다시 떠나기로.

 

호주로 갔던 3년 전부터

내 마음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그곳,

내사랑 나의 꿈 남미로.

 

내일은 없는 것처럼 치열하게 살기 위하여.

떠남은 언제나 옮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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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알라딘 신간평가단으로서의 첫 임무.

8월(7월 출간물) 에세이 주목 신간을 작성했다.


 

제목, 표지, 지은이, 책소개, 목차, 책속에서&밑줄긋기 등을 이렇게 꼼꼼히 읽은 적은 처음이었다.

마치 저자, 책을 기획한 출판사와 소통하는 기분이랄까.


반짝거리는 수십 권의 책들 중 다섯 권만 선정하는 작업도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고역이었음을 고백하며, 수많은 작가분들과 기획자 분들의 노고에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전하며, 엘리사벳(이하 '리즈')의 8월 에세이 주목 신간을 시작한다.

 

 

 

1.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김해자 지음, 아비요, 2013, 07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인가?”

 

서른 살이 넘고 어른 소리좀 들으면 이런 고민은 안 하고 살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보다 이십년은 더 사신 분께서도 그런 고민을 한다니 반갑기도 하고, 위안이기도 하고, 이 끝나지 않는 존재론적 고민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가 수십년 간 부대낀 참된 자아찾기, 그 과정에서 알아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고유성을 되찾을 때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는" 깨달음은 읽어보기도 전에 내 마음을 잔잔히 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프로필에도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조립공 미싱사 학원강사를 전전하며 노동자들과 시를 쓰다 1998년에 등단하였고, 현재는 노동자, 장애인, 사회운동가 들과 함께 문학과 예술치료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짬짬이 농사를 짓고 바느질을 하며 산단다.

사실 나는 이렇게 일관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발견하는 일이 즐겁다.

그것은 아마 하루만 지나도 옛 것, 오래된 것, 쓸모없는 것 취급을 당하기 십상인 이 시대에 어쩌면 낡고 오래되고 그래서 늘 그자리에 있어주는 것들만이 나를,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인지도.

나 역시 그녀를 통해 이상한 나와 이상한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비로소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얻게 되길 바라는 마음인지도.


 

 

2. <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 태원준 지음, 북로그컴퍼니, 2013, 07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더욱 간절해지는 것 중 하나는 '부모'에 대한 마음일 것이다.

여전히 건장하게 내 곁에 계시건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장차 내가 내 아이와 보낼 시간보다 부모님과 함께할 날들이 절대적으로 적다는 자각 때문이리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이가 자라나는 만큼 부모에 대한 애틋함도 깊어져 가지만, 이미 2순위로 밀려나버린 한계때문일까, 부모님께는 아쉽고 죄송한 일만 더욱 늘어난다.


나보다 '먼저'인 존재가 생겨버린, 즉 내가 엄마가 되어버린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꼭 함께 하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나에겐 이제 만년 2순위가 되어버린 당신들과의 장기여행.

어쩌면 그것은 부모님이 아니라, 언젠가 그들이 내 옆에 계시지 않을 때 그들과의 추억으로 살아갈 나 자신을 위한 여행이 아닐까 한다.

여행할 때 가장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내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앞에서 고향땅에 두고 온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내가 그들과 제대로 여행 한 번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게 뻔하니까.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그동안 자식 키우느라 정작 자신은 즐길 겨를도 없이 늙어버린 그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어린아이처럼 순간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그런 꿈을 가진 나에게 이 책은 세상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더구나 서른 살 아들과 예순 살 엄마의 세계여행이라니!

모르긴 해도 무수히 황당하고 재밌는 여행 스토리, 눈물이 쏙 빠지는 감동의 사연, 그리고 엄마와 자식만이 나눌 수 있는 애틋한 사랑이 담겨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언젠간 나도 꼭 저렇게 말해야지.

"엄마, 아빠, 일단 한 번 떠나고 보자니까요!"

 


 

3. <학교를 찾습니다>, 오쿠노 슈지, 이선미 지음, 바다출판사, 2013, 07

 



매스컴에서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아이들의 학교폭력, 왕따 그리고 자살소식들.

부모가 된 덕분에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하나하나 가슴에 와 박힌다.

내 일처럼 가슴이 저리고, 안타깝고, 급기야 이 사회에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저자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무조건 1등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사회, 내 옆에 앉은 친구가 소중한 인격체가 아니라 내가 반드시 밟아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시키는 경쟁사회에서 학교폭력이나 왕따, 청소년 자살 같은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테니까.

그것은 비단 일본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부모들이, 어른들이 달라지면 된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면 된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꿈을 찾아 열심히 정진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하면 된다.

생각해보면 어린시절, 내가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도 이것 뿐이었다.

나를 믿어주는 것, 언제나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는 것.


"문제 학생은 없다, 문제 학교가 있고 문제 부모만 있다."

"아이의 문제 행동은 부모와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


이 책이야 말로 아이들이 어른들, 부모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닐까.

제대로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4. <당신에게는 사막이 필요하다>, 아킬 모저 지음, 배인섭 옮김, 더숲, 2013, 07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저자의 사막사랑은 뜸금없이 보일 것 같다.

아니 보고 즐길 거리가 세상 곳곳에 넘치고 넘쳤는데 사막이 뭐 볼 게 있다고?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호주에 2년간 머물고 여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일부는, 황무지 같은 광활한 사막에서의 날들이었다.

오로지 건조한 바람만 머무는 곳인 줄 알았던 그 곳에서 꿈틀대는 '살아있음'이란!

더 신기한 건 그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 땅에서 우린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여행이 자기를 찾아 떠나는 모험이라면 사막 여행은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그래서 가장 쉽게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싶다. 

사막이 낯선 분들에게, 알라딘에 소개 된 본문 내용 중 일부로나마 그 매력을 보여줄 수 있으면 한다.

"걷고 걷고 또 걷고. 배낭에는 꼭 필요한 것만 들어 있다. 
사막 트래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 등에 전해지는 무게의 대부분은 물이다. 
12리터를 지니고 있다. 그밖에 나는 식수를 채울 수 있는 장소를 여럿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에서 내 삶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물을 아끼는 것이다. 
사막에서 제한된 양의 물을 가지고 여러 날을 지내기 위한 전제조건은 무엇보다 만족과 포기다.
… 
한 걸음씩 내딛는 ‘조심스런 발걸음’에서 나는 다시금 드넓은 사막을 딛고 서서 사막의 거친 환경과 하나가 되어가는 나를 느낀다. 
전화도, 약속도, 텔레비전도 없다. 달리 마음을 빼앗길 일이 없다. 
집에서 가져간 복잡한 일들은 거대한 고요에 부딪혀 어디선가 멈춰서버렸다. 
독일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이 어딘가 모래 속에 파묻혔든지 아니면 모래바람에 날아가버렸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사막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자기 존재로 가득 채워지는 순간의 장엄한 공허, 오로지 ‘여기 그리고 지금’에 의해 결정되는 지금 이 순간의 광야다." - <부처를 만난 순례자처럼> 중에서

 

 

 

5.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 김얀 지음, 이병률 사진, 달, 2013, 07



 

여행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것을 멋진 도시에서 찾느냐, 사막에서 발견하느냐, 사람, 그 중에서도 이성에게서 느끼느냐의 차이일 뿐.

내가 읽어본 여성 작가의 섹스 칼럼치고 대담하고 도발적이며 솔직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무작정 기대가 된다.


나 역시 여행을 좋아하건만, 그러나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그래서 더 궁금한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

약간 벗겨진 침대 시트 아래 써진 저 한 줄 만으로도 난 이미 '흥분'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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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3-08-06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렇게 불쑥 인사드리는 건 참으로 쑥스럽고 생뚱맞은 일 같아요.
그럼에도 같은 13기 신간평가단원으로서(그것도 같은 분야에) 용기를 내어 인사를 드립니다.
신간 추천 페이퍼에서 리즈님의 노력이 보이는 듯합니다. ^^

리즈 2013-08-06 16: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13기 신간평가단 안정숙 엘리사벳입니다.
황망하게도, 이렇게 먼저 찾아주신 덕분에 요란한 천둥과 번개, 소나기가 지나가고 매미 소리만 남은 오후, 즐겁게 시작했습니다.

막상 첫 임무를 시작하려니까 이 수많은 작가들 책 기획자들 중에 몇 가지를 고른다는게 무척 어렵더군요.
꼼쥐님께서 격려해주시니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습니다^^

블로그를 보니 무척 많은 글들이 있어서 즐겨찾기를 해두었어요.
시간 날 때 틈틈히 읽고 가겠습니다.

남은 여름, 좋은 시간 되시길 바라며.
어떤 도서가 선정될지 두근두근 하는 맘으로.

안정숙 엘리사벳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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