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그녀
가키야 미우 지음, 김은모 옮김 / 콤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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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바람났다! 더 기가 막힌 건! 남편의 애인과 아내의 영혼이 서로 뒤바뀐 사건이다. 가키야 미우 작가의 '남편의 그녀' 제목만 봐도 불륜과 막장의 냄새가 풀풀 난다. 그런데 이런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책의 표지는 어쩐지 사랑스럽다. 이 무슨 아이러니? 책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 대략 이랬다. 영혼이 뒤바뀐다는 설정은 조금은 흔한 설정인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영혼이 뒤바뀐, 그래도 최소한 서로 애정관계로 얽혀있는데 반해 '남편의 그녀'에선 파격적으로 영혼이 뒤바뀐 것이다. 정말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피하고 싶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존재인 남편의 그녀! 남편의 여자! 남편의 내연녀!로... 무뚝뚝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성실하게 일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둔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주부 히시코. 어느 날 컴퓨터에 남겨진 남편의 흔적을 보고 불륜을 의심하게 된다. 결국 남편을 미행하게 되고 자신보다 훨씬 젊은 여성과 나란히 걸어가는 남편을 목격하게 된다.


너 같은 아줌마한테 여자로서의 상품 가치는 더 이상 없어.

어이, 유통 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고. p34


배신감과 충격에 휩싸인 히시코는 이혼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가정을 유지할 것인가,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어 친구 지사를 만나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미 이혼 경력이 있는 지사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절대 이혼은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단, 이혼을 해도 되는 조건을 제시하는데! 첫 번째 전문직에 종사한다. 두 번째 따뜻하게 맞이해 줄 부유한 친정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위자료가 충분하다. 이 세 가지에 해당되지 않으면 결혼이라는 형태를 유지하고, 누군가 나를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와....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새삼 나 자신을 돌아 보았다. 결혼 후 3년 가까이 전업주부로 생활하면서 경력은 단절되었고, 친정 엄마는 돌아가셔서 사실상 친정이라는 공간은 없는 것과 같고,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위자료를 받을 가능성도 없고. 나야말로 이혼은 꿈에도 생각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지사의 말에 어폐가 있는 것 같지만 어찌 보면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할 말을 잃었다. 마치 내가 히시코라도 된 것처럼. 그렇다고 진짜 이혼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가끔 격하게 부부싸움을 할 때 이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은 있다. 물론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긴다고, 하루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잘 지내긴 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향후(?) 미래를 위해서라도(어떤 미래?ㅋ) 다시 전문직으로 복귀해야겠다.


결국 히시코는 상대 여성인 호시미를 만나기로 한다. 제발 남편에게서 떨어져 달라고 말할 생각이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20대 초반의 풋풋한 호시미와 마흔을 바라보는 히시코. 서로 탐색전을 하며 남편 무기타로를 접전으로 아웅다웅하던 순간! 새빨간 롱드레스를 입은 수상쩍은 할머니로 인해 호시미와 히시코의 영혼은 뒤바뀌고 만다.


"상대의 마음을 뼛속까지 이해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p57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황당함 속에서 호시미와 히시코는 사태를 파악하고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생활공간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호시미는 남편과 자식들이 있는 히시코의 집으로, 히시코는 남편과 호시미의 불륜장소인 집으로. 그렇게 서로의 영혼이 뒤바뀌면서 상대방의 생활 속으로 깊게 스며들게 된 두 사람! 과연, 그녀들은 다시 자신의 몸을 되찾을 수 있을까? 히시코는 호시미로부터 남편을 지켜낼 수 있을까? 따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가키야 미우의 '남편의 그녀'. 13일의 금요일 오후, 따뜻한 햇살이 비쳐든 거실의 소파에 누워서 혼자 심각해하며, 혼자 낄낄거리며, 혼자 감동의 쓰나미를 느끼며 읽었다. 

어쩌면 타인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 속 구절을 빌리자면 이런 문장이 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즉 교훈이든, 타인에 대한 이해든, 그 모든 것들이(타인의 아픔과 고통, 슬픔 등)내 속에서 체험된 후라야만 온전에 가까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키야 미우의 '남편의 그녀'는 영혼이 뒤바뀌는 판타지적 요소를 통해 불가능하지만,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잠시나마 나는 타인의 삶을 얼마나 이해하고 헤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책 속 밑줄>


아무 자격도, 기술도 없는데.... 이혼하고 나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까?

남편에게 친권을 빼앗길지도 몰라.

결혼한 지 십오 년, 주부라는 자리에 불안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자리가 '남편의 사랑'이라는 불안정한 단서가 있어야

성립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p213


평범하게 살아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커서 자신만의 시간이 생겼는데도 눈앞의

일상을 살아내는 데에만 정신을 팔았다. 주부라는 위치가 이렇게 간단하게

흔들리는 것인 줄 알았다면 고등학생 때부터, 아니 중학생 때부터

인생의 기반을 다졌을 것이다. 여차할 때 혼자 먹고살 수 있도록

직업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했다. p214


"그야 오랜 세월 회사원으로 살다보면 어떤 사람이라도 변하는 법이지.

회사에서 구르다 보면 강해지기도 하고, 교활해지기도 해.

진창에 발을 담그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어.

여차하면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더러운 수단이라도 쓰는 법이고." p275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만약 지금 막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바꾸어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야.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해 봐. 네가 변하면 상대도 변하기 마련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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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키워주는 동화 속의 마녀이야기 - 세계 대표 작가들이 들려주는 세계 대표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6
안토니오 텔로 지음, 페르난도 팔코네 그림, 곽정아 옮김 / 가람어린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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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상상력은 삶의 원동력이자 기쁨이다. 어렸을 때부터 상상하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 표현방식을 그림으로 나타냈었다. 방안의 벽지는 내 상상력을 표출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손에 집어 든 크레파스, 볼펜, 연필, 물감 등을 가지고 온 방안의 벽지를 나만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갔다. 이를 지켜보던 어린 동생들까지 합세하여 그야말로 부모 입장에서는 총체적 난국이었을 것이다. 결국 부모님은 다시 도배를 하였고, 내 입장에선 포화상태에 이른 상상력의 공간이 새롭게 리셋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벽지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서슴없이 그리곤 했는데 두 번째 희생양이 바로 식탁이었다. 식탁 위는 강화유리가 놓여 있어서 크레파스를 제외 한 다른 도구들로는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공간이 바로 식탁 밑이었다. 어린 나는 크레파스와 물감 등을 가지고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천장에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ㅋ)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빨간색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식탁 밑 어둠을 먹고사는 요정을 그렸는데, 내가 그린 그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어린 나에겐 내 상상력으로 탄생한 그 존재가 무서워서 그 뒤로는 식탁 밑을 들어가지 않았다. 그땐 정말 무서웠다. 다른 사람도 아닌 본인이 그려서 탄생한 존재였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어느 날, 이사하면서 방치해 뒀던 그때의 식탁을 부모님이 다시 주방에 내어 놓았던 적이 있다. 문득 어린 시절 그렸던 식탁 밑 그림이 생각나서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 그림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나의 상상력으로 탄생했던, 그 존재 때문에 식탁 밑은 얼씬도 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나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던 그 존재!!! 이제 성인이 된 나는 그 시절 두려움의 대상과 마주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고, 도대체 어떻게 생긴 존재이기에 그토록 어린 내가 무서워했던 걸까? 호기심이 명치끝을 내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긴장 반,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식탁 밑을 기어들어가 올려다 본 그 존재와 마주한 순간!!! 허탈한 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 그림은 그저 빨간 색깔의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어지럽게 칠해지고, 그려진 추상적인 그림이었다. 성인이 된 나의 눈엔 전혀 무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그림을 보고 그토록 무서워했던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의아함이 가장 먼저 찾아왔지만, 그 뒤로 찾아온 감정은 안도감과 약간의 쓸쓸함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때의 나. 그 시절 어린아이에겐 분명 무서웠을 존재.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리고 느끼고 바라본 상상력의 존재를 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시절, 나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과 행복감이 밀려왔다. 더불어 성인이 된 나의 눈엔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은 그 존재는 뭐랄까? 이제는 갖고 있지 않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왕국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한동안 식탁 밑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작은 아이가 식탁 밑을 캔버스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모습을, 그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로 자신만의 상상력을 키워나가는 모습을 그렇게 한동안 지켜보았다.

<세계 대표 작가들이 들려주는 상상력을 키워주는 동화 속의 마녀 이야기>는 성인이 된 우리가 읽기에는 전혀 무섭지도 않고 스토리 자체도 단순하다. 아무래도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쓰인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존재했던 어린아이를 깨워 읽어 나가다 보면 꽤 흥미롭고 재미있다. 동화 속 마녀들​, 민담 속 마녀들 두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화 속 마녀들은 익히 알고 있는 마녀들이 등장한다. 라푼젤, 헨젤과 그레텔, 인어 공주 등에 등장하는 마녀들이 그렇다. 그러나 민담 속 마녀들은 나조차도 잘 알지 못했던 마녀들이 등장하는데, 새로운 민담과 그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마녀들을 알게 되어 읽는 내내 즐거운 시간이 되기도 했다. 각 장의 첫 페이지 왼쪽에는 각 마녀들의 초상화가 크게 실려있고, 오른쪽에는 마녀들의 이름, 국적, 사는 곳, 목격된 장면, 좋아하는 음식, 알려진 사실, 취미, 죄목 등 마녀들의 특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 페이지를 넘기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며 작가들의 디테일하면서도 신비로운 배경 그림과 삽화들을 엿볼 수 있다.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아이가 잠들기 전, 밤하늘의 별을 배경 삼아 아이에게 이야기를 읽어주면 아이의 상상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어린 시절의 나처럼 두려움에 휩싸일 수도 있는데 어찌 보면 그 두려움을 마주함으로써 오히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를 갖출 수도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혹은 우리 삶 속에서 마녀나 악역을 맞은 사람들의 존재는 책 속 주인공과 현실 속의 우리들을 보다 더 성장하게끔 하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때론 평화롭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온실 속의 삶보다는 고통과 시련이 존재하는 삶이 주인공의 삶을, 우리의 삶을 더 가치있게 만들기도 하니까. 때문에 장애물을 이겨내고, 시련을 극복하고, 고통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책 속 다양한 마녀들의 이야기는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나 역시 이 책을 계기로 마음속의 아름다운 판타지를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망울을 간직한 그런 사람으로.

『 "인어 공주의 목소리를 앗아간 심해의 마녀,

라푼젤을 탑에 가둔 마녀,

과자로 만든 집에 사는 마녀 등

동화와 전설 속 마녀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사악한 속임수와 비밀의 주문이 가득한

마녀들의 어둠의 왕국에 들어갈

용기 있는 어린이만 책장을 넘기세요.

자 이제 마녀의 세계로 함께 떠나 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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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인 1
최지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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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인'이란 무엇인가? 조금은 생소한 단어인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흡혈귀' 또는 '뱀파이어'의 또 다른 이름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흡혈귀라는 비속한 명칭 대신 아주 오래전, 불로불사의 열혈 전사 '하일랜더' 즉, '고지인'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사실 흡혈귀나 뱀파이어의 경우 동양보다는 서양 쪽이 더 잘 어울린다 할 수 있다.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어원이나 기원 및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는 곳이 바로 서양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토리 진행상 조선 또는 동양권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흡혈귀의 존재가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서양과의 교류나 접촉을 통해 흡혈귀의 존재가 유입되는 형식이다. 그것이 스토리 진행상 또는 이해하고,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덜 어색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지인'의 경우도 그렇고 작년에 종영한 '만화가 원작'인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또한 그렇다. 단순히 두 작품만을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만큼 흡혈귀라는 존재는 동양권에서는 어색한 존재임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혈귀 또는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친숙하고 심지어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영원한 젊음, 매력적이고 창백한 얼굴에 붉은 입술, 영원불사, 불상불사의 운명.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 말은 육체적으로 영원한 젊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흡혈귀나 뱀파이어와 같은 존재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공포', '젊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정말로 이런 삶을 부여받는다면 과연 행복할까? 그 삶은 축복일까? 더불어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는 흡혈 갈증까지 더해진다면? 분명 그런 삶은 극도로 고독하고 철저하게 외로운, 저주받은 불행한 삶일 것이다.    
"이따위 영생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우리의 영생은 다른 이의 목숨을 앗는 데서 비롯되네. 극악한 저주일 뿐이지." p.154
소설 ​'고지인'은 기독교 역사 및 로마 역사에 팩션을 가미하여 '고지인'의 탄생과 배경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때는 조선 후기 1654년 효종 재위 시절 '제주도 연쇄 살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종사관 '염일규'가 급파된다. 주인공 '염일규'는 조선 중기 인조 재위 시절, 가문이 숙청의 대상이 되어 멸문지화를 입었다. 그의 형은 소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이었는데, 역모로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소현세자의 측근으로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일로 가문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되었으나,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간청으로 당시 어린 '염일규'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효종의 배려로 성인이 된 '염일규'는 '시구문(시체를 내가는 문)' 밖 치안과 경비를 맡아 보는 하급 관리로나마 호구지책을 마련하게 된다. 역적의 자식으로 죽음을 피한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매일매일 시체를 마주해야 하는 삶은 그의 마음을 헛헛하게 했다. 그래서 일까? 주인공 '염일규'는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는 망나니 삶을 지속한다. 그래야만 이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하멜이 표착한 제주에 의문의 변사체가 연이어 발견되면서 '염일규'는 종사관이라는 높은 벼슬을 재수 받아 제주로 떠나게 된다. 그 누구도 유배지와 다름없는 제주로 가길 원치 않았으니까. 제주에 도착한 '염일규'는 의문의 사건을 조사하며 만나, 자신을 도운 관비 '아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결국 그의 아이까지 갖게 된 '아리'. 한편 감금되어 있던 하멜 일행 중 '나선인' 한 명이 탈출과 동시에 연쇄 살변도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데, 제주 목사와 '염일규'는 서로의 거래 조건으로 이 사건을 종결 짓는다. 어느 날 조정으로부터 하멜 일행을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명이 떨어지고,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염일규'는 '아리'와 함께 제주를 떠난다.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아리'와 함께 숨어 살기로 결심한 '염일규'. 그러나 제주에서 탈출한 줄로만 알았던 '나선인'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염일규'는 그에게 목이 물려 쓰러지고 마는데... 가까스로 '고지인'인 왜인에게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염일규'. 그는 그 왜인으로부터 '고지인'에 대해 알게 되고 자신도 '고지인'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고지인'이 된 '염일규'의 목숨을 노리는 또 다른 '고지인' 흑도. 과연 '염일규'는 끊임없이 인간의 피를 갈구하는 이 저주받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과 사랑하는 여인 '아리'를 지킬 수 있을까? '염일규'의 목숨을 노리는 또 다른 '고지인', '흑도' 그는 누구인가?
제2권으로 이어지는 '고지인'은 향후 두 남자 '염일규'와 '흑도'의 대결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조선이라는 실제 역사적 배경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쓰인 '고지인'. 조선 중기에서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서인과 남인들의 붕당정치는 심화되고 변질되는데,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을 필두로 조정에선 권력싸움이 한창인 시절. 소설 '고지인'은 그 시대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고지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실제 역사적 배경에 '고지인'이라는 존재를 더해선지 흡입력 있고 빠르게 읽힌다. 다만 완결이 아니기 때문에 1권에선 큰 긴장감은 없지만 흑도의 출현과 더불어 2권에선 두 남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사뭇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배경이 조선시대인 만큼 '한자 어구'와 '주석'들 때문에 스토리를 이해하며 빠르게 읽어나가는 데 약간의 걸림돌이 되긴 했다. 나의 무지를 탓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책 속 밑줄>
그래도 시체들을 태우고 해거름쯤 돌아올 때면 아무래도 헛헛한 게 사내의 심정이었다.
그때마다 그립고 고픈 건 따뜻한 여인네의 품,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근처의 색주가를 찾았다.
몸 파는 계집들의 푹신한 젖무덤에 얼굴을 묻으며 그는 여태껏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을 묻고 기댈 만한 상대로는 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와 상대하는 계집들도 몸뚱이로는 그를 안아주되 가슴으로 품으려 들지는 않았다. p.23
 
이고르는 결코 선하다고 할 수 없는 악인이었다. 그러나 흑도의 악성은 그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이고르는 설마 흑도가 자신의 목과 영기마저 노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염일규의 뒤를 쫓으며 영기를 노렸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흑도의 사냥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서둘러 녀석보다 강한 힘을 갖춰야 했던 것이다.
약한 놈은 강한 자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양육강식의 세계, 그것이 고지인들의 생태계였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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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증
마리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박하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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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충증'이라는 독특한 제목과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에로틱한 표지에 이끌려 읽게 된 작품이다. '마리 유키코'라는 작가는 처음 접하는 작가였기 때문에 작가와 책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최근 작품으로는 '여자친구'와 '골든애플'이 있고, 2008년 입소문을 통해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 <살인귀 후지코의 충동>이란 작품도 있다. '고충증'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고충증'이 2005년도 '마리 유키코'의 데뷔작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고 표현도 너무 리얼해서 나도 모르게 읽으면서 인상을 쓰게 되고, 다 읽고 난 후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찝찝함 속에 허우적 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매년 챙겨 먹었던 구충제를 다시 복용하기도 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이런 '찝찝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이야미스'라는 조어가 있다고 한다. 불쾌하다는 뜻의 '이야'와 미스터리의 '미스'가 결합된 것으로 '읽고 나면 기분 나빠지는 미스터리'라는 뜻이란다. 최근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새로운 충격과 전율을 안겨줄 수 있는 건 그녀만의 '독특한 작풍'의 힘이 아닐까 한다. 기리노 나쓰오와 미나토 가나에를 이어 '다크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등극한 '마리 유키코'는 '고충증'으로 '메피스토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메피스토'란 파우스트와 계약을 맺은 악마의 이름이기도 한데, 어쩐지 상 이름 자체도 그녀의 '작풍'과 너무도 잘 어울려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고충증'은 저자 '마리 유키코'가 '기생충'과 관련된 수많은 책들을 탐독하며 6년이란 세월을 헌신한 결과 탄생한 작품이라 한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투자해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집필하고 퇴고하는 그 모든 과정에 작가의 열정이 느껴져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고충증'은 작중 주인공인 '마미'와 '나미'의 입장에서 서술된 1장과 2장,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3장까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사립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는 딸과 함께 다카모리의 고급 맨션 스카이헤븐에 살고 있는 주부 마미. 남부러울 것 없이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동생 명의로 빌린 허름한 아파트에서 매주 월, 수, 금 다른 남자들과 '프리섹스'를 즐긴다. 그녀의 무분별한 성관계가 초래한 일일까? 음부의 극심한 가려움증을 동반하게 되고, 그녀와 성관계를 맺은 남성 중 한 명이 온몸에 블루베리 크기의 작은 혹이 잔뜩 돋은 상태에서 사망하게 된다. 이후 마미는 자신의 집에서 '파삭파삭파삭파사삭....'하는 기괴하면서도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벌레소리 같기도 한 이 소리는 집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결국 그녀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자신의 오른손을 자른 후 갑자기 종적을 감춘다. 동생 나미는 형부와 함께 사라진 언니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마미'의 행방을 쫓기 위해 언니 집에 머물러 있던 '나미'는 <문예 다키모리>발행인으로부터 ​'마미'가 썼다는 '소설'을 돌려받는다. '마미'의 일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이 작품은 미완성 작품으로 결국 채택되지 못해 반송된 것이다. '마미'의 원고를 읽은 '마미의 남편'은 크게 분노하지만 원고 속 내용이 어딘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나미'와 '마미의 남편'이 '원고'를 바탕으로 '마미' 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과 인물들의 궤적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밝혀지는 범인의 실체, 평범하게만 보였던 이웃들의 비밀, 저열하고도 추악한 인간의 욕망 등 그 모든 사건의 시발점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지막으로 독자를, 나를, 너무나 혼란스럽게 만든 작가의 '서술트릭'을 동반한 반전까지!!

'마리 유키코'의 '고충증'은 '기생충'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이면의 음습하고 추악한 욕망의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해 낸 작품이다. 표면상으론 무분별한 성관계가 불러온 참극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속에 내재된 이야기들은 더 참혹하기만 하다. 인간의 몸을 숙주로 순환하며 성장하는 '기생충'은 성충이 될 때까지 인간의 몸을 점차 잠식해 나간다. 이 모습과 과정은 어딘가 인간의 감춰진 추악함과 닮아 있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듯, 순환과 동시에 그 크기도 커져 인간의 정신을 점차 잠식해 나간다. 결국 그 추악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혹은  매스컴을 통해서 심심찮게 엿볼 수 있다.

현실 속 '추악함'이 소설 속 '비현실'이 되고, 소설 속 '추악함'이 현실 속 '현실'이 되는 이 순환과정 또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영원히 마주할 수밖에 없는 그림자이다. 결국 그 누구도 '욕망이라는 그림자'로부터 결백할 수 없다. 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고로 이 소설 '고충증'의 작중 인물들 또한 모두 결백하지 못하다. 때문에 범인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안도감도 느낄 수 없었다. 

"유리코의 웃음에는 인간의 본성을 끌어내는 속임수가 숨어 있다.
그 망측스러운 웃음을 보면 감추고 있던 또 다른 얼굴이 무심코
나타난다." <p.85>

"이런 일로 죽다니... 아이들 시험 준비에 악영향을 끼치면
곤란하다." (중략) 어쩌면 아이들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그러도록 온갖 수단으로 사건을 얼버무리
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다른 원인을 끄집어내어 거기다 모든
책임을 전가하겠지.

인간이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든 죄를 짊어진다면 인간은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인간은 비겁자가 되어서라도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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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틸유아마인 언틸유아마인 시리즈
사만다 헤이즈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범인'도 '범인'이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이 더 눈에 밟혔다. 그들에게 '범인'은 사랑한 사람이고, 앞으로 더 사랑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범인'이 되어버린 '그 혹은 그녀'의 소식을 듣고 '남겨진 사람들'이 또다시 받게 될 상처를 생각하니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착잡하고 안타까웠다. 소설 <언틸유아마인>은 ​책표지에서 느낄 수 있듯 아이를 가진 행복한 여자의 모습 혹은 그와는 반대로 아이를 갖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여자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그림자를 잔인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모습으로 그려낸<범죄스릴러>이다.  


<​언틸유아마인>은 세 여자의 시점이 교차되며 서술된다. 첫 번째 주인공은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곧 출산을 앞두고 있는, 워킹맘 '클라우디아'이다. 그녀는 제임스와 결혼 전 여러 차례 유산의 아픔을 겪었지만 지금은 그와의 사이에 소중한 딸을 품게 되었다. 제임스를 처음 만난 건 일 때문에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였다. 아내를 잃은 제임스와 엄마를 잃은 쌍둥이들.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사랑하게 된 클라우디아와 제임스. 결국 클라우디아는 그들과 한 가족이 된다. 남편 제임스는 해군으로 장기간 바다에 나가 있곤 하는데, 자신이 없는 동안 만삭인 아내와 쌍둥이들을 보살필 유모를 고용하게 되고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조 하퍼'를 만나게 된다.

​『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삶 아니었나? 완벽한 가정생활. 어린 시절부터 늘 꿈꾸던 삶.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 나를 엄마로 받아준 두 아들, 탄탄한 직장, 장차 태어날 딸. 인테리어 잡지를 옮겨 놓은 듯한 멋진 집. 』 <p.76> ​『사실 제임스는 엘리자베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직후에도 웃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를 알만큼 알고 나니, 그것이 그 사람 나름의 대처 방식임을 깨달았다. 청난 스트레스에 직면한 사람은 그 스트레스를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대해야 이겨낼 수 있다. 일종의 자기방어인 셈이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거기에 의존했다. 우린 둘 다 실연이나 이별의 아픔으로 힘든 상태였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 <p.374> 

두 번째 주인공은 클라우디아와 제임스 가정에 고용된 유모 '조 하퍼'이다. 그녀는 오자마자 쌍둥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부부의 마음도 사로잡는다. 결국 주말까지 클라우디아와 제임스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어딘지 의심쩍다. 그건 클라우디아도 독자도 마찬가지다. 클라우디아가 집을 비우면 온 집안을 뒤지고, 클라우디아와 마주할 땐 유독 그녀의 만삭인 배를 의식하기도 한다. 첫날 이 집에 왔을 때 가방이 열리며 얼핏 보였던 임신 테스트기를 클라우디아에게 들키기도 했다. 클라우디아는 남편 제임스에게 불안한 마음을 털어 놓지만 임신 때문에 예민해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뿐이다. 얼마 후 제임스는 장기간 항해를 위해 떠나게 되고 만삭인 자신과 어린 쌍둥이들만 남은 이 상황에서 그녀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가는데...

​『 나는 옷장 구석에서 여행용 가방을 꺼냈다. 안쪽 주머니의 지퍼를 열고 푸른색과 흰색으로 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클리어 블루 임신 테스트기였다! 99%의 정확도를 자랑한다는 임신 진단 키트이다. 두 번이나 검사를 해봤지만 임신은 아니었다. 다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남들은 쉽게 하는데, 난 왜 이리 어렵단 말인가? 공허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p.100>

생각만 해도 겁이 났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러자고 대답했다. 거기 가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임산부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다들 모성이라는 덫에 걸려든 걸 후회하면서 두세 살 난 아이들을 우리에 가둬 놓고 거대한 배를 내민 채 수다를 떨겠지. 사방에 임산부가 널려 있었다. 그게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더 허전하고 더 외롭게 했다. 나 자신이 더 쓸모없게 느껴졌다. 전에는 가뿐히 해치웠던 일도 이젠 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오래가진 않을 거라고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 이런 식으로 영원히 살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 <p.111>

 

세 번째 주인공은 여형사 '피셔'이다. 그녀는 최근 잇따라 발생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같은 형사인 남편과 함께 조사하고 있다. 만삭인 임산부를 상대로 배를 갈라 산모와 아이 둘 다 죽게 된 아주 잔인한 사건이다. 사건 해결도 해결이지만 그녀에겐 가정사도 문제다. 남편의 불륜고백, 10대 딸아이의 가출과 결혼 선포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 편한 것이 없다. 이런 와중에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을 하나 둘씩 찾아 나서는데...

소설 <언틸유아마인>은 세 여자의 시점을 번갈아 읽어나가며 그녀들의 내면을 엿보게 된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며 각자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일련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간다. 마치 떨어져 있던 각각의 퍼즐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이 되어가는 것처럼. 내 눈앞에 펼쳐진 완성된 그림을 보았을 때, 여지껏 믿었던 혹은 의심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충격이란!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들을 의심하고, 믿었던 건 나 자신일 뿐이지, 그녀들은 그저 자신의 삶 일부분을 이야기했을 뿐이리라.


뱃속 아기를 잃을 때마다 내 일부분도 죽었다. 마틴은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까운 친구들은 물론이요, 내 몸의 일부를 떼어낸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아기를 세 번이나 사산했다. 그리고 속옷에 피를 흘리며 유산한 숫자는 세는 것도 포기했다. 그런 일을 다 겪으면서 내가 겉모습만 여자일 뿐, 아기를 열 달 동안 품지도 못하는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억장이 무너지고 피눈물을 쏟아냈다.  <p.400>


여자이기 때문에 삶의 어느 과정에선 좋든 싫든 마주해야 하는 것.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뜻과 어긋날 때 비극은 시작된다. 한순간의 실수로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질 수도 있고, 너무나 간절히 원하지만 쉽게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내면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주변의 시선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소설 속 표현처럼 사방에 임산부가 널려 있는 곳. 갖지 못한 자에겐 힘들고 허전하고 외롭고 심지어 자신의 몸뚱어리가 쓸모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SNS를 도배한다. 누군가에겐 희극이 누군가에겐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이를 갖는 다는 것은 분명 축복받을 일이나 이렇게 얄궂게도 두 얼굴을 가진 것이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자이기에 여자라서 짊어져야 할 숙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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