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드의 영역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이규원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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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은행나무의 현명한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다. 소녀상에 정액을 뿌리자니... 하.. 어떻게 이런 망발을... 이젠 이 작가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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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사색 -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서
강원상 지음 / 지금이책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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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4월 16일 누군가에게는 그저 어제처럼 이날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제와는 다른, 너무도 다른 날이었다. 수많은 어린 영혼들이 미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그 깊고 차가운 바다 속으로 수장되어버린 날. 바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던 날이다. <TV로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앞에 놓인 점심식사를 마저 하고 있더라고요. 한참이 지나 그릇이 깨끗이 비워진 걸 깨달았어요. '아, 인간은 참 잔인하구나......'> 강원상 작가님은 이때의 깨달음을 토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다. 오로지 잊지 않기위해. 그리고 이 책을 펼친 당신들이 잊지 않으려는 자들로 남아주길 바라는 애절한 마음으로. 작가님과 그리고 잊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늘도 움직였을까? 2017년 3월 23일(비록 3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드디어 세월호 인양이 시작되었고, 하늘엔 노란 리본 모양의 구름이 드높게 그려졌다.

 

 

강원상 작가님의 <공감사색>은 '관객과 죄수', '부르주아의 국가', '다시 한번 희망을'이란 소제목으로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소제목 속엔 작가님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려낸 많은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세월호 사건부터 국정농단 사태까지, 우리 국민 모두가 겪어야 했던 현시대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이 강원상 작가님의 비판적 시각아래 하나씩 하나씩 풀어져 있다. 또한 소외된 이웃들에 대해 따뜻한 후원과 관심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이야기하고 있다. <공감사색>을 한 꼭지씩 읽어가면서 내가 몰랐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고,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잊어버렸던 것들은 다시금 부끄러운 반성과 함께 기억하게 하고, 편협했던 나의 생각에 또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해주고,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현 자화상을 바라보며 내 가슴에 울분을 느끼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광장으로 달려가 촛불을 든 희망의 불씨인 우리 국민들이 있다는 것에 눈물을 흘리게 했다.     


1791년 영국의 뛰어난 건축자 겸 개혁자였던 벤담은 최소의 비용과 감시로 최대 효과가 가능한 감옥을 설계한다. 바로 '모두 본다'(pan+opticon)는 뜻의 판옵티콘이란 원형 감옥이다. 아래 그림처럼 중앙에 감시탑이 있으며 그 주변을 죄수의 방들로 채운다. 중앙의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하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하여 감시탑에서 언제나 죄수의 방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어두운 감시탑을 보지 못한다. 그 결과 죄수들은 24시간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느끼며 스스로 규율을 지키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무서운 것은 권력자들은 언제나 하늘에서 땅을 지켜보는 신처럼 <판옵티콘>을 꿈꾼다는 것이다.

 

 

반대로 시놉티콘은 '함께 본다' (syn + opticon)는 뜻이다. 즉 감시에 대한 역감시이다. 다수가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하는 양상이랄 수 있다. 아래 그림처럼 관중으로 둘러싸인 중앙 무대에서는 배우도 관객을 볼 수 있지만 주로 관객이 배우를 지켜본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선택해야 한다소수의 권력자들이 감시하는 다수의 힘없는 죄수로 남을 것인지, 소수의 권력자들을 원형의 무대에 세워 역감시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시놉티콘의 사회를 구현할 것인지. 그동안의 대한민국은 판옵티콘의 양상을 보여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016년 12월 9일 234표로 탄핵안이 가결되었고, 광장으로 달려나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치켜든 촛불의 힘은 2017년 3월 10일 8:0으로 대통령 탄핵 인용을 이끌었다. 이는 헌정사상 첫 탄핵이자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너무도 명백한 진리를 실현한 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다. 진보와 보수는 자주 대립한다. 그러나 진보를 표현하는 단어가 좌익(左翼) 즉, 왼쪽 날개를 뜻하고, 보수를 뜻하는 우익(右翼)은 오른쪽 날개를 뜻한다. 세상 어떤 새도 한쪽 날개로만 하늘을 날 순 없다. 두 날개가 몸에 붙어 있어야 드높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다. 작가님의 말씀처럼, 진보와 보수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으며 상호보완적인 관계로서 균형을 필요로 한다. 잊지 말자.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것을.


뉴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4년간 12억 원가량 재산이 증가했다 한다.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국정농단 등, 전 국민을 슬픔에 젖게 하고 두려움과 울분, 분노에 빠뜨리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 포함 정치인들은 자기들 밥그릇 채우기에 급급했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연평균 50회가 넘는 출장을 가는데 대부분의 명목은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들이 해외출장비로만 일 년에 약 4천만 원을 사용하며, 국민 혈세에 대해선 그 어떤 사용 검증도 하지 않는다. 2015년 국가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OECD국가 가운데 1인당 GDP대비 우리나라 국회의원 보수 수준은 3위로 상당히 높은 편이고 스웨덴은 24위로 낮은 편이다. 그러나 보수 대비 의회의 효율성은 스웨덴이 2위, 우리나라는 26위로 조사됐다. 이 보고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책 속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그저 비탄과 울분에 젖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송파 세 모녀 사건처럼 가슴 아픈 사건들이 너무도 많다.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서 운동화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해야 했던 가난한 여고생들의 이야기까지... 너무도 대비되고, 모순되는 이 상황 속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 역시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했던 방관자는 아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비통하고 답답하여 그저 속절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러라고 그들에게 권력을 준 것이 아닌데, 힘을 준 것이 아닌데, 언제까지 우리는 국가의 무차별적인 폭력 앞에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대한민국 18세 청년들은 OECD 35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선거권이 없다고 한다. 촛불집회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 자신들의 작은 목소리를 내기위해 모인 청년들을 보았다. 한창 공부해야 할 귀중한 시간을 쪼개 광장으로 모인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어린 학생들이 아니다.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이 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하나의 인격체이다. 작가님의 말씀처럼 만약 이들이 선거권을 갖게 된다면 유권자가 60만 명으로 늘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청년을 위한 교육 및 노동정책 개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한다. 하루빨리 청년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


2017년은 대한민국 건국 69주년이 아닌 98주년이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언제 탄생했을까. 1919년 4월 10일 독립지사 29명이 국호 논의를 위해 모였고, 결국 표결 끝에 '대한민국' 국호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를 건국 60주년으로 하겠다." 발표했고,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은 건국 68주년이라 언급했다. 즉, 대한민국의 시작이 1948년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1919년을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독립군과 독립운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1948년을 건국 시점으로 하게 되면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제 하의 모든 친일 활동이 정당화되며, 당시 행위에 대한 어떤 책임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타국까지 넘어가 목숨 걸고 투쟁한 항일 독립투사들의 죽음과 눈물의 가치를 축소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57Page

건국 98주년이 되는 2017년도는 대선이 있는 해이기도 하다. 썩은 뿌리는 잘라내고, 다시금 씨를 뿌려 새로운 싹을 틔워야 한다. 미국의 문예평론가 조지 진 나단의 말처럼 "나쁜 관리들은 투표하지 아니한 좋은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것"이라는 말처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고, 두 번 다시 "최순실과 그 무리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강원상 작가님의 <공감사색>은 곁에 두고 여러 번 곱씹어 읽어 볼 것이다. 이 책 <공감사색>은 잊지 않기 위해 기록된 것이며, 회색빛으로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는 나라이지만, 촛불이 꺼지지 않는 한 다시 한번 희망을 꿈꿔 볼, 대한민국에 대한 이야기다. 잊지 말자. 나도, 너도.


*

밤은 깊어지고 수면 위에 슬픔이 떠오른다.

비는 점점 짙어지고 별은 휘청거린다.

꽃잎은 모두 져버리고 흙탕물에 버무려졌다.


봄은 다시 왔건만 우리 아이들은 언제 돌아오려나.

꽃은 다시 활짝 피겠지만 웃음꽃은 오직 사진뿐이구나.


바람아 불지마라, 밤에라도 편히 잠들도록.

구름아 달을 가리어라, 떨군 내 슬픔 감추도록.

밝혀라 촛불아, 진실을 인양할 때까지.

*


개인의 탄생과 죽음은 필연이지만 국민의 안전과 생존은 국가와 어른들의 몫이다. 어른들이 무시한 안전과 어른들의 잘못된 구조와 어른들의 소홀한 대처로 우리 아이들이 너무 빨리 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난 그날의 아픔을 절대 잊지 못한다. 그날의 어른들은 너무 무능했고, 너무 무신경했고, 너무 뻔뻔했다.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은 뼈와 심장이 없는 소리일 뿐 절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책 속 한 방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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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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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야구선수였던 '기누가사 사치오'와 한자는 틀리지만,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는 남자 '기누가사 사치오'는 아버지가 지어주신 자신의 이름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했다. 어디를 가든, 어느 곳에 있든,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사치오 그 자신이 아닌 야구선수 '기누가사 사치오'를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야구선수가 된다면 끊임없이 야구선수인 '기누가사 사치오'와 비교될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결국 사치오는 야구선수라는 꿈은 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소설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사치오와 대학 동창이었으나 재학시절 큰 교류도 없었고, 도중에 중퇴한 다나카 나쓰코. 어느 날 미용실을 방문한 사치오는 그곳에서 나쓰코와 재회하게 된다. 머리를 감겨주는 나쓰코의 손길이 기분 좋았던 사치오. 그러면서도 그녀의 이름이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 스친 어떤 빛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좍 끼치는 느낌과 함께 사치오는 나쓰코, 그녀에게 함락되고 만다.

부부가 된 사치오와 나쓰코 두 사람. 사치오는 '기누가사 사치오'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그 자신 안에 내재되어 왔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해소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소설가로서 이런 자신의 본명을 버리고, 쓰무라 케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사치오. 그 필명 뒤에 숨어서 조악하고 유치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감추고 허세도 부려보지만, 실제 자신의 삶과 소설가로서의 삶의 간극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아내인 나쓰코는 미용실을 계속 운영하면서 남편인 사치오가 소설가로서 유명세를 탈 때에도, 그렇지 못할 때에도 그저 묵묵히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그리고 사치오의 이런 모습들을 비난하지도, 추켜세우지도 않는다. 그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지켜만 볼 뿐이다. 그 어떤 의존도 허락하지 않은 채. 이렇듯, 자신과 달리 늘 한결같은 아내의 모습은 사치오, 그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비굴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반항 심리 때문일까? 급기야 사치오는 외도까지 하게 되고, 아내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악의로 되받아 친다. 남편에 대해 점점 싸늘해지는 나쓰코. 처음엔 사랑으로 시작했을 사치오와 나쓰코였겠지만, 결국 서로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바랐는지 묻고, 얘기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그들의 결혼생활은 끝나고 만다.


친구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친구인 오미야 유키와 나쓰코가 버스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과, 이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잃는 것과는 슬픔의 정도가 비교도 안 되겠지만, 후자가 빠질 실의의 늪 또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61page> 아내의 장례식 날 사치오는 울지 않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죽은 아내의 얼굴을 본 지 스무 시간 뒤에는 벌써 그 백골을 줍고 있었다. 화로 문이 열리고 안에서 재가 된 유골이 나오자, 나는 자신이 본의 아니게 동요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평평한 받침대 위에 널린 그것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을 봐서 알고 있는 '인간의 유골'일 뿐 나쓰코다운 점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65page>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내를 잃은, 오미야 유키의 남편인 오미야 요이치. 그를 장례식장에서 만났고, 이후 있을 또 다른 만남이 계기가 되어 사치오는 생업으로 바쁜 요이치를 대신해, 그의 남겨진 두 아이들 신페이, 아카리를 돌보게 된다. 이 기묘한 동거 아닌 동거로, 그동안 자신을 잃은 채 살아왔던 사치오의 인생에 작지만 큰 변화가 시작된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사랑이었다. 또한 그 자신 사치오가 아내인 나쓰코와 누렸어야 할 행복이기도 했다.


아내가 죽었다
눈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랑이 다시 시작되었다.


니시카와 미와의 <아주 긴 변명>은 아내를 잃은 두 남자 사치오와 요이치의 애도의 과정을 담담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묘사함과 동시에 사치오가 요이치의 아이들인 아카리와 신페이를 돌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사랑과 삶의 의미를 슬프지만 잔잔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한 남자, 사치오의 아내에 대한 고백이자, 아주 긴 변명 끝에 힘겨운 자각과 견뎌냄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뒤늦게 흘린 그의 눈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누가사 사치오는 처음으로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또 회한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내를 생각하고, 울었다. 329page>


그런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았을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었는지, 당신과 헤어지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고,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살아 있는 동안에는 노력이 중요하겠지.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걸, 사람은 후회하는 생물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건 어째서일까. 사랑해야 할 날들에 사랑하기를 게을리한 대가가 작지 않군 <..........>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한들 용서해주는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쪽에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욕하고 동정하든, 그 목소리 역시 내게는 들리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그뿐이지. 우리는 둘 다 살아 있는 시간을 너무 우습게 봤어....

<책속 밑줄>


인간은 '참담한 일을 당했지만 그걸 극복해냈다.'하는 타인의 스토리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개개인이 직면한 장벽을 넘어서기 위한 원기 회복제로? 아니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심심풀이로? 어느 쪽이든 사치오가 만들어내는 허구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면 몰라도, 자신의 인생 자체가 그 재료가 될 수 있다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 73page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심야 프로그램 사회자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려 스위치를 끄는 순간 딸꾹질이 났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울고 싶지 않다. 왜 간혹 이러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두 사람이 기분 상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가족의 불행을 겪지 않은 그들의 태평함이 부러운 것도 아니다. 그저 유쾌한 남일뿐이다. 그들이 생활 속에서 '불행을 겪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 100page


'엄마가 없을 때'라는 말의 의미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없을 때'라는 건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잖아. '없어졌을 때'를 '없을 때'라고는 하지 않잖아. 엄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 118page


석 달 전까지는 이렇게 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오누이가 이토록 야무지게 생활하려 애쓰는 건 그전의 습관이나 교육의 성과라기보다는 엄마가 고집스럽게 구축해놓은 성실한 생활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그것들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엄마와 살았던 기억을. - 15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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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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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절반이 뒤덮이고, 하얀 나체 위에 붉은색의 강렬한 천으로 뒤덮인 여인의 모습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숨기고자 함인지... 김희재 작가님의 <소실점>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색상처럼 강렬한 시선으로 나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처음 책의 제목인 <소실점>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위의 그림인데, 작품의 제목이나 작가는 이번에 정확히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화가 '마인데르트 호베마'의 대표작인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이라는 작품이다. 가로수길, 저 길 끝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시선을 잡아끄는 중앙에 배치된 '하나의 강렬한 소실점'때문에, 이 단어를 보자마자 오래전 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었던 이 그림이 그렇게 떠올랐나 보다. 소실점이란, 2차원의 평면에 원근법과 입체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준이 되는 선을 그리는 방법을 말하며, 이 단어를 중고등학교 때 미술시간 외엔 크게 사용할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오래전 내가 알고 있는 소실점이라는 정의 혹은 의미를, 작품 <소실점>은 어떻게 표현하고, 그려냈을지 궁금했기에 책을 펼쳐 들었다.


뉴스에 실종 사건이 특종으로 보도된다.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은 KBS 9시 뉴스 여자 앵커 최선우다. 지명도로 치면 대통령과 유재석 다음으로 유명했고, 남편은 외교관, 시아버지는 재벌 총수, 친정 또한 이에 못지않은, 그야말로 '노블레스의 표상'이랄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어느 외딴 집 거실에서 기이하게 목이 꺾인 채 알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한 가운데, 강력부의 유능한 검사 강주희가 사건을 수사 담당하게 된다. 용의자로 검거된 사람은 이 집의 주인인 화가이자 미술교사인 서인하로 검거 후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하나 검찰청 조사실, 강주희와의 첫 대면에선 돌연 태도를 바꾼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한 마디는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나는 최선우 섹스 파트너였어! SM! 사도마조히즘 커플이었다고, 우리가!"


그동안 대중들에게 비쳤던 최선우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상반된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나, 최선우가 타살이라는 명백한 증거도 없고, 시종일관 일관된 서인하의 이야기 속 논리와 이를 입증하는 증거 사이엔 괴리가 없고, 오류가 없는 것이 강주희를 당혹게 하고, 수사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최선우의 남편 박무현이 강주희를 찾아온다.


"나만 알고 있는 내 아내에 관한 '사실'을 확인시켜드리죠."


최선우의 남편 박무현과 함께 한때, 그들이 살았던 집을 방문한 강주희는 서인하가 주장하는 모습과는 다른, 최선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대중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고전적이고, 현모양처에 정숙하기 이를 데 없는. 살아생전에 만났다면 지루하게 생각했을 것 같은. 그래서일까? 강주희, 자신을 향해 나지막이 내뱉은 박무현의 "모욕당하지 않겠습니다."라는 한마디는 그녀로 하여금 왠지 모를 다행스러움을 안겨준다. 최선우, 당신 진짜 모습이 뭐야? 아니 진짜 모습이란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책을 읽어내려 가면서 강주희 그녀 자신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붉은 베일을 벗겨내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된 증거 하나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선배 검사가 맡고 있던 연쇄살인방화사건의 증거물들이 서인하의 집에서 발견된 것이다. 최선우 살해 후 시신방치, 또 다른 연쇄방화살인까지. 결국, 두 사건의 연결고리 선상에 놓이게 된 서인하는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고, 판사는 검사의 구형을 그대로 언도한다.

"사형."

최선우, 그녀를 잊고 서인하, 그를 잊고 이제는 진심으로 이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강주희 검사. 실로 며칠 만에 모습을 드러낸 햇살이 빛을 더하는 예쁜 오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청송교도소장입니다. 5892번, 그러니까 서인하가 검사님을 좀 뵙고 싶다고 합니다."


다시 서인하와 대면하게 된 강주희 검사. 또다시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이 한마디'는 모든 사건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고, 그 진실은 슬프다기 보다 서늘했다. 마치 불꽃처럼 붉은색으로 타올랐다가 점차 더 거센 온도로 타오르면서 푸른빛이 되는 파란 불꽃처럼.

​ps.

서인하, 그가 내뱉은 '어떤 한마디' 뒤에 담담히 들려준 <소실점>에 대한 아래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은 들으면서 든 생각은 결국,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이 그림 속 <소실점> 밖 저 끝에 무엇이 있을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서인하' 그 자신뿐이 길 바란 것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겐 이 그림이 <소실점> 안의 '보이는 그대로의 그림'으로 남길 영원히, 바란 것이 아니었을까... 나 또한 그의 바람대로 해주고자 한다. 달의 뒷면, 그림 속 <소실점> 밖의 그림은 서인하, 당신이 모두 안고 가는 것으로... 

"저는 최선우를 똑바로 보기 위해 매 순간 새로운 소실점을 찍고, 제 위치를 바꿔가며 그녀를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한 번 찍은 소실점에 변동 없이, 그 구도 안에 선우를 밀어 넣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을 모습을, 저는 그래서 볼 수 있었고, 저는 그래서……." 28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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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머무는 순간들 - 소소하지만 소중한 행복을 배우다
무무 지음, 이지연 옮김 / 보아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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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과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위안과 위로를 준다. 나 또한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고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어쩌면 아직 치유되지 않은, 못한 감정의 더께들을 책을 통해 털어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행복이 머무는 순간들>은 제목도 참 좋았고, 감성을 자극하는 핑크빛의 책 표지도 그 자체로 좋았다. 각 테마별로 8장까지 68개의 꽤 많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한 꼭지씩 읽을 수 있어 부담도 없다. 작가 무무는 필명으로, 국내에선 필명 외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 그래서일까? 화자가 '나'로 시작하는 이야기에선, '아 이제 작가의 이야기가 나오나 보다'라며 읽다가 그 작중 화자가 '여성'임을 알게 되고 '아 무무 작가님은 여성인가 보다' 혼자 생각하다가, 다음 꼭지를 읽는데 거기선 '나'라는 화자가 '남성'으로 등장한다. 잠시 머릿속의 혼란을 수습하고, 생각을 정리한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즉,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 작가 본인이 직접 체험했거나 경험했던 이야기들은 거의 없고, 주변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사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작가 본인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가님이 직접 체험하고 경험한 일상 속에서 느낀 어떤 깨달음이나 소소한 감정들을 나는 듣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들이, 나에겐 감정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지고,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책 속 68개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사연들을 읽는 재미도 결코 무시할 순 없다. 나름대로 즐겁게 읽었고, 좋은 문장들도 많이 만났다. 그러나 몇몇 이야기들은 작위적으로 느껴지거나,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꽤 많았다. 내가 '작위적이다'라고 느낀 것은 오롯이 내 문제다. 나라는 사람은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초연할 수 있다거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다거나 등등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초인적인 이야기들은 교훈은 될지 언정 오히려 약간의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뭐랄까? 너무 멀게 느껴져서 정말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 걸까? 작가의, 혹은 사람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떤 환상이나 이상향은 아닐까? 정말 실화인지,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해 억지로 이야기를 만든 것은 아닌지, 자꾸만 이런 불편한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랑에 대한 부분이었다. 요즘과 같은 시대의 인스턴트식 사랑, 너무 쉬운 이혼 등 작가님께서 비판하고,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알겠는데, 그 주제에 포함된 몇 개의 이야기들은 나를 당혹게 했다. 젊었을 적 자식과 아내에게 난폭하게 굴다가, 나중에 늙어서 치매가 든 후에 비로소 아내를 위해 하는 여러 행동들이 이해도 안 가고, 전혀 감동스럽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런 남편이 죽고, 남편을 위해 우는 여자도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 일화를 예로, 참고 인내하는 사랑이라며 요즘과 같은 시대의 사랑을 비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그럴 거면 평소에 좀 잘하지, 왜 꼭 치매가 걸린 후에 아내를 위하는 척하느냔 말이다. 한 일화는 여자의 생일날 남자가 곰인형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 선물이 마뜩지 않았던 여자는 하루 종일 뾰로통하다가, 술 마시고 차 안에 토하고, 심지어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들다가 이를 알아챈 남자가 대신 몸을 날려 목숨을 잃게 된다. 후에 곰인형 속에 프러포즈 반지가 있음을 알게 된 여자가 대성통곡하면서 뒤늦게 남자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작가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때로 경솔하고 침착하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조금이라도 남자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난 이 이야기 속의 남자가 이해가 안 되어서 너무 답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준, 보잘 것 없는 선물이라도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를 사랑한 남자를 말이다.


<행복이 머무는 순간들> 분명, 읽을거리도 풍부하고 소소하게 감동을 자아내는 이야기와 좋은 문장들도 많다. 책 중간중간엔 사랑스러운 일러스트도 배치되어 있어 지루하지 않다. 다만 내 마음이 아직은 강팍한 것인지, 아직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진 몰라도 읽는내내 왜?라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고, (사실 굉장히 눈물이 많은 편인데) 눈물 한 번 흘리지 않고 무표정에, 무감각하게 읽어나간 페이지들도 꽤 있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라는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평이다. 사람마다 느낀는 바가 다 다를 것이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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