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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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절반이 뒤덮이고, 하얀 나체 위에 붉은색의 강렬한 천으로 뒤덮인 여인의 모습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숨기고자 함인지... 김희재 작가님의 <소실점>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색상처럼 강렬한 시선으로 나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처음 책의 제목인 <소실점>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위의 그림인데, 작품의 제목이나 작가는 이번에 정확히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화가 '마인데르트 호베마'의 대표작인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이라는 작품이다. 가로수길, 저 길 끝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시선을 잡아끄는 중앙에 배치된 '하나의 강렬한 소실점'때문에, 이 단어를 보자마자 오래전 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었던 이 그림이 그렇게 떠올랐나 보다. 소실점이란, 2차원의 평면에 원근법과 입체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준이 되는 선을 그리는 방법을 말하며, 이 단어를 중고등학교 때 미술시간 외엔 크게 사용할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오래전 내가 알고 있는 소실점이라는 정의 혹은 의미를, 작품 <소실점>은 어떻게 표현하고, 그려냈을지 궁금했기에 책을 펼쳐 들었다.


뉴스에 실종 사건이 특종으로 보도된다.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은 KBS 9시 뉴스 여자 앵커 최선우다. 지명도로 치면 대통령과 유재석 다음으로 유명했고, 남편은 외교관, 시아버지는 재벌 총수, 친정 또한 이에 못지않은, 그야말로 '노블레스의 표상'이랄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어느 외딴 집 거실에서 기이하게 목이 꺾인 채 알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한 가운데, 강력부의 유능한 검사 강주희가 사건을 수사 담당하게 된다. 용의자로 검거된 사람은 이 집의 주인인 화가이자 미술교사인 서인하로 검거 후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하나 검찰청 조사실, 강주희와의 첫 대면에선 돌연 태도를 바꾼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한 마디는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나는 최선우 섹스 파트너였어! SM! 사도마조히즘 커플이었다고, 우리가!"


그동안 대중들에게 비쳤던 최선우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상반된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나, 최선우가 타살이라는 명백한 증거도 없고, 시종일관 일관된 서인하의 이야기 속 논리와 이를 입증하는 증거 사이엔 괴리가 없고, 오류가 없는 것이 강주희를 당혹게 하고, 수사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최선우의 남편 박무현이 강주희를 찾아온다.


"나만 알고 있는 내 아내에 관한 '사실'을 확인시켜드리죠."


최선우의 남편 박무현과 함께 한때, 그들이 살았던 집을 방문한 강주희는 서인하가 주장하는 모습과는 다른, 최선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대중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고전적이고, 현모양처에 정숙하기 이를 데 없는. 살아생전에 만났다면 지루하게 생각했을 것 같은. 그래서일까? 강주희, 자신을 향해 나지막이 내뱉은 박무현의 "모욕당하지 않겠습니다."라는 한마디는 그녀로 하여금 왠지 모를 다행스러움을 안겨준다. 최선우, 당신 진짜 모습이 뭐야? 아니 진짜 모습이란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책을 읽어내려 가면서 강주희 그녀 자신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붉은 베일을 벗겨내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된 증거 하나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선배 검사가 맡고 있던 연쇄살인방화사건의 증거물들이 서인하의 집에서 발견된 것이다. 최선우 살해 후 시신방치, 또 다른 연쇄방화살인까지. 결국, 두 사건의 연결고리 선상에 놓이게 된 서인하는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고, 판사는 검사의 구형을 그대로 언도한다.

"사형."

최선우, 그녀를 잊고 서인하, 그를 잊고 이제는 진심으로 이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강주희 검사. 실로 며칠 만에 모습을 드러낸 햇살이 빛을 더하는 예쁜 오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청송교도소장입니다. 5892번, 그러니까 서인하가 검사님을 좀 뵙고 싶다고 합니다."


다시 서인하와 대면하게 된 강주희 검사. 또다시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이 한마디'는 모든 사건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고, 그 진실은 슬프다기 보다 서늘했다. 마치 불꽃처럼 붉은색으로 타올랐다가 점차 더 거센 온도로 타오르면서 푸른빛이 되는 파란 불꽃처럼.

​ps.

서인하, 그가 내뱉은 '어떤 한마디' 뒤에 담담히 들려준 <소실점>에 대한 아래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은 들으면서 든 생각은 결국,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이 그림 속 <소실점> 밖 저 끝에 무엇이 있을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서인하' 그 자신뿐이 길 바란 것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겐 이 그림이 <소실점> 안의 '보이는 그대로의 그림'으로 남길 영원히, 바란 것이 아니었을까... 나 또한 그의 바람대로 해주고자 한다. 달의 뒷면, 그림 속 <소실점> 밖의 그림은 서인하, 당신이 모두 안고 가는 것으로... 

"저는 최선우를 똑바로 보기 위해 매 순간 새로운 소실점을 찍고, 제 위치를 바꿔가며 그녀를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한 번 찍은 소실점에 변동 없이, 그 구도 안에 선우를 밀어 넣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을 모습을, 저는 그래서 볼 수 있었고, 저는 그래서……." 28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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