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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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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야구선수였던 '기누가사 사치오'와 한자는 틀리지만,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는 남자 '기누가사 사치오'는 아버지가 지어주신 자신의 이름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했다. 어디를 가든, 어느 곳에 있든,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사치오 그 자신이 아닌 야구선수 '기누가사 사치오'를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야구선수가 된다면 끊임없이 야구선수인 '기누가사 사치오'와 비교될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결국 사치오는 야구선수라는 꿈은 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소설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사치오와 대학 동창이었으나 재학시절 큰 교류도 없었고, 도중에 중퇴한 다나카 나쓰코. 어느 날 미용실을 방문한 사치오는 그곳에서 나쓰코와 재회하게 된다. 머리를 감겨주는 나쓰코의 손길이 기분 좋았던 사치오. 그러면서도 그녀의 이름이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 스친 어떤 빛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좍 끼치는 느낌과 함께 사치오는 나쓰코, 그녀에게 함락되고 만다.
부부가 된 사치오와 나쓰코 두 사람. 사치오는 '기누가사 사치오'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그 자신 안에 내재되어 왔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해소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소설가로서 이런 자신의 본명을 버리고, 쓰무라 케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사치오. 그 필명 뒤에 숨어서 조악하고 유치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감추고 허세도 부려보지만, 실제 자신의 삶과 소설가로서의 삶의 간극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아내인 나쓰코는 미용실을 계속 운영하면서 남편인 사치오가 소설가로서 유명세를 탈 때에도, 그렇지 못할 때에도 그저 묵묵히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그리고 사치오의 이런 모습들을 비난하지도, 추켜세우지도 않는다. 그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지켜만 볼 뿐이다. 그 어떤 의존도 허락하지 않은 채. 이렇듯, 자신과 달리 늘 한결같은 아내의 모습은 사치오, 그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비굴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반항 심리 때문일까? 급기야 사치오는 외도까지 하게 되고, 아내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악의로 되받아 친다. 남편에 대해 점점 싸늘해지는 나쓰코. 처음엔 사랑으로 시작했을 사치오와 나쓰코였겠지만, 결국 서로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바랐는지 묻고, 얘기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그들의 결혼생활은 끝나고 만다.
친구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친구인 오미야 유키와 나쓰코가 버스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과, 이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잃는 것과는 슬픔의 정도가 비교도 안 되겠지만, 후자가 빠질 실의의 늪 또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61page> 아내의 장례식 날 사치오는 울지 않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죽은 아내의 얼굴을 본 지 스무 시간 뒤에는 벌써 그 백골을 줍고 있었다. 화로 문이 열리고 안에서 재가 된 유골이 나오자, 나는 자신이 본의 아니게 동요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평평한 받침대 위에 널린 그것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을 봐서 알고 있는 '인간의 유골'일 뿐 나쓰코다운 점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65page>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내를 잃은, 오미야 유키의 남편인 오미야 요이치. 그를 장례식장에서 만났고, 이후 있을 또 다른 만남이 계기가 되어 사치오는 생업으로 바쁜 요이치를 대신해, 그의 남겨진 두 아이들 신페이, 아카리를 돌보게 된다. 이 기묘한 동거 아닌 동거로, 그동안 자신을 잃은 채 살아왔던 사치오의 인생에 작지만 큰 변화가 시작된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사랑이었다. 또한 그 자신 사치오가 아내인 나쓰코와 누렸어야 할 행복이기도 했다.
아내가 죽었다
눈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랑이 다시 시작되었다.
니시카와 미와의 <아주 긴 변명>은 아내를 잃은 두 남자 사치오와 요이치의 애도의 과정을 담담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묘사함과 동시에 사치오가 요이치의 아이들인 아카리와 신페이를 돌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사랑과 삶의 의미를 슬프지만 잔잔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한 남자, 사치오의 아내에 대한 고백이자, 아주 긴 변명 끝에 힘겨운 자각과 견뎌냄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뒤늦게 흘린 그의 눈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누가사 사치오는 처음으로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또 회한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내를 생각하고, 울었다. 329page>
그런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았을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었는지, 당신과 헤어지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고,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살아 있는 동안에는 노력이 중요하겠지.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걸, 사람은 후회하는 생물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건 어째서일까. 사랑해야 할 날들에 사랑하기를 게을리한 대가가 작지 않군 <..........>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한들 용서해주는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쪽에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욕하고 동정하든, 그 목소리 역시 내게는 들리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그뿐이지. 우리는 둘 다 살아 있는 시간을 너무 우습게 봤어....
<책속 밑줄>
인간은 '참담한 일을 당했지만 그걸 극복해냈다.'하는 타인의 스토리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개개인이 직면한 장벽을 넘어서기 위한 원기 회복제로? 아니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심심풀이로? 어느 쪽이든 사치오가 만들어내는 허구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면 몰라도, 자신의 인생 자체가 그 재료가 될 수 있다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 73page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심야 프로그램 사회자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려 스위치를 끄는 순간 딸꾹질이 났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울고 싶지 않다. 왜 간혹 이러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두 사람이 기분 상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가족의 불행을 겪지 않은 그들의 태평함이 부러운 것도 아니다. 그저 유쾌한 남일뿐이다. 그들이 생활 속에서 '불행을 겪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 100page
'엄마가 없을 때'라는 말의 의미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없을 때'라는 건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잖아. '없어졌을 때'를 '없을 때'라고는 하지 않잖아. 엄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 118page
석 달 전까지는 이렇게 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오누이가 이토록 야무지게 생활하려 애쓰는 건 그전의 습관이나 교육의 성과라기보다는 엄마가 고집스럽게 구축해놓은 성실한 생활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그것들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엄마와 살았던 기억을. - 158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