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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드뷔시 ㅣ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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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극은 그 화마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인 하루카와 사촌 루시아는 함께 지내며 '피아니스트'라는 같은 꿈을 꾼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날, 하루카와 사촌 루시아는 별채에서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며 잠이 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전 세계 누구라도 세상의 온갖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이 있다는 걸 아느냐? 그건 말이다, 이길 때까지 멈추지 않는 거다. (...) 대체로 계속 싸우다 보면 승기가 찾아오는 법이지.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그때마다 다시 일어서면 언젠가 반드시 이긴다. 아니, 이길 때까지 패배도 절대로 없지. 패배는 싸움을 멈췄을 때 오는 거란다. 그만두고 싶어 하는 스스로에게 졌을 때 온단다. 아니, 모든 싸움은 결국 나약한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니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 (...) 그런데도 만약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으면.... 그때는 여기로 돌아오너라. 여기 할아비가 있단다.
매캐한 냄새와 자욱한 연기 속에서 눈을 뜬 하루카. 온 집안은 이미 화마로 뒤덮였고 이날의 사고로 사랑했던 사람들, 할아버지와 사촌 루시아를 잃었다. 다행히 하루카 자신은 목숨은 건졌지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은 처참히 망가졌다. 하루카에게 남은 것이라곤 신체 대부분의 피부이식과 고통스러운 재활훈련의 나날들뿐이었다. 그, 미사키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어쨌든, 충분히 애도할 틈도 없이 하루카에게 생전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막대한 유산이 남겨졌다는 사실을 하루카와 가족들은 변호사를 통해 듣게 된다. 단, 하루카가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잃지 않고 나아갔을 때만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 붙지만...
이후, 하루카는 미사키를 만나 다시, 처음부터 피아노 레슨을 시작한다. 제대로 굽어지지 않는 손가락, 내 마음과 달리 따로 노는 손가락. 사고가 나기 전엔 이 모든 일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너무나 벅차고 힘들다.
몸이 이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세상에 장애를 지닌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코앞을 지나가는데도 못 본 척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반 도로가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얼마나 배려 없는 곳인지도. -159page
한때는 법조계에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그였지만 지금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살고 있고, 하루카의 피아노 레슨을 담당하고 있는 미사키. 하루카는 미사키를 통해 예전에 갖추었던 피아노 실력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더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암흑과도 같았던 터널 속 한 줄기 빛처럼, 음악의 광명으로 이끌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미사키였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절망은 옅어지고, 희망은 짙어져 간다.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 콩쿠르를 목표로 하루카는 연습에 더욱더 매진해 간다. 문득, 헬렌켈러와 앤 설리번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내 삶에도 이런 스승 한 분쯤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뭐 그런 생각도 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그렇게 미사키와 하루카의 피아노 레슨이 거듭되는 가운데, 누군가 하루카를 노리는 듯한 사건이 잇다라 발생한다. 심지어 살인사건까지.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했던가? 화마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하루카에게 닥쳐온 잇단 사건, 사고들. 혹 누군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하루카를 노리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미사키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하루카가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주고, 그 자신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나간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안녕, 드뷔시>는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피아노를 매개로 극복하는 하루카의 모습과 가까이서 그녀를 돕는 미사키의 이야기가 큰 줄기가 된다. 당연히 그 속에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타듯 책상 위를 굴러다녔다. 머릿속에서는 피아노 선율이 떠다녔고, 마치 콘서트홀에서 직접 음악을 듣고 있는 한 사람의 청중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만큼 작가의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와 타고난(?), 섬세한 묘사력이 바탕이 된 덕분일 것이다.
중간중간 책 읽기를 멈추고, 책 속에 등장하는 음악가들의 음악을 찾아서 듣기도 했다. 실로 독서와 음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안녕, 드뷔시>는 리커버 개정판으로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책인데, 예전에도 이 작품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다. 다만 기회가 되지 않아 읽지를 못했다가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는데, 책 띠의 문구처럼 <반전의 제왕>이 선보이는...라는 말처럼 이 책의 반전이 무엇일까? 내내로 기대하며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범인이 밝혀지는 장면에선 뭐야?라는 허탈감이 나올 만큼 허무했는데, 그게 반전의 클라이맥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반전은 조금 후에 맛보게 되었는데, 정말 상상도 못한 반전이라 책을 덮는 순간까지 소름이 오소소!!
덧) 앞으로도 <미사키 요스케 음악 시리즈>는 죽~ 출간이 될 것 같은데,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어둠을 떨쳐라. 일어나 싸워라.
마음이 동한 이유는 그것이 미사키 씨 자신의 말이기 때문이다. 미사키 씨 자신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강해지길 원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불행이나 타고난 나약함 때문에 좌절하곤 한다. 그럴 때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해주는 건 바로 옆에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다. 자신처럼 나약하지만 의지의 힘으로 극복하려 발버둥 치는 인간의 뜨거운 손길이다. 미사키 씨의 음악이야말로 그 손길일지도 모른다. -288page
나는 무기를 내팽개치고 전쟁터에서 도망치려 한 패잔병이었다. 도망치는 건 확실히 편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편하게 지내면서 얻을 수 있는 건 게으름과 죽을 때까지의 시간밖에 없다. 모든 싸움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296page
세상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공격에 노출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비난하는 쪽에 있을 때는 전혀 알지 못한다. 아니,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잔학함을 정의감으로 둔갑시켜 자기 내면에 있는 악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올바른 인간이라고 믿는 것,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을 악으로 단정하는 것이야말로 악의가 아닌가. -356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