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곡
윤재성 지음 / 새움 / 2019년 3월
평점 :
+
윤재성의 <화곡>이라는 소설은 실제 지명인 화곡동에서 발생한 화재를 시작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화곡동의 '화'자가 '火'자는 아니지만 소설 전반의 주요 소재인 '불'도 연상케하는 중의적 느낌이라 작품의 제목으로써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변변한 직장은 없지만 경찰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고, 가진 것 없어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청년 형진은 그날도 화곡동 골목길을 자진해서 순찰하고 있었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손쓸 틈도 없이. 방화범에게 테러를 당한 형진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화곡동 일대를 불태운 화재는 동생 진아의 목숨마저 빼앗아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형진은 뒤틀린 괴물이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화곡동 화재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신이 방화범을 잡고, 동생의 복수를 위해 불이 난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갔고, 미친놈 마냥 소방차가 출동하는 날이면 뒤를 쫓았고, 경찰서, 방송국의 힘도 빌려 보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좌절과 분노, 상처뿐이었다. 또한 일그러진 얼굴과 몸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신 앞을 지나가는 선량한 양떼들의 행복한 웃음을 이 손에 들린 라이터로 소멸해 버리고 싶었던가. 그렇게 형진의 내면은 예전의 선량한 자신과 화상 후 생긴 비열한 방화범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형진은 서서히 괴물이 되어갔고, 결국 술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잠식 당하도록 내버려 둔 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노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후드를 내리자 일그러진 살덩어리가 유리창에 비쳤다. 그를 보는 괴물과 마주 보며, 형진은 불현듯 깨달았다. 그가 정말로 잃은 것은 집도 가족도 아니었다. 방화범이 앗아간 것은 인간의 자격이었다. -34page
한때 신문사 에이스였던 기자 김정혜는 형진에 대한 정보에서 특종의 냄새를 맡고, 노숙자들을 상대로 그를 수소문한 끝에 형진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형진은 그녀가 기자임을 알고 접근을 거부한다. 이에 질세라 정혜는 형진에게 술 사주고, 밥도 사주면서 끈질기게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방화 사건이 발생하고, 형진은 본능적으로 '놈의 짓'임을 직감한다. 이 사건으로 형진과 정혜는 한 팀이 되어 활약하게 된다. 형진은 놈을 잡기 위해, 정혜는 특종을 낚기 위해. 서로의 목적은 다르지만, 이후 여러 차례 발생하는 화재 현장에서 단서를 발견하게 되고, 놈을 따라 하는 또 다른 모방범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방화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어두운 정치세력과 이에 기생하는 조직폭력단이었던 것.
판이 점점 커진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형진은 방화범으로 몰리고, 정혜는 범인 은닉죄로 지명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낮에는 경찰에 쫓기고, 밤에는 조직폭력단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마는데... 형진과 정혜는 악의로 가득 찬 불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자의 목적을 이루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저들, 어두운 세력들을 단죄할 수 있을까?
윤재성의 <화곡>은 방화로 정신과 육체가 잠식당한 형진과 신문기자 정혜의 활약상과 캐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로에게 드세게 받아치는 대화 속에서 알게 모르게 싹트는 우정 어린 애정을 독자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도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다. 또한 방화, 불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욕망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한번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다 태워버리고 마는 뜨거운 불처럼. 초반부터 속도감 있게, 몰입감을 가지고 읽어나간 소설 <화곡>이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은 있다. 형진의 불사조와도 같은 부활 능력이랄까? 뭐, 이는 소설 속 주인공이니 그렇다 처도 방화범이 너무 강력하게 그려진 반면, 경찰은 다소 무력하게 그려졌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결말부에선 (한국영화 대부분이 좀 그렇듯) 감성을 자극하는 신파적 요소로 마무리했다는 점?! 정도 ㅎㅎ
어째서 손을 멈췄던가. 차후 자문해봤으나 이유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술은 입에도 안 댔건만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손 때문이었나, 소나타 차창에 붙은 가족사진 탓이었나. 그 뒤로 한동안 번화가를 바라보며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소주병이 없는 날에도 라이터는 늘 주머니 속에 있었다. 사표를 챙겨 다니는 직장인처럼, 세상을 향해 장전된 그의 총탄이었다. -75page
"방화범을 잡고 동생의 원수를 갚은 다음에요. 하고 싶은 게 있어요?"
형진은 자기 잔을 내려다봤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놈을 쫓고 놈에게 분노하고, 놈과 맞서 싸우는 일만이 삶의 유일한 이유였으므로, 놈은 추방당한 세상에 그를 머물게 하는 족쇄였다. -167page
몸이 수십 갈래로 찍기는 기분이었다. 한쪽에는 철없이 선량했던 예전의 그가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증오로 활활 타는 방화광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갈등하는 자신이 있었다. 산 몸도 죽은 시체도 아닌 채로, 8년 전의 적과 8년 동안의 적 중 누구를 태워야 할지 고뇌하면서. -242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