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읽은 베르베르의 소설(집)이다. 총 18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평이하게 씌여져 있고 책이 가볍기까지 하므로 침대에 누워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후딱 읽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한계가 없어 보이는 상상력과 꽤 진지하고 거대한 주제들의 무게는 그리 가벼이 볼 수 있지만은 않다. 다만, 그 소재들이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 적쟎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종종 빠져들곤 했던 환상적인 상상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책에 담긴 많은 상상력의 산물들은 굉장히 고전적이기도 하고 진부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최소한 그 소재와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기발하고 산뜻해 보인다. (경미한 스포일러가 있음)

내겐 너무 좋은 세상 - <블레이드 러너> 풍의 반전과 일렉트로닉스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전망이 공존한다. 물건들의 골때리는 수다를 들을 수 있다.

바캉스 - 한 여름의 몇 주를 바캉스로 보내는 프랑스인다운 시간 여행 바캉스 에피소드. 불결하고 야만적인 몇 백년 전의 세계보다 현대의 자본주의가 더 무섭다고 역설한다.

투명 피부 - <플라이>처럼 본인을 대상으로 과학 실험을 하여 끔찍한 괴물로 변하는 과학자의 이야기. 한국 독자에 대한 배려 내지는 아첨을 볼 수 있다.

냄새 - <맨 인 블랙>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하고, 우리보다 훨씬 거대한 지적 존재에 대한 유머러스한 야유.

황혼의 반란 - 노인의 모습을 한 체 게바라가 젊음을 숭상하고 늙음을 경멸하는 세태에 결연히 맞선다. 그러나 수많은 여느 반란 이야기와 마찬가지의 결말을 맞는다.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 <털없는 원숭이>의 외계인 판본.

조종 -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내전을 끝내려면 반란을 일으킨 몸의 일부분을 어떻게 조종할 것인가, 또는 조종당할 것인가를 해설한다.

가능성의 나무 - 저런 나무를 만드려면 전 우주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수의 신비 - 10 이상을 무시하려는 사람들을 통하여 파시즘의 정신 박약을, 그러나 그 무모한 막강함에 밑줄을 긋는다.

완전한 은둔자 - 면벽 수행을 끝까지 밀고 가는 극단적인 예를 보임으로써 선불교적 수행에 대해 짖궂은 조롱을 던진다.

취급 주의: 부서지기 쉬움 - '냄새',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에서 주객만 전도된 버젼.

달착지근한 전체주의 -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조지 오웰의 예언이 근본적으로는 옳았음을 100년 후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 사이의 다른 그림찾기를 통해 신랄하게 보여 준다. 독특한 접근법과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모호하고도 풍부한 주제가 돋보이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

허깨비의 세계 - 기표와 기의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만들다.

사람을 찾습니다 - 심각한 말기 공주병의 증례.

암흑 - 시각의 종말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 주인에 그 사자 - 현대에는 이 에피소드의 사자보다 더 고약한 자본의 발명품이 많다. 물론, 이 에피소드의 전갈보다 더 고약한 것도 많다.

말 없는 친구 - 엔트 이후로 가장 드라마틱한 '행동'을 한 나무의 이야기.

어린 신들의 학교 - <블랙 앤 화이트>라는 게임을 하다가 쓴 단편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문명> 시리즈와도 닮았군.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에서도 영향을 받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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