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시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9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 지음, 김양순 엮음 / 일신서적 / 1990년 3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주인공인 요한 모리츠가 루마니아 판타나 마을의 순박한 농부에서 수용소 생활, 첩차라는 누명, 게르만 영웅족의 후예, 그리고 포로 수용소 생활을 거쳐 석방되지만, 석방된지 18시간 만에 다시 감금되는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인생운명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또한 약소국가의 민족이 겪어야 하는 슬픔과 서러움을 그리고 있다. 하버마스는 그렇게 말했다. 생활세계와 체계가 분리되어,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는 그 고유의 의사소통의 체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궁극적인 위기의 시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이 점에 대해서 공감한다.

서구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성에 대한 신뢰와 그것의 발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한 축이 초월론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의지해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기 위해서 이를 분리한다면 그렇다) 그런 이성의 발전의 역사가 이렇게 현대의 위기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서양의 전 역사는 자기수정과 반성을 해야할 때이다. 게오르규 식으로 말한다면,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25시에 다다른 것이다.

서양은 계몽과 근대를 지나, 얼핏보면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의 시대를 열었지만, 그 내면에는 강자의 논리와 패권주의가 오만하기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게오르규가 경계하는 점은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긴장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저키즘
질 들뢰즈 지음 / 인간사랑 / 1996년 4월
평점 :
절판


매저키즘은 사드의 글이 우리에게 음성적인 경로로 이해되었던 사회구조 때문에 다소 낯설지만, 그 핵심은 아주 친숙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에 묻어있는 흔적, 혹은 습관인 이 새디즘과 매조히즘에 대해서 충분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매저키즘은 이런 의미에서 적절하게 우리가 읽을만한 책이다. 물론 들뢰즈가 워낙 독창적이라서, 그의 머리 속에서 나온 글들은 그 나름의 코드와 개념으로 재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들뢰즈를 알아야지만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접근방법으로 '감각의 논리'를 읽기를 추천한다) 어쩌면 돌연변이거나, 어쩌면 인간의 본성인 새도-매저히즘은 과연 무엇일까?

이 책에서 들뢰즈는 (물론 그가 이것을 그의 이론의 전면에 내세우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엄연히 두툼한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 사실이다) 사드와 마조흐의 원래 텍스트를 적절히 소개하면서 글을 이끌고 있다. 과연 인간의 쾌락은 무엇일까? 인간의 욕망은 무엇일까? 그것은 본성적인 형태의 실재일까? 아니면, 상황에 따라 규정되는 하나의 기표와 같은 것일 뿐일까?

이 문제는 어려운 것이지만, 어쩌면 핵심적인 것일 수도 있다. 형식과 내용이 서로를 밀쳐내는 과정에서 생겨난, 그래서 이형동종인 무엇인 것처럼, 인간의 쾌락은 자신의 슈퍼에고에 의해 억압당한 이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근대화를 통해서 하나의 사회적 개인으로 습속화되기 이전 자연적인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욕망을 알고 싶다면, 읽어보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라톤 잔치 - 성우신서 7
조우현 / 성우출판사 / 1992년 1월
평점 :
절판


플라톤의 '잔치'(symposium; 향연으로 번역되기도 함)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리스, 희랍철학을 전공하지는 않지만, 대학 초년생 때, 이것의 영역본을 가지고 강독을 했던 기억도 있고 하니, 고전임은 분명한 듯하다. 적어도 나 개인의 입장으로서는 대화식으로 되어 있는, 흔히 말하는 변증술 형식의 희랍철학 저작의 형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고생하고 있다. 그들의 논의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잔치 역시 그랬었다. 마치, 나는 결코 그들의 지적 심포지움에 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안에서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위대하며, '선의 이데아'는 현대에 다시 살아나고 있는 보석이다.

'좋음'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은 정의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윤리학이 다시 고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죽지 않았다. 이데아, 쉽게 말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염원하는 세상은 여전히 현재에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꿈꾸는 세상과 인간이 꿈꿨던 세상은 다르고, 인간이 살려는 세상과 인간이 살았던 세상은 다르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의 깊이를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두 가지는 확실하다고 본다. 우리에게 좋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좋음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연 합의, 혹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좋음을 규명할 수 있는 공론장이 없다. 우리는 점점 알지 못하는 궤도이지만, 좋음의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트겐슈타인 -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
존 히튼 / 이두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비트겐슈타인. 그는 천재이다. 그러나 전공자에게는 적어도 그가 천재인지 아닌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현대철학에서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큰 산일 따름이다. 나는 철학을 전공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산을 직접 넘어보지는 못했다. 그의 책과 또 그에 관한 여러 해설서를 읽기는 했지만, 본래의 전공도 벅찼기 때문에 그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막상 깊게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분석철학과 논리 실증주의의 사이에서, 러셀과 프레게 사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는 아직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두 개념은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가족유사성'과 '언어게임'이 그것인데, 후자는 전공영역의 개념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은 모두 언어게임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예컨데,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듯이 현대의 사상조류는 언어적 측면에 아주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반대편에 서서 비언어적 존재론의 측면을 공부하고 있다. 적어도 언어가 기호가 아닌 더 큰 의미로 이해되는 것인 이상, 나는 나의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그런데 '가족유사성'은 참 적절한 개념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인지과학이나 여타의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언급되는데, 개인적으로는 형태발생에서의 상동적인 틀과 맞닿아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인식론에로 진입하고 싶은 것이 차후의 내 과제이다.

이 책은 너무 어렵지도, 너무 비약적이지도 않은 적절한 비트겐슈타인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안에 있는 다음 구절을 옮겨보면서 글을 마치겠다. '내부는 숨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 놀이는 확실성이 배제되어 있는 언어 놀이이다. 내부라고 하는 것은 심리학자들에 의해 상세히 나타내어 질 수 있는 야만적인 실재가 아니라, 내부를 외부와 연결시키는, 그리고 인간의 이해력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한 타래의 복잡한 개념들이다'(151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1
황지우 지음 / 민음사 / 198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황지우. 그는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의 시단에서 1980-90년대를 넘어오는 시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키워드가 아닐까한다. 물론, 그의 시는 때로는 너무 아름답고 간결해서 매력적이지만, 때로는 또 너무나 힘이 많이 들어가 알아듣기가 어렵다. 속칭 난해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가 그랬었지. 시는 질그릇과 같아 깨지기 쉽다고. 그런데, 그의 시는 도대체 깨지지 않는 질그릇인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시를 두번 세번 다시 읽었던 경우도 많았고. 깨어지지 않는 질그릇일 필요는 없는데, 굳이 그의 표현법은 그랬었다. 그러나 표현법은 시인 고유의 영역이다.

나는 그가 말하는 속내가 맘에 든다. 그는 적어도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의 질그릇으로서 시는 그것이 깨지면서 세상을 울리고, 우리의 정신을 울리고, 또한 엉겨붙은 저속함들을 울린다. 깨지면서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그 당찬 목소리로서, 혹은 봄이 오면서 소리없이 녹아버리는 얼어붙은 강가의 얼음장처럼, 그런 소리를 그의 시에서 더 많이 듣고 싶다. 개인적으로 황지우의 근황이 다시 궁금해진다. 아,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