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 종이연 / 1994년 10월
평점 :
절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그의 저서인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립적 인간>, <건전한 사회>에서 프롬이 말한 책들에 표현되어 있는 사상을 상당히 인용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요약은 아니다. 이 책에는 이전에 밝힌 사상을 능가하는 많은 사상이 제시되어 있고 사랑의 기술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됨으로써 새로운 시야를 얻게 한다.

이책은 단지 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을 마련한것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인격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실패하기 마렴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는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다.

위에서 말한 성질들이 희귀한 문화에서는 사랑하는 능력의 획득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은 그 누구든 참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몇 명이나 알고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려움을 알기위해 우리는 사랑에 도달하는 조건들도 알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위해 사랑의 기술을 서술했고 가능한한 비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문헌도 최소화 했다.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크게 4개로 구성되어 있다. Ⅰ사랑은 기술인가? Ⅱ사랑의 이론. Ⅲ현대 서양사회에 있어서의 사랑의 붕괴. Ⅳ사랑의 실천. 제1장 '사랑은 기술인가?'에서 프롬은 이 책을 저술하는 목적과 사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제2장 '사랑의 이론에서 그는 사랑을 인간 실존의 문제로 정의하고 있다. 인간이 존재한는 이유를 사랑을 하는 감정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으로써 사랑의 심층에 자리잡은 대등한 사람간의 사랑인 형재애, 인간의 본성적인 사랑이며 무력한 사람에 대한 사랑인 모성애, 이러한 두가지 사랑과 상반되는 사랑의 양상중 가장 기만적인 성애, 그리고 자기애과 신에 대한 사랑으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제3장 '현재 서양사회에 있어서의 사랑의 붕괴'에서는 20세기에 일어난 자본주의의 발달과 이로 인한 사랑의 변화에 대해 설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하나의 규격화된 상품으로 취급받게 되고 사랑은 상품시장에서 자신을 다른것과 교환할수 있는 서로의 교환가치의 한계를 고려하여 최상의 대상을 찾았다고 생각할때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감상적인 요소로 받아들일수는 없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타산적인 면이 강하다.

제4장 '사랑의 실천'에서 앞에서 다루어 왔던 이론적인 문제를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사랑을 이해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을 실천하기 위해 훈련을 통해 숙달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롬은 현대사회의 문제점으로 보편적으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것을 지적하고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현상으로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인용을 보더라도 <사랑의 기술>은 상당히 매력적인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래로 돌아가다 - 갈무리신서 22
안또니오 네그리 / 갈무리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안또니오 네그리와 펠릭스 가타리. 이 두 이름만으로도 그는 21세기 정치학의 희망이자,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생각할 때 고려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다.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아게는 그러했다. 이 두 사람 옆에 조용히 포진해있는, 질 들뢰즈·마이클 하트를 비롯해 그들이 사숙했던, 스피노자·마르크스·빌헬름 라이히를 기억했을 때, 우리는 그냥 그들의 연설을 지나쳐갈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의 학생운동과 노조운동에 하나의 주축이었던 불셰비끼즘은 지금 퇴색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사회주의의 붕괴를, 맑스의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의 붕괴로 보면서 진정한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요구하고 있다. 뜨로츠키의 정신에 따라 볼셰비키즘을 마냥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여기엔 사회주의 열망을 보존하는 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정치적 보수주의로 전락하는 위험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네그리와 가타리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벗어나 새롭게 마르크스를 재전유하려는 입장에 서 있다. 즉, '또 다른' 노동운동의 방향을 구상해온 것이다. 그것은 특히 스피노자의 potentia 개념을 분석적 도구로 사용해, 이론과 실천의 괴리가 없는 역능의 구성체가 가능함을 토대로 한다.

예컨데, 네그리가 '야만적 별종'에서 수행했던 potentia와 potestas의 적대관계를 이 책은 정치적 차원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적대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건설하려는 것은 아니다. 마치 소비에트 연방의 당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이 다시 인민을 지배하는 지배세력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커뮤니즘은 다중의 것이며, 일자에 대립하는 공동적인 구성체이다. 그들은 반플라톤주의를 토대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틀을 바탕으로 그들은 한국의 정치상황 등을 보여주며, 하나의 다중심주의(multicentrism)를 계획한다.

이들의 정치적 주장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의 운동가들에게 주어진 몫은 그것이다. 그들에게 답변을 해주는 것! 이 나라에서는 어떠한 이념과 이론들이 가능하다는 것! 이런 물음들을 통해 우리나라의 특수한 주체생산양식이 극복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온한 검은 피 세계사 시인선 53
허연 지음 / 세계사 / 199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허연은 그렇게 널리 알려진 시인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는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허연을 좋아한다. 그는 詩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통해 가장 폭넓은 의미에서의 저항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비단, '지옥에서 듣는 빗소리'나 '전쟁기념비'에서의 저항을 말하는 것을 넘어선다. 물론, 그 시들도 수작 이상이다. '죽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그런 영화관엘 가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시인의 낮은 목소리는, 집회를 열어 큰 목소리로 자신의 요구조건을 주장하는 어느 사람들보다, 더 힘있고 설득력이 있다.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그의 알 수 없는 저항, 혹은 저항을 넘어선 목소리는 '悲歌'를 거쳐, 일련의 추모시들로 증폭된다. 익명의 K부터, 권진규·구상·손상기·오윤에 이르기까지, 그는 하나의 슬픈 울림을 만들어낸다. 차라리 낮은 절규, 읊조리는 혼잣말처럼. 이 일련의 詩들 중에서 난 개인적으로 '無伴奏'를 가장 좋아한다. 요절한 작곡가 에릭 사티에 대한 추모시인데, 거기에는 간결하게 절제된 그에 대한 위로가 보인다. 허연은 그렇게 자신의 슬픔을, 꼭꼭 담아눌러 낮게낮게 하지만 또렷하게 발음한다. 당신들이 그들에 대해 그렇게 쉽게 평가할 수 있냐고! 빛을 피해 걸어가며, 음지에서 울음을 삼켰던 예술가들에 대해 그렇게 쉽게 평가할 수 있냐고!

그래서 허연은 그렇게 권진규의 장례식을 그렸고, 손상기는 곱추가 아니라고 웅변한다. 그들은 비록 외로웠지만, 사람들을 사랑했으므로 그리고 가난했으므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들에게 희망을 노래해준 그들에게, 우리는 손가락질을 결코 할 수 없다고. 그런 시인들을 따라 그의 세상도 천국이 아니다. 그는 힘들게 조금씩 세상을 포월해가고 있다. 기어서 넘어서, 저지대에 흐르는 희망이 되려고 한다. 마치 예술가 협회의 보이지 않는 노조위원장처럼, 허연은 쓸쓸하게 사라져간 예술가들을 반추해내며, 자신의 詩들을 조명해낸다. 그런 시인에게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슬픔'을 기억하는 것일 뿐. 그래서 난 그의 시집에 대한 서평을 쓴다. 허연은 언제나 急流처럼 되돌아온다 했기 때문에. 그 한마디로 난 당신의 시를 기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학의 몽상
이진경 / 푸른숲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마디로 난 수학을 못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렇게 규정지어 버린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옆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난 누구보다 수학적인 사고를 좋아하지만, 수학문제를 잘 풀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은 항상 나를 괴롭혔고, 어떤 인지적 조화를 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나에게 하나의 후원자가 되어준 책이 '수학의 몽상'이었다.

이진경씨는, 내가 그의 저작들을 꽤 읽어본 것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결코 수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수학에 대한 새로운 서술방식은 무척 흥미롭다. 예컨데, 표면적은 무한대지만, 부피는 9인 멩거의 스폰지를 보여주는 방식이 그러하다. 그는 독자에게 수학에 대한 호기심을 새롭게 가져보라고 권유하는 방식으로, 수학의 합리성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딜레마가 독자들에게 주어졌을 때, 이 책을 적어도 자신의 의지로 구입한 독자라면 생각해보지 않고는 못 베길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학이 하나의 과정으로서,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패러다임으로서 그 계산가능한 공간이 변형되는 것을 수학사를 통해 명쾌하게 보여주는 방식은 수학과 학생들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수학을 매우 잘하는 수학과 학생도 이러한 미적분의 역사나 이중긍정의 논리(139쪽)에 대해서 쉽게 알지 못했다) 나 역시 기하학에서 대수학으로 발전되는 수학의 방향, 그리고 그 둘이 각각 보편수학과 해석학으로 갈라졌지만, 보편수학은 수학의 담론에 편입되지 못한 상황들을 알면서 지적인 쾌락을 느꼈다. 특히 이중긍정의 논리를 통해 데카르트의 악신의 가설을 풀어보려는 저자의 시도는 특히 흥미로웠다. 철학에 관한한 전문가인 저자의 생각을 볼 수 있는 단면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책이 고등학교 교재로 쓰인다면 어떨까?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는 수학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던 많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학문의 영역을 보여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수학을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대학입시를 위해 배워야 하는 도구로서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의 나의 바램이 실현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많은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읽어 나와 같이 수학에 대한 호기심을 빨리 접어버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 조직하는 우주 - 새로운 진화 패러다임의 과학적 근거와 인간적 함축
에리히 얀치 지음 / 범양사 / 1989년 4월
평점 :
절판


<자기 조직하는 우주>는 서문에서 나타나 있듯이,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반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에 대한 에리히 얀치의 평생의 역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프리고진의 소산구조를 우주 전체에 거시적으로 적용시킨다.

즉, 엔트로피가 어떻게 개체의 자발적 형성의 근원이 되는가를 밝히고(54p), 그에 따라 하나의 자기-준거적 자율성의 형성을 설명하고(63-64p), 개인적으로 내가 밝히고 싶었던 부분인 '내재성'과 'potentia' 개념들에 대한 연관성을 추리하도록 하고 있다(65p). 이런 과정들을 통해 구조와 기능이 어떻게 상호의존하며(71p 및 77P), 상동성과 거시와 미시의 공진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91p 및 116p).

특히, 그는 르네 톰의 카타스트로프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형태발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중반부 이후에는 이러한 공진화에 대한 각론들이 언급되며, 308p에서 대칭성 파괴에 대한 언급을 한다. 특히 리좀 개념들을 언급하면서(321p), 그가 철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얀치는 의식이 자기-준거를 획득하고 구성하는 과정을 언급하고(390p), 신은 미분화적 전체성이자 잠재태라고 명시함으로서(423p) 그의 우주론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